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너스 모텔에 묵고 있다고 합니다
익명
특허를 낸다면 불로소득 가능할까? 변의주가 12시간 근무에도 졸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턱 괴기 각도를 개발해낸 한여름 밤에 든 생각이었다. CCTV에는 비스듬히 정수리만 비추도록, 모텔 입구에서는 국적 불명 식물에 얼굴을 가리도록 오늘도 정확히 계산한 각도에 얼굴을 손바닥에 기댔다. 종아리에 쬐이는 선풍기 바람 즐기며 무아지경 월급 루팡하던 중... 예고 없이 팔이 무너져 책상에 안면 강타할 뻔했다. 화들짝 자세를 추스르면 눈앞의 광경이 당황스러웠다. 또래의 외국인 남자애가 대체 언제부터인지 카운터에 턱을 괸 채 저를 마주보고 있었다. 덮은 머리 아래 가로로 긴 눈이 웃음기에 슥 가늘어진다. 의주는 태연한 척 애쓰며 예약 창을 확인하고 남자는 녹색 대만 여권을 꺼냈다. 건네준 키와 콘돔을 주머니에 쑤셔 넣은 남자는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오프 화이트 벨트로 휘감은 하드 캐리어가 꽤 무거워 보였다. 까만 벙거지 모자를 푹 눌러쓴 여자 동행인이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혼자가 된 의주는 방금 불로소득 포즈에 의한 퍼포먼스가 스르르 부끄러워졌다. 셀카 모드로 확인하면 덤덤한 척이 무색하게 뺨이 맞은 것처럼 빨갰다.
비너스 모텔에 묵고 있다고 합니다
촌스러운 상호명과 애매한 위치에도 불구 비너스 모텔은 그럭저럭 흑자 운영되었다. 차이나타운 외곽이라 특유의 약재 및 향신료 냄새가 거리에 배어 있었고 길을 건너면 동네 끝자락의 가성비 술집이 즐비했으며 뒷산은 빽빽한 나무들에 가려진 오래된 공동묘지였다. 더불어 절도·성추행·실종도 잦은 우범지대였는데, 모텔 알바들은 사람 간의 범죄보다 귀신 목격담을 더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었다. 공동묘지 아래 정류장에 소복 입은 여자가 앉아 있더라는 지역 특산 괴담, 존재하지 않는 객실에서 카운터로 전화가 온 적이 있다는 직속 선배의 구전 설화, 그리고 22년 전 306호에서 모녀가 동반 자살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썰이 유명했다. 알바생들은 가끔 그 세 타입의 귀신 중 꼭 마주쳐야 한다면 누가 낫겠냐는 밸런스 게임으로 노가리를 깠다. 의주야 너는 뭐가 낫겠냐니까? 변의주의 경우에는 그런 괴담이 즐길거리보단 불편함에 가까웠다. 반말하며 진상 부리는 취객, 카운터 전화 무응답 시 버럭하는 사장 대신 귀신이 낫겠다는 지론이기도 했고. 실제로 존재하는 진상들 및 풀타임 대학생 신분 덕에 체력이 알게 모르게 떨어지는 건가. 일에 숙련되어 가는 것과 별개로 좀처럼 꾸벅꾸벅 졸아대는 요즘이었다. 변의주가 요새의 본인을 규정한다면 이 모텔 건물만큼 낡고 지친 20대인데... 그럼 그 외국인 손님은 뭐하는 사람일까?
탈색모에 가로로 긴 눈. 그는 단골이고 동갑이고 좀... 특이한 이름이었다. 굳이 언젠가 부르게 된다면 왕씨? 모텔 예약자명이 웬 머리털 나고 처음 보는 한자 석 자였는데 그 중 읽을 수 있는 게 王자뿐이었다.
그는 대개 의주가 수건을 개고 있을 새벽 1시경에 매번 다른 여자와 등장하셨다. 여자들은 대체로 왕씨가 모텔비를 계산할 때까지 말 한 마디 없다는 공통점뿐. 뭐 보통 남녀가 왔을 때의 통상적인 그림이긴 했다. 딱 한 케이스가 기억에 남긴 하는데, 왕씨 등에 업혀 코 골며 자던 여자가 있긴 했다... 여자들의 외양은 화려한 쪽에서 수수한 쪽까지 다양했다. 단순 이목구비뿐 아니라 옷차림까지 츄리닝, 쓰리피스 정장, Y2K, 고스룩 등등 천차만별. 왕씨는 혈기왕성한가 보네. 취향이랄 것도 없어 보이고. 하긴 저렇게 날티 나는 상에 매번 요란한 패션 센스를 자랑하는 걸 보면 혹시... 보도방 출신? 그런데 외국인도 취업을 시켜주나. 의외로 수요가 있을 듯도 하고. 한편 왕씨가 나이가 두 배는 많아 보이는 아줌마와 동행한 날도 있었다. 보통 주던 대만 여권 대신 파란색 미국 여권이었다. 이중국적자?라는 정보가 추가된다. 같은 사진 옆에 NICHOLAS WANG이라 적혀 있었다. 음, 왕씨 대신 니콜라스라고 부르면 되겠군. 비너스 모텔에 얼굴도장을 찍은지 한 달여 쯤 되어가는 그는 무료한 카운터 알바가 머릿속으로 저를 상대로 외국인 노동자 문제 사례 논문까지 쓰고 있다는 건 추호도 몰랐다. 그저 매번 담백히 키와 콘돔만 건네받고 새벽 내내 말썽부리지 않는 손님이었다.
니콜라스가 한밤중에 프라다 선글라스를 쓴 여자와 왔던 날엔... 아니 정확히 그 밤이 지난 아침 9시경엔. 의주는 입 찢어지게 하품하며 모텔을 나오고서야 봤다. 귀신이 앉아 있는다는 정류장에 앉아서, 306호 창문틀에 늘어진 니콜라스 왕씨를. 샤워 가운을 입고 동행녀의 프라다 선글라스를 쓴 그는 턱을 괴고 한 팔을 길게 뻗고 있었다. 그 손에 타들어가는 연기를 매단 담배가 끼워져 있었다. 뭔 아침부터 담배를 저런 차림으로... 흡연도 라식 수술도 안 해본 의주는 그 남자의 행적이 온통 미스터리였다. 근데 원칙상 실내 흡연은 안 되는데. 의주는 방금 근무를 이어받은 민철에게 전화 걸어 주의를 부탁하려다가 눈을 더 작게 찌푸렸다. 초점이 더 맞는가 하다가 시력이 한계에 부딪혔다. 그 와중에 깨달은 것은... 담배를 입에 대진 않는다는 것? 긴가민가할 때 창문이 매정히 닫혔다.
원래 객실 내 비치여야 할 콘돔은 사장의 짠돌이 기질 덕에 2인 커플에게만 제공되도록 교육 받았다. 그래서 오늘, 니콜라스가 처음으로 남자를 데려왔을 때 의주는 조금 당황했다. 남자가 둘이면... 씌울 것도 두 개 이상이지 않을까? 내적 갈등 끝에 두 개를 건넸는데 왕씨는 군말 없이 모두 챙겼다. 그때까진 여느 밤과 다를 게 없었다.
의주는 평소처럼 한적한 새벽 시간대에 복도 청소를 시작했다. 신음소리 서라운드로 들리는 3층 한가운데에서 익숙하게 애플 뮤직 켜고 헤드셋을 착용했다. 긴 팔다리만큼 팍팍 시원시원하게 대걸레질했다. 비상계단 앞에는 아무리 걸레질해도 지워지지 않는 자국이 있었다. 출처가 가늠조차 안 되는 두어 개의 검은 얼룩. 오늘도 관성처럼 힘주어 닦아 보지만 끄떡없었다. 이유는 몰라도 이게 건물이 생겨날 때부터 새겨진 거라면. 으레 본질과 기질이 그러하듯 닦아내거나 덧칠해도 이내 드러나는 것이라면... 지금 고막에 다이렉트로 꽂히는 음악을 비집고 들어온 이 ‘울음소리’도 그런 종류일까? 의주가 홱 헤드폰을 목덜미로 내렸다. 정적. 그리고 신음 소리. 잘못 들은 건가. 저도 모르게 참은 들숨이 답답해질 즈음 다시 들려왔다. 그 서럽게 우는 소리가. 기억 속 어렸을 적 누나의 울음소리가 겹쳐질 정도로 분명했다. 의주는 대걸레를 팽개치고 306호 문에 귀를 맞댔다. 그 서러운 주파수가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듯했다. 길게 생각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틀었다. 의외로 맥없이 열려 의주가 더 놀랐다.
객실 청소부 아주머니에게 쫌쫌따리 주워들었기로서니 방의 상태든 사람의 상태든 여기선 못 볼 꼴 참 많았다고 했으나... 예상 외로 방은 깨끗했다. 또한 아무도 없었다. 바닥엔 니콜라스의 닫힌 캐리어, 닫힌 화장실엔 스위치가 켜져 있었다. 울음소리는 또 자취를 감췄지만 의주는 한 발짝을 안으로 내딛었다.
“무슨 일?”
뒤에서 튀어나온 목소리에 의주는 격 없이 소스라쳤다. 멀뚱 선 니콜라스가 객실 문을 한 팔로 지탱하고 있었다.
“아니... 아니에요 문이 안 잠겼길래요.”
“나 찾았어요?”
니콜라스가 빙긋 웃었다. 어색하게 고개를 저은 의주는 휙 나가려다 괜히 던져봤다.
“누가 우는 것 같아서요.”
“사람 없는데?”
니콜라스가 머리를 갸우뚱했다. 버젓이 남자랑 동행해 놓고, 또 화장실 불이 켜져 있구만 아무도 없다는 말이? 좀 이상하다고? 느끼던 찰나, 질문이 또 들어왔다.
“종교 있어요?”
의외로 깔끔한 한국어 발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스몰토크는 처음인데... 혹시 사이비?? 한밤 중 모텔에서의 이단 성경 공부?? 의주는 포교를 원천 차단할 목적으로 네, 하며 다급히 목에 건 작은 십자가 목걸이를 가리켰다. 사실 나이롱 신자가 된지 10년은 됐고 목걸이는 종교적 의미 따위 없는 악세사리였다. 아하. 고개를 끄덕인 니콜라스는 난도질 수준으로 찢어진 청바지 주머니에서 손바닥만한 플라스틱 병을 꺼냈다. 사이즈며 희끄무레한 색이며 처음엔 손 세정제인 줄 알았다. 그런데 금박으로 십자가와 HOLY WATER(성수)라는 글자가 박혀 있다. 나 지금 잘못 걸린 건가? 하는 순간 니콜라스가 성큼 다가왔다. 니콜라스의 하얀 얼굴에서 안 어울리는 독주 냄새가 훅 끼쳤다. 숨을 참은 의주의 목걸이 펜던트를 니콜라스가 성수 병에 푹 담갔다 뺐다. 의주의 티셔츠가 조금 젖었다. 니콜라스는 손을 모으고 눈을 감은 채 정성스레 속삭였다.
아멘.
곧 객실을 빠져나온 의주는 역시 취객이 귀신보다 싫다고 생각했다.
모텔 외벽이 홍보가 되냐고. 누가 자꾸 붙여놓는 건지 사장 지시에 따라 처리는 변의주 몫이었다. 대부업체 광고와 LGBT 모임 QR코드와 실종자 포스터를 떼어냈다. 반듯이 접으며 가로등 켜진 분리수거장으로 향하던 의주의 손과 발이 느려졌다. 뭔가 낯익어. 단박에 지나치지 못하고 껌뻑껌뻑 실종자 사진을 들여다보다 동공이 미세하게 커졌다. 일주일 전 모텔에 왔던 여자였다. 입 옆의 점과 체크무늬 머리띠까지 똑같았다. 실종 시점은 1년 전, 이름 석 자는 이민자의 그것처럼 이국적이었고 국적은 대만이라 쓰여 있었다. 말 한 마디 없이 바닥을 향해 있던 시선, 초조한 듯 제 손톱을 손톱으로 뜯던 모습을 기억한다. 니콜라스의 뒤에서. 그녀는 니콜라스가 데려왔던 수많은 여자들 중 하나였다. 니콜라스는 오늘 밤 곤색 캡모자를 쓴 여자와 306호에 투숙하고 있었다.
의주는 마스터키를 챙겨 306호를 찾았다. 울음소리가 또 나려나? 열쇠를 집어넣지도 않았는데 문은 또다시 맥없이 열렸다. 방 안은 또 비어 있었고 거짓말처럼 고요했다. 마치 아무도 들어오지 않은 것처럼. 바닥에 니콜라스의 캐리어가 눕혀져 있는 것만 빼면 말이다. 의주는 방 안을 찬찬히 둘러보며 진입했다. 키와 콘돔은 고스란히 협탁에. 그리고 캐리어 옆에는 곤색 모자가 나동그라져 있었다. 의주는 입이 마르는 걸 느끼며 몸을 낮춰 앉았다. 허락 없이 캐리어를 열었다.
세면도구나 화려한 옷가지로 가득찼기를 바랐다. 하지만 고물상처럼 중구난방 잡동사니가 난무했다. 조금 당황한 것도 잠시, 하나하나 살펴볼수록 얼굴 근육이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분명 본 적 있는 물건들이었으니까. 까만 벙거지, 츄리닝 저지, 정장 넥타이, Y2K 패션 벨트, 고스룩 망사 스타킹, 프라다 선글라스, 그리고 체크무늬 머리띠. 모두 그가 모텔에 데려왔던 그녀들의 착용템이었다. 캐해는 단박에 외국인 성노동자에서 싸이코패스 살인마로 뒤집힌다. 의주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방바닥에 늘어놓았다. 대만 전통 술과 중국어가 프린팅된 라이터와 캐리어 크기만한 대형 물총까지 꺼내고 나면 차곡차곡 쌓인 지폐들이 있었다. 대만 화폐? 한자와 정체 모를 남자나 건축물이 그려져 있었으나 그 재질이 살면서 만져본 지폐와는 사뭇 다르긴 했다. 의주는 그 돈뭉치까지 꺼냈다. 캐리어의 바닥에 다가갈수록 온 머리칼이 곤두서고 맥박이 귀에서 뛰는마냥 크게 들렸다. 그렇게 예민한 상태였기에 당연히 알 수 있었다. 눈 감고도 그릴 수 있는 이 모텔 내부에서 여기 306호로 인기척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 하지만 이 충동을 뿌리칠 수 없었다. 딱 한 개, 아는 물건이 나올 것 같아서. 내 것은 아니더라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캐리어를 완전히 비워내고서야 깨달았다. 찾은 게 아니라 바란 거구나. 약간의 메스꺼움을 느끼며 일어나자마자 덥석 팔목을 잡혔다.
“무슨 짓이야?”
사나운 인상의 니콜라스였다. 해부당한 캐리어 주변으로 늘어놓아진 본인의 소지품, 아니 본인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진 모르겠지만, 이 난장판을 확인한 이상 현행범을 쉽게 놔줄 리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누가 범인이지?
“미안하다고 해.”
정말 사과를 듣고 싶은지 악력이 그대로다. 의주의 얼굴에 항복은커녕 반항에 가까운 표정이 스치자 니콜라스는 지체 없이 팔을 꺾었다. 아!! 몸을 뒤틀며 침대에 엎어진 의주를 니콜라스가 빈틈없이 압박했다.
“가만 있어 주주.”
응? 의주가 찡그렸던 눈을 반짝 떴다. 니콜라스는 논리력이 결여된 설명을 잇는다.
“난 모두의 이름을 알아.”
“나 주주 아닌데.”
일시 정지가 눌린 듯 잠시 멍해지는 표정은 처음이었다.
“...사실 너 애칭이야.”
이 새끼 뭐지?
그래서 니콜라스가 대체 뭐냐고 물으신다면. 수집가야. 안내자고. 비밀 요원이기도 하고. 배려심 넘치게 풀어 설명한 그 세 가지 역할은 융화되지 못하고 영 두루뭉술했다. 의주가 여전히 이 새끼 뭐지? 라는 표정을 하고 있자 팔짱 낀 니콜라스는 답답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아 저승사자를 어떻게 설명하지.”
어 그것 참 제일 잘 이해되네 처음부터 간단하게 직업을 밝히지 그랬니 허 참나... 이제는 의주가 눈을 질끈 감았다.
리빙 포인트! 아니 다잉 포인트? : 저승은 속인주의기 때문에 해외에서 사망한 자는 본인 국적의 저승사자를 통해서만 저승으로 인도될 수 있다. 이 골치 아프고 구시대적인 법 때문에 한 해에도 수십 명의 저승사자가 해외로 파견된다. 니콜라스도 그중 하나였다. 특히 요즘, 대만에서 저승의 문이 열리는 중원절 기간(7/15~29)은 귀신들의 기운이 더 세지는 만큼 더 많은 혼을 찾아내고 인도할 수 있는 절호의 성수기였다.
“그러니까 연쇄 살인범도 납치범도 아니다?”
“저승사자라도 시체나 사람 못 숨겨.”
의주는 쉽게 믿지 않고 306호 객실을 샅샅이 뒤졌다. 청소부 아줌마 진짜 끝내주게 프로페셔널하시네, 라는 감상이 따라왔을 뿐... 머리카락 한 올, 피 한 방울 찾을 수 없었다. 창 너머엔 공동묘지를 품은 뒷산이 형형했다. 저보다도 큰 의주를 능숙히 제압했던 게 무색하도록 니콜라스는 침대에 느긋이 앉아 그를 흥미롭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의주가 제 오프화이트 캐리어를 절도하려던 게 아니라 근거 있는 심증에 의해 내용물을 확인 중이었다는 사실에 아이러니하게도 마음이 풀어진 셈이었다.
“그럼 여태 데려온 사람들은?”
”다 죽은 자들. 그래서 이 방에서 ‘길’을 보여줬지.“
니콜라스가 지전(노잣돈)을 담배처럼 돌돌 말아 보여줬다. 입에 대지 않던 담배는 담배가 아니라 가짜 돈이었다. 대만식 제사 방법과 같이 니콜라스가 지전을 태우면 혼은 이승과의 연을 놓고 완연히 저승으로 돌아갈 몸이 된다. 이때부터 보통 영험하지 않고선 인간이라면 그 형상을 보거나 느낄 수 없게 된다. 망자들 중 그 누구도 굳이 창문으로 나가고 싶어하진 않았으므로(...) 니콜라스는 1. 지전을 태우고 2. 술을 함께 마시며 이야기를 들어주고 3. 소지품을 받은 뒤 4. 그들을 모텔 계단 앞까지 배웅해줬다고 한다. 지전을 태운 방을 밤새 잠그지 않는 건 긴 배웅과도 같은 의미. 소지품은 자국인을 위한 예우로써 대만에 돌아가 태워준다. 그러니까 나더러 이걸 다 믿으라고?
미친놈인가? 내가 미쳐가는 건가? 역시 12시간 근무 같은 거 하는 게 아니었어. 헛소리가 그럴듯하게 들리잖아. 정신력이 약해졌잖아. 의주는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워 대충 동조해주고 어디에도 발설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뒤 카운터로 돌아왔다. 어느덧 파랗게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CCTV 영상을 확인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방금 새벽 1시부터 돌려봤다. 캡모자를 눌러쓴 여성은 없었다. 니콜라스가 왔던 모들 날들을 확인했다. 모텔 입구, 카운터 앞, 계단, 복도엔 니콜라스 단 한 명뿐. 의주는 잠시 간 머리를 쥐어뜯었다.
며칠 후 니콜라스가 다시 찾아왔다. 말 좀 텄다고 손 흔들어 인사까지 하는데 이번엔 캐리어도 여자도 없다. 의주가 눈에 불을 켜고 허공을 스캔하고 있으니 니콜라스가 웃었다.
“오늘은 혼자.”
카운터에 엎드리듯 기대오자 얼굴이 부쩍 가까웠다. 의주는 괜히 CCTV 각도를 의식했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있지 너가 부탁한대로 나 누구한테도 말 안 할 거긴 한데. 너가 자꾸 오고 수상한 짓하면 들킬 수도 있어.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말도 있잖아 잘 모르겠구나 속담이라서. 아무튼 우리 사장님 무섭구, 알바들 눈치도 빨라. 너가 저승사자라서 잘 모를 수도 있는데 이승에 꽤 호락호락한 사람은 별로 없...”
“너 보러 온 거야.”
예상 밖의 말에 의주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너 괜찮은지. 괜찮네 아직.”
니콜라스는 진짜로 뭘 확인하는 듯 의주의 얼굴을 빠짐없이 들여다봤다. 곧 순식간에 카운터 너머로 몸을 밀어넣어 귓속말했다.
“주주 몰랐지. 귀신이 묵고 있는 거.”
불로소득 바라지도 않을 테니 귀신수당 이런 건 없나. 니콜라스는 변의주 속 모르고 필리버스터를 시작했다.
“어린 여자애야, 한국인. 그리고 주주한테 붙어 다녀. 좋아하나 봐. 하긴 주주 착하게 생겼으니까.”
“난 못 봤는데.”
“네 뒤에 있었으니까.”
의주가 홱 뒤편을 돌아보았다.
“지금은 없어. 위층에 갔나?”
니콜라스가 느릿하게 천장을 올려다봤다. 시선으로 실재하는 뭔가를 따라가는 듯 천천히 목을 돌리는데 목젖이 크게 도드라졌다. 의주 역시 아무것도 없는 천장을 보다가 구석의 거미줄을 발견하곤 작게 진저리쳤다.
“내가 목걸이 성수에 담가준 이후론 잘 안 보여. 그래도 여기저기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해. 주주 맨날 졸고 있잖아. 그거 걔한테 기 빨린 거다. 그리고 내가 데려온 귀신들 보이는 거 정상 아니야. 걔한테서 기운이 옮아서 그래.”
객실 대부분의 화재 경보기가 고장 나 지전을 태우기에 알맞고, 술이 약한 체질이라 마시자마자 바로 누울 수 있어서만이 아니었다. 니콜라스가 비너스 모텔을 자주 찾아온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도와주고 싶어.”
국적이 다른 관계로 완전히 저승까지 보내줄 순 없지만 저승사자로서 이승과의 경계를 지어 줄 순 있었다. 그러면 주변의 인간들도, 무엇보다 당사자인 망자도 훨씬 편해진다. 니콜라스의 눈빛이 본 적 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의주는 조심스레 입을 뗐다.
“나를...?”
“...그 애기를.”
아... 조금 머쓱해진 걸 다행히 들키지는 않았다. 왜냐면 니콜라스의 마음이 마구 달려 나가고 있었으니까.
“왜냐면, 외국 귀신 인도에 기여하면 무조건 포상금에 택스 프리. 나 이번에 잘해서 베트멍 바지 일시불로 사고 싶어. 진짜 내 소원.”
얼굴이 살짝 상기되기까지 할 일이냐고. 아무튼 계산기 두드려 보면 의주는 만성피로 해결하고 니콜라스는 갈망템 구입하고 윈윈 아닌가. 니콜라스가 호기롭게 손을 내밀기에 얼떨결에 악수에 응했다. 다시 만나면 내쫓으려고 했는데 어째 또 오세요 해버린 꼴이다. 니콜라스가 이어 라이터를 건넸다. 처음 보는 한자가 프린팅되어 있다. 태우는 데 말고 보는 데 써. 그 말을 곱씹어 보기도 전에 숙박 어플을 낮은가격대순으로 조회했을 게 뻔한 불운한 일본인 관광객 무리가 로비로 들어섰다. 니콜라스는 자연스럽게 자리를 비켰다. 손님이 여권을 내밀고 니콜라스가 유리문을 열었을 때 의주가 벌떡 일어섰다.
“니콜.”
쟤는 이상한 호칭에도 망설임 없이 돌아봐줬다. 그래서 의주는 쉽게 답을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어떻게 생겼어? 이름은 뭐야?”
“모르는 게 좋아.”
니콜라스는 예상치 못한 데서 단호했다.
“알면 그렇다고 믿게 되니까.”
울음소리가 다시 들린 듯했을 때. 의주는 니콜라스의 말을 다시금 재고해봤다. 알면 그렇게 믿게 된다라. 하지만 울음소리만큼은 니콜라스에게 모든 전말을 듣기 전부터 자신이 먼저 감지했던 것이었다. 의주는 혹여 작은 소리라도 놓칠까 숨소리마저 죽였다. 화장실을 갔다가 카운터로 돌아가는 복도 중간에서였다. 의주가 고개를 트는 순간 여자애의 웃음소리가 이명처럼 지나갔다. 반대편이었다. 그곳엔 웅웅 돌아가는 세탁실뿐이었다. 수십 번은 들락날락했던 그 문 앞에 가까워질수록 왠지 가슴이 답답해지는 느낌이었다. 문고리에 손을 가까이 가져가자 정전기가 소용돌이치며 웃음소리와 울음소리가 섞이는 듯했다. 머리를 흔들었다가, 심호흡을 했다가, 니콜라스에게 먼저 알려야 하나 했다가. 의주는 그냥 문을 열었다.
시간이 오래 지난 건가. 혹은 조금도 지나지 않은 건가. 파악하지 못한 채 의주는 비를 맞고 있었다. 억수로 쏟아지는 한가운데 누워 있었다. 고인 물이 누운 몸의 반어치를 넘실거렸다. 상체를 일으키면 달라붙은 머리카락이며 축축한 몸이 말도 못하게 찝찝했다. 도림천에 빠져 죽을까 했는데 물이 정강이까지도 안 왔던 시절이 있었다. 그땐 고작 초등학생이었다. 누나도 마찬가지였고. 빗소리 사이에 울음소리가 있었다. 온전히 일어나서 따라갔다. 물이 더 깊어지다 얕아지다 반복했다. 아무런 근거도 없었지만 왠지 누나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초등학교 1학년, 학원을 마치면 항상 함께 귀가하던 누나와 사소한 말다툼을 하고 딱 한 번 따로 집에 갔던 날이었다. 누나는 그날 이후로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고 동네는 한동안 시끄러웠다. 사람들은 도와주겠다며 지역 구석구석을 겨눴다가 의주네 가족을 겨누기도 했다. 미쳐서 팔짝 뛰었다가 말없이 벽만 보고 지내기도 했다. 신은 더 이상 믿지 않게 됐다. 시간은 타협해주지 않고 앞으로만 흘렀다. 의주는 극복하지도 묻지도 못한 채 성인이 되었다.
니콜라스는 모르는 게 좋다고 했지만 의주는 이해할 수 없었다. 누나가 어떻게 됐는지 알아야 했다. 알아야 생각을 멈출 수 있으니까. 신원 미상의 변사체, 납치되어 팔려간 여자들, 사고로 얼굴이 완전히 변형되고 기억을 잃은 사람. 뉴스·유튜브·신문 어디서든 접할 때마다 본능처럼 누나에 겹쳐 보는 짓을 그만둘 수 없었다. 오랜 날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죄책감에 혹사당했다. 한편 이런 생각도 했다. 어느 날 누나가 아무 조짐 없이 사라진 것처럼, 언젠가 어떤 형태의 누나든 알아볼 수 있을 것 같다고. 그 믿음이 사람을 버티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지금껏 귀신을 본 거라고 했을 때도 혹시 싶었다. 누나가 죽었다면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이건 기회이지 않을까.
물을 헤치며 나아가던 발이 무언가에 걸렸다. 엎어지자마자 바닥 없는 물속으로 몸이 집어삼켜졌다. 딱 숨이 멎을 듯이 괴롭다가 모든 것이 사라졌다. 깊은 어둠뿐, 소리도 냄새도 보이는 것도 없었다. 의주는 물기 없이 마른 자신을 더듬어 한시름 놓았다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불을 켜도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다시 울음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따라갈수록 라이터 불빛이 흐려질 만큼 시야가 밝아지기 시작했다. 어린 여자애가 엎드려 떨고 있었다. 울고 있었다. 켁켁 숨이 막히는지 목언저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했다. 의주는 마음을 다잡으며 가까이 앉았다. 누나. 누나... 그 작은 등을 어루만지는데 목구멍이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시큰거렸다. 다시 만난들 바뀌는 건 없는 건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건가. 사시나무처럼 떨리던 손이 양초처럼 녹아 그 몸에 엉겨 붙었다.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럴 겨를도 없을 만큼 이 무력감과 절망감을 어찌 다뤄야 하는지 몰랐다. 도망칠 수도 물리칠 수도 없는 운명의 굴레에 또 한 번 굴복하는 중이었다. 더 녹기 전에 의주의 정수리에 손바닥이 얹어졌다.
“이미 믿고 있었네.”
니콜라스였다. 검은 민소매 셔츠에 검은 조거팬츠를 입은 그가 의주에 어깨에 팔을 두르며 곁에 앉았다.
“그리워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고, 지금이어야 한다고. 그래서 주주도 길에 들어와 버린 거야.”
니콜라스는 곧 여자애의 목을 조르던 줄을 빼내었다. 줄은 증발하듯 사라졌고 의주의 양손은 다시 멀쩡히 달려 있었다. 그리고 왜인진 모르겠으나 이제 의주는 이 아이가 제 누나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엄마가 먼저 갔는데 엄마를 찾느라 못 떠나고 있었어.”
니콜라스의 말에 의주는 언젠가 모텔에서 모녀가 동반 자살했다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니콜라스의 표정이 조금 쓸쓸해 보였다. 저승사자란 생각 외로 감정 소모가 심한 직업일 수도 있겠다. 역시 남의 돈 버는 건 쉬운 일이 없구나. 먹고 사는 생각을 하니 조금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도 같았다. 니콜라스가 의주에게 지전을 주었다. 의주는 봤던 대로 돌돌 말았다. 저도 모르게 입술 가까이 가져갔는데 니콜라스가 손차양을 해왔다. 어딘지 공손하고 부드러운 손짓. 라이터로 불을 붙여주는 얼굴이 꽤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종이가 불타오르자 휘파람 소리가 났다. 불씨가 되어 춤추듯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돌아보면 여자애는 없었다. 니콜라스가 볼을 닦아줘서 의주는 그제야 제가 한바탕 울었다는 걸 깨달았다. 니콜라스는 의주를 껴안았다.
“돌아가면 주주도 도와줄게.”
그 마음이 고맙고 든든했다. 응... 의주가 오히려 니콜라스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니까 돌아가.”
니콜라스가 의주를 놓으며 말했다. 일어서는 걔는 어느 새 제 몸통을 다 가로지르는 긴 총을 들고 있었다. 거대하고 반듯하고 물이 출렁거리는... 캐리어에 꽉 차는 크기였던 그 물총 말이다. 의주를 겨눈 총구 뒤로 니콜라스가 장난스레 웃은 것 같았다.
담긴 건 성수였다. 물가에 누워 있던마냥 바닥에 정자세로 곱게 붙어 있던 의주는 물총 세례에 흠칫 정신을 차렸다. 으앗, 악. 손바닥으로 가려보고 몸을 접어도 니콜라스는 멈추지 않았다. 큰 물총 하나를 다 비우도록 머리부터 발끝까지 남김없이 적셨다. 웅웅대는 세탁실 바닥이 물바다가 되었다. 의주는 꿈에서 깨 몽롱한 듯이 느릿하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조금 웅크리며 정지해 있기에 니콜라스가 긴히 살폈다. 주주 괜찮아? 걱정스레 묻자마자 엣취! 커다랗게 재채기했다. 괜찮구나. 그 순간 바깥의 전화기 소리에 의주가 고개를 들었다. 이건 환청도 귀신 울음소리도 아니다. 진짜 카운터 전화기 소리라니. 내가 근로자라니... 가끔은 현실이 제일 무서운 법이다. 비척대며 뛰쳐나가는 의주를 니콜라스가 끌어안아 제지했다.
“안 돼 주주! 이거라도...”
선반 위를 더듬어 꺼낸 대형 타월을 허리에 둘러줬다. 흠뻑 젖은 면바지가 적절히 가려졌다. 의주는 ‘비너스 모텔’ 자수가 새겨진 수건을 엉거주춤 고정하며 카운터로 전력질주했다.
하필 이럴 일인가. 택시 마을버스 관광버스가 한 번에 도착하기라도 했냐고... 웬일로 열 명은 족히 넘는 손님이 카운터 앞에서 멀뚱멀뚱 기다리고 있었다. 철퍽철퍽, 물기어린 발소리와 함께 영 수상하고 숭한 꼬라지의 카운터 알바가 등장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쫄딱 젖어 모텔 타월을 치마처럼 두른 장신의 청년은 손님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뒤뚱뒤뚱 카운터석에 자리 잡았다. 일단 아직도 울려대는 수화기로 손을 뻗으며 변의주는 생각했다. 불로소득 존나 간절하다고...
“비너스 모텔입니다.”
계단 난간에 기댄 니콜라스만 큭 웃음을 참았다.
오전 9시 칼퇴. 의주는 카운터 자리에서 나온 일반 쓰레기를 분리수거장에 버리고 허리 젖혀 기지개를 켰다. 여느 때처럼 12시간 근무 후인데 묘하게 덜 피곤한 느낌. 내 기 빨던 귀신 아가가 사라져서 그런가. 길은 잘 찾아갔으려나. 엄마는 다시 만났을까. 아니면... 그냥 플라시보 효과일지도. 습관적 그 저승사자 의심하며 분리수거장을 빠져나왔는데 우연찮게 딱 마주쳐 버렸다. 다가오는 니콜라스는 양손을 뒤로 꽁꽁 감추고 있어 걸음걸이가 좀 어색했다.
“주주, 손 줘.”
“왜?”
“빨리.”
불룩한 슈프림 파우치 하나가 쥐여졌다. 의주는 단박에 지퍼를 열었다가 멈칫했다.
“이게 뭐야...?”
“나 너가 준 콘돔 다 모았어ㅎㅎ”
“왜...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쫌 감동 아니야?”
반응이 성에 안 차는지 니콜라스가 볼을 긁는다. 갯수를 눈으로 세던 의주가 작게 한숨 쉬었다.
“이거 유통기한 거의 다 됐을걸. 또 제일 단가 저렴한 거 무더기로 구입한 거라... 차라리 새 걸 써. 이건 같이 버리러 가자.”
의주가 분리수거장을 향해 앞장서자 니콜라스는 금세 따라붙는다.
“주주, 나 여기 한 달 숙박 끊을까? 그거 쓸 일 생길 수도 있잖아. 휴가 막 꼴아박아.”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우는 거야 니콜...?”
나란히 걷는 동갑내기 근처의 모텔 간판이 아침 햇빛에 양껏 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