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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코


 



 

씨발 고딩 극혐. 변의주는 옥탑방 평상에 드러누워 눈 벌게져서 생각한다. 졸업한 지 3년 밖에 안됐는데 교복 갖다 버리자마자 심각한 청소년 혐오자 됐다. 맞은편에서 하교하는 고딩이 보이면 반대편으로 길을 건너고, 예능 프로그램에 현직 고딩이 나오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채널을 돌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존나 잘생겼는데 교복을 반듯하게 입고 다니며 말끝마다 요 자를 붙이는 예의 있고 싸가지도 있는 고딩이 싫은 거지만. 왜 하이틴 포비아가 되었냐 묻는다면 변의주에게도 사정은 있었다

 

밖에 나와 이러고 있기에는 좀 쌀쌀한 11월. 찬 기운이라도 좀 들이마시고 정신 차리려고 나왔다. 분명히 춥긴 추운데 얼굴이 빨개지기는커녕 더 하얗게 질린다. 추리닝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징징댄다. 쏟아지는 아이메시지. 카카오톡. 페이스타임. 음성 통화. 꺼칠꺼칠한 얼굴 손바닥으로 벅벅 쓸다가 결국 핸드폰 꺼내 들고 메시지부터 확인했다. [] [내가머잘못항거있어요?] [그게어렵나] [한번만인데요] [전화좀벋아보지

그거 보고 땅 꺼지게 한숨 쉬었다. 너 같으면 수능 전에 한 번 대 달라는 거 흔쾌히 오케이 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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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잘못한 거 오지게 많은 거 인정한다. 성인이 미자 만난 것부터가 병신인 것도 인정한다. 네 달 전 옥탑방 사는 변의주 아래층에 고등학생 한 명이 월세로 이사 왔다. 보증금 천에 오십. 고삼이 혼자 방 얻어서 산다는 것부터 이상했는데 알고 보니 타국에서 혼자 왔댔다. 이 방 저 방 전전하다가 계약 기간 끝나서 여기로 이사 왔다고

그날 바로 김치랑 반찬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엄마한테 얘기했다. 엄마 엄마. 아래층에 고딩 혼자 살더라. 대만인가 거기서 왔대. 변의주가 그 소리 하자마자 마음씨 좋은 어머니는 내려놨던 김치랑 반찬 그대로 소분해서 아래층에 가져갔다. 그때 처음 본 고딩. 이름 니콜라스. 나이 열아홉. 헐렁헐렁한 반팔 티셔츠에 추리닝 바지 하나 입고 머리 까치집 된 채 문 열어주더니 상황 파악하고는 두 손 모아 안영하세요, 인사하는데 어······ 애가 잘생겼네. 그게 첫인상.

반찬 맛있게 먹고, 공부 열심히 하고. 형은 윗집 사니까 뭐 힘든 거 있으면 얘기하고 사이좋게 잘 지내자고 입 발린 소리 줄줄 하고선 이제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다. 애가 그냥 심각한 표정으로 눈만 끔뻑거리고 있어서 그랬다. 요즘 엠지 특. 이런 거 싫어하는 애들 많다니까 앞으로는 퍼스널 스페이스 지켜줘야겠다 생각하며 올라왔는데. 며칠 뒤 걔가 반찬 다 먹었다며 빈 반찬통 야무지게 싹 씻어 옥탑방으로 드나들기 시작했다. 형. 잘 먹었어요. 감사합니다. 교복 입고 눈 접어가며 웃는데 기분이 좀 그랬다. 괜히 양심이 콕콕 찔렸달까

 

 

그때 변의주는 2년 사귀었던 세 살 연상 남자친구랑 헤어진 지 이틀 되었을 때였다. 니콜라스는 착실히 의주의 옆구리를 파고들며 살갑게 굴었다. 만나면 하루 종일 붙어 여기저기 쪼물딱거리는 애 어색하게 뒷머리 살살 쓰다듬어 준 게 몇 번 반복됐을 때 니콜라스가 드디어 말했다

“형 우리 번호 교환해요.”

라고

며칠 버틴 것만 해도 대단하다 싶었다. 번호 주는 거야 어렵지도 않았으나 궁금한 게 있어서 숫자를 입력하기 전 물었다. 너 근데 이런 거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이런 거가 뭐예요? 그러니까 이웃끼리 잘 지내는 이런 거? 나 처음 만났을 때 표정 무서워서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아. 저 그때 일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정신없었어요. 싫었던 게 아니라. 그래 그렇구나. 영혼 없이 고개 끄덕이곤 번호 입력한 핸드폰 돌려주자마자 환하게 웃는 니콜라스가 신기했다. 그리고 그건 형식적인 건 줄 알았다. 그러니까 이웃 간의 어떤 그런 거. 윗집 아랫집 간의 그런 커넥션 같은 거.

그러나 니콜라스는 시도 때도 없이······. [형 굿모닝] [저 등교함] [수업듣기싫어요] [ㅠㅠㅠㅠㅠㅠㅠㅠ] [아직 안일어납나] [심심한데] [사진] [이모티콘] [이모티콘] [사진] [사진] 그 외 60개. 아침마다 종알종알 쌓여 있는 메시지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애가 분명히 학교 수업할 시간에도 그러니까 의문이 들었다. 얘는 핸드폰 그런 거 안 내나? 원래 다 내지 않아? 우리 때는 그랬는데. [형 뭐해요 ㅋㅋ] [수업잼없어요] [저 밥 먹는데] 그리고 지 식판 사진을 찍어 보내고. [우리반 보여줄까요] 괜한 양심의 가책 느끼게 교실에서 제 뒤에 앉은 학우들 다 나오게끔 자기만 존나 잘생기게 나온 셀카 보냈다. 의주는 그럴 때마다 차분히 대답했다. [그래] [그렇구나] [그랬구나] [그랬군] 네 가지 돌려 막기로

 

처음에는 설마. 그 다음에는 에이 아니겠지. 고개까지 저으며 회피했는데 그 뒤로는 확신했다. 느껴졌다.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고딩이 쳐다보는 끈적한 눈빛. 노골적으로 화르르 타오르는 시선. 그걸 모르면 진짜 바보였다. 얘 나 좋아하네. 존나 좋아하네. 근데 변의주가 아무리 아무리 진짜 개막장이어도 고딩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할 수는 없는 거다. 그 정도 선은 있었다. 의주는 있는 철벽 없는 철벽을 다 세웠다. 진짜 고딩은 안 되지. 안 되지 나도

 

 

 

많이 취했어요그러나 모든 역사는 술자리에서 다시 쓰여진다. 그날 좀 많이 마시기는 했다. 의주가 원체 잘 마시기는 하지만 술을 많이 마셔도 잘 빨개지지 않는 탓에 주위 사람들이 주는 술을 더 많이 받아 마신 게 화근이었다. 분명히 동기들이랑 같이 있을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집 앞에 도착할 때쯤 긴장이 풀려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계단을 오르려다 휘청거리며 퍽 엎어지려고 했을 때 누군가 허리를 받쳤다

의주가 눈을 번쩍 떴다. 뒤를 돌아보니 니콜라스다. 딱히 놀랍지도 않지만 뜬금은 없다. 얘가 또 왜 여기 있어.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의주는 그 순간에도 다 깨진 핸드폰을 꺼내 들어 시간을 확인하고는 니콜라스에게 차분히 말했다. 어른이 된 도리로. 너 내일 학교 안 가? 얼른 자야지. 그 말을 듣자마자 니콜라스의 미간이 조여든다. 한숨을 푹 쉬고는 대답한다. 내일 주말이거든요. 얼른 올라가요. 데려다줄게요. 글쿤. 의주는 또 금방 수긍했다. 허리를 안아오는 손이 꽤 뜨거웠으나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뒤부터 필름은 싹둑싹둑 잘려나갔다. 그러니까 어쩌다가 얘랑 평상에서 키스를 하게 된 거냐고. 그 인과관계를 모르겠다는 게 변의주의 입장. 도무지 집안까지 들어갈 수는 없다며 니콜라스가 의주를 철퍼덕 평상에 내려둔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중간이 툭 잘렸다

그냥 정신 차려보니 니콜라스 목에 팔 감고 입술 붙이고 있었다. 그냥 입술만 쪽 붙였다 뗄 줄 알았는데 니콜라스는 꽤 집요했다. 이로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잘근잘근 깨물다가 입술이 벌어지면 자연스럽게 안으로 혀가 들어왔다. 뒤로 멀어지려는 의주의 머리를 받치고 더 깊숙이 파고든다. 그러면서 자세가 좀 틀어졌다. 의주가 중심을 잃고 거의 바닥에 쓰러졌고 니콜라스는 그 위에 올라타다시피 했다. 곧이어 그 취한 상태에서도 현타가 쏟아졌다. 나 지금 고딩이랑······ 뭐 하냐

그다음부터는 아예 정신을 잃었는데 일어나 보니 니콜라스가 잠이 덜 깬 얼굴로 옆에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 물었다. 형 우리 이제 사귀는 거 맞죠? 그쵸. 의주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이 꾹 닫혀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얘가 미자인 게 제일 중요한 점이었고 두 번째는··· 변의주가 한 번도 연하와 사귀어 본 적 없었다.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나이가 저보다 어리다면 눈길도 안 줬다. 의주의 당황한 낯빛을 확인하자마자 니콜라스는 일순 벌떡 일어서더니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분간 저 찾지 마세요. 그리고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진짜 나갔다. 아니 고딩이 갈 데가 어디 있다고 나가. 진짜 가? 정말 갔어? 대답 안 해줬다고 삐졌어? 그걸로? 의주는 황당해져서 입을 살짝 벌린 채 죽은 안광으로 닫힌 현관문을 쳐다봤다

 

 

니콜라스가 나간 뒤 동생이 있는 친구들에게 물어 「고딩이 자주 가는 곳 리스트」를 추렸다. 단순했다. 코노. 무한리필 음식점. 카페. 피씨방. 무인 사진관······. 그런데 남자 혼자 가는 곳은 보통 피씨방이란다. 근데 이 근방에만 피씨방이 몇 갠데. 한숨을 쉬니 이런 거에 빠삭한 동기 하나가 피씨방 중에서도 애들이 많이 가는 곳 몇 개를 추천해 줬다. 의주는 그걸 핸드폰에 받아 적은 뒤 겉옷을 챙겼다. 알려준 곳은 세 개. 처음에 선택한 곳은 집에서 제일 가까운 곳이었다. 10시가 다 되어 입김 호 불면서 무작정 앞에서 기다렸는데.

“······.”

“······.”

“형이 왜 여기 있어요?”

진짜 니콜라스가 거기서 나올지는 몰랐다. 귀신이라도 본 듯 펄쩍 뛰는 목소리에 의주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기가 잔뜩 묻은 목소리로 니콜라스 앞에 다가서며 말했다. 너 기다렸지

“허.”

니콜라스가 고개 뻣뻣하게 들고 황당해 하거나 말거나 의주는 니콜라스에게 한 발자국 더 다가섰다. 계속 웃다가 진지한 표정을 지으니 니콜라스도 약간 긴장한다. 솔직히 그렇게 나온 거 좀 후회도 하고 있던 참이라. 의주가 손을 뻗는다. 니콜라스의 눈이 반사적으로 살포시 감겼다.

“과자 사 먹었어? 뭐 먹었어. 뭘 이렇게 묻히고 먹어.”

“······.”

그리고 니콜라스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박박 털어준다. 무슨 말을 할까 몰라서 침을 꼴깍 삼키던 니콜라스가 속으로 욕을 씹었다. 의주는 아랑곳 않고 엄지로 입가를 싹 정리해 준 뒤 니콜라스의 손을 탁 붙잡았다. 니코 나 춥다. 손잡고 가자. 아 추워요? 그럼 말을 하지. 1초 전까지 얼음장 같던 니콜라스의 얼굴이 다시 사르르 녹았다. 손에 입김을 호호 불어 의주의 손등을 두 손으로 포갠다. 이제 안 춥죠(헤헤). 

의주가 이미 애저녁에 깨달은 고딩 특. 개단순하고 다루기가 쉽다

 

 

그러니까 변의주는 수학 문제집 이고 지고 올라와서 1번 문제 잡고 끙끙대며 저 형이랑 같은 대학 가려고요, 말하는 애가 귀엽게 느껴진 순간 망한 거지. 니콜라스는 등교할 때마다 셀카를 찍어 보냈는데 어느 때는 입술을 쭉 내미는 사진을 보내기도, 어느 때는 벌써 보고 싶어 죽겠다며 엉엉 우는 얼굴을 보내기도 했다. [보거싶다] [형도 사진 보내봐요] 그러면 변의주도 못 이기는 척, 지 셀카는 안 보내도 브이를 하는 손가락 사진이나 강의실에 앉아 비치는 흐릿한 제 모습을 찍어 보냈다. 답장은 개칼답.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귀여워] [ㅠㅠ] 라고 도착하는 식이었다. 그걸 본 의주는 솟아오른 광대와 삐쭉 올라간 입꼬리를 손으로 가리며 히죽거렸다. 

근데 이렇게 뒤통수를 칠지는 몰랐지. 니콜라스는 의주의 마음은 한 개도 모르는 듯, 수능 2주 전 폭탄 발언을 하고 만다. 평상에 앉아 부루스타로 삼겹살을 구워 먹으면서. 비 오는 소리가 꼭 고기 굽는 소리 같지 않냐는 니콜라스의 말을 듣고 금방 정육점에서 부랴부랴 사 온 거였다. 잘 먹고 수능 잘 보라고.

“형. 저 수능 보기 전에 소원이 있는데.”

“뭔데?”

의주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삼겹살을 한 번 뒤집었다. 그래그래. 내가 고삼 소원 한 번 못 들어주겠니, 하는 표정으로. 근데 애가 그걸 보고서도 바로 말을 못 하고 조금 뜸을 들인다. 의주는 좀 대단한 소원인가 싶어서 갑자기 땀이 나는 듯했지만 그래도 다시 물었다. 니코 뭔데. 말해

“그.”

그? 그리고 본능적으로 이런 상황이 변의주 자신에게 안 좋은 상황이 될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아니에요 됐어요.”

알았어. 말하고 싶을 때 꼭 말해. 평소 같았으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랬냐고 어깨를 잡고 짤짤 흔들었을 의주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니콜라스가 말하려는 소원이라는 게 좀 무서웠던 탓이다. 의주는 왠지 다행이면서도 찝찝하다. 도대체 무슨 소원이길래 말을 하려다 말았는가. 그러나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말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금방 까먹어버렸다. 첫 번째는 그렇게 지나갔다.

 

 

그러나 두 번째는 금세 찾아왔다. 애 수학 학원에 데려다주기 전에 포장마차에서 떡볶이 일 인분에 오뎅 하나씩 나누어 먹고 있을 때였다

“형. 그때 저 말하려던 소원이요.”

얼어 죽어도 패딩은 안 입고 교복 마이만 걸친 니콜라스가 의주의 종이컵에 오뎅 국물을 떠주며 입을 뗀다

“아. 어어.”

의주는 그걸 후루룩 마시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속으로는 존나 긴장했으나 또 어른 된 도리로 그런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아서.

“나 수능 보기 전에······.”

“어.”

“한 번만.”

“한 번만?”

한 번만 뭐. 니콜라스의 꽤 덤덤한 표정을 보면서 의주도 표정을 굳혔다

“딱 한 번만 대 주면 안 되나.”

“푸훕!

의주는 먹던 오뎅 국물을 전방에 안개 미스트처럼 분사했다. 입천장이 다 데었다. 삐걱삐걱 고개를 돌리며 니콜라스를 쳐다보는데 니콜라스는 그 미친 발언을 내뱉고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다. 당당하다. 그게 뭐 그렇게 놀랄 일이냐는 투다

“······.”

“······.”

나 뭐 잘못했어? 뭘 대 줘. 니코. 형이 뭘 대 줘······. 의주는 할 말을 잃고. 데인 혀로 더듬더듬 아무 말도 못 하다가 충격에 떨리는 손을 감추려 마지막 가오로 추리닝 바지에 손을 꼽고 겨우 중얼거렸다. 니 마음 다 알아. 니 맘 다 아는데··· 그게 무슨 끔찍한 소리야······. 근데 니콜라스는 그럼에도 표정에 변화가 없다. 그딴 말 들으려고 한 말 아니라서 그랬다

의주는 결국 뭐라 대답도 하지 못하고 니콜라스를 일단 학원에 밀어 넣은 뒤 집에 들어와 생각했다. 아니 자기합리화를 시작했다. 오늘 하루 뭔가 힘들었겠지.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었겠지. 그래서 잠깐 삐뚤어진 걸 거야. 그렇게 웃으며 넘기려고 했다. 그런데 니콜라스는 그다음 날에도, 그 그다음 날에도, 형 나 한 번만. 형 나 한 번만 대 주면. 형 나 한 번만 대 줘요. 형 나 한 번만 대 줘. 볼 때마다 얼굴 들이밀고 중얼거렸다. 아무리 모르는 척하려고 해도 너무 황당해서 그쪽으로 눈알 돌아가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근데 대 달라는 소리 할 거면 웬만하면 교복 좀 벗고 오던지 씨발. 그 교복에 써진 이름이랑 누가 봐도 교복 와이셔츠인 흰 셔츠 볼 때마다 기분이 참······

“안 가냐고.”

의주는 오늘도 옥탑방에 얼굴 들이밀고 찾아온 니콜라스를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학교에서 공부를 해도 되고 도서관에서 공부를 해도 되고 독서실에서 공부를 해도 되고 자기 집에서 공부를 해도 되는 걸 굳이 여기까지 문제집 교과서 이고 지고 오는 이유가 뭔데. 그러니까 그냥 가라고. 원래 같았으면 열심히 하는 거 기특하다고 과일 깎아 벌써 내놨을 변의주가 그러니 니콜라스가 코웃음 친다.

“제가 어딜 가요.”

“공부 안 해?”

“그 말 형이 하니까 되게 웃겨요.”

입을 다물었다. 할 말 없다. 의주는 니콜라스 나이일 때부터 밖에 나와 막 살았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아는 형 집에서 먹고 자고 시다 짓 하면서 되는대로 막 살았다. 그니까 얘가 일침 놓는 게 맞는 말이긴 한데. 그냥 꼴 보기가 싫은 거다. 무서운 거다. 또 대 달라느니, 한 번 만이라느니, 제발이라느니. 눈 촉촉해져서는 그딴 말 할까 봐. 제발 좀. 의주는 간지로 쓰는 안경테를 추켜올린다. 니코 미안한데 좀 가주라. 나 오늘은 좀 혼자 있고 싶어

“근데 형은 저한테 할 말이 그거밖에 없어요?”

“그럼 뭐.”

“한 번 대 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

의주는 이제 어이가 없어서 눈물이 다 났다. 나 진짜 돌아버릴 것 같아. 원래 고딩이 이래

 

 

 

 

수능 일주일 전. 이꼴 니콜라스가 한 번만 대 달라고 쫓아다닌지 일주일째. 의주는 결심했다. 그래 한 번 대 주자. 니코라이팅 오지게 당했다. 사실 진짜로 마음먹은 건 아니었고 일단 말은 하고 나중에 어떻게든 이건 아닌 것 같다 달래 볼 생각이었다. 그래도 애는 애니까 그렇게 설득하면 뭐가 좀 먹히겠지. 말이야 손바닥 뒤집듯 바꾸면 그만이다. 의주는 오늘도 어김없이 옥탑방에 올라온 니콜라스를 보며 쓴웃음을 짓고 겨우 허락하듯 말했다. 딱 한 번이면 되는 거지

의주의 계획은 이랬다. 일단 결심한 척하다가 타이밍이 되면 불쌍한 척을 하자. 그리고 말하는 거다. 니코 우리 수능 끝나고 하자. 나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아. 라고 살살 달래놓은 뒤 니콜라스의 수능이 끝나고 나면, 성인 되고 나서 하자고 좀 더 미루는 거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방식이 가장 베스트 인 것 같았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의주가 어디서 뭘 보고 왔는지 버릇없게 바로 올라타려는 니콜라스를 제지하며 “니코 이건 진짜 아닌 것 같아.” 라는 대사를 치자마자 예상과는 다른 반응이 돌아왔다. 잠깐 마가 뜨더니 니콜라스가 머리를 쓸어넘기며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아 왜.”

의주가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정색했다

“야. 너 반말.”

의주가 째려보자 니콜라스는 금세 눈을 내리깔고 다시 말을 고친다

“아니 왜요······.”

니콜라스는 니콜라스 나름대로 다 계획이 있었다. 어떻게 할지도 다 짜고 왔다고. 일단 니콜라스의 존댓말로 다시 얌전해진 의주 눈치를 보며 살살 입을 맞추자 그에 맞춰서 응해온다. 여기까지는 좋다. 다른 건 몰라도 키스는 잘 받아줬다. 허리를 감싸는 듯하면서 손을 티셔츠 안으로 집어넣었다. 의주의 몸이 움찔한다. 몸에 힘이 빡 들어간 게 느껴졌다. 니콜라스는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옆구리를 만지다가 위쪽을 더듬었다. 그러자마자 의주가 니콜라스의 손을 잡아 빼내고는 세상을 잃은 것 같은 황량한 얼굴로 중얼거린다

“아니 이건 진짜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니콜라스도 쉬이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이게 어떻게 만든 분위긴데. 의주가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끈적하게 의주의 입술만 바라보고 있던 니콜라스는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입술을 부딪히고는 의주가 입고 있던 추리닝 바지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자마자 의주가 낚싯대에 잡힌 물고기처럼 힘차게 퍼덕거렸다

야야야야야야. 니코 야야야ㅑ야야아야야. 잠만 야. 의주는 입술을 간신히 떼고 내려가는 바지를 붙잡아 봤지만 급식 먹고 자란 대한, 아니 대만의 고딩은 힘이 쎄다. 쎄도 존나 쎄다. 실랑이할 것도 없이 바지가 허벅지까지 내려가 버린다. 이게 야망가 같았으면 그냥 니콜라스가 변의주를 자빠트리는 해피엔딩으로 갔겠지만··· 의주도 여기서 고딩한테 뒤를 따일 생각만큼은 추호도 없었다. 이걸 막느냐 VS 벌리느냐의 싸움. 마른 팔 휘적거리며 어떻게든 니콜라스를 떼어내려고 애를 썼다. 얼굴 시뻘게져서 목덜미에도 힘줄 올라오는데 갑자기 이 상황이 웃겼다. 웃겼는데 웃음이 안 나왔다. 니콜라스가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형만 좋으려고 해요?”

그거 들은 변의주는 개억울했다. 니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뭘 나만 좋으려고 해··· 제대로 좋은 적이 어디 있는데······. 의주의 허탈한 표정을 본 니콜라스는 잠잠한 의주의 아래 상황을 확인한 뒤 축 주저앉았다

“아니 한다면서요. 해준다면서요.”

“······수능 끝나면 진짜로 하자.”

“됐어요.”

“진짜로.”

“됐으니까 저 당분간 찾지 마세요.”

니콜라스가 벌떡 일어나서 냉랭한 표정으로 짐을 싸 들고나간다. 의주는 니콜라스의 뒷모습을 보며 주섬주섬 무릎까지 내려간 추리닝을 제대로 입었다. 큰일 났다는 생각은 안 든다. 고딩 갈 데가 거기서 거기다. 쫌만 놀게 한 다음에 찾으러 가야지. 의주는 간만에 힘을 빼 헐떡이는 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그리고 의주의 추측대로 니콜라스는 정말 또 갈 곳이 없었다. 우울한 얼굴로 번화가를 휘적거리다가 결국 피씨방에 들어왔다. 아이디도 없어서 천 원 더 내고 비회원 결제. 불닭볶음면에 핫바 하나 시켜 놓고 유튜브나 깔짝거렸다. 여기저기서 총소리와 욕설이 들렸다. 니콜라스는 유튜브를 보며 슬픈 얼굴로 불닭볶음면을 후루룩 후루룩 흡입했다. 그리고 두 시간 있었나. 나가란다. 미자는 갈 시간이란다. 니콜라스는 또 우울한 얼굴로 미적미적 일어나 계단을 내려갔다

“······.”

“게임했어?”

근데 변의주가 또 피씨방 건물 앞에서 쪼그려 앉아 기다리고 있는 거 알았으면 여기 안 왔을 텐데. 열 시 딱 맞춰서 나와 있는 것도 짜증 난다 그냥. 모르는 척 대답도 안 했더니 옆에 다가와서 물끄러미, 얼굴을 정말 빤히 쳐다본다. 니콜라스가 그제서야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 왜요

“불닭 맛있었겠다.”

웃지도 않고 그렇게 말하더니 엄지로 입술 슥슥 닦아주는데. 개열받네 진짜······.

니콜라스가 휙 지나친다. 의주가 그 옆을 쫄쫄 따라왔다. 니코 수능 조금 있으면 보잖아. 금방이잖아. 그거 쫌 참는 게 그렇게 어려워? 아니 진짜 너 며칠 있으면 수능이고 조금 더 있으면 성인이라니까? 그거 지나면

변의주 말하면서 지도 웃긴지 웃는데 왜 그게 또 열받지. 근데 왜 또 꼴리지. 니콜라스는 멈춰 서서 깜깜한 하늘 보며 심호흡했다. 아 몰라요. 그냥 집 가요. 의주가 그 소리에 딱 달라붙는다

너 근데 왜 맨날 여기 피씨방만 와? 그거 그냥 나한테 와 달라고 하는 거 아니야? 아닌데요. 진짜 아니야? ······. 대답 못 하네. 쫌 붙지 좀 마요. 아직도 짜증 났어?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아니 꼴린다고······.

 

 

 

 

니콜라스는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변의주를 보고 처음 알았다. 하고 다니는 뽄새나 그런 게 딱 봐도 대학생인 것 같긴 했는데 그게 뭐가 중요해. 멀리서 관찰하는 동안 느낀 점은 생각보다 변의주가··· 좀 까졌다는 거다. 학교 끝나고 집에 가는 길 집 앞 담벼락에서 남자와 웃으며 얘기를 하는 걸 봤다. 그게 그냥 친구나 선배 같아 보이지는 않고, 누가 봐도 애인이었다. 니콜라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근데 더 짜증 나는 건 변의주보다 나이가 더 많아 보여. 연상이 취향이야? 여태 나이가 깡패라고 생각해 왔고 들이댈 게 그 풋풋한 생기밖에 없었던 니콜라스로서는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근데 며칠 뒤에 가져다준 반찬통 씻어 올라가니 눈 두 쪽이 마카롱이 되어서 문을 열어주더라고. 니콜라스는 아무리 봐도 얘가 애인이랑 헤어진 것 같았고. 기분이 어쩐지 엿 같았고. 그러나 착실히 형이라고 부르며 옆 파고들었다. 이때가 기회라고 판단했다

좀 친해지고 있다고 생각할 때쯤 친구들에게 고민을 털어놓자 대부분 다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스탠드에 앉아 빠삐코 쪽쪽 빨며 세상 다 산 것 같은 목소리로 니콜라스에게 충고했다. 야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봐. 대학생이 미자를 연애 상대로 볼 거라고 생각하냐? 그러면서도 남자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거에 대한 거에는 편견이 없다. 니콜라스는 그걸 들으면서도 별 생각없다. 그게 왜 안 돼. 하면 되지 걍. 몇 살이나 차이 난다고. 니콜라스는 친구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반쯤 먹은 빠삐코를 앙 물고 각도를 이리저리 틀어 셀카를 찍어본다. 그리고 제일 잘 나온 걸 골라 [변의주] 라고 저장되어 있는 연락처를 콕 눌러 메시지를 전송했다. [형 뭐해여 ㅋㅋ] [사진] [오늘 날씨좋던대

그리고 답장은 몇 분 뒤 도착한다. 니콜라스가 배시시 웃었다. 미자라고 안 넘어가는 법 있냐고. 남은 아이스크림 털어먹던 니콜라스는 대강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한다. 내가 몇 달 뒤에 변의주랑 존나 잘 사귀는 모습 보여줄게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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