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k Get Some Me Down
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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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나요? 라는 질문에 변의주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다.
[미안 의주야... 갑자기 일이 생겨서 야근해야 될 것 같은데 먼저 밥 먹을래? 최대한 빨리 들어갈게]
웃기시네…. 변의주는 차게 식어 굳은 손가락을 움직여 메신저 창을 벗어났다. 고개를 들면 건물을 벗어난 애인이 누군가를 발견하고 신이 난 듯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변의주가 아니었다. 의주가 아닌 사람의 손을 잡은 애인의 얼굴엔 웃음꽃이 가득 피어있었다. 의주와 있을 때보다 더 즐거워 보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을 다정하게 바라보는 얼굴을 보며 의주는 허탈하게 웃었다. 이… 씨발놈아. 네가 다른 사람 만나는 거 알고는 있었지만 우리 오늘 사 주년이야, 개새끼야. 변의주는 당장 사 년 전으로 돌아가 그 때의 변의주를 붙잡고 싹싹 빌고 싶었다. 그 인간 만나지 말라고, 제발…….
의주는 지금의 애인인 정현을 현재 근무하는 회사에 취업하기 전 잠깐 일 년 정도 계약직으로 일을 했던 곳에서 만났다. 당시 회계팀 업무를 도와주는 인력으로 일했는데 정현은 회계팀에서 제일 손이 많이 가는 일을 맡은 담당자였다. 원래는 일하는 사람이 더 많은데 다들 갑자기 그만두는 바람에 의주 씨 혼자 일하느라 한동안 바쁠 테니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행동이 조금은 날티 나는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담백하다고 생각한 게 정현의 첫인상이었다.
정현은 담백하다고 생각했던 첫인상과 비슷하게 의주에게 업무를 가르치는 내내 태도가 과하지 않고 산뜻했다. 아직 사회생활에 서툰 의주가 실수할 때마다 기분 나쁜 티를 낼 법도 한데 아무렇지 않게 수습하고는 다음부터는 조심해달라고 담담하게 스치듯 말할 뿐이었다. 미안하다는 뜻으로 점심시간 끝자락에 근처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톨 사이즈를 테이크아웃해서 책상 위에 슬그머니 올려두면 잘 먹겠다고 말한 뒤 다음날 의주의 책상 위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그란데 사이즈를 올려두고서는 모른 척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렇게 오가는 커피가 점점 많아졌고 조금씩 서로가 편해지며 호칭도 바뀌었다. 회사에서는 똑같이 정현을 대리님이라고 불렀지만 둘이서만 점심을 먹을 때는 이따금 정현을 형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여전히 존댓말을 사용하고 정현이 의주에게 말을 놓은 건 아니었지만 나름 정현을 부르는 호칭이 바뀌니 조금은 뿌듯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즈음, 변의주는 정현을 향한 제 마음을 자각했다.
처음 정현을 좋아한다고 깨달았을 때, 생각보다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다. 그냥 그렇게 됐구나 생각했다. 딱 이 정도의 모호한 감상.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전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적당히 계약 기간을 채우고 좋은 형 동생 사이로 남아 일 년에 한두 번 연락을 하는 걸로도 충분했다. 원래 사람 사이에 마음을 주고받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이성끼리도 어려운 일, 하물며 성향이 어느 쪽인지도 모르는 사람과 운명처럼 통할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 미적지근한 짝사랑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사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고. 애초에 그런 기적 같은 일이 변의주 인생에 일어날 리가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기적이 일어난 거다.
의주의 계약 종료가 일주일 정도 남았을 때였다. 새로 구한 직원에게 인수인계하던 것이 거의 마무리되었고 마침 금요일이라 조금 일찍 퇴근하려는데 정현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오늘 밥을 사줄 테니 잠깐 기다렸다가 같이 나가자는 내용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기에 알겠다고 답장을 보낸 뒤 정현을 기다렸다. 여섯시가 되자마자 가방을 챙긴 정현의 뒤를 따라 주차장으로 가 조금은 어색하게 조수석에 올랐다. 몸을 감싸는 의자에 기대어 운전하는 정현의 옆얼굴을 힐끗힐끗 훔쳐보았다. 그러다 신호에 잠시 차가 멈추고, 눈이 마주쳤다. 생긋 웃어준 정현이 다시 앞을 바라보고 의주도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현이 의주를 데리고 간 식당은 제법 가격대가 있는 일식집이었다. 이미 여러 번 와봤던 곳인지 정현이 익숙하게 메뉴를 읊었다. 마지막에 불린 건 제법 가격대가 있는 사케의 이름이었다.
“어? 형, 오늘 차 가지고 왔잖아요.”
“대리 부르면 되죠. 왜. 저랑 술 먹기 싫어요?”
“아니…. 그건 아닌데…….”
의주의 떨떠름한 대답에 그럼 뭐 어떠냐는 듯 어깨를 들썩인 정현이 자연스럽게 대화 주제를 돌렸다.
“좀 비싸서 그런 거면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제가 사주고 싶어서 사는 거예요.”
“……알겠어요.”
“술은 좀 해요?”
“어…. 아예 못 마시는 편은 아니에요.”
“나는 못 마시는 편인데. 나 취해도 버리고 가면 안 돼요.”
“제가 형을 왜 버려요.”
“왜? 지금도 나 버리고 가잖아요. 정규직 전환 제의 들어갔다면서요. 그거 거절하고 나가는 거니까 이미 한 번 버린 거죠. 제의 받은 거 얘기도 안 하고. 나만 우리 친하다고 생각했나?”
“그건….”
이뤄지지도 않을 짝사랑 상대 오래 보면 뭐하나 싶어서 거절했다고는 말 못하지. 때마침 서류 합격한 곳이 있어서 그걸 핑계로 썼는데 아직 거기까진 듣지 못한 것 같다. 핑계를 다시 써먹기 위해 천천히 말을 꺼내려는데 정현의 말이 더 빨랐다.
“아냐, 변명 안 해도 돼요. 그냥 좀 섭섭해서 심술부린 거니까. 그리고 부장님한테 들었어요. 서류 합격한 곳 있다면서. 들어보니까 괜찮은 곳이던데 면접 준비 잘하고. 혹시 모르죠. 거기 다니고 있으면 내가 거기로 이직할 수도?”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이미 붙은 사람처럼 말한다?”
“말이 씨가 된다는데… 이런 식으로 말하면 붙지 않을까요….”
민망해져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하니 정현이 부드럽게 웃었다. 그 표정이 꼭 의주를 귀여워하는 것 같아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테이블 너머로 정현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이 달아올랐을 게 분명해 고개를 들 수가 없어 음식이 나올 때까지 의주는 정현을 쳐다보지 못하고 내내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했다.
주문한 메뉴가 하나둘 나오고, 얼음에 차갑게 칠링한 사케를 한두 잔씩 주고받다보니 조금씩 분위기가 풀어졌다. 괜히 긴장한 탓에 온몸의 근육이 뻣뻣해져 태도가 어색했는데 취기가 오르니 점점 자세나 표정이 조금은 자연스러워졌다.
정현은 술을 못 마신다고 말한 것치고는 잔을 비우는 속도가 빠른 편이었다. 추가로 주문한 나베를 의주의 접시에 덜어준 정현이 말했다.
“그런데…. 나 말 편하게 해도 될까?”
“네? 당연하죠. 말 편하게 하라고 했을 때 존댓말이 더 편하다고 한 거는 형이었잖아요.”
“응……. 그랬지. 왜냐면 그땐 잠깐 보고 말 사이라고 생각했거든.”
그 말에 약간 서운해지려던 찰나, 정현이 곧바로 문장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아니면,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는데요.”
“너랑 계속 보고 싶어. 그래도 될까?”
와…. 이 형이 미쳤구나. 아무 의미 없이 하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속절없이 가슴이 뛰었다. 붉어진 얼굴을 술을 마신 탓이라고 변명할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부쩍 더워진 날씨와 맞지 않게 히터를 틀기라도 한 것처럼 공기가 더워 괜히 손부채질을 했다. 스치는 시선을 피하고 적당히 식은 나베를 먹기 직전 작게 대답했다. 당연하죠…. 의주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정현이 눈을 가늘게 늘어뜨리며 미소 지었다.
그 뒤로도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그 사이 주문한 사케를 전부 비우고도 모자라서 하나를 더 시키기까지 했다. 그것마저 다 비울 즈음에는 정현도 잔뜩 취해 평소와는 다르게 한껏 풀어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정신까지 놓은 건 아니었는지 슬슬 자리를 마무리하기 전 의주가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 틈에 정현은 계산을 모두 마치고 대리기사를 불러놓기까지 했다.
근처 공영주차장에 차를 대놓은지라 천천히 걸어가는 중 정현이 물었다.
“내일 출근 안 하니까 우리 집으로 가서 한 잔 더 할래?”
“어, 저는 괜찮은데…. 형, 안 힘들어요?”
“응. 괜찮아. 내가 잠옷도 빌려줄게.”
“알겠어요.”
사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정현의 집에 가지 않고 택시를 잡아 의주의 집으로 가는 게 맞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알코올의 영향으로 본능이 지나치게 열심히 일하는 탓에 아니라고 집에 가겠다는 말보다 알겠다는 대답이 먼저 튀어나왔다. 정현의 집에 가면 변의주만 곤란해질 게 뻔한데. 그러나 사람들은 이따금 멍청한 선택을 하지 않는가.
도착한 대리기사에게 정현이 집 주소를 부르고 나란히 뒷좌석에 앉았다. 말은 괜찮다고 했지만 힘들었는지 눈을 감은 정현이 창밖을 바라보던 의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더워진 날씨에 부쩍 얇아진 옷차림 너머로 정현의 온도가 느껴졌다.
정현이 사는 아파트 단지에 도착해 주차를 마치고 조금씩 비틀거리는 정현을 붙잡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거의 의주에게 안기듯이 기댄 정현을 낑낑대며 끌어 현관 앞에 도착하면 정현이 천천히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현관문이 열렸고 먼저 들어간 정현이 의주를 끌어당겼다. 의주가 정현의 품으로 넘어짐과 동시에 문이 닫혔다. 자동으로 켜진 조명으로 확인한 정현의 얼굴은 방금 전까지와 다르게 아주 멀쩡했다. 눈과 눈이 마주쳤고, 서서히 가까워지는 거리에 놀라 도망치듯 눈을 감고 말았다. 정현이 낮게 웃는 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들렸다. 부드러운 무언가가 의주의 입술 위에 머물렀다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멀어졌다.
감은 눈을 뜨면 정현의 얼굴이 아직도 지나치게 가까운 곳에 있었다.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며 물었다.
“어, 왜, 왜…?”
“좋아하니까. 왜? 나는 의주도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네? 언제, 부터 알았어요?”
“그게 중요한가. 그래서, 싫었어?”
뭐 이런 걸 물어보는 거지. 생각을 하면서도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싫은 건 아니었다.
“다행이네.”
정현이 여전히 멍한 얼굴의 의주를 빤히 보다 조용히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씩 올라간 입꼬리에 시선을 빼앗긴 사이 다시 당장 입술을 붙일 것처럼 다가온 정현이 물었다.
“그럼 한 번 더 해도 될까?”
정말이지. 자꾸 곤란한 질문만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주는 다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으로 하기는 조금 민망해서였다. 그런 소극적인 행동에 결국 웃음소리를 내버린 정현이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의주의 눈이 다 감길 즈음, 부드러운 입술이 닿았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면, 그날부터 사귀기로 했다. 이게 정현과 의주가 연인이 된 정황이고 의주가 돌아가고 싶어 하는 과거의 순간이다. 개자식. 네가 먼저 나를 꼬드겨놓고…. 역시 의주는 이때로 돌아가 제게 키스하는 정현을 후려쳐야 한다.
“잠깐, 근데 의주. 그 새끼가 언제부터 바람피웠는지는 알아?”
“아마… 네 달 전? 세 달 전? 그쯤….”
일단 정현이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는 것 같다고, 아니, 못해도 썸을 타고 있는 것 같다고 확신하기 시작한 것은 네 달 전부터다.
의주는 사 년 전 서류 합격한 회사에 무사히 최종 합격까지 하게 되었고, 정현은 의주가 이 년 차 직장인이 되었을 때 이직에 성공했다. 새로 옮긴 회사가 너희 회사에서 제법 가까운 위치라며 정현이 먼저 동거를 제안했다. 어차피 집을 옮겨야 되는 마당에 대출을 조금 더 받고 아파트로 들어갈 생각이니 거기에 들어오는 건 어떠냐는 말에 일주일을 고민하다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당시 살던 곳이 제법 외진 동네이기도 했고 집 자체도 원룸이라 썩 만족스럽지 않은 생활을 하던 차라 그랬다. 퇴근을 하고 만나 집을 보러 다녔고 그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즐거운 일이었다. 수압이 어떠니, 채광이 어떠니, 주변에는 뭐가 있니. 이것저것 따져가며 집을 계약한 뒤에 돈을 조금이라도 아끼겠다고 짐을 직접 옮겨 한참을 정리하다 중국집에서 음식을 시켜 순식간에 비워내는 일련의 과정에서 의주는 고단함의 몇 배로 행복을 느꼈다. 그렇게 이사한 집을 정현과 의주의 취향으로 꾸미고 당번을 정해 집안일을 하며 순조롭게 동거생활을 이어나갔다. 그건 제법 오래 지속되었는데 그게 반 년 전부터 조금씩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먼저, 정현의 야근이 늘어났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더는 야근은 못해먹겠다더니 어느 순간부터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여섯시에서 일곱시, 일곱시에서 여덟시, 여덟시에서 아홉시로 귀가 시간이 늦어졌다. 정현이 회사를 옮기면서 직종을 조금 바꿔 어지간하면 정시퇴근을 할 수 있다는 걸 이전에 들은 적 있는 의주가 먼저 말을 꺼냈다.
“요새 회사에 무슨 일 있어? 계속 늦게 퇴근하네.”
“아…. 새로 들어온 신규가 자꾸 실수를 해서 그거 수습하느라고. 우리 의주 형 걱정했구나?”
“아니? 어디서 이상한 짓 하고 돌아다닐까봐 그러지.”
“내가 무슨 이상한 짓을 한다고 그래.”
정현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었다. 실제로 얼마 전에 팀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왔다는 얘기를 들었던지라 아무 의심 없이 그저 비타민을 하나 사서 챙겨줘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의주를 보고 정현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뒤로도 정현의 귀가는 계속 늦어졌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났을 때는 사내 등산동아리에 가입하게 되었다며 주기적으로 주말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딱히 운동을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 왜 하필 등산 동아리를 들었나 싶긴 했지만 얼마 전 만난 고등학교 동창 중 한 명이 상사가 자꾸 눈치를 주는 바람에 하기도 싫은 탁구 모임에 들어갔다고 불평했었기에 비슷한 상황일 거라고 짐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무언가 이상하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한 건 정현의 핸드폰에 뜬 메시지 내용을 본 뒤였다. 오늘도 신규가 사고 친 걸 수습하느라 죽겠다면서 정현이 피곤한 낯으로 씻으러 들어가고 가방과 겉옷을 정리하는데 가방 속에 들어있던 핸드폰 화면이 켜지고 누군가로부터 도착한 메시지의 내용이 보였다.
[오늘도 너무 즐거웠어요 ㅎㅎ 잘 들어가셨죠?]
…즐거워? 오늘도? 교제가 점점 길어지면서 의주와 정현은 서로의 친구 이름을 자연스럽게 공유했는데 메시지를 보낸 사람의 이름은 의주가 정현에게서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어쩌면 정현의 회사에 새로 들어왔다는 사람이 보낸 문자일 거라고 생각하려해도 그렇게 치면 내용이 이상했다. 사고 친 걸 수습하는 게 즐거울 리가 없으니까. 욕실 문 너머로 들려오는 정현의 콧노래 소리를 들으며 의주는 불안해지는 마음과 의심을 애써 잠재웠다. 설마, 아닐 거라고. 정현이 그럴 리가 없다고. 괜한 사람 의심하는 거라고.
그러다 발견한 거다. 다른 사람과 다정하게 길을 걷는 정현을. 처음에는 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지구 인구가 80억 명인데 그 중 비슷하게 생긴 사람 한 명이 없겠냐고 합리화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회피한다고 해서 진실이 거짓이 되지 않는다는 걸 의주도 알았다.
정현이 의주와의 사 주년에 의주가 아닌 사람과 먼저 약속을 잡았다는 걸 알았을 때는 당장 그 자리에서 정현의 머리를 후려치고 싶은 걸 참느라 얼마나 힘들던지. 혹시 정신을 차린 정현이 약속을 취소하진 않을까 정현의 회사 앞에서 몸을 숨기고 기다렸는데 결국 의주가 마주한 것은 처참한 현실이었다.
분노에 가득 찬 채로 빠르게 이야기를 끝낸 의주의 맞은편에 앉은 니콜라스가 진정하라는 듯 거품이 가라앉은 맥주를 슬쩍 의주 쪽으로 밀었다. 들어 올린 잔에 제 잔을 부딪친 니콜라스가 입술을 적신 맥주를 닦아내며 말했다.
“그래서, 그게 언제 있었던 일이라고?”
“저번 달….”
“아직 안 헤어졌고?”
“응.”
“왜?”
그러게. 왜 나 형이랑 안 헤어지고 있지. 이유는 많았다. 지금 살고 있는 집 자체가 정현이 빌린 집이니까 헤어지면 나가야 할 텐데 당장 갈 곳이 없었다. 의주가 게이라는 것을 아는 부모님에게도 몇 달 전에 올해 내로 지금 만나는 사람을 한 번 데리고 갈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말을 해두었는데 그 기대를 실망시키는 것 같아 조금 미안했고. 그리고, 그리고….
“엿 먹이고 싶어…….”
“응?”
“그 형 엿 한 번 제대로 먹이고 싶다고. 아니, 지만 바람피울 줄 아나? 나도 바람피울 수 있어.”
“의주가? 에이.”
“나도 할 수 있어. 어? 나도 막 게이 바 가서 모르는 사람이랑 술 먹고, 키스하고. 아니, 모르는 사람이랑 키스는 좀 그렇긴 하다. 아무튼 나도 바람피우고 김정현한테 보여주고 싶어. 나도 딴 사람 만날 수 있다고.”
“흠, 그래? 그럼 이건 어때.”
니콜라스의 말에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했다. 시큰둥하던 얼굴을 하고 있던 니콜라스가 입꼬리를 올려 순식간에 장난스러운 표정을 만들었다. 순간 씩 올라간 입꼬리에 시선을 빼앗긴 의주를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내는 걸로 다시 제게 집중시킨 니콜라스가 조금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나랑 바람피우는 거야.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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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랑? 내가?”
“응. 의주랑 니콜이랑.”
“갑자기 웬 삼인칭….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어떻게 너랑 바람을 펴.”
“하… 의주, 들어봐? 의주가 바람을 피우는 것까지는 좋아. 근데 누구랑 피울 건데? 진짜로 아무 게이 바 들어가서 별 시답잖은 애랑 피우려는 건 아니지? 적어도 김정현보다 잘난 사람을 골라야지.”
“어, 계속 말해.”
“좀 짜증나긴 하지만 김정현이 다른 사람보다 잘나긴 했잖아? 당장 지금 나가서 길거리 지나가는 사람들 봐봐. 그 인간보다 나은 사람 찾기 드물어. 하지만? 의주는 길거리를 나가지 않고 게이바에 가지 않아도 고개만 들면 김정현보다 잘난 사람을 찾을 수 있지.”
“그래…. 너 잘나셨어요. 그래서 너랑 바람피우라고? 말했잖아. 너랑 나랑 어떻게 바람을 피냐고.”
“척을 하자는 거야. 어차피 너 말만 그렇게 하지 결국 못할 거잖아. 그리고 의주, 생각해봐. 네 남친 나 되게 싫어해. 이왕이면 네 남친이 싫어하는 사람이랑 바람피우는 게 엿 먹이긴 더 좋지 않아?”
생각해 보니 그렇긴 했다. 정현과의 연애 초기에 이루어진 싸움의 이유 대부분은 니콜라스가 차지하고 있었다. 하도 의주가 매일 니콜라스랑 연락을 하니 걔를 한 번 만나야겠다는 성화를 부려 가진 만남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 정현은 내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왜 너는 걔랑 그렇게 자주 만나냐, 걔는 너를 왜 주주라는 애칭으로 부르냐, 너는 왜 걔를 니콜이라고 부르냐, 그리고 걔가 널 보는 눈빛이 심상치가 않다. 별별 트집을 다 잡았다. 그러고는 그 뒤부터 의주가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고 말이라도 꺼내면 그것부터 물었다. 네가 만나러 가는 친구가 니콜라스냐고. 긍정하면 바로 얼굴을 굳히는 탓에 한동안은 니콜라스를 만나지 않은 적도 있었다. 시간이 좀 더 흐르고 나서부터는 슬그머니 다시 만나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정현을 생각해서 니콜라스에게 말하긴 했다. 앞으로는 주주라고 부르지 말고 의주라고 부르라고. 나도 이제 너 니콜이라고 안 부르고 니콜라스라고 부를 거라며 정현이 불편해하니 부탁한다고 얘기하는 의주의 말에 니콜라스는 내가 더 주주랑 훨씬 더 오래 알고 지냈다고 억울해 했었다.
“그렇긴 하지만…. 좀 미안한데. 괜히 나 때문에 너만 게이로 오해받으면 어떡해.”
“뭐 어때. 어차피 이제 안 볼 사람 아니야? 의주의 잘난 친구 이럴 때 써먹어.”
“아니, 그래도.”
거절하는 게 맞는다는 걸 알지만 딱 잘라 거절할 수 없는 이유는 니콜라스의 말이 어느 정도 의주를 설득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니콜라스의 말마따나 변의주는 게이 바 가서 생판 모르는 누군가를 꼬드겨서 바람을 피울 깜냥이 안 된다. 두 번쯤 죽었다 깨어나면 모를까. 게다가 안 그래도 니콜라스를 내내 의심했던 김정현인데 의주가 저를 두고 만나는 사람이 니콜라스라는 사실을 알면 정말 제대로 자존심이 긁히지 않을까? 망설이는 변의주를 눈치챈 니콜라스가 몸을 일으켜 의주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로의 몸이 스칠 정도로 가깝게 거리를 붙인 니콜라스가 비밀스러운 거래를 제안하는 것처럼 나지막이 속삭였다.
“의주, 날 이용해.”
“…뭐? 아니, 하, 잠깐.”
“의주가 손해 볼 일은 없어. 아니면 그 뭐야, 옛날에 한국에서 했던 프로그램. 우리 결혼 했어요? 그거 한다고 생각해. 그니까 나랑 피우자. 바람. 응?”
하여간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를 그럴 듯하게 하는 건 타고났다. 그리고 애초에 부탁을 해야 되는 건 의주인데 왜 니콜라스가 의주에게 역으로 부탁하고 있는 건지. 이 이상한 상황에 웃음을 참지 못한 의주가 뜬금없이 끅끅대며 웃기 시작하자 니콜라스의 표정이 미묘하게 옹졸해졌다.
“왜 웃어?”
“그게 아니라…. 니콜, 왜 네가 부탁하는 거야. 이건 내가 부탁해야 되는 거잖아.”
“어? 의주, 지금 나 뭐라고 불렀어?”
“야아…. 왜 의주라고 불러? 예전에 네가 말해준 적 있었잖아. 대만에서는 가까운 사이에 이름 하나를 반복해서 부른다고. 아, 그럼 나도 앞으론 그렇게 불러야 되나? 샹샹이라고?”
“뭐, 무, 아니.”
“잘 부탁해? 샹샹?”
말을 끝내고 씩 웃는 의주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니콜라스가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렸다. 이런 건 치사해, 주주.
니콜라스는 제일 먼저 룰을 정해야 된다고 얘기했다. 하면 안 되는 것들을 정해놓고 그 외에는 다 허용하는 걸로 하는 건 어떠냐는 말에 얌전히 수긍했다. 그럼 오늘은 시간도 늦었고 둘 다 취했으니 다음 주말에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잡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해 방문을 여니 대체 언제 귀가했는지 모를 정현이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분명 저런 행동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멋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 보니 꼴값도 저런 꼴값이 없다. 멀쩡한 서재 두고 왜 침대에서 저러고 있지? 있는 정, 없는 정이 다 털려서인지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전부 시비를 걸고 싶어졌다.
“좀 늦었네.”
“응. 니콜이랑 대화하다 보니까.”
“…그래?”
아, 긁혔다. 애써 아닌 척 하지만 입가가 굳어 미소가 어색했다. 씻으러 갈 테니 먼저 자라는 말에 정현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갈아입을 옷을 챙겨 욕실에 들어오니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최근 몇 달은 내내 지옥에 떨어진 기분이었는데 오늘은 신나기만 했다.
우울은 수용성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뜨거운 물 아래서 한참을 있다가 나오니 조그맣게 남아있던 부정적인 감정까지 다 녹아 없어진 기분이었다. 정현이 옆에 있어도 그렇게 막 짜증이 나지는 않았다. 이 개자식 엿 먹일 생각을 해서 그런가. 눈을 감기 전 니콜라스에게 고맙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남겨놓으려고 핸드폰 화면을 키자마자 돌아 누워있던 정현이 몸을 돌려 의주를 바라봤다.
“아직 안 잤어?”
“누구야?”
“누구냐고?”
“지금 연락하려는 사람.”
“아, 니콜. 잘 들어갔냐고. 아까 좀 취했어가지고.”
“너 왜 아까부터 걔를…. 아니, 아니다.”
“뭐지? 형, 얼른 자. 내일도 일찍 출근해야 된다며.”
모르는 척 대꾸하니 정현이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결국 너도 얼른 자라는 말을 하고 다시 몸을 돌렸다. 그치, 너도 지금 다른 사람 만나니까 나한테 뭐라고 못 하겠지? 새삼 상기되는 현실에 짜증이 솟구치려는 찰나 핸드폰 알림이 울렸다. 니콜라스였다.
[주주, 다음 주까지 제대로 생각해 와. 그럼 굿나잇~]
뭘 생각해오라는 건지 주어를 언급하지 않는 점에서 정현이 내용을 확인 했을 때 의주를 의심하기 딱 좋은 문자였다. 니콜라스가 이런 거에 소질이 있었다니. 몇 년을 알고 지냈지만 처음 알게 된 사실에 기분 좋은 신기함을 느끼며 답장했다.
[응 잘 자 너도 제대로 생각해 오고]
니콜라스와 변의주의 인연은 스무 살, 다른 과와의 합동 엠티에서 시작되었다. 경영학과와 회계학과의 합동 엠티였는데 거기서 처음만나 친해지게 되었다. 사실 니콜라스를 처음 봤을 때는 엠티 장소를 잘못 찾아온 건 아닐까 생각했다. 변의주의 기준으로 봤을 때 패션센스가 다른 사람들과 달리 범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게다가 당시 니콜라스는 지금보다 한국어가 서툴렀다. 패디과 유학생이 장소를 잘못 찾아온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지만 니콜라스는 놀랍게도 경영학과 신입생이 맞았다. 고등학교 이학년 때부터 한국에 들어와 살았다고 그래도 아직 한국어 마스터는 못 했으니까 가끔 실수해도 그러려니 하라는 말에 박수를 치며 속으로 친해지기는 조금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황은 의주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술이 약한 편은 아니지만 술 특유의 씁쓸한 맛이 싫어 적당히 눈치를 살피다 다들 어느 정도 정신이 나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취한 척 눈을 감았다가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때는 사방이 온통 컴컴했다. 아마 누군가가 의주를 옮겨 적당히 노는 방 하나에 버려둔 것 같았다. 벽 너머로 사람들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주머니에 들어있던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니 이미 새벽 한 시가 훌쩍 지나있었다. 하여간 다들 체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다시 자려는데 옆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지금 몇 시?”
“앗.”
깜짝이야….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아서 다행이지. 급하게 소리를 삼킨 탓에 딸꾹질이 나왔다. 잘게 튀는 몸을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니콜라스였다. 자다 일어났는지 나른하게 반쯤 감긴 눈과 동그랗게 뜨인 의주의 눈이 마주쳤다. 어두컴컴한 방, 달빛을 받아 번쩍이는 눈을 보고 있자니 야밤에 들짐승과 마주친 기분이 들어 천천히 숨을 골랐다.
“미안. 많이 놀랐어?”
일어난 것을 밖에 들키고 싶지 않은지 니콜라스는 속삭이듯 말했다. 의주도 다시 바깥의 지옥으로 끌려가고 싶지 않은 마음인지라 조그맣게 대답했다.
“아니. 괜찮아. 아, 지금 몇 시냐면… 잠깐만? 어… 한 시 사십 분.”
“고마워.”
조금 제멋대로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사과와 감사가 순순히 튀어나왔다. 속으로 섣불리 판단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의주를 조용한 시선으로 응시하던 니콜라스가 거리를 좁혀 가까이 다가왔다.
“의주.”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지. 물론 알고 있을 수도 있다. 아까 니콜라스와 의주는 근처에 앉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존재감이 크지 않은 의주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신기했다. 실제로 선배 중 한 명은 의주의 이름을 무려 다섯 번이나 물어봤다. 마지막으로 물어봤을 때는 완전 만취상태였으니 아마 내일 아침 여섯 번째 질문을 하지 않을까. 낯을 가리고 조용한 탓에 먼저 다가온 동기들도 금방 의주를 떠나 다른 사람에게 갔다. 니콜라스는 의주와 정반대였다. 주변에 계속 사람이 머물렀다. 그러니 대화도 하지 않은 의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렇다고 해서 유난스럽게 반응하고 싶지는 않았다.
“응, 니콜라스.”
의주의 대답에 니콜라스의 눈이 살짝 동그래졌다. 왜… 놀라지. 그 반응에 오히려 당황한 게 겉으로 드러났는지 니콜라스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한테 관심 없다고 생각했어.”
“왜?”
“나랑 눈이 마주치지 않았으니까. 난 의주를 계속 보고 있었는데.”
“나를?”
“응.”
왜? 무언가 비밀을 물어보는 기분에 더 작아진 목소리에 니콜라스가 더 가까워졌다. 소란한 바깥과 다르게 조용한 방 안에 의주를 따라 소리를 작게 내느라 더 낮아진 니콜라스의 음성이 내려앉았다.
“그냥. 의주 귀여워서 친해지고 싶었어.”
황당한 말에 표정이 구겨진 의주의 얼굴을 봤는지 니콜라스가 숨죽여 웃었다. 지금의 문장이 실수라고 생각하려 해도 동그란 의주, 하고 말하는 걸 보아하니 제대로 만들어 낸 것이 분명했다. 역시 니콜라스는 의주가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조금 제멋대로인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유가 이상해.”
“그래? 왜?”
“그냥 다 이상해.”
“뭐… 의주가 그렇다면 그런 걸로 하자.”
뭘 그런 걸로 해. 너 진짜 이상하다.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말하면 괜히 말꼬리를 잡혀 이 대화가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결국 입을 꾹 다문 의주에게 니콜라스가 다시 말을 걸기 위해 입을 연 순간, 구석에 있던 누군가가 몸을 움직이다 어딘가에 부딪쳤는지 쿵하는 소리와 함께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제법 소리가 컸던지라 밖에서 무슨 소리냐며 대화를 주고받는 게 들렸다. 눈이 마주친 니콜라스와 의주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반쯤 일어나있던 몸을 바로 눕히고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누가 잠꼬대했나봐. 아직 다 죽어있네.”
“아, 뭐야. 괜히 놀랐네. 가자.”
벌컥 문이 닫히는 소리에 실눈을 떠 혹시 누가 남아서 지켜보고 있는지 확인했다. 아무도 없었다. 다시 눈을 뜨고 편하게 옆으로 돌아누웠다. 니콜라스는 이미 의주를 보고 있었다.
“일어난 거 들키는 줄 알았어.”
“그니까.”
“의주, 술 잘 못 마셔?”
“그건 아닌데… 맛이 없잖아.”
공감하는 듯 니콜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주 맛있는 거 좋아해? 그럼 맛집 돌아다니는 것도 좋아해? 니콜라스의 질문에 좋아한다고 대답하니 학교 근처에 맛집이 많다고 들었다고 나중에 같이 가자는 말이 돌아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한참을 떠드는데 아직 날이 조금 쌀쌀해 구석에 뭉쳐져 처박힌 이불을 가지고 와 니콜라스까지 덮어주었다.
“땡큐.”
“뭐….”
“어, 그러면 우리 지금 한 이불 덮은 거네?”
“아니, 그렇긴 한데 너 왜 당연한 말을 이상하게 말해…?”
기겁하는 의주의 반응에 니콜라스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한참을 끅끅거리고 웃었다. 아까부터 차라리 실수면 좋겠는 이상한 말을 하는 통에 결국 뚱한 표정으로 니콜라스를 응시했다. 그런 의주의 반응에도 니콜라스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나 예전에 들었어. 부부는 한 이불 덮고 자야 사이가 좋아진다고. 그럼 의주랑 나도 지금 사이좋겠네. 그치.”
“그, 틀린 말은 아닌데 너 자꾸 말이 좀….”
그렇게 말을 묘하게 하는 니콜라스와 의주는 하룻밤 같은 이불을 덮으며 빠르게 가까워졌다. 새벽 늦게까지 대화하다가 느지막이 일어난 둘이 나란히 앉아 라면을 먹는 내내 조잘조잘 떠드는 걸 본 사람들이 대체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냐고 반응할 정도로 말이다. 그 반응에 의주는 어색하게 웃었고 니콜라스는 어깨를 한 번 으쓱거렸다. 그 뒤로는 대학생활 내내 니콜라스랑 붙어 다녔다. 교양 시간표를 최대한 맞추는 것은 물론 방학 때면 내내 서로의 자취방에서 살다시피 했다. 심지어 니콜라스는 의주가 군대를 갔을 때 가족보다도 자주 면회를 오기까지 했다. 올 때마다 뭘 어찌나 많이 사들고 오는지 나중에는 의주보다 의주의 부대 사람들이 니콜라스를 기다릴 정도였다.
“니콜, 너 이렇게 자주 오면 집엔 언제 가는 거야?”
“집? 안 가. 부모님 아직 신혼 즐기는 중이라 내가 가면 오히려 민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심 서운해 하실 수도 있잖아.”
“저번에 말 안 하고 깜짝 이벤트로 갔다가…. 아무튼, 안 가는 게 맞아.”
그래,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겠니. 애초에 의주가 입대하던 날에도 변의주 가족 옆에서 잘 다녀오라고 손 흔들던 니콜라스였다. 그걸로 이미 충분히 유난이고 놀라운데 의주가 처음으로 휴가 나온 날에도 부모님 옆에 나란히 서있었다. 심지어 니콜라스를 의주가 부른 것도 아니었다.
“뭐야. 너 왜 여기 있어?”
“응? 나 전화 받고.”
“누구한테?”
“엄마가 전화했어. 얘, 너는 휴가 나오는 것도 말 안 해주고 애 서운하게.”
“아니…. 뭐지.”
결국 의주는 어머니가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 니콜라스와 나란히 앉아 근처 소고기 집에서 푸짐하게 고기를 먹고 부모님이 예약한 숙소에 같이 들어가 한 방을 썼다. 옆에서 고롱고롱 팔자 좋게 자는 니콜라스가 얼마나 어이없었는지 모른다. 우리 누나도 안 왔는데 대체 네가 여길 왜 온 거야. 실제로 복귀하는 날 이렇게 물어보기도 했다. 그랬더니 니콜라스가 의주는 너무하다고 감정이 없다며 불쌍한 척을 해서 괜히 부모님에게 너는 섭섭하게 친구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며 괜히 한소리 들었다. 나중에 시간이 더 흐르니 니콜라스는 아예 의주의 부모님을 엄마아빠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사실 그 즈음엔 니콜라스가 가족 사이에 끼어있는 게 익숙해져서 의주도 아무렇지 않았다. 심지어 의주가 제대하는 날에는 이런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군대 기다려주는 사람이랑은 결혼하는 거라던데. 의주, 이제 나랑 결혼해?”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의주랑 결혼 한다고? 프러포즈는 받았니?”
“아직이요. 기다리고 있어요.”
“진짜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기대하고 있을게. 성대하게 해줘야 돼?”
진심 정신 나갔나. 누구하나 그만두는 법을 몰라 끝도 없이 흘러가는 아무 말에 질린 의주가 지쳐서 제발 알겠으니 이제 그만하자고 빌고 난 뒤에야 상황이 종료됐다. 그리고 이 때부터 니콜라스는 의주를 주주라고 불렀다. 아무래도 부모님이 인정한 사이니 애칭을 부르는 게 맞는다는 이상한 논리에 대꾸하기도 귀찮아 네 맘대로 하라며 대충 대답했다. 결론적으로는 대학 친구들도 전부 니콜라스에게 호칭이 옮아 다들 주주라고 불러대긴 했지만. 니콜라스는 끝까지 우겨댔다. 내가 말하는 주주만 진짜고 너희가 말하는 주주는 가짜라고. 그 말이 아니라고 반박하기에도 애매한 것이 미묘하게 다르긴 했다. 니콜라스가 부를 때가 제일 익숙하다고 해야 되나. 다른 사람이 부를 때는 이상하게도 그 부름이 익숙해지지가 않아 반응이 늦을 때가 많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정현이 니콜라스가 의주를 주주라고 부르는 걸 싫어했나.
정현이 억지를 부려 마련한 자리에서도 니콜라스는 의주를 주주라고 불렀다. 호칭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 좀 이상하게 시작되긴 했으나 이미 몇 년이나 흘러 기억조차 희미해져 익숙해져 버릴 대로 익숙해진 호칭인지라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정현은 그걸 거슬려했다. 왜 다른 사람이 애칭을 불러도 가만히 있냐고, 그리고 왜 너도 걔를 특별하게 부르냐고. 여기엔 의주도 할 말이 있었다. 니콜라스라고 부르면 네 글자고, 니콜이라고 부르면 두 글자인데 당연히 두 글자만 부르는 게 낫지 않냐고. 그리고 걔랑은 진짜 아무 사이 아니라고. 형이야 말로 애꿎은 사람 의심하지 말라고. 그러나 연인간의 관계에서 이렇게 반응하면 안 된다는 걸을 알아서 참았다. 그래서 니콜라스에게 말한 거다. 우리 잠깐 거리를 두자고. 친구에게 하기에는 유난인 말이었지만 그래도 걔는 의주를 전부 이해해주니까.
“당분간은 만나지 말자고?”
“응. 형이 좀… 싫어하는 것 같아.”
가족에게 남자를 좋아한다고 밝힐 때 니콜라스에게도 말했기에 니콜라스도 의주가 현재 만나는 사람이 남자라는 걸 알았다. 아마 정현은 몰랐겠지만 지난번의 만남은 연인의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니콜라스가 의주의 연인이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만남에서 정현만 니콜라스를 별로라고 생각한 건 아니라는 것도.
“주주, 난 그 사람 별로.”
“왜에.”
“몰라. 그냥 눈빛이 별로야.”
그건 아마도 형이 너랑 내 사이를 의심해서 그럴 걸. 그걸 말하기는 좀 그래서 그냥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사실 니콜라스가 의주에게 유난인 것도 맞으니까.
“아무튼 당분간은 둘이서만 만나는 건 자제하자.”
니콜라스는 의주의 말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가 결국 알겠다고 대답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니콜라스는 의주에게 잘 져주는 편이었다. 이다음에 앞으론 주주라고 부르지 말고 의주라고 부르라는 말을 했을 때도 내가 왜 그래야 하냐며 따지고 보면 주주랑 내 사이에 그 사람이 끼어들은 거라고 투덜거렸지만 결국은 그렇게 하겠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마지막까지도 그런 말을 하긴 했다.
“주주, 주주는 주주가 제멋대로 굴 수 있는 상대를 만나는 편이 좋아.”
주말 아침 눈을 뜨자마자 준비를 끝내고 아직 자고 있는 정현에게 오늘 니콜라스와 만나서 놀다 들어올 건데 아마 저녁 늦게나 돌아올 것 같으니 혼자 잘 놀고 있으라며 통보하고 집을 나섰다. 비몽사몽 정신에 의주가 한 말을 거의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그건 알 바 아니었다.
니콜라스와 만나기로 한 카페는 몇 년 전 아직 학생 신분일 때 거의 매일같이 갔던 곳이었다. 졸업하고도 한동안은 방앗간에 가는 참새처럼 곧잘 방문했지만 정현과 사귀기 시작하면서 발걸음을 끊었었다. 니콜라스가 살던 자취방 근처에 있어 주말에 니콜라스와 만날 때마다 갔던 곳이었는데 주말을 정현과 보내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사장님이 가끔 나한테 의주 안부를 묻는다는 말에 조만간 가야겠다고 기약 없는 말을 여러 번 뱉었는데 그 말을 드디어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가는 길은 여전히 익숙하지만 군데군데 낯설어진 곳이 보였다. 사라진 몇몇 가게들을 회상하다 보면 어느새 익히 알고 있는 카페 입구가 보였다. 어쩐지 조금 긴장돼 숨을 살짝 고르고 문을 열었다. 문에 달려있던 종이 맑은 소리를 내며 울렸다.
“어서 오세, 어?”
“안녕하세요.”
“세상에… 의주야 너무 오랜만이다. 그동안 잘 지냈어?”
“네에…. 사장님도 잘 지내셨죠?”
“나야 매일 똑같지. 의주는 회사 다닌다면서. 어때. 괴롭히는 사람은 없고?”
“요새는 그러면 바로 징계라 다들 조심하더라고요.”
“하긴 그렇지. 그리고 의주 네가 어련히 잘 하겠지. 내가 괜한 걸 물었다. 그치. 그런데 오늘 여기까지 무슨 일이야? 이사도 했다면서. 집이 더 멀어졌다고 니콜라스가 말하더라고.”
“아…. 저 오늘.”
대답하려던 찰나, 뒤에서 들린 목소리가 멋대로 문장을 빼앗아 의주의 말을 마무리했다.
“나 만나러 왔지요. 일찍 왔네, 주주?”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니 한껏 꾸민 니콜라스가 안녕, 하고 인사했다. 니콜라스와 반대로 튀는 곳 하나 없이 얌전하게 차려입은 옷이 조금은 멋쩍어 작게 인사를 돌려주었다. 그러고는 메뉴를 고르기 위해 나란히 선 둘을 사장님이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오늘은 돈을 안 받을 거라고 냅다 선언하는 통에 제발 계산하게 해달라고 한참을 빌었다. 결국 승리를 거머쥔 건 사장님이었다. 그렇게 정 돈을 내고 싶으면 다음에 또 와서 왕창 시키라는 말에 웃음을 터트린 니콜라스가 그럼 다음에 우리가 올 때까지 마음의 준비 하고 있으시라고 능청을 떨었다. 하여간 어떤 상황이든 유쾌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항상 앉던 구석 자리에 앉으니 꼭 오랜만에 본가에 간 것처럼 익숙한 편안함이 느껴져 절로 몸이 늘어졌다. 푹신한 의자에 잡아먹힌 것처럼 파묻힌 의주를 본 니콜라스가 집에서도 그러고 있냐며 물었다. 천천히 고개를 도리질했다. 이상하게 정현과 있을 때는 격 없이 굴기가 조금은 겸연쩍었다.
의주의 말에 잠시 침음에 빠졌던 니콜라스가 곧바로 빠져나와 질문했다. 정현이 불편했냐고. 그 말에 생각했다. 그랬었나, 하고.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보면 또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뭐라고 딱 잘라 표현하기가 애매하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의주는 정현에게 언제나 조금씩 거리감을 유지했던 것 같다. 정현의 옆에서는 항상 보여줄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적정선을 그어두고 행동했다. 사 년이나 그렇게 지내왔으니 하도 익숙해져 딱히 불편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 니콜라스의 질문에 문득 자각했다. 어쩌면 변의주는 김정현을 내내 불편해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조금 충격적인 깨달음이었다.
“주주. 그 인간 좋아했던 거는 맞지?”
“응. 좋아했지?”
“그럼 사랑은?”
“사랑? 사랑도….”
당연히 했다고 대답하려는데 어쩐지 선뜻 말이 튀어나오질 않았다. 무려 사 년을 만났다. 짧지 않은 시간을 만났으니 사랑하는 게 분명한데 왜 말하기가 꺼려지는 걸까. 그 망설임을 니콜라스는 그냥 넘기지 않았다.
“좋아하는 거랑 사랑하는 거는 다른 거야. 알지?”
“그건 나도 알아.”
알면 됐고. 뭣 모르는 어린애를 상대하는 것 같은 태도에 나를 설마 그것도 모르는 바보로 아는 거냐면서 말을 하려는 찰나 사장님이 음료와 디저트로 가득 채운 트레이를 들고 나타났다.
“너희 싸우니?”
“아니요.”
“전혀요.”
“너희는 예전에도 툭하면 티격태격 하더니 아직도 그래?”
사장님의 말에 조금 민망해져 고개를 숙인 의주와 다르게 니콜라스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사장님, 부부싸움은 원래 칼로 물 베기라는 거 몰라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얘 아직도 말을 종종 이상하게 하네. 어이가 없어져 고개를 들어 니콜라스를 보니 자기 잘 했냐는 듯 도리어 뻔뻔하게 윙크를 날리는 통에 순간 치솟았던 짜증이 황당함에 잡아 먹혀 가라앉았다. 어이없어, 진짜. 니콜라스와 의주를 번갈아 본 사장님은 그러게 그런 것 같네 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셨다.
“진짜 너는….”
“왜?”
“…말을 말자.”
“응. 어, 딸기 케이크다. 대박.”
신나서 카메라로 케이크 사진을 찍은 니콜라스가 핸드폰 화면을 톡톡 쳐가며 무언가를 입력하는 것 같더니 이윽고 의주의 핸드폰에서 알림이 울렸다. 니콜라스가 SNS 게시물에 의주를 태그 했다는 내용의 알림이었다. 들어가 확인하니 방금 찍은 케이크 사진 너머로 의주의 손가락이 보이고 오랜만이라는 말 뒤에 웃는 얼굴의 이모티콘이 붙은 글과 함께 사진엔 의주의 아이디가 태그 되어 있었다.
“뭐야?”
“어때. 잘했지.”
“뭐가. 어차피 네 계정에 올린 거라 형은 못 볼 걸?”
“무슨 소리. 김정현 예전에 실수로 내 게시글 하트 누르고 취소한 적 있어. 아마 오늘도 계속 확인하고 있을 걸.”
그건 대체 언제 그랬던 거지. 의주의 생각보다 정현이 더 니콜라스를 신경 쓰고 있었나 보다. 심지어 하트를 누르고 취소했다니. 조금 찌질한 행동에 표정이 절로 떫어졌다. 다시 확인한 게시글에는 그새 댓글이 여럿 달려있었다. 어디냐, 요새 왜 연락을 안 하냐, 조만간 날 잡아서 만나자. 그런 댓글들을 전부 무시한 니콜라스는 태그 된 아이디와 무슨 사이냐는 질문에만 답글을 달았다. 비밀. 그리고 수줍어하는 것 같은 이모티콘. 아니, 진짜 얘는 이런 걸 어디서 배워온 거야? 관심을 끄는 방법이 수준급이다. 아마 정현이 이걸 보면 짜증이 확 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또 기특한 거다. 그래서 계속 핸드폰을 확인하느라 그렇게 좋아하는 딸기케이크도 뒤로 미뤄둔 니콜라스를 보다가 케이크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포크로 찍어 조금 내민 채로 말했다.
“니콜, 아.”
핸드폰을 보던 시선만 조금 올려 의주를 확인한 니콜라스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들고 있던 포크를 더 니콜라스의 쪽으로 내밀었다. 아, 하라고. 나 팔 떨어져. 당혹스러운 얼굴을 한 니콜라스가 머뭇거리며 입을 벌렸다. 몸을 더 내밀어 니콜라스의 입에 쏙 넣어주고 의주도 케이크를 먹으려 작게 조각을 내는 순간 지금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달았다. 어쩐지, 반응이 이상하더라니. 그럼 거부를 하던가 그걸 왜 또 받아먹어서. 심지어 정현에게도 이런 행동은 한 적이 없었다. 결국 민망함을 이기지 못해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그런 의주를 향해 니콜라스가 중얼거렸다. 우리 일단 서로 하면 안 되는 것부터 정하자, 주주….
“스킨십은 아무리 생각해도 포옹까지만. 키스는 만약 해야 되는 때가 와도 하는 척만 하자. 대충 얼굴 각도 맞춰서 가까이 있으면 그럴듯해 보이지 않을까?”
“흠,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볼 뽀뽀까지는?”
“볼? 음. 그래. 볼까지는 허용.”
오케이, 짧게 대답한 니콜라스가 챙겨온 아이패드에 내용을 적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겨우 한 문장을 적었다. 둘 다 일주일을 넘게 고민한 것치고는 막상 채워진 내용이 지나치게 빈곤했다.
의주가 그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열심히 생각을 하긴 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금지시킬 내용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스킨십정도. 애초에 친구와 연인의 차이는 스킨십 정도의 차이 아니던가. 그러니 그걸 제외하고는 하면 안 된다고 굳이 제한을 둘 행동이 없었다. 아까의 행동은… 그 순간이 민망했던 거지 막상 차근차근 생각하면 또 금지령을 내릴 정도는 아니었다. 니콜라스도 생각이 같았는지 언급하지 않았고. 이럴 거면 그날 바로 정할 걸. 조금 허무해진 마음에 앞으로 내밀고 있던 상체를 뒤로 눕혀 편한 자세를 취했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탓인지 조금 졸리기도 해서 느릿하게 눈을 끔뻑거렸다. 한껏 나른해져 정신이 늘어진 의주를 현실로 돌아오게 만든 건 니콜라스의 말이었다.
“나도 하나만 정하자면…. 우리 사이에 사랑이라는 단어는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 걸로.”
“예를 들자면?”
“사랑한다는 말이라든가 사랑하는 사이라는 말이라든가. 이런 거.”
“음, 뭐…. 그래. 근데 왜? 어차피 그런 척 하는 건데 써도 되지 않아?”
“난 사랑을 섣불리 쓰고 싶지 않아. 아무튼 그 외에는 다 괜찮아. 의주 맘대로 해.”
알겠다 대답하면서 생각했다. 니콜라스의 사랑은 아마 제법 무거울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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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니콜라스는 연기가 능숙했다. 꼭 진짜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했다. 주말에 만날 때면 의주가 좋아할 것 같은 곳들을 미리 골라두고는 어떤 생색 하나 없이 자연스럽게 봐두었던 곳으로 의주를 이끌었다. 바람피우는 척을 하느라 매일같이 주고받기 시작한 연락 속, 무심코 흘린 말들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지금처럼.
금요일인데 아마 밤늦게야 겨우 퇴근할 것 같다고 짜증난다는 말을 남긴 의주가 핸드폰을 확인할 새도 없이 차가 끊기기 직전까지 일을 하다가 부랴부랴 뛰쳐나왔을 때 누군가가 뒤에서 경적을 울렸다. 뒤를 돌아 확인하니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민 니콜라스가 태연하게 인사했다. 안녕, 주주. 왜 여기에 있냐는 질문에 저녁은 먹었냐며 동문서답을 하는 뻔뻔한 얼굴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빤히 보니 그제야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왔다.
“오늘 늦게 퇴근할 것 같다며. 데려다 주려고 기다렸지.”
“너 아까 여섯시에 퇴근했다고 했잖아.”
“응.”
“집에 있다가 나온 거지?”
“음, 응.”
니콜라스는 거짓말이 서툴렀다. 그 짧은 대답에서도 티가 났다. 저가 생각해도 혼나겠다 싶었는지 주인 몰래 사고를 친 강아지처럼 의주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리는 걸 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진짜로 사귀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할 필요는 없다고. 애초에 진짜로 사귀는 사이인 정현도 이렇게 해준 적 없다고. 차라리 미리 말을 하고 내가 부르면 나오던가 누가 미련하게 이렇게 냅다 몇 시간을 기다리냐고.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오히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물고 서있으니 니콜라스가 말했다. 일단 들어가자고. 주주, 피곤하잖아…. 그러니까 나만 피곤해? 너도 피곤하지. 아무리 내일이 주말이라고 해도 행동이 너무 무식했다. 순간 표정이 구겨진 의주에 이번에야말로 한 소리 듣겠다 싶었는지 몸을 잔뜩 움츠린 니콜라스에게 일단 제일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밥은 먹었냐고. 예상했던 말이 아니었는지 멍하게 고개를 젓는 니콜라스의 차에 먼저 올라타 내비에 가게 이름 하나를 찍었다. 24시간 운영하는 콩나물 국밥집 가게의 이름이었다.
식당 문을 열자마자 국밥 두 개를 주문하고 앞치마를 두 개 가져와 하나를 니콜라스에게 건넸다. 아직도 상황이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는 듯 니콜라스의 얼굴이 어벙했다. 테이블 위에 티슈를 한 장씩 두고 그 위에 수저까지 세팅한 뒤에야 정신을 조금 차린 니콜라스가 컵에 물을 따르는 동안 집에 언제 오냐는 정현의 문자에 답장했다. 차가 끊겨서 친구 집에서 자고 내일 가겠다고. 한참 뒤에나 돌아올 줄 알았던 답장은 의외로 금방 돌아왔다.
[친구 누구]
미리보기로 확인한 내용에 대답을 잠깐 망설이는 사이 곧바로 문자 하나가 더 도착했다.
[설마 니콜라스?]
눈치가 빠르네. 메시지 창에 들어가지 않고 그대로 화면을 껐다. 딱히 애를 태우려는 건 아니고 그냥 답장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두워진 화면에 초췌해진 얼굴이 비쳤다. 몰골이 좀…. 힐끗 앞을 보니 기약 없는 기다림에 지쳤을 니콜라스는 조금 피곤해보일 뿐. 오히려 드라마 속 워커홀릭 본부장 캐릭터 같은 멋이 있었다. 그 차이에 어쩐지 민망해지는 기분이라 괜히 반찬 몇 개를 집어먹으니 이윽고 팔팔 끓는 뚝배기 두 개가 나왔다.
후후 불어 식은 국물을 조심스레 삼키니 몸이 훈훈해지는 게 조금은 피로가 가시는 기분이었다. 니콜라스도 배가 고팠는지 숟가락질을 하는 속도가 제법 빨랐다.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순식간에 뚝배기를 비우고 적당히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며 가게를 나섰다. 차를 댄 주차장으로 가 니콜라스의 옆에 탄 뒤 자연스럽게 음악을 재생시켰다. 네가 듣고 싶은 걸 들으면 된다며 의주의 핸드폰을 니콜라스의 차에 연결해둔 덕에 차엔 평소 의주가 좋아하던 음악이 흘렀다.
테가 없는 안경을 쓰고 어두운 하늘과는 달리 밝은 도시를 배경 삼아 운전하는 니콜라스를 저도 모르게 빤히 보다가 문득 생각난 것을 입 밖으로 꺼냈다.
“너랑 사귀었던 사람들은 좋았겠다.”
“갑자기? 왜?”
“아니, 잘해주니까. 지금도 그래. 내가 몇 시에 끝날 줄 알고 미련하게 계속 기다려….”
“아, 그거. 글쎄.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나.”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은 없었어?”
“부담? 음…. 모르겠네.”
역시 단순한 짐작이긴 하지만 니콜라스의 사랑은 제법 무겁고 꽤나 헌신적인 모양이었다. 하긴 의주에게도 그동안 얼마나 지극정성이었나. 고작 친구사이에도 그렇게 구는데 연인에게는 아마 더할 테지. 결론을 내리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의주에게 잠깐 시선을 둔 니콜라스가 차를 출발시키며 작게 웃었다.
“아, 근데 주주 집 주소 찍어줘야지.”
“응? 주소? 아. 그냥 너희 집으로 가면 돼.”
“우리 집?”
“응. 나 아까 안 들어간다고 말 했거든. 너한테 말한다는 걸 깜빡했네. 자고가도 되지?”
제법 뻔뻔한 태도의 의주가 어이없었는지 공기가 잔뜩 섞인 웃음을 뱉은 니콜라스가 되물었다. 진짜로? 아니, 그럼 뭐 가짜로 자고 가는 것도 있나. 니콜라스에게 딱히 장난을 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의주를 의심하는 태도가 조금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굳이 티를 내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응, 진짜로. 의주의 요구가 갑작스러웠는지 조금은 머뭇거리던 니콜라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나 집 좀 엉망인데…. 중얼거리는 말에 상관없다고 대답하며 창밖을 보다가 사이드 미러 속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제법, 기분이 좋아 보였다.
“씻고 옷은 이걸로 갈아입어.”
“고마워.”
니콜라스가 사는 아파트에 도착해 차를 주차하고 근처 편의점에 들러 맥주와 갈아입을 속옷을 구매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집은 니콜라스가 엉망이라고 엄살을 떤 것치고는 옷가지 몇 개만 조금 널브러져 있을 뿐 꽤나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하여간 엄살은. 봉투 안을 가득 채운 맥주를 냉장고에 넣어두고 간단한 안주를 꺼내놓는 사이 겉옷과 가방을 방에 두고 온 니콜라스가 잠옷을 건네주었다. 묘하게 익숙한 옷이라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니콜라스가 말을 덧붙였다.
“이거 예전에 주주가 놓고 간 거.”
“내가? 언제?”
“어……. 한 이 년 전인가. 그 예전에 살던 집에 애들 불러서 다 같이 놀았을 때.”
니콜라스가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한 게 일 년 전의 일이다. 그럼 이사할 때도 의주가 놓고 간 옷을 챙겼다는 소리인데 그럴 거면 그냥 가져가라고 하면 됐을 텐데. 니콜라스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지만 조금 민망한 기분이라 괜히 툴툴거렸다.
“버리지 그랬어…. 아니면 가져가라고 하지.”
“뭐, 이럴 때를 대비해둔 거라고 생각해.”
“그냥 네 옷 입으면 되잖아.”
“그건 좀.”
과거, 한참 두 사람이 붙어 지냈을 때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옷장을 공유했는데 지금은 안 된다니. 그렇게 구멍이 뻥뻥 뚫린 바지는 싫다고 거부하는 의주에게 한 번만 입어달라고 사정을 한 건 분명 니콜라스였다. 그런데 지금은 옷을 주는 게 좀 그렇다고 하니 도통 기준을 모르겠다. 약간 섭섭하기도 하고. 괜히 말꼬리를 붙들고 들어지려다가 꾹 참았다. 지금도 멋대로 집에 쳐들어온 거나 마찬가지인데 시비까지 걸면 그게 사람인가 싶어서였다.
씻고 나오니 니콜라스가 보이지 않았다. 자기는 안방 화장실에서 씻겠다더니 아직 샤워가 끝나지 않은 것 같았다. 하긴 니콜라스는 다른 사람들보다 샤워 시간이 길었다. 대체 뭘 하는지 한 번 들어가면 나올 기미가 없어 매일 문 밖에서 재촉하는 게 일상이었다. 떠오른 과거에 간만에 같은 짓을 할까 싶어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손잡이를 잡은 의주가 문고리를 돌려 밀기도 전에 안에서 문이 열렸다. 그 탓에 비틀거리던 의주가 니콜라스의 품 안으로 넘어졌다. 하마터면 얼굴끼리 부딪힐 뻔 했다. 근데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왜 옷을 아래만 입었지.
“야! 너 왜 바지만 입고 나와?”
“새삼? 그리고 아직 몸 좀 촉촉해서 입기 싫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십대 때랑 지금이랑 같아? 이제 우리 청춘 다 끝났어. 너 그러다 병나….”
“주주, 무슨 소리야. 내가 얼마나 건강한데. 그리고 우리 아빠가 그랬어. 남자는 한 평생 청춘이라고.”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어쩔 수 없지. 그리고 새삼 왜 그러냐는 니콜라스의 말마따나 니콜라스는 집에 있을 땐 옷을 좀 덜 입고 다니기는 했다. 밖에 나갈 때는 이것저것 레이어드도 해가면서 옷을 잘 껴입는 주제에 왜 안에만 들어오면 일단 벗고 보는지 이해하기는 힘들었지만 그냥 그러려니 했던 과거가 있었다. 하지만 그 때는 서로의 피부가 닿은 적 없었으니 그럴 수 있었던 거고,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아. 사고에 가까운 짧은 접촉이었지만 알 수 있었다. 니콜라스의 몸이 단단하다는 걸. 특히나 마주보고 선 지금은 굳이 닿지 않아도 보였다. 그동안은 편하게 입은 모습이나 정장을 차려입은 모습만 봐서 이렇게까지 몸이 좋을 줄은 몰랐다. 밀도 있게 근육이 찬 흰 피부를 멍하니 보고 있으니 니콜라스가 제 몸을 팔로 가리며 놀리듯이 말했다.
“변태 주주.”
“뭘…. 야, 따지자면 벗고 나온 네가 변태 아니야?”
“시선이 음흉해.”
“내가 언제….”
억울함에 변명을 하려는데 니콜라스가 먼저 컵라면 물을 끓여야겠다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온수 나오는 정수기가 빤히 보이는데 변명이 성의가 없었다. 그렇다고 니콜라스를 다시 붙잡아 그 주제를 얘기하자니 모양새가 구질구질한 것 같아 결국 변명을 포기하고 식탁에 자리 잡은 니콜라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분명 콩나물 국밥을 해치우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라면이 술술 들어가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순식간에 면발을 없앤 두 사람이 그제야 맥주 캔을 조금씩 비우기 시작했다. 자극적인 탄산이 식도를 넘어간 뒤에야 살겠다는 듯 자세가 편해진 의주를 보던 니콜라스가 불쑥 김치가 필요하냐고 물었다.
“김치?”
“응. 의주 엄마가 보내주셨어.”
“대체 언제 연락했대….”
“의주가 불효자라 내가 대신 효자 노릇 해드리는 중.”
“뭐라는 거야. 넌 우리 엄마한테 효도하기 전에 어머님한테 잘해. 얼마 전에 네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하셔서 내가 너 뭐하고 사는지 대신 설명 드렸어. 요새 주말마다 나랑 논다고.”
“엥. 엄마 나한테는 전화 안 하는데…. 내 생각엔 그냥 의주랑 연락하고 싶어서 내 핑계 댄 듯.”
“설마.”
네 맘대로 생각하라는 듯 니콜라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니콜라스의 부모님과는 대학 졸업식 날에 처음으로 만났다. 네 얘기를 많이 들었다면서 우리 아들이랑 친하게 지내주어 정말 고맙다고 친근하게 대해주셔서 낯을 가리는 의주도 금방 마음의 문을 열었다. 니콜라스가 한동안 본가에서 지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자주 놀러가 하루씩 자고 오는 경우가 많아 어느 순간부터는 꼭 사이좋은 친척집에 놀러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언제는 초대를 받아서 갔는데 정작 니콜라스가 없어서 니콜라스의 부모님이랑 셋이 밥을 먹은 적도 있었다. 어쩌면 니콜라스의 말이 영 틀린 말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정현과 시간을 보내느라 니콜라스의 본가에도 갈 일이 없어 발길이 끊겼으니 조금은 서운해하셨을지도.
“조만간 어머님이랑 아버님 뵈러 가야겠네….”
“엄마랑 아빠는 의주라면 언제든지 환영일걸.”
니콜라스가 저와 바람피우자는 척을 하자고 제안한 그 날, 장난스럽게 말한 샹샹이라는 호칭도 니콜라스의 본가에서 배웠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아들 원래 이름이 뭔지 아냐는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더니 너만 알고 있으라며 알려 주셨다. 왕이샹. 어쩐지 샹샹이라는 호칭에 반응하길래 별명인가 싶었는데 애칭이었던 거다. 바보, 워스 커아이더 주주 말고 네 이름을 알려줬어야지. 그 날 의주는 일부러 니콜라스를 하루 종일 샹샹이라고 불렀다. 대체 누가 알려준 거냐며 귀가 벌게진 채로 황당해하던 니콜라스는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말했다. 그 애칭은 너만 알고 있으라면서. 그리고 너무 자주 부르지 말라고. 그 말에 얌전히 알았다고 대답하고 그 뒤부터는 절대 그 애칭을 꺼내지 않았다. 조금 서운해서였다. 뭐, 가족끼리만 부르는 호칭이다 이거지. 본인은 의주를 주주라고 무척이나 많이 불러대면서.
“왜 예전에 너희 집 놀러갔을 때, 내가 너 샹샹이라고 불렀던 적 있었잖아. 기억나?”
“아…. 그랬지. 응, 기억나.”
“그때 막 자취방 가는 길에 네가 그랬잖아. 나만 알고 있으라고, 그리고 너무 자주 부르지 말라고. 그 때 왜 그랬던 거야?”
“엉? 갑자기 그런 걸 물어본다고?”
“갑자기 생각나서.”
의주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곤란한 표정을 지은 니콜라스가 남은 맥주를 한 번에 들이켜고 냉장고에서 새 맥주를 꺼냈다. 캔을 따는 소리가 청량했다. 다시 벌컥벌컥 캔을 비운 니콜라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냥, 뭐…. 궁금해?”
“말해주기 곤란하면 말하지 마.”
“다음에…. 언젠가는 말해줄게.”
“됐네요.”
부러 심통 난 얼굴을 하니 니콜라스가 능글맞은 표정을 하고 맥주 캔을 내밀었다. 짠, 하지 않을 거냐는 듯 눈썹을 들썩이는 통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 결국 웃음소리가 튀어나오는 대로 두고 똑같이 캔을 내밀어 톡 부딪혔다. 그렇게 한참을 옛날에 있었던 추억과 최근에 쌓은 기억을 떠올리며 이야기 하다가 새벽 늦게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소파에서 잘 테니 주주가 침대에서 자라고 말하는 니콜라스를 우리 나이엔 이제 침대에서 잠을 자야 된다고 한참을 설득한 뒤 나란히 누운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눈을 뜨니 니콜라스를 품에 안고 있는 상태였다. 니콜라스가 깨지 않게 체온이 높은 몸을 조심스레 떼어내고 화장실에 가 세수를 하고 나온 뒤 식탁위에 놓인 채로 방치된 핸드폰을 확인했다.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아 꺼지기 직전이었다. 어두워진 화면으로 쌓인 알림을 보는데 정현에게서 부재중 전화만 서른 통 가까이 와 있었다. 조금 징그럽게 느껴져 표정을 구기는 동시에 또다시 정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받을지 말지를 고민하던 중 결국 핸드폰 전원이 꺼졌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다시 니콜라스가 자고 있는 방으로 돌아가 핸드폰 충전기에 연결된 니콜라스의 핸드폰을 빼고 의주의 핸드폰을 연결했다.
대체 언제 바지까지 야무지게 벗은 건지. 몸의 일부를 가린 이불 아래로 보이는 다리는 아무것도 걸치고 있지 않았다. 구겨지고 뭉쳐진 이불을 가지런히 가다듬어 니콜라스의 위로 덮어주고 나와 냉장고를 뒤졌다. 그래도 나름 뭔가를 해먹고는 사는지 제법 냉장고 안이 든든했다. 정현과 살면서 나름 요리 실력이 늘어 이것저것 만드는 동안 일어났는지 바지와 티셔츠를 주워 입은 니콜라스가 배를 벅벅 긁으면서 문을 열고 나왔다.
“주주, 뭐해?”
“밥. 김치찌개 끓였는데 간 한 번 볼래?”
한 번 맛보기는 했지만 막상 니콜라스가 먹을 거라고 생각하니 좀 걱정이 되는지라 아까 국물을 맛 본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 적당한 온도로 불어 식히고 니콜라스에게 내밀었다. 잠이 덜 깨 평소보다 표정이 딱딱한 니콜라스가 의주를 한 번 시선을 두고는 숟가락을 쥔 의주의 손을 잡아 맛을 보고 멀어졌다. 맛있어. 그 말에 안심하고 가스 불을 끄는데 니콜라스가 냅다 사과의 말을 했다.
“미안. 나 내 전화인 줄 알고 주주한테 온 전화 받았어.”
“아, 핸드폰 충전하느라 내거 끼워뒀었지. 괜찮아. 근데 누구한테 온 전화였어?”
“그, 의주 남친.”
“……으음.”
물론 바람피우는 척을 하고 있긴 하지만…. 심지어 지금의 상황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발생한 사고에 가까웠다.
“뭐…. 어쩔 수 없지. 그래서 뭐래?”
“의주 핸드폰 아니냐고 해서 맞다고 하니까 너 누구냐고 묻던데? 그래서 그냥 내 이름 말해줬어. 그러니까 전화 끊더라고.”
어쩌면 오늘이 정현과 헤어지는 그 날일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헤어지기로 결심한 마당에 정현에게 조금이라도 엿 먹이고 싶어서 니콜라스와 계획을 짠 거였으니 처음 목적한 바를 이뤘다고 볼 수 있다. 아직 집을 못 구하긴 했는데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면서 정현의 집에 의주의 캐리어가 있었는지를 떠올렸다. 처음 집에 들어갈 때 큰 사이즈의 캐리어를 들고 가긴 했던 것 같은데.
“무슨 생각해?”
“형 집에 내가 캐리어를 뒀었나…. 뭔가 오늘 헤어지자고 할 것 같은데 그러면 짐 싸들고 나와야 하지 않을까? 집도 구해야 되니까 당분간은 모텔에서 지내야 될 것 같고.”
“뭐야. 주주 아직 집 안 구했어?”
“보긴 봤는데… 봤던 곳들이 다 별로더라고. 웬만하면 회사에서 가까운 곳으로 구하고 싶은데 하나같이 영….”
“흠, 나도 같이 찾아줄게.”
“고마워.”
집을 구할 때까지 내 집에서 지내도 된다는 말은 안 하네 너. 물론 니콜라스가 그런 제안을 한다고 해서 선뜻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지만 아예 말도 안 꺼내는 건 또 조금은 서운했다. 밥을 먹고 정리를 한 뒤 스타일러에 돌려둔 의주의 옷을 다시 입었다. 그 사이 잠옷에서 편한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니콜라스가 정현의 아파트까지 데려다주겠다며 차키를 들고 의주를 따라 집을 나왔다. 니콜라스의 집에서 정현의 집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어 거절하지 않고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주말 낮이라 그런지 도로가 제법 밀려 도착이 생각보다 늦어졌다. 아파트 단지 앞에 비상 깜빡이를 킨 니콜라스의 차가 천천히 멈춰 섰다. 의주가 가방을 챙겨 내리고 차문을 닫으니 창문을 내린 니콜라스가 돌아선 의주를 불렀다. 의주.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니콜라스는 조금 불안해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주주. 기다리고 있을까?”
“뭘, 됐어. 들어가. 남은 주말 잘 쉬고.”
“그래도… 필요하면 불러. 언제든지. 나는 계속 기다리고 있으니까.”
“말로도 충분히 고맙네요. 얼른 가. 빨리. 가.”
선뜻 출발하지 못하는 니콜라스를 두고 먼저 뒤를 돌아 걸었다. 니콜라스의 도움은 이미 충분히 많이 받았다. 이제부터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의주가 결판을 내야할 때였다.
들어선 집은 묘하게 싸늘했다. 해가 중천인데도 커튼을 걷지 않아 집안이 온통 컴컴했다. 현관과 신발장을 확인 했을 때 사라진 정현의 신발은 없었다. 그러면 집에 있는 게 분명한데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다시 잠들었나 싶어 조용히 신발을 벗고 식탁 의자를 끌어 가방을 올려두는 동시에 벌컥 문이 열리고 정현이 의주가 집에 들어올 때 끌고 왔던 캐리어를 집어 던지듯이 제 앞으로 내려두었다. 내용물이 가득 차 있었는지 제법 큰 소리에 깜짝 놀라 쳐다보면 정현이 무표정한 얼굴로 성큼성큼 다가와 거리를 좁혔다.
“의주야.”
“왜.”
“내가, 나는….”
“뭐. 말을 해.”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기세와는 달리 정현은 문장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한참이나 입술을 달싹거렸다. 너무 분노한 탓에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 것인지, 배신감에 치가 떨리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증명 받을 현실이 무서워서 말을 뱉어내지 못하는 것인지. 정현을 알 수 없었다. 아니, 의주는 정현을 안 적이 없었다. 이것도 아니다. 어쩌면 의주는 정현을 알려고 한 적조차 없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의주가 정현을 궁금해 한 적은 있나? 무심한 얼굴을 한 의주의 시선과 본인도 무엇부터 말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해 이리저리 흔들리던 시선이 마주친 순간, 정현이 무언가를 토해내듯 물었다.
“너, 걔랑 만나는 거 맞아?”
잠시 고민했다. 끝까지 거짓을 유지해 얄팍하게나마 남아있을지 모를 서로간의 신뢰를 아예 무너뜨릴지. 아니면 진실을 말하고 일방적인 배신에 대한 원망을 쏟아낼지. 끝을 목전에 둔 지금, 신중하게 선택해야 했다. 그렇게 의주가 대답을 하지 않고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정현은 이미 저 혼자 결론을 지었는지 허탈하게 웃으며 뒤로 한발자국 멀어졌다. 꼭 기어코 정체를 확인해버린 공포스러운 존재로부터 도망치려는 것처럼. 그러고는 고개를 숙인채로 중얼거렸다.
“의주야, 나는…. 난 알고 있었어. 그래도, 아닐 거라고. 하, 아니겠지 생각했는데.”
“말을 알아듣게 똑바로 해. 뭘 알고, 뭘 생각했다는 거야.”
의주의 말에 정현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네가 언젠가는 그 새끼한테 갈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고, 나는.”
“그 새끼? 니콜 말하는 거야?”
정현의 표정이 무너졌다. 이미 누군가가 죽었다는 걸 알지만 기어코 그걸 다시 확인 해 절망하는 사람의 표정과 비슷했다. 그리고 의주는 그게 우스웠다. 먼저 의주를 배신한 건 정현이었다. 그런 주제에 왜 본인은 깨끗한 것처럼 구는 건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파리한 안색의 정현에게 다가가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의주의 손에 정현이 익숙하게 얼굴을 묻었다. 사람들이 그랬지. 아이들은 달래는 순간부터 더 울기 시작한다고, 정현의 표정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서럽게 변했다. 손바닥에 닿는 볼의 감촉이 거칠해졌다는 생각을 하며 의주가 나긋이 속닥거렸다.
“그런데 형…. 형도 다른 사람 만났잖아.”
“……어?”
“왜 너는 아무 잘못도 없는 것처럼 말해….”
“잠, 잠깐. 의주야, 잠깐만.”
당황한 정현이 의주의 손을 붙잡으려는 하는 것을 뿌리쳤다. 당황한 듯 말을 더듬거리던 정현이 겨우 문장 하나를 겨우 완성했다. 어떻게 알았느냐는 질문이었다. 지금 형이 만나는 사람이랑 문자를 한 것도 여러 번 봤고, 저번에는 둘이 같이 데이트하는 것도 우연히 봤다는 의주의 말에 말을 잃은 정현을 보다가 결심했다. 니콜라스와 아무 사이 아니라는 걸 말하기로. 정현이 의주를 의심하는 건 상관없었지만 정현이 니콜라스를 오해하는 건 싫었다. 니콜라스는 정현이 쉬이 탓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형이 오해하고 있는 게 있는데 나 니콜이랑 만나는 거 아니야.”
“만나는 게 아니라고?”
“응. 걔랑 난 그냥 친구야.”
처음 의주의 말에 당황한 얼굴을 했던 정현이 이어지는 말에 표정을 구겼다. 의주를 의심했던 게 결국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을까. 표정에 허탈함과 분노가 섞여있었다.
이제 더는 할 말 없으니 가보겠다고. 잘 살고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고. 이야기하고 정현의 발치에서 쓰러져있는 캐리어를 들고 집을 나서려고 발걸음을 옮긴 순간 손목이 붙잡혔다. 그러곤 어깨를 잡고 의주를 돌려세운 정현이 단어 하나하나를 짓씹듯이 말했다.
“친구? 네가 걔랑 그냥 친구라고?”
“어, 친구.”
허망한 듯 웃던 정현이 의주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의주야. 나 이제 이해가 되는 것 같아.”
“뭐라는 거야….”
“나는 그동안 네가 걔랑 짜고 나를 기만하는 거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아니었구나. 너도 몰랐던 거야. 와…….”
“내가 아까도 말하지 않았어? 말을 똑바로 좀 하라고? 내가 뭘 몰랐다는 거야.”
“뭐 하나만 물어보자.”
의주의 말을 무시하고 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태도에 그냥 무시하고 가려다가 그동안 쌓인 정에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나와의 미래를, 미래를 상상해본 적 있어?”
“미래? 당연….”
당연히 그려보았다고. 형과의 미래를 언제고 상상했었다고 대답하고 싶었는데 할 수 없었다. 한 적이 없으니까.
차마 대답하지 못 하고 말끝을 흐린 의주에게 정현이 대상을 바꿔 다시 물었다.
“니콜라스와의 미래는?”
“그건 왜….”
걔랑은, 니콜라스랑은 계속 함께이지 않을까. 나중, 더 나중이 오더라도 항상 서로의 든든한 지지자로 남아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나이가 들어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면 서로 근처에 사는 것도 좋겠다고. 아니면 의주는 아마 결혼을 못 할 거고 니콜라스는 평소 딱히 생각이 없다고 했으니 아예 한집에 같이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고 상상했었다. 실제로 가끔은 이런 곳에서 니콜라스와 살면 좋겠다고 집 사진을 핸드폰에 저장하기도 했다.
부정하지 않는 의주에 정현이 어깨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고 조금씩 비틀거리며 멀어졌다.
“변의주. 아직도 모르겠어? 네가 어떻게 걔랑 그냥 친구야….”
정현의 말에 침묵했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 무슨 말을 꺼내야할지 알 수 없었다. 복잡하게 엉킨 실을 풀어보라는 숙제를 받은 것처럼 막막했다. 애초에 이걸 푸는 게 맞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그냥 이대로 살아도 되지 않을까. 꼬인 실을 풀어도 어차피 이미 자국이 남아 있을 텐데.
대답하지 않는 의주를 정현은 한참 바라보다가 말했다. 변명 같겠지만 내가 다른 사람을 만난 이유는 우리의 미래가 보이지 않아서였다고. 그저 나도 원했을 뿐이었다고. 나와 같은 미래를 그려보는 사람을. 쌓이는 문장에도 여전히 침묵하는 의주에게 정현은 마지막으로 물었다.
“너는 언제고 날 떠나도 괜찮은 사람 같았어. 의주야, 너 날 좋아한 건 맞아? 그냥 누군가를 좋아해야 될 것 같아서 좋아한 거 아니야?”
끝끝내 대답하지 않고 캐리어를 챙겨 나오는 의주를 정현은 붙잡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는 동안 생각한 건 의외로 캐리어가 그렇게 무겁지 않다는 거였다. 사 년의 무게치고는 지나치게 가벼웠다. 정현이 했던 말을 곱씹었다. 언제고 정현을 떠나도 괜찮은 사람 같았다는 말을. 정현에게는 의주가 그렇게 보였던 걸까. 마지막에 덧붙인 누군가를 좋아해야 될 것 같아서 좋아한 거 아니냐는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생각에 빠져 단지 입구를 지나쳐 나오는 순간 문득 고개를 들었다.
비상 깜빡이를 킨 차. 니콜라스는 여전히 의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DOWN
“너 왜 여기, 집에 안 갔어?”
“응.”
“가라고 했잖아. 가려고 했잖아.”
“그랬지.”
“근데 왜 여기 있어.”
“그냥…. 기다리고 싶었어.”
별거 아니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얼굴에 힘이 빠졌다. 왜…. 왜. 니콜라스는 자꾸 변의주를 기다리는 걸까. 대체 의주가 언제 나타날 줄 알고. 기약 없는 기다림을 바보처럼 반복할까.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릿속에 침범한 니콜라스는 의주를 더욱 정신없게 만들었다.
지끈거리는 머리에 미간을 좁힌 의주를 보던 니콜라스가 손에 쥐고 있던 캐리어 손잡이를 자연스레 빼앗아 쥐고 제 차에 가방을 실었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조수석 문을 열어 의주를 태우려는 것을 뿌리쳤다. 예상치 못한 거부였는지 니콜라스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가까운 거리에 니콜라스의 어두운 눈동자에 비친 의주의 얼굴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화가 났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의주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니콜.”
“응, 주주.”
정현을 생각한다. 의주는 정현을 좋아했다. 정현과 함께 지내는 시간동안 즐거웠다. 그래서 정현의 배신에 화가 났었다. 연인의 배신에 분노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니콜라스를 생각한다. 의주는 니콜라스를 좋아한다. 함께 있던 시간 중 즐겁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러나 가끔씩 보여주는 니콜라스의 미련한 행동은 의주를 화나게 만든다. 그리고 그 행동은 동시에 의주를 무척이나 서럽게 만들었고….
변의주는 어떤 차이를 깨닫는다. 희로애락. 니콜라스에겐 모든 감정을 느끼고 정현에게는 모두 느끼지 못했다는 것을. 엉킨 실이 풀렸다. 애초에 엉겨있지도 않았다. 그저 실의 양끝을 잡아당기면 풀리는 복잡한 모양의 단순한 매듭이었을 뿐이다.
“니콜….”
말하라는 듯 상냥한 얼굴을 만들어내는 니콜라스에게 미루고 미루던 숙제를 제출하는 듯이,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참고 물었다.
“너는 알고 있었어?”
“응? 뭐를?”
“내가,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아니, 그 이상이었던 거. 알고 있었냐고 너.”
의주의 말에 놀란 듯 표정을 바꿨던 니콜라스가 이내 덤덤하게 대답했다.
“알았어. 알고 있었어.”
“근데 왜 말 안 했어? 언제부터 알았어?”
니콜라스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이번에야말로 의주가 기다릴 차례다. 의주를 대체 언제부터 기다렸는지 모를 니콜라스 대신에.
이런 말을 하면 다들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지만 니콜라스는 운명을 믿는 편이다. 특히나 사람과의 인연은 더더욱. 지구의 인구만 80억 명이다. 그중 니콜라스를 스치는 인연은 얼마나 많겠는가.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깊은 관계를 누군가와 맺는다는 건 그야말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의주는 니콜라스에게 있어 세상에 둘도 없을 운명이었다. 처음 본 순간부터 마음에 들었다. 뭐 하나 모난 곳 없이 동그란 눈코입이라던가 누군가 말을 걸면 어색해 하면서도 상냥하게 웃어주는 모습이라던가 그러면서도 어느 정도 무심해 보이는 성정이라던가. 뭐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어두운 방에서 의주가 니콜라스의 이름을 불렀을 때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설마하니 제게 관심을 가졌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으니까. 아까도 모두가 모인 장소에서 제법 대놓고 의주를 보고 있었는데도 눈 한 번 마주치지 않았다. 시선이 느껴질 법도 한데. 그래서 조금 놀리듯이 말했더니 돌아오는 반응이 너무 좋았다. 나중에는 제게 이상하다고 말하는 의주였는데 아마 모를 거다. 니콜라스보다 의주가 더 이상하다는 것을.
니콜라스의 이십대를 누군가의 이름으로 표현하자면 그건 무조건 변의주의 이름일 것이다. 그리고 그건 아마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대학 안에서든 밖에서든 니콜라스와 의주는 서로가 없으면 안 되는 것처럼 굴었다. 과가 다른 탓에 부득이하게 떨어져있어야 하는 순간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무조건 붙어 다녔다. 오죽하면 의주에게 입영통지서가 날아왔을 때 니콜라스도 휴학을 하겠다고 했을까. 너랑 같이 졸업하고 싶다는 말에 변의주는 처음으로 화난 얼굴을 보여주었다. 고작 나랑 같이 졸업하고 싶다는 이유로 휴학을 하겠다는 거냐면서, 네 맘대로 하라고 대신 그렇게 하면 난 평생 너랑 안 본다는 말에 니콜라스는 뱉은 말을 겨우겨우 주워 담았다. 그래도 매주 가는 것까지는 금지하지 않았기에 니콜라스는 바로 면허를 취득했다. 주마다 가려면 차를 운전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제발 오버하지 말고 적당히 오라는 의주의 말에 결국 매주 가는 건 금방 그만두었지만.
한 번 상실을 겪은 사람은 무언가를 잃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 결핍이 채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샹샹, 우리는 일 년 뒤에 한국에 갈 거야. 그 말에 열심히 한국어를 공부했고 소통에도 크게 문제는 없었지만 고등학교 내내 니콜라스는 어딘가에 발을 딛지 못하고 떠다니는 풍선 같았다. 호기심에 잠깐 관심을 가지기는 하지만 계속 갖고 놀기에는 재미없는 풍선. 조금 더 어리다면 모를까 적당히 머리가 커지면 전시된 풍선을 사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니콜라스는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쭉 전시되었다.
집은 좋았다. 안정적이고 평화로웠다. 그래서 집을 나왔다. 니콜라스가 집을 나온다면 조금 더 재밌는 생활을 즐기실 수 있을 테니까. 지금 생각해도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 그렇게 집을 나와 진학한 대학에서 의주를 만났으니까. 무심한 주제에 상냥해서 오래 전시된 탓에 낡아버린 풍선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변의주를. 니콜라스는 의주를 잃고 싶지 않았다. 자기가 쥐고 있는 것이 조금 방심하면 그대로 날아가 버리는 가벼운 풍선이 아니라 땅에 발을 딛고 선 니콜라스라는 걸 의주가 알게 되는 순간 바로 손을 놓아버릴까 겁이 났다. 그러니 난 네게 나를 알려주지 않을 거야. 그냥, 내가 의주의 것이 된 것만으로도 충분해. 어쩜, 사랑은 이렇게도 사람을 헌신적인 겁쟁이로 만들고 만다.
겁쟁이의 비겁한 점은 자꾸 도망치려고 한다는 점이다. 의주가 니콜라스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니콜라스처럼. 좋아하니까 알 수 있었다. 의주가 니콜라스를 바라보는 눈이 어느 날부터 니콜라스가 의주를 바라볼 때와 똑같아졌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 사실을 애써 무시했다. 어차피 의주는 모르는 것 같았다. 무심한 거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설마 제 마음에도 무심할 줄이야. 아마 예상컨대 그냥 요새 들어 니콜라스랑 시간을 보내는 게 더 재미있다고만 생각하지 않았을까. 같은 온도의 눈동자를 마주할 때마다 이따금 충동이 일었다. 의주, 그거 알아? 너 나를 좋아해. 그리고 나도 너를 좋아해. 이렇게 말하고 싶은 충동. 하지만 여전히 말할 수 없었다. 아직도 두려웠다. 그래서 의주가 일을 다니기 시작했을 때 조금은 안도했다. 얼굴을 보는 날이 줄어들면 충동의 횟수도 조금은 줄어들 테니까.
설마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나고 평소처럼 주말에 만난 의주가 누군가와 사귀게 되었다고 말할 줄은 차마 예상 못했지만.
세상에, 제 맘도 모르는 바보와 비겁한 겁쟁이의 결말이 이런 식이라니. 이만큼 우스운 일이 또 있을까. 하지만 이미 상황은 벌어졌고 니콜라스는 뒤늦게라도 용기를 낼 생각이 없었다. 안정적으로 보이는 의주를 흔들고 싶지는 않았다. 흔들리는 건 니콜라스 하나로 충분했다. 그래서 당분간 만나지 말자는 서운한 말에도 알았다고 대답했다. 주주라고 부르지 말라는 말도 정말 굉장히 무척이나 섭섭하고 짜증났지만 결국 의주의 말에 따랐다. 어쩔 수 없지. 니콜라스는 이미 의주의 것이다. 하라면 해야지, 뭐. 그러나 마지막에 결국 말 한 마디를 덧붙이고 말았다.
“주주, 주주는 주주가 제멋대로 굴 수 있는 상대를 만나는 편이 좋아.”
그리고 네게 말할 생각은 없지만 나는 제멋대로 구는 너를 굉장히 좋아한다고. 뒷말은 꾸욱 삼켰다. 어쩐지 바람 빠진 풍선이 조금 부푼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형이 바람피우더라. 개새끼…. 그 말을 뱉은 의주가 방금 나온 생맥주를 목이 따갑지도 않은지 단숨에 반을 비워냈다. 한숨을 푹 쉬는 의주를 천천히 바라봤다. 그저 사 년을 만난 상대가 배신했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만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느끼는 실망이나 슬픔은 전혀 없었다. 아이고, 의주야…. 하지만 그 자리에서 사랑 어쩌고를 말해서 의주를 자극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이 무언가를 지적하면 일단 아니라고 말하는 의주를 알았다. 그렇다면 니콜라스가 해야 되는 건 하나였다. 지금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기.
하고 싶은 말을 삼킬 때마다 부푼 풍선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아슬아슬한 상태가 되었다. 생각보다 꽤나 힘들더라고. 의주가 연인이 없을 때는 몰랐는데 의주에게 연인이 생기니 매일 헤어지라고 말하고 싶은 걸 참느라 죽을 맛이었다. 의외로 인내심이 강한 니콜라스가 아니었다면 아마 풍선은 진즉 폭발해서 의주는 잔뜩 쌓인 사랑에 파묻히고 말았을 거다. 여전히 의주에게 마음을 전할 용기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주가 헤어질 것 같은 순간을 그냥 넘길 수는 없지. 그래서 제안했다. 나랑 바람피우는 척을 해보자고. 사실 맨 처음에 게이 바를 가서 모르는 남자랑 키스를 하니 어쩌니 얘기했을 때 눈 돌아가는 걸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가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할 때가 있는 의주라서 더 무서웠다. 날 이용하라고 설득하는 내내 테이블 아래 숨긴 손이 달달 떨렸다는 건 평생의 비밀이다. 거절당할까봐 속으로 벌벌 떠는 니콜라스를 모를 의주는 선뜻 대답하지 않고 그저 웃기만 했다. 그러더니 니콜라스가 좋아하는 눈코입이 동그란 얼굴 가득 즐거움을 띄우고선 니콜라스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말을 마구잡이로 해댔다.
“잘 부탁해? 샹샹?”
넌 모르겠지. 아주 예전에도 네가 날 샹샹이라고 불렀을 때 우리가 가족이 되면 어떨까 상상한 나를. 너와 대만에 가고 싶다고 말하는 걸 참으라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너는 전혀 몰라…. 정말이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너는.
“이런 건 치사해, 주주….”
그 뒤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의주와 시간을 보냈다. 주주, 지금 너는 나랑 바람피우는 척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너랑 데이트한다고 생각 중이야. 한참 둘이 자주 가던 카페에 갔을 때도 그렇다. 좋아하는 거랑 사랑하는 거는 다르다는 말로 의주에게 한 번 생각할 주제를 던지고 괜히 SNS에 의주와 함께 있는 걸 티내는 사진을 올렸다. 정현이 볼 수 있을 거라는 핑계를 대긴 했지만 그냥 올리고 싶어서 올린 거였다. 태그 된 아이디와 무슨 사이냐고 묻는 댓글에는 괜히 의미심장하게 답글을 단 뒤 그 아래 달린 댓글들을 보고 있는데 의주가 니콜라스를 부르는 거다. 힐끗 확인하니 의주가 케이크를 먹여주려는 듯 포크를 제게 내밀고 있었다. 아니, 아니. 아, 주주. 비명을 지르고 싶은 걸 참느라 죽는 줄 알았다. 케이크를 받아먹은 뒤에는 오늘을 평생 기억하기 위해 달력에 표시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니콜라스는 의주가 하면 안 되는 것들로 팔만대장경을 써올 줄 알았다. 이것도 안 돼. 저것도 안 돼. 그건 절대 안 돼. 그렇게 금지당할 게 아주 많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의외로 의주는 아주 관대했다. 스킨십만 어디까지 하자길래 살짝 충동에 입을 맡겨 냅다 말한 볼 뽀뽀였는데 의주는 납득하고 흔쾌히 허용했다. 그러고는 자기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뒤로 눕기까지. 대체 변의주는 니콜라스를 어디까지 봐주려는 걸까. 어쩐지 펑 터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말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말자고. 왜냐는 말에 섣불리 쓰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지만 그 또한 변명이었다. 그 말을 뱉는 순간, 니콜라스가 진심을 숨길 자신이 없었다. 의주는 순순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평일에는 저녁을 함께 먹고, 주말 이틀 중에 하루는 꼭 만나 시간을 함께 보냈다. 만나지 못하는 날에는 산책을 핑계로 밖에 나온 의주와 한 시간씩 통화를 했다. 메시지를 나눌 때면 답장을 기다리느라 아무것도 못하고 저녁을 보내곤 했다. 그렇게 밀린 집안일은 내일 너희 집에 놀러가도 되냐는 문자가 오면 일단 가능하다고 답장을 먼저 보낸 뒤 부랴부랴 해치웠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니콜라스는 기쁨을 느꼈다. 단 한 번도 지친 적 없었다. 그래서 늦게 퇴근할 것 같다는 메시지를 보고 퇴근한 니콜라스가 의주의 회사 앞에서 의주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몇 시간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나는 널 영영 기다려도 괜찮아. 나를 놓지만 않는다면 영원히 기다릴 수 있어.
그러니 니콜라스와 사귀었던 사람들은 좋았겠다는 의주의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애매했다. 부담스러워 하는 사람은 없었냐는 말은 더더욱. 애초에 누굴 만나지도 않았고, 니콜라스가 끝없는 기다림을 견딜 수 있는 상대는 변의주가 유일했으니까. 그런 의주는 니콜라스를 가만둘 수 없는 건지 계속해서 시험의 늪으로 빠뜨렸다. 자고 가도 되냐는 말에 순간 멍해졌다. 집에 놀러온 의주에게 자고가라는 권유 한 번 하지 않고 항상 돌려보냈던 이유는 샹샹이라는 호칭을 자주 쓰지 말라고 했던 이유와 비슷했다. 니콜라스가 또 의주와의 미래를 멋대로 망상할까봐. 하지만 의주를 정현에게 돌려보내고 싶지 않은 것도 사실이라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다행히 집은 평소보다는 덜 엉망이었다. 눈에 보이는 옷가지들만 대충 치운 뒤 서랍에서 의주가 예전에 두고 갔던 잠옷을 꺼내 건네주었다. 친구 여럿을 초대해 놀았던 때 놓고 간 것을 돌려주기 싫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지고 있던 거였다. 그 뒤에 새로운 집으로 이사할 때도 고이고이 잘 챙겨 나왔고. 그래서 버리지 그랬냐는 의주의 말에 조금 양심이 찔리기는 했다. 조금… 그런 것 같아서. 그래도 아무렇지 않은 척 이럴 때를 대비해둔 거라고 제법 뻔뻔하게 잘 대답했다. 설마 의주가 니콜라스의 옷을 입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말할 줄은 몰랐지만.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건 좀.”
내 잠옷을 입고 잠드는 의주라니. 그거 진짜 위험하다고. 씻으러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거실 욕실 문이 닫히자마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변의주, 내 속도 모르고. 잔뜩 원망하고 싶다가도 계속 내 집에서 우리 집이라는 호칭이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지내면 안 되냐고 빌고 싶기도 했다.
변의주는 니콜라스를 곤란하게 만들 작정으로 온 게 분명했다. 아무리 사고라지만 니콜라스의 품 안으로 넘어지지를 않나, 벗은 제 몸을 빤히 보지를 않나, 샹샹이라는 호칭을 자주 부르지 말라고 했던 이유를 묻질 않나. 게다가 같은 침대에서 자자고 말하기까지. 정신줄을 놓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어찌나 피곤하던지. 덕분에 아침에 일어났을 때 충전기에 꽂혀있던 전화기가 의주의 것인지도 모르고 자연스럽게 전화를 받아버리고 말았다.
- 여보세요? 의주야?
“주주…?”
- 뭐야. 누구세요? 이거 변의주 핸드폰 아닌가요?
“잠깐, 아……. 네. 맞는데요.”
- 누구, 하…. 니콜라스?
“네.”
- …씨발.
그러곤 전화가 끊겼다. 어쩐지 목소리가 낯설지 않아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하니 정현이었다. 일어나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쓰는데 밖에서 무언가 부산한 소리가 들렸다. 침대 아래로 떨어진 바지를 주워 입고 위에 티셔츠를 하나 걸치고 나가니 주방에서 의주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뭐 하냐고 물으면 간 한 번 보라고 국물을 뜬 숟가락을 내밀었다. 아침부터 벌어지는 포상 같은 상황에 풀어지려는 안면근육 잔뜩 힘을 주었다. 그러다 정현과 통화했던 게 생각났다. 의도는 하지 않았으나 제법 큰 오해를 하기 딱 좋은 상황을 만들었기에 사과를 하니 상황을 설명 들은 의주가 아무렇지 않게 어쩔 수 없다는 대답을 했다. 아마, 오늘 헤어지지 않을까. 의주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아직 집을 구하지 못했다며 걱정을 하는 통에 같이 찾아주겠다고 말했다. 잠시 니콜라스의 집에서 지내는 건 어떠냐고 제안을 할까 하긴 했지만 지난밤과 오늘의 아침이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매일 의주와 함께 지낸다면 니콜라스는 아마 머지않아 펑하고 터져버릴 게 분명했다.
그러나 막상 정현의 아파트 앞에 도착한 순간, 후회했다. 그냥 아예 돌려보내지 말고 계속 같이 있자고 할 걸. 짐은 그냥 택배로 보내달라고 해, 주주. 나랑 있자. 더 이상은 아주 잠시라도 너를 빼앗기고 싶지 않아. 그렇게 말할 걸. 하지만 끝끝내 말하지 못하고 의주의 이름만 겨우 부르고 말았다. 돌아본 의주에게 말했다.
“주주. 기다리고 있을까?”
“뭘, 됐어. 들어가. 남은 주말 잘 보내고.”
“그래도… 필요하면 불러. 언제든지. 나는 계속 기다리고 있으니까.”
정말 계속 기다리고 있어. 기다리게 해줘. 그런 니콜라스의 속마음을 모르는 변의주는 얼른 가라고 손을 휘휘 저었다. 출발하지 못하는 니콜라스를 두고 멀어지는 의주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보다가 겨우 차를 출발시켰다. 그래, 가자. 의주가 다시 부를 때까지 기다리자. 그렇게 집으로 향하는 길, 유턴을 했다. 네가 부를 때까지 기다리고 싶지 않아. 그냥 네가 내게 나타날 때까지 기다릴게. 그리고 그건 니콜라스가 무척이나 잘하는 거였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니콜라스가 이내 결심했는지 의주의 질문에 대답했다.
“언제부터 알았냐면… 모르겠어. 정확히 언제라고 말하기가 애매해서. 근데 좀 오래되긴 했어. 왜 말 안 했냐면. 그냥. 내가 겁이 많아서 그랬어.”
“겁이 많다고? 네가?”
“응. 주주는 모르겠지만 나 완전 겁쟁이야.”
“뭐가 그렇게 널 무섭게 만드는데?”
의주의 질문에 니콜라스의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갔다. 상상조차 싫은 건지.
“나는 네가 날 떠나는 게 무서워. 내가 널 가지려고 하는 순간 네가 날 놓을까봐 겁이 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심지어 의주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상황이었다. 변의주가 니콜라스를 놓는다니. 내가 널 떠난다니.
“뭐…. 무슨.”
“의주야. 주주, 변의주….”
의주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른 니콜라스가 이윽고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몸을 숙인 니콜라스의 아래로만 예보 없던 비가 내린다. 차마 의주에게 닿지도 못하고 어떤 말도 하지 못하는 우는 니콜라스. 소리도 하나 내지 않고 뺨을 적신 니콜라스를 일단 일으켜 세웠다. 차문을 열고 비틀거리는 몸을 조수석에 앉혔다. 조금 돌아 운전석을 차지한 의주가 손을 뻗어 아직도 멍하니 있는 니콜라스에게 벨트를 채우고 기어를 옮겼다. 돌아 가야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니콜라스를 재촉해서 얻어낸 비밀번호를 눌러 현관문을 열 때까지도 니콜라스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알고 지낸 기간 동안 의주의 앞에서 니콜라스가 눈물을 보인 건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드물었다. 조급하게 연 현관문이 닫히고, 신발을 벗기도 전에 뒤에서 저를 끌어안은 니콜라스의 무게로 순간 중심을 잃고 넘어지려는 것을 겨우 힘을 주어 버텼다.
“잠깐, 니콜. 놔 봐….”
“돌아가지 않을 거지?”
뜬금없는 말에 고개를 돌렸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축축한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나 널 돌려보내고 싶지 않아. 미안해, 주주….”
사과를 뱉은 니콜라스가 의주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달래듯이 말했다.
“니콜, 평생 여기에 있을 거야?”
대답이 없었다. 겁쟁이라더니 맞는 말인 것 같다. 원래 겁쟁이는 일어날 리 없는 일에도 지레 겁을 먹곤 하니까. 니콜라스는 의주를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고, 의주가 다시 누군가에게로 돌아갈까 겁내지만 니콜라스는 아무것도 모른다. 변의주가 돌아갈 곳은 이미 의주를 안고 있었다.
“나 아무데도 안 가. 그니까 일단 놔 봐.”
이번에도 무시다. 결국 애를 쓰고 빠져나온 의주가 몸을 돌려 니콜라스와 마주섰다. 숙인 고개를 손으로 감싸 들어올렸다. 제일 아끼는 물건을 빼앗긴 아이처럼 서러운 얼굴이었다. 잔뜩 젖은 니콜라스의 눈가를 매만졌다. 순식간에 축축해진 손가락을 옷에 닦으려 떼어내면 니콜라스가 의주의 손을 붙잡았다. 잠시도 제게서 떨어지는 걸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니콜, 나 너랑 얘기하고 싶어. 여긴 불편하잖아. 응?”
“무슨 얘기….”
“우리에 대해. 그리고 너에 대해. 내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널 알려줘.”
너를 더 알고 싶단 말이야. 있잖아, 나 몰랐는데 욕심이 많나봐. 너의 전부를 알고 싶어. 네가 너무 궁금해…. 이어지는 의주의 말에 니콜라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정말? 주주, 내가 궁금해?”
“응. 그니까 알려줘.”
“전부를?”
“전부를.”
니콜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풍선처럼 가볍게.
대화가 끝난 건 저녁보다는 밤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 정도로 늦은 시간이었다. 눈물은 그친지 오래지만 짓물러 붉게 물든 눈가를 보다가 물었다.
“그럼 너는 정확히 언제부터 날 좋아한 거야?”
“스무 살 때….”
대화를 나누는 동안 정확한 시기를 언급하진 않았어도 제법 오래 됐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나 예전일 줄은 몰랐다. 강산이 변하고도 남는 시간동안 변의주 하나만 생각했을 니콜라스를 생각하니 미안한 동시에 그 이상, 아니 몇 배로 가슴이 벅찼다. 이런 충만함을 느껴도 되는 걸까. 아니면 곧 익숙해질까. 어쩌면 앞으로 매일을 이렇게 살 텐데. 아주 오랫동안. 문득 정현의 말이 떠올랐다. 나와의 미래를 그린 적 있냐는 말. 그래, 단 한 번도. 의주의 미래에 정현이 있을 거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었다. 의주가 상상한 미래에 있는 건 오로지 니콜라스뿐이었다.
그리고 이건 아마 영영 비밀로 부치겠지만, 변의주는 니콜라스와 닮은 사람에게 끌렸고 니콜라스와 다른 사람을 끝끝내 사랑할 수 없었다. 니콜, 넌 네가 완전 겁쟁이라고 했지만 실은 내가 더 그래. 그래서 그랬던 거야. 섣불리 마음을 인정했다가 친구로도 남지 못할까봐. 내가 내 마음도 외면하는 바보라서 미안해. 그러니까 이번엔 내가 먼저 말할게.
“니콜.”
의주의 부름에 니콜라스가 시선을 돌려 눈을 마주했다. 여유 없이 긴장한 얼굴. 그 오랜 시간을 함께 했음에도 처음 보는 얼굴이다. 혹시 짓무른 눈가가 아프지는 않을까 싶어 조심스럽게 매만지는 의주의 손길에 순간 나른해진 표정이 의주의 말에 다시 뻣뻣해졌다.
“있잖아. 나 널 사랑해. 너는?”
그 물음에 니콜라스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여전히 겁이나? 넌 아직도 그 말을 하는 게 두려워? 도대체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거야? 무수한 물음표를 의주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어둠이 무서워 이불 아래로 몸을 숨긴 겁쟁이를 달래는 법은 간단하니까. 그 이불 아래로 들어가 함께 있어주면 된다. 특히 저를 달래줄 누군가를 아주 오래 기다린 누군가라면. 그리고 의주는 이불 아래 숨은 것이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었다. 괴물이든 장난감이든 무엇이든 그게 니콜라스라면 정말 전혀 상관없었다.
“멍청아, 사랑한다고.”
의주와 눈이 마주친 니콜라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내 당황해했다.
“왜, 왜 울어. 주주….”
“몰라. 그냥 나와…,”
어쩌지. 어떡하지. 의주의 눈물을 닦아줄 무언가를 찾는 니콜라스를 붙잡았다. 시야가 온통 흐릿흐릿한데도 이상하게 니콜라스의 얼굴은 선명했다.
“니콜…, 나 사랑해?”
있잖아. 나 이제 다른 건 다 필요 없어. 널 갖게 해줘. 네가 날 가졌으면 좋겠어. 너의 쌓인 마음에 그대로 파묻혀 숨을 쉴 수 없게 되어도 괜찮아. 그냥 네가 내 옆에 있으면 무슨 일이 생겨도 괜찮을 것 같아. 그리고… 이 마음은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러니까 말해. 빨리 말해줘.
“응. 나, 나 주주를 사랑해.”
여전히 잘게 떨리는 니콜라스의 손을 보다가 빠지지 않게 힘을 주어 손가락을 겹쳐 잡았다. 실수로라도 놓치지 않게. 날아가 버린 풍선은 다시 잡을 수 없으니까. 니콜라스를 조금 더 가까이 보고 싶었다. 거리를 좁혔다. 코끝이 스치고, 호흡을 멈춘 니콜라스에게 숨을 불어넣었다. 앞으론 함부로 날아갈 수 없게 잔뜩 변의주를 채워 넣을 생각이었다. 그러니까, 니콜. 너도 너의 무거운 그 사랑으로 너를 가득 채워줘. 전부 나한테 줘. 나를 쥐고, 절대 놓치지 마. 우리가 서로에게 떨어져 짓눌린 뒤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