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마이 프론트맨
틸디
듣기 쉬운 음악을 하자.
22년 만에 해보는 제대로 된 자아 성찰이었다. 관객이라곤 열 명이 전부였던 어젯밤의 공연을 복기해보니 노선 변경이 불가피할 것 같았다. 그동안 나랑 좀 안 맞긴 했지. 잘 생각해보면 아무도 안 들어줄 음악이었어. 그래. 인정하니까 쉽다. 무언가 떠오를 때마다 적어둔 가사들이 아직도 한가득한데 죄다 폐기 처분하려니 마음이 허했다. 왜 우리 음악을 몰라주는 걸까.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베이스까지 배웠는데 이젠 그마저도 지쳐서 니콜라스는 신촌으로 내달리는 2호선에서 꾸벅꾸벅 졸며 게으른 반성에 빠졌다.
어젯밤 밴드의 존폐를 두고 열띤 토론을 가장한 술판을 벌이느라 뜬눈으로 지새운 뒤 1교시를 위해 튀어나온 탓에 하품만 해도 알코올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합주는 일주일에 최대 세 번, 공연은 많아 봐야 한 달에 두 번. 마음 같아선 우리 이 상태로는 주저앉으면 안 된다고, 다시 일으켜 세워보자고 파이팅 넘치게 외치고 싶은데. 이건 음악에 죽고 음악에 사는 밴드맨에게 치욕스러운 비극이었다.
이대로 망할 것인가. 그것 또한 숙명이면 받아들여야겠지만 불행하게도 니콜라스는 아직 포기할 마음이 없었다. 물론, 앞으로 열심히 할 생각도 없어 보이는 게 문제지만.
다들 출근하느라 바쁜 2호선 안에서 제 몸뚱이만 한 기타 케이스는 짐 덩어리나 마찬가지였다. 좌우로 압박해오는 인파 속에 혹여나 기타가 망가지기라도 할까 봐 제 목숨보다 소중하게 케이스를 끌어안았다.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어서 두 눈을 감고 있어도 넘어질 염려가 없었다. 어쩌면 제 자취방 매트리스보다 안락했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너바나의 리튬과 달리는 지하철 소음과 섞여들어 제법 감미로웠다. 적막만 가득한 인파 속에서 홀로 노래를 흥얼거리다 을지로에 다다르자 인파가 밖으로 쏟아졌다. 두 눈을 감은 채 유유자적 행동하던 니콜라스가 앞사람의 백팩 끈과 듣고 있던 줄 이어폰이 엉키며 양 귀에 울려 퍼지던 너바나의 노래는 끊기고 강제 음소거 상태를 맞이했다. 어어, 잠시만요. 출입문 바로 앞에 서 있던 니콜라스는 저도 모르게 몸이 휩쓸려 나갔다. 그러다 마지막 순간에 문이 닫히고 제 앞 사람이 꽝 하고 넘어지자 그 위로 니콜라스의 몸도 함께 쏟아졌다.
"...죄송합니다."
넘어진 건 니콜라스인데 사과는 덮침 당한 쪽에서 흘러나왔다. 이게 무슨 일이지. 모든 게 순식간이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 바닥에 흩뿌려진 종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딱 봐도 넘어진 사람이 흘린 서류라는 각이 섰다.
"같이 주워드릴게요."
"아, 괜찮은데......"
영어로 잔뜩 쓰인 종이들을 앞뒤 구분 없이 줍는데 남자의 손은 빠른 듯 느릿했다. 반듯하게 펴진 수트 차림새는 이 근처 직장인임을 간접적으로 알려줬다. 분주해 보이고 정신없는 와중에도 니콜라스는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정말 빤히. 동글동글한 인상인데 젖살이 없어서 제법 날카로운 얼굴선이었다. 섬세한 동그라미. 이런 표현이 맞을까 싶은데 분명한 묘사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저 작은 얼굴에 이목구비가 다 들어가 있는 게 신기할 정도였는데 온통 땀으로 범벅이었다. 맞다. 곧 있으면 7월이지. 니콜라스는 남자의 축축한 얼굴과 그에게서 풍겨오는 달큰한 무화과 향으로 날짜를 헤아렸다. 사방이 꽉 막힌 먼지만 가득한 지하인데도 남자에게선 여름 향기가 났다.
"여기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엉망으로 정리된 서류를 쥔 남자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출구 쪽으로 뛰어올라갔다. 출근이 많이 급한가 보네. 대학생인 니콜라스는 직장인에게 지각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질 못했다. 엉킨 채 바닥에 흘린 줄 이어폰을 줍던 니콜라스는 여전히 엉망인 바닥을 멍하게 응시했다. 이게 다 뭐야. 떨어진 명함 케이스와 반무테 안경을 줍곤 후후 불어 먼지를 뗐다. 안경은 제 주머니에 꽂고 명함 케이스를 열자 족히 서른 장은 되는 직사각형의 종이를 무심하게 들어 올렸다.
WR광고 경영지원 재무팀 변의주
남자의 이름이 변의주였구나. 이름도 정말이지 동그랗다. 니콜라스는 한국에 산 지 오래되진 않았지만 그 이름이 흔하지 않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실제로 변이라는 성을 처음 봤으니까. 지금 쫓아가면 이걸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치자마자 저 역시 일교시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마침 내선순환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명함을 꽉 쥐고 남자의 안경을 제 기타 케이스 앞주머니에 고이 넣어두었다. 의도치 않은 사고로 쉽게 깨지 않을 것 같던 술이 깬 기분이었다.
반무테안경과 명함 서른 장이 이렇게나 무거워도 되는 걸까.
니콜라스는 아침에 주운 분실물이 신경 쓰여서 좀처럼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온통 숫자뿐인 원가회계 수업을 들으면서도 스크린에 남자의 얼굴이 둥둥 떠다녔다. 밥을 먹으면서도 어떻게 이걸 돌려줄지만 궁리했다. 다시 지하철 역사로 돌아가 분실물로 맡길까. 니콜라스는 어쩐지 그 방법은 썩 끌리지 않았다. 남자가 역에서 분실한 지 모를 수도 있잖아. 사실 그건 핑계란 걸 안다. 그저 니콜라스는 제 방식대로 해결하고 싶었다.
결국, 명함에 적힌 열한 자리의 숫자로 문자를 보내기를 결심했다. 어차피 이럴 생각이었지만 한참 고심해서 내린 결론이었다. 메시지를 열고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돌려주는 쪽은 자신이라 긴장할 이유가 없는데 말을 겨우 고르고 골라 보냈다.
[안녕하세요. 아침에종이같이주운사람인데요. 안경이랑명함제가들고있어요.]
너무 딱딱한가 싶지만 니콜라스는 제 한국어 실력에 한계를 느꼈다. 이것보다 더 상냥한 말이 떠오르지 않으니까. 언제 즈음 답이 올까 기다렸지만 한참이 지나도 오질 않았다. 마지막 수업이 끝나기 10분 전에 드디어 답이 도착했다.
[네. 안녕하세요. 우선 문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경과 명함은 폐기처분 하셔도 됩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답이 돌아왔다. 누가 이렇게 소지품을 막 다루지. 멀쩡한 안경과 명함 케이스도 분명히 잃어버리기 전까지 쓰임이 있었을 거고 쓰레기통이 제집일 리가 없다. 니콜라스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걸 꼭 전해줘야만 직성에 풀릴 것 같았다.
[제가회사근처로갈게요. 만나요.]
곧 바로 읽음 표시가 떴다. 이 대화창을 나가지 않은 건지 입력 중일 때 뜨는 모션이 한참 지속됐다.
[정말 괜찮아요.]
[제가안괜찮아요.]
주인은 괜찮다는데 굳이 주운 사람이 만나자고 하는 이런 경우는 뭐지. 잃어버린 건 주인에게 돌아가야 맞잖아. 의주라는 남자가 독특한 건데 왜 자신이 쩔쩔매고 있는지 모르겠다. 니콜라스는 그런데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여섯시까지 회사 앞으로 와주실 수 있어요?]
남자의 부탁을 듣자마자 니콜라스는 겨우 안도했다. 그리곤 저만 들릴 정도로 한참 노래를 흥얼거렸다. 이즈음에서 마치도록 하죠. 교수의 반가운 말소리에 니콜라스는 백팩 안에 물건들을 모조리 쏟아 넣었다. 여섯 시가 되려면 멀었지만 곧바로 지하철을 탈 생각이었다. 자신은 어렴풋이 남자의 얼굴을 알지만 남자는 자신을 알까. 몰라도 상관없었다. 내가 아는 체하면 되지. 모른다면 놀라게 해 주고 싶었다. 그 동그란 이목구비로 다른 표정을 짓는 게 궁금했다. 그게 왜 궁금한지는 자신도 모르겠지만.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고개를 한참 올려다봤다. 뻥 뚫린 하늘을 향해 높이 솟은 건물이 남자가 일하는 곳이었다. 제대로 찾아온 게 맞겠지. 다들 복사 붙여넣기를 해둔 것처럼 똑같은 정장을 입고 다니는데 저 혼자만 홍대를 어슬렁거리는 모양새라 튀어 보였다. 하릴없이 회사 앞 화단에 앉아 남자의 안경을 꺼내 봤다. 저를 알아볼 수 있을까 싶어 반 충동적으로 제 콧대에 올려 썼다. 빙글빙글 시야가 돌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거 폼인가. 그래서 나한테 버리라고 한 건가. 그런 영양가라곤 없는 생각을 하며 육중한 회전문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퇴근시간이 도래하자 직장인들이 하나둘 쏟아졌다. 그 인파 속을 들여다보기 위해 없던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혹시라도 남자를 놓칠까 싶어 유심히 바라봤다. 못 알아보고 지나칠까 봐 걱정했던 건 기우였다. 고만고만한 사람들 사이로 우뚝 솟은 남자는 곧바로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눈에 띄었다. 저도 모르게 반가워서 손을 들어 올렸다. 여전히 허락도 없이 안경을 낀 채였다.
"죄송합니다. 최대한 빨리 나온다고 나온 건데."
겨우 3분 지각한 걸로 남자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오히려 남의 안경을 함부로 쓴 니콜라스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안경을 벗으면서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저도 금방 왔어요. 미안해하지 마세요."
"정말 안 돌려주셔도 되는데......"
"근데 이 안경 도수 없어요? 안 어지러워요."
머쓱하지 않게 일부러 말을 돌렸다. 모니터 볼 때만 쓰는 안경이에요. 남자의 말에 그제야 납득이 갔다. 비싸 보이는데 버리긴 아무래도 아까웠다. 한 손에 재킷을 들고 셔츠 포켓에 타이 끝을 넣어둔 남자가 뒤늦게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아침과 다르게 땀이 흐른 자국도 없이 뽀송뽀송해 보였다. 부는 바람을 타고 제 코에 스치는 옅은 무화과 향기는 여전했다. 니콜라스는 안경과 명함 케이스를 주인 앞에 내밀었다. 두 손으로 받아서 든 남자가 또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이 정도로 예의범절이 바른 사람은 또 처음이었다.
"감사합니다. 사례할게요."
"그럼 배고픈데 저녁 사주시면 안 돼요?"
굳이 필요 없다는 걸 내가 주겠다고 억지를 부렸는데 사례까지 하겠다는 남자의 친절을 두고 보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렇게 헤어지긴 어딘가 아쉬워서 거절하기 어려운 부탁을 제안했다. 남자는 손목에 두른 시계를 한 번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혹시 규동 좋아하세요?"
"규동이요? 못 먹어요."
"아, 그럼 다른 걸......"
"없어서 못 먹는다는 말인데."
웃으라고 한 소리였는데 잠시 로딩에 걸린 것처럼 남자의 행동이 멈췄다. 그리곤 수초가 지나서야 뭔가를 깨달은 것처럼 웃어 보였다. 얼마 전 동기들이 알려준 말장난이었다. 저런 걸 누가 쓰나 했는데 자신이 쓰고 있었다. 동그란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지으니 부드러웠던 인상이 두 배는 순해졌다. 웃고 다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늘 무표정인 게 아쉬울 만큼 근사했다.
남자의 발걸음에 이끌려 들어간 곳은 건물 숲 사이에 자리한 일식 덮밥 전문점이었다. 근처 직장인들도 많이 들리는 건지 퇴근길에도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제가 근처 맛집을 잘 몰라서요. 어떤 질문도 건네지 않았는데 남자는 자리에 앉아 머쓱하게 핑계를 댔다.
"뭐 드시겠어요?"
"저 메뉴 좀 볼게요."
"네. 원하시는 걸로 시키세요."
"여기 뭐가 맛있어요?"
"저는 올 때마다 규동만 먹어서, 다른 건 잘......"
잘 정돈된 뒷머리를 어색하게 쓰다듬던 남자에게 별 수확 없는 추천을 받았다. 그럼 저도 규동 먹죠 뭐. 결국 특별할 것 없는 메뉴를 시킨 뒤 마주 보고 앉아 있으려니 어색한 기류가 가시질 않았다. 솔직히 어려 보이는 얼굴이긴 하지만 저보다 나이가 많은 건 확실해 보였고 막 퇴근해서인지 직장인 특유의 혼이 나간 표정으로 물만 홀짝거렸다. 무어라 말을 걸어야 하나 고민하던 와중에 오히려 질문을 받은 건 니콜라스였다.
"대학생이에요?"
"네. 2학년이요."
"아직 아기네요......"
"네?"
"그쪽 어리다고요."
당연히 자신이 어리다는 것도 알고 조롱이 섞인 어투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남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아기라는 말은 좀처럼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이래 봬도 군필인데. 한국에선 군대 갔다 오면 다 어른 남자로 쳐주던데. 건장한 대만건아인 니콜라스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이건 남자에게 귀여움을 받을 기회라 생각하면서.
"그럼 형이라도 불러도 돼요?"
"네?"
"형이요. 의주 형."
아기라고 불린 뒤의 제 모습과 똑같이 남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 왜? 나보고 아기라고 할 땐 언제고 연장자 대접해준다니까 반색을 표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느새 명함 속 이름까지 외워서 의주 형이라고 부르니 당혹감이 얼굴 전체에 서렸다.
"저를 형이라고 부를 일이 또 있을까요?"
"그럼 이대로 끝?"
"더 봐야 할 이유라도......"
"와. 차갑다. 우리 이렇게 밥도 같이 먹잖아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쳐다보며 의문을 띄웠다. 어쩐지 선을 긋는 듯한 행동에 니콜라스가 눈썹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자 남자는 마지못해 이 상황을 수긍했다.
"알았어요. 편한 대로 부르세요."
"그럼 형도 말 편하게 해요."
"전 이게 편해요."
마침 시킨 규동이 나왔고 내내 차분하기만 한 의주에게 밥은 뒷전으로 둔 채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다. 나이는 몇 살인지, 아침에 지각을 하진 않았는지부터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까지. 다소 뜬금없는 질문에도 의주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나이는 올해 서른넷. 평소에 지하철을 탈 일이 없는데 오늘은 타이어 펑크 이슈로 시간 계산을 제대로 못 했다고. 이직한 지 일 년 조금 넘어서 이 회사에서 일을 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저한테 궁금한 거 없어요?"
"혹시... 외국인이에요?"
의주의 말에 헛웃음이 터지고 사레가 들렸다. 기침하는 니콜라스에게 냅킨을 건네고 물을 따라주는 게 퍽 다정했다. 그 손길을 받아내면서 니콜라스는 광대를 올리며 방긋 웃었다.
"너무 당연한 걸 물어봐서. 네. 저 대만 사람. 유학 왔어요."
"혹시나 실례일까 봐요. 한국말 잘해서 놀랐어요."
"나 한국말 못하는데? 근데 잘한다고 하니까 기분 좋아요."
"기분 안 나빴다면 다행이고요."
의주는 한 숟갈 뜰 때마다 질문을 받는 입장이라 평소였다면 다 먹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여전히 절반 밖에 먹질 못했다. 그러다 이젠 자기 신상을 줄줄 읊어대는 띠동갑의 남자애를 감당하느라 혼이 저절로 빠져버렸다.
"오늘 저녁에 뭐 해요?"
"그건 왜 물어요?"
"그냥. 궁금해서요."
도대체 첫 만남에 밥까지 얻어먹은 주제에 뭐가 이렇게 궁금한 게 많냐는 말은 꺼내질 못하고 의주는 우물우물 밥알을 씹기만 했다. 사실 안경도 다시 사면 될 일이고 명함도 회사에 신청하면 그만인데 굳이 찾아오겠다는 걸 말리지 못해서 남은 업무들을 죄다 버려둔 채로 모르는 이와 저녁을 먹고 있는 이 상황이 예상에 없던 일이었다. 너랑 내가 뭘 더 해야 하니. 그런 말이 나갈 뻔했지만 억지로 참았다.
"우리 집 갈래요?"
값을 치르고 밖으로 나왔는데 역으로 향하는 건지 회사로 향하는 건지 불분명한 발걸음 속에서 대만에서 왔다는 이름 모를 연하의 발언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집에 들인다는 거야. 요즘 애들은 다 이렇게 겁이 없나? 오지말라는 거 굳이 찾아와서는 배가 고프다며 밥을 사달라더니 이젠 집까지 가자는 말에 의주는 이게 즉흥적인 건지 계산적인 건지 가늠이 안 됐다.
"고양이도 있어요. 그것도 두 마리."
마치 사진을 찍는 사람처럼 브이를 내보였다. 그게 천진난만해서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났다. 우리 연습실 앞에 버림받은 아기고양이들 제가 키우는 중이거든요. 형제인데 귀여워요. 그러더니 갑자기 제 배경 화면을 냅다 보여줬다. 고양이 두 마리를 들고 찍은 사진이었는데 솔직히 귀여웠다. 고양이를 들고 있는 밝은 표정의 스물 두 살 된 아기도.
"맥주도 있는데... 형 술 안 좋아해요?"
나름 치트키인 고양이도 보여줬는데 넘어올 생각을 안 하자 온갖 미끼를 다 던지기 시작했다. 의주는 다시 제 손목에 맨 시계를 쳐다봤다. 사실 돌아가서 남은 업무를 처리할까 고민했는데 제가 가는 대로 졸졸 따라다니는 이 아기를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 어차피 전원도 다 내려갔을 텐데. 월요일부터 자진해서 야근을 하고 싶진 않았다.
"여기서 멀어요?"
"2호선 타고 역에 내린 다음에 10분만 걸어가면 돼요."
아주 잠시 고민했다. 정말 가도 될지 아니면 여기서 거절하는 게 맞을지. 그런데 무료하다 못해 쳇바퀴 돌아가는 의주의 일상은 튀는 구석이 조금도 없었다. 가끔 여행도 다니고 취미 생활도 했던 미국 생활은 잊은 채 한국에 들어와선 정말 일만 하며 지냈으니까. 당황스럽긴 해도 의주는 제 일과에 갑자기 끼어든 띠동갑이 조금 반가웠을지도 모른다.
"앞장 서요."
그 말 한마디로 니콜라스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느새 어깨에 손을 걸친 채였다. 처음 만난 사이치고 너무 가깝지 않나 했는데 띠동갑의 애교겠거니 하고 쿨한 마음으로 봐주기로 했다. 얼른 가요. 고양이 밥 줘야 돼요. 간식은 형이 줄래요? 제 손을 이끌며 티가 나게 신나 보이는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고양이처럼 생겼는데 하는 짓은 완전 강아지 같았다. 구김살 하나 없이 밝기만 해서 보는 것만으로 신기했다. 매일 개저씨들 사이에서 살벌한 업무 이야기만 하다가 이렇게 어리고 밝은 사람을 만나본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질 않아서 조금 낯설기까지 했다. 이런 걸 사랑스럽다고 표현하나. 낯간지럽지만 이 표현을 대신할 더 적절한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의주는 경계심을 살짝 풀어보기로 했다. 이런 애가 나쁜 사람일 리 없잖아. 차라리 삶에 찌든 자신이 여러모로 더 지독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리하여 매사 의심 100퍼센트로 이루어진 변의주가 모르는 사람 집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이다.
어쩌면 역사적인 순간일지도 몰랐다. 돌다리를 백번 즈음 두드려보고 건너는 변의주가 처음 만난 사람의 집에 이끌려 가게 된 건 사고에 가까웠다. 역에서 10분이면 된다더니 예고했던 것보다 한참을 더 걸어야 했다. 불편한 구두를 신고 오르막길을 걸으려니 그것 또한 죽을 맛이었다. 언제까지 올라가야 해요? 그 말을 했을 땐 공기 반 소리 반이 절로 섞여 나왔다. 진짜 다 왔어요! 1분만! 그러더니 니콜라스는 혼자 뛰어가서 두꺼운 철제문을 열었다.
1층도, 2층도 아닌 3층 옥탑방까지 좁은 계단을 걸어 올랐다. 낡은 평상과 그 위를 가로지르는 빨랫줄. 듬성듬성 심어진 화분엔 이름 모를 식물들이 한가득 놓여있었다. 이건 집주인이 키워요. 내 거 아니에요. 옥탑방 문을 열쇠로 열자 야옹 소리를 내며 고양이 두 마리가 나오더니 니콜라스의 발밑에 얼굴을 비볐다. 한 마리는 하얀색이었고 한 마리는 검은색이었다.
"얘는 별이, 얘는 달이에요."
이렇게 가까이서 고양이를 본 경험이 없는데 극명하게 대비되는 색 때문에 이름을 잘 지었다고 생각했다. 어색하게 집 안으로 발을 들이자 낯선 의주에게 다가온 두 마리의 고양이가 수색을 하는 것처럼 이리저리 향기를 맡았다. 어쩔 줄을 모른 채 가만히 있자 들어와도 된다고 행동을 부추겼다.
"아무 데나 앉아도 돼요."
솔직히 곧이라도 천장에 머리가 닿을 만큼 낮고 좁은 집이었지만 제법 잘 꾸며놓고 사는 모양새였다. 방 한쪽엔 침대와 옷장이 있었고 그 옆 테이블엔 어울리지 않게 고가의 턴테이블이 자리하고 있었다. 음악을 좋아하는구나. 조금만 둘러봐도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앰프 옆 일렉 기타와 자랑스럽게 붙여진 너바나의 네버마인드 엘피까지. 한 쪽에 진열된 엘피들은 딱 봐도 고전 록 밴드의 앨범들이었다. 그 중엔 의주도 어렵지 않게 흥얼거릴 수 있는 타이틀곡도 제법 있었다.
"기타 칠 줄 알아요?"
"말 안 했어요? 저 밴드해요."
"밴드요? 보컬?"
"보컬도 하고 기타도 쳐요."
"프론트맨이구나."
"맞아요. 형도 음악 좋아해요?"
밴드에 대해 모르지 않는 의주의 말에 니콜라스의 관심이 쏟아졌다. 음악 이야기를 하게 될 줄 몰랐는데 어쩐지 같은 관심사가 있다는 점이 반가웠다. 침대 앞 좌식 테이블에 의주가 앉자 니콜라스가 냉장고에서 맥주 두 캔과 새우깡 한봉지를 가져왔다.
"락 듣는 거 좋아해요."
"락이요? 안 좋아할 것 같이 생겼는데. 의외다."
혹시 좋아하는 밴드 있어요? 노래는요? 어떤 앨범 좋아해요? 질문 폭격을 이어가며 의주에게 맥주를 건넸다. 짠. 캔끼리 부딪히고 별이와 달이가 둘 사이에 앉았다. 맥주를 든 채로 부동자세가 된 의주를 본 니콜라스가 그 행동이 웃긴다는 듯이 한참을 웃었다. 얘네 사람 엄청 좋아해요. 완전 강아지. 그러면서 한 마리를 쑥 들어다가 의주의 다리 위에 앉혔다. 낯선 이의 무릎 위에서도 골골송을 멈추지 않았다. 의주는 용기를 내서 목덜미와 등허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털의 감촉이 손끝에 감겼다.
"그린데이 좋아해요. 아메리칸 이디엇 앨범 전곡 다."
"와. 진짜요? 음악 들을 줄 아네요. 형."
"제일 유명한 앨범이니까... 그린데이 안 좋아하는 남자도 있나."
"노엘 갤러거?"
그 말에 둘 다 동시에 터지듯이 웃었다. 음악 이야기가 나오자 니콜라스의 눈이 차원이 다르게 반짝거렸다. 사이 좋게 고양이를 한 마리씩 끌어안은 채 무릎이 부딪힐 만큼 가까이 앉았다. 마치 이런 대화가 목말랐던 사람처럼 보여서 의주는 순순히 맞춰주기로 했다. 어린 아이를 다루는 게 완전한 어른을 상대하는 것보다 확실히 쉬웠다. 좋고 싫은 게 분명하다 못해 얼굴에 비칠 만큼 투명했다.
"언제부터 밴드했어요?"
"한국 오면서부터요. 그때 락밴드인지도 모르고 통기타 들고 오디션 봤어요."
"그래도 붙었잖아요. 그러니까 음악 하는 거 아니에요?"
"맞아요. 노래 한 소절 부르니까 바로 합격이라던데요."
그 때 도망갔어야 했는데. 완전 속았어요. 그러면서 세상 털털하게 웃었다. 지금의 모습으론 잘 상상이 안 됐다. 은색의 탈색모는 태어날 때부터 저 색일 것 같았고 온몸에 문신을 도배할 것 같이 생겨선 통기타를 연주했다는 사실이 의외의 연속이었다.
"기타 쳐줄 수 있어요?"
"당연하죠. 어떤 거 연주해줄까요?"
그 말을 하면서 이미 몸은 기타를 가지러 간 상태였다. 이성보다 본능이 앞서는 열정 타입들은 어쩐지 감당하긴 쉽지 않았다. 고이 모셔진 기타는 그저 장식용이 아니었던 건지 조율을 하지 않아도 소리가 경쾌했다. 손가락을 푸는 것 같더니 마치 준비된 사람처럼 익숙하게 허밍을 덧붙였다. 그 행위가 퍽 자연스러워서 의주는 손을 눈으로 좇으며 연주에 빨려 들어간 것처럼 집중했다.
"들어본 노랜데......"
"주걸륜 청천. 알아요?"
멜로디와 목소리가 제법 조화로웠다. 까놓고 말해서 무척이나 들어줄 만했다. 분명 대충 부른 것 같았는데도 장난스럽고 어린 아이 같던 모습은 뒤로한 채 제법 갖춰진 실력이었다. 그 모습이 니콜라스에겐 너무나도 편안해 보였지만 제가 보기엔 낯설었다. 의주는 제 앞의 연하를 감동하게 할 멋들어진 감상을 내놓지 못하는 자신이 조금 야속해졌다. 그저 솔직하다는 것만이 제가 가진 유일한 무기였다.
"목소리랑 잘 어울려요."
"진짜요?"
"응. 정말로요."
의주의 투박한 표현에도 얼굴 전체에 웃음이 번졌다. 솔직히 좀 날카롭게 생겼다 생각했는데 웃으니까 제 나이대처럼 보여서 귀여웠다. 고양이들이 주인을 닮은 걸까. 이 옥탑방에 사는 생명체 모두가 부드럽고 순해 빠졌다. 의주는 저도 모르게 들었던 곡을 흥얼거렸다. 그걸 듣던 니콜라스가 마치 감동을 한 것처럼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리곤 별이를 쓰다듬는 의주를 아주 뚫어져라 쳐다봤다.
"왜 그렇게 봐요?"
"형이 저 칭찬해줘서, 고마워서요."
이게 칭찬이라 할 수 있나. 의주는 제 성의 없는 감상에 괜히 머쓱해졌다. 마신 건 맥주 한 캔이 전부인데 종일 업무에 시달린 탓인지 몸이 피곤해서 취기가 살짝 도는 것 같았다. 근데 그 기분이 나쁘지 않아서 한참 눈을 감은 채 따끈한 고양이의 등허리만 쓸었다.
"형. 달 볼래요?"
"달? 고양이 말하는 거예요?"
"아니. 그건 달이고요. 지금 말하는 건 문. 하늘에 떠 있는 거."
천장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면서 자신이 취해서 정신이 없는 건가 싶었다. 이 엉망진창인 회색 도시에서 무슨 달을 봐. 그런 비관적인 생각이 들기도 전에 고양이를 내려둔 채 의주의 손을 이끌고 좁은 방에서 나왔다. 이젠 완전히 어둠이 내려앉아서 멀리 보이는 네온사인들이 정신없이 반짝거렸다.
"여기 누워요."
나무 평상 위에 대자로 뻗은 니콜라스가 의주를 손을 거칠게 끌어당겼다. 중심이 무너지면서 의주 역시 엉성하게 대자로 뻗었다. 어쩌다 보니 팔베개를 한 모양새라 머리를 들어 올리자 오히려 더 가깝게 붙어왔다. 일어나야 하는데 등이 닿자마자 편안해서 쉽게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달 없잖아요."
"아, 잘 봐봐요. 구름 걷히면 찾을 수 있어요."
"없는데......"
"그럼 누가 먼저 찾는지 대결해요. 시작."
어려서 그런지 이렇게 유치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의주는 눈을 사방으로 돌렸다. 달은커녕 하늘을 올려다본 지가 언제인지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무지의 하늘을 보니 저도 모르게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최근에 비 예보가 잦았다. 여전히 하늘엔 먹구름이 껴 있어서 찾기가 쉽지 않았다. 매번 보고서만 들여다봤지 별을 찾아본 적은 없어서 평상에 등을 대고 누워 하늘을 하염없이 바로 보는 행위 자체가 어떤 감상이 필요 없을 정도로 새롭고 낯설었다.
"한국에서 혼자 지내는 거 어때요?"
"조금 외롭긴 한데 무슨 일이 자꾸 생겨서 재밌어요. 이렇게 형도 만나고."
외롭다는 말이 어쩐지 어울리지 않았다. 낯선 타지에서 혼자 살아가는 게 쉬울 리는 없겠지만 지나치게 해맑아서 외롭다던가, 쓸쓸하다는 감정 같은 건 느끼며 살지 않을 것 같았는데. 가족의 품을 떠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고양이 둘까지 건사하는 스물둘을 문득 쓰다듬어주고 싶단 생각이 스친 것도 아주 잠시였다.
"어, 보인다."
"어디요?"
"저기 반짝이는 거요. 안 보여요?"
그 생각이 실제로 이어지기도 전에 구름이 가려졌다 다시 거두어지길 반복하자 니콜라스가 가리키는 달의 형체가 드러냈다. 진짜 달이 떴었구나.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인데 깜깜했던 하늘에 미약한 빛이 드러나자 의주는 한참 그 빛을 바라봤다. 아마 밤새 빛나겠지. 그러다 해가 뜨면 빛났던 걸 잊은 것처럼 자취를 감추고. 그저 하루를 살아내기 바쁜 직장인이 달의 반짝임을 아무 생각없이 멍하니 본다는 건 흔하지 않은 일이니까. 이젠 숨소리가 들릴 만큼 두 사람의 거리가 좀 더 가까워졌다.
"꿈 같은 거 있어요?"
평생 내뱉을 일 없는 질문이었다. 누군가 제게 똑같은 걸 물었을 때 그런 게 왜 궁금하냐고 정색했었는데. 이젠 자신이 이런 막연한 질문을 건네는 입장이라니. 아까 마신 맥주 한 캔에 취해버린 건지 머리가 이상해진 게 분명했다.
"꿈이요? 갑자기 물어보니까 생각 안 나는데."
"밴드맨으로서 목표라던가 하는 그런 거요."
"음... 무도관에 서는 거?"
의주의 얼굴에 잔잔한 의문이 번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밴드에 드럼 하는 친구가 일본인이에요. 걔 꿈이 거길 입성하는 거래요."
저는 나이스 프론트맨이니까 멤버들 꿈이 내 바람이에요. 그 말이 퍽 진심 같아서 의주는 지극히 이타적인 태도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위한다는 게 빛날 수밖에 없는 내면 같아서 모르는 척 지나치기 어려웠다.
"이름이 니콜라스라고 했죠?”
"네.”
"중국어 이름은 없어요?"
"있어요. 왕이샹. 근데 니콜라스가 더 익숙해요."
친한 사람들은 아무렇게나 부르니까 형도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니콜라스는 의주를 바라보며 짓궂게 웃었다. 우리가 앞으로 친해질 일이 있을까. 아니 더 만날 수나 있을까. 물론 오늘은 예상치 못하게 같이 있었지만 그 이상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그려지진 않았다. 경험상 자신이 노력하지 않으면 멀어지는 건 너무나도 당연했다. 어떤 정의가 필요치 않은 관계는 그만큼 끊어지기도 쉬웠으니까.
온몸을 녹이던 낮을 잊은 것처럼 제법 찬 바람이 불었다. 아직 시간이 여름에 완전히 닿지 않았다. 온 마음이 녹아버린 줄 알았는데 별을 보니 여전히 형체가 남아 있긴 했나 보다. 달 하나를 빼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 밤의 시간은 차곡차곡 쌓여 멈출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쩐지 아주 천천히 지나갔으면 했다.
냉정하게 생각해봐도 그건 일회성 만남에 지나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랑 밥 한 끼 먹고 집에 가서 반려묘 좀 쓰다듬다가 누워있다 온 게 뭐 별일이라고. 물론 그날 밤 의주는 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을 때 암전이 된 것처럼 까만 배경 속에 매몰된 달을 찾다 잠이 들었다. 복잡한 머리가 둔감해질 만큼 오랜만에 숙면이라 아침에 깼을 땐 우주 속을 한참 유영하다 온 것처럼 몸이 가벼웠다.
물론 특별한 경험이었던 건 인정한다. 곱게 큰데다 시간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낸 탓에 그날 밤 겪었던 모든 일이 의주에겐 처음이었다. 지금은 집안의 압박으로 직장인 흉내를 내고 있긴 하지만 의주는 일반적인 루트로 살지 않았으니 그날의 경험이 낯선 게 당연했다. 오히려 타지 생활을 하는 니콜라스가 한국 생활을 더 훤히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 날 후로 니콜라스에게 끊임없이 문자가 왔다. 잘 들어갔냐는 말에 찾아줘서 고맙다고 답장을 보낸 게 연락을 해도 된다는 신호라고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형. 오늘 날씨 좋아요. 하늘 봐요. 같은 별 시답지 않은 굿모닝 문자를 매일 같이 보내기에 처음엔 답장을 해주다가 이걸 내가 왜 받아주고 있나 싶어서 바쁜 날은 적당히 무시했다.
그런데도 어린 게 좋긴 한 건지 제가 별다른 반응이 없어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이걸 성가시다 해야 할지 아니면 어디까지 가나 지켜봐야 할지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스물둘일 때는 어땠더라. 무모하기 보다는 겁이 많았던 것 같은데. 하고 싶은 게 마땅히 없어서 남들 다 가는 대학에 들어가서 기억에 남을만한 일을 꾸미거나 도전해본 적도 거의 없었다. 제 의지로 자행했던 거라곤 온갖 경로로 남자만 많이 만나고 다닌 게 전부였으니까.
물론, 제가 상대하고 있는 스물둘을 남자로 볼 일은 없어야겠지만 이렇게 저돌적인 연하는 오랜만이라 니콜라스가 게이든 아니든 참신한 존재로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의주는 니콜라스의 문자를 받을 때마다 얘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다, 위로든 아래로든 띠동갑이랑은 뭘 해도 망한다, 가능성조차 없으니 꿈 깨자를 몇 번이고 마음에 되새겼지만 어린아이답게 어른의 관심을 끌어내는 방법을 너무나도 잘 아는 게 문제였다.
[형]
[아기볼래요?ㅋㅋ]
[사진]
그러니까 이런 수법이 너무 자연스러웠고, 의주는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기 사진이라길래 뭔가하고 봤더니 자기 셀카를 당당하게 찍어 보내는 행위일 줄은 상상도 못했지. 구내식당에서 밍밍한 콩나물국을 퍼먹다가 사레가 들릴 만큼 놀란 것과 별개로 사진은 잘 나와서 한참 들여다보긴 했었다. 이걸 답장을 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메시지를 보내는 대신 찍은 성의를 봐서 갤러리에 저장은 해뒀다. 그리곤 회의를 하다 한 번 들여다보고, 퇴근 직전에 한 번 들여다보고, 집 가서 샤워하다가 한 번 들여다보고. 정말 어리긴 어리네... 그런데 잘생기긴 했다. 같은 무미건조하지만 객관성을 갖춘 감상을 내놓기도 했다.
[형]
[점심뭐먹어요?]
일주일 즈음 일방적인 연락 지옥에 갇혀 있다 보니 제 의지와 무관하게 대학생의 일과를 꿰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월수금은 오전 수업, 화목은 오후 수업. 종로 인근 고깃집 알바(주로 숯불을 피우고 불판을 간다고 했다)를 갔다가 느지막이 연습을 하거나 주말엔 합주와 공연. 오늘은 늦잠을 잔 모양인지 아침에 문자가 없어서 사실 좀 걱정했다. 전화라도 해줘야 하나 했는데 그건 너무 오지랖인 듯해서 꾹 참았는데. 오전부터 점심도 거른 채 이어지고 있는 지루한 전략 회의 중에 날아온 문자를 3초 만에 열어서 재빨리 확인했다.
[회의 중이라 못 먹어요.]
답지 않게 답장이 너무 빨랐다. 반가운 티를 너무 냈나. 스크린엔 몇 시간째 비슷한 숫자와 그래프가 반복이라 더 이상 집중하고 싶지 않을 만큼 지루했다. 한참 동안 암전인 화면에 얼른 답장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형네회사나빠요]
[나도안먹을래요ㅠㅠ]
저를 위로하고자 보낸 말들이 너무나도 철부지 같아서 웃음이 났다. 저도 모르게 작게 소리 내서 웃어버리는 바람에 잠시 회의실엔 정적이 돌았다. 무슨 문제라도? 그 질문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직장인 짬으로 대충 얼버무렸다. 재채기가 나와서... 죄송합니다. 맨 뒷자리에 앉아있어서 그나마 핑계가 어색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답은 뭐라고 보내지. 의주는 잠시 치열하게 고민했다. 변 프로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러다 갑자기 제게도 질문이 날아들었다. 상황상 오래 메시지를 주고받을 순 없을 것 같아 메모를 하는 척 얼른 메시지를 보냈다.
[아기는 먹어요.]
그 문자를 보낸 뒤 답도 없는 회의 지옥에서 풀려나니 니콜라스에게 온 문자가 잔뜩 쌓여 있었다. 안 먹겠다고 한참 버티더니 결국 햄버거 두 개를 늘어놓고 찍은 사진을 보낸 게 귀여웠다. 그래도 양심상 감자튀김은 안 먹었어요. 양심상이라는 단어는 어떻게 안 건지 제법 한국인스러운 구사력이라 문자를 볼 때 재밌었다. 매번 같은 공간에 비슷한 업무로 갇혀있다 보니 어디로 튈지 모르는 니콜라스와의 연락이 유일하게 숨통 트이는 순간이었다.
흡연구역 한쪽에 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깊게 빨아들이자 따갑고 씁쓸한 기운이 퍼졌다. 답을 보낼지 말지 고민하다가 이내 마음을 다잡곤 메세지창을 껐다. 자꾸만 궁금해지고 즐거워져서 큰일이다. 위험신호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서로 연락이 불필요한 사이라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안 오면 걱정이 되고 오면 또 기분이 들뜨고. 좋은 형 동생으로 지내도 되지만 오랜 클로짓 게이의 경험상 제 마음이 더 커지기 시작하면 말로(末路)는 늘 비슷했고 전처럼 되돌릴 수 없었다.
[사진]
[이거 내 기타]
적당히 선을 그어줘야 맞는데 그럴 생각이 있긴 한 건지 잘 모르겠다. 자신도 멈출 줄 모르고 그 선을 자꾸 넘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게 문제였다. 한 달에 두 번, 수요일 저녁마다 반강제로 참석해야 하는 사내 기타 동호회에서 의주는 오랜만에 제 기타를 꺼내 들자마자 니콜라스를 떠올렸다. 밴드 한다고 했지. 통기타도 집에 있던데. 다른 사람들 다 무난한 디자인을 고를 때 자신은 장비 욕심이 앞서서 제법 고가로 구매했었다. 물론 실력은 여전히 초보자 수준에 머물렀지만 니콜라스가 들려줬던 곡을 그 이후로도 계속 흥얼거렸다. 나중에 또 들려주려나. 의주는 자리를 잡고 기억이 나는 대로 스트럼을 했다. 아무리 연주해도 음이 겉돌 뿐 한 번 들었던 멜로디는 쉽게 따라부를 수 없었다.
[우와]
[형기타에요?]
[칠줄알아요?]
[연주하는거보여주면안돼요?]
말이 기타 동호회지 모두 다 몇 달째 초급 단계였다. 한참 수업을 듣다 개인 연습 시간이 주어지자 의주는 또 한가득 쌓인 메시지를 거슬러 올라가 읽었다. 귀여운 고양이 이모티콘도 잔뜩 보냈길래 그마저도 니콜라스답다고 생각했다. 연주하는 걸 누구에게 보여준 적이 없어서 솔직히 부끄러웠지만 그나마 자신 있게 칠 줄 아는 곡이 하나 있었다. 비틀즈 헤이 주드. 의주는 맞은편에 카메라를 켜두고 다리를 꼰 채 기타를 들었다. 갑자기 무슨 자신감이 생긴 건지 제법 열심히 위아래로 스트럼을 하고 줄을 꾹꾹 눌러 잡았다. 그러다 코드를 몇 번 틀려서 음이 엇나가고 주법을 까먹어서 잠시 멈추긴 했어도 끝까지 연주를 이어갔다. 찍힌 걸 다시 보니 어쩐지 민망해서 보내지 말까 고민도 했지만 자신에게 연주를 들려준 니콜라스에게 제 연주도 꼭 보여주고 싶었다. 꽤 긴 동영상이라 보내는 시간도 상당했다. 전송되자마자 읽음 표시가 뜨더니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괜히 보냈나 싶을 때 즈음 문자 여러 개가 쏟아졌다.
[와]
[연주들어야하는데안들려요]
[수트입고기타치는게어딨어요]
[그냥형이섹시해요]
[That’s too much.]
예상도 못 한 반응이라 얼떨떨했다. 처음엔 기타 칠 때 복장이 따로 필요한가 싶었다. 다시 읽어보고 나서야 얼굴이 서서히 붉어졌다. 볼이 뜨거워져서 자꾸만 쌓여가는 문자를 더 읽기 어려웠다. 어린애한테 섹시하다는 말을 듣고 좋아하는 자신이 나잇값을 한참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자꾸 선을 넘어오는 걸 어떡하라고. 자신도 부추기는 것 같아서 딱히 할 말은 없었다.
[다음에 가르쳐 줄 수 있어요?]
[좋아요 저좋은선생님될게요 같이연주해요]
말도 행동도 부드러워서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도 잘할 것 같았다. 같이 연주하는 건 생각 못 해봤는데 그것도 제법 기대됐다. 그 전에 따라갈 수 있을 정도로 열심히 배워놔야겠지. 수요일마다 시간 때우는 게 다였는데 이젠 성실하게 임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니콜라스와 친해지고 싶은 거냐고 묻는 거라면 당연히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겠다. 그런데 친해지는 것에서 그치고 싶지 않은 게 의주에겐 큰 걸림돌이었다. 연락이 뜸한 날은 보내준 사진과 메시지를 틈만 나면 돌려봤다. 사람에게 이리저리 치여본 결과로 늘어난 건 인간관계를 명확히 정의하는 법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기술이었는데 니콜라스와 자신은 그저 형 동생인 건지 아니면 썸을 타는 사이인지 잘 구별이 안 갔다. 어떨 땐 형 동생이 맞는 것 같다가도 니콜라스의 몇몇 정신 나간 발언에 그 확신이 무너지기 일쑤였다. 형 기타 치는 거 백 번 돌려봤어요. 너무 좋아요 진짜. 오늘 형이 빨리 답장해줘서 기분 날아갈 것 같아요. 나 오늘 형 생각하다가 무대에서 실수했어요. 저 책임져요.
어린 게 겁도 없이 함부로 책임지라고 하네. 내가 진짜로 책임진다고 하면 어쩌려고. 의주는 꽤 심각하게 이 관계를 골몰했다. 자신이 당기면 속절없이 끌려 들어올 것 같은데 범접 불가한 나이 차며 해맑기만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대만산 연하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아니다. 자신이야 있었다. 수많은 남자 카테고리 중 외국인과 연하가 없진 않았으니까. 그런데 둘 다인 경우와 띠동갑이라는 특수 사항은 처음이었고 게이인지 헤테로인지도 불분명한 상황에서 함부로 손을 댈 순 없는 노릇이었다.
더 마음이 커지기 전에 접자. 의주는 책임감 있는 어른답게 굴기로 했다. 자신이 니콜라스보다 한참 어른이니 이 혼돈의 관계를 갈무리할 책임이 있었다. 그렇게 강인한 마음을 먹은 이후로 오는 문자도 철저히 씹고 갤러리에서 니콜라스가 보내온 사진들을 모조리 삭제해버렸다. 가랑비에 옷 젖는지 모른다더니 일상 사진들을 제외하고도 보낸 셀카만 서른 장이 넘어서 의주는 하나하나 지우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노래 부르는 걸 보여주겠다며 알려준 인스타 계정도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렸다. 만들어놓고 방치해뒀던 비공개 계정으로 게시물마다 좋아요를 눌러둔 것도 하나하나 거둬가듯 지워나갔다. 가까워지는 것보다 멀어지는 게 인간관계에선 더 쉬운 법이니 내가 연락 안 받으면 이제 끝. 서로 몰랐던 상태로 다시 돌아가면 되니 미련 같은 거 남겨두지 말자고 다짐했다. 나 같은 종류의 어른은 인생에 별 도움 안 되니까 이 선택이 바르다고 애써 자기 위로 중이었는데 의주는 자신이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형]
[요즘많이바빠요?]
[답이없어서걱정돼요]
[전우산안가지고나왔지만]
[오늘비많이온대요형은우산챙겨요]
자신은 귀여운 것에 약했고 마음이 물러 터졌다는 점이었다. 아침에 온 문자였는데 종일 니콜라스의 말이 신경 쓰였다. 보고서를 쓰다가도 문자 내용을 생각했고, 회의를 하다가도 그 말을 곱씹었다. 비 맞고 돌아다니진 않겠지. 떠돌이 강아지도 아니고. 비 조금 맞는다고 죽기야 하겠어. 근데 그러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하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마음이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튀었다.
기어코 하늘이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졌다. 창밖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제법 거셌다. 쉽게 그칠 모양새가 아니었다. 걱정이 점점 머릿속에서 부피를 키웠다. 퇴근 시간까지 치열하게 고민을 반복하다 의주는 주차장에서 핸들을 붙잡고 골몰했다. 그래. 어차피 집까지 데려다주는 건 선의로도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의미부여 하지 말고 형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호의를 베풀자 싶었다.
[어디 가지 말고 학교 건물 안에 있어요.]
[데리러 갈게요.]
꽉 막힌 퇴근길을 헤치고 낯선 캠퍼스에 들어섰을 때 의주는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온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걱정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조바심을 느끼며 차를 몰았다기엔 제 행동들이 낯설 정도로 성급했다. 적당히 둘러댈 변명이 부재한 상황에서 건물 앞 자판기 옆에 서 있는 니콜라스를 발견했다. 창문을 내리고 고개를 숙이자 그제야 자신을 본 얼굴에 한가득 웃음이 번졌다.
"형!"
그 얼굴을 보자마자 혼란했던 마음에 확신이 들었다.
나 얘가 보고 싶었던 게 맞구나. 그게 부정할 수 없는 진심이라 의주는 덤덤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기어코 마음을 줘버린 이 상황이 믿을 수 없이 참담했다. 그런데도 오랜만에 얼굴을 보니 내내 성급했던 마음이 저 멀리 도망을 가는 것처럼 제 의지대로 붙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데리러 온다고 해서 놀랐어요?"
조급했던 마음을 애써 숨겼다. 여유가 없어도 있는 척하는 건 자신 있었으니까. 핸들을 돌리면서 애써 제게 닿는 시선을 모른 척했다.
"갑작스러웠는데 좋았어요."
"......"
"오랜만에 형 볼 생각에 설렜어요."
그 말을 듣자마자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어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저렇게 반짝이는 눈과 애정이 묻어나는 말투엔 면역이 좀처럼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거쳐왔고 또 지나왔지만 날 것에 가까운 순수한 애정을 느끼는 것 자체가 오랜만이었다. 니콜라스의 모든 행동이 낯선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탓에 오히려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가슴 속에 뭔가 꿈틀대는 감각이 경계하고 싶을 만큼 좋다는 것도 문제였다.
니콜라스가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아도 얼굴에 전부 쓰여 있었다. 기분이 전부 드러나는 편이구나. 솔직하고 투명해서 마음에 들었다. 굳이 이 사람이 가진 수를 읽으려 들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편안하게 다가와서 자연스럽게 무장해제를 하게끔 만들었다.
"알바 가는 거 맞죠. 네비에 주소 찍어요."
"어, 저 알바 가는 날인 거 알고 있었네요?"
어쩐지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걸 들킨 기분이라 의주는 저도 모르게 당황했다. 물론, 그 말을 내뱉은 니콜라스는 감동에 젖은 모양이었지만 의주가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답장도 무시한 채 매사 여유로운 척하더니 결국 온 관심이 쏠려 있었다는 걸 자백한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라 의주는 점점 느리게 움직이는 와이퍼의 움직임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형 온다고 해서 다른 사람 구했어요."
"괜히 데리러 온다고 해서 난감해진 거 아니에요? 그런 거면 내가 너무 미안한데."
"데이트하러 간다고 했더니 바꿔주던데요?"
자신이 내뱉는 말의 무게가 얼마인지도 모르고 저돌적이다 못해 들이박아 버리는 니콜라스 때문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얼굴 만반에 번진 천진난만한 웃음이 이제 더 이상 어린애 같아 보이지 않아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순진한 얼굴 하지 마. 나 그런 얼굴에 약해. 점점 더 곤란한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 같아 마음이 미로 속에서 헤매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목적지 없이 캠퍼스를 벗어나자 의주는 복잡한 마음을 비우고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한국에 발붙이고 산 시간은 짧아도 더 살아온 내공은 무시 못 할 테니 오늘은 제가 이끄는 게 맞았다. 열 살 넘게 차이 나는 남자와 저녁에 갈만한 곳이 어딜까. 의도가 불순하지 않으면서 분위기를 낼 만한 곳은 한군데밖에 없었다.
"오늘 영화 볼래요?"
너무 진부한가. 고리타분하다 생각하면 어쩌지. 의주는 말을 내뱉고 나서 잠깐 후회했지만 밝아진 니콜라스의 표정에 이내 안도했다. 너어무 좋아요. 그러면서 기분이 좋은 건지 익숙한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저번에 연주했던 노래 맞죠."
"네. 형 기억 잘하네요."
어쩐지 자신감이 묻어났다. 확실히 저번보다 허밍이 길어지긴 했다. 저 역시 까먹지 않으려고 계속 불렀던 탓에 멜로디가 익숙해졌다.
"언제 또 공연해요?"
"다음 주요. 제 생일에 공연해요."
다음 주에 생일이면 7월이라는 건데. 한여름에 태어나서 이렇게 밝은 건가. 의주는 윤슬 같은 니콜라스의 눈을 보면서 머릿속으로 조용히 시간을 어림잡았다. 빠듯하긴 하지만 일정을 쥐어짜면 시간을 못 낼 것도 없었다. 니콜라스의 연주가, 그리고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가 궁금해서 꼭 시간을 내고 싶었다.
"저 기타 잘 쳐요. 노래도 꽤 불러요."
"알아요. 들려줬잖아요."
"저 지금 형한테 부탁하는 거예요."
애달픈 눈빛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단순히 와달라는 게 맞는지 아니면 더한 의미가 있는 건지 가늠이 안 됐다. 그래서 저 눈이 말하는 바를 제멋대로 해석하고 싶었다.
"시간 보고 갈게요. 너무 기대하진 말고요."
속내를 애써 숨겼다. 어쩐지 꼭 가겠다고 말하는 게 부끄럽고 민망해서. 무엇보다 정말 시간을 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확실하지 않은 일엔 허투루 약속하지 않았다. 일말의 기대조차 없어야 실망을 주지 않으므로 긍정이 부정 되는 일은 극도로 경계했다.
"올 수 있으면 와주세요. 저 꼭 들려주고 싶어요."
그 말을 듣고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 의주는 유리를 뚫고 들어오는 빗소리가 제 심장 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살갗을 두드리는 듯이 제법 거세서 의주는 괜히 눈썹을 매만지며 고민하는 척 행동했다. 두근거림을 숨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제 마음이 제 것 같지 않게 다루기가 어려웠고 누군가에게 끌려다니는 기분이 어쩐지 묘했다. 감정적으로 열과 성을 다해본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연애도 인간관계도 늘 미적지근했으니까. 의주는 지금 충분히 혼란스러웠다. 열 살이나 어린 애한테 호감을 느낀다는 것도 충격이었는데 감정적으로 이리저리 휘둘리는 자신이 서툴렀던 어렸을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아 이 상황을 피해버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도달했다.
머리가 터질 것만 같은 의주와 다르게 니콜라스의 기분은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영화관에 도착해서도 니콜라스 손에 이끌려 다녔다. 상영 중인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 한 편과 히어로물 한 편이었다. 뭐가 더 좋아요? 둘 중에 고르라면 차라리 로맨틱 코미디요. 이견 없이 쉽게 같이 볼 영화를 골랐다. 당연히 의주가 결제하기 위해 지갑을 꺼내려고 하자 니콜라스가 먼저 카드를 직원에게 건넸다. 형이 데리러 와줬으니까 영화는 내가 살게요. 의주는 나잇값을 못하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드는 것도 잠시 니콜라스가 쥐여준 티켓 한 장을 얌전히 받아들였다.
"팝콘이랑 콜라 사러 가요."
"형. 지금 작업 건 거예요?"
"응?"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니콜라스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돼서 영문 모를 표정으로 니콜라스만 바라봤는데 어쩐지 귀가 빨개진 건 니콜라스였다.
"대만에서는 콜라 사러 가자는 말 플러팅이에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너한테 관심이 있다. 만나고 싶다. 뭐 그런 말이라고요."
의주는 니콜라스가 그저 장난을 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없는 말은 아닌지 유래까지 줄줄 읊었다. 대만의 유명 드라마에서 나온 멘트라고 했는데 사실 의주는 그 사실을 알고 썼을 리 없었다. 그제야 얼굴이 붉어진 의주가 손사래를 쳤다. 우연이었지만 어쩐지 제 마음이 들킨 것 같아 더 크게 부정하게 됐다.
"아... 미안해요. 그런 의미인 줄 몰랐어요."
"왜 미안해요? 난 좋은데. 저는 형이 작업 걸면 바로 넘어갈 거예요."
그 말을 듣자마자 어쩐지 숨고 싶어졌다. 매사 제 마음을 훤히 내보이는 건 니콜라스인데 부끄러운 건 오히려 의주였다. 제 말이 진심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하듯이 제일 큰 팝콘과 콜라를 사서 상영관에 들어섰다. 이미 상영을 한 지 꽤 된 모양인지 광고가 나오고도 한참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렇게 둘만 보는 건가 싶었는데 영화가 시작되기 직전에 커플 한 쌍이 아주 먼 좌석에 앉았다. 오히려 이 공간에 둘만 있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란 생각까지 했다.
그렇게 흥미 없는 영화가 시작되고 둘은 별다른 말없이 팝콘만 주워 먹었다. 니콜라스가 고개를 한껏 가까이 기울이더니 귓가에 소곤거렸다. 달달한 거 좋아해요? 그 질문에 의주는 뭐 이런 당연한 걸 묻나 싶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곤 영화를 보는 내내 캐러멜이 잔뜩 발린 팝콘만 골라서 의주 입에다 넣어줬다. 괜찮다고 해야 하는데 오히려 거절하는 게 더 이상해서 그저 받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영화의 내용은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진부했다. 누구나 인생에 한 번 즈음 있을 법한 일로 꾸며진 흔해 빠진 로맨틱 코미디. 영화의 중반까지 흘러가자 의주는 눈이 저절로 감겼다. 잠이 들고 싶지 않은데 온종일 격무에 시달리며 니콜라스 생각에 잔뜩 머리를 굴린 탓인지 온몸이 노곤해졌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마음과 다르게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푹신한 의자에 몸을 좀 더 깊게 기댔다. 숨소리가 점점 차분해졌다. 그러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로 잠이 들어버렸다.
"형. 자요?"
한참 영화에 집중하던 니콜라스가 무의식적으로 옆을 돌아보니 의주는 눈을 감고 양손으로 팔을 감싸 안은 채로 곤히 잠이 들어있었다. 제법 깊이 잠에 빠진 건지 아무리 속삭여도 답이 없었다. 스크린에서 나오는 밝은 빛이 공간을 가득 채우니 의주의 속눈썹이 떨리는 게 여실히 보였다. 니콜라스는 의주의 눈 위로 손을 대자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곧바로 내리깔린다는 것을 알아챘다. 추운 건가. 그리곤 제 체크 셔츠를 벗어 의주의 몸 위로 덮어줬다. 작게 바르작거리다가 이내 몸을 좀 더 옆으로 기울였다. 니콜라스는 그 행동에 재빨리 반응하곤 어깨를 가져다 댔다.
의주의 관자놀이가 니콜라스의 딱딱한 어깨에 마주 닿았다. 의식할 만한 온도도 무게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뽀송한 체향이 달달한 팝콘향과 섞여 제법 진하게 났다. 불편한 자세로 한참을 있다 니콜라스가 고개를 더 깊게 숙였다.
"진짜 자요?"
더 작게 속삭였다. 대사에 묻혀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 수 없을 만큼 나지막이 소곤거렸다.
"자는 거 맞죠?"
다시 한번 물었다. 여전히 의주는 묵묵부답이었다. 얼마나 깊이 잠이 든 건지 숨소리가 새근거렸다. 니콜라스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목울대가 위아래로 요동쳐 온 어깨를 잘게 떨었다. 그러다 얼굴이 좀 더 깊게 내려갔다. 반듯한 이마와 콧대 사이에 뜨거운 숨이 멈췄다. 숨이 잠깐 멈춘 사이 영화 속 대사가 둘의 침묵을 메꿀 때 즈음 니콜라스의 온기가 의주의 살갗이 닿았다. 부드럽고 연약한 입술로 얕게 문질렀다. 그렇게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니콜라스는 급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반 충동적인 행동이라 후회가 스칠 틈도 없었다. 입술에 닿은 온기가 너무나도 미약해서 금세 잊어버릴 것만 같아서 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그 감정을, 감각을 잊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성급한 입맞춤이 불러온 딸꾹질이 불시에 시작됐다. 저도 놀라서 한참 숨을 참았지만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손등으로 입을 가리곤 불편하게 희뜩거렸다. 심장이 밖으로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이젠 제법 뜨겁게 느껴지는 어깨 위 온기와 간헐적으로 스치는 체향이 마음을 분별없이 괴롭혔다.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지 않았으면 싶다가도 저조차도 입을 맞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무성 영화 속에서 소리를 찾으려는 사람처럼 어딘가 감각이 고장 난 것만 같았다.
제멋대로 날뛰는 심장 박동이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어깨 위에 느껴지는 맥박은 여전히 빠르게 뛰었다. 그 맥박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닌지도 모른 채 혼란하게 엉킨 마음을 풀어내려 애썼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온몸이, 저를 감싼 살갗이 멀미하는 것처럼 울렁거렸다.
영화관에서 헤어진 후로 의주와 완전히 연락이 끊겼다. 분명히 영화가 끝나고 저를 집까지 데려다 주며 잘 들어가라고, 심지어 먼저 연락하겠다는 말까지 했었는데. 문자를 보내도 이젠 읽음 표시가 뜨지 않았다. 몇 번이고 고민하다 답답한 마음에 전화를 걸어도 받질 않았다. 한 번이 열 번이 됐고, 열 번이 서른 번이 됐지만 돌아오는 건 그 무엇도 없었다. 헤어짐은 불시에 찾아왔고 그 어떤 예고도 없었다.
그 날 제 입맞춤이 들킨 걸까. 그래서 화가 난 걸까. 니콜라스는 후회뿐인 자책에 온 시간을 허비했다. 연습을 하다가 몇 번이고 가사를 절었고, 멤버들이 충고를 해도 들리지 않았다. 결국, 연습 부족으로 끝내 준비했던 곡들은 올리지 못했다. 음악 빼면 시체인 밴드맨이라 자부하던 자신이 수치스러웠다. 단순히 음악만 내팽개친 게 아니라 정신을 빼놓고 일을 하는 바람에 불판에 팔이 뎄는데도 아프긴커녕 아무렇지도 않았다. 차라리 몇 번이고 데여도 형과 연락 한 번만 할 수 있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형. 잘 들어갔어요? 오늘도 출근 잘해요. 다음 주에 영화 새로 개봉한다는데 보러 갈래요? 저는 이제 알바 왔어요. 오늘 소주잔 몇 개 깨 먹어서 많이 혼났어요. 위로해주면 안 돼요? 형. 보고 싶어요. 아무 말이라도 좋으니까 답장 한 번만 해주세요. 형. 그날 제가 실수했어요. 미안해요.
일주일이 되어갈 때 즈음 니콜라스는 의주의 회사 앞으로 찾아갔다.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나 지하철이 끊기기 직전까지 버텼지만 끝내 의주는 볼 수 없었다. 완전히 증발해버린 것처럼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젠 포기해야 하나 싶다가도 의주가 남긴 몇 안 되는 흔적을 보면 다시금 마음이 커졌다.
마디가 불거진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 반쯤 풀어진 넥타이와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소매. 어색하게 기타를 끌어안은 마르고 판판한 몸. 잠시 멈췄다가 다시금 시작되는 연주. 몰아쉬는 숨과 함께 번지는 어색한 웃음.
니콜라스는 그 영상을 아주 오랫동안 돌려봤다. 오 분 남짓한 시간이지만 좋아하는 의주의 모습이 다 담겨 있어서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비참한 감정이 샘솟았다. 자신이 가진 유일한 형의 흔적이 명함 한 장과 이 영상이 전부라니. 제 짝사랑은 제 구질구질한 상황처럼 가진 것 하나 없이 가난하게만 느껴졌다.
결국 나사 하나 빠진 상태로 무대에 올랐다. 관객은 늘 오던 사람과 새로운 얼굴 몇 명이 전부였다. 이젠 완전히 여름이 온 건지 축축한 습기와 사람들의 열기로 공연장이 뜨거운 물 속 같았다. 세트리스트가 중후반으로 내달릴수록 제 얼굴에 흐르는 게 땀인지 눈물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어떤 기분을 온전히 느끼기도 전에 온몸이 늘어져 너덜너덜해졌다.
음악은 결국 마음을 구하는 일이었구나.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처음으로 노래가 부르기 쉬웠다. 사랑을 말하는 가사들이 다 제 이야기 같아서, 닿지 않는 누군가에게 끝내 들려주지 못할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소리를 내질렀다가 아주 작게 속삭였다. 그러다 읊조리며 애원을 했다. 제가 내뱉는 모든 가사가 한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말들이었다.
"여러분. 제가 고백할 게 한 가지 있는데요."
쉬지 않고 달린 탓에 빠르게 뛰는 심장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니콜라스는 쉽사리 의미를 짐작할 수 없게 웃었다. 제가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차인 것 같아요. 근데 고백도 못 해봤어요. 아쉬운데 또 너무 미안해요. 차마 그런 말은 내뱉을 수 없었다. 보잘것없는 연주와 노래에 환호해주는 사람들에게 실망감을 안길 순 없으니까 속으로만 꾹꾹 눌러 담았다.
"사실 오늘 제 생일이에요."
다행히 좋은 핑곗거리가 있었다. 니콜라스의 말에 관객들의 환호와 박수 소리가 커졌다. 생일 축하해! 사람들의 말이 파도처럼 밀려와 무대 위로 덮쳤다. 그 말을 들으면서도 울고 싶었다. 가장 축하받고 싶었던 사람은 따로 있는데 이젠 잊어야 하니까. 감사합니다. 빈껍데기 같은 말과 함께 마지막 곡을 연주했다. 싸구려 앰프 소리가 사람들의 고막을 날카롭게 때리며 울려 퍼졌다. 그런데 노래를 부르는 내내 어떤 소리에도 집중할 수 없었다. 심지어 공간을 채우는 제 목소리조차도. 마음이 완전히 부서진 후에야 세상이 이토록 소란스럽다는 걸 비로소 알아차렸다.
마지막 무대까지 마치고 온몸이 땀에 절은 채로 내려오니 멤버들은 한껏 상기된 채 뒤풀이 겸 생일 파티를 하자는 의견으로 술렁거렸다. 그 말을 애써 무시한 채 어두컴컴한 대기실 한쪽에 너저분하게 늘어놓은 짐들 사이로 새 티셔츠를 꺼내 입었다. 그러다 제 기타 케이스 옆에 놓인 케이크와 꽃다발을 발견한 니콜라스가 행동을 잠시 멈췄다.
"이거 누가 가져다 둔 거야?"
막 대기실로 들어온 멤버 중 하나에게 말을 걸었지만, 어깨만 으쓱할 뿐 적당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다 뒤늦게 들이닥친 멤버 하나가 말을 덧붙였다.
"아까 네 팬이라고, 나한테 전해달라고 하던데?"
"어떻게 생겼는데?"
"뭐가?"
"어떻게 생겼냐고! 그 사람!"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니콜라스의 격앙된 목소리에 놀란 멤버가 말을 잃은 채 조용해졌다. 고함에 놀라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니콜라스가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겁을 준다기보다 어쩐지 애원하는 듯한 표정이라 영문도 모른 채 술술 불었다.
"키 큰데 말랐고... 수트 입었던데."
니콜라스는 그 말을 듣자마자 대기실을 뛰쳐나갔다. 공연장 밖까지 숨이 차도록 내달렸다. 갈림길에 서서 한참 고민을 하다 내달린 쪽으론 의주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 반대편도 마찬가지였다. 공연장 주변을 몇 번이고 빙글빙글 돌았지만 어떤 자취도 남아있질 않았다.
눈 앞에서 의주를 놓친 이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너무 보고 싶었다. 어떻게든 만나고 싶었다. 한동안 꿈에도 찾아와선 저를 사정없이 흔들었다. 그런데도 생각을 떨쳐낼 방법이 없어서 못 견딜 만큼 괴로워했다. 왜 찾아온 건지, 그동안 연락은 왜 없었던 건지, 우리가 정말 이렇게 스쳐 지나가는 게 맞는지 묻고 싶었다. 아니, 묻지 않아도 되니 그저 제 앞에 나타나기만 해줬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랐다. 그런데 신은 제 편이 아닌 건 확실했다. 모든 경우의 수가 빗겨나갔고 찰나의 순간조차 겹치지 않았으니까. 그제야 온몸이 좌절감에 절여졌다. 허우적대는 것도 지쳐서 이젠 그 속에 잠겨 죽고만 싶었다.
모두가 떠난 공연장 무대 위에 앉아 한참을 기다렸다. 혹시라도 다시 찾아올까 싶어 꾹 닫힌 출입문만 쳐다봤다. 이제 나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나서야 억지로 끌려 나오듯이 자리를 떴다. 어깨에 기타 케이스를 매고 양손엔 케이크와 꽃다발을 들었다. 까만 하늘 아래로 저를 데리러 와 준 그날처럼 비가 내렸다. 우산을 쓸 손도, 정신도 없었다.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빗속을 아무렇지 않게 걸었다. 케이크 상자와 하얀 꽃다발 위로 물기가 잔뜩 맺혔다. 형이 자신에게 준 선물인데 젖고 싶지 않아서, 놓칠까 두려운 사람처럼 꽉 끌어안았다. 온몸이 빗물에 흠뻑 젖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점차 거세지는 빗줄기에 하늘을 올려다봤다. 저를 봐주지 않을 테지만 이젠 정말 울어도 눈물처럼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무도 없는 길을 걸으며 발끝만 보고 걸었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쓰레기들과 울퉁불퉁한 보도블록. 그리고 젖은 채 밝게 비친 아스팔트 바닥. 가로등조차 없는 후미진 골목인데도 느릿하게 걸어가는 도둑고양이가 선명하게 보였다. 니콜라스는 잠시 걸음을 멈추자 물기에 닿은 바퀴 소리가 잠시 멎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리곤 설마 하는 심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눈을 멀게 할 만큼 밝은 헤드라이트가 저를 온통 비추고 있었다. 마치 무대 위에서 저를 태워버릴 듯한 조명처럼 길 위에 서 있는 자신만을 온전히 밝혔다.
"...형?"
익숙한 차체의 운전석에서 한 사람이 내렸다. 우산을 활짝 핀 채 다가오는 인영이 빗물에 젖은 속눈썹 때문에 흐릿했다. 제 말소리가 빗소리에 갇혀 웅얼거렸다. 제 앞에선 의주가 마치 만들어낸 환상과 같아서 니콜라스는 그저 눈만 끔뻑거리기만 했다. 양손엔 여유가 없어서 눈물조차 닦을 수 없었다.
"이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하려고......"
제게 기울어진 우산 때문에 눈앞이 선명해졌다. 점점 젖어가는 의주의 얼굴과 듣고 싶었던 담담한 목소리에 니콜라스는 그제야 현실이 맞다는 걸 자각했다. 너무 보고 싶었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묻고 싶었던 말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원망도 궁금증도 미안함도 들지 않았다.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문장들을 꾹 참았다. 얼굴을 다시 볼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것도 묻지 않기로 했으니까. 제가 내뱉을 문장 중 의주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 말을 고르고 또 골랐다.
"오늘 제 공연 봤어요?"
의주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없었다. 그리곤 한참이 지나 고개를 가로저었다. 결국, 보러 오지 않았구나. 니콜라스는 실망감이 스치기 전에 머리를 좌우로 털어 삿된 감정을 멀리하고 부정을 덜어냈다. 이렇게 형이 제 눈 앞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보게 되면... 포기가 안될까 봐."
회색 수트를 입은 마르고 판판한 몸이 물기에 어려 색이 점점 짙어졌다. 올렸던 앞머리도 젖어 이마를 덮었다. 축축한 음성을 듣자마자 케이크와 꽃다발이 제 품에서 툭하고 떨어졌다. 그 대신 의주에게 손을 뻗었다. 우산이 길바닥에 펼쳐진 채로 나뒹굴었다. 겨우 붙잡은 몸을 놓칠까 싶어서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그 익숙한 체향과 비 내음이 섞여들어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내뱉은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싶어서 저답지 않게 안달이 났다.
"왜 사라졌어요?"
"......"
"제가 몰래 입 맞춰서 싫어졌어요?"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막상 내뱉어지는 문장들은 볼품없었다. 혹시나 제 말에 의주의 기분이 상할까 싶어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그렇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이 제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는 의주 때문에 숨이 턱턱 막혀왔다.
"내가 널 좋아하게 됐다고 어떻게 말해."
"......"
"나도... 나를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어."
혼잣말을 하듯이 덤덤한 어조였다. 심장이 내려앉아 저 멀리 빗속에 나뒹굴고 있었다. 같은 마음일 거라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제 마음을 들켜버린 바람에 도망쳤을 거라 여겼다. 그래서 내뱉는 모든 말이 곧이라도 형체 없이 부서질 모래성 같았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도 되니까, 그거 하나만......"
의주의 말을 듣자마자 니콜라스는 온 뼈가 부서질 만큼 끌어안았다. 저를 한없이 괴롭혀놓고 이제 와 좋아한다는 의주가 원망스럽긴커녕 기꺼워서 참을 수 없었다. 마음을 알게 되니 고백을 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이 모든 게 제가 만들어낸 환상일까 봐, 깨어나면 끝일 꿈일까 봐 니콜라스는 조급함이 앞섰다.
"형. 의주 형......"
하고 싶은 말을 고르고 골랐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올까 봐 입을 달싹였다. 한참을 고민하며 이름만 나지막이 불렀다.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뭐냐면요."
목덜미에 코를 가져다 댔다. 익숙한 향기에 정신이 몽롱해져서 온몸에 힘이 서서히 빠졌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너무나도 단편적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은 지금 전하기에 너무 무거워서 아껴두고 싶었다. 그렇다면 제 진심이 담아 전할 어설픈 문장은.
"형 앞에서 노래 부를 수 있게 해주세요."
보잘 것 없이 초라했다. 지나치게 유치한 문장은 온갖 감정을 꾹꾹 눌러 담은 고해성사에 가까웠다.
"형의 프론트맨이 될게요."
제 마음이 이만큼이나 커서 도무지 어떤 문장으로도 제 마음을 다 전할 수 없다고. 수만 가지의 감정이 뒤엉킨 노래를 형에게 실어 보낼 수 있다면 그건 제 모든 걸 내어주는 것과 다름없다고. 그건 한 사람만을 위한 듣기 쉬운 무이의 맹세였다.
축축하게 젖은 옷으로 엉망이 된 케이크와 꽃다발을 껴안은 니콜라스를 조수석에 태운 채 익숙하게 집 앞까지 데려다 줬다. 집에 들렀다가 가라는 니콜라스의 말에 한참을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거렸다. 비에 젖은 수트가 무거워서 집까지 갈 수 없다는 건 말도 안 되는 핑계란 걸 알지만 이대로 헤어지긴 싫었다.
익숙한 철제문을 열고 좁고 높은 계단을 올랐다. 덜컹거는 철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날처럼 고양이 두 마리가 튀어나왔다. 혹시라도 발이 젖을까 봐 얼른 고양이들을 들어 올린 니콜라스를 따라 의주가 문을 닫고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확실히 두 번째라 그런지 고양이들의 경계가 전보단 줄어서 의주의 발밑에서 한참을 뒹굴었다. 형 좋나 봐요. 나한테도 잘 안 그러는데. 니콜라스의 말이 진짜인진 모르겠지만 자신을 반겨주는 달이와 별이의 반응에 얼떨떨했다.
"그... 갈아입을 옷 줄게요."
어쩐지 어색한 분위기라 의주는 다른 말 없이 옷을 받아든 채 욕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무거운 수트를 허물 벗듯이 벗고 니콜라스가 건넨 옷들로 갈아입었다. 프린팅이 여기저기 벗겨진 박스티셔츠와 통이 큰 반바지였다. 나 반바지 잘 안 입는데. 그렇지만 다른 방도가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문을 열고 나오자 침대 앞 작은 테이블 위로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떨어트려 엉망으로 뭉개진 상태였지만 니콜라스는 생크림 위로 긴 초 두 개와 짧은 초 두 개를 꼽고 불을 붙이고 있었다.
"아직 12시 안 지나서요."
말을 하면서 민망한 듯이 웃는 니콜라스를 바라보다가 촛농이 녹을 것 같아서 의주는 얼른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불을 끄자 일렁거리는 촛불 사이로 붉게 비친 니콜라스 얼굴엔 만반에 미소가 가득했다.
"생일 축하 노래 불러주면 안 돼요?"
그 말에 잠시 당황했지만 못할 것도 없었다.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곤 기침을 얕게 토했다. 이게 뭐라고 긴장이 되어선 목까지 가다듬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의주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방 전체를 가득 매웠다. 달이와 별이를 껴안은 채 니콜라스가 몸을 좌우로 이리저리 움직였다.
"사랑하는 니콜라스... 생일 축하합니다."
어쩐지 간지러운 단어라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들었는데 의주가 잠시 뜸들이는 걸 보곤 니콜라스가 크게 웃었다. 노래가 끝나자 두 손을 모으곤 짧게 기도를 하더니 니콜라스는 힘껏 촛불을 불었다. 매캐한 연기가 아지랑이 피듯 위로 흩어졌다. 불을 키고 포크를 들고 온 니콜라스가 의주의 옆에 딱 달라붙어 앉았다. 무릎과 무릎이 부딪힐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형. 먼저 먹어요."
그리곤 포크 가득 케이크를 퍼서 의주의 입앞에 가져다 댔다. 그걸 받아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다 의주는 거절할 수 없어서 입을 벌렸다. 입속에 달큰한 맛이 순식간에 퍼졌다. 의주도 받아먹기만 할 수 없단 생각에 딸기 하나를 통째로 떠서 니콜라스의 입 안에 넣어줬다. 맛있어요. 입 안에 공간이 없어서 웅얼거리는 말이 제법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생크림 케이크 싫어하는 건 아니죠?"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장난스럽게 덧붙였는데 그 의도와 다르게 의주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싫어하구나."
의주의 말에 니콜라스가 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아니 그게 아니라요. 그리곤 꿀꺽 삼킨 채 재빨리 말을 이어나갔다.
"생크림을 좋아하진 않는데 딸기는 좋아해요. 그래서 맛있어요."
"다음 생일엔 참고할게요."
"그러면 내년에도 같이 있어준다는 말 맞죠?"
의미가 그렇게 해석될 줄 몰랐던 의주가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연히 그래야겠지. 아마 다가오는 제 생일도 니콜라스와 보내야 할지도 모르니까. 의주의 긍정에 니콜라스 얼굴에 미소가 활짝 지어졌다. 정말이지 맞춰주기 쉬운 타입이었다.
"아까 비 맞았는데... 기타 망가지진 않았어요?"
"아, 맞다. 기타. 확인해볼게요."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기타 케이스를 가져온 니콜라스가 내부를 열어봤다. 다행히 하드케이스라 그런지 안까지 물이 스며들진 않아서 기타는 멀쩡했다. 안도의 숨을 몰아쉬더니 기타를 꺼내 들었다. 조율하듯이 몇 번 매만지니 줄마다 정확한 소리가 났다.
"저번에 연주했던 거 가르쳐줄까요?"
어쩐지 거절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한동안 니콜라스의 연주가 떠나질 않고 머릿속을 맴돌았으니까. 건네는 기타를 받아든 의주가 어색하게 자세를 잡았다. 그래도 열심히 배웠는데 막상 니콜라스 앞에서 연주하려니 민망함이 머릿속을 지배한 기분이었다.
"G 코드부터 잡아볼래요?"
더듬더듬 왼손을 올리니 니콜라스가 제 손으로 더 쉽게 잡는 법을 알려줬다. 힘껏 벌어진 손가락이 어쩐지 불편했다. 형은 손이 작네요. 별 의미 없이 내뱉은 말 같은데 의주는 듣자마자 얼굴이 빨개져서 들킬까 봐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분명히 니콜라스가 연주했을 땐 쉬운 것 같았는데 의주가 하려니 느린 곡이라도 코드를 바꾸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아주 천천히 가르쳐주는 니콜라스의 친절에 부응하고 싶었지만 제 등 뒤로 느껴지는 니콜라스의 심장박동이 거세서 쉽게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잔뜩 경직된 의주를 한껏 끌어안은 니콜라스가 손등을 감싸 쥐곤 의주의 오른손을 살살 움직였다. 기타의 울림과 소리가 커졌다가 작아지길 반복했다. 코드를 짚는 손 위에도 따뜻하고 큰 손이 부드럽게 겹쳐졌다. 아직 코드를 외우지도 못했는데 니콜라스의 손을 따라가니 원래도 연주할 수 있었던 것처럼 쉽게 완성할 수 있었다.
제 프론트맨이 되겠다는 니콜라스의 말을 듣고도 의주는 마음을 주먹으로 꽉 쥔 것처럼 답답해서 참을 수 없었다. 제가 이해한 게 맞을까 싶다가도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싶어서 덜컥 겁이 났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감내할 게 많은 감정이니까. 차라리 짝사랑하는 게 더 어울릴 정도로 누군가와 마음을 깊이 나누는 일엔 소질이 없었다. 더 좋아졌는데 제게 실망해서 모든 걸 끝내자고 하면 그 이후엔 어떻게 살아야 하지. 시작도 하기 전에 끝부터 생각하는 자신이 겁쟁이 같아서 진절머리가 났다.
"나랑 연애하는 게... 생각보다 재미없을 수도 있어요."
"......"
"니콜라스를 섭섭하게 만들거나 실망스러운 일들이 있을 수도 있고요."
"......"
"그래도 최대한 노력할게요."
그런데도 저를 좋아해 주는 마음을 거절할 수 없어서 의주는 있는 용기를 애써 끌어냈다. 내 프론트맨이 되어주면 좋겠다는 아주 수동적인 형태의 고백. 너무 소중해서 아껴주고 싶은 마음보다 잃게 될 순간이 두려워서 더 꼭 쥐고 있는 사람도 있으니까.
뜨거운 숨이 무거운 침묵을 가득 메웠다. 답이 없어 불안한 마음이 서서히 밀려들 때 즈음 니콜라스가 부끄러운 듯이 슬며시 웃었다. 이 웃음을 온종일 볼 수 있다면 겁이 나더라도 끝까지 같이 있고 싶었다.
"노력하지 마요. 제가 더 많이 좋아하면 돼요."
내뱉는 모든 문장이 제 마음을 뜨겁게 만들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문장이 끝날 때까지 한참 숨을 참았다. 그리곤 제 눈 앞에 보이는 반질반질한 콧잔등 위로 딸기 향이 나는 입술을 묻었다. 캐러멜 향이 담긴 숨결이 제 이마에 닿았던 날, 두근거려서 전해주지 못했던 응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