非
익명
건물을 나선 의주가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의주는 이 향을 기억한다. 어제 하루 종일 내리던 비 덕에 공기는 맑아져 있었고 땅에 고인 물웅덩이로 인해 물 비린내는 지워지지 않았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기 전 마지막 봄이 남긴 차가운 비 냄새. 길어진 해가 군데군데 남은 비의 흔적을 쓸데없이 예쁘게 반짝여주고 있었다.
오후 여섯시 이십분의 지하철은 지친 사람들이 틈 없이 모여 여유라곤 없었다. 지하철에 타기 전 이어폰을 꺼내는 것을 깜빡한 의주는 덜컹이는 지하철과 시끄럽게 대화하는 사람들의 소음을 고스란히 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랜만의 정시 퇴근인데도 야근 후 귀가하던 때보다 더 피곤한 것 같았다. 뻑뻑한 눈을 비비고 싶은데 도저히 손을 올려들 공간이 생기지 않아 느리게 꿈뻑거리기나 했다.
지하철에서 쏟아지듯 내리자마자 본 건 거울에 비친 본인의 모습이었다. 이리저리 치여 한껏 구겨진 정장을 손바닥으로 대충 쳐봤지만 아침에 말끔하게 다려져있던 태로 돌아오진 않았다. 얼른 집에 가서 밥을 먹고 빨래를 하고 내일 입을 옷도 새로 다려야 할 테고... 의주의 구둣발이 천천히 바닥을 찍었다. 아 이쪽에서 내리면 에스컬레이터 없고 계단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시답잖은 생각을 하던 때였다.
의주? 최근 의주는 변주임님, 의주님, 변의주씨 말고 다른 호칭으로 불려본 적이 잘 없었다. 눈코뜰새 없이 바빠 평일 퇴근 후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인스타그램 속에서도 족했고 주말엔 밀린 잠을 자느라 집 밖에 한 번도 못 나가볼 때가 더 많았다. 그래서 더 낯설게 느껴지는 제 이름 두 글자에 조금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고개를 드는 찰나의 순간에 의주는 깨달았다. 아, 이거 많이 들었던 목소린데. 고개를 마저 든 의주는 그제야 지하철 안에서 못 비볐던 눈을 비볐다. 가볍게 말아 쥔 주먹이 눈에서 떨어지고 시야가 또렷해진 순간 의주는 바보처럼 아, 소리만 냈다.
많이 들었던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고 있는 많이 봤던 얼굴. 니코와 마주한 건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니콜라스는 여전한 듯 여전하지 않은 것 투성이인 채로 의주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사실 보통 걸음걸이로 다가왔을 텐데 의주에겐 그게 슬로우 효과를 건 것처럼 느껴졌다. 의주는 와중에 천천히 그를 눈으로 뜯어봤다. 만날 땐 좀 자르는 게 어떻겠냐는 의주의 제안에도 부득불 사수하던 뒷머리가 댕강 잘려 목이 훤했다. 살이 빠졌는지 조금 핼쑥해 보이기도 하고. 의주를 보자마자 벗어 손에 쥐고 있는 헤드셋은 예전 쓰던 것 그대로고.
니콜라스의 발이 제 발 거의 바로 앞에 닿았다는 걸 알았을 때야 생각을 멈췄다. 안녕. 오랜만이네. 지하철에서 한 마디도 안 했으니 당연히 목이 잠겼다. 조금 갈라진 목소리가 평범한 인사말을 내뱉었을 뿐인데 니콜라스의 미간이 바로 걱정으로 구겨진다. 감기 걸렸어? 그 물음을 들은 의주는 단박에 깨달았다. 아, 빨리 이 순간을 끝내야 한다. 니콜라스의 다정함 묻은 걱정은 여전히 의주를 슬픔으로 물들인다. 와중에 니콜라스의 왼손 약지에 반지가 있는지 확인하는 자기 자신이 싫었다.
집으로 돌아온 의주는 계속해서 귓가를 맴도는 그의 목소리에 작게 도리질을 쳤다. 번호 안 바뀌었지? 나도 안 바꿨어. 잘 지내는지 정말 궁금했어... 조금 상기된 듯한 니콜라스의 긴 대사 다음 의주의 답변은 형식적이었다. 응 연락할게. 무슨 연락을 하겠다는 말인가.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집까지 무슨 정신으로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평소와 똑같이 걸었는데도 숨이 찼다. 그러니까 이 둘이 얼마나 오랜만이냐면, 헤어지고 나서 1년 정도가 흐른 게 지금이었다.
튀는 것 없이 수수하게 착실한 의주 옆에 패션 잡지 모델처럼 입고 주변에 사람이 많은 니코는 어쩌면 어울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도대체 어떻게 만나게 됐냐는 질문을 마주치는 사람마다 했다. 그럼 의주는 얼버무리듯 웃어넘기는 척 어떤 연도의 초여름을 회상했다.
모여서 공놀이하는 것에도 크게 뜻이 없던 의주는 단순히 키가 크다는 이유로 농구 모임에 자주 불려갔다. 대체로 빠졌지만 가끔 땀을 흘리고 싶다거나 운동을 좀 해야겠다 싶을 때는 참석하는 편이었다. 팀플이 길어져 조금 늦게 한강으로 갔던 날, 의주는 피곤함에 그냥 집에 갈까 싶었지만 안 그래도 사람 없다고 난리 칠 거를 듣는 게 이골이 나 한강으로 향했다. 대충 얼굴만 비추고 과제 핑계로 적당히 빠질 생각이었다.
의주가 늦는 탓에 다른 무리와 함께 농구를 하고 있던 친구가 의주를 보자마자 공을 멈추고 뛰어왔다. 왜 이렇게 늦었어. 얼버무리듯 팀플 이야기를 하며 가방을 내려놓자 갑자기 경기를 멈추게 된 사람들이 의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른 몸 풀고 오라는 말에 의주가 고개며 발목을 빙빙 돌리고 있자 누군가가 공을 바닥에 튕기며 다가왔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왜? 내 친구 방금 왔는데...”
“응. 얘 오늘 농구하면 안 돼.”
턱이 얄쌍한 남자가 땀에 젖은 머리를 쓸며 의주의 신발을 가리켰다. 앞코가 아직 더러워지지 않은 납작한 컨버스 스니커즈.
“이거 신고 농구하면 무릎 다쳐.“
“아. 잠깐 뛰는 건데 괜찮아.”
의주는 가만있는데 한창 농구가 재밌었던 친구가 더 난리였다. 바닥에 튀겨지던 농구공은 남자의 옆구리에 끼인지 오래였다.
지하철 타고 한강까지 간 보람 없게도 의주는 공 한 번 쥐어보지 못했다. 대신 어색한 인사 후 악수나 나눴다. 안녕. 어. 안녕...
얼마 지나지 않아 한강에서 다시 만나게 된 남자는 반갑다는 듯 웃으며 본인을 니콜라스라 소개했다. 교포? 외국인인가? 의주의 생각을 다 읽었다는 듯 니콜라스는 본인이 대만 사람이고, 왕이샹인데 발음이 어려워 한국에서는 잘 안 쓴다고. 너만 괜찮다면 니코라도 불러줘도 좋다는 말을 막힘없이 술술 뱉었다. 그 사이 의주는 낯을 가리느라 겨우 제 이름이나 말할 수 있었는데 니콜라스는 의주의 이름을 알게 되어 정말 기쁘다는 듯 입이 시원하게 벌어지게 웃었다.
그렇다면 오늘의 니콜라스는 어땠지? 의주는 꿈이라도 꾼듯한 기분이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대화도 나누었는데 니콜라스의 표정이 어땠는지가 기억에서 순식간에 휘발됐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제 표정이 어땠을까 걱정이 들었다. 여러 감정이 뒤섞였을 표정이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머리가 복잡하더라도 할 일은 해야 했다. 냉장고를 열었다가 입맛이 없어 밥은 건너 뛰고 바로 세탁기를 돌렸다. 그러다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대충 마실 걸 준비했다. 오늘따라 더 적막하게 느껴지는 집안에 노래를 틀고 내일 입을 정장을 다림질했다. 의주는 착실히 할 일을 하다 정장을 옷걸이에 걸고 난 후 올라오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무릎을 모아 바닥에 주저앉았다. 니콜라스를 마주한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의주에게 너무 버거운 일이었다.
헤어진 옛 애인을 우연히 마주친다고 해서 일상이 뒤틀리지는 않는다. 의주는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를 보냈다. 오전 내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일을 하고 우르르 몰려가 점심 식사를 한 뒤엔 오전에 한 일을 검토하며 오후를 보냈다. 얼마 전 들어온 인턴 교육을 맡게 돼 일이 두 배로 늘어나 꼼짝없이 야근해야 하는 처지였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일을 대충 끝내고 기지개를 켜자 어깨에서 연골이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사내 메신저 접속 현황을 보아하니 의주를 제외한 모두가 퇴근을 한듯했다. 피곤함에 자꾸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며 컴퓨터 전원을 끈 의주가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이 늦어 택시를 탈까 했지만 짧은 고민 끝에 발을 분주히 움직였다. 막차 시간에 맞추려면 서둘러야 했다.
사실 야근 내내 일에 집중이 전혀 안 됐다. 니콜라스가 왜 본인이 사는 곳 지하철역에 있었는지에 의문이 들어 저녁을 먹는 걱도 잊었다. 사귀던 때에도 니콜라스는 의주와 꽤 먼 곳에서 살았고 귀갓길이 멀다는 핑계로 자주 의주의 집에 머물렀다. 이사를 왔다 하더라도 헤어진 연인이 사는 동네로 온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자꾸 머리에 피어오르려는 생각을 멈추려고 평소 즐겨 듣지 않는 노래며 오늘 나온 신곡들을 플레이리스트에 넣어 들었다. 억지로 들리지도 않는 가사와 취향도 아닌 비트에 집중하던 의주가 이어폰을 빼고 고개를 푹 숙였다. 니콜라스에게 맞춰보려던 과거의 본인이 한심해서 그랬다.
억지로 맞췄다는 말이 과격해 보일 수 있지만, 이건 부정적인 의미는 절대 아니었다. 다만 니콜라스를 알게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적의 의주는 정말 그랬다. 농구 룰도 잘 모르고 대충 동네 농구 정도로만 하고 싶었던 의주는 니콜라스와의 경기가 힘들었다.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땀이 흐르는 여름밤이 버거워 잠시 숨을 고르고 있자면 니콜라스가 몸을 한껏 낮춘 채 옆을 치고 나갔다. 같은 팀이어도 힘들고 다른 팀이면 괴로웠다. 니콜라스 따라가다 과호흡 오겠다 싶어 결국 항복하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면 그제야 웃으며 의주에게 뛰어왔다. 경기 내내 누구 하나 죽일 듯 무섭던 표정이 순식간에 풀어지는 건 경이롭기까지 했다.
듣자 하니 현재 유학 중인 대학에서도 농구팀으로 활약하는 듯했다. 수돗가에서 거의 상반신 전체를 씻고 있는 니콜라스 옆에서 물을 마시던 의주가 넌지시 말을 던졌다. 니코 너 그럼 인기 되게 많겠다. 물소리에 의주의 말을 잘 듣지 못한 니코가 귀를 가까이 대오면 다시 말해줬다. 니코 너 인기 많겠다고. 니콜라스는 의주가 무슨 말을 하든 웃으며 대답하는 편이었지만 그때만큼은 단호했다.
주주... 난 그런 거 관심 없어.
난 너만 있으면 돼.
이름 끝자를 따서 별명 만드는 걸 가만뒀더니 이젠 아예 주주라고만 불렀다. 아무튼... 의주는 물에 쫄딱 젖어 표정을 굳히는 니콜라스를 보며 웃었다. 이후 니콜라스는 아주 오래도록 그 장면의 의주가 웃는 모습이 너무 좋았다는 이야기를 반복했다. 물 냄새 나던 계절이었다.
니콜라스는 해외에서 와 친구가 별로 없어 외롭다는 말을 하며 의주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자주 메신저 해도 되지? 번호 좀 달라는 말도 없었는데 의주가 핸드폰을 자연스럽게 받아 자기 번호를 찍었다. 응. 짧은 대답이었다. 본인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웃으며 방방 거리는 게 질릴 법도 한데 계속 새로웠다.
천천히 고개를 든 의주가 핸드폰 화면을 켜 연락처로 들어갔다. ㄴ 으로 단숨에 스크롤을 내리면 연락처를 교환했던 때와 똑같은 저장명이 손가락 아래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니콜라스. 애칭으로 바꿔달라 조르던 얼굴이 생각나 옅게 웃었다. 연락한다던 말을 믿고 아직 기다리고 있으려나. 살이 좀 빠진 것 같았는데 잘 챙겨 먹긴 하는가... 우습게도 니콜라스는 지금의 의주에게도 윤슬이 아닌 파도였다.
본격적으로 여름에 들어섰다는 걸 티라도 내듯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아침에 잠깐 들은 뉴스에 의하면 이 비 후엔 찌는 더위가 시작될 거라 했다. 소리마저 살벌한 비가 유리창으로 물결 모양 커튼을 남겨냈다. 일기예보를 확인하니 밤쯤엔 그칠 모양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하필 팀원들이 유독 반차나 연차를 많이 쓴 날 큰 실수가 발견돼 의주가 그걸 다 해결했다. 눈치가 보여 집에도 못 가고 안절부절못하는 인턴을 괜찮다고 집에 보냈을 땐 조금 후회했다. 탕비실에서 허기를 달래는 것엔 한계가 있었고 일은 줄어들질 않았다. 막차라도 타자... 하늘도 의주의 심정을 아는지 계속해서 비를 내려댔다.
긴 몸이 녹초가 되어 한껏 구겨졌다. 우산을 쥔 손 마디까지 아팠다. 내일은 연차 쓸까. 잘 일어나지도 못하고 내내 앉아 있었더니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계단 계단마다 허리가 아우성이었다. 오늘 최악이다. 푹 젖은 미끄러운 바닥 위로 구두가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불현듯 든 생각은 의주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니코 보고 싶다... 니콜라스와 사귀고 있을때는 보고 싶다고 말할 새도 없이 항상 니콜라스가 곁에 있었으니 생각해본 적 없었고, 니콜라스와 헤어진 후로는 노력해서 머리에서 지운 생각이었다. 그냥 만났을 때 더 길게 대화해 볼걸 그랬나. 연락해 볼걸 그랬나... 와중에 어리광 피우고 싶어질 때가 되어서야 니콜라스가 보고 싶어진 게 짜증이 나 앞으로 멘 가방에 얼굴을 묻었다.
니콜라스는 자주 의주의 생각을 읽는 듯 행동했다.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에 서툴렀던 과거의 의주에게 필요한 행동을 니콜라스는 알았다. 의주가 누군가를 불편해하면서도 그걸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면 니콜라스가 은근 의주를 자기 옆에 끌어왔다. 생각이 많아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걸 눈치챘을 땐 보고 싶어도 의주를 기다렸다. 생각이 복잡해지거나 가라앉으려 하면 눈 깜짝할 사이 나타나 어깨를 두들겨줬다. 가방에 얼굴을 더 깊게 파묻은 의주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내가 니콜라스랑 왜 헤어졌더라.
머리가 복잡해진 동안 시간은 착실히 흘렀고 지하철은 의주가 내릴 역에 도착했다. 급하게 일어나 허둥지둥 내린 의주는 이유 모르게 차오르는 숨에 무릎을 짚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빙빙 도는 것 같았다. 같은 역에서 내린 사람들이 의주를 보고 걱정하듯 괜찮냐 물어왔지만 의주에겐 웅웅 거리는 소리로만 다가왔다. 도중에 또렷하게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말소리도 아니고 급한 듯 뛰어오는 발소리...
제가 챙길게요. 아... 아는 사람이에요. 고개를 들지 않아도 누군지 알았다. 니콜라스는 여전히 의주의 생각을 다 안다는 듯 굴었고 보고 싶을 때 모습을 보여줬다. 타지도 못 할 만큼 커다란 파도 앞에 의주는 그저 눈을 꾹 감았다.
의주는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왔지만 제 뒤에 니콜라스를 세워두고 도어락 비밀번호를 치고 있는 지금이 맞는 상황인지에 대한 판단이 서질 않았다. 의주의 집 비밀번포를 보지 않겠다는 듯 멀리 서있는 니콜라스에게 의주가 첫 마디를 건넸다. 들어와. 바쁜 와중에도 집을 꽤 치워놔서 다행이었다.
밖에서는 서성거리기만 하던 니콜라스가 의주의 집 문이 열리자마자 성큼 들어와 냉장고까지 한달음에 다가갔다. 생수병을 까는 손이 은근 떨리는 걸 보아 니콜라스도 놀란 것 같았다. 물을 받아 마신 의주와 덩그러니 서있는 니콜라스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현관에 걸어둔 우산에서 빗물 떨어지는 소리가 다 들릴 정도였다.
밤이면 그친다던 비는 어째 바람까지 동반해 더 거세져 있었다. 지하철은 끊긴지 오래니 니콜라스가 돌아갈 방법은 택시밖에 없었는데 그러자니 마음이 또 불편했다. 의주는 말없이 새 칫솔을 준비했다. 헤어질 때 니콜라스의 칫솔을 버리다 욕실에서 한참을 울었던 게 떠올라 괜히 그때와 다른 색깔의 칫솔을 욕실에 두었다.
의주가 아무 말 없자 니콜라스도 아무 말이 없었다. 의주의 시야에 푹 젖은 니콜라스의 어깨가 들어찼다. 우산이 없대서 의주의 우산을 함께 쓰고 집에 온 참이었다. 의주의 시선이 제 어깨에 꽂히자 니콜라스가 멋쩍게 웃으며 어깨를 털었다. 씻고 와. 문 앞에 옷 둘게... 의주는 괜찮냐 어디 아파서 그랬냐 묻지 않는 니콜라스에게 내심 고마웠다. 지금은 필요에 의한 말밖에 뱉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니콜라스는 의주가 씻고 나오고서야 의주를 살폈다. 울상이 되어 손도 못 대고 이리저리 살피는 니콜라스에게 억지로 입꼬리를 당겨 웃어 보였지만 그의 표정엔 여전히 걱정이 묻어 있었다. 니콜라스와 다시 마주하게 된다면 나눌 대화가 많을 줄 알았는데. 허공에 하던 질문을 니콜라스에게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의주는 정말 괜찮다며 몸을 일으켜 전등 스위치 쪽으로 다가갔다. 일찍 자자. 피곤해. 니콜라스는 뭘 말하려는 듯 입을 달싹이다 의주를 따라 억지 미소를 지었다. 응. 짧은 대답에 집이 암전으로 물들었다.
토퍼에 누운 니콜라스와 침대에 누운 의주. 낯설지만 당연했다. 분명 피곤함에 바로 잠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하루를 보냈음에도 잠이 오질 않았다. 이명까지 들리는 것 같던 순간이었다.
주주. 그때 내가.
응...
몸이 안 좋은 것도 아닌데 자꾸 땅으로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니콜라스가 애매하게 말을 맺길 간절히 바랐다.
결혼 이야기를 꺼낸 거 미안해.
의주는 이명이 니콜라스의 목소리를 흉내 내 문장을 만들어낸 거라 믿고 싶었다. 대답하지 않으면 니콜라스는 더 미안해할 텐데 도저히 대답할 수가 없었다.
니콜라스의 조심스러운 의주 나랑 만나줄 수 있어? 로 시작된 관계는 더할 나위 없이 순탄했다. 사귀기 전엔 앞뒤 가리지 않고 온갖 감정을 쏟아내더니 사귀게 된 후론 의주를 신경 쓰고 배려하느라 온 정신이 팔려있었다. 의주가 드물게 예민해졌던 시험 기간에도 교환학생을 고민하던 때도 거의 매일 우울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취준기간에도. 니콜라스는 차고 넘치는 사랑의 다음 스텝을 위해 의주의 속도를 좇을 줄 알았다.
그러다 각자의 속도가 한 번 어긋난 날이 있었다. 의주는 무언가가 안에서 목께까지 울컥하고 차오르는 느낌에 목울대를 크게 꿀꺽였다. 입안이 바짝 말라 소리도 넘어오는 것도 없었다. 다만 그렇게 허공을 삼켜내 속에 있는 진심을 눌렀다.
그건 그냥 다 내 겁 때문이었다고. 나름 준비했을 프러포즈에 당황했던 내 표정이 나도 보이는 것 같아서 그랬다고. 그저 좋아할 수 없고 떠올랐던 많은 상황들과 이루어놓은 것들이 너보다 중요했을까 후회된다고. 너는 그 말을 하려 나를 기다렸던 거냐고.
그런데 내가 이렇게 대답하면? 대답으로 인해 생길 관계의 변화에 대한 기대보다 제 말을 듣고 니콜라스가 다시 상처받지 않을까에 대한 무서움이 더 컸다. 대답을 아끼고 다시금 겁을 먹은 의주에게 니콜라스는 물론 괜찮다 말해주겠지만... 이명 사이로 빗소리가 치고 들어왔다. 우리는 만나게 됐을 때도 완전히 헤어지게 되는 때에도 어느 방식이로든 물기 어려 있구나. 아가미 없는 한 쌍은 갈라져 각자 다른 곳으로 잠겨만 갔다.
누구도 잠들지 못했지만 누구도 눈뜨지 않는 밤은 천천히 아침을 데려왔다. 의주는 평소보다 이르게 몸을 일으켜 출근을 준비했다. 준비하는 동안 니콜라스를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몰래 울어 부운 눈엔 피곤보단 슬픔이 더 많이 앉아 있었다.
니콜라스는 도어락 닫히는 소리가 들린 후 한참이 지나서야 눈을 떴다. 잠을 못 잤는데도 하품조차 나오지 않았다. 니콜라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의주의 집을 둘러보았다. 어디 하나 모난 곳 없이 의주를 닮아있는 집. 그럼 니콜라스는 그것만으로 만족하는 거다. 어떤 애정은 여전함에 안도하며 물러날 줄 알아야 했다.
의주는 분주하게 준비하는 것 같더니 완전히 건조한 니콜라스의 옷을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기까지 했다. 잠이 많아 항상 바쁜 아침을 보내는 니콜라스에겐 오랜만에 여유로운 아침이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냐 묻는다면... 니콜라스는 그 아침에 아이처럼 울었다. 실감이란 회피가 끝났다는 말과 같았다.
니콜라스는 나갈 준비를 마치자마자 곧장 근처 약국에 들렀다. 어제 의주의 상태를 간략하게 말하고 받은 약에 다른 상비약까지 결제한 니콜라스가 의주의 집으로 돌아갔다. 습관처럼 도어락을 열어 본인의 생일을 치려다 얌전히 닫아두었다. 대신 문 앞에 쭈그려 앉아 작은 종이에 메모를 남겼다.
我马上就要回台湾了. 그 후로 적어내는 말들은 모두 약에 관련된 말들이었다. 어떤 건 꼭 식후에 먹어야 하고 한 번에 몇 개를 먹어야 한다는. 문고리에 걸어둔 묵직한 약국 봉투 안에 메모를 넣어두면 정말 끝이었다.
건물을 나선 니콜라스가 맑게 갠 하늘을 보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니콜라스는 이 향을 잊어야 했다. 어제 하루 종일 내리던 비 덕에 공기는 맑아져 있었고 땅에 고인 물웅덩이로 인해 물 비린내는 지워지지 않았다. 봄이라는 계절을 완전히 지워내고 여름만 남은 습한 비 냄새. 내리쬐는 햇볕이 머리에 닿고 니콜라스는 물웅덩이를 피해 걸음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