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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날씨 흐림뒤맑음

트리

 

 

 

지난한 장마철을 뒤로하고 드디어 해가 났다. 여린 연두색이 어느새 청량한 초록이 되어 있었다. 약속한 듯 시작된 폭염에 입맛이 똑 떨어져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더니 뱃속이 텅 빈 기분이었다. 니콜라스는 엄지로 화면을 슥슥 밀며 여러 개의 카페 후보군 중 한 곳을 즐겨찾기 한 뒤 습관처럼 화면을 껐다.

택시 안에서, 어느새 익숙해진 서울의 창밖을 바라본다. 닮은 듯 다른 도시가 익숙해진 지 벌써 20일이 넘었다. 한 달 살기의 시작은 장마, 마지막 주는 폭염으로 장식하게 될 서울 도심의 호텔이었다. 근처에는 작은 호수가 있고, 놀이공원이 있는 곳. 니콜라스는 로비 앞에서 내려 3주 전과 달리 묵직해진 캐리어를 끌었다.

 

한국의 서울은 니콜라스가 머물다 온 여러 도시들과 많이 닮아있었다. 가장 작고 좁으면서 건물들의 높이와 인구 밀도가 높았다. 너무 높은 건 좀 별로. 니콜라스는 새로 생긴 높은 호텔을 함께 염두에 두었지만 클래식한 곳으로 선택했다. 체크인 한 숙소는 오래됐지만 룸 컨디션이 괜찮았고, 호텔에서 내려다보이는 호수 뷰가 좋아 결정했다. 건너편의 커다란 쇼핑몰을 떠올리다 열어두기만 한 캐리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정리는 나중에 할까. 가볍게 걷기로 하고 휴대폰과 지갑만 챙겨 침대에 앉았다.

 

한국에 온 목적은 대외적으로 카페투어였다. 정확히는 카페의 사람들이 주는 느낌을 구경하려고. 좀 심심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잠깐 쉬어가는 시간이 필요했다. 카페야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꼭 들렀으니 거창하게 이름을 붙인 거다. 거대 체인점부터 개인이 하는 작은 카페, 저렴한 가격의 프랜차이즈 가리지 않았다. 특별한 장소가 아닌 익숙한 곳에서 다른 언어를 쓰며 현실을 걸어 나가는 사람들이 궁금했다. 그걸 보기만 해도 나쁘지 않았다. 브레인스토밍. 리프레시 그런 것. 3주 전 인천공항에 내렸을 때 한숨을 쉬며 지쳐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지도 속 숙소 근처의 카페들을 성의 없이 둘러보다 아까 전 즐겨찾기를 해 둔 가게의 리뷰를 열었다. 게릴라로 나오는 케이크도 맛있고, 커피도 좋아요, 다른 음료는 거의 없지만, 마감시간이 빠른 편 등등을 제치고 사장님이 무척 친절하다는 이야기가 가득했다. 가게가 깨끗하다, 커피가 맛있다, 사장님이 상냥하다. 음. 좋은데? 니콜라스는 도착점으로 찍어 검색을 시작했다. 호텔에서부터 걸어서 25분. 산책 겸 다녀오면 딱 좋을 것 같아 바로 일어섰다.

 

 

 

호텔에서 나오자마자 후끈한 공기가 몸을 덮쳤다. 건너편의 거대한 쇼핑몰을 뒤로하고 니콜라스는 아파트 숲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대로변을 두고 바쁜 걸음을 하는 사람들 사이를 유유자적 걷는다. 서울의 여름은 습하다. 눅눅한 녹음이 가진 대만의 습기와 다른, 공기 중의 뜨거운 물기. 건물과 아스팔트의 열기가 어질어질 올라오는 낯선 여름의 초입. 손부채질을 하면서 가로수 아래의 그늘로 걸어보지만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는 햇볕이 따가웠다. 뭐 그마저도 좋았다.

 

중간중간 지도를 확인하면서, 길을 잃을 것도 없이 곧바른 직선을 밟는다. 도시의 소음은 즐거운 비명이 함께였다. 근처의 놀이공원 덕분인 듯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소리에 어깨를 슬쩍 움츠렸다. 이제 여기서, 조금 더 걸으면 곧이다. 아무래도 정오에 걷기엔 좀 덥네. 이러다 익어버리겠는데……. 니콜라스는 콧잔등을 붉게 물들이고서 골목으로 들어가 한 번 더 꺾었다.

 

 

 

아파트와 빌라 주택이 있는 베드타운, 그 가운데 덩그러니 있는 하얀 가게는 아담했다. 출입구 옆, 가게의 벽에는 담쟁이덩굴과 함께 곡선으로 이루어진 전신거울이 있었다. 포토존이네. 깨끗하게 관리된 거울에 이리저리 비춰보다 휴대폰을 꺼내어 들고 사진을 찍었다. 바로 섰다가 옆으로 서봤다가, 앉아봤다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은 화면을 다시 보기가 어려웠다. 뜨겁게 발열 중인 화면을 끈 니콜라스는 문을 열었다. 손자국 하나 없는 투명한 문에는 오픈과 클로즈 시간이 적혀있었다. 19:00. 정말 일찍 닫네, 생각하며.

 

찰랑이는 종소리가 거슬리지 않는 음악소리 위로 덮였다. 가슴께로 오는 테이블 너머 뒤를 돌아있던 남자가 인사와 함께 몸을 돌렸다.

 

“어서 오세요.”

 

웃어 보이는 얼굴이 말갛다. 목소리가 둥글다. 마른 몸 위로, 미소 짓는 얼굴이 저를 향해 있었다. 안녕, 안녕하세요, 수십 번도 더 말했던 인사가 어찌나 어색한지 니콜라스는 괜히 뜨거운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훔쳐냈다.

 

메뉴판 드릴까요? 한글과 영어와 한자, 일본어로 간단하게 적힌 종이 메뉴판이 데스크 위 고정되어 있는 아크릴 메뉴판 옆에 같이 놓였다. 사진과 가격, 설명이 같이 나열된 심플한 페이지였다.

니콜라스는 가느다란 손끝을 좇으면서 ‘좆됐다’라는 말을 떠올렸다. 외국어 배울 때는 욕부터 배운다더니. 그런데 쓰지는 마 니코. 누가 너한테 쓰면 째려봐. 알았지. 그렇게 알려줬던 한국인 친구의 말이 떠오르는 순간. 이럴 때 쓰는 말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이상한 상태가 되었다는 건 누구보다 더 잘 알 수 있었다.

 

짙은 고동색일까, 옅은 갈색일까, 어쩌면 새카만 검정일까.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싶었지만 눈이 마주친 순간 후다닥 고개를 내렸다. 니콜라스는 고민하는 척하며 어지러운 마음, 텅 빈 머릿속을 진정시켰다. 음. 시그니쳐 주세요. 겨우 입술을 열고 꺼낸 한마디에 나긋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네, 4700원입니다. 드시고 가시나요?”

 

힐끔힐끔 바라보며 대답하지 않는 니콜라스에게 어... 하며 머뭇대던 남자가 두 뺨을 봉긋하게 올리고 물었다.

 

"Here?"

 

손가락으로 바닥을 콕콕 가리키면서. 미치겠네. 이거 괜찮은 건가. 입술도 겨우 뗐는데 고개도 겨우 끄덕였다. 남자가 한 것과 비슷하게 손바닥으로 비어있는 자리를 가리켰다. 네, 저기서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계산한 카드를 건네주며 또다시 웃는다. 그렇구나, 정말로 친절하네……. 남자가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니콜라스는 진짜 친절, 엄청 상냥해. 사람들의 후기는 정확하다고 감탄했다.

 

삐거덕대며 네 개의 테이블 중 하나에 앉았다. 블라인드로 줄무늬 그늘을 만든 벽 쪽의 테이블로, 여기에 앉으면 사장님과 거리, 가게 안이 모두 잘 보였다. 오픈주방에서 원두가 갈리는 소리가 울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니콜라스의 손바닥 안에 가려지는 작은 컵에 가득 담긴 커피는, 피스타치오가 올라가 있었다. 연한 녹빛을 띄는 크림과 그 위에 뽀얀 우유거품이 얹어진. 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얼떨결에 시킨 시그니쳐 메뉴였다.

 

“맛있게 드세요.”

 

웃음소리가 목소리 끝에 걸려있는 남자의 말투는 습관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서비스직이니까 그렇겠지. 알고 있는데도 심장이 쿵쿵 뛰었다.

 

“감사합니다.”

 

대답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가까이에 있는 얼굴과 눈이 마주친다. 몇 초가 되었을까, 알 수 없다.

 

묻고 싶었다.

혹시 당신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혹시 경험한 적이 있는지.

그러니까 사람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것을 아는지.

그 무너진 세상 중심의 축이 달리 세워지고, 세계의 색상표가 바뀌는 걸 경험 한 적 있는지.

니콜라스는 그 모든 걸 이름도 모르는 어떤 남자를 보며 느꼈다.

 

남자의 머리꼭지에서 어깨, 팔꿈치로 니콜라스가 아는 모든 언어의 미사여구가 붙었다가 떨어진다. 수식하는 말들이 다시 팔꿈치에서 가늘고 둥근 손가락까지 데굴데굴 구른다.

냅킨을 챙겨 들고 다시 이쪽을 향하는 동안, 에어컨과 서큘레이터의 바람에 남자에게 달려있던 여러 개의 단어들이 팔랑이다 니콜라스의 머리 위로 다소곳하게 앉는다. 사각형의 테이블 위로 연갈색 냅킨을 내려놓는 손끝에 몇 개 남지 않은 표현들이 대롱대롱 붙어있다. 글자로 치면 운명. 모양새라면 심장을 닮은 둥글고 뾰족한 하트.

니콜라스는 이 순간을 간결하게 사랑이라 정의하고 싶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서 한 모금 입에 담는다. 남자는 가지 않은 채로 니콜라스를 내려다본다. 다시 고개를 들어 눈이 마주친다. 무슨 맛인지 알 수 있을 리 없다.

 

"맛있어요."

"감사합니다."

 

눈을 곡선으로 접어 웃은 남자가 미소 짓고는 뒤를 돌았다. 그제야 숨을 크게 내쉬었다. 텅 빈 가게에서, 음악과 커피와 남자 둘만 있었다. 니콜라스는 휴대폰을 보는 것도 잊은 채 남자가 움직이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기계적으로 커피를 홀짝이면서.

 

잘 먹었습니다. 인사를 하고 나갈 때에, 남자는 젖은 손을 닦으며 홀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가세요? 네에. 조심히 가세요. 키가 큰 남자가 머뭇대며 눈을 마주쳤다.

 

“내일도 올게요.”

“꼭 오세요.”

 

목안에서 웃는 소리를 낸 남자가 문을 잡아주었다. 기다릴게요. 조심히 가세요. 서로 고개를 몇 번이고 꾸벅였다. 니콜라스는 뒤를 돌고 싶었지만 참았다. 대신 어깨를 곧게 펴고 걸었다. 심호흡을 하면서.

 

 

 

 

 

 

 

그러니까 5일째 되는 날까지, 니콜라스는 몇 개 없는 메뉴를 모조리 해치웠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카푸치노, 바닐라 라테, 밤 라테, 따듯한 드립커피... 하루에 한 잔, 그리고 어제는 날짜를 못 맞출 것 같아 가는 길 드립커피를 포장해 나왔다. 드디어 전 메뉴를 다 클리어했다. 기쁜 마음으로 근처에 도착해 오늘은 뭘 마시지 미리 고민한다. 이제 여기에 올 날도 며칠 남지 않았음에 입을 삐죽였다. 니콜라스의 인스타 스토리 속에는 늘 같은 장소에서 찍은 거울샷이 담겼다. 친구들은 거기가 숙소 근처냐 물었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숙소는 아니고, 그냥 그런 게 있어.

 

 

 

음료라고는 물 말고 즐기지 않던 니콜라스는 카페에서 만큼은 한 컵을 싹싹 비워야 했다. 마르고 길쭉하고 동그란 남자가 기대 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봤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요만큼도 남길 수가 없었다. 에이드나 과일주스가 있는 곳도 아니었기에 하루에 허락된 카페인의 양을 여기서 모두 섭취했다. 오늘은, 첫날의 시그니처를 다시 마셔볼까 생각하며 가게 앞의 거울에서 기록을 남겼다. 날씨가 좋아 바깥에 둔 건지 못 봤던 화분이 촉촉이 젖은 채로 바깥에 나와 있었다.

 

‘이제 두 번 더 올 수 있나. 오늘은 무슨 말이라도, 걸어봐야 할 텐데.’

 

이런 적이 없었다.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다 생각했고, 그렇게 살아왔다. 하지만 그게 안 됐다. 온몸이 빳빳하게 굳고, 머릿속에 있는 단어도 끄집어내지 못하고, 몸이 얼었다. 아. 나 지금 진짜 멋없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기다렸다는 듯, 테이블에 양팔을 짚고 있던 남자가 씩 웃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얼굴이 싱그럽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마주한 6월의 여린 잎처럼 상큼하다. 손안에 있는 데워진 휴대폰처럼 니콜라스의 얼굴이 홧홧했다. 작열하는 것은 태양만이 아니었다.

 

"오늘은 어떤 거 드릴까요?"

"오늘, 이거요."

 

니콜라스는 첫날의 첫 메뉴를 짚었다. 시그니쳐 커피로 드릴까요? 네. 키가 큰 사장님은 고개를 조금 떨구고 웃었다. 오늘은 제가 선물로 드릴게요.

 

"네?"

"선물."

"왜요..?"

"손님이 좋아서요."

 

니콜라스는 그 뜻을 곰곰이 생각했다.

좋아서요.

내가.

손님.

나.

LIKE.

설마, 혹시,... LOVE?

갑자기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대답을 하다 말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가게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빠르게 걸었다가 헉하고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이게, 뭐지. 그러니까. 그 뜻이 아니겠지. 안다. 하지만 어쩌면 그럴 수도 있잖아. 니콜라스와 같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 첫날 우리가 만나자마자 같은 감정을 느꼈을지 아직은 모르는 노릇이다.

 

두 뺨을 찹찹 때렸다가, 따끔한 피부를 쓸었다. 햇빛에 덴 듯 온몸이 뜨겁다. 아, 그게 아니라. 다시 가게로 달려간다. 투명한 유리문을 열자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까 그 자세, 그러니까, 섹시하게 어깨를 자랑하며 양손으로 테이블을 짚은 그 자세로 니콜라스를 보고 있었다. 숨을 몰아쉬고는 대답했다.

 

"저도, 저도 좋아요."

 

아 바보 같았겠지……. 조금 후회할 때에 아하하 웃는 소리가 들렸다. 가볍게 박수를 친 남자는 주먹을 말아 쥐고 입가를 가리고 웃는다.

 

“네, 저도요.”

 

그리곤 앉아계시라는 듯 니콜라스가 늘 앉는 자리를 손바닥으로 가리킨다. 같은 뜻이 아니라고 해도, 그 입에서 나온 좋다는 말이 좋았다. 상기된 얼굴로 남자가 샷을 뽑는 모습을 바라봤다. 일이 손에 익은 듯 착착, 빠르게 행동한다. 손바닥만 한 유리컵에 커피와 우유를 넣고, 피스타치오 크림을 올리고, 우유거품을 올렸다. 마지막으로 작은 통에서 다진 피스타치오를 수저로 정성스럽게 올렸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본다. 저 통에 사장님을 담아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오렌지브라운색의 곱실곱실 한 머리카락. 오늘은 안경을 쓴 얼굴. 목빗근. 죽 뻗어 있을 쇄골 뼈와 그 모양새 그대로 주름진 셔츠. 팔꿈치까지 접어 올린 소매 아래로 드러난 뾰족한 팔꿈치, 팔목까지 이어지는 기다란 팔. 손목의 둥근 뼈. 가까이 다가온 손등…….

 

"어..."

"맛있게 드세요."

"감, 감사합니다."

"저도요."

 

기대 어린 눈동자가 니콜라스를 내려다본다. 남자의 얼굴을 흘깃대면서 커피를 한 모금 넘겼다. 우유거품, 녹진한 크림, 짙은 커피를 한입에. 맛있어요. 웃으며 말하자 웃는 얼굴의 남자가 윗입술을 톡톡 쳤다. 아.... 허둥지둥 엄지로 입가를 쓸자 다시 미소 지었다. 입동굴이 보인다. 앞치마의 주머니에서 냅킨을 꺼내면서 통통하게 부풀어 오른 마들렌을 함께 내밀었다. 이것도 선물이에요.

 

"여행은, 언제까지예요?"

"목요일요……."

"목요일."

 

얼마 안 남았네요. 아쉽다. 당장 내일모레였다. 니콜라스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작 여기에, 이런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을 텐데. 남자는 이것저것 물었다. 맛있는 거 드셨어요? 어떤 거? 어디 다녀왔어요? 둘은 번역기와 단어사전을 이용해 가며 대화를 나눴다. 뜻만 통하면 그만이지. 남자는 니콜라스의 한국어가 대단하다고 내내 감탄했다.

 

"오늘은 뭐 하세요?"

"아무것도요."

 

아랫입술을 잠깐 깨문 남자가 니콜라스와 눈을 마주쳤다.

 

"그럼 저랑 저녁 드실래요?"

"저요?"

"네. 괜찮으시면요."

 

남자가 긴 다리를 한 번 바꿔 꼬았다. 니콜라스는 컵을 만지작대던 손을 떼고 주먹을 꽉 쥐었다.

 

"정말 좋아요."

"다행이다."

 

남자는 안경을 한 번 치켜올리고서 말을 이었다. 저녁에 7시에 닫아요. 네. 여기 호텔이라 했죠, A호텔....

 

"네."

"7시 반까지 제가 1층으로 갈게요."

"7시 30분."

"맞아요."

 

메모장에 숫자를 적어가며 서로 확인한다. 우리 오늘 고기 먹어요. 니콜라스는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고기, 좋아요. 네. 좋아요. 둘이 얼굴을 마주하고 흐흐 웃는 사이 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빠르게 일어난 남자가 뒤를 돌았다. 주문을 받고 플라스틱 컵에 얼음을 담는 남자를 보면서, 까만 휴대폰 화면에 얼굴을 한 번 비추어봤다. 바로 남은 음료를 입에 털어 넣으며 오늘따라 맛있고 유난히 기억에 남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주섬주섬 일어서 컵을 갖다 주자 샷이 내려오는 걸 기다리던 남자가 습관처럼 웃었다. 다 드셨어요? 잘 먹었습니다. 니콜라스의 대답에 눈을 곡선으로 만든다.

 

"좀 있다 봐요."

"응, 좀 있다가요."

 

안녕. 손을 살짝 흔들어 보이고는 얼른 밖으로 나왔다. 분명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래 있었음에도 얼굴에 열이 올랐다. 바깥에 세워진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목에 걸어둔 헤드셋을 썼다.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가볍게 걸었다. 날씨까지 완벽했다.

 

 

 

호텔로 돌아온 니콜라스는 샤워부터 했다. 뜨거운 물에 개운하게 씻고서 헤어브러시로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침대에 흩뿌려놓은 옷들을 골랐다. 오늘 오전에 입었던 건 패스, 사장님은 무슨 옷을 입을까. 최대한 시밀러 룩처럼 보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약간 커플처럼. 거기까지 생각하고 입가를 가렸다. 흰 셔츠를 그대로 입고 나올까? 섹시한데. 말아 넣었던 입술을 떼면서 회색의 여름 니트를 골랐다. 저녁 날씨면 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고, 까만 바지에, 목걸이도 얇은 걸로 하나. 기껏 씻어놓고 비니를 들었다가 놨다가, 안경도 썼다가 벗었다가 반복하던 니콜라스는 피어싱도 얌전한 걸로 바꿔 꼈다. 컨디션이 좋아야 하니 침대에 누웠다. 알람을 맞춰놓고서 한숨 자고 일어나기로 한다.

 

 

 

 

 

 

 

 

 

 

 

 

 

 

 

 

저녁 여섯 시부터 일어나 음악을 크게 틀고, 머리를 만지고, 조금 부어오른 얼굴을 주무르고, 턱과 입 주변을 한 번 살피고, 양치를 하고, 옷을 잘 입었다. 휴대폰 충전도 확인, 지갑도 확인. 시간을 다시 확인한다. 6시 28분. 분명 아까 전에 27분이었는데, 한 시간이나 남았다. 시간이 정말 안 갔다. 1분이 꼭 세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남자의 나이도, 이름도 모른다. 휴대폰번호는커녕 인스타도 메신저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러다 바람맞으면 어떡하지? 솔직한 심정으로는 남자가 열두 시에 온다고 해도 기다리겠지만. 그리고 어쩐지 늦을 리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늦어도 분명 타당한 이유가 있을 거라 믿었다. 그냥 그런 기분.

 

엇갈리지 않기 위해서라는 훌륭한 이유를 세워 니콜라스는 일곱 시부터 로비의 소파에 앉았다. 입구 쪽의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마다 고개를 들었다가 실망했다. 시간은 아까보다도 느리게 갔다. 7시 20분이 막 되었을 때 니콜라스는 그제야 웃을 수 있었다. 까만 슬랙스에 흰 셔츠 단추를 두 개 푼, 팔꿈치까지 소매 단을 걷어 올린. 마른 허리, 너른 어깨. 니콜라스를 곧게 보며 큰 보폭으로 걸어온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일찍 나와 있었네요?"

"어……."

"제가 기다리게 했어요?"

"아뇨."

 

오늘 마감 빨리 하고 왔는데, 호텔까지 시간이 좀 걸리네요. 웃은 남자가 가게는 여기서부터 좀 걸어야 하는데 괜찮겠냐고 물었다. 그럼요. 남자의 옆에 나란히 서서 함께 오래 걸을 수 있다면 더 좋다.

 

 

 

 

해가 막 내리기 시작한 눅눅한 저녁의 공기가 몸을 감쌌다. 대로변을 걸으면서, 빠르게 지나가는 차 옆으로, 거리의 사람들 사이를 느긋하게 걷는다. 혼자가 아니었다. 처음 온 도시에서 익숙하고 낯선 거리를 얼굴만 아는 남자와 걷는 게 새삼스럽고 두근거렸다. 새로 친구를 사귄 게 한두 번도 아닌데 뭔가 특별했다. 손등이 스칠 만큼 가까이 붙어 서서 눈높이가 살짝 높은 남자가 이런저런 말을 천천히 했다. 서울은 처음이세요? 한국말을 잘하시네요. 배우신 건가요? 서울 처음이에요. 한국인 친구가 있어요. 저 이름 니콜라스, 대만 이름은 왕이샹. 니콜이라고 불러도 돼요.

 

"니콜라스."

 

니콜.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치고 웃는 얼굴이, 이르게 켜진 흰 빛 가로등 아래의 그 얼굴이, 붉고 푸른 하늘의 노을을 뒤로한 동그랗고 말간 얼굴이 한낮의 태양보다 맹렬했다. 현기증이 일었다. 이름이 뭐예요? 니콜라스가 물었다.

 

"변의주, 요."

"변. 의. 주."

 

혀끝이 앞니를 한 번 치고, 입꼬리가 좌우로 당겨지고, 동그랗게 입술이 모아지는. 단맛이 나는 이름이었다.

 

"변의주... 주주."

 

니콜라스는 그 이름을 삼켰다.

 

 

 

변의주가 안내한 가게는 모던하고 깔끔했다. 니콜라스가 경험했던 드럼통 위의 숯불이나, 커다란 돌판 같은 것과는 또 달랐다. 직원이 서서 고기를 구워주는 건 무척 편했다. 초벌 된 고기들이 치익 소리를 내며 구워지는 동안 니콜라스의 맞은편에서 긴 무릎을 접어 앉은 남자가 이것저것 신경 써 주었다. 이거, 먹어봤어요? 매운 거 괜찮아요? 양파는 먹어요? 니콜라스는 채소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뭐에 홀려 고개를 끄덕였다. 네네 좋아요. 매운 거 좋아요. 다행이다. 상추 위 쌈무를 한 장 얹고, 파절이에 쌈장, 고기를 두 점 넣은 변의주가 상추를 잘 오므렸다.

 

"쌈 알아요? 아 한국친구 있다고 했지."

"걔 미국 살아요. 이런 거 잘 모를걸요."

"아 정말요?"

 

물론 친구네 집 정원에서 삼겹살 파티를 했던 아름다운 기억을 잃어버린 건 아니다. 한인마트에서 준비한 삼겹살이라며, 참기름에 마늘까지 익혀먹었었다. 하지만 의주 씨랑은 처음이니까 한국의 니콜라스는 삼겹살이 처음인 걸로 정했다. 그리고 직원이 구워주는 삼겹살도 처음이니까 딱히 틀린 말도 아니다. 동그란 쌈을 쥐고 팔을 쭉 뻗은 변의주가 방긋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하세요.

 

"한입에."

 

아, 하고 입을 벌린 니콜라스의 입안에 상추쌈을 쏙 넣어주면서 웃었다. 그걸 오물오물 씹으며 얼굴이 빨개지는 니콜라스를 보며, 변의주는 뒤늦게 무슨 짓을 한 건지 자각했다. 둘은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눈만 마주치면 웃다가, 열심히 고기를 씹어 삼켰다.

 

 

 

카운터에서 카드를 내미는 니콜라스에게 계산이 되었다는 말이 돌아왔다. 변의주가 옆에서 어색하게 웃었다. 이거도 선물이에요?

 

"네. 선물."

"제가 좋아서요?"

"네. 니콜 좋아서요."

 

우리 이제 차 한 잔 할까요? 아니면 술? 대답을 기다리는 변의주는 자꾸만 팔꿈치 위로 셔츠를 걷어 올렸다. 니콜라스는 그 손짓을 계속 바라본다. 저 마른 팔이 목에 감기면 기분이 어떨까…….

 

"니콜?"

"아, 주스요."

 

술은 거의 못해 음료가 좋다는 말에 변의주가 동의했다. 날이 좋은데 밖에 앉을까요? 호수가 보이는 근처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평화로운 작은 공원은 사람들이 저녁 운동을 하거나, 데이트하는 커플 친구들이 보였다.

긴 다리를 꼬아 앉은 변의주와 그 근처에 발을 내려놓은 니콜라스. 둘은 컵 표면을 매만지며 이야기를 나눴다. 어쩌다 한국에 온 건지, 의주는 언제부터 카페를 했는지, 대만에 와 본 적이 있는지, 커피를 좋아하는지, 나이는 몇 살인지, 휴대폰 번호는, SNS는 그런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 신변잡기가 이어졌다. 번호와 아이디를 교환하고 서로의 이름을 저장한다.

 

“우리 정말 잘 맞는 것 같아요.”

 

니콜라스의 말에 변의주가 뺨을 둥글게 올린 채 입을 뗐다. 니콜 생일은 언제예요?

 

"저 이제 금방이에요. 7월 9일."

"어……."

 

나는 9월 7일인데. 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참을 마주 봤다. 거짓말……. 홀린 듯 멍한 눈을 한 니콜라스의 말에 변의주는 아니이, 진짜 아. 말꼬리를 늘이며 지갑을 꺼내 신분증까지 보여줬다. 숫자를 확인한 니콜라스는 멍한 얼굴로 중얼댔다.

 

"운명 같다……."

 

변의주는 그런가? 그럴 수도요. 대답했다. 운명이 있다 생각한 적은 없으나,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고백했다.

 

"내일은 뭐해요?"

"내일?"

 

음, 손바닥을 펼치고 손가락을 하나 접으며 말했다. 아침에 주주네 카페에 가요.

 

"네, 그리고?"

"쇼핑몰에 갈 것 같아요."

 

가족들 선물을 사야 해요. 사실 엄마랑 누나, 백화점 좋아해요.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서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키득대며 웃던 변의주가 조금 침울한 목소리를 낸다.

 

"이제 우리 못 보겠네요……."

"볼 수 있어요. 곧."

 

니콜라스의 버석한 손바닥 안에 가느다란 뼈대의 손등이 자리 잡았다. 손톱 근처 거스러미를 만지던 변의주가 닿는 체온에 행동을 멈추다 남은 손 하나로 니콜라스의 손가락을 쓸어 만진다. 눈이 마주쳤다. 언젠가 궁금했던 눈동자의 색은 여전히 가늠할 수 없다. 오묘한 색의 어두움이다. 밝기도 캄캄하기도 빛나기도 고독하기도 하다.

 

"니콜 조금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되겠죠."

 

니콜라스는 이마에 잔주름을 세우고 눈썹 끝을 떨어트렸다. 곤란한 듯 웃는 얼굴에 변의주가 어색하게 미안하다 했다. 괜한 말을 했어요. 미안.

 

"안 미안해요."

"저 좀 웃기죠……."

"하나도 안 웃겨요. 무슨 마음인지 나도 알아요."

 

정말 약속할게요. 조금만 있다가, 금방 다시 올게요. 엄청 빨리. asap. 니콜라스가 말을 하는 동안 변의주가 손가락 사이마다 자신의 손가락을 걸어 밀어 넣었다. 겹쳐진 손의 열기가 후끈하다. 차가웠던 철제테이블이 따끈하게 익었으나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엄지손가락으로 상대의 손등을 끊임없이 만진다.

 

"언제 가요?"

"목요일……."

"내 기억이 맞네. 점심 비행기?"

"응."

"공항 데려다 줄게요."

"정말요?"

"싫으면 안 갈게요."

"너무 좋아요."

 

그런데 슬프다, 첫날부터 말 걸어볼걸……. 그 말에 변의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간지럽히면서, 말도 없이, 고기냄새 풍기면서, 이게 뭐 하는 건가 싶고, 웃기고, 아쉽고, 서운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내일 선물 사고, 카페로 와요. 저녁 먹어요."

"카페로? 저녁에?"

"네."

"아침에도 가요."

"알았어요. 아침에도 오세요."

 

 

 

 

 

 

 

 

 

 

 

 

 

 

 

 

 

팅팅 부은 얼굴로 주주야 저 왔어요. 굿모닝, 하고 인사한 니콜라스는 똑같은 자리에 앉아서 똑같은 표정으로 일하는 변의주를 보다 일어섰다.

샌드위치로 점심을 대충 때우고 침울한 마음을 애써 헤집어 띄워놓는다. 대만에 도착하자마자 준비해야 할 게 많았다. 비자를 알아봐야 했고, 집도 알아봐야 한다. 번아웃이 계속된다면 어차피 작업도 늦어질 테니 이 기회에 언어를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다. 슬퍼할 시간이 없었다. 큼직한 짐들을 캐리어에 욱여넣은 니콜라스는 대충 정리된 호텔 룸을 보며 괜히 침대 위를 쓸어 만지다 일어섰다.

 

 

 

해가지지 않은 거리, 블라인드가 내려간 카페는 클로즈 푯말이 걸려있었다. 니콜라스는 유리문을 열고 발을 디뎠다. 아직까지 시원한 내부는 아침과 달리 조금 어수선했다. 뒤집혀 올라가 있는 의자, 서비스 테이블 위에서 몸을 말리는 식기들, 조명이 꺼진 쇼케이스.

 

"좀 앉아 있어요."

 

행주로 기기들을 닦아내는 변의주를 보며 늘 앉는 자리에 앉았다. 까만색 앞치마를 벗는 마른 몸을 구경한다. 니콜라스가 찾아오는 시간과는 느낌이 다른 음악이 틀어져있었다. 익숙한 언어였다. 유명한 대만 드라마의 ost였다. 니콜라스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이 사람을 이렇게 만났는데, 나는 왜 가야 해……. 호텔 방에 가득한 면세봉투 따위를 머릿속에서 지우며 아쉬움에 몸을 떨었다. 너무 귀엽고, 내 인생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

 

청소를 마쳤는지 앞치마를 벗고 줄무늬 셔츠의 단추를 한 개 더 풀면서 다가온다. 맞은편에 앉은 변의주가 내일의 일정을 말했다. 아침 여덟 시까지 호텔로 갈게요. 짐이 많아요? 혼자 들 수 있어요? 니콜라스는 당연히 혼자 들 수 있었지만 웃었다. 변의주가 무슨 뜻으로 알아들었는지 그럼 호텔로 올라가겠다고 했다.

 

시원한 카페 안, 진지한 얼굴의 변의주가 휴대폰 화면을 슥슥 내렸다. 반드시 뭔가를 먹여야겠다는 듯 다짐한 듯싶었다. 여름 되면 입맛이 없어 한국에서도 종종 끼니를 건넜다는 말에 안 그래도 큰 눈을 엄청 크게 뜨고 니콜라스를 몇 초간이나 응시했었다. 우리 그럼 오늘 안 먹어본 걸 먹을까요, 아니면 또 가고 싶은 곳 있어요?

 

"저는 의주 먹고 싶은 거 좋아요."

"그럼 우리 배달음식 먹을까요?"

 

배달시켜본 적 있어요? 치킨, 떡볶이 이런 거. 니콜라스는 없다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진짜였다. 그러면, 우리 배달할까요? 고기 좋아한댔으니까 육회랑……. 변의주의 말에 네네 착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니콜라스는 자꾸만 입이 바싹 말라 계속해서 입술을 혀로 쓸었다. 저기 주주,

 

"그럼 내 방에서 먹을래요?"

"응?"

"제 방. 제가 청소하지는 않았지만. 깨끗해요."

 

짐이 좀 있지만요. 니콜라스는 고개를 조금 숙이고 눈을 굴려 변의주의 얼굴을 살폈다. 침묵이 흘렀다. 아……. 잠깐 머뭇대던 변의주가 좋아요. 하고 휴대폰 화면을 껐다.

 

출발하면서 음식을 시킨 덕분에, 룸으로 바로 올라가지 않고 로비에서 잠시 기다렸다가 받아간 음식은 결국 식어서야 먹을 수 있었다. 팅팅 불은 떡볶이도, 다 식은 치킨도 눅눅했지만 한 달 동안 먹은 음식 중 가장 좋았다.

일주일 내내 쳐다보기만 했던 마른 팔이 니콜라스의 목에 둘러졌기 때문에, 팔꿈치 근처의 상처자국 위를 변의주가 커피를 내려주던 손가락으로 살살 쓰다듬었기 때문에, 밥을 먹고 난 뒤에도 변의주가 품 안에 있었기 때문에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마지막 밤이었다.

 

 

 

 

 

 

 

 

 

 

 

 

 

 

 

 

 

뒤척이다 깬 변의주의 조금이라도 자라는 기운 빠진 목소리에 알았어 알았어, 대답해 놓고 하염없이 잠든 얼굴을 쳐다봤다. 동그랗게 생겼다. 감은 눈에 코와 눈매는 일자인데, 뾰족하지만 역시 동그랗다. 말랐고, 따듯하고, 좋은 냄새가 난다. 니콜라스의 주주는 입맞춤을 닮았고, 발음보다도 단맛이 난다. 초콜릿 같았다. 잠결에 달라붙어 니콜라스를 안는 몸이 녹아 피부 위로 찰싹 붙는 것 같았다. 이대로 한 몸인 채로 대만에 데려가면 좋을 텐데. 그렇게 새벽이 지나 암막커튼 틈사이로 이른 햇빛이 비춰왔다. 묵직한 이불 아래 뾰족한 몸이 팔과 다리에 얽혀있는 황홀한 새벽. 마지막 날이 밝았다.

 

 

 

눈을 느리게 끔벅이며 잠에서 깬 변의주는 니콜라스의 얼굴을 보고 픽 웃었다. 잘 잤어요? 응. 니콜라스의 거짓말을 하는 얼굴을 한 번 꼬집고서 몸을 일으켰다. 사방으로 도망간 옷들을 앓는 소리와 함께 주워 입고 들뜬 머리를 손으로 빗어 넘기고서, 단정하게 넣어 입었던 셔츠는 대충 단추만 잠갔다. 니콜. 차 가지고,

 

"금방 데리러 올게요."

"응."

"나오지 말고."

 

말을 듣지 않고 문을 열기 전, 몇 번이고 입술을 가져다 댄다. 변의주는 톡톡 두드리는 대로 열어주었다. 아마도 마지막 키스.

 

 

두꺼운 문 너머 얇은 남자가 있겠지. 아쉽지만 발을 돌려 엉망인 방을 둘러봤다. 캐리어가 두 개, 커다란 가방 하나. 올 때는 비어있는 캐리어 하나였는데. 새로 장만한 오렌지색 캐리어를 빙글빙글 돌리며 뭐, 마음은 둘이 되었으니 딱히 상관없나 여긴다.

 

콘센트에서 충전기를 잘 뺐는지 확인하고, 샀던 선물들을 가방에 잘 넣고. 옷장을 한 번, 욕실을 또 한 번 둘러본다. 휴대폰, 헤드폰, 지갑, 여권……. 또. 그러면서도 변의주가 일어났던 침대의 이불은 건드리지 않았다. 구겨진 이불만 봐도 웃음이 절로 났다. 좋은 냄새가 나는 것 같았고, 자꾸 웃음이 났고, 역시 슬펐다.

 

 

 

 

 

 

 

 

 

 

 

 

 

 

 

 

 

***

 

 

 

 

 

 

 

 

 

 

 

 

 

 

 

 

변의주는 찌뿌둥한 몸으로 가게에 개인 사정으로 휴무라는 말을 붙여두고서 집으로 향했다. 말이라도, 손이라도, 입이라도 맞춰 볼 수 있을까 생각하던 사람을 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다시는 못 볼 수도 있다고 못 믿는다고 안아보지 못하는 게 더 손해일 것 같았다. 뭐, 일 년 정도는 기다릴 수 있지. 가볍게 생각하자. 마음 말고 상황을. 뜨거운 물로 씻고 나온 변의주는 편한 옷을 챙겨 입고 차키를 들고, 향수를 가볍게 뿌렸다. 니콜라스에게 출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고서 핸들을 돌렸다.

 

캐리어를 하나씩 챙기고서 마지막 방을 같이 점검했다. 니콜 저건 버리는 거? 저건? 여러 번 확인한 뒤 만약 잃어버린 게 있으면 변의주가 갖다 주기로 마무리 짓고 겨우 발을 돌릴 수 있었다. 둘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니콜라스는 서있는 변의주 어깨에 이마를 폭 기댔다.

 

"주주야."

"응."

"향수 뿌렸어요?"

"응."

 

그렇구나. 그럼 이것도 주주 냄새. 고개를 틀어 뼈가 불거진 뒷목에 살짝 입을 맞춘다. 간지러워 움츠러들었지만 떼어내지는 않았다.

 

 

 

"좋아하는 음악 있으면 틀어도 돼요."

 

트렁크를 닫고 자리에 오른 의주가 목적지를 검색하며 말했다. 괜찮아요. 이대로. 니콜라스는 신호가 잡힐 때마다 의주에게 사진을 찍어도 되겠느냐 물었다. 진작 좀 찍을 걸 그랬어요. 운전하는 변의주를 따로 또 같이 찍은 니콜라스가 아쉬워했다. 다음에 많이 찍어요. 변의주 말에 순순히 대답하면서 공항에 들어갈 때까지 몇 번쯤 카메라를 켰다.

공항으로 들어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익숙하고 낯선 언어와 건조한 실내, 소란스러운 사람들 사이에서 둘만이 침묵했다. 짐을 보내고, 체크인을 하고서, 기내에 들고 갈 작은 크로스백 하나만 두른 채로 서성였다.

 

"얼른 들어가요."

"잠깐만... 연락 안 될 수도 있잖아."

 

한 번만 해볼게요……. 깔아 둔 메신저별로 주주 두 글자로 말을 걸어보고, 변의주 휴대폰을 애절하게 바라본다. 변의주는 니콜라스에게 'ㅠㅠ' 답장을 보냈다. 서로 화면을 보여주며 잘 오네요. 응, 잘 되네. 그러네……. 머리를 맞대고 키득이다가 한숨을 쉬다가 두 팔로 변의주를 꽉 껴안았다. 등을 두어 번 두드려준 변의주가 어깨에 이마를 갖다 대고 숨을 쉬자 키스하고 싶다고 속삭여왔다. 대답 대신에 니콜라스의 허리를 다시 고쳐 안았다.

 

다시 안아주는 척, 실수인 척 목에 입술을 파묻었던 변의주는 정말로 니콜라스를 보냈다. 잘 도착했다는 연락, 막 내려 캐리어를 기다린다는 메시지, 누나가 데리러 왔다는 말, 저녁식사 사진, 잠들기 전 페이스타임까지 쭉쭉 이어져 당일에는 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연애할 때 매일 보는 타입도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변의주는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왔던 남자의 날카로운 얼굴이 하루 만에 그리워져 낯설었다. 한 시간의 시차는 체감할 일이 없었지만, 변의주의 이른 취침시간에 니콜라스가 대신 아쉬워하기는 했다.

 

저 사실 아침에 약해요.

 

가게를 열고 오픈 후 오전 손님들을 한바탕 치르고 나면 느지막이 오는 연락들. 여독은 괜찮은지, 몸살은 나지 않았는지 둘은 서로의 언어를 번역기에 돌려가며 열심이었다. 일이 바쁜 시간에는 딱히 연락이 되지 않아도 괜찮았다. 하루 이틀이 지나 연락이 점점 뜸해져도 어쩐지 서운한 마음을 잘 다듬었다.

 

 

 

변의주는 그럴수록 청소를 더 열심히 했고, 카페들의 유행이나, 요새 입소문을 타는 디저트, 새로 나오는 기계들까지 꼼꼼히 체크했다. 여름의 케이크와 디저트 라인업을 구상하면서 이게 바로 롱디? 하고 허허 웃었다. 팔자에도 없는 연애를, 하다 하다 롱디로 하네. 아니지 이 경우에는 팔자에 있다고 해야 하나...

 

홀이 텅 비고, 시간이 여유로울 때마다 인천에서 대만행 티켓을 검색했다. 유튜브에 대만여행 브이로그를 보는 건 진작부터 습관이 됐다. 이제 알고리즘은 뭐만 하면 대만이었다. 잠깐 이틀이라도, 다녀올까. 얼굴만 잠깐. 바쁘다고 하면 못 봐도, 그래도 뭐, 갔다 오는 게 마음에 위로가 되지 않나.

 

매일 이어지는 영상통화에 애가 말랐다. 이런 게 처음이라서, 이런 사랑의 시작도, 이런 사람도 처음이라서 변의주는 도저히 진정을 할 수가 없었다. 주주 보고 싶어요, 얼른 갈게. 큰 손이 얼굴을 벅벅 쓸어내릴 때면 마음이 같이 쓸려가는 기분이었다.

 

 

 

대만은 별자리가 유명하다며 니콜라스는 깊은 새벽 본인이 잠들기 전마다 꼬박꼬박 메시지를 보내왔다. 어제는 3위였고 오늘은 1위였다. 처녀자리. 기쁜 일이 생깁니다. 보고 싶은 마음을 전해 보세요! 행운의 아이템, 행운의 숫자. 그리고 변의주는 그게 변의주만을 위한 가짜 점성술사의 기도라는 걸 알았다. 세상에 열흘 동안 1,2,3등만 하는 별자리가 어디 있어. 하지만 엉망진창의 점성술사가 귀여웠으니까 신기하다. 나 오늘도 운이 좋네 대답하고는 몰래 귀여워하기만 했다.

 

어제 새벽 잠들기 전 당신의 별자리 운세가 오늘도 1위라는 걸 남겨놓고 오전 열한 시까지 연락이 없는 야행성 남자친구. 오늘은 바쁘다고 했는데, 그래 바쁠 수도 있지. 평소보다 늦은 시간까지 연락 한 통 없는 니콜라스를 떠올리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늘 점심은 뭘 먹나. 니콜은 언제 일어나 뭘 먹으려나. 오늘은 일주일 중 가장 더워요! 알람이 오는 휴대폰을 한 번 본다. 광합성하라고 내놓았던 식물이 햇빛에 타지 않을지 고민을 하며 대만의 날씨를 한 번 살피고 가게 밖을 보고 있을 때였다.

 

 

 

‘요새 애들은 다 우리 니콜처럼 입나……. ‘

 

저 멀리 걸어오는 남자가, 꼭 저가 아는 사람 같다 여기자마자 이 세상이 슬로모션이라도 걸린 것처럼 갑자기 느리게 움직였다. 틀어놓은 상견니의 OST도 조용하다. 가게 바깥의 거울 앞에서 사진을 찍던 멋쟁이 손님을 처음 마주한 그때처럼 온 세상이 고요하다. 아스팔트 위를 마찰하는 캐리어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다 이윽고 멈추었다.

 

눈이 마주친다. 니콜 같은 게 아니라 니콜이었다. 유리문을 앞에 둔 남자가 활짝 웃으면서 변의주가 뽀득뽀득 닦아둔 유리문을 두드리고, 뭐에 홀린 듯 다가간 변의주를 향해 더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세 걸음쯤 앞에서 호오 입술을 동그랗게 말아 입김을 불곤 그 위에 손끝으로 하트를 그려냈다.

 

"뭐야……."

 

주주, 더. 입모양으로 변의주를 부르는 니콜라스의 손짓에 유리문에 가까이 다가가자 사라진 입김 옆으로 니콜라스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열흘 만에 보는 얼굴은 여전히 매끈하고, 희고, 예쁘고, 귀엽고, 야하다. 변의주를 기다리던 눈을 뜨고 있던 니콜라스의 두 눈이 감겼을 때, 변의주는 차가운 유리문 위 손바닥을 맞대고 입술을 올렸다. 온도가 옮는 미지근한 입맞춤으로 당장의 사랑을 맹세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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