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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절대─━ 죽지 않아!

 


​​​​​소재 주의 

유혈 주의

 

아지랑이가 피는 문제적 7월. 매미의 시끄러운 울음 소리와 쨍한 햇빛에 인상을 잔뜩 찡그린 니콜라스는 저 너머로 동그란 머리통이 걸어오는 걸 발견한다. 눈 감고 봐도 의주인 것 같은 머리에 잔뜩 따분해하던 니콜라스의 표정이 순간 바뀐다. 평일의 고요한 정류장에서 멀리 다가오는 걸 이리저리 살피며 관찰한다. 파란 넥타이랑 각이 잔뜩 잡힌 정장 마이, 단정하게 매만진 머리…평소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

면접 보고 오나 보네. 주주, 너 벌써 그런 나이가 됐어

듣지도 못할 의주에게 멀리서 말을 건넬 때 저릿하게 감각이 반응한다. 또네. 팔뚝까지 올라 붙어 옮은 으스스함은 무시할 수 없다. 반응 올 때마다 소름끼친단 말이야. 어떻게 된 게 감상 시간이 없지? 니콜라스가 혀를 쯧쯧 차고는 손마디를 뚝뚝 꺾는다. 의주 앞으로 가야 해. 빠른 행동은 곧 생명. 니콜라스가 하얀 운동화의 끈을 묶고 조용히 발을 두세 번 찬다. 순전히 감각에 의지해 행동하는 거라 이런 신호들은 절대 무시하면 안 된다. 완전한 전속력. 달린다. 의주에게로. 계속, 계속, 계속, 계속...... 

 

끼이익, 쾅! 자동차의 뜨거운 바람이 차갑게 식는다. 니콜라스에게만 들릴 굉음이 쨍하게 퍼지고는 몸이 붕 하고 올라간다. 의주와 마주친 눈. 괜찮다는 의미로 입꼬리를 잔뜩 끌어올린 얼굴. 의주의 눈동자에 선명하게 비친 초록불. 주주는 눈이 진짜 예뻐. 방금 의주 대신 차체에 치여 떠오르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산뜻한 생각도 좀 해 주다 보면...

추락한다.

 

“죄송합니다. 브레이크가, 이게 갑자기 말을, 말, 말을 안 들어서. 안 다치셨어요?“

이번엔 아플까? 곧 다시 둔탁한 소리가 들릴 것 같을 때에 흰 소나타에서 운전자가 후다닥 내려 말을 더듬는다. 니콜라스도 더위를 먹은 건지 정상적인 사고 회로가 안 돌아가는 듯했다.

아마도 반동이 꽤 셌는데 말이지. 쿵! 여전히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니콜라스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멀쩡히 서서 안절부절 못하는 남자와 이미 차가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니콜라스의 표정이 상반됐다. 아플까? 하는 물음에 몸으로 체험하라는 【신】이시여. 니콜라스는 회색 콘크리트에 누워 실소를 터뜨렸다. 아니, 그것보단 정확히 니콜라스는 회색 콘크리트에 누워 쪼갰다. 긴장이 풀리면서 튀어나온 장난에 느껴지는 안도감이 절로 몸서리쳐질 정도로 싫다고 생각하면서 원하는 게 로미오와 줄리엣인지 아님 사랑과 영혼인지 빌어먹을 신에게 또 물었다.

 

교복 셔츠에 묻은 먼지를 터는 시늉을 하는 니콜라스의 시선에 의주의 손에 엉성하게 껴진 흰색 명함이 걸린다귀신 퇴치해 드립니다! -귀신에 관한 모든 것 아스팔트 사이로 자라난 풀은 의주의 운동화 아래에 짓밟힌다. 풀 짓밟히는 소리는 잘만 났는데, 니콜라스의 하얀 운동화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음은 없다. 소나타에 죽겠다시피 몸을 박아도, 차가운 아스팔트 도로에 작정하고 떨어져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근데 뭐, 괜찮아. 이게 내 치트키니까.

내가 의주를 구할 방법이니까.

 

 

여름은 절대─━ 죽지 않아!

 

 

니콜라스는 변의주를 처음 봤던 날을 확실히 기억한다. 한국의 고등학교로 전학 온 첫날에 얼굴보다 이름을 먼저 알게 됐으니까. 펜싱부, 변의주. 교문 앞 선생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곤란한 표정으로 현수막을 낑낑거리며 떼고 있었다

 

"이건 어떻게 해요?"

"몰라요. 부상이라잖아요. 다신 안 한다고 쐐기를 박고 나갔다는데 어떡해요. 다른 애들 키워야지." 

"현수막은 본인 줘야 할까?"

"미쳤어요? 그냥 알아서 잘 없애는 게 낫죠."

 

현수막을 없애니 마니, 유망주가 안쓰럽게 됐다느니. 다른 나라에서 전학 온 니콜라스에게도 무례하기 그지없는 말들이었다. 예전에 한국어 공부 하지 말걸 그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초반부터 그런 말들로 니콜라스는 이미 변의주의 편이 된 것 같다

그 시각 변의주는? 그럭저럭 아는 얼굴들에 어색하지도 않고 익숙하지도 않은 교실. 여기가 내 자리인지도 모르겠다. 창가 맨 뒷자리에 앉아 창틀에 머리를 기대면 귀가 먹먹하고 몸이 힘없이 축축 처졌다. 눈만 잠깐 감을까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전학생이 자기소개 중인 걸 알았다면 졸지는 않았을 텐데.

 

”본명은 왕이샹인데, 그냥 니콜라스라고 불러.”

 

들리는 낯선 목소리에 의주는 급하게 눈을 비비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나름의 예의는 갖췄으니까 급하게 다시 복기한다. 본명은 왕이샹인데 그냥 니콜라스라고 불러. 왕이샹? 왕대륙, 왕조위.... 대만 영화를 좋아하는 누나 덕분에 배우들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줄지어 상기되었다. 의주는 자기소개 중에 졸아 괜히 느껴지는 죄책감에 좀 미안했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하품을 하는 시늉을 해 안 미안해지긴 했지만

교탁에 정자세로 서있던 니콜라스가 하품을 하는 시늉을 한 손을 내리며 의주를 보고 웃었다. 눈에 만화같은 필터가 한 겹 씌워져 껍데기가 붙은 것 같은 기분. 처음 본 니콜라스의 웃음은 꼭 어릴 때 본 눈알 사탕으로 눈이 변한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밤 열두 시 디즈니 채널에 나오는 공주 변신 장면이 딱 이랬던 것 같은데. 처음 보는 보정 효과가 울렁거린다. 교실 전체가 녹아 흐르는 것 같은 환각. 그때 변의주는 어떻게 했더라. 그냥 나 쟤랑 안 맞을 것 같다라고 먼저 결론을 내려버렸던 것 같다.

 

니콜라스가 저 멀리 비행기에서부터 소문을 몰고 온 전학생이라면 변의주는 누구인가? 투명도 50%의 있는 듯 없는 듯한 힘든 거 티 안 내고 다정한 성정. 거기에 플러스 요인은 남들 말 잘 들어 주고 남들이 대놓고 싫어할 성격은 아닌 것. 딱 여기까지가 모두가 아는 변의주의 내부적 특징이었다.

스스로 피해망상 정도라고 인식한 내부적 결함이 약간의 문제이긴 했다만

변의주는 무릎 부상으로 수술과 재활을 지겨울 정도로 반복해댔다. 항상 외부의 결함이 내부로 이어지는 걸까. 다짐이 습관을 넘어 강박으로 바뀌어 갈 무렵은 엄하던 코치님마저 의주를 대단하다고 격려했었다. 변의주는 진심으로 계속 펜싱이 하고 싶었다.

의사는 기나긴 재활을 끝낸 의주에게 우선 수고했다는 말로 운을 띄웠다. 그래서 그 긴 말들의 초점은 모두 하나. 예전처럼은 못 돌아온다는 거였다. 그 말이 진짜였다는 걸 뼈저리게 깨닫기 전까지는 믿지 않았다.

스피드가 생명인 종목은 몇 초 만에 모든 승부가 결정된다. 여태껏 느껴왔지만 애써 회피해왔던 문제가 모조리 다 드러났다. 확실히 느려졌다. 조금만 자세를 취해도 무릎이 아렸다. 가빠지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을 때에서야 겨우 인정하게 됐다.

 펜싱칼이 의주의 손을 떠났다는 것을

 

 

1. 여름은

 

니콜라스와 변의주 사이 이상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계기는 단순하게도 니콜라스의 소개가 끝났을 때 담임이 교실을 둘러 보더니 의주와 눈이 마주친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의주, 네가 학교 소개 좀 해 줘."

 

설마설마 했는데. 운동부였던 사람한테 학교 소개를 부탁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지. 담임 선생님께서 진짜 너무하신 건데. 의주는 남들이 다 씹을 때 별 생각 안 했던 담임 선생님을 이젠 저도 원망했다. SOS 신호로 반장을 급하게 쳐다봤지만 반장은 빨간색 문제집에 코 박고 머리만 쥐뜯고 있었다. 학교 소개 같은 거 할 시간 없다는 거였다. 그냥 내가 걸린 거구나. 담임 옆에 서 있던 니콜라스가 한번 더 입꼬리를 올리더니 어깨를 들썩거린다. 왜 웃는 거야.

 

"언제 데리고 갈래? 아예 그냥 자리도 비었으니까 옆에 가서 앉아."

 

펜싱도 관둬서 할 짓 없어 보이는지 담임이 꾸역꾸역 의주에게 니콜라스를 몰아넣는 게 느껴졌다. 싫다고 해. 니콜라스가 담임 선생님에게 싫다고 대신 말해 주길 의주는 두 손 모아 빌었다. 굳이 변의주가 싫어할 이유가 없었는데도 왠지 이 상황이 부담스러웠다만 결국 점심시간에 학교를 소개시켜 주기로 했다. 니콜라스가 뚫어져라 보내는 눈빛에 그렇게나 이 학교에 대한 열정이 있는 건가 싶어서 외면하지 못했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말렸네. 니콜라스가 의주를 궁금해해서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거라고는 전혀 생각 안 했으니까 말이다.

 

수업을 오랜만에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잘만 갔다. 띵디딩딩. 4교시가 끝났음을 알리는 종은 선명하게 들려왔고 결국 거절하지 못한 변의주는 니콜라스를 데리고 학교 소개를 시켜 줘야만 했다. 솔직히 말해서 좀 부담스러웠다. 수업 시간에 잠깐 봤을 땐 샤프를 위에 올려 입술을 삐죽이던 그 의욕이라곤 하나 없이 다 죽어가던 안광이 차르르 빛나는 꼴에 변의주의 부담감은 더욱 가중되었고 급식도 마다한 채 학교 소개를 시켜달라 하는 것 또한 그랬다.

그래서 이리저리 쏘다니며 변의주는 니콜라스에게 열심히 설명해주려는 흉내라도 내야만 했다. 이건 뭐야? 저건 뭐야? 메아리처럼 귓가에 울려댔다. 당연히도 시원한 대답은 해줄 수 없었지만, 웅얼거리는 애매한 목소리에 그러려니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면 괜찮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변의주의 이제 다 본 것 같은데, 갈래? 하는 말에는 고개를 저었다. 살랑살랑 젓는 고개에 변의주는 슬며시 답답한 마음을 숨기며 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가기 싫어?

그리고 그 말에 그런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다면 묻지 않았을 것이었다.

 

“의주, 우리 운동부는 안 보지 않았어?”

 

그 말에 변의주는 아차. 순간 귀가 먹먹해졌다. 나름 자연스럽게 넘어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변의주에 대해 니콜라스가 아는 것은 없을 텐데도 이 말에 지레 찔리는 본인이 작아 보였다. 운동부를 그만 둔 이후 도망치듯 피해다닌 것은 모조리 변의주였으니까. 도르르 굴러가는 의주의 눈동자를 살핀 니콜라스가 느닷없이 목을 가다듬었다. 큼큼. 아아.

 

"나 왜 대만에서 떠났는지 맞혀 볼래?"

 

갑작스레 꺼낸 운동부 얘기에서 이어질 주제가 전혀 없는 본인의 전학 사유를 의주더러 맞혀 보라고 한다. 글쎄, 유학 온 거 아니야? 아닌데. 교환 학생이야? 그건 이미 끝났다며. 의주가 애써 추측한 결과를 말하자마자 하나하나 반박한다. 맞혀 보라고 했으면서 힌트도 안 주네. 공부 때문 아니면 부모님? 여기서 부모님께서 사업하셔? 의주가 마구잡이로 던진 마지막 답변이 정답이 됐다. 빙고. 그리고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대만은 엄청 아름답고 사람들도 다 친절한 나라거든. 솔직히 떠나기 싫었어. 한국 문화 좋아하긴 했지만 대만에서의 생활이 너무 나한테 잘 맞는 걸 아는데, 굳이 한국까지 오고 싶진 않았다랄까. 그런데 여기로 안 튀면 내가 죽는대."

"?"

 

의주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니콜라스가 폭소한다. 죽는다고? 방금 표정 뭐야? 지인짜 웃겼다. 같은 반 친구와 학교 투어 중 뜬금없고 갑작스러운 니콜라스의 자기 고백에 의주만 어안이 벙벙해진 상황. 멍하게 할 말을 잃은 것 같으니 니콜라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끼운다. 난 괜찮아, 뭐. 여전히 외관만 부잣집 도련님 같으면 된 거 아니겠어?

 

"사업엔 좋은 면만 있는 건 아니잖아.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고. 다만 나는 야반, 야반도주? 어쨌든 그거의 범위가 좀 넓은 거야. 별 생각은 없어."

 

니콜라스가 괜찮다고는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뭐라 말을 해야 될지 모르겠다. 생각도 안 하고 있던 말이라 그런지 나와야 할 말도 계속 헛돌았다. 위로를 해 줘야 하나. 근데 지금에서의 위로는 좀 늦은 거 아냐? 의주가 심연까지 파헤치며 깊이 말을 고르고 있는 사이에 니콜라스는 벌써 뒤돌아서 앞을 향한다. 이제 가자. 다음 수업 늦겠어.

 

"나도, 나도 뭐 하나 얘기해 줄까?"

 

지금 아니면 나도 말 못해. 그럼 일단 지르고나 보자는 마음가짐으로 앞으로 향하는 니콜라스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의주의 다급한 목소리에 니콜라스가 곤란한 표정으로 말한다. 근데, 의주 지금 시간이 없는데. 우리 들어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돌고 돌아오는 거절에도 불구했다. 변의주. 결심한 건 한 번에 끝낸다.

있지, 이번 시간만 나한테 줘. 나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생겼어.

 

 

변의주가 소매 끝을 잡으며 귀엽게 말한 건 (그냥 말한 거다.) 괜히 튕기던 니콜라스를 단번에 K.O 시켰다. 출결이 뭐가 문제겠어. 홀린 듯이 의주가 향하는 곳으로 니콜라스가 졸졸 따라갔다. 수업 시간 중이라 아무도 없이 한산한 복도를 피리 부는 사나이와 그것을 따르는 병아리마냥 지나가는 게 남들이 봤으면 진심 비웃을 만큼 좀 이상하긴 했다. 그리고 변의주가 이끈 곳이 운동부 뒤쪽 공터라는 게 지금 할 얘기가 어떤 의미가 될지 알 것 같아서 니콜라스가 침을 꼴깍 삼켰다

 

"운동부만 빼고 소개 시켜줘서 미안해. 솔직하게 말하면 운동부 오기 싫었거든. 나 펜싱부였어서."

 

변의주가 딸깍딸깍 핸드폰 위쪽 버튼만 꾹꾹 누르다가 입술도 계속 씹어주고 손가락 딱딱 소리도 몇 번 냈다가 겨우 꺼낸 말이었다. 니콜라스에게는 행동에서부터 보이는 망설임이 짠하게 느껴졌다.

 

"나 펜싱 되게 잘했는데, 알아? 유튜브 쳐도 많이 나와. 나중에 궁금하면 펜싱 유망주 변의주 이렇게 쳐 봐. 근데 예상했다시피 지금은 못해. 무릎 쪽이 많이 안 좋거든. 내가 하는 종목은 엄청 빠르고 유연해야 하는데 나는 느리고 뻣뻣해졌으니까 당연한 거겠지? 솔직히... 안 관두고 싶었어. 그걸 안 할 생각을 한 번도 안 해 봤고, 인생에서 없을 생각도 안 해 봤어."

 

흔한 말뿐인 달래기보다는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 더 위로를 느낀다는 걸 본 적이 있다. 변의주는 무언가에 대한 결핍을 얘기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인 걸 너무나 잘 안다. 이런 거 몇 번 말해 봤자 돌아오는 건 힘내, 그래도 할 수 있어 등등의 본인과는 별로 상관없다는 어투였을 게 뻔하니까. 아무에게도 말 안 했는데, 니콜라스가 먼저 결핍을 드러냄에 지금이라는 걸 느꼈다. 지금이 조금이라도 말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 것 같다고.

 

"그래서 지금은 뭐 해야 될지 모르겠어. 어딜 가도 적응이 안 되고 도망가고 싶은 기분. 나 이런 적 한 번도 없었거든? 나는 노력하는 걸 제일 잘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이젠 뭘 노력해야 하는지 감도 안 와서."

 

펜싱에 대한 진솔한 얘기를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에게 하는 것은 엄마 말고는 없었어서 그래서 이런 대화는 보통 자세에 대한 피드백 정도로 끝났는데 따라 이런 대답이 흘러나온 걸 들은 것도 처음이었다.

 

"의주 되게 멋있네? 난 진짜 도망쳤는데. 의주는 도망쳤다기보다는... 꽉 잡고 있다가 놔준 거잖아."

 

그러고는 습관적으로 씹고 있는 의주의 입술을 톡 하고 쳤다. 잘 놔준 것 같아. 이렇게 예쁘게 생겼는데 투구 안에 가려지면 내가 좀 서운할 것 같으니까. 그 말을 하는 니콜라스의 얼굴 뒤로 햇빛이 쨍하게 비쳤다. 이렇게 벌렁거리고 울렁거리는 기분은 세트 포인트 낼 때 빼고는 없었는데.

 

"오늘 약간 고백 데이 뭐 그런 걸로 지정할까? 우리 오늘 진짜 친해진 것 같다."

 

본지 몇 시간도 안 된 서로에게 온갖 말들을 다 하며 고백 릴레이를 하던 게 하고 싶었던 말을 다 쏟아내니까 좀 웃겼다. 야, 고백 데이가 뭐야. 헉, 의주. 고백 데이가 뭐가 어때서 그래? 지금 고백 데이에 고백하는 수많은 중고등학생들 무시하는 거지. 니콜라스의 고작 그런 말들에도 너무 웃겼다. 안심돼서 그런가

주주라고 불러도 돼? 주주가 뭔데? 너 애칭. 무슨 애칭을 정해. 우리 오늘 베스트 프렌드 된 거 아니었어? 베프 된 기념으로 할 수도 있는 거지. 와, 베스트 프렌드래. 언제적이야. 와, 변의주.... 알겠어, 알겠어. 주주 해.

 

그러니까 니콜라스가 그날을 최고의 땡땡이였다고 기억하는 것도 그런 이유가 있었던 거다. 서로의 진솔한 얘기를 터놓아버린 처음 보는 학교 친구. 그리고 결국은 나중에 걔를 좋아하게 된 것도, 모두 다 이 날 덕분이라고.

 

 

 

2. 절대 죽지

 

니콜라스와 변의주는 그 날 이후로 눈에 띄게 붙어다녔다. 전학 온 첫날부터 수업에 빠진다며 반에서는 양아치 이미지 굳어지긴 했지만 둘 다 길을 잃었다는 이상한 변명에 하필 붙여놨던 게 변의주라 담임이 제 잘못이라며 그냥 넘어가서 다행이었다. 이놈들 앞으로는 정신 좀 차리고 다녀라는 잔소리는 피할 수 없었지만 이쯤에서 끝난 건 역시나 초럭키한 일은 맞았다.

 

"니콜, 너 앞으로는 땡땡이 치면 안 되겠다."

"와, 난 들어가고 싶었는데 주주가 하자고 한 거 아니었어?"

 

변의주가 교무실 앞에서 니콜라스를 툭 치며 조용히 하라고 키득거렸다. 선생님 또 들으시면 난리난다 하면서. 아마 니콜라스가 변의주를 좋아하고 있음을 완전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인지하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을 거다. 변의주 보려고 안 해도 되는 야간 자율 학습 신청한 거, 꾸벅꾸벅 졸고 있을 때 개악필 한국어로 바득바득 적어서 의주에게 칭찬받은 거, 원래 아침 잘 안 먹고 온다고 했지만 굳이 아침에 편의점 들려서 샌드위치 하나 사 하지도 않는 1+1 핑계댔던 거

변의주를 좋아하는 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됐던 행동들이라 빠르고 깔끔하게 인정했다. 솔직히 그때 그 얼굴을 보고 안 좋아하는 게 등신 같은 거지

 

고등학교 3학년은 눈 감았다 뜨면 소멸하는 시기라 했나. 눈 감았다 뜨면 인천으로 수학여행 가서 바다 앞에 있는 변의주와 하지도 않을 입수 얘기 하기도 했고, 또 눈 감았다 뜨면 이불 한 뭉텅이 말아서 자고 있는 변의주한테 이불 다 뺏겼음에도 걔 얼굴 구경하랴 옆에 같이 누워있는 마음 진정하랴 밤을 꼴딱 새웠다. 그리고 또 정신이 다시 들 때는 시험 보느라 지친 의주에게 커피 사다 주고 있었다.

니콜라스의 고등학교 생활이 모조리 다 변의주로 뒤덮여 있었다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닐 만큼 너무 좋아했다, 변의주를

 

근데 원래 좋아하면 그런 거잖아. 누가 걔 얘기 하는 거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듣고 싶고 그런 거.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아는 거 하나라고 있다고 하면 캐내고 싶은 거. 니콜라스도 감정에 충실한 고등학생에 불과해서 그런 거 잘 못 지나쳤다. 사람이 궁금한데 어떡해. 그래서 같은 반 남자애가 변의주에 대해 해 줄 이야기가 있다고 했을 때도 의아하긴 했지만 순순히 불려나갔다. 얘가 우리 주주랑 접점이 있었나?

 

 

니콜라스를 불러낸 것은 신은우. 운동부였던 변의주와 전학 온 니콜라스는 전혀 몰랐지만 반에서 왕따였다. 귀신, 병신으로 불린 은우는 왜소한 체격에 얼굴은 새까만 앞머리로 모두 뒤덮여 있었다. 본인들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애새끼들답게 쟤랑 말하면 입시 망한다더라, 생긴 것부터 꺼림칙하게 생겼다, 엄마가 무당이라는데 언제 죽었다더라 등등. 은우를 향한 소문들은 다 날카롭고 적대적인 의도를 가진 소문들밖에 없었다

신은우는 니콜라스를 불러내고 한참을 말없이 니콜라스의 흰 운동화만 쳐다봤다. 그리고 좀 아프겠네라며 중얼거렸다. 니콜라스는 은우를 향한 소문들을 몰랐음에도 소름 꽤나 돋는 기분 나쁜 행동들에 걸핏하면 자리를 박차고 나올 예정이었다. 그 말을 듣기 전에는.

 

"야, 변의주 죽어. 방금 확실해졌어."

 

새까만 앞머리 사이로 안광이 다 죽은 눈이 니콜라스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니콜라스보다 20cm 정도 낮은 눈높이에서 중얼거렸는데도 말이 한 번에 가슴에 날아와 꽂히는 기분이다

 

"야, 니가 뭘 알아. 말 조심해.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이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닌 거 네가 더 잘 알 것 같아, 내가 더 잘 알 것 같아?"

 

치켜뜬 눈과 색이 다 죽은 입술, 목이 다 늘어난 티셔츠에 머리가 여기저기 쥐파먹은 것처럼 잘려있는 게 꼭... 신은우는 그 다음으로는 니콜라스와 변의주의 정보를 술술 읊었다. 본인들이 나눴던 대화가 아니면 알 수가 없는 정보들을 하나하나 세밀하게 다 알고 있었다. 나도 왜 하필 너네인지 궁금하긴 하네. 신은우는 니콜라스의 턱 끝까지 얼굴을 들이밀고는 다시 떨어진다. 뭘 어떻게 하라는 게 아니야. 너도 죽을 애 그만 좋아하라는 거지. 내가 이걸 왜 말하냐면 그나마 너희가 나 무시 안 해서 말해 주는 거야

 

"안타깝긴 하네. 무슨 로미오와 줄리엣이야?"

 

은우가 말을 쉬지 않고 하다가 턱 끝까지 올라온 숨을 내쉰다. 이번 년도까지 정리해. 그게 너랑 변의주한테 편하거든. 원래 숙명은 거스를 수가 없어. 내가 병신으로 불리는 것도, 왕따 당하는 것도 다 숙명이라 더 이상 바꾸려 들지 않아. 신은우는 니콜라스에게 말을 할 때 곧게 폈던 어깨를 다시 구부정거리며 접었다. 변의주 죽는다고? 한꺼번에 들어온 정보로 인해 머릿속이 과부화되는 것 같다

겨우 변의주가 웃는데. 변의주가 커서 무슨 일을 할지 내가 더 기대되는데. 걔가 아니면 이제 나는 안 될 것만 같은데. 까만 아디다스 운동화가 멀어지기 전에 잡아야 한다. 니콜라스는 신은우의 손목을 잡고 단번에 돌렸다. 변의주가 니콜라스의 손목을 돌렸던 것처럼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는데?"

신은우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귀찮은 표정으로 니콜라스의 손을 떼어낸다. 야, 아파. 놓고 말해. 그리고 숙명이라고 했잖아. 절대 못 바꾼다고

"그럼 왜 얘기했는데. 뭔가 방법이 있을 거 아니야. 야, 너 알지? 아까도 뭐 아프겠네 어쩌겠네 했잖아."

 

니콜라스가 다급하게 얘기하다 결국은 소리를 질렀다. 제발 의주 좀 살려 달라고. 너는 무조건 알지 않냐고. 신은우는 그런 니콜라스를 신기하게 뚫어져라 쳐다본다. 와, 너 그 정도로 좋아해? 너 지금 상황도 만만치않아. 여기서 인생에 더 역경 만들면 안 되지. 진짜 대신 죽어 줄 거 아니면.

"대신 죽으면 돼?"

니콜라스의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 찼다. 대신 죽어 주는 거, 그거 하나면 변의주를 살릴 수 있는 건지만 말해 봐. 언제부터 변의주가 제 안에 이렇게 큰 의미로 가득 찼는지는 모르겠다. 운명이라 생각했는데. 진짜 운명이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거라면. 그리고 또 운명이 네가 죽는 거라면. 너를 좋아하는 내가 뭐라도 해 주고 싶어.

 

신은우가 무너져서 바닥까지 기는 니콜라스를 보고 피식하고 조소했다. 야, 너 후회해. 대신 죽어 주는 게 쉬운 거인 줄 알지? 나도 우리 엄마 대신 죽으려고 했다고 실패했거든

 

"진짜 열심히 해도 몇 년 더 살리는 것밖에 못해. 그리고 넌 귀신이 돼서 걔 죽기 전까지 계속 지켜야 해. 몸빵으로든 머리를 쓰든. 그러니까 그런 알량한 좋아한다는 마음으로는 쉽지 않은 거잖아. 천륜도 실패했는데."

 

니콜라스는 신은우의 조소에도 이미 몇 년 더 살리는 것밖에 못해도 살리고 싶다는 마음만 가득찼다. 방법만 알려 줘. 그때는 무슨 생각을 했더라. 언젠가는 나도 대만에 가고 싶다고 인천 바다를 보며 넌지시 얘기한 변의주를 살리고 싶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자고 일어났을 때 이불 본인이 다 가져간 거 몰랐다고 겨우 잠든 니콜라스의 위로 이불 무덤을 쌓아둔 의주를 살리고 싶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그날 밤 유튜브에 검색해서 재생된 펜싱 신동 변의주를 살리고 싶었던 걸까. 니콜라스의 부탁에 신은우가 한숨을 쉬고는 결국 방법을 알려 줬다.

 

"변의주는 졸업식 날에 죽을 거야. 과속하는 트럭에 치여서. 그 트럭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술 퍼 마시고는 학교 주변만 빙글빙글 돌고 있었거든. 네가 그 날 대신 그 트럭에 치여 준다면... 그리고 계속해서 변의주를 구할 수 있다면. 살 수 있겠지, 조금이라도."

 

만약 진짜 할 생각이라면, 그리고 네가 변의주를 그만큼이나 아낀다면... 행운을 빌어, 왕이샹. 내가 겪고 보니 소중한 사람을 잃는 건 참 무서운 일이었잖아. 몰랐는데.

 

 

 

신은우가 니콜라스를 지나쳐간 자리에서 한참을 엎어져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를 때 저 멀리에서 익숙한 인형이 뛰어온다. 기다란 검정 장대 우산을 하나 들고서는 니콜라스를 보자마자 숨가쁘게 달려오던 것을 멈춰 무릎에 손을 올리고 숨을 내쉰다. 주주네. 변의주는 쭈구려 정신이 나간 것 같은 니콜라스에게 다가와 같이 무릎을 굽히고는 시선을 맞췄다. 의주야. 무릎도 안 좋으면서 왜 나한테 네 무릎을 내어 줘, 너는.

 

"야, 너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인데.... 우리 서로한테 비밀 없기로 했잖아, 니콜. 애들이 너 없어졌다고 했을 때 깜짝 놀랐어. 누구한테 불려나갔다고 했는데, 애들이 계속 너한테 안 좋은 일 있을 거라는 말을 해서. 그래서.... 나는 그냥."

 

니콜라스가 변의주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품 안에 가득 의주를 껴안았다. 순간의 충동이었음에도 전해지는 온기에 막막했던 앞이 밝아졌다. 안도감에 어깨에다 얼굴을 파묻었다. 내 의주. 나의 주주. 절대 죽어서는 안 됐다. 잃을 수는 없었다.

 

니콜라스의 대답이 안 돌아와도 변의주는 계속해서 묻는다. 우산을 가져왔다는 의주의 말에 니콜라스의 어이없는 실소도 같이 터진다. 넌 한국인 아니라서 잘 모르나 본데 울다가 웃으면 안 좋아. 저를 달래 주려고 하는 말인지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효과는 좋았다

 

"우산은 왜 가져온 거야, 주주."

"난 싸움 못하니까. 이걸로라도 치려고. 펜싱 할 때처럼."

 

왜. 진짜로 우산이 필요했어? 그 말이 너무 사랑스럽게 다가왔다. 펜싱 더는 못한다고 했잖아. 웃음이 실실 새어나온다. 대만에 가고 싶다고 한 변의주. 나한테 이불 쌓아둔 변의주. 영상 속 펜싱 잘하는 변의주. 전부 변의주였다. 그게 지금 다 내 눈앞에 있는 얘였다. 지금 이 순간, 확신한다. 변의주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 있다고.

 

 

그 일이 있고 나서 니콜라스는 뭔가 항상 불안해 보였다. 변의주는 이상했던 날이라고만 기억했다. 니콜라스에게 아무리 물어봐도 왜 그랬는지 안 알려 줘서 서운함만 가득찼던 기억. 그런 결심을 했을 거라고는 절대 몰랐던 날. 잘만 걷고 있던 변의주를 갑자기 확 낚아채서 자신 뒤에 숨기질 않나, 의주에게 차 조심 안전 교육 영상을 하루에 삼십 분 정도 억지로 보게 하질 않나. 뭔가 수상함을 느꼈지만 실마리가 잡히는 게 없어 가만히 있었다. 아니, 니콜라스. 한국어 공부 할 때 위기 탈출 넘버원 좀 그만 보라니까. 그 정도 농담으로 니콜라스의 행동들을 넘겼다.

언제는 한 번 니콜라스에게 금발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소리를 한 적이 있다. 너는 날티나게 생겨서 금발 해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주주... 나 날티나게 생겼어? 안 좋은 의미 아닌가, 그거. 왜 안 좋은 의미야? 날티나게 생긴 건 보통 멋있게 생겼다는 거잖아. 이어지는 짤막한 일상 대화에 니콜라스가 갑자기 의자를 돌려 의주 쪽으로 빼고는 방향을 바꿔 앉았다. 다시 한 번만 얼굴 봐줘. 진짜 날티나게 생겼는지.

니콜라스가 전학 온 첫날 이후로는 니콜라스의 얼굴을 이렇게나 자세히 본 적이 없었다. 치켜 올라간 눈, 높은 콧대, 얇쌍한 입술이 눈에 차곡차곡 담긴다. 니콜라스도 의주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말한다

 

"주주는 진짜 귀엽게 생겨서 날티나는 거 하면 안 되겠네~ 오토바이 평생 금지."

"어쭈, 너는 날티나게 생겨서 오토바이 타도 된다는 거야?"

"나는 타야 할 일이 있을 수도 있지."

 

그리고는 의주의 손을 잡아다 자신의 머리 위에 턱 하고는 살포시 얹는다. 나 진짜 금발 할까? 우리 졸업식 때. 그때 만나서 봐. 잘 어울리는지, 안 어울리는지. 안 봐도 잘 어울릴 것 같다니까, 뭘 또 보래. 너 성인 되고 나서 머리 바로 탈색하면 머릿결 상한다? 평소에는 그럼 주주 말대로 안 해야겠다며 넘길 니콜라스가 답지않게 고집을 부렸다. 난 꼭 졸업식 때 하고 올 거야. 그러니까 주주도 와서 우리 만나는 거야. 사진도 찍고, 꽃다발도 주고 하는 거야. 그건 꼭 의주에게 말하는 게 아니라 제 자신에게 약속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해 졸업식에는 니콜라스가 오지 않았다.

 

 

3. 않아

 

금발 하고 나타나겠다며. 변의주는 모두가 집으로 돌아갔음에도 니콜라스를 기다리다가 가족들의 재촉을 몇 번씩이나 받고는 겨우 자리를 떴다. 그리고는 니콜라스의 책상 위에 포스트잇을 하나 남겼다. 니콜라스, 이거 보면 꼭 연락해. 페메나 디엠이나 카톡이나 다 괜찮으니까 꼭 연락 줘야 돼. -주주가. 3학년 교실은 모두 다 비워 놓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쪽지 하나 남기는 걸 참지 못했다. 혹시나 늦게라도 올 수 있으니까. 변의주는 니콜라스가 있는 졸업식을 겪어보지도 않았는데, 안 온 졸업식은 닭살 돋을 만큼 별로라는 것도 알게 됐다

담임 선생님이 눈물 흘리실 때 너랑 같이 눈 마주치고 선생님 좀 놀려야 되는데. 교장 선생님 연설이 끝도 없이 길어질 때 유명한 짤 따라하는 너 보면서 눈물도 좀 훔쳐야 되는데

니콜라스가 빠지니까 모두 다 재미없었다. 전학 오기 전, 교실에서 혼자일 때로 돌아가버려서 니콜라스가 존재했다는 게 모두 한바탕 꿈인 것처럼 느껴졌다.

 

 

나 손절한 건가. 우리는 성인 되고도 절대 잊지 말고, 한 달에 무조건 네 번 이상은 만나야 한다며 계획을 하나씩 짜던 니콜라스의 모습이 어제 본 것처럼 의주에게는 여전히 생경했다. 주주, 너 연락 끊으면 나 서운해서 울 거야. 주주 대학 앞에 가서 피켓 시위 할 거야, 나랑 절대 안 놀아 주고 배신했다고. 그럴 일 없다니까? 니콜, 너 자꾸 나 친구 많은 줄 아는데, 나 진짜 친구 없거든....

그 말을 했던 니콜라스는 변의주가 축제 때 대신 전해 드립니다라는 페이지에 어쩌다 한 번 올라온 걸 보고 잔뜩 경계 태세를 갖췄었다. 진짜 웃겼는데. 그거 다 주작이라고 해 줘도 안 믿고 말이야. 그리고 배신은 무슨 배신이야. 그런 쪽으로는 네가 더. 더 생각하기 싫었다. 변의주에게 온 알 수 없는 번호의 문자가 아니었더라면 아마 변의주는 죽을 때까지 니콜라스가 자신을 손절한 줄로만 알았을 것이다. 니콜라스가 이상하던 날. 넋이 완전히 나가있던 니콜라스가 이상해 캐묻는 변의주에게 니콜라스는 마치 말하면 죽기라도 하는 듯 입을 안 열었으니까.

 

나 같은 반이었던 신은우인데, 말해 주고 싶은 게 있어. 이거 보면 연락 줘, 만나서 얘기하자. 그래서 그 연락을 더욱 무시할 순 없었다. 신은우. 어렴풋이 기억이 스쳐지나가기도 한 것 같은 이름. 니콜라스가 이상했던 날. 넋이 완전히 나가있던 니콜라스를 기억한다. 반 친구들 말로는 그때 만났던 애 이름이 신 뭐라고 하긴 했었는데, 걔인가?  

삼십 분쯤 기다렸던 것 같다. 카페 입구 밖에서부터 걸어들어오는 은우를 보니 여전히 덥수룩한 머리에 키는 조금 큰 것 같기도 했다. 은우는 의주를 보더니 오랜만이라며 손을 내밀고는 악수를 건넸다. 오랜만이야, 의주야. 신은우의 손을 맞잡자 한여름 밖에 있다 왔어도 몸에 냉기가 흐르는 착각이 들었다. 뭐 하고 지냈어? 뭐 하고 지냈냐는 물음엔 말을 선뜻 꺼내지 못했다. 표면적으로는 대학교 다니고, 어디 유명한 회사에서 스카웃 제의도 와 오늘도 면접을 보고 올 만큼 착실하게 생활하고 있었지만 속은 다 곪았으니까. 니콜라스가 빠진 일상은 변의주에게 절대 큰 의미가 되지 못했다. 나를 겨우 궤도에 올려놓은 사람이 없어져 한 순간에 이탈한 기분, 아니 제자리로 돌아간 것만 같은. 이게 나의 제자리라는 걸 알면서도 변의주는 니콜라스가 없는 일상에 매번 매순간 괴로웠다.

 

"그냥 평범하지. 대학교 다니고, 공부하고. 아, 오늘은 면접 보고 오느라 정장이네."

표면적인 일상만 말하며 멋쩍게 웃는 의주에 은우는 그저 뚫어져라 응시하다 혼자 조용히 읊조린다. 걔 대단하네. 이렇게 잘 살려 놓고

"그게 무슨 말이야?"

"알 필요없어. 궁금한 거 끝났으니까. 너도 딱 일 년만 더 버티면 될 거야."

 

은우는 용건이 끝났다는 듯이 내려 놓았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사람 불러내놓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이렇게 되돌아간다고? 말해 주고 싶은 게 있다고 했잖아. 신은우는 학교 복도에서 자기를 향해 방법이 없냐며 소리치던 니콜라스의 불안한 음성과 방금 들린 차분하지만 떨리는 목소리의 공집합을 생각한다. 진짜 나도 귀찮게 내 팔자가 내가 꼬았지, 뭐. 이것들을 학교에서부터 그대로 지나쳤어야 됐는데. 이제 와서 후회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제가 엎지른 셈이다.

 

"딱 일 년만 죽지 말고 버티라고. 네 목숨줄 누가 꽉 붙잡아 주고 있으니까."

 

신은우가 벙찐 의주의 손에 명함을 한 장 끼운다귀신 퇴치해 드립니다! -귀신에 관한 모든 것  정자인 글씨체로 나란하게 적혀있다. 왜, 이런 거 안 믿는 편? 이 명함만큼 신뢰감을 더 줄 수 있는 건 나한테 없는데. 변의주는 정색하고 뒤돌려나. 시간 아깝게 사람 불러냈다고 욕이나 좀 먹을까? 신은우는 본인이 생각하는 의주의 이미지를 머릿속으로 그린다. 안 믿는 게 베스트지. 그래야 걔가 죽은 의미가 있으니까. 근데 차마 이런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다.

 

"그러니까 지금 내 목숨줄 잡고 있는 게 니콜이라는 거야? 그럼 걘 지금 어디 있는데."

"뭔 소리야. 걔 죽었.... 아, 너 설마 걔 죽은 것도 모르는."

 

다만 신은우가 간과한 것은 변의주는 니콜라스가 죽은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엔 카페에서의 기억이 부분부분 끊겨서 났다. 니콜라스가 죽었다는 말을 하는 신은우와 때마침 걸려온 예전 선생님의 전화. 왜 죽은 거냐고 묻는 변의주의 말에 동시에 사고사라고 대답한 것도. 세상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다. 니콜라스가 왜 죽어. 걔가 뭘 했다고. 신은우는 변의주의 얼굴을 부여잡은 채로 말했다. 너 절대 죽을 생각 하지 마. 그럼 괜히 쓸데없는 애 목숨 하나 날린 거나 마찬가지야

 

멀쩡한 사고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니콜라스는 왜 죽은 건지, 걔 이름 옆에 붙여진 사고사가 진짜 사고로 인한 건 맞는 건지, 내 목숨줄을 쥐고 있다는 건 또 무슨 의미인 건지. 변의주가 한참 횡단보도에서 생각에 잠겼을 때 멀리서 니콜라스를 닮은 사람이 보인다. 이상해. 너무 보고 싶으면 헛것이 보이나? 그럼 좀 마음 편할 때나 와주지. 눈을 잠시라도 떼면 사라질까봐서 계속해서 응시한다. 그러나 사라지지 않는다. 하얀 운동화의 끝을 묶고는 차분히 발을 두세 번 차고는 전속력으로. 달린다. 의주에게로. 계속, 계속, 계속, 계속... 

 

끼이익, 쾅! 자동차의 뜨거운 바람이 차갑게 식는다. 니콜라스다. 변의주는 직감한다. 너를 닮은 사람이 아니라 너였어. 니콜라스의 몸이 붕 하고 올라간다. 의주와 마주친 눈. 의주가 여태껏 그려왔던 얼굴로 입꼬리를 잔뜩 끌어올린다. 의주의 눈동자에 선명하게 비친 금발에 하복을 입은 니콜라스가

추락한다.

 

“죄송합니다. 브레이크가, 이게 갑자기 말을, 말, 말을 안 들어서. 안 다치셨어요?“

흰 소나타에서 후다닥 내려 말을 붙인 운전자에도 먹먹하니 꼭 물에 잠긴 것 같았다. 니콜라스가 그대로 회색 콘크리트에 누워 실소를 터뜨리는 모습. 꿈인가, 꿈이 아닌가. 한참을 서 있었던 것 같다. 도로 한복판에서 눈에 초점이 나간 채 멍하니 있다 다시 니콜라스를 보려고 했을 땐 이미 인형이 사라진 후였다.

절대 헛것을 본 게 아니다. 그건 분명히 니콜라스가 맞았으니까. 그 날 이후로 변의주는 하루에 한 번씩 은우가 준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은우가 받았을 때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끊었을 때도 있고, 그 쪽에서 아예 안 받는 날도 있었고. 의주는 한 달 동안 나가지도 않고 잘 먹지도 않았다. 머릿속엔 온통 니콜라스가 제게로 달려왔던 생각 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다시 볼 수 있는 거지. 하루는 집을 다 뒤지기도 했다. 예전 고등학생 때 썼던 문제집, 필통, 하다 못해 졸업 앨범까지 다 엎었을 때.

드디어 실마리가 보였다.

 

롤링페이퍼 끝자락에 써진 건 분명하게 니콜라스의 필체가 맞았다. 귀퉁이에 작게 보일 듯 말 듯 써져 있는 글씨. 주주, 언제나 네가 위험에 빠질 때마다 지켜 줄게.

언제나 네가 위험에 빠질 때마다 지켜 줄게

 

내가 위험에 빠지면 니콜라스를 볼 수 있는 걸까? 차에 치일 뻔한 걸 니콜라스가 대신 치여 줬고, 그로 인해 변의주는 털 끝 하나 다치지 않을 수 있었다. 이거다. 더 이상 신은우에게 전화하지 않아도 알겠다. 변의주는 피곤한 얼굴로 곧장 발걸음을 옮긴다. 지금 당장 할 수 있어. 변의주는 니콜라스를 봤던 길로 뛰었다. 전속력으로 나를 향해 뛰던 니콜라스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변의주는 어쩐지 그 마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이게 갑작스러운 선택이라는 걸 안다. 이게 옳지 않을 수도 있다고, 이건 분명히 틀린 선택일 것이라고. 네 인생, 네 앞길 전부 말아먹는 짓일 거라고. 하지만 변의주는 적어도 하나는 확신했다. 니콜라스는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란 것. 적어도 변의주는 이 불확실한 상황에 그거 하나만큼은 완전히 믿었다. 그거면 변의주 또한 고민할 이유는 없다.

여름 초저녁의 차들은 라이트를 켜고 쌩쌩 달린다. 변의주는 눈을 감고는 숨을 고른다. 휙휙 지나가는 차들에 쉽사리 몸을 내던질 엄두가 나질 않았다. 다행히 주위는 고요했고 눈을 감아도 새어나오는 라이트 불빛들만이 존재했다. 이제는, 더 이상....

!!

 

아, 맞다. 나 원래 죽을 운명이었지

 

인도로 돌진하는 차에 허리가 꺾여 공중으로 떠오른 변의주가 제 운명을 상기했다. 꼭 내가 뛰어들지 않았어도 일어날 일이었던가. 다행이다. 망설이고 돌아갈 수 없게 돼서. 고작 나의 두려움 따위를 경멸하지 않아도 돼서. 변의주의 23번의 여름. 그 중 최후의 여름이 서서히 멸절한다. 니콜라스가 누울 땐 멀쩡하기만 했던 아스팔트 위에 피가 흥건하게 덧씌워진다. 쿵 하고 떨어진 다음은 놀랍게도 아픔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눈을 힘겹게 감았다 뜨니 금발이 바람에 흔들리는 게 보인다. 눈에 고인 피 때문인가. 니콜라스가 꼭 철지난 유행인 빨간색 브릿지를 한 것처럼 보이기도 해 웃겼다. 우나? 정신은 멀쩡한데 눈이 잘 안 떠져서 니콜라스의 표정을 확인할 수가 없다. 그래도... 머리 염색한 거 봐서 다행이네. 역시 잘 어울려. 슬프지도 않고 오히려 기뻤는데 눈물이 옆으로 흐르는 느낌이 난다. 변의주는 대뜸 대만을 떠났던 이유를 말했던 왕이샹처럼 목을 가다듬는다. 니콜, 오랜만이야. 보고 싶었어.

 

 

여름은 절대─━ 죽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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