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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스케테구다사이

미애

 





 

 

외계인이 나오는 이야기는 이제 너무 뻔하다. 그들은 이미 사회의 일원이 되어 지구의 발전에 이룩하고 있는 동시에 범죄율에도 톡톡히 기여 중이니 특별할 것도 없었다. 그저 人과 人이 엉킨 목걸이처럼 엮이는 이야기가 특별할 게 뭐 있겠는가. 그러나 동시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은 너무나 특별해서 아주 사소한 사건만으로도 우주를 통째로 흔들어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경고한다. 이건 그런 감동적인 대서사시는 아니다.

 

 

난 특별해지고 싶어

시작은 외계전사레인저 시리즈. 때는 2020년, 우리은하 가장자리에 위치한 태양계 근처에서 하필 행성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별안간 지구는 예상보다 한참 빠른 21세기에 외계인의 정체를 밝혀내게 되었다. 졸도하는 천문학자가 넘쳐났고, 물리학자, 점술가, 과학유튜버, 유사과학유튜버 기타 등등 모두가 패닉에 빠졌다. 의외로 덤덤했던 건 일반 시민이었는데 그들은 난민이 탄 우주선이 대기권으로 진입하는 와중에도 낡은 몸을 이끌고 출근 중이었으므로 별세계이야기라고 생각했을 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점심시간에나 스몰톡 주제로 이용당한 행성 전쟁과 외계 난민 이야기는 점차 세계의 핫토픽, 뜨거운 감자에서 미지근한 감자샐러드 정도가 되었다. 샐러드처럼 잘 섞여든 외계종족은 이내 사이좋게 치고 박고 싸우고 사랑하고, 혐오하거나 포용하거나, 지지고 볶으며 잘 살고 있었다. 러브 앤 피스!

 

그렇게 해서 등장한 역사적인 티비 프로그램. 이름하야 < 외계전사레인저 > 이름 한번 직설적이고도 촌스러운 프로그램은 외계 난민을 받아들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영된 특수촬영물이었다. 1화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프로파간다는 물러가라. 이딴 걸 어린이들 보라고 내놓은 거냐, 작가의 상상력이 너무나 빈약하다, 외계전사 비주얼은 끝내주는데 악당들은 왜 저렇게 징그럽냐 등등. 악플보다 무서운 게 무플이라더니 외계전사레인저는 악플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 10화가 지나 점점 촬영 퀄리티가 높아지더니 완결 즈음엔 거의 살아있는 특촬물의 전설이 될 정도였다. 그동안 특수촬영물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매료되었느냐, 혹자는 말했다. 잘생겼어.

 

외계전사레인저 시리즈는 최초로 우주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드라마였다. 지구 사회에 한시라도 빨리 적응하기 위해 가진 능력을 활용했다. 일종의 프로파간다였다. KA9629-1 행성인은 지구인에겐 없는 슈퍼파워가 있었고 히어로라는 직업이 있었다. 이종족의 아름다움이란 그런 거였다. 유전적으로 아주 꼼꼼하게 설계된 외형과 능력은 지구인을 매료 시키기에 충분했다. 외계전사레인저는 곧 아시아 각국의 언어로 송출되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한국과 일본에선 벌써 크고 작은 행사가 수없이 열렸다. 서양 오타쿠들이 슬금슬금 외계전사레인저의 코스프레를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질리지도 않는지 양산형처럼 시리즈를 찍어내는데도 다음 시즌 내놓으라고 성화였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검정 비니, 핫핑크 반팔티, 다 찢어진 데님을 입은 채 캠퍼스를 활보하는 니콜라스 되시겠다.

 

니콜라스는 예로부터 남자라면 어디서든 특출나야 한다고 믿는 편이었다. 본인이 특출나게 태어났다기보다는 그런 노력을 열심히 하는 편이라고 자부했으며, 자신이 바라는 이상향과 자신의 외관이 꽤나 합이 잘 맞는다고도. 그렇게 다 가진 남자가 딱 하나 가지지 못한 게 있다면 바로 외계종족 신분. 그것까지 있었다면 완벽했을 텐데. 유학생 신분도 충분히 특별했으나 그걸론 만족할 수 없었다. 왜 난 외계전사레인저 블랙이 아니지? 그런 생각을 10살 때부터 했을 거다. 레드도, 블루도 아니다. 무조건 블랙. 블랙은 고독한 늑대니까.

 

외계전사레인저시리즈의 인기투표 1위는 언제나 레드였다. 사람들은 호쾌하고 태양 같은 주인공을 사랑한다. 꺾이지 않는 마음과 의지력. 굳건한 정의감으로 모두를 하나로 모으는 힘. 그런 것들에 빠지지 않을 리 없었다. 2위는 블랙이었다. 태양이 있다면 그림자가 있어야 했다. 그림자는 짙으면 짙을수록 아름다웠다. 그는 차갑고 고독한 타입이었지만, 나그네의 옷을 태양이 벗겼듯 온기가 그를 살살 녹이는 법이었다. 그런 서사가 시리즈 내내 있었는데도 사람들은 질리지도 않았다. 1위는 레드. 2위는 블랙. 블루는 알아서 살라지, 뭐. 그런 결과가 이어졌다. 니콜라스는 자국 언어로 후시녹음된 외계전사레인저를 보며 강렬한 감각을 느꼈다. 멋지다. 멋진 거 좋아. 당연하잖아. 니콜라스의 꿈은 외계전사레인저 블랙이었다. 다만 안타까운 건 직업에 귀천 없고 위아래 없고 종족 없다지만, 외계전사레인저는 외계종족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일단 죽으면 안 됐고, 악당을 처부술 수 있는 특출난 능력이 하나쯤은 있어야 했고, 그것도 아니라면 힐이라도 기깔나게 넣어줄 수 있어야 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무지막지하게 졸려하기, 옷장에 옷 쌓인 거 모르고 또 쇼핑하기 같은 게 특기인 인간 니콜라스는 될 수 없다는 소리였다. 그래도 춤은 좀 췄는데. 브레이크댄스 전형이 없다는 게 통탄스러운 일이었다.

 

펼쳐보기도 전에 꿈이 꺾인 니콜라스가 특기를 살려 패디과로 전향할 때 즈음 텅 빈 눈의 변의주가 특수섬유로 제작된 쫄쫄이에 팔다리를 욱여넣으며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시즌 블랙레인저는 거절하길 잘했어. 왜 하필 나야. 레드보다 대사 없어서 낫긴 하지만 내가 블랙할 관상은 아닌데. 유니폼이 하필 검정색이긴 해도. 변의주는 외계레인저 중 유일하게 시리즈에 불참 의사를 밝힌 히어로였다. 대외적으로 밝힌 이유는 본인의 연기력이었고, 속내는 따로 있어서 난감한 웃음만 지으며 매번 거절했다. 사람 구하고 민원 해결하라고 뽑아놨더니 지구엔 언제 그렇게 빨리 적응한 건지, 인스타그램 계정 만들어서 광고 올리고 있는 꼴들이 가증스러웠다. 신발 한번 신어주면 돈 몇백이 들어온다는 과시는 코웃음도 아까울 지경이었다. 확실히 박봉이자 유명세도 없었던 지난날에 비하면 이 정도 호사야 누려도 되겠지만. 그래도 명색이 히어로가 손에 쥐면 흘러버리는 모래알 같은 유명세에 눈이 멀다니. 그렇게 생각했던 게 저번주였지만  지금 다시 돌아간다면 차라리 촬영장에서 구르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매번 출동 중이었다. 과로 앞에선 신념도 소용없다. 촬영한다고 자리 비운 동료 땜빵해주느라 뒤지게 바빴다. 그래도 매화마다 대사 절어서 밈으로 재탄생한 전 세대 블루레인저를 온갖 숏츠에서 볼 때마다 생각을 고쳐 먹었다. 자기객관화가 철저한 변의주는 자신의 선택에 다시 한번 마음을 쓸어내리며 출동 준비를 마쳤다.

 

리모델링 한다고 몇 달째 손도 안 대는 구관 화장실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었다. 분위기가 을씨년스러워서 뭐라도 나올 분위기였다. 굳이 이렇게 무너져도 상관없는 곳까지 와서 출동 준비를 했다. 부서져도 어차피 국가에서 다 변상해주지만 세금 빼먹는다고 여간 눈치를 주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변의주는 뚜벅뚜벅 걸어서 문으로 나갔다. 옆구리에는 헬멧을 낀 채로. 매끈한 몸에 착 달라붙는 의상은 이제 익숙해졌지만 각종 시스템 명령어, 통신화면 등으로 시야를 빼곡하게 가리는 헬멧은 적응하려야 할 수가 없어서 보통 나가기 직전에 쓰는 게 습관이 됐다. 간소화 좀 시켜주면 좋으련만. 속으로 투덜대며 걸어가는데 누군가 툭 부딪쳐 본능적으로 먼저 사과했다. 헬멧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아, 죄송합니다.

아, 저도요.

 

아무도 없어야 하는 공간에서 상대방이 떨어진 헬멧을 주워다 변의주에게 건넸다.

 

아.

어?

 

상대는 변의주보다 더 화려한 행색을 하고 있었다. 멋내기용이 확실한 무테 안경과 넥이 다 헤진 그런지무드의 니트에 바닥까지 끌리는 카고바지, 그리고 핑크 운동화. 모를 수가 없는 패션. 저 중 하나는 변의주가 선물해준 물건이었다. 주주? 변의주가 헬멧을 머리에 푹 쓰고 주먹을 꽉 쥐었다. 어디선가 웅웅대며 진동이 들렸다. 외계전사레인저 블랙 출도오오ㅇ. 구관의 천장도, 국민의 세금도, 변의주의 체면도 개박살나는 현장이었다.

 

 

변의주가 스물에 사귄 첫 남친은 외계전사레인저 시즌 5의 레드를 맡았다. 역대 레드 중 가장 호평 받았고 여전히 인기투표 5위 안에서 내려올 생각을 않는 쾌남 중에 쾌남이었다. 처음 히어로가 됐을 때부터 오로지 정의 밖에 모르는 바보였다. 데이트를 하다가도 출동 신호가 오면 바로 달려나갔다. 처음 손을 잡았을 때도, 처음 키스했을 때도, 처음할 뻔했을 때도. 변의주는 그때 햇병아리 견습생이었다. 빨리 히어로가 돼서 좋은 시간 방해하는 악당을 쳐부수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종국엔 저렇게 물불 안 가리고 달려가게 만드는 정의감이란 무엇인가, 궁금해졌다. 그가 변의주에게 알려준 건 대체로 이런 내용이었다.

 

무조건적으로 시민의 안전을 우선시 할 것.

무조건적으로 시민의 피해를 최소화 할 것.

무조건적으로 시민을 먼저 생각할 것.

무조건적으로 시민은 착해.

무조건 적은 나빠. 마주치면 싸워라.

 

이분법적 사고를 들이미는 그에게 변의주는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히어로 견습생 주제에 정의 때문에 악당이 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정의가 모든 걸 해결해주진 않았다. 앞서 말했듯 견습생이 그런 불손한 생각을 했다. 어쩌면 괜한 반항심이었을지도 모른다. 히어로가 악당의 사정 따위 들어줄 의무는 없는 건 맞으니까. 휘말린 시민은 죄가 없고 원인을 제공한 악당이 잘못했을 뿐. 그와 헤어지고 나서는 그런 잡념도 확연히 줄었다. 피곤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가 없으니 그랬다. 어린 마음에 그런 남자가 멋있어 보였던 거겠지. 이제 더는 그런 화려함에 눈이 멀지 않았다. 진짜 정의로운 남자는 막 견습생으로 들어온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 햇병아리를 꼬시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그렇다면 저 핑크 비니의 화려함은 어떤가. 무채색으로 가득한 강의실 한복판에서 정말이지 미치도록 눈에 띄는 화려함이다. 독버섯은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위험하다지만 저 남자에겐 독성이 없어 보였다. 인상이 좀 더러울 뿐.

 

니콜라스.

 

옆자리에 앉자 당연하다는 듯 자기소개를 하는 니콜라스에게 호감이 생기기 직전이었다. 어쩌면 옆에 앉은 것부터가 맘에 들었다는 의사표현이었지만.

 

변의주입니다.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걸로 조금 더 확실히 표현하기로 했다. 제대로 알아들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니콜라스는 어쨌든 변의주의 손을 맞잡고 수줍게 웃었다. 인상, 별로 안 더럽네.

 

변의주는 평범할 수 있을까? 행성 전쟁이 발발하면서 지구에서는 아직 개발할 수 없는 고차원의 무기로 인해 생겨버린 웜홀로 이따금 흉악한 악당이 방문했다. 어떤 날엔 외형이 인간과 비슷했고, 어떤 날엔 동식물과 비슷했고, 어떤 날엔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꼬라지로 나타나 또 하나의 기록을 만들기도 했다. 오늘은 문어와 그 모양새가 비슷했으니 차라리 평범한 축에 속했다. 변의주는 자르면 자라나고, 자르면 자라나는 촉수를 끊임없이 자르며 잡념의 크기를 키웠다. 아, 쪽팔려. 차라리 헬멧만 쓰고 있었으면 어땠을까? 그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 기분은 생각보다 암담했다. 촉수를 30개쯤 잘랐을까, 보다 못한 레드가 머리를 쑹덩 잘랐다. 광화문 한복판에 문어 괴물의 잔해가 널브러져 있었다.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악당을 물리친다는 건 곧 퇴근이라는 뜻이었다. 변의주는 빠르게 복귀해 환복한 뒤 집으로 향했다.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의주, 얘기 좀 해. 발신인은 꽉 찬 검은 하트였다.

 

니콜라스가 신경 쓰이는 남자1에서 변의주의 3번째 애인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한 달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교양 수업에서나 겨우 마주치는 사이였음에도 둘은 역사를 썼다. 니콜라스는 언제나 주주가 날 꼬셨어, 라고 단언했지만 변의주는 정말 한 게 없어서 어이가 없었다.

 

내가 뭘 했다고?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잖아.

그건 너겠지. 아무튼 난 그런 적 없어.

그럼 왜 맨날 내 옆자리 앉았는데?

 

말문이 막힌 변의주를 가리키며 니콜라스가 킥킥 웃었다. 그건 변의주식 플러팅이 맞았기 때문에. 분명 놀릴 거라 예상했지만 의외로 별 반응이 없었다. 주주, 감동이야. 그런 말만 남겼다. 옆자리에 앉아 첫인사 빼고 말도 안 거는 변의주를 냅다 패디과 술자리에 초대한 니콜라스. 물론 그 자리에 변의주의 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 물어본 거였다. 그게 아니었어도 왔을 거라 확신했지만. 자연스럽게 변의주를 제 옆에 앉히고 열심히 술을 따라줬다. 술을 따라주다 아무도 안 볼 때 물로 바꾸고, 또 술을 따라줬다가 사이다로 바꾸고. 갖은 꼴값을 다 떨다 보니 자리에 있는 대부분이 만취해있었다. 수업 듣다가도 종종 저런 눈으로 자신을 볼 때가 있었다. 동그랗고 큰 눈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면 니콜라스는 아주 깊은 강에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축축하고 숨이 턱 막히지만 좋은 기분이었다. 사랑이라는 게 매번 보송한 수건처럼 산뜻한 사랑만 있는 건 아니었다. 허벅지에 올려놓았던 변의주의 손 사이사이로 니콜라스의 손가락이 얽혀 들어왔다. 그래서 변의주는 억울했다. 니가 먼저 꼬셨잖아.

 

영화 보다 갑자기 사라져서 안 오는 변의주 기다리기, 카페 가서 사진 찍어주고 있는데 갑자기 사라져서 안 오다가 상처 달고 오는 변의주 걱정하기, 집에서 자고 간다더니 갑자기 가스불 안 끄고 온 거 생각난다며 가버리는 변의주 이해하기 등등. 그런 일만 아니면 둘 사이는 제법 평화롭게 흘러갔다. 니콜라스가 만난 사람 중 변의주는 가장 특이한 편에 속했다. 특별하고도 특이한 사람.

 

아까.

맞아.

뭐가?

니콜, 네가 본 거. 나 맞아.

 

이실직고 말하니 좀 후련한 것 같기도. 니콜라스는 별 반응이 없었다. 의주, 그거 알아?

 

너 표정에서 엄청 티나는 타입이야.

내가?

 

결국은 전부 알고 있었단 소리잖아. 중얼거리니 니콜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왜 기념일마다 약속을 깨도 화를 안 냈겠어? 니콜라스가 눈썹을 까딱이며 팔을 넓게 벌렸다. 안기라는 소리였는데 변의주가 멀뚱히 쳐다만 보고 있어서 한참 있다 주섬주섬 팔을 내렸다. 굳어버린 건가.

 

그렇게 충격이야? 내가 알고 있는 게?

알고 있으면 말 좀 해주지. 그럼 그 고생 안 해도 됐던 건데.

주주 부담스러워 했을 테니까. 편하게 일하라고.

그렇게 편하진 않았어.

 

니콜라스는 자신의 꿈이 눈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벅찼고, 그가 자리를 비울 때마다 따라가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그니까 자신의 맹목적인 사랑이 변의주를 부담스럽게 만들까 봐 걱정이었다. 안 그래도 주주 너무 사랑하는데, 직업까지 사랑한다고 하면 너무 속물처럼 보일 거 아니야. 이 말까진 안 했다. 이중생활이 들통난 게 후련하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걱정이라는 변의주의 말에 니콜라스가 확신했다. 걱정하지마, 나 쉽게 당할 리 없어. 그렇게 뻔한 히어로의 애인은 되지 않을 거다.

 

그런 대화를 나눈 게 불과 4일 전. 니콜라스는 아주 쉽게 납치 당했다. 그것도 한 대여섯번. 누가 신상을 털었는진 몰라도 니콜라스의 자취방, 학교, 출몰하는 루트 모든 게 네트워크를 타고 돌아다녔다. 악당에도 실력자가 많은 모양이었다. 맨날 레드한테 맞아서 하늘로 날아가는 것만 보여주더니 이제 보니 순 사기였다. 누구보다 뻔한 히로인이 됐다. 이제 히로인이 납치 당하는 건 기사 한 줄 거리도 아닌데. 그보다 요즘 누가 히어로의 연인을 납치하나, 이 악당들이 더 뻔한 족속이었다.

 

저번엔 뭔 문어 같은 거랑 싸웠다더니 이번엔 새 대가리인가보다. 정장 잘 차려입은 비둘기 같은 게 문 앞을 얼쩡거렸다. 얼쩡거릴 때마다 고개가 360도 돌아갔다. 어디선가 꾸룩꾸룩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저 악당놈에게서 나는 소리 같았다. 그들은 니콜라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은 채 가만히 뒀다. 어차피 나 같은 거 잡아와봤자 본거지만 박살날 뿐인데. 니콜라스는 묶이지도 않았다. 다과까지 준비된 테이블에 앉아 곧 자신을 구하러 올 변의주를 기다렸다.

 

저기요, 저 여기서 뭐해야 돼요?

 

묻자마자 철문이 벌컥 열리더니 아주 화려한공작 같은 게 등장했다. 인간 몸에 공작 대가리와 공작 꼬리를 갖다 심은 듯한 키메라의 모습이었다. 좀, 그렇다. 니콜라스의 미감이 심각하게 불호를 외치고 있었다. 아주 잘 물었다. 부리에서 인간의 언어가 나왔다. 인간 같은 건 가만히 있으면 돼. 니 남친이 찾으러 올 때까지. 그리곤 퇴장했다. 저거 말하려고 등장한 건가? 악당도 어지간히 할 짓 없다 싶었고, 저런 놈들한테 시간 쓰느라 바쁜 변의주를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보다 큰일이 많을 텐데도 항상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오는 변의주. 언제나 다친 곳 없이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리지만 걱정하느라 표정이 굳은 변의주. 그런 걸 생각하다 보면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그리고 어째서 히어로들은 장기연애를 못하는지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히로인으로 살아남는 법

이번 서울경기 지역 본부1 소속 블랙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이러했다.

 

어쩐지 소시민적 그러나 그 모습이 호감 ★★★★☆

큰 희생을 좋아하진 않는 듯 큰 일은 못할 상 ★★★☆☆

정의감 보단 의무감으로 출동하는 모습 ★★☆☆☆

히어로가 잘생겼고 다음에 또 납치 당하고 싶어요 ★★★★★

 

시민의 소리함에 접수된 의견이 취합되어 변의주의 사무실 테이블로 전달되었다. 놀랍게도 히어로에게도 사무실이란 게 있었다. 보통 변의주는 대학생 신분을 병행하느라 학교로 대신 출석했지만, 공강인 날엔 사무실로 출근했다. 쉬는 날이라고는 없는 최악의 근무지였다. 매달 시민의 의견이 히어로에게 전달되는데 의미 없는 악플만큼이나 들을 만한 의견도 많았다. 변의주를 향한 의견은 대체로 히어로가 너무 소박한 마음가짐으로 사람을 구한다는 점. 반박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정확히 꿰뚫어 보는 의견이었다. 외계전사레인저에 출연했다면 악플을 두 배로 받았겠지. 근무태만 소리는 듣지 않았지만 열정적으로 근무하지도 않았다. 출동하라면 했고, 야근하라면 했고, 땜빵 뛰라면 뛰었지만 어쩐지 사람들이 말하는 그 열정이라는 건 눈곱만큼도 없었다. 하라는 거 하고 월급 받으면 그만이다. 구해줘서 고맙다는 소리 들으면 평범하게 행복해졌지만.

 

그치만 그 소리를 니콜라스에게서 듣는 건 또 다른 기분이었다. 그것도 벌써 일주일 째 열 번이었다. 니콜, 혹시 나 몰래 범죄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 거야? 그런 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많이 납치될 리가 없어. 진지하게 말하자 니콜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내가 대장이야. 요즘 들어 웜홀을 통해 태양계로 넘어오는 무리가 많아졌다지만 그게 이렇게 영향을 미칠 줄은 몰랐다. 티는 안 내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 니콜라스를 본부에 묶어두기라도 해야 하나 고민했다. 지구에도 있는 클리셰가 외계행성이라고 없었겠나. 히어로의 연인이라면 언젠가 악당에게 이용당하다 죽는 법이었다. 전 세대 블루의 연인이 그랬고, 전전 세대 핑크의 연인이, 전전전 세대에는 레드였다. 그러니까 그게 자신의 이야기가 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니콜라스는 희생될 이유가 없었다.

 

참고로 난 주주랑 안 헤어질 거야.

뭔 소리야.

지금 그 생각 중이잖아.

 

눈치가 참.

 

네가 납치만 안 당하면 돼.

그래도 주주가 구해주러 오는 거 좋은데.

 

말없이 째려보자 미안, 중얼거리며 두 팔로 변의주를 끌어안았다. 히어로에게 평화는 사치라는 말이 가장 싫었다. 그 말을 하는 것들은 진정한 평화를 누려본 적이 없어 질투가 나 그러는 거라고. 고르게 숨을 내쉬는 니콜라스의 품에 안겨 그런 생각을 했다.

 

보통 침략의 목표는 정복이다. 방문의 목표는 여행이라던가 유학 등등 많겠지만, 침략이라면 오로지 하나. 가진 걸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허접한 외계인부터 제법 이름 있는 외계인까지 침략하는 수가 늘었다. KA9629-1 행성인이 지구로 대피했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몇 광년 너머로 퍼진 탓이었다. 한번 뺏은 거 두 번은 어렵겠나. 지구인은 안중에도 없었고, 침략자들은 히어로의 능력을 탐내는 편이었다. 지구인에겐 아직 별 능력이 없으니까. 물론 지구인에게도 능력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출근하는 능력 하나는 끝내주게 좋아서 이 상황에도 악착같이 출근하고 돈 벌며 살고 있다. 그렇다고 무슨 도움이 되는 건 아니었지만 덕분에 사회가 멈추지 않고 굴러갔다. 외계전사레인저 시리즈는 잠정 중단 되었다. 히어로들이 촬영시간을 낼 수도 없을 만큼 바빠진 탓이었다. 겉보기엔 평화로웠지만 도처에 불안감이 가득했다. 언제 우주선이 하늘을 덮고 침략할지 몰랐다. 그런 종류의 불안이란 생경한 것이어서 사람들은 얼떨떨했다. 사이비가 목소리를 키웠고, 세계 곳곳에선 폭동이 일어나고. 어딘가는 여전히 평화로웠고, 어떤 곳은 사회망이 완전 박살나기도 했다. 혼돈의 시대였다.

 

폭풍전야 같은 날이 계속 됐다. 니콜라스는 이제 안전했다. 그보다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탓이었다. 침략을 계획하는 쪽에서도 일개 인간 하나에게 집중할 인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마냥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둘이 함께 있을 수 있다는 데에 감사하기로 했다. 아직 주말엔 쉴 수 있었으니까. 니콜라스가 고른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재미없는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입에 카라멜 팝콘을 잔뜩 집어넣은 채 씹고 있으면 콜라가 내밀어졌다. 저녁은 나가서 먹을까? 팝콘을 다 삼킨 변의주가 발을 까딱이며 물었다. 니콜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그의 생일이었다.

 

생일선물은 니콜라스가 갖고 싶다고 했던 티셔츠였다. 외출 전에 선물을 미리 주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변의주도 옷을 갈아입고 나타났다. 커플티를 나란히 입고 깜찍하게 문밖을 나섰다. 기분이 최고였다. 평범한 연인의 하루를 보낼 예정이었다. 너무나 뻔하게도.

 

대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하는 일이 불가피하다면, 어디까지를 소수라고 정할 수 있는 걸까? 단 하나의 희생도 원하지 않았다. 시민은 무조건적으로 지켜야 한다고 말하던 그의 첫 남친은 언제나 소수의 희생으로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지만. 그 희생 속에 자신은 없었다. 언제나 타인이 희생하는 시나리오만 존재했다. 그런 건 불공평했다. 서서히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다가 마주 앉은 니콜라스를 바라봤다. 웜홀을 통과한 익숙한 우주함선이 천천히 대기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자신은 블랙이 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만큼이나 슬펐던 적이 없었다. 어린 마음에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을 너무 일찍 깨달았다. 제 손에서 빔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히어로가 되지 못한다는 걸 알고 며칠간 식음을 전폐했다. 그와중에도 외계전사레인저는 꼬박꼬박 챙겨봤는데, 블랙은 언제나 열심히 싸웠다. 악당한테 무기를 빼앗겼어도 맨주먹으로 싸워서 이겼다. 누군가를 지킬 수 있는 힘을 썩히지 않을 거라고. 싸울 힘이 남아있으면 어떻게든 싸울 거라고 말하는 블랙이 너무 좋았다. 진짜 되고 싶었던 건 유니폼을 입고 무기로 재롱 떠는 모양만 히어로가 아니라 사람들을 지키는 히어로가 되고 싶었던 거니까. 초등학생 주제에 아주 깊은 뜻을 헤아렸다. 그런데 지금, 현재의 니콜라스는 그때의 초등학생이 무슨 마음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자신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힘이 없다. 모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연인을 막을 힘이 없었다.

 

사랑은 더는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었다. 실체가 있었고 눈으로 볼 수도 있으며 끌어안을 수도 있었다. 지구상의 많은 사랑이 그러했다. 지구뿐이겠는가. 지금도 어디선가 어떤 은하계에서 어떤 항성을 돌고 있는 어떤 행성 속 어떤 존재 또한 사랑을 끌어안은 채 행복을 속삭이고 있을 거다. 지금 니콜라스가 하는 것처럼. 의주, 너는 내가 본 최고의 히어로야. 너는 내 히어로야. 그치만 이런 식으로 우리 모두의 히어로 같은 건 되지 마. 너를 희생하지마. 변의주는 니콜라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헬멧을 벗고 눈을 마주했다. 혼자가 아니야. 다 같이 사람들을 구하는 거야. 그렇게 거창한 거 아니야, 안심해. 그러나 떨리는 손으로 니콜라스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건물 사이로 변의주가 빠르게 날아 웜홀로 향했다. 점점 커지는 출입구 사이로 함선이 등장하고 있었다. 거대한 크기에 압도 당할 법도 했으나 이미 먼저 와있던 히어로들이 정신 없이 변의주를 불렀다. 감상에 빠질 시간이 없었다.

 

침략자가 탑승한 함선이 조금씩 밀렸다. 양옆에선 전투기들이 엉켜 싸우고 있었다. 함선의 동력 기관을 찾아 파괴해야 했다. 변의주가 자진해서 함선 내부로 들어갔다. 물론 힘으로 부수고 들어갔다. 경고음이 시끄럽게 울려대고 있었다. 기관실을 지나 더 깊이 들어가니 동력 장치가 보였다. 너무 허술해서 불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떼거지로 몰려와 변의주를 둘러싸더니 한꺼번에 공격했다. 멍청이들인가. 그들의 공격에 동력 장치가 망가졌다는 경고가 울리기 시작했다. 우왕좌왕하는 틈을 타 다리를 절뚝이며 왔던 길을 되짚어 나갔다. 뜯어진 함선 너머로 하늘이 보였다. 얼른 나오라는 누군가의 고함과 동시에 아래서부터 함선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함선의 잔해가 폭우처럼 쏟아졌다. 지진에 버금가는 피해가 세계 곳곳에서 일어났다. 많은 히어로가 다쳤고, 그보다 많은 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변의주의 이름이 실종자 명단에 올랐다.

 

오늘도 개미는 열심히

히어로의 수명은 길지 않다. 몸 쓰는 일이 그러하듯 히어로라고 다를 게 없었다. 입사하는 연령대도 빨랐고 은퇴하는 연령대도 빨랐다. KA9629-1 행성인의 수명 자체가 지구인보다 짧은 탓도 있었다. 그들에겐 딱 맞는 시간의 흐름이었다. 빠르거나 느리지 않았다. 영원히 실종될 뻔한 변의주는 며칠 안 가 건물 잔해에서 발견되었다. 목숨은 부지했고, 다친 곳도 얼마 없었다. 남들에겐 기적 같은 일이 히어로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돌아오자마자 은퇴하라고 난리 칠 줄 알았던 니콜라스는 의외로 아무 말 없었다. 대신 변의주를 꼭 끌어안고 놔주질 않았는데 담당 주치의는 회진 돌 때마다 그 꼬라지를 보느라 심기가 불편했다. 치유 속도가 빨랐다. 일주일만에 퇴원하고 바로 현장에 복귀했다.

 

니콜라스가 별말이 없는 건 아마도 절절하게 했던 고백 때문이리라 추측했다. 히어로더러 사람을 구하지 말라니. 꿈이 히어로였던 남자로서 대단히 정신 나간 발언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몰랐다. 그러나 변의주 또한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 말에 잠시 흔들린 자신이 조금 쪽팔려서 그랬다.

 

주주, 나 꿈이 바뀌었어.

뭔데?

네 담당 스타일리스트.

오, 별론데.

너네 유니폼이 더 별로야. 입사 지원서 넣을 거야.

본부에 그런 자리 없어.

 

거기 가면 의주를 더 많이 볼 수 있겠지. 이미 귓등으로도 안 듣는 중이었다. 니콜라스가 전담 스타일리스트가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혼자 화려한 유니폼을 입은 채 출동하는 상상을 했다. 등에는 아이러브니코 따위가 적혀있는 유니폼을. 어떻게든 막고 싶어졌다. 당연하게도 이쯤에서 출동 신호가 요란하게 울렸다. 악당들은 랜드마크를 참 좋아했다. 여행 가면 랜드마크 먼저 방문하듯 침략도 랜드마크가 먼저였다. 이번엔 일본 출장이었다. 도쿄 타워까지는 워프로 3분. 오늘의 기념품은 도쿄바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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