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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파
*실존 인물, 사건, 조직과 무관하며 실제 프로야구의 운영 방식과 다른 서술이 있습니다.
… 네, 다시 1번 타자 변의주 선수가 타석에 들어섭니다. 재작년 5월 민준호 선수의 갑작스런 부상으로 한 자리가 비어버린 울브즈의 외야를 채우며 등장했죠. 지난 시즌 타율 3할 0푼 2리, 득점권 타율도 같고요, 그리고 출루율이 4할 1푼. 작년 코리안 시리즈 3차전에서 끝내기 안타로 이어진 2루타 때려낸 선수입니다. 이제 입단 4년차. 올 시즌 유니브 팬분들이 변의주 선수에게 걸고 있는 기대가 크죠. 현재 볼 카운트는 투 앤 투(2S-2B).
변의주 선수, 이전 타석에선 삼진으로 물러났는데… 아, 떨어지는 공, 지켜봅니다. 풀카운트. 지난 아시안게임 때에도 변의주 선수가… 대만과의 결승전이었죠? 12구 승부 끝에 3점 홈런을 쳤었는데요, 심리적으로 몰릴 수 있는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공을 보는 모습이 참… 젊은 선수 답지 않죠. 네, 그렇죠. 유니브 팬분들이 좋아하실만합니다. 또 한 번 파울. 승부가 길어지네요. 이제 8구째. 다시 한 번 파울. 임인찬 선수, 지금 변의주 선수 상대로 어려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주자 2루와 3루, 득점권에 주자가 둘이고 투아웃 상황.
변의주 선수 역시, 지금 선택지는 볼넷 출루 또는 안타밖에 없습니다. 또 다시 파울. 아, 방금 라인에 걸친 공, 아주 높게 뜬 파울이 되었습니다. 이 타석 결과가 궁금해지는데요? 각 팀 스코어는 4대 2, 유니브가 지금 2점 차이로 뒤쳐지고 있는데, 이번 찬스를 놓치면 한 번의 공격 기회만 남습니다. 네, 변화구- 때렸습니다! 이 공, 높게- 높게- 담장-!
담장…!!
넘-!
… 잠시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뉴스 속보 전해드립니다. 미항공우주국, NASA에서 4월 17일 오늘, 목성 인근에 출현한 미확인 비행 물체, UFO의 존재를…
아… 미확인 비행 물체의 존재를 확인했다고 발표했습니다. 15분 전 진행된 공식 기자회견에서, 해당 미확인 비행 물체는 약 80일 뒤 지구에 도착할 것으로 예상되며, 이와 관련한 지적 외계 생명체의 신호를 받은 사람들을 전세계에 걸쳐 찾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미국 현지 CNN 뉴스 연결해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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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25일
생각해보면, 이 모든 일의 시작은 니콜라스, 그 애다.
KBO(한국프로야구) 리그 소속 구단, 유니브 울브즈의 선수가 된 지 1시간이 지난 변의주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야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같은 가벼운 질문에 깊은 한숨을 내쉬어버리면 이상하잖아. 입단 기념 인사 영상을 찍자며 카메라를 켜고, 기대에 찬 눈으로 저를 보는 홍보팀 직원 분들을 실망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 안녕하세요, 2021년, 유니브 울브즈에 입단하게 된 청암고등학교 외야수 변의주입니다.”
우선 간단한 인사로 운을 떼었다. 변의주의 머릿속에서는 초등학교 시절의 어떤 순간이 멋대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야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 시작, 계기. 변의주에게 있어 그런 묵직한 단어들은 오롯이 누군가를 향한다. 그리고 그게, 지금은 싫다.
*
12살, 초등학교 5학년. 변의주는 이미 다른 남자아이들보다 한 뼘이 더 컸다. 저를 마음에 들어한 선배와 짝을 이뤄 나간 선거에서 승리해 전교 부회장이었고, 딱히 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명분이 있었지. 담임 선생님이 대만에서 전학온 남자아이를 변의주에게 맡길 명분이.
“… 이름이 뭐야?”
“응?”
“이름, 그, name…”
“아-”
분주한 교무실 책상에 앉아 변의주를 올려다보는 눈동자. 그 애는 다른 남자아이들처럼 변의주보다 한 뼘이 작았고, 목소리가 낮았고, 눈매가 날카로워서 인상이 강했고, 이름이-
“니콜라스.”
니콜라스라고 했다. 나는 변의주야. 의주? 응, 의주. 니콜라스는 의주, 라는 어절을 몇 번 발음해 보다 조용해졌다. 교무실에서 교실까지 가는 길이 유독 멀었다. 복도는 새학기에 들뜬 아이들로 가득했다. 외국인이, 전학생이, 나를 놓쳐서 길을 잃으면 어떡하지? 그런 걱정에 손을 끌어당겨 꼭 잡았는데, 저를 빤히 보는 차가운 얼굴에 마음이 불편했다. 그냥 긴장한 건지, 아니면 정말,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변의주는 빨리 자리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니콜라스는 그 표정 그대로 교실 문 앞에서 멈춰섰다. 어… 여기가 우리 반이야, 들어가자. 그렇게 말을 해도 못 들은 건지, 니콜라스는 조용히 제 책가방을 내려 뒤적였다. 한 손은 여전히 변의주에게 내어준 채로. 뭘하는 거지… 싶어 함께 가방 안을 들여다보던 눈 앞에 초콜릿 두 알이 내밀어졌다. 얇은 비닐로 사탕처럼 포장된 작은 초콜릿 두 알. 그리고 딸려오는 니콜라스의 목소리.
“초콜릿 먹을래?”
그걸 받았던가, 말았던가. 그건 잘 기억나지 않지만, 딱 하나는 확실하다. 초콜릿을 내밀며 슬쩍 웃는 얼굴이 어색했다는 것. 아주 어색했지만, 그 표정이 의외로 귀엽다고 생각했었다는 것도.
니콜라스는 당연하게 변의주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3월 한 달 동안은 담임선생님의 배려 덕분이었지만, 그 다음달은 순전히 운이었고, 또 그 다음달은 니콜라스가 당시 유행하던 팽이 장난감인지, 게임 카드인지로 변의주의 새 짝꿍과 거래를 한 결과였다. ‘무표정이 차가워서 불편하다’는 첫인상이 녹아내리는 데에 한 달 정도가 걸렸다. 날이 풀린 시기와 같았다. 목련이 다 떨어지고 철쭉이 활짝 필 때 쯤부터는 하교를 같이 했다. 학교 앞 마트에서, 변의주는 니콜라스에게 쌍쌍바를 깔끔하게 가르는 법 같은 걸 알려주었다.
다른 친구들을 잔뜩 사귀고도 니콜라스는 항상 변의주에게 돌아왔다. 어디에 꽂혔던 걸까. 지금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발음이 어려웠는지,
“주주!”
같은 별명을 멋대로 부르면서. 변의주는 니콜라스에게 흰 우유를 초코 우유로 만들 수 있는 가루를 소개해주었고, 국어 숙제를 도맡아서 도와주었고, 배드민턴 수행평가의 짝이 되어주었다. 밀어내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즐거웠으니까. 비슷한 매일에 주주, 라고 저를 칭하는 목소리가 끼어들면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게 좋았고, 더이상 어색하지 않은 웃는 얼굴이 편했다. 그래서 날이 더워진 뒤에도 운동장 스탠드에서 제 무릎을 베고 누워 아이스크림을 먹는 니콜라스를 내버려두었다.
“주주.”
“응?”
“우리 학교 베이스볼 팀 있잖아.”
“응.”
“나, 그거 할까?”
“어… 너 하고 싶으면 해봐.”
“근데, 학교 끝나고 주주랑 못 놀잖아.”
“그건-”
“그러니까 같이 하자.”
“그렇… 뭐?”
이 사이로 물고 있던 아이스크림 막대를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황당한 얼굴을 한 변의주를 보며 니콜라스는 실실 웃을 뿐이었다. 주주, 지금 얼굴 무서워. 큭큭 대느라 눈과 입이 가늘어진 표정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그럼… 나도 한 번 해볼까. 니콜라스는 항상 파도처럼 무언가를 휙 몰고 와서는 변의주의 손등을 간질이곤 했다. 그 간지러움이 싫지 않아서 시작한 야구에 금세 몸이 익었다. 플라스틱 배트로 말랑한 공을 치는 것뿐이었지만. 휘둘렸다면 휘둘린 거고, 휩쓸렸다면 휩쓸린 거다. 야구도 그 중 하나였다. 니콜라스가 출국을 하루 앞두고 미국에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한 것도, 마찬가지였고.
“… 화났어?”
“아니.”
“그러면?”
“그러면, 뭐.”
“의주, 슬퍼 보여서.”
“…”
“상처 받았어?”
원래 아버지 직업 때문에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고 했었다. 그래도, 한국을 이렇게 금방 떠날 거라고는 말한 적 없잖아. 하다못해 조금 더 일찍 얘기해줄 수는 있었잖아. 변의주는 얇게 쌓인 눈을 어그부츠 앞코로 툭툭 헤치기나 했다. 금세 발 밑이 질척거렸다. 그래놓고 상처 받았냐니.
“… 아니야.”
“근데, 왜…”
“니콜, 너, 이제 와서 안 갈 것도 아니잖아.”
“…”
“내가 지금 뭘 해도, 어차피 너는 갈 거잖아. 아니야?”
그 말은 열두 살의 변의주가 열두 살의 니콜라스에게 건넨 마지막 인사가 되었다. 굳은 얼굴로 저를 보는 아이를 교문 앞에 세워두고 돌아섰으니까. 이유도 모른 채로 눈물이 나올 것 같았고, 니콜라스 앞에서 엉엉 울기는 싫어서 그랬다. 상처 받았던 거냐고?
절대 아니.
변의주는 니콜라스가 떠나고 나서도 야구를 그만두지 않았다. 하루가 통째로 비어버린 기분이 싫어서 그랬다. 그만두지 않으니, 잘하게 되었고, 잘하다 보니 재미도 붙었다. 재밌어지니까 더 잘 되던데? 그 뒤로 변의주는 모두가 말하듯 꾸준했고, 성실했고, 그리고-
고등학생이 된 후, 딱 한 번 니콜라스와 마주쳤다.
*
그 사건을 떠올린 변의주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살며시 뜨고는 가볍게 답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친구가 같이 하자고 해서… 시작했습니다.”
유니브 울브즈의 2021년 신인 드래프트 2라운더, 청암고등학교 외야수 변의주. 그가 야구를 시작, 하게 된 계기, 는 그뿐이다.
*
2024년 3월 31일
변의주가 타석에 선다. 야구화 밑창에 달린 스파이크 사이로 흙바닥 대신 푸른 잔디가 밟힌다. 손에 든 건 배트. 낯설다. 나무로 된 것이 아니니까. 두 손으로 잡으니 냉기가 스미는 은색 배트다. 고개를 들면 보이는 풍경은 검은색의 둥그런 무언가가 싱크홀처럼 자리 잡은 탁한 하늘. 변의주는 그 공동을 보며 심호흡을 한다. 오른손으로 배트를 쥐고 몸 앞에서 서너 바퀴를 빠르게 돌린 뒤, 두 손으로 잡고 그라운드를 가볍게 툭, 친 후 자세를 잡는다. 그리고 하늘에서 눈 앞으로 새카만 구체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변의주는 침착하게 배트를 휘두른다. 타격한 구체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가죽으로 된 야구공보다는 초등학교 때 쓰던 소프트볼에 가까운 감각이다. 그렇게 5분 정도 하늘에서 쏟아지는 구체를 빠짐없이 쳐내면, 어느 순간 그 빈도가 뜸해지더니 더이상 아무것도 날아오지 않는다. 변의주는 그제서야 크게 숨을 내쉬고 배트를 내려놓는다. 보통 3루가 있을 왼편에 하늘을 향해 뻗은 경사로가 있다. 꼭 활주로 같은 그 길을 따라 누군가가 달리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변의주가 문득 오른발을 떼고, 밟고 있던 그라운드를 보면,
[100]
이라고 적힌 하얀 글씨. 무슨 뜻이지? 의아해하는 사이, 알람 소리가 시끄럽게 울린다.
변의주가 눈을 뜬다.
*
“무슨 꿈이…”
이 모양이지. 나직히 중얼거린 변의주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일요일 아침 8시, 이제 슬슬 짐을 챙겨서 야구장으로 출발하면 딱 맞는 시간이다. 칫솔을 입에 문 채로 생각했다. 아무래도 개막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올 시즌부터 맡게 된 1번 타자, 리드 오프라는 역할도 국가대표팀 이후로 처음이라 부담스럽고, 그래서 예민해진 것뿐이라고. 애초에 꿈 해몽이나 미신에 목을 매는 성격도 아니었다. 창 밖의 하늘은 구멍은 고사하고 구름 한 점 없이 파랬다. 변의주는 제 갈색 머리칼을 한 번 쓸어넘기고는 말았다.
그렇게 별 일이 아닐 줄 알았다.
2019년 2월 10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진행된 청암고등학교 야구부의 전지훈련은 현지 청소년 야구팀들과의 시범 경기로 이루어졌다. 봉황대기 우승 기념으로 제법 큰 지원을 받아 이루어진 프로그램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상대할 수 있는 팀들도, 고전하게 되는 경기도 있었다. 어차피 모두 매일 반복되는 훈련 중에 생긴 이벤트처럼 여기고 있으니 분위기야 항상 좋았다. 변의주만 빼고. 이제 2학년, 본격적으로 팀의 주축이 된다. 수비 포지션도 우익수로 확정 되었고, 타순은 8번에서 단숨에 2번이 되었다. 그와 함께 수정한 타격폼이 몸에 익지 않아 애를 먹는 중이었다. 감독과 코치는 허리에 무리도 덜 가고, 무게 중심을 잡기에도 더 안정적일 거라고 설명했다. 변의주도 이해했다. 확실히, 무슨 말인지는 알겠지만… 적응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니까.
전지훈련 내내 부진한 건 변의주뿐이었다. 3주 동안 총 15팀을 상대하는 일정, 마지막날 만난 게 근방에서 가장 성적이 좋다는 고등학교의 야구부였다. 여기 애들 장난 아니래. 스카우터들이 탐내는 선수들도 많고. 아, 감독님이 얘기하시는 거 들었는데, 그… 걔 이름이 뭐더라?
“니콜라스?”
팀원들의 대화에 대꾸해주며 피자를 씹던 변의주가 콜록거렸다. 천천히 먹으라며 친구가 건네준 콜라를 들이켜고 겨우 숨을 내쉬었다. 마음에 박힌 이름이 들려서 놀랐지만, 찬찬히 생각해보면 니콜라스, 라는 이름은 너무 흔하지 않나? 흔하지. 진짜 흔하지. 그 애랑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리가 없지… 애초에 야구를 계속 하고 있을지, 어떨지도 모르고.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 변의주는 미트를 끼고 경기장으로 들어오는 바로 그 니콜라스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바로 다음날, 무슨 거짓말처럼.
시선이 맞닿은 순간 알아보았고, 알아본 순간 고개를 돌렸다. 울컥 치미는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로스앤젤레스의 푸른 하늘 아래 선 그 애는 초등학교 때보다 키가 훌쩍 컸고, 웃는 얼굴이 여전히 시원했다. 눈이 오던 날에 헤어졌는데 맑은 날에 다시 만나니 현실감이 없었다. 차라리 비라도 왔으면 마주치지 않았을 텐데. 니콜라스가 자꾸 제게 보내는 시선을 무시하기가 힘들었다. 한동안 잔잔하던 손등에 다시 파도가 확, 덮쳐오는 기분.
내내 삼진으로 물러나던 변의주는 마침내 8회 초, 상대 투수의 실수로 볼넷을 얻어 출루했다. 바라던 바는 아니었다. 출루를 하면, 1루로 가야 하고, 1루 베이스를 밟고 선 건 니콜라스니까. 고개를 숙인 변의주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니콜라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저를 빤히 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 정도 모르는 척했으면 너도 그냥 아무 말 하지 마. 그런 마음을 모르는지, 등을 보인 변의주의 귓가에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주.”
“…”
“왜 나 무시해? 공 일부러 안 친 거야?”
“… 뭐? 야-”
“초콜릿 거절했던 것처럼 인사도 거절이야?”
그 말에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았다. 입술을 모은 채 눈을 가늘게 뜬 니콜라스가 변의주의 유니폼 소매를 꼭 쥐고 있었다.
*
2024년 4월 17일
홈런이… 아닌가?
1루, 2루, 3루를 돌아 홈을 밟은 변의주가 미묘한 분위기에 고개를 들었다. 분명히 공을 쳤고, 느낌도 소리도 좋았고, 높이 띄웠고, 왼쪽 담장을 넘겨서, 환호성을 들으며 배트를 던지고 달려나갔는데. 술렁이는 관중석이 심상치 않았다. 혹시 나 뭐 잘못했나? 비디오 판독 중? 공은 폴대 근처로도 안 갔는데… 먼저 홈으로 들어온 선배들도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변의주가 시원한 밤바람이나 맞으며 우두커니 서있던 순간,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네, 잠시 경기를 중단하고 뉴스 속보 전해드리겠습니다. 좌석에서 일어나지 마시고 전광판을 확인해주십시오.”
새카만 밤하늘 아래, 변의주의 선수 정보를 띄우던 전광판에 백인 아나운서의 얼굴이 떠올랐다. CNN? 평소에 볼 일이 없던 해외 뉴스 채널이다. 변의주는 숨을 고르며 실시간으로 띄워지는 자막에 집중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NASA. 나사, 뭘 하는 곳인지는 알지. 목성 근처에서 미확인 비행 물체가 출현… 그러니까, UFO가 있다는 거잖아. 와… 대박. 약 80일 뒤에 지구에 도착할 것으로 예상… 뭐? 이와 관련된 지적 외계 생명체의 신호를 받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 이건 또 무슨 말이야. 현재의 과학 기술로는 알 수 없는 방식을 사용하여 꿈을 통해 특정한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특정한 날짜부터 같은 꿈을 매일 꾸고, 그 꿈의 끝에 하나씩 줄어드는 숫자를 보며 깨어나는 사람은 자신이 본 숫자를 기입하여 아래의 이메일로 연락을… 잠깐만. 꿈, 숫자…
“83…”
멍하니 중얼거린 변의주의 눈이 한껏 커졌다. 변의주가 2주째 하루도 빠짐 없이 꾸는 똑같은 꿈. 이상한 그라운드에서 이상한 배트를 잡고 이상한 구체를 쳐내는 그 꿈. 그리고 깨기 직전마다 마주치는 하얀색 숫자. 100에서 시작해서 하루에 하나씩 줄어들었고, 오늘은 83이었지. 변의주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로 굳어버렸다. 장내 아나운서는 방금 송출된 뉴스의 내용을 한국어로 한 번 더 설명했다. 전광판에는 다시 제 이름이 떠올랐다. 유니브 울브즈, 8, 변의주, 타율 .317… 그러니까, 그냥 그게 다인데.
왜 나한테 이런 일이.
*
재개된 경기는 유니브의 승리로 끝났다. 8회 말 변의주가 만든 점수를 잘 지켜서 4:5. 아무도 야구 경기 결과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우선… 의주, 시즌 첫 홈런, 오늘 결승타, 축하한다. 잘했어.”
덕아웃에서 선수들을 한 데 모은 주장이 서두를 떼었다. 변의주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주장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 아까 뉴스 속보 다들 봤잖아. 우리 선수단 중에서도 혹시 그런 꿈… 같은 거, 아니 나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꾸는 사람이 있는지 일괄적으로 다 알아봐야 된다네. 일단 있으면 말을 해봐. 내일 2군 애들도 다 조사해서 리그에 제출할 거니까.
“저…”
“어, 의주 왜.”
“아, 저, 꾼다고요. 그… 꿈.”
너 뭐라고? 옆에 서있던 선배가 변의주의 어깨에 손을 턱 얹었다. 그 덕에 어설프게 손을 든 채로 멈춰섰다. 동료들의 혼란스러운 눈빛을 마주한 변의주가 고개를 숙였다. 관중들이 모두 떠난 야구장이 야속하게도 조용했다.
2019년 2월 10일
“네 초콜릿 거절 안 했어.”
“했어. 아닛! 괜찮아! 이렇게.”
“안 했다니까?”
사실 정확히 기억 나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 우긴 건, 민망해서. 모두가 떠나고 텅 빈 야구장 관중석에 니콜라스와 나란히 앉았다. 목 뒤를 덮는 베이지색 머리칼이나, 양쪽 귀에 단 피어싱 때문에 제법 어른스러워 보였다. 산 하나 없이 탁 트인 지평선으로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그보다 차가운 캔이 변의주의 뺨에 닿았다. 말랑말랑 주주다. 장난스레 말한 니콜라스가 웃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과 달라진 게 없는 투로. 건네 받은 캔을 따자 오렌지 향이 훅 끼쳤다. 잠깐의 정적.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 야구 모자를 꾹 눌러쓴 변의주가 입을 열었다.
“… 너는 나 오는 거 알았어?”
“응. 한국 고등학교에서 베이스볼 팀이 온다고, 그, 사진 보여줬는데, 의주가 있어서.”
“그래…”
“…”
“니콜, 무시해서 미안해.”
이건 진심. 여전히 화가 나는 건지, 슬픈 건지, 상처 받은 건지 하나도 모르겠는 마음으로 변의주가 말했다. 니콜라스는 별다른 대꾸 없이 저를 향해 상체를 숙였다. 눈을 맞추고 싶어한다는 걸 알면서 고개를 돌렸다. 니콜라스를 다시 만나면 어떨까? 상상만 해도 마음이 복잡해져서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저와 달리 마냥 즐거운지, 옆에서는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주주, 그대로네.”
“… 뭐가?”
“그냥…”
“너도, 한국어 잘하네. 쓸 일 없었을 텐데.”
“아, 팀에 한국에서 온 친구가 있어. 한국어로 말하자고 내가 부탁했어.”
“왜?”
“안 까먹으려고.”
그 말에 변의주가 니콜라스를 보았다. 기다렸다는 듯 모자 챙을 들어올리는 손이 있었다.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서 눈이 마주쳤다. 마침내. 니콜라스의 까만 눈동자에 멍한 제 얼굴이 비쳐보였다. 반팔 티셔츠 밑으로 서늘한 공기가 스며들었다. 꼭, 목련이 지고 철쭉이 필 때와 같은 온도로. 잠시 그대로 서로만 들여다보다가,
“보고 싶었어.”
니콜라스가 그렇게 말한 순간, 변의주는 숨을 삼켰다. 어릴 때보다 선이 분명해진 얼굴이 다가왔다. 가로로 긴 눈이 제 앞에서 감겼다. 그리고 입술이 맞닿았다. 당연히 그래야 할 것처럼. 손 끝부터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그와 반대로 심장은 미친 듯이 뛰어 어지러웠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숨 한 모금 들이쉬지 못한 변의주의 손에서 음료수 캔이 추락했다. 텅, 하는 소리가 신호라도 된 듯 니콜라스가 퍼뜩 물러섰다. 먼저 입술을 붙여놓고, 제가 더 놀란 표정으로.
“… 미안.”
변의주는 그 말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캔을 밟고 뒤돌아서서 경기장을 나왔다. 뒤따라오는 발소리는 없었다. 진짜 미친, 방금 뭘… 무슨 짓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파도처럼 밀어닥쳐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무슨 정신으로 짐을 정리하고, 팀원들과 버스를 타고, 공항에 도착해서 비행기에 올랐는지 모르겠다. 저만 빼고 모두가 잠든 객실이 어둡고 조용했다. 새카만 하늘을 보며, 니콜라스의 이메일이나 SNS 계정도 물어보지 못했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다시는 못 볼지도 몰라. 내뱉은 숨의 끝이 떨렸다. 변의주는 손등으로 제 눈가를 꾹 눌렀다. 훌쩍이는 소리는 엔진의 소음에 먹혀들었다.
*
2024년 4월 25일
댈러스 공항 입국 게이트에서 나온 변의주에게로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변의주 선수, 정확히 어떤 꿈을 꾸는지 말해주실 수 있나요? 변의주 선수, 현재 심경이 어떻습니까? 변의주 선수, 올 시즌 강력한 우승 후보팀 유니브 울브즈의 전력에 어떤 영향이 있을 것 같나요? 변의주 선수, 변의주 선수! 그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안전 요원들의 뒤에 서있을 수밖에.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마치 대학생처럼 구단의 짙은 하늘색 바시티를 걸친 변의주는 그저 웃는 얼굴을 유지한 채 겨우 입을 열었다.
“어… 사실 저도, 아는 게 없어서요… 저희 팀은 훌륭한 선배님들과 후배들이 있으니, 제가 없어도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최대한 빨리, 건강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정말 그게 다였다. 네가 무슨 지구를 지켜 넌 우리 외야나 지켜… 같은 댓글을, 협찬 물품을 찍어 올린 인스타그램 게시글 밑에 몇백 개씩 받고도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모르는 것들 투성이다. 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지, 그 꿈은 정말, 대체 뭔지, 그리고…
“어, 주주!”
안내 받은 버스의 가운데 자리에 앉은 채로 저를 향해 손을 흔드는 니콜라스, 어쩌다 저 애도 자신과 비슷한 꿈을 꾸게 된 건지. 전과 달리 짧게 자른 까만 머리칼이 단정했다. 사람들은 나사에서 호출한 전세계의 인원들 중 야구 선수가 둘이고, 하나는 대만 출신 메이저리거인 니콜라스, 그리고 다른 한 명이 한국프로야구 리그의 변의주라는 사실에 은근한 자부심을 갖는 것 같았다. 야구 실력으로 뽑힌 것도 아니고, 막상 당사자인 변의주는 또 다시 큰 파도가 치는 바다에 내던져진 기분이었지만.
“너도 방금 도착했어?”
“아니, 나는 호텔에 있다가 따라왔어.”
“응? 왜?”
“의주가 온다고 해서.”
“…”
“아, 요즘 어때? 유튜브에서 하이라이트 보면 주주, 멋있던데.”
하지만 티 내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지금 인스타그램 디엠을 자주 주고 받는 친구 사이, 단지 그거니까. 침착하자.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초등학교 때 느꼈던 애매한 감정, 고등학교 때 있었던 그 사건, 그리고 아시안게임에서의 일도 전부 아무것도 아닌 거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되뇌이며, 변의주는 씩 웃고 니콜라스의 옆자리에 앉았다.
“어, 뭐… 못하는 날엔 똥이라고 욕 먹고, 잘하는 날엔 주님이고, 그래.”
“… 응?”
“너는? MLB 기사에 니콜, 네 이름 많이 나와.”
그 말에 니콜라스가 생글거렸다. 주주, 나 칭찬해주는 거야? 좋네. 변의주는 간지러운 가슴께를 무시하며 괜히 낮은 목소리를 냈다. 칭찬한 거 아닌데. 너 어떻게 지냈냐니까?
2022년 10월 1일
입단 2년차 봄, 변의주는 선배의 부상으로 급하게 1군에 콜업되어 주전 우익수 기회를 얻었다. 첫 해에는 팀이 잔여 경기를 소진하던 때에나 몇 번 출장했던 터라 잔뜩 얼어있었다. 그저 하던 대로만 하라는 2군 감독의 말처럼 정말 하던 대로 했다. 꾸준하게, 성실하게, 그러다 보니 잘. 아시안게임에 출전할 국가대표팀 엔트리에 들었을 때에도 변의주에 대해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선배들은 축하해주었고, 팬들은 금메달을 따 군대 문제를 해결하길 바랐으며, 부모님은 자랑스러워하셨다. 그리고 변의주는 엔트리가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 순간, 휴대폰을 들어 대만 야구 국가대표팀의 명단을 검색했다. 니콜라스라는 이름은 없었다. 그래서 안심했는데.
아시안게임이 열리는 항저우에 도착해서야 니콜라스는 편하게 쓰는 별명 같은 이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왕이샹. 본명이 왕이샹이었어… 초등학교 때에는 그냥 니콜라스라니까 니콜라스인 줄 알았지. 한자로 된 제 이름이 따로 있었구나. 생각해보면 당연하네.
사실 알고 싶지 않았다고 나는…
가슴팍에 Korea라는 글씨를 단 변의주는 타석에 들어선 왕이샹, 이자 니콜라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미국 마이너 리그 소속으로 국가대표가 되는 경우가 있구나. 몰랐네. 이것도 딱히 알고 싶지 않았다. 니콜 오른손잡이었던 것 같은데, 왼손 타자로 전향은 언제 한 거지. 고등학교 때일까… 아, 그 때 생각은 하지 말자. 평소와 달리 경기에 집중할 수가 없게 된 변의주가 고개를 젓는 사이 니콜라스는 벌써 볼 세 개를 얻은 상태였다.
제발 아시안게임이 끝날 때까지 대만 국가대표팀과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는데, 결승전에서 맞닥뜨리고 말았다. 선수들이 쓰는 숙소에서도 중국어만 들리면 무조건 피해다녔건만 전부 소용 없어졌잖아. 변의주가 넘실대는 제 마음 속에서 허우적 댈 동안 니콜라스가 크게 배트를 휘둘렀다. 딱,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고, 공은 높게 떴다. 변의주의 머리 위로.
거리를 가늠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까딱하면 넘어갔겠다, 같은 생각을 하며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순간, 시야에서 공이 사라졌다. 경기장을 밝히는 조명 탓에 흔히 있는 일이었다. 하얀 빛에 하얀색 공이 잡아먹히는 건 당연하니까. 여기가 한국이었고, 이 공을 친 사람이 니콜라스가 아니었다면 변의주는 미리 잡아둔 자리에서 침착하게 기다렸겠지. 공이 다시 보일 때까지. 하지만 이 곳은 항저우, 타자는 니콜라스. 전혀 침착하지 못한 변의주는 저도 모르게 두어 발자국을 옮기다 잠시 중심을 잃었다. 그리고 공은 글러브를 스쳐 그라운드에 떨어졌다.
변의주가 다급하게 몸을 숙여 공을 줍다 한 번 더듬었다. 그리고 이미 비어있는 1루를 보고 멈칫, 하다가 3루를 향해 던졌다. 2루와 3루에 있던 주자들은 이미 들어왔고, 니콜라스는 3루에서 세이프 판정을 받았다. 기껏해야 희생타로 기록되었을 니콜라스의 뜬공이 3루타가 되었다. 스코어는 1회 초에 2:0. 변의주는 볼캡을 벗어들고 잠시 숨을 골랐다.
변명의 여지없이 최악의 실수다. 고개를 숙이자, 눈 앞의 그라운드가 일렁였다. 그 덕에 3루 베이스를 밟고 선 니콜라스가 제 쪽을 빤히 보고 있다는 건 알아채지 못했다.
*
2024년 4월 30일
며칠에 걸쳐 이런저런 신체검사, 심리검사를 마친 변의주는 NASA 존슨 우주 센터의 대형 세미나실로 향했다. 지적 외계 생명체의 신호를 받은 인원들이 전부 모이는 오리엔테이션 자리였다. 에이전시에서 붙여준 통역사도 잔뜩 긴장한 눈치였다. 큰 강당 같은 세미나실에는 국적도, 나이도 다양한 사람들이 100명 정도 앉아있었다. 마른 침을 삼킨 변의주를 향해 니콜라스가 손을 들었다.
“주주! Come here!”
결국은 니콜라스의 옆자리. 가장 편해보이는 곳이 여기라니, 고등학생 변의주가 들었다면 믿지 않았을 이야기다. 안경을 꼈고 키가 큰 백인 여성이 무대로 올라섰다. 자신을 이 ‘퍼펙트게임 프로젝트’의 책임자라고 소개한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변의주는 제 오른편에 앉은 통역사의 말에 집중했고.
지난 3월 31일, NASA의 연구원, 엔지니어 몇몇이 기묘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 중에서는 저도 있었죠. 목성의 위성 유로파를 연구하던 저의 경우에는, 평소처럼 관측을 하다 보이지 않던 어떤 천체를 찾아내는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깨기 직전, 옆에 놓인 종이에 숫자 100이 적혀있는 걸 보았습니다. 다음날, 저는 아무래도 이상한 기분에 조금 더 주의 깊게 관찰을 했고, 정말 같은 자리에 같은 천체를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의문점이 있었죠.
“지금까지 발견되지 못했을 밝기가 아니었거든요.”
통역사는 저도 모르게 놀라 숨을 삼키고 짧게 사과했다. 책임자는 그 뒤로도 나사의 인원들이 내린 결론을 나열했다. 그 천체는 해독되지 않는 파장을 보내며 빠른 속도로 정확히 지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서 단순히 자연물이 아니라, 어떤 의도를 가지고 지구로 오고 있는 미확인 비행 물체라고 판단했다. 하루에 하나씩 줄어드는 그 숫자는 아무래도 디데이. 각자의 꿈 속에서 엔지니어는 의문의 설계도를 보며 의문의 도구들을 제작했고, 경찰은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통제했고, 전투기 조종사는 존슨 우주 센터 위를 날며 알 수 없는 구체들을 파괴했다고. 모두의 꿈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듯 검은 구멍이 뚫린 하늘 아래에서. 추측컨데, 이 꿈은 우리가 디데이에 행해야 하는 일을 미리 보여주는 게 아니겠느냐고.
“제가 꿈대로 하늘을 관측해서, 미확인 비행 물체의 존재를 알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아마 저는 디데이에도 똑같이 관측을 하고 있겠죠. 그렇게 말한 책임자는 왠지 뿌듯한 모양새로 웃어보였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모은 겁니다. 우리에게 미리 앞날을 알려준 어떤 존재가 있고, 그대로 행동을 취하면 아마도 그 비행 물체를 막아낼 수 있을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책임자의 말이 끝난 뒤, 변의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부 믿기지가 않아서. 그냥 지금이라도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 변의주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동안, 여러 질문과 대답이 오갔다.
“애초에 이런 꿈을 꾸게 되는 과학적 원리가 뭡니까?”
“모릅니다. 그래서 또 다른 지적 생명체의 기술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미확인 비행 물체와의 관계는 알 수 없죠.”
“꿈을 꾸게 만든 이들이 인간을 도우려고 한다는 건 어떻게 확신하죠? 이용당하는 것일 수 도 있지 않습니까.”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비행 물체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을 테니까요.”
“…”
“비공개로 진행된 정상회담에서도 그렇게 결론 내렸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뿐이라고.”
니콜라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지한 얼굴이었다. 의아하게 여긴 변의주가 물었다. 너는 안 놀랐어? 그 말에 니콜라스는 그저 입꼬리를 씩 올렸다.
“응. 난 미리 들었어.”
“너만?”
“음… 아마? 내 꿈이 좀…”
“꿈이… 어떤데?”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 오늘 일찍 일어났어. 졸려. 그런 소리나 하며 눈을 감았다. 니콜라스는 그 뒤로도 한참을 이어진 책임자의 설명을 배경 음악으로, 변의주의 어깨를 베개로 하고 순식간에 잠이 들어버렸다. 위아래로 검은색 아디다스 트레이닝복을 갖춰입고 있어 조금… 백수 같기도. 변의주는 얌전히 눈을 감은 얼굴을 보다 피식 웃어버렸다. 니콜라스의 규칙적인 숨소리에, 긴장으로 내달리던 심박수가 제 속도를 찾아갔다.
2022년 10월 1일
메이저 리그에서는 1루수를 Abmassador, 대사라고도 부른다. 출루한 상대팀 주자를 가장 먼저 맞아들이는 자리라는 의미다. 니콜라스는 첫 공에 짧은 안타를 때려내고 저를 향해 달려오는 변의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친선 경기에서 만났던 고등학생 변의주는 죽어도 제가 지키는 1루로는 오기 싫다, 티를 냈었다. 쉬운 공에도 배트를 내지 못해 번번히 삼진. 그러다 마지막 타석에서 겨우 1루로 걸어왔었지. 앳된 얼굴, 까만 생머리로 이름도 적히지 않은 유니폼을 입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리고 지금, 니콜라스의 미트에 공이 도착하는 것보다 빨리 변의주가 베이스를 밟았다. 깔끔한 세이프.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더이상 어리지 않은 변의주가 이를 꽉 물었다. 니콜라스는 조용히 그 뒤에 섰다. 유니폼 뒤에 적힌 글씨가 보였다. BYUN E J, 8. 이게 아시안게임이 아니었다면, 변의주는 과연 저를 향해 달려왔을까?
“주주-”
“니콜.”
“… 어?”
“너, 아무 말도 하지 마.”
절대 그럴 리가 없겠지. 냉랭한 기운을 느끼며 니콜라스가 숨을 삼켰다. 사실 할 말도 없다. 재회를 망친 건 충동적이었던 자신이다. 완벽한 실책. 덕아웃에서 감독이 내리는 사인을 확인한 변의주가 2루를 향해 거리를 벌렸다. 차가운 밤바람에 흔들리는 갈색 머리칼을 보며 니콜라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변명이라는 걸 좀 해보자면 말이야-
*
니콜라스의 삶에 있어 꾸준한 건 변의주뿐이었다. 모두에게 친절하고 성실한 아이. 그리고 가끔은, 놀랄만큼 무심하고 대범했지. 어릴 때부터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니 누굴 깊게 알아갔던 적이 없었는데, 변의주는 항상 맑은 하늘 아래 선 사람처럼 선명했다. 준비물을 놓고 온 누구에게나 제 것을 빌려줬다. 하지만 앞으로 잘 챙기라는 잔소리를 덧붙이는 상대는 니콜라스뿐이었다. 친구들이 같이 하자는 일에는 웬만하면 참여했다. 하지만 니콜라스가 조르는 건 다섯 번에 네 번 정도 거절했다. 그래놓고 야구부 같은 건 같이 가입해줬지. 사실 나도 너랑 있으면 재밌어, 제일 편해, 그렇게 말하면서. 우리 주주는 내 앞에서만 진짜야. 그런 우월감도 조금은 있었는지도.
옆에 붙어있으면 세상이 고요해지고, 떠올면 차분하게 기분이 풀리는 그런 존재. 미국으로 떠난 뒤에도 니콜라스는 타석에 설 때마다 변의주를.생각했다. 초등학교 시절 그대로의 모습일 때도 있었고, 멋대로 상상한 고등학생일 때도 있었다. 그러니까, 니콜라스에게 돌아갈 곳이 있다면 그건 변의주였다는 뜻이다. 정작 그 애와 함께 보낸 시간은 1년이 채 되지 않았는데도. 누군가는 이런 현상을 심리학적 용어로 설명하려고 하겠지만, 니콜라스는 이미 간단하게 결론을 내린 뒤였다.
내가 주주한테 반해서 그렇지 뭐.
상상한 것보다 훨씬 키가 커졌고(따라잡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큼직한 눈동자는 초등학교 시절보다도 또렷하게 반짝였다. 웃을 때 올라가는 입꼬리는 그대로. 화창한 햇살을 온통 제 것으로 만들었다. 현실에 나타난 열아홉의 변의주는 그 동그란 이목구비를 하고 니콜라스를 차갑게 무시했다. 아, 정말… 저만 빼고 사방를 향해 미소 짓는 얼굴이 160km짜리 직구라도 되는 것 같았다. 배트를 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막상 손 안에 들어오니까, 바싹 붙어 앉으니까, 해가 넘어간 하늘 아래에서도 여전히 선명하니까… 오래도록 쌓아오기만 한 마음이 엎어졌고, 손에 든 오렌지 주스가 쏟아지듯 입술이 부딪혔다.
맞아, 내 잘못이야.
하지만 의주, 네 책임이 없는 건 아니잖아.
*
그러니까 사과 정도는 받아줘.
니콜라스는 그런 마음으로 변의주를 향해 상체를 숙였다. 타석에 섰던 2번 타자가 공 다섯 개만에 삼진으로 물러났다. 그 다음 타자가 들어오자 마음이 급해졌다.
“하나만 말할게.”
관중석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 틈에 변의주의 대답은 없었다. 니콜라스는 타석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미안해. 난 그냥 좋았어, 그대로인 의주를 만나서.”
그저 주먹을 꼭 쥔 변의주는 투수가 어깨를 돌리자마자 시야에서 사라졌다. 니콜라스는 2루를 향해 쏘아지듯 달려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허탈하게 웃었다. 의주, 지금 이 상황에 도루를 하네. 나를 두고 그냥 달려가버리네. 빠르다. 멋지네. 재빨리 몸을 날리며 쭉 뻗은 변의주의 손이 베이스에 닿았다. 포수가 던진 공이 2루수의 글러브에 들어가는 건 그 다음이었다. 심판의 세이프 판정을 받고 일어선 변의주가 니콜라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유니폼에 묻은 흙을 터는 무표정한 얼굴, 하지만 눈은 오롯이 저를 담고 있었다.
*
2024년 5월 5일, D-65
“니콜, 왜 날까?”
호텔 TV 속 한국은 어린이날, 한낮이었다. 관중석을 꽉 채운 사람들과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선배들을 보던 변의주가 물었다.
“너야 뭐, 메이저에서 결승타도 많이 치는 선수니까…”
“결승타?”
“아, 그거 뭐라고 하더라… Game Winner?”
“음, Game Winner보다는 Sacrifice Hit가 엄청 더 많은 것 같은데. 팀메이트들이 내 공에 대신 들어오는 거.”
“희생타 치는 것도 대단하지… 나는 왜 내가 선택된 건지 진짜 모르겠어.”
변의주가 의문을 표하며 두 손바닥을 들어보였다. 푹신한 침대에 나란히 앉은 니콜라스는 감자칩을 입에 넣으며 답했다.
“우리 주주, 성실하니까?”
“… 어려운 말도 아네.”
“여기 와서도 매일 운동하잖아.”
“시즌 중이니까.”
“응, 그래서 포테이토칩도 거절하고.”
“그래서는 아니야. 그거 너무 짜서…”
“새벽에 한 팀 경기, 지금 바로 다시 보고.”
“아니… 너 그만 해.”
어쩐지 귓가가 붉어지는 기분이라 베개나 꽉 끌어안았다. 민망하다. 그런 변의주를 보고 큭큭 웃은 니콜라스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의주, 침착해. 그게 장점. 네가 어떻게 알아? 봤으니까 알지.
“뭐, 내 경기 다 봤어?”
“볼 수 있으면?”
“나 작년에 홈런 몇 개 쳤는데?”
“3개.”
“…”
“맞잖아.”
변의주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정답이다. 눈을 가늘게 뜬 니콜라스가 미소를 띈 채 저를 보는 게 느껴졌다. 의주 나한테 관심 없지만 나는 많아. 그 말에 반박할 기운도 나지 않았다. TV 속의 관중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상대 팀의 홈런이었다. 사실 나도 네 경기 다 봐, 바쁘면 하이라이트 영상이라도 찾아서 봐. 미국이랑 한국이랑 열몇 시간씩 차이 나는 거 너무 싫어. 시즌 중에는 도무지 생방송으로 볼 수가 없잖아. 그런 말은 변의주의 혀 끝에서 사라졌다. 옆에서 바삭거리던 니콜라스가 문득 창 밖을 가리켰다.
“주주, 저기 봐.”
침대에 반쯤 누워있던 변의주가 몸을 일으켰다. 니콜라스의 손가락 끝에는 야구공만한 검은 점이 있었다. 그저 푸른 하늘에, 누가 구멍을 뚫어놓은 듯.
2022년 10월 1일
3회 말, 다시 한 번 변의주가 배트를 들었다. 타석으로 걸어가는 길이 멀었다. 점수는 여전히 2:0. 1루에 선 니콜라스가 제 움직임을 좇는 시선이 있었다. 전처럼 따갑지는 않았다.
오른손으로 배트를 쥐고 몸 앞에서 서너바퀴를 빠르게 돌린 뒤, 두 손으로 잡고 그라운드를 가볍게 툭, 친 후 어깨 위로 들어올렸다. 천천히 숨을 뱉자 사방이 고요해졌다. 눈 앞의 투수가 던지는 공이 빠르게 날아왔다. 몸 쪽으로 파고드는 건 피하고, 애매한 코스의 공은 뒤로 때려냈다. 세상에 저와 마운드 위의 투수만 남은 기분. 솔직히, 1루에 선 누군가를 완전히 지워버리지는 못했지만. 변의주에게 있어 니콜라스의 존재감은 항상 그랬다. 물이 빠져나가고도 모래사장 위에 남는 흔적 같은 거였다.
몇 구째였을까, 정확히 배트 앞으로 오는 공을 강하게 밀어쳤다. 그 공이 어디까지 가는지도 모르고 일단 달렸다. 순간 조용해졌던 관중석에서 한 순간에 함성이 터져나왔다. 제 공이 담장을 넘어갔다는 건 1루에 도착한 뒤에야 알았다. 신이 나기보다는 그저 마음이 놓였다. 아, 그래도 내 실수 정도는 만회했다, 그런 생각. 2루, 3루를 밟고 달리면서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라운드에서 울 것 같은 기분. 홈 플레이트로 돌아와, 앞서 들어온 선배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다 저도 모르게 1루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니콜라스가 저를 보고 있었다. 해사하게 입꼬리를 올린 채로. 그 표정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니콜, 바보야, 네가 지금 왜 웃어.
그대로인 나를 봐서 좋았다고? 가늘게 접히는 눈매, 시원하게 올라가는 입술. 시끄러운 경기장의 소음을 뚫고 니콜라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대로인 건 너잖아. 여전히 그 앞에 서면 발 밑이 일렁인다. 손등이 간지럽다. 훅 밀려났던 파도가 다시 덮쳐오는 것처럼.
마침내 니콜라스를 따라 웃어주었다. 중계 카메라에는 변의주의 편안한 미소만 담겼다. 그 반짝이는 눈동자가 향한 곳이 어디인지는 전세계의 누구도 알 수 없었다.
*
2024년 5월 21일, D-49
NASA의 직원이 건넨 배트를 든 변의주는 그대로 몸이 굳는 기분이었다. 꿈에서 쥐어본 그 이상한 배트와 똑같아서. 기묘한 냉기나, 햇빛 아래에서 은색으로 빛나는 표면 같은 것이. 꿈에서 본 설계도 대로 만든 거래요. 그렇게 덧붙인 직원이 멀어졌다. 역시나 꿈대로 만들었다는 그라운드에 서서 고개를 들었다. 하늘에 뚫린 싱크홀은 아직 변의주가 손을 쫙 펴면 가릴 수 있을 정도다. 디데이에는 저게, 지평선에 닿을만큼 커진다는 거지? 3루가 있을 자리에는 하늘을 향한 경사로가 지어지고 있었다. 꿈 속에서 그 길을 따라 달리던 누군가의 인영이 겹쳐보였다.
“주주, 볼 던져줄까?”
호텔에서 그라운드까지 따라온 니콜라스는 야구공 하나를 쥐고 있었다. 초등학생 때 캐치볼을 하자고 조르던 모양새와 똑같아 웃음이 나왔다. 제 팀 로고가 박힌 아이싱티를 입고 있지만 않았어도 열두 살인 줄 알았을 테다. 7월에 바로 돌아가겠다며, 연습해. 그러더니 어설픈 동작으로 공을, 휙-
“… 야!”
“주주, Strikeout.”
“네가 지금 공을, 송구하듯이 줬잖아. 이걸 어떻게 쳐.”
“뭐, Swing 했잖아.”
“… 니콜, 너는 투수는 못 하겠다.”
그리고 헛스윙 한 번했는데 무슨 아웃이야. 저도 같이 초등학생이 된 것처럼 말이 길어졌다. 배트를 든 손이 찼다. 평소에 들던 제 배트와 정확히 같은 무게라는 게 조금 무서웠는데, 헛소리를 받아주다 보니 잊어버렸다. 니콜라스는 연습을 하라며 미트로 제 어깨를 쿡쿡 찌르기나 했다. 아, 얘가 진짜 왜 이래. 배트를 놓고 그라운드에 누워버리자, 니콜라스도 웃으며 옆에 몸을 뉘었다. 바닥에 닿은 손등이 풀잎에 닿아 간지러웠다.
“네가 나 연습시켜서 뭐해.”
“우리 주주 잘해야지. 아직 우승해본 적 없잖아. 이번 년도에는 꼭 해.”
“… 니콜, 너랑 나랑 만나면 무조건 상대 팀이야.”
“왜 그런 말해. 감정 없어?”
“뭐, 너 한국 올 거야? 우리 팀 1루수할 거야?”
“음…”
“아니잖아. 너 지금 메이저에서-”
잠시 조용하던 니콜라스가 변의주의 몸을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 덕에 뒷 말은 그저 삼켜졌다. 훅 끼친 체온에 열이 올랐다. 붉어진 변의주의 귓가에 니콜라스의 나직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나 그냥 한국에 있을걸.”
왜 그런 말을 해, 같은 건 이럴 때 내 입에서 나올 문장이지. 조용히 입술을 깨문 변의주가 니콜라스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꼭 낮잠이라도 자는 사람처럼 눈을 감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가. 이런 얼굴은 안 보여서. 니콜라스의 숨소리를 듣던 변의주가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를 냈다.
“… 너는, 그, 프로젝트 연습 안 해? 장비 없어?”
“내 툴은 아직…”
“아직도 못 받았다고?”
“의주, 지금은 이렇게 있자.”
니콜라스가 한 팔로 제 목 밑을 받치고, 다른 쪽 손으로는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는 걸 느끼며 그냥 눈을 감았다.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잠시 망설이다 니콜라스의 허리를 감싸자, 멈칫, 하는 떨림이 전해졌다. 몸 속 어딘가가 저렸다. 눈꺼풀 너머로도 세상은 밝았다. 그냥 잠들어버릴 수도 없게. 눈치 없이 제게 쏟아지는 햇살 탓이었다.
2022년 10월 2일
피해다닐 때에는 고개만 돌려도 보이더니, 막상 찾으니까 어디에도 없다. 전날 밤을 꼬박 샌 변의주가 선수촌의 공용 시설을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아침 9시 반, 이제 두 시간 뒤면 공항으로 출발한다. 식당에 있나? 아니면, 아직 자나? 초등학생 때도 늦잠 때문에 종종 지각했었잖아. 선수촌 앞 광장은 조용했다. 흰색 단복 져지를 걸치고 휴대폰 하나만 꼭 쥔 채로, 변의주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두 시간 안에 니콜라스를 찾아야 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다시 얼굴을 보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
대만 국가대표팀이 정확히 몇 동 몇 층에 있는지는 몰랐다. 마땅히 물어볼 곳도 없었다. 옆 동을 쓰는 선배가 대만 선수들을 많이 만났노라 지나가듯 이야기했던 게 전부였다. 그래도 그게 어디야. 윗층부터 전부 뒤져볼 마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리고 최고층에서 내려 복도를 향해 걸어나온 순간, 그렇게 찾아 헤매던 얼굴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부스스한 머리에 검은 민소매 차림의 니콜라스가 막 제 방 문을 열고 나온 차였다. 각오에 비해 허탈할 지경이라 웃음이 번졌다.
“아, 니콜-!”
반쯤 감겨 있던 니콜라스의 눈이 변의주를 발견하고 크게 뜨였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제 방으로 도로 들어가버렸다. 쾅, 하고 문이 닫혔다. 반갑게 이름을 부른 변의주만 복도에 남겨놓고. 뭐야? 지금 뭐하자는 거야. 황당한 마음으로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야, 니콜라스. 니콜! 문을 두드려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내가 안 피하니까 이제 네가 피하는 거야? 이럴 경우는 생각 못 했는데. 변의주의 머릿속이 바쁘게 굴러갔다. 규칙적인 속도로 문만 콩, 콩, 두드리며. 만약 니콜라스가 이대로 2시간을 버티면? 무시 당할지도 모를 쪽지를 붙이는 것과 타국 국가대표 선수 숙소의 문을 따달라고 부탁하는 것 중 무엇이 나을까. 그 고민이 깊어지기 전, 다시 문이 열렸다. 단복 져지의 깃을 세워 지퍼를 목까지 올린 니콜라스가 문틀에 기대섰다. 방금 전보다 훨씬 말끔해진 모습으로.
“… 어, 의주, 왜…”
“이메일 좀 알려줘.”
“…”
“인스타그램 아이디나.”
“아…”
“… 싫으면, 안 알려줘도-”
“아니아니아니.”
꼭 꿈을 꾸는 것 같은 얼굴로 변의주를 올려다보던 니콜라스가 냉큼 휴대폰을 낚아채갔다. 뭐가 이렇게 급할까. 한 글자씩 꼼꼼히 입력하며, 어쩐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니콜라스가 말했다.
“주주, 금메달 축하해.”
“고마워… 그, 니콜, 어제 네가 한 말 있잖아.”
“…”
“그대로인 나를 봐서 좋았다고.”
“… 응.”
“나도 그랬어. 고등학교 때도, 어제도… 너 봐서 좋았어.”
그 정도의 마음이라면, 나도 그랬다고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선 그 정도라면 말이다. 니콜라스의 손이 멈췄다. 변의주를 향해 치켜든 얼굴에 까만 눈동자가 맑게 빛났고, 숨이 가빠졌고, 그래서-
“우리… 친구니까.”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해버렸다. 쫓기듯 나온 단어에 니콜라스가 흐릿하게 웃었다. 응, 친구. 따라 말하는 목소리에 어딘가 쿡, 찔린 기분으로 휴대폰을 돌려받았다. 변의주의 실책과 고등학교 시절의 첫키스는 그렇게 없던 일이 되었다. 금메달과 인스타그램 아이디로.
*
2024년 6월 9일, D-30
“유니폼 입은 모습 오랜만이네요. 변의주 선수, 휴스턴에서의 생활은 어떤가요?”
“아시안게임에 출전했을 때랑 비슷한 것 같습니다. 선수촌 같은 느낌이에요.”
“지금 한국에서 기다리고 계신 유니브 울브즈 팬분들께, 한 마디 부탁드릴게요.”
“네, 저, 정말 건강하게 지내고 있고,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맡은 일 잘 마치고 한국으로 빨리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리그 복귀 예상 시점, 혹시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감독님께는 한국 도착하는 대로 합류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는데, 그래도 휴식 기간을 좀 갖는 게 좋겠다고 하셔서… 아마 7월 16일 경기가 될 것 같습니다.”
“매일 경기 챙겨보고 있다고 하셨는데, 유니브 울브즈의 올 시즌 우승, 가능할 것 같나요?”
“아… 작년 코리안 시리즈에서 아쉬운 모습을 보여드렸는데, 네, 올 시즌엔 꼭… 야!”
그라운드에 선 변의주의 인터뷰는, 어깨를 톡톡 두드리고는 무심코 저를 향해 돌려진 뺨을 검지로 쿡, 찌른 니콜라스에 의해 잠시 중단되었다. 이거 뉴스 생방송이라고. 몰랐던 것 같진 않지만. 니콜라스는 변의주를 향해 씩 미소 지으며 브이를 그리고 사라졌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뻔뻔하게 걸어나가는 뒷모습을 밉지 않게 흘겨보다 다시 카메라를 향했다.
“… 죄송합니다. 올 시즌엔 꼭 우승할 수 있도록, 후반기부터 저도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인터뷰 감사합니다. 방금… LA 자이언츠의 니콜라스 선수였죠?”
“네, 그…”
난처하게 웃은 변의주가 캐스터 너머의 니콜라스에게 시선을 던졌다. NASA의 직원에게 건네받은 검은색 무언가를 등에 메고, 경사로의 초입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순간, 꿈 속의 장면이 스치듯 떠올랐다. 배트를 내려놓는 변의주. 그 타이밍에 맞춰 경사로를 달려나가는 누군가. 멈추지 않던 새카만 인영.
그 누군가가, 너였어?
숨이 얼어붙는 기분. 멍하니 니콜라스의 움직임을 좇는 변의주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발사대, 또는 활주로처럼 검은 구멍을 향해 뻗은 그 길. 그 길의 끝에 뭐가 있더라? 낭떠러지 일뿐인데.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제 꿈은 항상 그의 결말을 보기 전에 끝난다는 걸. 어느새 완성된 경사로는 어떤 안전 장치도 없이 그저 ‘길’이다. 그럼, 있는 힘껏 끝까지 달린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경사로의 시작점에 선 니콜라스는 연구원과 무어라 대화를 나누다 달리기 준비 자세를 잡았다. 변의주가 무심코 손을 뻗으려던 순간,
“변의주 선수?”
캐스터의 목소리가 들렸고, 변의주는 다시 저를 향해 선 기자들과 카메라를 보았다. 맞다, 질문에 답해야지. 질문, 그러니까,
“아… 맞아요.”
“두 분 굉장히 친해 보이시네요.”
전혀 어렵지 않은 말이 귓가를 빙빙 돌았다. 마른 침을 한 번 삼킨 변의주가 겨우 입을 떼었다. 니콜라스. 니콜라스는…
“… 네, 친구예요.”
그 말은 여전히, 변의주의 몸 어딘가를 찔러댄다.
2023년 7월 9일
“니콜, 생일 축하해.”
야구장 식당 구석 자리에서 변의주가 작게 말했다. 뭐라고? 주주, 안 들려- 하는 야속한 목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사람들이 잔뜩인 곳에서 휴대폰에 대고 생일 축하해, 같은 말을 하는 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다시 해달라며 큭큭 대는 웃음이 얄미웠다. 딱 한 번 참아준다. 생일이니까.
“… 생일 축하한다고.”
“응? 뭐라고 하셨어?”
“야, 너-”
“오케이. 주주, 땡큐.”
이번 생일 축하, 주주가 처음이야. 진심으로 감동 받은 것 같은 밝은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당연하지. 로스앤젤레스 시간만 쳐다보다가 전화한 건데. 저 답지 않게 생색내고 싶은 마음을 숨기고 딱 한 마디만 건넸다.
“니콜, 나밖에 없지?”
우쭐해진 변의주의 말에 니콜라스가 말꼬리를 늘였다. 으응- 하고. 그러더니 잠시 조용해졌다. 좀 더 막, 웃어버릴 줄 알았는데. 휴대폰 너머로 온 신경을 집중한 변의주에게 서늘한 에어컨 바람이 닿았다. 니코올, 하고 불러도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나 한국 갈까?”
그렇게 묻는 목소리가 진지해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네가 한국을 어떻게 와. 왜 못 가, 우리 지금 브레이크야. 그거 쉬라고 있는 거잖아. 안 쉬어도 돼. 유치하게 티격태격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말소리가 커졌다. 백숙을 먹던 식당 안 직원들, 선배들의 시선을 느낀 변의주가 고개를 숙였다.
“네가 지금 한국을 왜 와.”
귓가가 붉어지는 기분에 급하게 후드를 뒤집어썼다. 지금 바로 옆에 있는 것도 아닌데 숨고 싶다. 식당의 소음을 뚫고 니콜라스의 웃음이 귓가에 닿았다.
“보고 싶으니까.”
침대에 누워있는지 나직하게 잠긴 목소리. 변의주는 제 아이싱티 끝자락을 꽉 쥐었다. 큭큭 대던 소리가 사그라들었다. 잠시 조용하던 니콜라스가 쫓기듯 말을 뱉기 시작했다. 아, 주주, 나, 그, 저번 경기에서 에러가 있었는데…
*
2024년 6월 25일, D-14
디데이를 앞두고 1주일의 휴가를 받았다. 안전을 이유로 호텔 밖으로는 나갈 수 없었지만.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는 가족들과 보냈다. 미국, 휴스턴까지 찾아온 부모님과 친누나의 식구들을 안심시키는 게 주된 일이었다. 나 진짜 괜찮아. 내 꿈 별 거 아니야. 평소에 경기하는 게 더 위험해. 그 세 문장만 반복하다 보니 완전히 지쳐버렸다. 그 덕에 월요일에는 하루 종일 잠만 잤다. 계속 똑같은 꿈을 꾸었다. 하늘에 난 싱크홀을 향해, 낭떠러지 위를 달리는 누군가의 잔상이 눈을 떠도 천장에 어른거렸다. 정말 이대로는 안 되겠다. 잠에 드는 게 싫어질 지경이 되었을 때, 비슷한 1주일을 보냈을 니콜라스가 찾아왔다.
갈만한 곳이 호텔의 바밖에 없었다. 주위에는 둘과 마찬가지로 발이 묶인 사람들 몇몇이 보였다. 니콜라스는 위스키를, 변의주는 무알콜 칵테일을 주문했다. 너 쓴 거 싫어하잖아. 그렇게 말해도 어깨만 으쓱하길래 그냥 두었다. 잔을 빠르게 비우는 걸 보며 괜히 제 흰색 반팔 셔츠 자락만 매만졌다. 어쩐지 차분하게 가라앉은 니콜라스가 낯설었다.
“… 니콜, 취했지.”
얼마나 시간을 흘려보냈을까. 니콜라스의 가늘게 뜬 눈을 마주하던 변의주가 허탈하게 웃었다. 오늘은 꼭 물어야 할 말이 있었다. 더 늦어지면 안 될 것 같았다. 바탠더도 백룸으로 사라져버리고, 둘을 뺀 나머지 손님들도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 뒤였다. 크게 숨을 들이쉰 변의주가 니콜라스를 향해 몸을 돌렸다.
“너 솔직히 말해, 무슨 꿈 꿔?”
간절한 마음으로 물었는데, 돌아오는 건 희미한 웃음뿐이었다. 어? 꿈에 어떤 장면이 나오냐고. 검은 셔츠 소매를 걷은 팔뚝을 꽉 움켜쥐었다. 대답해. 웃지 말고. 제 입술을 쓸며 고민하던 니콜라스는 가벼운 말투로 답했다.
“Game Winnner? 가장 중요한 플레이어가 되는 꿈인데-”
“아니, 그런 꿈 말고.”
“하늘을 보면, 숫자가 있어. 그래서 알았어. 이게 그냥 꿈이 아닌 거.”
“… 그래, 그거. 자세히 말해봐.”
“안 해.”
풀린 눈으로 해실 대는 얼굴이 불쑥 다가왔다. 조명 두어 개만 켜져 어둑한 공간에서도 말간 표정이었다. 진짜 말 안 해줄 거야? 네 꿈? 나 지금 장난치는 거 아니야. 어떻게 끝나는지 만이라도 말하라고. 그렇게까지 다그쳐도 똑같다. 여전히 돌아오는 답은 없는 웃는 낯. 조금 울 것 같아진 변의주가 고개를 숙였다. 니콜, 너, 진짜-
“의주, 내가 갑자기 사라질 거라고 했을 때, 화났고, 슬펐고, 상처 받았었잖아. 그래서 말 안 해.”
“…”
“난 의주한테 아무것도 안 해.”
초점 없는 눈동자가 깊다. 화났다고, 슬펐다고, 상처 받았다고, 나는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는데. 변의주가 조용히 숨을 삼켰다. 아무것도 바꾸지 않아. 그렇게 다짐하듯 말한 니콜라스가 변의주의 오른손을 조심히 쥐었다. 그대로 끌어당겨 스스로의 뺨을 감싸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손등에도, 손바닥에도, 온통 니콜라스의 체온이다. 마주한 눈빛만큼 따뜻한.
“그래서, 난 의주한테 아무것도 아니지만…”
“…”
“좋았어, 마지막으로 같이 있어서.”
“… 뭐?”
니콜라스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손과 고개가 함께 힘을 잃고 아래로 떨어졌다. 제게 전부 맡긴 채 잠에 든 얼굴을 보다, 변의주가 숨결처럼 물었다. 그거 무슨 말이야…? 떨리는 목소리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그 날, 열두 살의 겨울. 나 내일 미국으로 가, 갑자기 이야기해서 미안- 이라는 말을 듣던 바로 그 겨울날. 꼭 그 때처럼 가슴께가 욱신거렸다. 시야가 흐려졌다가, 눈을 한 번 깜빡이자 다시 선명해졌다. 니콜라스의 뺨을 감싼 채로 그렇게 눈물을 떨어트리다가 천천히 일어섰다. 여전히 손을 떼지 않고 있어, 한 발자국씩 다가서자 니콜라스의 고개도 저를 향해 움직였다. 조용히 몸을 낮춘 변의주가 숨결이 닿을 거리에서 멈춰섰다.
“… 니콜.”
“…”
“네가 왜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야…”
물을 먹은 눈을 꾹 감고 입술을 붙였다. 어느 저녁의 맑은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다. 살짝 입을 벌리고 혀를 밀어넣자, 느릿하게 따라오는 움직임이 있었다. 위스키 향에 같이 취하는 기분이다. 니콜라스의 눈이 살며시 뜨였고, 곧 허리를 붙잡혔다. 달뜬 호흡이 터지듯 새어나왔다. 닿는 곳마다 열이 올랐다. 현실 감각 없이 움직이던 변의주는, 쪽, 하는 파찰음이 몇 번을 이어지고 나서야 물러섰다. 어느새 올라타있던 니콜라스의 무릎에서 내려오자, 여전히 초점이 없는 눈동자에 엉망이 된 제 얼굴이 담겨있었다.
“鹹…”
“…”
“夢? 不可能…”
이해할 수 없는 느릿한 말을 들으며 젖은 제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잠시 숨을 고른 변의주가 니콜라스의 잔에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반들거리는 입술과 뺨을 대충 훔쳐낸 손등으로 여전히 마르지 않은 제 눈을 가렸다.
“니콜, 미안한데,”
“…”
“… 나 먼저 갈게.”
멍하니 저를 보는 니콜라스를 두고 돌아섰다. 비틀대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눈 앞의 엘리베이터 버튼을 전부 누른 뒤 가장 먼저 도착한 걸 탔다. 문이 닫히고, 그 틈으로 니콜라스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주저앉았다. 그제서야 울음이 터져나왔다. 니콜라스가 미국으로 떠나버리던 날처럼, 로스앤젤레스에서 서울로 돌아오던 비행기에서처럼, 우린 친구니까, 같은 말을 뱉어버리고 돌아왔던 숙소에서처럼. 손바닥으로 꾹 누른 눈자위가 뜨거웠다. 엘리베이터 구석에 앉아 목 놓아 울며 생각했다. 이딴 말도 안 되는 꿈을 꾸는 이유. 하필 내가 전세계 사람들의 운명을 건 경기의 엔트리에 들어버린 이유. 그건 여전히 모르겠지만, 니콜라스가 선택된 이유는 알 것도 같다고.
니콜라스는 결승타보다 희생타를 훨씬 더 많이 치는 선수, 기꺼이 승리를 위한 조각이 되는 사람이었으니까.
2024년 2월 28일
이럴 줄 알았다면 캐리어에 옷을 더 꽉꽉 넣어왔을 테다. 변의주는 아침부터 몇 없는 옷가지들을 늘어놓고 입술을 뜯고 있었다. 유니폼은 빼고, 훈련복도 빼면, 남는 사복은 트레이닝 져지나 바지 같은 것들뿐이었다. 호텔방을 나눠쓰는 후배가 의문이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의주 형, 오늘 어디 가요?”
“응, 너 혹시 재킷 같은 거 없어? 좀 깔끔한… 출국할 때 입은 수트 말고.”
“그런 건 없는데… 아니, 누구 만나러 가시는데요?”
“아, 그냥… 친구.”
개막을 앞두고 진행되는 전지 훈련, 스프링 캠프. 비행기에 몸을 실을 때만 해도 니콜라스를 만날 계획은 없었다. 로스앤젤레스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는데 그 때에는 자신이 대만에 있다길래, 그냥 못 보겠네, 하고 말았지. 어쩐지 아쉬운 마음을 접어두고 훈련에나 집중했다. 그리고 마지막 날 받은 휴식일 하루 전, 니콜라스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주주, 내일 만날까?”
“… 어? 너 대만에 있다며.”
“아니야, 지금 왔어.”
“…”
“한 주 빨리 간다고 했어.”
내일 만나자. 신이 난 목소리에 덩달아 심장이 쿵쿵 댔다. 너, 그, LA가 그렇게 좋아? 마음에도 없는 소리나 했고. 니콜라스는 정말 선수단이 묵는 호텔 앞까지 차를 가지고 왔다. 결국 평소처럼 트레이닝복에 후드 집업을 걸친 변의주가 검은색 세단을 보고 감탄했다. 우와, 니콜! 너 운전해? 창문을 내리고,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머리 위에 걸친 니콜라스가 씩 웃었다. 그렇게 놀랄 일이야? 조수석에 앉은 변의주가 말을 이었다. 당연히 놀라지, 나 네가 운전하는 거 상상도 안 해봤어. 너 초등학교 때 롯데월드 가서 혜성특급도 못 탔잖아, 무섭다고. 어? 근데, 니콜-
“머리 잘랐네?”
어쩐지 분위기가 달라졌더라니. 변의주가 손을 뻗어 뒷머리가 사라진 자리를 만지작 거렸다. 까슬까슬하다. 머리 막 자르면 이렇지. 저도 모르게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지긋한 시선이 느껴졌다. 가늘게 뜨인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시간이 멈춰버린 기분. 마른 침을 삼킨 변의주의 시선이 니콜라스의 입술로 옮겨갔다. 하필 시동까지 꺼져버린 차 안은 고요할 뿐이었다. 정적을 깬 건 나직한 목소리였다.
“의주.”
“… 어?”
“벨트.”
“아.”
그제서야 니콜라스의 뒷목에서 손을 뗄 수 있었다. 다시 시동을 건 니콜라스가 운전대를 잡고는 픽, 웃었다. 변의주는 괜히 창 밖에 시선을 두었다. 귓가가 달아오르며 들뜨는 기분이 싫지 않았다.
*
목적지는 디즈니랜드 파크였다.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아, 내가 미국에 오긴 왔구나- 싶었다. 니콜라스는 멍하니 입을 벌린 변의주의 옆에서 큭큭 대기 바빴다. 그래놓고, 실은 자신도 로스앤젤레스에서 이렇게 놀러다닌 건 처음이라고 고백했다. 나도 가본 적 없다고 하면 주주가 안 따라올 줄 알았지. 가이드가 되어줄 줄 알았는데, 실은 그냥 통역사였다니. 어이가 없어 웃은 것도 잠시, 둘은 바쁘게 돌아다녔다. 평일인데도 날이 좋아 사람이 많았다. 어린 아이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싱긋 웃어주는 니콜라스를 보는 게 즐거웠다. 사실 어트랙션을 타는 것보다 그냥 나란히 줄을 서있는 시간이 더 좋았던 것도 같다.
불꽃놀이까지 보고 돌아가는 일정이었다. 운 좋게 나무에 가리지 않는 정면 자리를 잡았다. 입에 넣으면 달콤한 맛이 날 것 같은 성 위로 낯 익은 캐릭터들이 비춰졌다. 부드러운 멜로디와 함께 불꽃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와, 하고 감탄하는 변의주의 커다란 눈동자가 색색깔로 반짝였다. 둘 중 하늘을 보고 있는 건 한 명뿐이었다. 그걸 알아서,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니콜라스의 시선은 저를 향해있었다. 당연한 것처럼 느껴져서 가슴께가 아렸다.
지금 나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새카만 하늘로 쏘아올려지는 불꽃을 보며 변의주가 입술을 깨물었다. 끝없이 바닷물이 들이치는 해변에서, 겨우 쌓은 모래성 앞을 두 손으로 막고 있는 기분. 언젠가는 무너지겠지. 형편 없이 허물어지겠지. 파도 같은 니콜라스의 손길이 닿았다. 조심히 깍지를 끼는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저 숨을 참고 하늘에만 시선을 두었다. 고개를 틀고 저를 올려다보던 니콜라스가 살며시 입술을 떼었다.
가장 큰 불꽃이 터져나오고, 샛노란 유성 같은 빛이 성 위로 반원을 그렸다. 팡, 팡, 하는 소리에도 묻히지 않는 목소리가 있었다. 변의주의 귓가에 정확히 내려앉은 한 마디. 중국어였고, 니콜라스가 스쳐지나가듯 그 뜻을 알려줬던 말이었다.
변의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됐다는 듯 홀가분한 미소를 지은 니콜라스가 손을 놓았다. 그제서야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언젠가, 열심히 쌓아둔 성벽이 부스러져버릴 그 순간, 제가 너무 엉망이지 않기만을 바랐다.
*
2024년 7월 9일, D-DAY
유니폼을 갖춰입은 변의주가 타석에 선다. 몸 옆에 하늘색 선이 들어간 흰색 유니폼, 등에는 이름과 백넘버가 적혀있다. 변의주, 8. 전투기의 소음이 시끄럽다. 후덥지근한 공기를 크게 삼켰다 뱉는다. 인이어에서는 제 컨디션을 묻는 연구원들의 음성이 들린다. 변의주는 약속한 대로 답한다. No problem here.
야구화 밑창에 달린 스파이크 사이로 흙바닥 대신 푸른 잔디가 밟힌다. 손에 든 건 배트. 나무로 된 것이 아니지만, 이젠 낯설지 않다. 꼭 잡은 두 손에 냉기가 스민다. 고개를 들면 보이는 풍경은 검은색 싱크홀이 자리 잡은 탁한 하늘. 경계가 넘실대며 점점 그 크기를 키우고 있다. 그 덕에 흐린 날처럼 해가 들지 않아, 모자 따위는 필요 없다.
제 갈색 머리칼을 한 번 흐트린 변의주가 그 공동을 보며 심호흡을 한다. 오른손으로 배트를 쥐고 몸 앞에서 서너바퀴를 빠르게 돌린 뒤, 두 손으로 잡고 그라운드를 가볍게 툭, 친 후 타격폼을 잡는다. 그리고 하늘에서 눈 앞으로 새카만 구체들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변의주는 왼발로 그라운드를 내리찍는다.
침착하게 배트를 휘두른다. 타격한 구체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역시나, 소프트볼에 가까운 감각이다. 구체가 바스라질수록 공기가 거칠어지는 것 같다. 평소에 들이마시던 숨이 아닌 기분. 그렇게 3분 정도 하늘에서 쏟아지는 구체를 빠짐없이 쳐내다 문득,
변의주는 고개를 들고-
왼편을 바라본다. 구체 하나가 배트를 스쳐 바닥에 떨어진다. 굳은 얼굴의 니콜라스와 눈이 마주친다. 3루가 있을 자리에 뻗은 경사로, 그 초입에서 기다리는 건 니콜라스. 꼭 활주로 같은 그 길을 따라 달려나가겠지. 하늘에 난 구멍을 향해. 그 끝은 낭떠러지고 어떤 안전장치도 없지만, 너는 아랑곳하지 않고 달릴 거잖아?
그렇게 또 사라져버리겠지. 이번엔 정말 영원히.
물빛 유니폼 차림의 니콜라스를 바라보던 변의주가 문득 오른발을 뗀다. 밟고 있던 그라운드에, 숫자는 없다. 이건 꿈이 아니니까. 그 사실을 실감한 순간, 변의주는 손에 든 배트를 바닥에 내던진다. 텅, 하는 빈 소리가 난다. 꼭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는 제 머릿속 같다.
잔뜩 흥분한 채 제 이름을 불러대는 인이어를 잡아뺀다. 타석에서 바로 3루를 향해 방향을 잡고, 변의주는 새카만 덩어리가 쌓여가는 바닥을 박차고 달려나간다. 말도 안 되는 주루 플레이다. 그 모습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얼어붙었던 니콜라스는 커다란 화구통 같은 물체를 등에 멘 채 인이어의 지시대로 몸을 돌린다. 그 끝엔 하늘, 정확히는 싱크홀과 같은 구멍이 있다. 니콜라스가 얕은 숨을 뱉는다. 무엇이 튀어나올지, 혹은 무엇을 빨아들일지 모를 것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변의주는 속도를 줄이지 않는다. 눈 앞에서 움직이는 글씨는 NICHOLAS, 3. 스스로가 공이 된 것처럼 하늘 위를 향하는 니콜라스의 등을 보며 계속 달려나갈뿐이다. 발 밑으로 모래알들이 부서져 떨어진다. 가쁜 숨을 뱉다 보니 어느새 싱크홀과 점점 가까워진다. 몸을 잡아당기는 알 수 없는 힘에 겁이 나도 물러설 수는 없었다. 등에 멘 것의 무게 때문인지 니콜라스의 발이 느려진다. 경사로의 끝을 몇 발짝 앞두고, 변의주가 앞으로 몸을 던진다. 잡는다. 무조건. 휘젓는 손 끝에 익숙한 감각이 스친다. 파도처럼 간지러운 체온이.
2013년 12월 30일
그날, 갑자기 무슨 말이냐고, 미국이고 뭐고 그냥 가지 말라고 울어봤어야 했다.
2019년 2월 10일
너를 혼자 두고 도망치는 게 아니었는데. 사실 나도 네 생각을 했다고, 보고 싶었다고, 그래서 네 갑작스러운 키스 같은 건 그냥 잊어버릴 수가 없는 거라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2022년 10월 1일
그 공을 놓친 건 다 너 때문이었고, 홈런을 찬 것도 네 덕분이었는데-
2022년 10월 2일
그래놓고 친구. 그딴 말은 정말 하지 말걸.
2023년 7월 9일
너 보러 갈까 고민한 적, 진짜 많아. 그냥 무작정 비행기표를 끊어서 네 앞에 서면 너는 내가 와서 좋다며 웃겠지. 그런데 그럼 뭘 해? 어차피 며칠 있지도 못하고 돌아와야 하고, 다시 한참을 못 볼 텐데.
너 그거 알아?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을 전부 모아도 1년이 안 될 거야. 그런데 왜-
2024년 2월 28일
너를 떼어놓고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을까. 그 별것 아닌 봄날, 교무실 테이블에 앉아서 나를 올려다보던 순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얼굴로,
“我喜歡你。”
그렇게 말했던 밤. 팡, 팡, 터지던 불꽃놀이의 소음과 화려한 하늘 아래에서도 나는 그 문장을 이해했거든. 응, 사실 나도 그래. 미국이고 뭐고, 가지 말라고 울어봤어야 했고. 네가 키스했을 때 도망치지 말았어야 했고. 항저우에서 그렇게 친구, 우린 친구라고 선을 그어버리지 말았어야 했어. 너는 항상 손을 뻗어서 닿을 수 있는 곳에 없으니까. 없어져버리니까, 화가 났고 슬펐고 상처 받아서, 그래서 나는-
절대 너를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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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9일
변의주의 손이 니콜라스의 팔을 낚아챈다. 그대로 함께 넘어져 뒤엉킨 둘은 하늘을 향해 끌려가다가, 맨 손으로 흙바닥을 밀어낸 변의주의 힘으로 경사로를 따라 굴러떨어지기 시작한다. 사정없이 부딪히고 깨진다. 비명소리도 나오지 않아서 입술만 깨문다. 변의주의 뒷통수를 손으로 감싼 니콜라스가, 제 팔꿈치를 바닥에 갈아 붙이고 나서야 멈춘다. 귓가에 가쁜 숨소리가 들린다. 변의주는 가만히 제 위에 얹혀진 허리를 끌어안는다. 사실, 내가 잡아주길 바랐지? 넌 혜성특급도 못 타는 애잖아. 이것도 무서웠을 거잖아, 너.
겹쳐진 몸에서 쿵쿵 대는 고동의 주인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여전히 왼손으로 니콜라스의 유니폼 소매를 꽉 쥔 변의주가 눈을 뜬다. 발목부터 머리까지 욱신거리지 않는 곳이 없다. 그래도 니콜라스가 있다. 손이 닿는 곳에.
“가지 마.”
“…”
“니콜, 나랑 있자.”
몇 번의 스트라이크 끝에 마침내, 말한다. 가지 말라고. 사라지지 말라고. 막상 뱉고 보니 별것 아니었잖아.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던 니콜라스가 한 팔로 몸을 일으킨다. 제 밑에 갇힌 변의주를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물을 잔뜩 먹어 반짝인다. 여전히 꿈 속에 있는 것 같은 얼굴이다. 그 뒤로 펼쳐진 푸른 하늘에서 검은 구멍이 점점 사그라든다. 덕분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태양 빛이 변의주의 오른쪽 뺨부터 서서히 밝혀나간다. 니콜라스가 눈을 깜빡이고, 떨어진 눈물이 햇살과 같은 자리에 닿는다. 역시 차갑지 않네. 그렇게 생각하며, 변의주가 입꼬리를 올린다.
“니콜라스, 니콜, 너-”
“…”
“아웃이야.”
내가 너 잡았어. 너 이제 못 뛰어. 여전히 유니폼 소매를 꽉 쥔 채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니콜라스가 힘 없이 고개를 떨어트린다. 왼쪽 뺨에 긁힌 자국을 매달고는.
그 상처를 발견한 변의주가 손을 뻗는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이자, 제 세계의 끝인 니콜라스를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