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비늘의 인어
난갈
보통 초월자의 비극은 낮은 자들의 짓씹기 좋은 소재가 된다.
대만해의 이무기는 하늘의 미움을 받아 결국 용틀음 중에 용이 못 되고 인어가 되었다지. 그 인어는 사람을 유혹하는 데가 있어 아름답다 한다. 탐스러운 검은 비늘은 반짝반짝 광택이 나 잘 세공한 최상급 흑요석처럼 보였다. 그의 살갗은 희기가 옥과 같고, 두 뺨에는 붉은 산호빛이 옅게 돌아 아름답다 한다. 그 아리따운 자태에도 불구하고 이무기에서 인어로 강등된 그 검은 비늘의 인어는 시시때때로 인간을 저주하며 강풍과 거대한 파도를 일으켰다.
음력 7월, 귀신들의 달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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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먼 수평선 너머 바다 깊은 곳. 그곳의 물빛은 블루 토파즈보다 진하고 선명하며, 크리스탈처럼 투명하다. 그 아래 신비롭고 아름다운 갖가지 색의 해조류는 춤을 추듯 하늘거리며, 갖가지 빛깔의 산호초는 화려하기 그지없다. 깊은 해저에는 각종 금은보화와 보배들로 꾸며진 용왕의 궁전이 있다. 조개들이 제 품에 껴안고 키워 내 진상한 최상급의 진주들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이샹은 물뱀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비는 그 바다를 관장하는 왕이었다. 아름다운 용궁에서 소중하게 키워진 이샹은 매일 같이 몸을 키웠다. 그러나 이무기로 태어난 누이보다는 매번 작았다. 온화하고 카리스마 있는 누이에 비해 장난기 많고 말 듣지 않는 비얌은 왕의 쩌렁쩌렁한 호통을 들으며 삼지창에서 삼지창에 얻어맞고 해일을 맞는 일이 빈번했다. 차기 왕은 누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칭찬 받고 싶은 어린 욕구는 이샹의 승부욕을 자극해 입술을 비쭉 나오게 했다. 그러고도 망나니처럼 뛰노는 막내아들 덕에 가족들은 골머리를 앓았지만, 천진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면 결국엔 너털웃음을 지었다.
어린 뱀은 영원히 어리기만 한 채로 살 것 같았지만, 잠에서 깨어난 듯이 그 꿈은 순식간에 부서진 창문처럼 와르르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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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샹이 제 사촌들이나 다름없는 고래들과 자유롭게 헤엄치던 어느 날이었다.
포경선의 프로펠러 소리에 고래들이 기민하게 반응했다. 자맥질하던 고래들이 끼이이- 소리를 내며 움직이면 포경선이 거리를 좁혀왔다. 이샹은 이런 일이 처음이라 당황해하며 고래의 헤엄에 함께 했다.
“뭐야?”
“도망가야 해.”
“뭔데 저게?”
“우릴 사냥하러 온 인간들.”
“왜 도망가? 인간은 너희보다 엄청나게 작잖아!”
고래가 이샹과 눈을 마주친다. 크기의 문제라면, 고래가 사람을 덮쳐 물속으로 가라앉히면 그만일 것이다. 아가리를 벌려 삼켜 버리고 깊은 바다에 뱉으면 그만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악독함은 물리적 크기의 문제가 아니다. 수 시간을 바짝 쫓아 사냥하고, 공포에 질린 고래들이 수면 위로 자꾸만 올라서면 소총을 쏘고, 작살을 날리며 전기충격기를 거침없이 쏜다. 생존을 위한 사냥이 아닌, 광폭한 유희의 사냥이다. 고래는 눈을 지긋이 맞추다가, 이샹의 등을 떠밀었다.
“그럴 때가 아냐. 도망가자.”
한 시간 즈음 진땀나는 도망에도 포경선은 유유히 따라왔다. 고래들의 체력이 훅훅 꺾이고 나자 알고 있다는 듯 펜트라이트 작살이 날아들었다.날카로운 작살에 30g 수류탄이 장착되어 있어서, 물에 날아든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펑, 터졌다. 귀 먹먹한 소리를 내며 거대한 음파가 불쾌하게 퍼졌다. 물 밖에서 수없이 날아드는 작살에 결국 이샹의 삼촌인 보리고래의 몸이 관통당했다. 코가 마비될 것처럼 비릿한 혈향이 삽시간에 온 바다에 퍼진다. 이샹이 뒤를 도는 와중에도 작살은 비처럼 쏟아져내렸다. 두 눈을 부정하기 전에, 펑-! 묵직하게 덮힌 소리가 귀를 멀게 했다. 크게 떴던 눈이 반사적으로 질끈 감긴다.
작살에 달린 수류탄이 몸속에서 터지며 보리고래의 내장을 짓이겼다. 작살이 뚫린 구멍으로 내장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이샹은 분노와 충격에 휩싸였다. 바다는 생존의 터이고, 살아남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다. 죽음과 죽임은 더 놀라울 것도 없었다. 고등동물은 생존만이 아니라 유희를 위해 무언가를 죽이기도 했지만, 하지만, 이렇게까지 잔인한 죽음은 처음이다.
죽음을 부정하며 그에게로 가려고 했다. 이샹을 지키려 둘러싸고 있던 주변 고래들이 그를 막아섰다.
“안 돼.”
“왜!”
“걘 이미 죽었어.여기 계속 있으면 너도 죽어.”
악을 쓰는 이샹과 쏟아지는 작살포 사이에서 고래들이 허둥댔다. 덕분에 옆에 있던 다른 고래 사촌형도 작살포에 스쳤다. 다행히 지느러미를 스친 정도지만 큰 혈관이 찢긴 모양인지 피가 끊기지 않았다.
“여기 있으면 안 돼. 같이 죽어.”
이샹은 삼촌을 두고 갈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대로라면 사촌들이며 다른 가족들이 위험했다. 이곳을 떠나는 게 먼저였다. 피눈물을 흘리며 이샹은 그들이 이끄는 대로 돌진했다.
결국에는 지느러미를 찢긴 사촌형은 과다출혈로 수영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다. 인간들의 포위망에 단단히 갇혀 흉부에 두터운 낚시바늘이 관통했다. 쇠심지 같은 피부가 찢기며 수십 리터의 피가 철철 흘렀다. 무리 가장 마지막으로 힘없이 헤엄치는 사촌을 계속 신경쓰던 이샹은 거센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가슴팍에 있는 낚싯바늘을 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인간들이 날린 포에 오른쪽 팔 지느러미가 찢겼다. 그래봤자 사촌의 피로 이미 붉게 물든 바다에 이샹의 상처에 난 피는 티도 나지 않았다.
거대한 프로펠러가 끊임없이 돌고, 배에 있는 기계의 힘에 질질 끌려가는 사촌형을 따라 이샹이 좇아가자 그가 고갤 저었다.
“따라오지 마.”
“내가 구해줄게, 형.”
“가.”
“안 가.”
“우리 존재는 인간이 알아도, 인간은 이무기를 몰라.”
“그래서 뭐!”
“네 존재가 드러나는 건 너무 위험해.”
“가족이 위험한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놔.”
“이샹. 포기해. 차라리 용이 돼. 여의주를 물면 뭐든 이룰 수 있다지. 그때 복수를 해줘. 오만한 인간들에게 너희 같은 야만의 시대는 끝났다고.”
그 말은 유언이 되었다. 이샹은 그대로 다른 고래들에게 붙들렸다. <너도 잃고 싶지 않아.> 날라든 작살과 그물에 엉망진창이 된 꼴로 애원하는 고래들을 두고 죽으러 갈 수 없었다. 여의주를 물고 복수를 해달라는 형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다. 그들이 앞장서는 대로 포경선의 감시에서 멀리멀리 도망쳤다. 깊은 바다로 처박히며, 이샹은 팔에서 흐르는 피 같은 눈물을 흘렸다.
용이 되겠다.
여의주를 가져 내 가족들을 상처입히고 죽인 저 인간들에게 복수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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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웬만한 성체만해진 뒤에는 미련없이 궁전을 떠났다. 더 넓은 세계를 보고 오겠다는 말엔 가족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삼촌과 형을 잃은 이후로 어딘가 어두워진 이샹이 밝아지길 바란 탓이었다. 떠나기 전 누이가 이샹을 붙잡았다. 살가운 말 건네기 어려워 둘은 잠깐 침묵했다.
“만물은 이어져있나니, 특정 무언가를 미워하는 마음은 너만 괴롭게 할 거야.”
“그럼 누나는 저 치들을 그냥 두고 보자는 거야?”
누이는 입을 다물었다.
“누님. 나는 인간이 미워…”
“난 네가 괴롭질 않길 바라.”
“나도 그래.”
“먼 바다에서 마음을 씻어 봐. 나도 그들이 밉지 않은 게 아니야.”
남매의 대화를 뒤로 하고, 이샹은 먼 바다 대신 아래로 침잠했다. 오랜 시간 심해를 유영했다. 얕은 바다는 관심이 없었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심해, 아가리를 벌리고 수천미터를 돌아다녀도 먹이가 없는 깊은 바다. 물비얌은 되는 대로 갖가지 것을 먹어치우며 구렁이가 되고, 이무기가 되었다.
심해에서도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었다. 심해 탐사기며 잠수정이 들이닥쳐 빛을 번쩍였다. 갈퀴들이 죄없는 해양생물들을 다 갈퀴고 해쳤으며, 인간이 버린 쓰레기들에 물고기들의 몸이 꽁꽁 묶이고 파헤쳐졌다.
그런 까닭에, 누이의 바람과 달리, 인간에 대한 악감정은 이샹의 몸이 커지는 것만큼 점점 크기를 더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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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문을 열어라.>
염라대왕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저승을 뒤흔든다. 명이 끝나기 무섭게 철옹성 같던 문이 열리자 음력 7월만을 기다린 귀들이 저마다 기이한 소리를 내며 저승문으로 달려들었다. 저승문은 어마어마하게 크고 묵중하였으나, 이승을 염원하는 귀들의 수에 비해 턱없이 작아 아수라장이 되기 십상이었다. 저승을 지키는 자들이 엄중한 얼굴로 길을 안내하고 오열을 맞추었다. 그럼에도 병목현상은 해결될 기미 없이 죽죽 늘어졌다.
들어올 수 있되 나갈 수는 없는 저승문이 양방향으로 열리는 유일한 달.
귀신들이 이승을 탐할 수 있는 귀월에만 가능한 일이었다.
음력 7월의 귀월이 되면 길거리에는 지전 태우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귀월을 맞아 이승의 땅에 온 귀신들의 평안을 빌며 공양을 하는 탓이다. 집집들이 상을 차려다 놓고, 다른 귀들도 함께 나눠 먹을 수 있도록 알알이 달린 포도나 바나나 따위의 과일을 올렸다. 귀와 인간이 공존하는 방법이라면 방법이었다.
대부분은 지전 태우는 냄새와 제삿상의 푸짐한 음식으로 만족하지만, 생에 대한 갈구로 귀들이 못된 짓을 할 수 있으니 귀월에는 다음을 조심해야 했다.
새로운 사업, 이사, 결혼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귀신이 질투해 저주를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호텔방에 들어갈 때 노크를 해야 한다. 방에 있던 귀신에게 알려야 하기 때문이다.
빨간색 옷을 피해야 한다. 귀를 끌어당기는 색이기 때문이다.
특히 교대를 잡는다(抓交替), 원한을 품은 귀신들이 환생을 하기 위해 사망 장소에서 자신과 교대할 인간을 잡으니 귀월, 중원절에는 특히 바다에 가지 말아야 한다.
네덜란드, 청나라, 일본 등 몇 백년 내내 식민지배를 겪은 타이완에서 제대로 제삿상을 받지 못하기는커녕 죽음마저 정당치 못한 자들이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그런 수많은 무연고 사망자를 보며 떠도는 고혼야귀(孤魂野鬼)를 두려워하는 것은 얼마나 당연한가. 그들을 죽음 이후에라도 위로하기 위해 생겨난 중원절과 귀월의 두려운 이야기는 풍속으로 이어져 여지껏 계속되었다. 모르는 자, 처음 보는 자에게도 배려하고 자비를 베푸는 다정함이 이어진 것이다.
단지 그런 일이 단순한 미신만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것을 다섯 살 배기 어린 아이가 알 턱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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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가지 말아야 하는, 귀월, 그것도 귀가 가장 많다는 중원절에 어린아이는 나룻배에 혼자 올랐다. 2006년 9월 7일, 제 생일을 맞아 어른들이 정신 없는 틈을 타 바닷가로 나온 것이었다. 제 생일이 음력 7월 15일인지 어쩐지 알 바 없으니 저 혼자 바다 물장구 치고, 배에도 기어 올라와 홀로 놀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세월 탓에 헐거워진 밧줄이 툭 끊겨 닻은 소용이 없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파도 따라 뭍에서 천천히 멀어졌다. 돛이 없는 배는 계속 연안을 떠돌았다.
그 때 마침, 하늘이 드물게 연안을 유영하던 이무기를 승천시켰다. 이샹 역시 전혀 예상치 못한 바였다. 보통 용은 이무기에서 몇 백년은 수련해야 될 수 있었다.아직 이샹은 이무기로도 턱없이 어린 나이였다. 하늘의 뜻을 하늘 아래 사는 자가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샹은 얼결에 용오름을 치며 하늘로 솟구쳤다. 귀문이 가장 활짝 열린 오늘은 친구들을 만나고 싶었는데. 얼떨떨한 감상을 하며 이무기는 오색의 상서로운 구름을 향해 용틀음을 했다.
하늘에서 친히 작디작은 여의주를 톡, 떨어뜨려 주는 순간.
다섯 살 배기, 변의주가 타고 있던 나룻배가 용오름에 휘말렸다.
배는 뱅글뱅글 정신없이 돌다 당연스레 전복했다. 잠에서 깨어난 어린 아이는 바다에 그대로 집어 삼켜졌다. 순한 어린애는 헤엄칠 줄 몰라 그대로 깊이깊이 가라앉았다. 꼬리 끝에 느껴지는 감각을 이샹 역시 느꼈으나 지금은 그런 사사로운 일에 정신을 팔릴 때가 아니었다. 기다리던 승천의 시간, 여의주를 입에 물어 용으로 자리매김해야 했다. 밑을 흘끗 보다 여의주를 향해 탐욕스레 아가리를 벌렸다.
<내게 그것을 주오. 나는 그 권능으로 인간을 징벌하리라.>
하늘은 얄망궂게 속삭였다.
<그렇담은 저 갓난쟁이도 너의 징벌인가?>
제 입에 닿을듯 말듯한 여의주가 안타까웠다. 이샹은 눈만 다시 흘긋 바다 깊은 곳으로 빠지는 아이를 보았다. 그리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여의주에 시선을 단단히 고정시켰다. 땅에 사는 미물의 죽음에는 흥미가 없었다. 나의 명예, 나의 권위, 나의 승천이 중요했다. 이미 소용돌이에 휩쓸린 물고기도 수두룩했다. 인간 하나를 신경쓰며 승천의 순간을 놓칠 수 없지.
<징벌은 아니다. 허나 나의 알 바도 아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별안간 거대한 벼락이 내리쳤다. 그것은 이무기와 용 사이의 무언가였던 이샹을 단숨에 관통했다. 순간 정신을 잃은 이샹은 힘을 잃었고, 용틀음은 언제 있었냐는 듯 흩어졌다.
그럼에도 금방 정신을 차린 이샹은 여의주가 바다로 추락하는 것을 보고 곧장 쫓아 몸을 틀었다. 승천은 지금 생각할 게 아니었다. 하늘로 솟구칠 것이 아니라 여의주를 가져야 했다. 호풍환우 이산도수의 여의주를 가져 제 뜻을 이루고 말 것이다.
검은 야욕으로 눈이 새까매진 이샹이 고속으로 바다와 부딪혔다. 수면에 부딪히며 거대한 물결이 생기고 포말이 전신을 뒤덮었다. 거대한 부딪힘, 미끄러운 잠수. 그러나 여의주는 얄궂게도 자맥질하는 변의주의 입에 꿀꺽 삼켜졌다.
그 동안 이샹의 몸은 천천히 바뀌고 있었다.
여의주에만 관심을 둔 이샹은 제 몸이 어찌 변했는지 알지도 못하였다. 다만 제 보물을 꿀꺽 삼킨 어린애를 낚아 채 뭍으로 올랐다. 백사장으로 오르자마자 정신을 잃은 어린애 배라도 가를 기세였다. 이샹에게 다시금 벼락이 내리쳤다.
<어느 죽음일지라도 너의 ‘알 바’가 되어야 할 것이다.>
신은 얄궂은 소리를 남긴 채 이샹의 혼백을 흔들고 기력을 잃게 했다. 머리와 어깨의 붉은 등 같은 불이 힘없이 툭 꺼진 듯이 티미해진다. 전원 꺼진 것처럼 이샹은 몸에 힘을 잃고 심해로 깊숙히 떨어져 내렸다. 그 사이 이샹은 백옥 같은 밀빛의 인간의 상체를, 캄캄한 제 눈 같은 색의 비늘이 뒤덮인 꼬리를 한 인어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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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샹은 그로부터 한참 뒤에나 정신을 차렸다.
<나의 여의주!>
광랑한 눈에 푸른 불꽃이 넘실거렸다. 어린 인간 낚아채 배를 도려내려는 찰나 하늘이 제게 벼락을 내린 것을 기억한다. 그것을 찾아야 한다! 내 여의주를 찾아 용으로 승격해야 한다. 그래야 나의 친우들의 복수를 해낼 수 있다.
순식간에 정리를 마친 이샹이 그를 찾아 수면으로 빠르게 질주했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몸이 지나치게 가볍고, 지나치게 느렸다. 어딘가 느낌이 달랐다. 괴이쩍은 마음에 저를 내려다 보니 몸이 영 이상했다. 익히 알고 있는 뱀의 몸이 아닌, 인간의 상체에 물고기의 하체가 붙어있다. 인어가 된 것인가!
제 여의주를 삼킨 인간! 그것때문에!
부아가 치밀었다. 그 맹랑하도록 어린 자식 하나 때문에 내 승천도 막히고, 심지어는 인어로까지 지위가 추락해야 하는 건가? 어째서? 심지어는 내 여의주도 그것이 홀랑 물어가지 않았는가.
여의주를 삼킨 그 녀석을 찾으러 가려고 해도, 꼬리가 달린 모양이 이러하니 뭍으로 올라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어린애를 찾지 못하게 하려는 하늘의 개수작임을 뻔히 알았다.
옥황상제의 마음이란 아무도 모른다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고작 그 인간 하나가 무어라고 승천하려던 용을 추락시키고 좌절시키는가? 나의 친우들이 인간들에게 당한 것은 그대로 두고 고작 이것을 두고 좌시하지 않으며 형벌을 내린다고. 하늘의 잣대라는 것은 어느 입맛에 맞춘 작태인가.
열 받은 신수는 익숙하지 않은 몸으로도 분노를 식히기 위해 함영하였다.
캄캄한 밤이 되고서야, 검은 비늘의 인어가 물 위로 솟구친다. 달빛을 받은 흰 피부는 아름답게 빛났으나 눈은 온순치 못하고 형형하다. 내가 죽기 전까지 저 자도 죽지 않고 고통 받으리. 잘 빠진 치열에서 으드득 소리가 났다. 뭍을 노려보던 인어는 수면을 박차고 올랐다가, 그대로 몸을 뒤집어 수면을 뚫고 깊이 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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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기였던, 용이 될 뻔했던, 검은 비늘의 인어가 평생토록 저를 저주하고 있는 것을 꿈에도 모르는 변의주로서는 평범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다섯 살 생일, 자신의 부재로 마을 하나가 발칵 뒤집혀졌던 것은 순간의 악몽이 지나 오래된 웃음 소재거리였지만, 의주에게는 진짜 악몽거리였다.
악몽은 제법 자주 꿨다.
5살 생일날처럼 바다에 별안간 빠지다 못해 처박힌 자신. 발목을 누가 잡아당기기라도 하듯이 자꾸만 바다 깊은 곳으로 끌어당겨지던 몸.
숨 쉬려고 코와 입을 열다가 식도와 기도로 짜디짠 바닷물이 들이차던 공포. 도리 없이 꿀꺽 삼켜내어도 들이부어지고, 가장 필요한 숨은 쉬어지지 않았다. 공기를 찾아 뻐끔대며 물을 토해내도 소용없었다. 공포에 질린다. 호흡을 할 수 없다는 원초적인 두려움. 폐가 짜부러지는 느낌이 들면…
눈이 번쩍 떠졌다.
그 꿈을 꾸고 나면 언제나 식은땀으로 베개가 함뿍 젖어 있었다. 십 몇 년이 지나도 여전한 악몽은 방금 전의 일처럼 생생했다. 터질 듯 뛰는 심장이 너무 요란해서 몸을 세우고 앉아 숨을 고를 때, 꼭 두렵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 악몽을 중화시키는 존재가 항상 함께 나왔으니까.
제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부드러워보이는 흰 몸이면서도, 새카만 비늘의 물고기. 제 허리를 감싼 그 정체 모를 존재는 자신을 구해주었다. 영원히 가라앉을 것 같은 몸이 수면과 가까워진다. 의주의 기억에는 그 흰 몸과 검은 비늘, 그리고 그의 머리칼이 흐릿하게 남아있다. 물에 젖은 머리칼은 어깨에도 닿지 않을 정도로 길이가 짧은 터럭이었지만 그의 목을 가볍게 스치며 아름답게 하늘거렸다.
그 환영을 잊을 수 없어서, 의주는 매끄럽고 미끈한 것이면 좋아하게 됐다. 벨벳을, 대리석을, 우습게도 미역이나 다시마 같은 해조류까지도.
바다에 대한 악몽은 여전해서 의주는 수영을 할 줄 모른다. 바다 옆에 사는 사람은 으레 바닷물에 첨벙 몸 담구며 개헤엄이라도 칠 법한데, 의주는 도통 그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눈이 시리도록 푸르게만 보여도 금방 새카맣게 변해 저를 덮쳐온 바다를 잊지 못했다. 물이 무서웠다. 샤워할 때마저도 눈을 감지 않고 크게 떴다. 목욕도 언감생심이었다.
다만 의주가 물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발을 담그는 것이다.
한여름에도 긴바지를 사수한 옷차림에, 운동화를 벗고 양말까지 벗어 나란히 놓은 뒤, 바지를 살짝 걷어 시원한 바닷물에 담군다. 순식간에 발의 온도가 낮아지며 머리끝까지 번뜩해지는 것이다. 바닷가, 저만 아는 조용한 동굴에서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오는 것이 한여름 의주의 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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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월이 되면 갖가지 인간 귀신만 저승의 문턱을 넘는 것이 아니다. 각종 동물들도 문을 넘어 이승으로 온다. 자신이 살던 주위를 뱅글뱅글 맴돌기도 하고, 자신을 사랑했던 생물들에게 혹은 자신이 사랑했던 생물들에게 닿지 않는 시선을 두고 마음을 두기도 한다.
보통 산 자는 죽은 자를 느낄 수 없으나, 신성한 영수인 왕이샹은 그들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선연하지 않고 어렴풋하게 자신의 주변을 선회하며 제 몸에 가끔은 알랑거리며 치대는 것을 인식했다.
인간의 재미로, 탐욕으로, 더없이 잔인한 방식으로 깊고 파란 바다에 수없이 붉은 선혈을 흘리며 도륙당한 제 가족과 친우들이 가까이에 왔단 걸 알게 되면 이샹은 금방 잔혹하고 광포해졌다. 너울성 파도를 일으켰다. 해일은 규모가 커서 2000해리, 3000해리까지 널리널리 퍼뜨렸다. 풍랑이 일어 선박이 전복되고 항구의 일부가 유실되어 인간들이 괴로워할 때마다 이샹은 불쾌한 승리감에 젖었다. 시원찮은 복수에 대한 졸렬한 패배감이 깃든 탓이다.
그럼에도 들끓는 분노를 어쩔 수 없어 거대한 해일을 일으켰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직 용이 되지 못 했으니까. 여의주를 잃었으니까.
가끔은 애꿎은 파도를 만드는 대신, 원망하는 하늘을 쳐다 보며 욕이라도 한 판 하려고 해수면 밖으로 나오는 일도 있었다. 애도하듯 비가 쏟아지다가 구름이 다 걷히며 햇빛이 바다를 따끈하게 데우고 있었다. 희고 둥실한 곁가지 구름만 동동 떠다니고 하늘엔 거대한 무지개가 떠 있었다. 저런 색의 구름을 타고 올라가려던 적이 있었지.
씁쓸하게 무지개의 모양을 따라가던 중, 그 무지개의 한쪽 끝에 어떤 인간 남자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인간이라니. 부아가 치밀어 오르기 전에 미련없이 등 돌리고 물 속으로 들어가려던 순간이었다. 한 줄기 햇빛이 구름 사이에서 빠져 나와 무지개의 끝을 향했다. 그러자 그 남자의 가슴께에서 대추씨만한 여의주가 번쩍 보였다. 남자가 살짝 몸을 틀자 그 빛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싹 사라지며 여의주를 비추지 않았다.
찰나, 한순간 뿐이었지만 똑똑히 그 색이며 빛을 볼 수 있었다.
분명히 그 꼬맹이가 삼켰던, 제가 놓친 여의주가 맞다.
“찾았어.”
비릿한 웃음이 만면으로 번진다. 삼백안이 위험하게 번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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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샹은 알고 있다. 누구를 찾아가야 하는지. 누가 제 맹랑한 요구를 들어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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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마, 오랜만이야.”
불긋한 나무연질 산호초들에 대고 이샹이 쩌렁쩌렁 인사한다. 듣지 못할 산호초에다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을 청어떼가 흥미롭게 보고 지나간다. 귀가 따로 없는 산호초에다 말을 하다니, 의미없는 행동 같지만, 마치 들은 것처럼 개중 무언가가 작게 꿈찔한다.
이샹은 그 어떤 시선에도 아랑곳않고 후마-, 하고 크게 부른다. 그러면,
“어떻게 알았어?”
산호의 색이 변하며 거대한 문어로 변모한다. 저보다 몸집이 큰 문어를 두고 쫀 기색도 없이 이샹은 씩 웃어보인다.
“문어의 위장도 못 알아보면 내가 왕이샹이겠어?”
“다음엔 더 잘 숨어야겠네.”
“해봤자 중심해수대면서. 만약 심해까지 가면 못 찾을지도.”
“좋은 조언 고마워.”
후마는 이 근방에서 가장 지혜로운 문어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고견을 들으러 후마에게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았다. 지나친 관심이 귀찮아 두문불출하며 칩거하고 사는지라 누구도 그의 행방을 몰랐다. 게다가 변장술의 달인인 문어를 제대로 발견하는 자는 극히 드물었다. 허나 이샹은 번번이 후마를 찾아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뻔뻔하게 요구했고, 조언과 물건을 맡겨놓은 사람처럼 갈취했다.
‘남한테 굳이 관심 가질 필요있어?’ 기조의 후마를 굳이굳이 달달 볶아대는 건, 망나니처럼 뛰놀던 이무기 시절 정말 드물게 뒷목 잡혀 혼나본 경험 때문이다.
왕의 자식인데다가, 추후 왕이 될지도 모를 ‘왕’이샹이다. 그뿐 아니라 몸집을 매일 같이 키워가는 이무기를 굳이 자극하고 싶지 않은 작은 생물들은 다 이샹을 피해다녔고, 어렵게 생각했다. 그러나 후마만은 그렇지 않았다.
단순 흥미로 고등어떼 뒤를 쫓아다니며 장난치던 때였다. 그런 어린 이샹을 본 후마는 긴 다리를 뻗었다. 허리가 문어의 빨판으로 꽁꽁 묶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다리 4개를 써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샹은 맥도 못 추고 후마에게 끌려갔다.
<겁주고 다니지 마.>
매서운 눈을 한 후마를 본 이샹은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 이렇게 혼을 내는 건 아비와 누이 외에 없었다. 좋게 채근하는 사람이야 가끔 있었어도 이렇게 단호한 투로 하지 말라고 하는 생물은 후마가 처음이었다. 단순 흥미는 고등어떼에서 후마에게로 변경됐다.
<이 사람만은 내게 필요한 말을 해주겠군!>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후마를 쫓아다녔다. 어린애다 싶어 몇 번 받아주던 후마는 그게 자주 반복되고, 사고 치고 해결해달라고 쫄래쫄래 오는 것이 귀찮아 이샹의 기척을 느낄 때마다 변장해 숨어 있었다. 그래도 번번이 저를 찾아냈고, 조르고, 청하고, 청구했다. 빚쟁이가 따로 없었다.
후마는 매번 굳이 이무기 인생에 개입한 걸 후회한다고 중얼거렸지만…
“오늘은 무슨 일이야.”
그것도 제 업보라고 생각하고 받아 주었다. 가끔 얌전하게 자기 말을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다거나, 어리광을 피우고 있는 게 귀엽다고 느끼기도 했고.
“나, 다리가 필요해.”
“다리? 나처럼?”
“아니. 인간처럼.”
후마가 입을 쩍 벌리고 황당해하는 모습을 보고도 얼굴 낯짝 한 번 바뀌지 않았다. 이렇게 어안이 벙벙해할 것을 예상했다는 것처럼.
“왜? 어려운 일이야?”
“어려운 일이면, 안 하게?”
이샹이 눈을 찡긋거린다. 어려워도 한다는 뜻이겠지. 자신이 해주지 않아도 분명 어디로든 가서 해내고야 말 것이다. 후마는 부드럽게 다리를 흔들거렸다.
“어렵지만, 못할 일은 아니야.”
“그런데?”
“그 아름다운 비늘을 가진 꼬리를 두고 굳이 뻣뻣한 토막 같은 인간의 다리를 얻어서 너한테 좋은 일이 뭐야?”
검고 윤이 나는 비늘은 빛을 받는대로 푸른빛, 붉은빛, 노란빛, 초록빛 등이 뒤섞여 보였다. 찬란한 색은 아무리 그가 강등된 인어라지만, 하늘이 그를 사랑함을 빤히 보여주는 산물 같았다. 거기서 내려가면 차르르한 비늘과 고급 모슬린으로 만든 것 같은 꼬리지느러미가 우아했다.
그러나 본인은 제 하체에 별 미련 없는 듯 오른쪽 입꼬리만 찔끔 올라가고 끝이었다.
“걔를 찾았어.”
“걔?”
“그 인간 자식 말야.”
아. 후마가 낮은 탄식을 뱉었다.
몸집 잘 키우던 이무기가 승천하는 것에 휘말리다 못해 승천을 막아선 그 주인공. 5살배기 어린 남자 인간. 여의주까지 홀라당 삼켜 버린 통에 이샹이 배를 가르려다 하늘의 미움을 받고 인어로 강등시키게 만든, 불행의 시초를 만든 인간.
“20년이 지나 마침내 복수할 시기가 온 것 같아.”
“그거랑 인간의 다리가 무슨 상관이야?”
“이 몸으로는 뭍에 갈 수 없어. 그러니 그 녀석에게 갈 다리가 필요해.”
사실 이해 못할 이유는 아니다. 바다 아래 모든 생물들은 오랜만에 용이 태어나는 줄 알고 그 순간 모두 고대했다가, 실망을 감추지 못 했으니까. 그렇다면 잠깐 동안 다리가 필요한 건가. 고작 그 꼬마를 죽이기 위해 뭍에 가기 위해? 그걸 위해서 인간이 되겠다고? 거대한 분노의 복수치고 너무 시시하다. 그 어린애를 이제 와서 죽인다고 이샹의 미래가 달라지지도 않는다. 너무 어처구니 없는 복수다.
다르게 생각하길 바라는 마음에 후마가 끙, 소리를 낸다. 뭐라고 해야 안 하겠다고 할까.
“그럼 어려운 일이 되겠네.”
“못해?”
“못할 건 없지. 하지만 너와 그 남자 둘 다 저주를 받을 수도 있어.”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면, 더 좋지.”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유치하다. 이런 미성숙한 왕자님을 어쩌면 좋을까.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에서 인어로 격하당한 데에는 어쩌면 이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 라고 후마는 생각한다. 남의 불행을 감히 헤아리는 편은 아니지만 이유를 가늠해볼 수 있는 것 아닌가.
“너처럼 어떤 초월적 존재가 힘을 담아 뱉은 말은 그대로 실현된다는 걸 잊지 마. 저주를 쉽게 말하지 말라는 거야.”
“쉽게 생각 안 해. 그래서 오히려 좋은 거야.”
지혜로운 문어는 이 생떼 같은 남자와, 그가 짚은 남자가 어떤 과정을 겪을지 빤히 보였다.
그래서 말리고 싶었다. 이건 아니라고 따끔하게 혼을 내며 다른 방법을 생각하라며 궁뎅이를 발로 차 내쫓고 싶은데… 이번 건은 그 정도의 건이 아니다.
제가 아니라면 더 위험한 흑색 바다에서, 더 음험한 것들과 거래할 것이다. 원하는 게 분명하게 있는 저 말괄량이가 자기 팔 하나쯤은 너끈히 내어줄 게 뻔했다. 제 승천에 운 나쁘게 휘말린 인간을 족치려고 무슨 수라도 쓸 것이었다. 싸가지 없기로 유명한 심해 괴수의 대가리에 머리 넣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데, 제 생을 죄 망가뜨린 인간을 만나겠다는 마음이라면 어디까지 내어줄지 가늠키 어렵다.
후마는 결단을 내린다.
“인간의 다리를 만들어 줄 수는 있어. 하지만 조건들이 필요해.”
“뭔데?”
“단순히 인간의 다리를 붙이면 되는 것 같지만, 사실상 종족을 바꾸는 것이라 몹시 복잡해. 물약을 만들 거고, 네게도 내게도 소중한 재료가 아낌없이 들어갈 거야.”
“좋아.”
뭐든 좋다, 좋다 한다. 저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정말 얼마나 험한 것들에게 가서 되도 않는 거래조건을 척척 받아들였을지.
“알고 있지? 나에게 무언가를 받아간다면, 그에 상응하는 값을 주어야 한다는 거.”
후마는 보통 그냥 해주지 않았다. 특히 이샹에게는 마땅한 값을 받았다. 넌 왕의 자식이라 가진 것도 많지 않느냐면서. 이샹은 대부분 투덜거리면서도 매번 적절한 것을 들고 와 물물교환했다. 누군가에게 굳이 빚을 지우고 싶지 않기 위한 배려였지만 이샹에게는 찾아 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하나와, 무엇이건 받는 게 있으면 주는 것이 있어야 함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 하나, 그 외 여러 갖가지 마음이 들어간 이유였다.
“삼지창을 들고 왔어.”
“그건 너희 아버지 거잖아.”
“그래. 그니까!”
삼지창은 용왕의 권능을 나타내는 법기다. 왕에게 내려오는 왕관과도 같다. 그걸 냅다 훔쳐왔다니. 이 어린 뱀을 어떡하면 좋나. 웬만한 것에 자애로운 후마마저 뒷골이 띵하고 뻣뻣해졌다. 살다살다 이런 놈 처음 본다.
“이건 됐어. 왕께 다시 갖다드려.”
“그럼 그 자식 심장과 교환할게.”
“그 인간은 무슨 죄야?”
이샹이 어깨만 으쓱한다. 그래, 모르지 않지. 모르지 않지만 그건 5살배기 어린 애가 뭣도 모르고 휘말린 거잖아. 보통 하늘은 그렇게 어린 애의 업은 업이라고 치지 않아… 하지만 후마도 알고 있다. 본의가 아니어도 불행이 얽히는 법이 있다는 걸. 자신이 단 한 번 간섭했다가 지금껏 이샹에게 휘둘리고 다니듯. 자연재해 같은, 신이 이유없이 내린 재앙을 피하거나 현명하게 대처하는 건 그 인간만의 몫이다.
어차피 이샹이 마음을 먹었다면, 어찌됐든 그 인간의 목숨은 파리목숨이다. 인간 하나의 목숨을 아깝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이샹이 그 목숨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혹은 너무나도 커다랗게 생각하는 것이 신경쓰여서다.
후마는 적당한 선을 제시해줄 요량이다.
“다리를 가진 유효기간은 1년이야.”
“좋아.”
“1년 동안은 그 다리로 살아야 한다는 소리야.”
“흠. 바로 죽이지는 말라는 거네?”
눈치 참 빠르다. 1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생각 외로 정이 많은 이샹이 그 인간을 죽일 수 있을까? 후마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1년의 유예기간 동안 이샹이 다른 결정을 내리길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죽여 복수한다면, 그건 이샹의 뜻이자 운명인 것이다. 그렇다면 후마도 더는 말릴 수 없는 것이겠지.
“그 뒤에 넌 그 인간의 심장을 가져와.”
“좋아.”
“네게 만들어준 인간의 다리를 다시 없애고 지금의 꼬리로 되돌리려면, 인간의 심장이 필요하니까.”
“좋아.”
“만약 1년 뒤 그 인간의 심장을 가져오지 못하면 네 심장을 가져와야 할 거야.”
“걔가 죽거나, 혹은 내가 죽거나 둘 중 하나라는 건가?”
“맞아.”
다른 종족의 몸을 붙이는 것은 위험이 따르고, 설령 바꾼다 한들 그의 수명이 깎이는 것과 진배없다. 긴 시간 동안 멀쩡하게 기능할 리 없다. 후마는 엄숙한 표정을 지어냈다. 나름대로 겁을 주려는 행동이었다.
“어렵지 않네. 거래하자.”
그에 비해 산뜻한 대답이 돌아온다.
“인간은 사랑을 심장에 비유한다고 해. 그러니 그 인간이 너에게 사랑에 빠지게 한다면…”
“더욱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되겠네. 좋아.”
후마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을 더해도 안 되겠다. 거대하고 오목한 팟을 꺼내 들었다. 인간의 다리로 바꿔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곰곰이 떠올리며 제가 갖고 있는 재료들을 탈탈 털었다. 이샹은 옆에 딱 붙어 서서 재미난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가, 후마가 제 다리 두 개를 툭 떼어내 냄비에 넣자 비명을 꽥 질렀다.
“뭐해?!?”
“재료로 다리가 필요해. 날카로운 양날검처럼 잘 듣는 약을 만들려면 내 다리가 필요하거든.”
“후마 다리를? 그럼 후마 다리는?”
좀 골려줄까 했는데, 안절부절 못하는 걸 보니 또 마음이 약해져서는.
“괜찮아. 다시 자라니까.”
상냥하게 대답했다.
“난 또.”
이런 답이 돌아올 줄 알았으면 분명 1시간은 골려주었을 텐데! 제 살까지 깎아가며 만드는 중인데 말이다. 심드렁한 소리에 열이 뻗친다. 이렇게 철 없는 남자라면, 분명 그 인간남자는 사랑을 느끼지도 못할 테고 이샹의 사랑도 얻어내지 못할 것이다. 이 녀석 입이 문제다, 입이. 생각하다가 번뜩 좋은 생각이 들었다.
사실 물약에 정말 좋은 재료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네 혀도 필요할 것 같아.”
“뭐?”
“그 분홍빛의, 뾰족한 혀를 조금 다오.”
입술을 축이던 혀가 쏙 들어간다. 이샹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후마는 아무렇지 않은 듯 덧붙였다.
“시간이 지나면 돌아올 거야.”
이샹이 씩 웃는다.
“그렇다면 얼마든지.”
-
“이샹, 너 말 안 하니까 진~짜 귀여운데?”
“……”
“혀가 아니라 목울대를 달라고 할 걸 그랬어!”
삐죽대는 주제에 혀가 잘린지라 말은 못 한다. 불퉁한 얼굴로 불만 가득한 모습을 보며 후마는 오래간만에 소리내어 깔깔 웃었다. 학학학. 학학학학! 말을 할 수 없는 이샹은 자신이 입만 꿈뻑이고 있단 걸 알고 불만족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몇 번이나 후마가 깔깔 웃고 나서야 완성된 물약을 건네주었다. 검은 타르처럼 끈적해 물 같지 않았다. 마시면 꼭 죽을 것 같은 모양새. 잠깐 병을 바라보던 이샹이 단숨에 약을 삼켰다. 약은 말도 안 되게 쓰고 구역질이 났다. 온 인상을 다 찌푸리고 간신히 목구멍 뒤로 삼켰다.
그러자마자 아랫도리 비늘들이 하나둘 싹 사라지고, 반이 갈라지며 다리의 모습이 생겼다. 상체와 똑같이, 흰 상아빛에 장밋빛이 감도는 색의 하체가 생겨났다.
이샹은 영 껄끄러운 얼굴로 제 다리 사이를 쳐다 보았다가,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데?”
혀가 잘려 가타부타 말할 수 없는 이샹이 입을 쭈욱 늘렸다.
인간의 다리를 해 헤엄이 불편한 것을 알고, 후마가 공깃방울을 훅 불어주었다. 동그란 공깃방울은 금방 커져 니콜라스의 몸을 가뿐히 감쌌다. 이제 인간세계로 떠나야 할 시간이다. 후마는 웃음기가 가신 얼굴로 눈을 맞추었다.
“잊지 마. 정해진 날까지 그 인간의 심장을 가져와야 한다는 걸.”
그깟게 뭐 어렵다고. 나도 인간들처럼 작살을 쓰지 뭐.
그렇게 생각했지만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이샹이 준비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후마가 다리를 부드럽게 펼쳐 공깃방울을 잡고 수면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가볍게 튕겼다. 하지만 그 공깃방울이 데굴데굴 몇 바퀴씩 회전하는 건 후마의 계산에 없었다. 이무기의 권능을 잃은 이샹 역시 어찌할 도리 없이 우엑, 우엑, 굵고도 갸냘픈 소리를 내며 어지러움에 시달렸다.
“어이구, 미안, 미안! 으학학학!”
…1년 뒤에 내가 복수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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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깊은 곳에서 수면으로 올라오기까지 수백 미터 내내, 공깃방울은 끊임없이 회전했다. 그 안에서 이샹은 계속해서 데굴데굴 뒹굴었다. 그 탓에 정신이 혼미하다 못해 반쯤 혼이 나가 있는 상태였다. 어지럽다 못해 속에 든 내장이 다 꼬인 것 같았다. 차라리 공기방울을 깨고 오래 걸려도 수영해야겠다 했는데. 어찌나 견고한지 주먹으로 퍽퍽 내리쳐도 깨지지 않았다. 무슨 수를 써도 금 하나 가지 않았다. 바다로 다시 돌아가면 후마 다리를 또 뽑아버릴 테다, 다짐하며 우웩 우웩, 헛구역질을 했다.
영겂 같은 시간이 지나고 수면에 공기방울이 떠오르자, 언제 그런 공기방울이 있었냐는 듯 그대로 팡! 깨어졌다. 일부러 물 밖에 나올 때까지 깨지지 않게 한 모양이었다. 다만 이게 장난인지 배려인지 가늠키 어려웠다. 후마는 일전에 인간들의 항구에 줄줄이 서 있는 배에 잔뜩 달린 전구에다 물을 뿜어 깨뜨리는 장난을 치곤 했다. 그 덕에 배 수십 척을 망가뜨린 전적도 있다. 그뿐이랴, 뻔뻔한 얼굴로 거짓말도 엄청나게 했다. 이게 뭐든 가만 안 두겠어. 이가 으드득 갈렸다.
짜증이 머리 끝까지 났지만 이미 손발은 몸의 통제를 잃었다. 손 하나 까딱할 기운이 없었다. 처음 겪는 현기증과 두통, 현훈에 흰 나신이 파도에 휩쓸렸다. 이샹이 정신을 잃건 말건 여전한 파도에 떠밀려 작은 동굴까지 왔다.
해식용굴의 평탄한 바위까지 가서도 이샹은 졸도한 사람처럼 누워 있었다.
마침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러온 변의주가 새된 소리를 내지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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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태어난 새끼 기린처럼 걸음마저 추스리지 못하는 남자를 허둥지둥 부축한다. 집까지는 멀지 않았지만 이런 느린 걸음으로는 그래도 시간이 꽤 걸릴 테다. 말도 하지 못하는, 무섭게 생긴 남자를 제 집으로 데리고 가는 게 맞을까. 의주는 하얀 남자를 힐끔거리다 눈이 마주친 뒤, 더는 흘긋거리지 못했다. 저를 보는 빤한 눈빛이 부담스럽다.
한 쪽이 말을 못 하니 저라도 말을 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휩싸였다. 남자가 말을 알아듣건 아니건 뭐라도. 의주는 아무 말이라도 했다.
“마침 그쪽…이 누워 계시던 동굴에 제가 가서 다행이에요. 평소에 너무 덥지만 밖에 있고 싶을 때에는 그곳에서 발을 담그고 있거든요. 혼자서요. 사람들은 그 동굴에 자주 가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다가 문득, 자신이 없었다면 이 남자는 이렇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로 바다에 누워있다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하얀 몸이 시체가 되어 새하얗게 죽어있는 상상을 했더니만 소름이 쫙 끼쳤다. 정말이지 마침 제가 발 담그러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임감을 등에 업고 의주는 조심스럽게 걸었다. 집까지는 인적이 드물어 이렇게 벌거벗은 남자를 아무도 못 본다는 것도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의주는 옷장을 뒤져 가장 깨끗한, 남자에게 맞을만한 옷을 골라 꺼내주었다. 그 동안 남자는 멀거니 서서 눈만 꿈뻑 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옷을 건네는데도 받아들 생각이 없었다.
그뿐이랴. 남자는 어찌된 게 옷을 입을 줄도 몰랐다. 흰 알몸으로 아주 당당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을 뿐이다. 옷 입으시라고 몇 번이나 말하다가, 애꿎은 옷을 주물럭거리고, 목구멍에다가 손 집어넣고 놀고 있는 모습을 보고 복장이 다 터졌다. 의주는 울며 겨자먹기로 남자에게 옷을 입혀주었다. 입자마자 불편해하며 당장이라도 벗으려는 남자 허리를 붙들고 몇 번이나 안 된다고 소리쳤다. 고양이한테 옷 입히는 집사처럼 싹싹 빌어야 했다.
실갱이에 지쳐 배가 고팠다. 남자도 그렇겠거니 싶어 밥을 차려줘도 수저 하나 제대로 들 줄 몰라 손을 고쳐주었다. 도대체 어디서 온 남자지?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속세에서 영 떨어져 있었던 건가? 남자를 주워온 거, 이거 처음부터 잘못된 생각이었나?
사실 남자를 데려온 건 충동적인 일이다.
평소라면 몇 번이고 숙고했을 테지만 말도 못 하는 나체의 남자를 두고 돌아설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나. 그리고 남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맥동하는 심장이 너무 선연히 느껴졌다. 운명을 믿지 않는 제 평소 신념이 툭 꺾일 만큼, 아주 크게 뛰었다. 목을 덮는 새까만 물미역 같은 머리칼에 한 번 마음이 동했고, 무어라 말을 하려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지 목을 부여잡으며 지은 쓸쓸한 표정에 한 번 마음이 동했다.
그래도 한 시간만에 이렇게 제 속을 썩이는 남자인 줄은 몰랐지. 의주는 양치질로 또 한바탕하다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바닥에 털썩 앉아 남자를 올려다 보았다.
“진짜 어디서 왔어요?”
남자는 말없이 바다를 가리킨다. 밀입국하다 걸린 건 아니겠지. 대만해협은 안 그래도 전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교통로라 갖가지 배가 다니고 사람들이 지나다닌다. 불법적인 루트로 온 건 아니겠지. 제발. 날선 삼백안과 마주치는 순간 삼합회 같은 무시무시한 것이 떠올랐으나, 아무리 그래도 옷도 못 입는 깡패가 어딨어. 밥도 못 먹는 마피아가 어디 있냐고. 가오는커녕 생존이 안 되잖아.
그래도 말을 아예 못 알아듣는 것은 아닌 것 같아 안심이 됐다. 어느 정도는 알아듣는 것 같다. 어떻게든 손발 섞으면 의사소통할 수 있을 것 같다. 근데 말은 알아들으면서 왜 옷 입는 것도, 수저도 쥘 줄 모르는 거지? 더더욱 의문스러웠지만 이렇게 지나칠 정도로 1세, 혹은 3세 같은 남자를 다시 집 밖으로 내보낼 수 없었다. 무슨 일을 당하려고. 이 집에 남자를 들일 때부터 이미 뭔가 어긋난 것이다. 다정한 제 마음은 이 남자를 내칠 수 있을 리 없다.
의주는 벌써 훤한 고생길 앞에서 잠깐 묵념한 뒤 고개를 들었다.
남자의 이름부터 정해주어야겠다. 무엇이 좋을까.
문득 어제 보던 영화의 주인공 이름이 떠올랐다. 니콜라스. 더 좋은 이름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이미 옷 입히고 밥 먹이느라 너무 지쳤다. 더 떠올리며 고민하고 싶지 않아 의주는 얼렁뚱땅 결단을 내리고 통보한다.
“니콜라스라고 부를게요.”
멀쩡한 왕이샹이라는 이름을 두고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았다. 니콜라스. 이샹은 1년 간 살아갈 이름으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끄덕였고, 이샹은 의주 앞에서 니콜라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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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 간, 의주는 정말이지 눈코뜰 새 없이 니콜라스를 케어하느라 바빴다. 그나마 성인이라서 그런지 습득력이 빠른 편이긴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알려주어야 했다. 어릴 적 보았던 영화 늑대인간과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야생에서 갓 건져온 인간을 케어하는 기분이랄까.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남자를 어디에라도 신고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다가도 이 정도로 인간세계를 모른다면 신고하고 나면 이 남자가 어딘가로 잡혀갈 것 같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논문을 위한 실험체처럼 쓰이고, 사진이 찍히고, 그의 행동양식 모두가 흠이 잡히고 활자로 기록될 게 뻔했다. 예민한 고양이처럼 발톱 세우는 남자에게 얼마나 스트레스가 될지. 의주는 기꺼이, 혹은 울며 겨자먹기로 독박육아를 선택했다.
거기다가 조금 불편한 걸 더하자면.
니콜라스는 매번 눈을 빤히 맞춰왔다. 누군가가 이야기할 때 저도 눈을 맞추는 버릇이 있지만 그 지긋한 눈맞춤은 속을 어지럽게 했다. 심장이 고요할 날 없이, 안에 무언가가 들어 진동하는 것처럼 쿵덕거렸다. 그게 호감이라기보다는 제 안의 무언가를 들여다보려는 시도 같아 보이기도 했지만... 어찌되었건 의주는 제 심장이 멋대로 빠르게 뛰는 이 빈맥을 무어라 지칭할 생각은 당분간 없었다. 아직은… 모르지 않는가.
게다가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니콜라스를 위해 산 침대와 침구류가 배송되기 전까지 같은 침대에서 자는 게 나을 것 같아 제 침대에 재웠다. 다행히 침대가 작은 사이즈는 아니라 둘이 어깨를 딱 붙이고 자면 그런대로 조금 여유공간이 남게 잘 수 있었다.
문제는 같이 자는 게 문제가 아니라, 니콜라스가 옷을 훌러덩 벗고 자는 거였다.
“제발, 제발 옷 좀 입어요!”
바다에서 당연히 맨몸으로 지낸 이샹은 불편하게 옷을 입어야 한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일어난 후에야 어찌 되었건 인간세계에 섞여보겠다고 옷을 주섬주섬 입었지만, 잘 때만큼은 옷을 훌렁훌렁 벗어제꼈다. 성기와 맨몸을 보이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지 않는 해양생물을 의주가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잘 때 벗고 자는 것만큼은 도통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이불도 덮지 않으려 했다. 속옷만큼은 입으라 사정해 그것만 하나 걸치고 고롱고롱 잠도 잘 잤다. 의주만 매일 밤마다 뜬눈으로 제가 들여온 제 불행을 곱씹었다.
이러니까 심장이 남아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직은 명명할 수 없다. 이 빈맥을. 어쩌면 빈맥이 아니라 고혈압인지도 모르지. 색색 잘 자는 반라의 남자 옆에서 한숨만 늘어난다. 의주는 이마에 손을 올려놓고 길고 긴 한숨을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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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샹이 어느 정도 인간세계가 익숙해지고, 참을성 있는 변의주 선생님 덕에 글자와 인간의 말을 깨치었을 무렵. 후마가 잘라갔던 반토막의 혀가 자라나며 말도 조금은 할 수 있게 되었다. 일방적인 의사소통에서 쌍방으로 천천히 바뀌며 둘의 관계도 서서히 변화했다.
“혀를 다쳤었나요?”
“응.”
말을 아예 하지 못하는 줄 알았는데 성대가 다치지 않은 거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말을 잠깐 잃은 거구나. 그런 것치고 너무 말을 모르긴 하는데… 어찌 되었건 이 남자를 품고 가기로 결정한 이상 그의 의문점을 너무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
다만 이 남자의 말이 자꾸 짧았다. 존댓말을 가르쳐주지 않은 것도 아닌데 매번 반말이었다. 왜 말이 짧아요… 물으면 이샹은 잠깐 생각하다 대답했다.
“말, 길게 어려워.”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혀를 막 가리키는 것이다. 존대를 왜 안 쓰냐는 뜻으로 말한 것이었는데. 아마 혀가 아직 다 낫지 않았다는 뜻이리라. 의주는 민망함에 상기된 볼로 다시 말한다.
“존댓말보다 반말이 편해요?”
“응. 너도.”
나도 그렇게 하라는 건가. 나이도 가늠하기 어려웠고, 니콜라스 스스로도 자신의 나이를 답할 줄 몰랐다. 동년배처럼 보이는데 싶어 멋대로 동갑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7월 9일에 떠밀려왔으니 생일도 7월 9일로 지어준 참이었다. 내 생일이랑 반대네.
“그래. 하자, 반말.”
의주에겐 내심 큰 도약이었는데 니콜라스는 신경도 안 쓰고 고개나 끄덕였다. 쳇. 오기가 생겨 손을 내밀었다. 이제 우린 친구야. 이샹은 그 손을 물끄러미 보다, 답싹 잡아 제 몸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래, 나의 오랜 적이여.”
“적이 아니라 벗이야.”
“적.”
“...그래.”
왜 저렇게 뚫어질 듯 그윽하게 날 볼까. 일부러 맞는 말로 고쳐주어도 끝끝내 발음하지 않는 고집쟁이면서. 왜 저런 눈으로 날 보는지. 공연히 마음이 술렁거려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몇 주 더 지나 니콜라스의 의사소통이 상당한 수준이 되면서부터 의주는 집에서 나와도 될 것 같다고 판단했다. 아무리 천둥벌거숭이 같은 남자라도, 정말 아기처럼 하나하나 알려주어야 해도, 집에만 가둬놓고 키울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의주의 동반 하에 산책을 종종 가곤 했다. 심해처럼 어두운 곳이 익숙한 이샹은 밝은 아침에 취약해서 보통 일어나지 못 했다. 그래서 아침 산책은 포기하고 점심 즈음, 혹은 저녁이나 밤에 바닷가나 인근 둔치, 언덕배기 등을 다녔다.
대만 작은 시골에 사는 외국인 변의주가 데려온 외국인 이샹은 어딜 다녀도 주목을 받았다. 정확히는 외국인이 아니라 대만해협 거주 불시착 어인이었지만.
“얘가 니콜라스인가?”
“네, 맞아요. 니콜라스.”
“만나서 반갑네! 앞으로 자주 보자고.”
목표물인 변의주 말고는 인간이랑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은 이샹은 의주 등 뒤에 숨어 인간을 경계했다. 다들 바다를 끼고 사는 만큼, 제 가족을 죽인 자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 때문이었다. 그럼 의주만 식은땀을 흘리며 니콜라스 대신 대답을 해주고 다녔다. 의주는 마을 사람만 보면 더욱 의존적으로 구는 게 의아하기도 하고, 귀엽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힘이 들어도 제 존재가 니콜라스에게 꽤 큰 안정을 준다는 게 어떤 효능감을 주기도 해서, 키우는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며 웃기도 했다.
그 밖에도 이샹은 땅에 자라는 것,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을 신기해하고 궁금해했다. 집을, 창문을, 민들레를, 벽돌을, 전봇대를, 바닥에 버려진 찌라시를, 오토바이를, 헬멧을, 포스터에 그려진 키티를. 작은 시골마을이라 대단한 것 무엇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니콜라스가 묻는 것은 수백, 수천 가지나 되었다. 이건 뭐야? 저건 뭔데? 묻는다. 그러면 의주는 유치원 선생님이 된 것처럼 하나하나 알려주었다. 뭐든지 새롭고 신기한 니콜라스의 시야로 보면, 모든 것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사물의 이름이 무엇인지, 사람들이 그렇게 명명한 이유는 무엇인지, 그 활용은 어떤지를 설명해주느라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모든 것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하루하루 작은 기쁨과 행복을 찾아낼 줄 아는 의주에게 더욱 황홀하고 아름다운 순간들이었다.
그러나, 그래서 금방 지치기도 했다. 보는 것마다 물어보니 답해주다 보면 끝이 없었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수십 개를 알려주다가 진이 쏙 빠져 니콜, 그만 들어가자. 고 말한 것이 몇 번이나 됐다.
하지만 또 의외로, 이샹이 인간세계를 더 잘 알게 되고, 어휘력이 늘며 생각 외로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있지, 니코. 너도 꿈이 있어?”
“꿈?”
“응. 잠 자는 거 말고, 목표라고 해야 하나. 이루고 싶은 거.”
“있지.”
“뭔데?”
“하늘 올라가는 거. 비상.”
용으로의 승천이라는 뜻임을 알 턱이 없는 의주는 빙그레 웃는다. 대신 턱 끝을 조금 들어 하늘을 본다. 이샹도 그 시선을 따라 하늘을 보았다. 오늘따라 유독 하늘이 공활하다. 구름 한 점 없이 탁 트여 푸른 빛을 냈다. 이샹은 바다의 푸른빛과 하늘의 푸른빛이 다른 걸 항상 신기하게 생각했다. 아니, 무척이나 다른 색을 인간들은 모두 푸르다로 부른다는 게 신기했다.
“나도, 나도 그래.”
“너도?”
너도, 승천이 꿈이라고? 이샹이 조소한다. 좌절한 이무기의 눈이 번쩍 뜨였다. 나쁘게 뜨인 눈을 모르고, 의주는 동그란 눈을 빛낸다.
“난 하늘 너머 우주! 우주를 가보는 게 소원이야.”
“우주?”
“응.”
“하늘 위에, 뭐가 더 있어?”
하늘을 보던 의주가 시선을 뚝 꺾어 이샹을 쳐다 봤다. 황당한 표정. 우주라는 개념을 모르는 이샹으로서는 그 반응이 더 당황스러웠다. 왜? 하고 반문하면 의주는 입꼬리가 비뚜름했다가, 금방 다시 눈을 순하게 떴다. 그리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니콜 넌 진짜 어디서 왔는지 가끔 궁금할 때가 있어.”
바다 깊은 곳에서 너를 죽이려고 왔다 말할 수 없는 이샹이 입을 고집스레 다문 동안, 의주는 모래사장에 손가락으로 쓱쓱 그림을 그린다.
“여기가 땅이면 이 위는 하늘인데, 대기권 성층권… 이렇게 대기가 있고, 그 위부터는 지구가 아닌 우주야. 지구의 영향력 밖의 공간인 거지. 무지무지하게 넓대.”
“바다도 엄청 넓은데.”
용왕의 아들이 하는 바다부심을 알아채지 못하고 의주는 그냥 넘어간다.
“바다보다 더 넓어. 엄청엄청. 바다는 비교도 안 되게, 이 커다란 세계도 지구도 아주아주 작아서 이 모래알갱이보다 작을 정도로. 이 모래 알갱이 하나가 지구라고 하면 이 넓은 모래사장이 우주인 거야. 얼마나 큰지 알겠어?”
“넓어서 가보고 싶은 거야?”
“궁금해. 그 넓고 캄캄한 우주엔 뭐가 있는지.. 외계인이 있는지 궁금해. 그렇다면 난 얼마나 작은 존재일지도.”
넓고 캄캄한 심해는 궁금하지 않아? 너희 인간들 잣대로 100미터는 족히 넘는 두족류가 빛 한 점 들지 않는 곳에서 유영하는 모습이, 그 사이에 점조차 되지 않을 너란 존재는 이 바다의 왕이 되었을 나라는 이무기를 좌절시키고, 그의 생에 빠져서는 안 될 거대한 존재라는 거, 다 궁금하지 않아?
이샹은 하고 싶은 말을 꿀꺽 집어삼켰다. 동그란 눈에 담긴 꿈을 굳이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건 자신의 좋은 마음인지, 나쁜 마음인지 알 수 없었다.
-
조금 더 의사소통이 원활해지고 나서는, 이샹은 어디든 종횡무진했다.
금지된 것은 무엇이건 좋아했다. 공사장 외벽에 붙은 ‘들여다보지 마시오!’를 보면 무조건 들여다 보았다. 다리를 달달 떨길래 의주가 하지 마, 하면 꼭 의주를 쳐다 보면서 한 번 더 했다. 나를 긁는 건가? 가끔은 그렇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꼭 어린애 같아서 한숨이 푹푹 나왔다. 긁는다기보다는, 자신이 어디까지 행동해도 되는지 선을 가늠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커다란 어린애를 키우는 거다. 육아 중인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대했다. 하지만 불쑥 억울했다. 니콜라스 몸을 봐. 완전히 다 큰 어른인데!
의주는 하지 마, 하지 말랬다, 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고, 그래도 달려가고 해보고 마는 이샹을 힘 없는 주먹으로 때리는 것은 습관이 됐다. 매번 칠렐레 팔렐레 뛰어다니는 거 뒷덜미 잡아끌고 다녔다. 사고뭉치다 싶었는데, 그러다가 한 번은 목숨까지 달랑달랑할 만큼 위험한 짓을 했다.
집에서 40분 쯤 걸으면 나오는 어두컴컴한 산이 있었다.
보기만 해도 등골 으스스한 숲에는 출입금지 팻말이 커다랗게 걸려있었다. 매번 그 근방을 지나쳤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음기가 가득한 탓인지 오히려 눈에 거슬리지 않고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이샹이 별안간 그 팻말을 읽었다.
“출-입-금-지.”
“어?”
나는 금지된 모든 것을 욕망하고 소원한다, 의 이샹은 곧장 저 숲이 궁금하다며 의주가 잡은 손을 놓고 뛰어갔다. 신체능력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샹이 저를 놓자마자 식겁해서 달음박질을 해도 니콜라스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다들 가지 말라고 한 금지된 숲인데. 금지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고 숲은 위험할 텐데. 제 눈앞에서 사라지면 니콜라스를 찾아 숲을 샅샅이 뒤져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꼭 그만큼 무서워서 눈물이 났다. 니콜 너 왜 이렇게 날 힘들게 해애. 울음 참고 니콜, 니콜 외치면서 등을 쫓았다.
이샹은 의주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숲을 휘젓고 다녔다. 못 가게 할까 싶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집에 돌아가면 정말 쥐어 박아줄 거야. 그러면서도 아예 멀리 도망가지는 않고 뒤를 힐끔힐끔 보며 의주가 있는지를 확인했다. 멀어진다 싶으면 멈췄고, 가까워진다 싶으면 멀어졌다. 팽팽하게 줄다리기하듯이. 그래도 의주의 시선 끝에 잘 남아있는 게 기특하기도 했다. 내 생각을 하긴 하는구나, 네가.
조금 마음이 놓여 의주도 이샹을 감시하면서도, 이샹처럼 금지된 숲을 구경했다.
금지된 숲은 겉보기와 달리 완연한 늦여름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잎이 두터운 고무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이름 모를 아름다운 깃털의 새가 예쁜 울음소리를 냈다. 사시사철 따뜻한 햇빛을 아름답게 받아 초록빛 잎은 기어코 하얀 색으로 보이기도 했다. 주변에 알알이 주홍의 열매가 달려있기도 하고, 보랏빛 야생 수국이 아름드리 피어 있기도 했다. 만지지 않아도 촉감이 느껴질 정도로 차르르한 빛의 털을 한 잿빛 토끼가 깡총깡총 뛰어다녔고, 바위 위에서 다람쥐가 야무지게 도토리를 까먹고 있었다. 총천연의 색이 가득했다. 무척 예뻤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야생의 숲이 보여주는 속살은 몹시 아름다워 의주는 이샹을 깜빡 잊어버릴까 봐 의식적으로, 억지로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잠깐 분홍빛 이름 모를 꽃에 정신이 팔렸다가 고개를 돌렸더니, 이샹이 어디 주저 앉아 있었다. 뭔가 싶었더니, 시뻘건 독버섯에 코를 박을 듯 관심을 주고 있다. 포자가 몹시 새빨간 것이 완전 수상한데! 저거 먹으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의주가 일단 냅다 소리질렀다.
“먹으면 안 돼!”
니콜라스는 버섯에서 고개를 떼며 뒤를 돌아보았다. 뜻밖에도 몹시 심드렁한 얼굴이었다.
“내가 바보야? 이런 거 딱 봐도 먹으면 죽어.”
안심이 되는 건지, 황당한 건지. 몸에 기운이 쪽 빠졌다. 그나마 생존에 관련해서는 본능적으로 아는가보지. 다행이다. 밥 먹는 법도 모르는 남자가 어디부터 어디까지 아는지 이럴 때마다 가늠하기 너무 어려웠다. 어떤 때는 다 산 사람처럼 턱, 턱 지혜로운 답을 내놓다가 어떤 때는 이렇게 금지된 숲에 칠렐레 팔렐레 뛰어가기도 하고. 밥 먹을 줄을 모르길래 정말 어린애처럼 자신이 배고픈지 배부른 지도 모를까 싶어 알려주려고 하면 그걸 누가 모르냐는 얼굴을 하며 고개나 젓고. 정말 알기 어려웠다.
어디까지 된다 안 된다 말해줘야 되는 걸까. 이건 알고 왜 금지된 숲에 가지 말아야 한다는 건 모르는 건데. 천천히 걷자 앞선 니콜라스도 천천히 걸었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금지된 것치고 꽤 평화로워서 의주도 말 않고 그의 뒤를 따라 느긋하게 걸었다.
그러다 묵중한 발걸음 소리가 나길래, 금지된 숲이지만 니콜이나 나처럼 또 이 곳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구나 했다. 설마 날짐승의 소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 했다. 소동물이나 고작 구경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가장 안일한 순간에, 앞에 나타난 것은.
흑곰이었다.
그래서 출입금지된 숲이구나.
다들 안 가길래 그런가보다 하고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왜 금지인지는 궁금해한 적 없었다. 하도 인적이 없고 아무도 가지도 언급하지도 않아서 정보가 하나도 없었다. 다들 어련히 알아서였나. 미리 여기가 어떤 곳인지 알았어야 했는데! 어떻게든 니콜라스를 붙들고 집에 갔어야 했는데!
흑곰과 눈이 마주쳤다. 표정도 없는 무심한 눈은 분명 저를 바라 보고 있다. 전신이 얼어붙는다. 흑곰 역시 의주를 보다가, 이샹 쪽을 돌아 보았다. 발이 바닥에 딱 붙은 듯 움직일 수 없었다. 팽팽한 대치상황. 의주는 가까스로 입술을 떼었다.
“니콜… 이리 와. 어떡해, 어떡하지. 큰일났다.”
“그리 가라고?”
“그럼 곰도 움직이려나? 일단 거기 있어 봐. 어떡해. 곰은 사람을 찢는단 말야.”
“아. 그래?”
긴장되어서 미치겠는데 대답이 영 신통찮았다. 니콜이 갑자기 움직이면서 도발해서 곰이 달려들면 어떡하지. 곰은 나무도 잘 탄댔는데 나무 위로 올라갈 수도 없고. 죽은 척해도 될까? 아니야. 죽은 시체도 먹는 잡식성이라고 어디선가 봤던 것 같은데. 변의주 인생 여기서 끝인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니콜라스가 먼저 잡아먹히면 어떡하지. 난 그걸 보면 더더욱 도망치지 못할 것 같은데. 당장이라도 공포로 울음 터질 것 같으면서 머리가 오히려 차가워졌다. 가장 빠른 퇴로가 어딜까. 죽어라 뛰면 어떻게든 도망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 순간 이샹이 낮은 소리로 그르렁댔다.
짐승 소리를 따라하는 건가. 하울링 같은 거? 그런 걸 하더라도 보통 흑곰이 이기지 않나? 흑곰이 누구랑 싸워야 질까? 웬만하면 이길 것 같은데? 의주가 곰과 이샹을 번갈아보면서 숨을 죽였다. 여차하면 튀어! 라고 소리치고 뛸 준비를 했다.
그러나 의외로 흑곰이 순순히 등을 돌려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신수인 이샹의 말을 들은 것이다. 뭍짐승에게도 통하는구나 싶어 이샹은 어깨가 으쓱했으나 그걸 인간인 의주가 알 리 없었다. 곰이 아주 멀리 떠나간 뒤에야 의주는 참았던 숨을 뱉었다. 숨을 참았던 탓인지, 산소가 부족한지, 긴장이 풀려선지 머리가 띵하고 어지러웠다.
“죽을 뻔했어.”
“괜찮아. 흑곰 갔어.”
“돌아가자.”
“흑곰 갔는데?”
“집에 가.”
의주는 여전히 생과 사를 넘나든 공포로 다리가 후들거렸다. 손도 잘게 떨리고 있었다. 얼른 이 숲을 떠나고 싶었다. 흑곰을 우연히 피했지만, 여기 어떤 야생동물이 또 아가리를 벌리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당장 제 안전한 집에 가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고 싶다. 감각들이 너무 날이 서 있어서 감정을 다스리기 어려웠다. 니콜라스에게는 당장 제 옆으로 따라 붙으라고 소리쳤지만, 이샹이 오건말건 상관치 않았다. 후들대는 발걸음을 재촉해 산 아래로 내려갔다. 이샹은 흑곰을 만났는데도 집에 갈 마음이 없는지 잠깐 망설이다가 결국 의주 옆으로 뛰어왔다.
“그래도 재밌었지.”
제 눈치를 보며 팔에 달라붙는다. 재밌었냐고? 흑곰을 만난 게 뭐가 재밌어! 아직도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의주가 입을 꾹 다물고 이샹을 야멸차게 무시했다. 내가 가지 말라 그랬는데. 오라 그랬는데. 하지 말라고 했는데. 제 말 하나도 안 듣고 팔랑팔랑 가다가 목숨 달랑달랑했다는 게 미웠다. 그러면서도 니콜라스를 잘 어르고 달래서 위험을 목전에 두고 숲을 빠져나왔어야 했다고 자책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어찌저찌 살아 돌아가지만, 흑곰이 마음을 다시 돌려 자기들에게 돌진했다면 지금도 살아있을지 장담할 수 없지 않나.
집에 가는 내내 의주는 말이 없었고, 이샹은 입 속의 혀처럼 굴려고 애를 썼다.
집에 도착하고도 의주가 말을 하지 않자, 이샹은 냅다 허리를 끌어안고 몸을 부벼왔다. 몸의 대화에는 아까보다 몸이 더 얼어붙었다. 놓으라는 뜻으로 몸을 비틀어도 저를 죈 팔에 힘만 더 들어가 움직일 수 없었다. 그제야 입을 열었다.
“놔, 놓으라구…”
“미안해, 미안해, 의주.”
“놔…”
“나 때려도 돼. 미안해.”
“내가 널 왜 때려…”
어깨에 이마를 부비며 애교를 피운다. 제 눈치를 보며 되는 대로 예쁜 짓을 하려고 하는 데에 마음이 풀리기는 해서, 의주가 가볍게 이샹을 밀어냈다.
“알겠으니까 위험한 짓 좀 하지 마.”
알겠어, 라고 대답했지만… 니콜라스가 그럴 리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잘 단속해야지. 구슬픈 마음으로 다짐했다. 실제로 그 정도는 아니어도 이상한 짓을 많이 했고, 의주에게 많이 혼났다.
-
노름판에서 돈을 다 잃었다며 돈을 달라고 당당하게 거죽 두터운 손바닥을 내밀기 전까지는 참을만 했다. 하지만, 세상에, 노름이라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돈이라고 니콜라스에게 준 건 많지 않긴 했다. 야시장 가서 띠과쵸 먹고 오겠다길래 적당히 쥐어준 몇 푼이 다였지만 그래도 그걸 노름판에서 마작에 홀라당 쓰고 와? 심지어는 돈까지 빌려서 했다가 잃고 왔다는 것이다. 마작도 해야 하고 빚도 갚아야 한단다. 그러니까 돈을 달란다.
의주는 정말 오래간만에 화가 났다.
뱃속에서 뭐가 들끓는 것이 느껴졌다.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했다. 하지만 이샹은 도박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나. 설명해줘야 하는데, 그래도 세상에 금지된 걸 아무리 욕망하기로서니 어떻게 도박판까지 갈 수 있어. 그런 거 해보고 싶은 마음? 의주에겐 정말 추호도 없었다. 해보고 싶지 않았어. 그런 생각 자체도 안 해봤다고.
아주 매섭게 혼을 냈다. 그런 데 가면 안 돼. 인생 망하는 거야. 이샹이 제대로 듣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화를 안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도박이지 않는가. 마음이 불안했다. 제 동갑내기 쯤이겠거니 생각하고, 당연히 성인일 거라 생각하지만 이샹은 늘 어린애처럼 구는 애지 않나. 이런 길로 한 번 빠지고 나면, 다음엔 또 어디까지 갈까. 비행청소년 아들을 두는 게 아닌가. 두려웠다.
일단은 당장 찾아가서 빚 갚고 니콜라스 출입금지 시켜주세요, 하려고 했는데 이샹이 드물게 어른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나 혼자 할 수 있어.”
혼자 할 수 있겠지. 할 수야 있겠지. 모르는 건 아닌데, 내심 불안했다. 어린애 심부름 보내면 이런 기분일까. 또 갔다가 무슨 사고를 칠 줄 알고. 의주는 그래도 믿어 보기로 한다. 적당히 돈을 쥐어주고, 빚만 갚고 오라고 신신당부하였다.
물론, 이샹은 그러지 않았다.
고구마볼을 사러 간 야시장 근처의 노름판을 구경한 건 그저 신기해서였다. 마작판이 시끄럽게 이뤄지고 있어 그 옆에 바짝 붙어서서 이게 무어냐 저게 무어냐 물었다.
듣고 보니 우습게도 마작 역시 용을 만드는 게임이었다. 용이 될 뻔했던 저에게 참으로지 어울리는 게임이로다, 하고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룰을 배웠다. 의주가 끼고 다니는 새파란 녀석, 만만하게 보였는지 다들 훼까닥 돈 눈을 하고도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용의 머리와 몸통을 먼저 만드는 것이 이기는 판이라, 크게 어렵지 않게 금방 배웠다.
의주가 쥐어준 푼돈을 걸고 이샹은, 당연히 죄다 잃었다. 용만 만들면 되는 줄 알았더니 아니란다. 역을 가지지 못하면 용이 아니라 이무기에 불과하단다. 그게 제 처지랑 똑같은 게 우스워 혀를 찼다. 규칙을 다 알아가던 참이라 아쉽다 싶기도 하고 용을 만들어 승천시키고픈 오기가 생겼다. 한 번 더, 외쳤더니 푼돈이라도 걸 돈이 없다고 순식간에 내쳐졌다.
이샹은 당연한 수순으로 의주에게 가 손을 벌렸고, 의주에게는 뜻밖에 혼이 났다. 화가 많이 났구나. 의주가 저렇게까지 화가 난 모습은 처음 봤다. 화난 적 없어 화낼 줄도 모르는 애가 내는 화라서 무섭지 않았지만, 또 그래서 무서웠다. 그러나 노름판에 가지 않을 생각은 없었다. 어찌된동 용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빚 갚으라고 준 돈을 가지고 이샹은 다시 노름판에 끼어 들었다.
동공이 수축해 뱀눈을 하고서 이샹은 착착 패를 모으고 버렸다. 쯔모와 기리, 치와 퐁을 반복하며 용의 머리와 몸을 만들었다. 이윽고 텐파이라 오름패 하나만 들어오면 됐다. 판을 뚫어질 듯 보는 인간들의 눈을 쓱 본다. 빛이 꺼져 우묵하게 들어간 눈은 퀭했다. 삶에 빛이라곤 없는 눈들. 이샹은 별안간 빛 없어도 반짝이는 동그란 눈동자를 떠올린다. 다 같은 인간들이 아니야.
몇 번이고 읽어내고 싶은 검은자 대신, 뻔히 읽히는 검은자들을 읽는다. 제게 승기가 있다는 게 뻔히 보였다. 리치를 선언하고, 오름패를 얻으며 화료해 큰 돈을 땄다. 초심자의 행운이라 생각했는지 다들 걸었던 돈을 흐뭇하게 건네며 칭찬에 후했으나 이샹이 그 이후에도 패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판을 압도하자 낯빛이 바뀌었다. 노름판에서 이샹은 날개 돋친 듯 날라다녔다.
허나 이미 용을 만드는 것에는 흥미를 잃은 참이었다.
이렇게나 승천이 쉬운데 난 왜 그리 어려웠을까. 하늘은 왜 제게 천년은 커녕 급작스럽게 용을 시켜주겠다 불러놓고 역이 없다며 내친 것일까. 볼사탕이나 만들며 지루해했으나 돈은 따박따박 제 옆구리에 들어왔다. 인간들이 금세 눈에 불을 키고 저를 해할 생각에 들끓는 것이 한눈에 다 보였다. 인간들이란 어찌 이리 탐욕스러운지. 딱 그만큼 저를 몹시 무료하게 했다. 보잘것 없는 이 존재들이 땅과 바다를 누비며 미개하게 생명들을 도륙하고 있단 사실은 이샹을 짜증스럽게 했다.
돈 잃었다고 이샹을 죽이겠다며 칼 들고 나서는 칼부림이 일었다. 다행히도 만인에 의해 저지되었다. 다들 그 서슬 퍼런 기세에 이마와 등에 식은땀 한 줄기 찌르르 흘렀으나 이샹은 낯 한 번 바뀌지 않고 바로 그 다음 판을 외쳤다. 적당히 갖고 놀았으니, 적당히 놀아주는 척을 해주련 마음이었다. 그래서 제대로 론에 걸려 져주었다. 덕분에 직전 판에서 딴 돈을 모조리 잃었다. 이샹만을 죽도록 노려보던 눈들이 흩어진다. 단단한 마작패가 부서지도록 손에 쥐며 서로를 향해 핏대를 세우고 눈을 부라렸다.
그 다음 판에서도 적절히 진 뒤 이샹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재밌는데 어디 가.”
“재미없네. 의주가 혼내요.”
다음 판에 사람이 나가기만을 기다리던 도박꾼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이샹이 있건 없건 상관없다는 듯 노름판이 다시 굴러간다. 의주에게 받은 돈의 20배를 주머니에 쑤셔 넣은 채 이샹은 유유히 노름판을 떠났다.
의주가 그렇게 말린 이유를 알겠다. 저 치들은 순간의 쾌락을 위해서만 살고 있다. 돈을 따고도 일어나지 못하는 건 거기서 쾌락이 끝나지 않길 바라서다. 잃었을 때의 분노와 슬픔은 외려 따고 난 뒤의 쾌감에 더해져 거기서 벗어나질 못하는 것이다. 인간들에 대한 실망만 더해진다.
그에 반해 금지된 건 절대 안 하고, 금지된 걸 하면 곤란해하며 헐레벌떡 따라오는 맹숭한 얼굴만은 왜 그리 지루하지 않은지.
집으로 돌아오는데, 뛰어가는 의주와 마주쳤다.
“니콜, 괜찮아?”
“응? 어. 어디 가?”
“정 선생님이 노름판에 칼부림이 났다고, 근데 네가 있었다 그래서… 괜찮아?”
“아. 칼.”
이샹이 심드렁하게 답한다. 의주는 걱정스런 눈으로 이샹을 둘러보더니 어깨에 손을 올린다.
“칼부림이 너한테 난 게 아니구나. 다행이다.”
“음. 나한테 칼부림한 건 맞아.”
“뭐?”
“근데 안 맞았어.”
안 맞으면 된 거 아닌가?
눈앞의 동그랗게 귀엽게 생긴 남자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지금 그게 할 소리야? 너 괜찮아?”
아예 어깨를 붙들고 몸 이곳저곳을 살핀다. 반바지 반팔 차림의 이샹 이곳저곳을 훑다가 다친 곳이 없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자마자 그대로 주저앉는다.
“왜 그렇게 무서워 해?”
“뭐?”
“다칠 수도 있지. 왜 그렇게 무서워 하는 거야?”
너희 인간은 그깟 단도보다 더 무서운 무기들을 들고 다니잖아. 작살포, 수류탄, 산탄총, 대전차, 미사일, 도검, 폭약. 칼에 스쳐도 가죽이나 좀 찢기고 말겠지. 꿰뚫는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다치면 다치는 거지. 넌 왜 내가 다칠까 그렇게 손을 벌벌 떨어? 왜?
“넌… 넌…”
대답이 늦는다. 무슨 대답을 할까? 이샹은 의주가 하는 말의 모든 것이 궁금한 자신을 깨닫는다. 하지만 궁금하지 않은가. 이 세상 가장 재미없게 사는 사람의 대답이.
“넌… 내 가족이잖아. 다치지 않길 바라는 게 당연하잖아.”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는 감각. 그 어떤 무기보다 더 강렬한 통각.
어느 산책길에서 산등성이 바위에 털썩 앉아 이야기했던 것이다. 넌 뭐가 가장 두려워? 의주의 질문에 곰곰이 생각하던 이샹의 대답. <가족이 다치는 것.> 삼촌과 사촌형을 잃었을 때의 공포와 두려움이 여전히 제 안에 남아있어서였다. 의주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었는데.
저가 가족이라 다칠까 두려웠다니.
이샹은 말을 잃는다. 넌 내 가족이 아니야. 복수대상인 걸. 그러나 그런 못된 마음이 힘을 잃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이 아무것도 모르는 동그란 인간 앞에서 나쁜 마음들은 모래알처럼 스르르 빠져나가 손가락 어귀에나 몇 알 남는다.
“그러니까, 안 가면 안 돼? 노름판.”
“안 가.”
“...진짜?”
구라 같은데, 같은 얼굴을 본다. 그 바보 같은 얼굴이 꽤… 귀엽다고 생각한다. 이샹은 주머니를 뒤져 제가 딴 돈을 건넸다.
“이게 다 딴 돈이니…”
그새 목소리엔 애틋함이 다 빠진 채 허탈함과 황당함만 남았다.
“이렇게 땄는데, 더 안 간다고?”
“흥미 잃었어. 맛있는 거 사 먹어.”
“왜?”
“의주 무서우면 나도 싫어.”
뭔가 꼬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굳이 바꾸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언뜻 보면 물고기를 닮은 동그란 얼굴이 웃으면, 저도 공연히 웃게 됐다. 아직은… 그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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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는 단란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다들 의주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전폭적으로 지원해줄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막상 의주는 딱히 원하는 것이 없었다. 번뜩 해보고 싶은 건 있었지만 금방 흥미를 잃었다. 그렇게 지나간 취미들이 많았다. 어린 나이의 연애라는 게 별거 없기 마련이지만 연애에도 흥미를 느끼질 못했다. 뭘 좋아하는 것 없이 그렇게 지내왔다. 자극이란 거 잘 못 느끼는 타입일까, 아니면 자극이 불편한 타입일까.
어쩌면 어릴 적 가족끼리 온 대만여행에서 큰 트라우마를 겪은 게 화근일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다. 물을 무서워하는 것만 트라우마가 아니었다. 의주는 어쩐지 그 땅을 떠날 수가 없었다. 의주가 삼킨 여의주의 탓이었지만 그를 알 리 없는 의주와 가족들은 대만을 떠나려고만 하면 자지러지게 울고, 비행기 이륙하자마자 심장이 멎어 CPR을 하며 다시 대만 땅으로 내려와야만 하는 의주를 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이상하게도 대만 땅에만 있으면 의주는 괜찮았다. 가족들은 의주를 위해 대만지사로 직장을 옮기고, 집을 옮겼다.
의주가 꽤 크고 난 이후에도 땅을 벗어나려고만 하면 현기증이 올라왔다. 다른 가족들이 다시 한국에 돌아간 동안에도 의주는 귀지방이라 부르는 작은 섬마을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만만 떠나면 되지 않으면 되니 타이페이로라도 가보라는 권유는 많이 들었지만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왜 이 마을을 떠나지 못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아마 자극이 싫으니 그렇지 않을까. 공연히 동요하는 가슴을 매만지며 그렇게 생각했다.
변변찮은 편의점도 몇 개 없는 마을에서 의주는 의외로 인공지능을 다뤘다. 컴퓨터 하나면 어디로든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 좋았고, 인간의 터무니없이 빈약한 이해와 통제수준을 인공지능이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초월적인 존재-바다-에 대한 무력감은 단계적인 수식 프로그램을 통해 안정감을 느끼며 해소됐다.
마침 타이페이에 본거지를 둔, 꽤 좋은 회사에서 주 2회 필수 출근을 내걸고 의주에게 좋은 조건으로 컨택이 왔었다. 의주는 흔들렸다. 주에 두 번쯤은, 복잡한 수도에 가도 괜찮지 않을까. 올 재택으로는 분명히 커리어에 한계가 있긴 했다. 찾아가기도, 찾아오기도 어려운 이런 귀지방에 있는 인재가 죽도록 뛰어나지 않는 이상 굳이 채용하진 않을 테니까.
채용 제안을 두고 커리어의 성장 혹은 마음이 편한 현재 생활 중 고민하던 때에, 니콜라스가 등장했다.
벌거벗은, 말을 못 하는 남자가 아니었으면 분명 돕지 않았을 테다. 허나 이샹이 인간으로 변모하며 힘을 잃어 연약해졌기에 의주는 기꺼이 도울 수 있었다. 그 기간은 길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점점 임보기간이 길어지며 의주는 채용제안을 거절해야 했다. 말도 못하는 남자를 두고 내가 어디 가겠어. 단순히 봉사의 의미는 아니었다. 제게도 누군가를 돕고 돌봐주어야 하는 마음이 강한지 제 스스로도 처음 알았다. 하나하나 가르쳐주고 알려주고 기다려주면서, 그게 꽤 성가시면서도 재미있었다.
처음인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다쳤던 혀가 나으면서 언어를 구사하고, 말이 점차 트인 이후로 이 연약하고 강한 애는 뭐든 알지 않으면 못 견디고, 안 된다고 하면 오히려 더 좋아했다.
얜 왜 이럴까?
의주는 매번 그런 생각을 하며 니콜라스를 쫓아다녀야 했다. 어찌할 수 없음을 매일 같이 느꼈다. 별안간 찾아오는 지진이나 사고 칠까 한 시라도 눈을 팔면 안 되는 부모처럼 헐레벌떡 쫓아다녔다. 그게 싫을 법도 한데, 꼭 싫지만은 않았다. 금지된 것을, 금지된 곳을, 금지된 모든 걸 할 때마다 의주는 의외로 그런 것들에 두근두근 심장이 뛰고 재미있단 걸 느꼈다. 식은땀이 벌벌 나고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 신이 났다. 하루하루가 즐거운 5살 꼬맹이가 된 것 같았다.
제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니콜라스를 좋아하게 되는 건… 당연한 순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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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의 관계는 겨울을 지나며 꽤 미묘해져갔다.
순식간에 신생아부터 어린이, 청소년을 지나 어른이 된 이샹을 의주는 몹시 의식하기 시작했고, 그게 제법 간지럽다고 생각하면서 이샹은 더는 어디까지 행동해도 되는지 선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주를 자극하기 위해서 행동했다. 단순하게는 등 뒤에서 어깨를 툭툭 쳐 돌아보는 장난을 쳤고, 더는 금지된 게 궁금하지 않는데도 궁금한 척 도발했고, 별로 가고 싶지 않아도 소파에 느슨하게 누워 일어나고 싶지 않아 하는 의주 손목을 잡고 흔들며 나가자고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가 문득, 거리감을 좁히고 볼을 맞대었다가 떨어진다. 의주가 가타부타 하지 못하게 아주 빠르게. 이상하다, 생각하면서 볼을 만지작대는 것이 꽤…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대부분은 이샹의 반칙이자 귀책사유 죄다 왕이샹이었지만 가끔은 의주의 무신경한 말에 이샹이 깊이 상처받기도 했다. 별다른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말이 오가다보면 언성이 높아졌고, 심드렁한 말에 이샹이 얄쌍한 턱 빠질듯 입을 벌리게 됐다.
귀책사유 변의주의 드문 날. 의주는 한 템포 늦게 사과하려 했으나 이샹은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며 등을 돌려 나갔다. 니콜라스의 등은 자주 쫓아 가느라 많이 봤지만 이렇게 다투다가 니콜라스가 먼저 등을 돌린 적은 없었다. 먼저 말을 걸고, 손을 뻗고, 되도 않는 애교를 부리고, 자신이 어이없어 웃어버릴 때까지 집요할 정도로 굴었다. 화해의 순서는 언제나처럼 니콜이었는데.
의주는 당황하면서도, 제가 뭐 틀린 말했나 싶어 별안간 화가 좀 나기도 했다. 무작정 신발 구겨신고 니콜라스의 뒤를 따랐다.
이미 이샹은 근처 언덕배기를 오르고 있었다. 고작 저 인간 하나에 왜 이렇게 감정이 왔다 갔다 하는지 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죽이려는 마음 같은 건 이미 다 흩어진지 오래다. 저 판판하고 마른 가슴에 들었을 여의주, 아무렴 어떠냐 싶다. 그러나 변의주가 툭 치는 불량한 손끝, 으쓱거린 눈썹 한 쪽, 볼썽맞아지는 표정, 그런 것에는 기민하게 반응하게 된다. 마음이 긁혔다. 끽해야 수명 100살 될까 말까한, 한심한 인간에게 왜 이렇게 초라해지는 건가. 그게 화가 났다. 그래서 의주가 저를 따라오지 않길 바랐다.
꼭대기 절벽 앞까지 와서도 씨근씨근하게 화를 삭히고 있었는데.
의주는 비탈을 올라오고 있었다. 뿔이 난 이샹은 다가오지 말란 뜻으로 손을 내저었으나 길고 마른 몸은 걸음을 그칠 줄 몰랐다. 이샹은 그를 피해 절벽 끝으로 계속 갔다. 거기 서. 거기 서라니까? 도통 성을 낼 줄 모르는 인간은 큰소리를 내다 음이탈이 난다. 결국 벼랑 끝 큰 느티나무 뒤에 설 즈음, 의주는 두 손을 들고 그 자리에 멈추었다. 이샹과 2 내지 3미터 가량 떨어진 참이었다.
“그래, 니콜. 거기서 들어.”
느티나무를 고집스레 껴안은 채로 이샹이 의주를 응시했다. 허리에 손을 올려놓고 이샹을 보던 의주가 스르르 손에 힘을 뺀다. 이샹만큼이나 성이 났던 의주가 더 화내지 못하고 마음을 풀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샹은 그 순간이 좋았다. 나쁜 마음을 오래 갖지 못하고 체념하고 내려놓는 순간을. 선한 본성이 사르르 인간을 지배하는 순간을. 이미 이샹의 마음만은 느티나무에 묶여 있지 않고 의주의 옆에 있었다.
의주는 평소 크지도 않은 목소리를 억지로 높여 차분하게 설명하고, 사과했다. 이샹은 그 내용만은 아무래도 좋았다. 손을 모았다가 푸는 것, 허공에 툭툭거리는 것, 주먹을 쥐었다 피었다 하는 것, 침을 꼴깍 삼키는 것. 그런 것들을 보느라 바빴다. 귀엽다. 사랑스럽다.
그리고 마지막엔.
“쫓아와서 미안해. 그래도 빨리 풀고 싶었어.”
개나 고양이에게 하듯, 나근한 목소리로 의주가 손을 뻗었다.
“이리로 와.”
나를 강아지 취급하는 거야? 라고 투덜댈 생각이었다. 그러면서도 이샹은 분명 의주에게 가려고 했다. 나무를 붙든 팔을 빼며 뒤로 물러나는데, 이미 연약해진 절벽이 그대로 무너질 줄은 몰랐다. 억 소리 한 번 못 내고 이샹이 뒤로 넘어갔다. 공중에서 추락한다. 땅이 잡아당기는 이 느낌은 일전에 겪어본 적 있다. 승천하다 고꾸라졌을 때. 심장이 튀어나가는 충격과 함께 자신이 어디로 떨어질지 생각한다.
절벽 끝은 바다다. 그렇다면 다치지는 않겠군. 놀라기는 했지만, 감상은 그게 다였다.
단지 의주가 새된 비명을 지를 뿐이었다.
“니콜—!”
바다와 첨벙, 닿으면 몸 전체가 깊숙히 빠졌다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여전히 목 아래 있는 역린이 작동했는지 인어의 몸으로 돌아왔다. 오래간만의 몸이 반가워 이샹은 바다 바닥을 한 번 찍었다. 오랜만이라며 달려드는 실러캔스와 밴댕이떼, 벚꽃새우를 뒤로 하고 다시 위로 솟구쳤다.
보통 인간은 이 높이에서 바다에 빠지면 죽으려나. 의주가 지른 비명이 신경쓰였다. 기껏 화해하나 했더니 뒤로 넘어간 녀석이라니, 의주가 화를 낼지도 모른다. 열없다 싶어 이샹은 꼬리 지느러미를 열심히 움직여 해안가로 갔다.
어느새 절벽에서부터 모래사장까지 혼비백산한 의주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달려왔다.
화가 많이 났나. 혼날 게 괜히 무서워 이샹은 더 가까이 가지 못하고 바다에 둥둥 떠 있었다. 이샹을 발견한 의주는 단숨에 바닷물 앞까지 온다. 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더니, 이샹을 향해 참방참방, 뛰어온다. 파도치는 바다는 진입하기 어려웠다. 의주가 발을 딛을 때마다 포말이 크게 튀었다. 바닷물이 의주의 발을, 다리를, 허벅지를 적신다.
이샹은 알고 있다. 의주가 물을 무서워한다는 거. 너무 더운 날 땀 한 줄기 흘리면서도 바다에 뛰어들지 못하고 발목까지만 간신히 담그는 것. 목욕이 뭔지도 모르는 이샹의 몸을 씻겨주면서도 이샹이 손목을 끌어당기면 고개를 젓던 것. 나긋한 목소리로 5살 때 바다에 빠진 이후로 물이 무섭다고 말하던 이야기. 의주는 영원히 모를 이샹의 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그 날 이후로 물이 무서워 샤워할 때도 눈을 뜨고 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이샹이 바다에 풍덩 빠지자 발목 위까지, 종아리를, 허벅지를 담구며 제게 오고 있다. 이샹의 탐스런 꼬리가 바다 속에서 잘 헤엄치고 있고, 상체가 단단히 물 밖으로 올라왔는데도 꼭 물에 빠져 아무 것도 못하고 있는 사람을 보듯이 기절초풍하여 원초적인 두려움을 깨고 제게로 오고 있다.
바닷물이 의주의 가슴 아래까지 오고 서야 이샹의 앞에 올 수 있었다. 의주의 둥근 뺨이 눈물로 다 젖어 있었다. 그러나 얼굴을 보고 있고, 몸을 보고 있는 것은 이샹 혼자 뿐이었다. 이샹의 존재 유무에만 관심 있는 의주는 이샹 앞에 오자마자 그를 잡아당겨 부둥켜 안았다.
이샹을 껴안은 의주의 몸은 지나치게 뜨거웠다.
“니콜, 니콜…”
“괜찮아. 의주, 나 괜찮아.”
온몸을 덜덜거리며 운다. 어깨가 연신 떨렸다. 목에 매달리다시피한 의주의 허리를 받치고 이샹은 제 가슴에 쿵쿵 와닿는 의주의 심장박동을 들었다. 빠르고, 연약했다. 마치 제 심박처럼.
-
여전히 흐느끼는 의주를 안고 뭍에 가고 나서야 제가 가장 편한 인어 상태로 계속 있단 걸 깨달았다. 눈물을 그쳐가는 의주 역시 니콜라스의 하체가 새카만 비늘로 뒤덮인 것을 보고 그대로 울음을 멈추었다.
아차 싶었다. 허나 이대로 지금의 무드를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이샹은 세이렌처럼 속삭였다.
“내가 죽을까 봐 겁났어?”
의주는 이샹의 단단하고 미끄러운 비늘을 보다가 천천히 그의 얼굴로 돌아왔다. 고개를 끄덕인다. 이샹은 그 순순한 태도를 보며 입을 맞추고픈 충동을 참기 어려웠다. 핏기가 가신 입술은 말라있다. 그럼에도 그 무엇보다 입을 맞추고 싶었다.
욕망을 따라 이샹은 고개를 낮춰 입술을 대었다. 피하겠지. 고개를 돌리겠지. 피하더라도 입을 맞출까, 아니면 나도 그저 고개를 돌려버릴까. 고민하면서. 그러나 의주는 예상과 달리 피하지 않고 입술을 마주한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날 받아들이는구나. 깨닫는다. 심장이 거세게 뛰고, 온몸에 뜨거운 피가 돌았다. 꼭 용암처럼 모든 것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이샹은 천천히 입을 떼고, 다시금 속삭인다.
“왜?”
“......”
가족이라서?”
의주는 망설이다, 고개를 젓는다.
“아니… 넌 내 가족이자, 가족이 아니야, 니콜.”
성마른 입술이 진실을 말하는 입술을 덮는다. 입맞춤은 천천히, 오래 이어졌다.
-
이샹과 의주는 침대에 나란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맨살이 닿아 둘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땀에 젖은 살이 쩍쩍 소리를 냈다. 꼭 그 소리만큼 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너도 아까 봤겠지만. 나는 인어야.”
“잘못 본 줄 알았는데.”
“내 비밀 지켜줄 거지.”
의주는 성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베개가 몹시 흔들렸다. 그게 아주 귀엽게 느껴져 이샹은 작게 웃었다.
“원래 인어는 인간도 되고 인어도 될 수 있는 거야?”
“뭐? 하하. 아니.”
“그럼 어떻게…”
“어떻게 인간 됐냐고?”
“응.”
“너 보려고 인간 되게 해달라고 빌었어.”
“뭐? 거짓말.”
한 치의 거짓도 없다. 단지 진실도 몇 가지는 없을 뿐이지. 네 심장을 가져가려고, 네가 삼킨 여의주를 가져가려고 난 인간이 됐어. 말할 수 없는 말은 삼킨다. 까만 밤하늘 같은 의주의 눈을 보면 어디까지 얘기해버릴지 모르겠어서, 천장만 계속 응시했다.
“날 언제 봤는데?”
“...무지개가 뜬 날, 그 끝에 네가 있었어.”
“무지개? … 아. 기억 나. 그 때 나를 봤어? 니콜 네가?”
고개를 끄덕인다. 햇빛에 의주 가슴에 있는 여의주가 번쩍이고, 복수의 기회다 싶어 후마를 찾아가게 했던 날. 이제 더는 복수라는 것이 무언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인간의 삶은 지나치게 짧다. 신수에게는 눈 깜짝 할 시간도 못 된다. 그 시간만이라도 의주의 삶을 들여다 보고 싶어졌다.
“널 알고 싶었어.”
달콤하지 않은 사실에, 혀가 아릴 정도로 달콤한 마음이 번진다.
정말이다. 정말 의주를 알고 싶다. 악한 인간을 혐오하는 나를 망친, 아주 선한 나의 인간. 그의 깊은 곳까지 헤엄치고 싶다.
의주는 불편한 사람이 있으면 은근슬쩍 자리를 피했다. 꼭 마주쳐야 한다면 애써 불편한 기색을 감추었고, 무례한 사람에게도 예의를 지키고 말을 경청했고 다정한 태도를 고수했다. 강한 자에게도 약한 자에게도 행동은 일관되었다. 무엇보다 무른 소재처럼 생겨서 누가 자신을 깡, 내리치면 단단하게 일어나서 강해진다는 점이 이샹의 흥미를 끌었다. 분명 저를 처음 보았을 때 무섭게 생겨서 불편했겠지. 그럼에도 가장 취약하고 연약한 상태라서 오히려 받아들인 것이다. 선한 마음들이 동글동글한 비누방울처럼 모여 만들어진 게 변의주란 사람 같았다. 해할 생각이나 하는 제가 아니라 변의주에게 여의주가 간 게 너무나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니 이 선하고 성실한 인간이, 정말 언제까지 그럴 건지 궁금해하는 게 당연하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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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알게 됐다.
사실 의주가 자신을 사랑하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세차게 뛰던 심장이라고 다 사랑은 아니니까. 그저 적당히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하지만 저는 분명히, 의주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토록 증오하던 인간을 사랑하게 되다니. 인간이기만 하면 분노가 들끓고 멸종할 때까지 쓸어버리고 싶었던 저가 맞나. 이것이야말로 신이 제게 내린 저주인지도 모른다. 그깟 용이 되지 못한 것, 여의주를 고의로 변의주 입에 넣은 것, 그런 건 저주 측에도 못 드는 일인지도.
사실 이샹은 지금 이런 순간들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삶이라는 것, 100년도 되지 않아 지독하게 짧지 않나. 누구보다 심심하게 사는 의주의 인생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옆에서 함께. 노화를 겪어야 한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함께 나이를 들어가는 것, 함께 시간을 지낸다는 것은 분명히 아름다울 것이다. 어렵겠지, 어려우니까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하지만 사랑에 들떠 눈이 가려진 시간은 극히 짧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 성큼, 5월이 되고, 6월이, 7월이 다가왔다. 후마에게 의주의 심장을 찔러 가져다 주어야 하는 게 얼마 남지 않았다. 다리가 이전과 달리 점점 성치 않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후마가 만들어준 물욕의 효력이 다해지는 것, 저주가 다가오고 있다는 게 시시각각 제 다리로 느껴졌다. 이샹은 오래간만에 공포를 느낀다.
이샹에게 죽음이란 어려운 개념이다. 죽임은 너무나도 가까운 단어임에 비해 죽음은 너무나도 먼 단어였다. 기본 수명이 세 자리인지라 하루보다는 오히려 달의 개념이 하루 같았다. 내가 죽을 것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불멸의 초월적 존재가 인간으로 죽는다라.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들이 우스웠으나 막상 죽음을 코앞에 두고 보니 몹시 무서웠다. 더는 가족도 의주도 보지 못한다. 심장이 조여들고 깊이 할퀴어졌다.
삶은 유한하고, 그 안에 이루고 싶은 게 많았다. 이샹은 비로소 삶에 집착하는 인간들을, 그 외 생물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당장의 하루하루가 소중했다. 언제 끝날지 모르기에. 당장의 하루하루가 필요했다. 언제 꿈을 이룰지 모르기에.
색색 소리를 내며 자는 의주는 지나치게 사랑스러웠다. 1년의 저주가 제게 몰려들고 있다.
가족들에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이샹의 생에 꼬여버린 인간의 심장을 찔러야 한다. 그 안에 들었을 여의주를 꺼낸다면 더없이 떳떳하게 가족들에게 돌아갈 수 있으리라. 하지만 내가 의주의 심장을 꺼낼 수 있을까?
가족과 사랑, 사랑과 가족.
그 사이에서 이샹은 무엇도 결정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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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하는 이샹의 고민을 알았다는 듯, 날치가 번뜩 날아들어 편지를 주고 다시 바다로 뛰어들었다. 편지를 열기도 전에 누가 쓴 편지인지 알 수 있었다. 그의 권능이 그대로 느껴진다.
아버지의 편지다.
-
이샹에게.
너는 너의 누나와 달리 나의 말을 듣지 않았지. 이제 와서 새삼 그 사실을 탓하려는 것은 아니다. 모든 생명은 자신의 세포 하나하나에 담겨진 자신의 기질이 있다. 너의 기질은 법칙을 따르지 않고 너만의 길을 따르는 것이란 것을 안다. 위험을 무릅쓰고 험한 길을 담대하게 가는 것은 박수칠 만한 일이지만, 가면 안 되는 길을 가는 것은 오만이자 무모하고 헛된 과신이다. 나는 그것이 두려워 너를 매번 다그쳤다. 너는 아기뱀에서 시작하여 거대한 뱀이 되고 이무기가 되었다. 나는 네가 빛도 들지 않은 심해 밑바닥을 기어다니는 것이 퍽 못마땅했다. 하늘이란 것은 관대하면서도 교만하여 때가 되면 틀림 없이 너를 용으로 추대하면서도 금방 널 내칠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나와 함께, 나의 아내이자 너의 어머니와 함께, 나의 딸이자 너의 누이와 함께 있으며 빛을 보며 많은 것을 깨치길 바랐다. 하늘을 두려워 하길 바랐다.
네가 검은 인어가 되었을 때의 일은 더 언급하지 않겠다. 그때 겪은 나의 분노와 좌절은, 네가 지혜로운 문어에게 가서 무엇보다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을 때보다 높지 않았다.
인어도 아니고, 인간이라니! 이것은 옳지 못한 길이고 틀린 길이다. 나는 지금도 내 마음을 번복하지 않는다. 보아라. 너는 결국 죽음의 길에 들어서지 않았느냐.
하지만 이것도 너를 성장시키는 수없이 많은 길들 중 하나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길을 가기 위해서는 네가 살아야 한다. 네가 생각한 또다른 많은 길들이 있을 테지만, 이번만큼은 나의 말을 듣길 바란다.
칼을 들어 너의 죄악인 그 인간의 심장을 찔러라. 따뜻한 피가 너의 손을 적시며 너는 다시 업을 쌓겠지만, 네가 단명하는 일보다는 나을 것이다. 네가 인간이어도 좋다, 아들아. 부디 살아서 다시 만나자. 다시 나의 궁전으로 와다오. 애간장이 끓는 마음으로 부탁한다. 나를, 너의 어미를, 너의 누이를 생각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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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은 것을 알고 있다는 듯, 파도를 타고 이샹의 발 앞에 무언가가 닿는다. 쏴- 파도가 물러가고 나면 잘 벼려진 은빛의 칼이 있다.
이걸로 의주의 심장을 찌르라는 거지.
이샹의 불행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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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샹은 망설인다.
가만 생각하면 당연히 가족이 먼저다. 제가 나고 자란 바다가 먼저다. 이깟 땅이야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인가. 바다가 인간들에게 당한 수많은 수모를 생각하면, 여의주를 가지는 게 분명히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의주를 보고 있노라면. 걔가 재잘대는 말을 들으면, 색색 숨죽여 자는 모습을 보면, 안경을 끼고서 제가 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는 것을 보면. 도무지 심장을 찌를 수 없다. 어떻게 이런 인간의 심장에 칼을 꽂는단 말인가.
이샹은 매일밤 의주의 침대 옆에서 서성였다. 보름달 빛이 둥글어 훤히 동그란 얼굴을 비춘다. 애써 얼굴을 외면하고 가슴에만 단단히 시선을 고정시킨다. 품에서 칼을 꺼내 가슴 앞까지 든다. 손은 덜덜 떨려 칼끝은 방향을 잃고 의주의 가슴 아무 곳이건 다 찌를 기세로 흔들렸다. 그것을 몇 번이나 반복하다가, 결국 다시 품에 넣고 제 방으로 돌아왔다. 그런 밤마다 잠을 설쳤다. 달빛이 비추는 내내 괴로움에 뒤척이다, 눈만 붙이고 일어났다. 그 잠깐 자는 잠에서도 괴로웠다. 몸이 뜯겨져나가던 사촌형의 가슴팍이, 물 아래로 쏟아져 내리던 폭우 같은 작살포가, 포경선을 결국에 따돌리고 돌아와 유령처럼 비명을 질러대던 고래들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이샹을 채찍질하듯 꿈에서 나타났다.
가족과 사랑, 사랑과 가족 앞에서 이샹은 처참하게 무너졌다.
후마가 만일을 대비해 준 물약도 삼켰다.
<선택을 되돌리고 싶거나, 잠깐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면 마셔. 딱 열 번이고, 시간은 오래 되돌릴 수는 없어. 1시간 뿐이야.>
후마가 내심 바랐던 대로, 인간을 죽이려는 선택 앞에서 이샹은 망설임 없이 들이켰다. 한 시간을 자는 의주 앞에서 서성이다, 다시 물약을 삼키고 돌아와 그 앞에서 서성였다. 칼을 내었다 빼었다, 하는 고통은 오히려 의주의 심장이 아니라 자신의 심장에 꽂히는 것 같았다.
제게 남은 하루하루가 줄어들 때마다 물약을 집어삼켰다.
마침내 7월 1일.
자신의, 혹은 의주의 죽음이 일주일도 남지 않은 순간.
과다복용하느라 마지막 물약을 털어넣고 여전히 칼을 쥔 채 의주 앞에서 서성이던 밤.
“니콜.”
이샹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선다. 부리나케 등 뒤로 칼부터 숨겼다. 잠꼬대일까? 잠버릇이 워낙 많은 의주이니까, 아마 잠버릇일 것이다. 그렇게 합리화하면서 이샹은 못 박힌 것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이름 한 번 부르고 만 거겠지, 꿈 속에서.
그러나 의주가 입을 다시 연다.
“날 죽이고 싶으면 죽여.”
“......!”
“망설이지 말고.”
커다란 손에서 힘이 빠진다. 쨍그랑. 칼이 바닥에 부딪힌다. 이샹은 칼도 의주도 그대로 둔 채로 방문 밖을 향해 뛰쳐갔다. 이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유리로 된 심장이 누군가의 손에 으스러져 각종 파편이 혈관을 타고 돌아다니는 것 같다. 온몸이 통렬하게 후려쳐진 기분이다.
의주가 알고 있다. 자신이 몇 번이고 망설였다는 사실을. 칼을 쥐고서 밤마다 그의 심장을 노리고 있단 사실을.
의주가 모를 거라고 생각한, 영원히 모르길 바란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이샹의 두 눈에서 더없이 투명한 진주 같은 눈물이 쏟아지듯 흘러내린다. 발이 닿는 대로 뛰어 도망가면서, 이샹은 이제 더는 땅으로도, 바다로도 도망칠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
니콜라스는 아무도 없는 숲 속에 앉아있다. 망나니처럼 이 작은 마을을 샅샅이 뒤지고 다닌 것은 그저 금지된 것이 궁금해서, 만은 아니다. 거사를 치를 때 갈 곳을, 여차하면 숨을 곳을 찾기 위함이기도 했다. 절대로 인간들이 오지 않는 곳. 거기 앉아 속도 모르고 푸릇한 나무들을 본다. 그러면서 그 동안을 반추해보았다.
어이하여 의주가 알았을까. 의주는 보통 잠이 들면 웬만해서는 깨지 않았다. 깊이 잠에 들어 잠꼬대도 했고, 제 이불을 돌돌 말아가기도 하고, 제 몸을 껴안기도 했고, 뒹굴다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하고, 코를 골기도 하고, 반 바퀴 돌아 침대 가로로 자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단 한 번 깨지 않고 색색 잠들어 있는데. 어떻게 알았을까.
심지어 이샹은 1년이 지나는 게 아깝고 아쉬워 밤마다의 선택의 시간을 돌리곤 했다. 그 시간 내내 의주는 알고 있었나? 그 생각에 닿자 이샹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제게도 지옥 같은 시간이었지만, 자신을 죽일 줄 알고도 눈을 감고 있었을 의주에게는 더더욱 지옥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걸 계속 반복한 건가. 저주처럼.
저주라고 생각하니 번뜩 떠오른 말이 있다.
<너처럼 어떤 초월적 존재가 힘을 담아 뱉은 말은 그대로 실현된다는 걸 잊지 마. 저주를 쉽게 말하지 말라는 거야.>
다리를 달라 말할 때 했던 후마의 말. 하지만 시간을 돌린다는 건 이샹이 뱉은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제가 말했던 저주. 이샹은 머리를 팽팽 돌리다 탄식을 내뱉는다.
‘내가 죽기 전까지 저 자도 죽지 않고 고통받으리.’
후마가 말했던 1년 뒤 의주의 심장을 가져 오지 않으면 자신의 심장을 바쳐야 한다는 것, 그것만이 족쇄가 아니다. 이미 스스로 채운 족쇄의 저주가 있었다. 지독하게 연결된. 내가 왜 눈앞의 좌절에 눈이 멀어 그런 말을 했을까. 변의주인 줄 알았다면,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침내 하늘의 뜻을 이해한다.
변의주가 아니었어도 하지 않았어야 했다.어느 죽음이라도 제가 함부로 여기지 말아야 했다. 용으로서 만물을 굽어볼 이샹이 알아야 할 바가 그러한 것이다.
제 꾐에 제가 넘어간 것이다. 얄량한 복수에 제가 얻어 맞았다. 누이의 말도 맞았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은 저만 괴롭게 하고, 만물은 이어져 있다. 그것이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일지언정 결국 제게로 돌아온다. 자승자박에 갇혀 이샹은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제는 사랑도, 가족도 고를 수 없다.
이샹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제 가슴을 죄는 것을 느낀다.
정말로 선택해야 할 때다. 사랑을, 가족을, 제 목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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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샹이 모습을 보이지 않은지 일주일이 다 되었다.
그 동안 의주는 후회를 거듭했다. 그냥 걔가 날 찌를 때까지 참을 걸. 하늘이 무너질듯 폭풍이 몰아치는 밤이라 그랬다. 기상상태가 꼭 제 마음 같아서 그랬다. 어디까지 내가 모른 척 잠에 든 척을 해야 할까 두렵고 한숨이 나서 그랬다.
사라진 뒤 어떤 정신으로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잠도 잘 이루지 못했다. 동이 트고 햇빛 한 줄기 내려드는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면 추해도 이렇게 추할 데가 없었다. 눈의 안광은 다 죽었고, 통통했던 볼살은 다 내려 얼굴뼈의 윤곽이 훤히 보였다. 안 그래도 마른 몸은 더 보잘 것 없어 보였다. 제 몸에 내려앉던 다정한 입맞춤을 기억한다. 오목한 배에다 대고 아름답다 중얼거리던 목소리를 기억한다. 제 얼굴과 몸에 별다른 감상이 없던 의주에게 몇 번이고 예쁘다 아름답다 귀엽다 이야기해주어 거울을 볼 때마다 정말 그런가? 하고 갸웃거리게 했던 남자를 기억한다. 목표물이 입을 열자 당황한 듯 나타나지 않는 남자가 결국 기억을 추억으로 만들까봐 겁이 난다.
그의 사랑이 진실된 것일까 두려웠던 그 시간마저 소중해질까 봐 무섭다.
의주는 세면대를 붙잡고 울음을 터뜨린다.
돌아와, 니콜. 니콜라스… 제발. 날 죽여도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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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만에 거짓말처럼 니콜라스가 돌아왔다. 인기척에 돌아보면 꼭 유령처럼 서 있었다. 니콜라스의 몰골도 의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얄쌍하게 빠진 하악은 살이 더 빠져 손을 대면 정말이지 베일 것만 같았다. 달빛에 비친 하악근이 도드라지게 보였다.
“의주.”
“...니콜.”
둘은 한참 대치를 한다.
“날 죽이러 왔어? 드디어?”
침묵을 참을 수 없어, 먼저 낫을 들고 난도질한다. 제 마음에.
그 낫이 니콜라스도 벨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만큼, 자신이 상처받은 만큼 니콜라스에게도 상처가 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죽음을 각오한 사랑으로 자신의 앞에 섰다는 걸 모르는 의주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미 그 말에 깊이 베여 피를 몇 갤런씩 뚝뚝 흘리는 이샹이 낮고 작은 목소리로 가만가만 속닥였다.
“이야기를 하러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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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샹은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몇 번이고 시뮬레이션 해보았지만 거짓말에 취약하단 걸 저 스스로도 알았다. 그리고 이 시간이 지나가면 의주를 못 본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순간을 미루게 됐다. 밤의 바닷바람은 매서워 피부에 닿으면 따가웠다. 그럼에도 그 따끔함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이미 심장에 칼이 꽂힌 듯 깊은 고통을 겪고 있어서였다.
침묵을 깬 건 의주였다.
“인어공주 동화에도 나와. 왕자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왕자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다음 날 아침에 공주는 심장이 터져 물거품이 돼.”
이샹은 씁쓸하게 웃었다. 맞아. 그게 내 미래야. 7월 9일. 널 만난 딱 1년이 되는 내일 말야.
“그래서 언니들이 칼을 주지. 왕자의 심장을 찌르면 다시 인어가 되어 가족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
“너도 그런 거야? 니콜 너도, 날 죽여야 다시 인어가 될 수 있어?”
“......”
“하지만… 하지만 나는 다른 누구와 결혼하지도 않았잖아.”
이샹이 픽 웃음을 샜다. 혼란스러워 보이는 의주의 눈동자는 아주 새카맸다. 저 동그란 눈에 수없이 했을 걱정을, 슬픔을, 두려움을, 당혹을, 그 수많은 상상들을 생각하면 눈동자만큼이나 제 마음이 새카매졌다. 이런 일을 겪지 않아야 했다, 의주는. 그저 부덕한 제 용오름에 휘말렸을 뿐인 다섯 살 어린애가 커서 자신과 만날 필요도, 그래서 누군가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나쁜 마음을 간접적으로 얻어 맞지도 않아야 했다. 모두 제 탓이다.
왜 자신을 죽이려고 했을지, 그러고도 왜 도망간 것인지 제딴에 얼마나 열심히 추리했을까. 이샹은 손을 뻗어 의주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매서운 밤바람에 머리가 엉망이었다.
“맞아. 그렇지.”
“......”
“마녀가 변의주 왕자의 진실한 키스를 받지 않으면 죽는다고 하더라고.”
농담을 던졌다. 좀 웃으라고. 그러나 의주는 웃기는커녕 울먹거리며 당장이라도 키스할 것처럼 머리를 붙여왔다. 착한 녀석이다. 저에게 휘둘리게 한 모든 시간을 이샹은 후회한다.
“농담이야.”
“농담?”
“사정이 있었어. 해결하고 왔어.”
니콜라스로서, 의주를 안심시킬 시나리오를 수십 개 생각했다. 은근히 마음이 여리고 착한 의주는 자신이 죽는다고 순순히 말하면 분명 저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죽이려고 하는데도 순순히 목을 내놓은 녀석인데. 그래서 의주를 안심시키고 떠나고 싶었다.
이샹 딴에 의주를 죽이려고 했던 이유, 그러나 이제는 죽이지 않아도 되지만, 그래도 이곳을 떠나야 하는 이유를 적절히 만든 시나리오를 이야기했다. 의주가 납득해주길 바랐다. 안 그래도 하는 수 없는 일이지만, 의주는 제 터무니없는 이야기에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왕왕 있었으니 그런 확률에 기댄다. 의주는 다행히도 니콜라스가 말을 끝낼 동안 가타부타 말을 얹지 않고 가만 듣고 있었다.
이샹은 내심 안도하며 제 목에서 역린을 떼어냈다.
“이게 나의 역린이야. 이걸 너에게 줄게.”
“...역린을 떼면 죽는 거 아니야?”
“안 죽어. 난 인어잖아. 나 같은 초월적인 존재는 죽지 않아.”
의주는 그게 거짓말이라는 걸 알았다.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를 쫓기 위해 수없이 흔들리느라 알게 됐다. 그러나 어떤 것이 거짓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역린이라는 게 거짓말이야? 죽지 않는다는 게 거짓말이야? 날 사랑하는 게 거짓말이야? 물어보면… 답을 해줄까.
니콜라스는 애초에 의문이 많은 남자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와 함께 하는 생활 내내 의주는 니콜라스의 생각과 행동을 쫓아가느라 바빴다. 니콜라스는 왜? 라고 자주 물었지만 의주의 왜? 에는 시원스러운 대답을 준 적 없었다.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간 날들을 가끔은 후회했다. 숨기고 싶어한다면 굳이 캐지 않으려고 했던 날을 후회한다.
뭍에 사는 자와 바다를 끼고 사는 자가 다르듯, 땅에 선 자와 바다에 사는 자는 너무도 달라 알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주는 알고 싶었다. 의주가 알지 않길 원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알고 싶다. 사랑하니까.
의주에게 필요한 것은 인어의 역린 따위가 아니다. 간절히 필요한 것은 그저 따스한 입맞춤이다. 그동안 흘린 눈물과 가슴 졸인 고통을 단숨에 보상받을 건 아름다운 인어의 사랑 뿐이다.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면 의주는 제 심장을 스스로 바칠 텐데.
그러나 간절히 원한다고 다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니콜라스는 의주의 손을 놓는다.
“즐거웠어, 의주.”
“.....”
“잘 지내.”
물 속으로, 이샹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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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로 해가 떠올랐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햇살이 한때는 인어였던 차가운 물거품을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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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는 토론토에서 타오위안으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바항공 BR35. 새벽 출발 비행기라 그런지 공항 내에는 사람이 없었다. 불도 적당히 꺼져 있는 밤 11시의 토론토공항은 적막함이 더 어울렸다. 라운지도 텅텅 비어있었으나 뭘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 의주는 아무데나 긴 몸을 구겨 앉았다.
이샹이 떠나고, 의주도 떠난 대만에는 약 1년 만의 방문이다.
회사에서는 의주의 입사 1주년 맞이, 혹은 의주의 생일 맞이 고향 방문으로 알고 있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출생지는 대한민국 일산이지만 5살 이후로 물이 무서워 떠나지 못하는 바람에 대만에 눌러 살았으니 고향이라 하믄 고향이라 할 수 있다. 의주의 생일도 맞고, 입사도 1년이 되어간 것도 맞다. 그러나 그걸 위해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2025년의 음력 7월 15일, 중원절이 다가오고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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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가 떠난 이후. 의주는 그것이 마지막일 거란 예감을 했다. 쓸데없이 비장한 니콜라스의 얼굴이, 저가 어찌 될지 걱정하지 말라는 어른스러운 말 때문이다. 니콜라스의 뜻이 그러하다면 따라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한 달 즈음 니콜라스가 없이 살다 보니 이대로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바다에 들어가 니콜라스를 잡아오던지, 니콜라스가 저를 보고 인간다리를 받아 왔듯 저도 생선꼬리를 달고 바다에 살던지 해야겠다 싶었다.
이샹이 주었던 역린을 목덜미 아래에 딱 붙인다. 두려움보다 사랑이 먼저라 의주는 성큼성큼 바다를 향해 뛰어든다. 이샹의 아름다운 꼬리라도 한 번 보길 원한다. 네가 오지 않는다면 내가 찾아가면 돼. 역린을 제게 준 이유가 있을 거라고 끝끝내 생각한다. 푸른 바다는 악몽처럼 의주를 덮친다. 허리를 껑충 넘어 가슴까지 물이 들이차면 바닥을 잘 걸을 수 없었다. 몸은 파도에 밀리고 위로 둥둥 저절로 떴다. 눈 질끈 감고 머리를 밀어 넣으면 언제 매서웠냐는 듯 바다는 미지근한 온도로 의주를 감싸주었다. 어쩐지 환대받는 느낌이었다. 참았던 숨을 저도 모르게 훅, 쉬면 어릴 때처럼 물이 코와 입을 막지 않았다. 화들짝 놀라 눈을 뜨면 옅은 보호막이 의주를 감싸고 있었다.
이게 니콜이 준 역린의 효과인가.
무작정 들어온 바다지만 어딜, 어떻게 가야 니콜라스를 만날 수 있는지 모른다. 망망대해를 다 뒤집어놓을 수는 없는데. 커다랗게 자란 미역들을 스쳐가며 의주는 금방 시무룩해졌다.
붉은 바다게가 의주를 따라왔다.
인어공주에 나오는 세바스찬이 생각났다. 바닷가재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붉은 게라지. 인어를 사랑한 뒤로 인어공주 애니메이션을 다시 찾아본 탓에 알고 있다. 세바스찬처럼 니콜라스의 충실한 신하이려나. 인간세상은 엉망진창이니까 바다에 있자고 언더더씨를 불렀을까. 제 빈약한 상상에 풉킥 웃으며 바다게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을 탄 애완동물처럼 게는 쓱 헤엄쳐 의주의 손 위에 올라탔다. 내가 살다살다 바다생물을 핸들링하고 있다니. 몇 번 가볍게 놀아준 뒤 의주는 알아듣지도 못할 줄 알면서 괜히 물었다.
“니콜라스, 검은 비늘의 인어는 어디 있니?”
게는 집게손을 딱딱거렸다. 꼭 알아들은 것 같았다. 신기하다 싶어 열심히 쳐다보면, 작은 입을 위아래로 딱딱 부딪힌다.
<인어는 이제 없어요.>
어쩐지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몸이 차게 식었다. 니콜은 죽었구나. 날카로운 이명이 머리를 지배한다.
그대로 잠수해 영원히 바다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
정처없이 길을 헤매다 갈 곳이 없어 다시 집으로 향했을 때. 침대에 누워 하염없이 눈물을 그렁그렁 모으다 심란함 그칠 길이 없어 책상에 앉았을 때. 평소와 다르게 책 사이 흰 종이 하나 끼워져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강렬한 직감이 들어 얼른 종이를 꺼냈다.
넘실거리는 글씨로 적힌 말.
의주야. 사랑해.
고작 그 6글자. 믿기지 않았다. 무너져서 울다가 이게 다가 아닐 거라고 척추 곧게 세우고 일어나 온 집안을 다 뒤졌다.
결국은 그 구겨진 종이들을 다 펴보지 못 했다. 니콜라스가 남기고 싶었던 말이 고작 그 6글자니까. 나를 사랑한다는 말. 흰 나신으로 덜컥 동굴에 쓰러져 있던 네가, 하지 말라는 말은 제일 듣지 않던 네가, 언젠가 나를 안고 입을 맞추던 네가, 밤마다 칼을 들고 날 죽일까 말까 망설이던 네가. 종이 스무 장을 쓰고 지우고 구겨 버리고서야 하고 싶었던 말이 딱 그 6글자, 내 이름과 사랑한다는 말이니까. 그럼 나도 그 말만 읽어줄게. 날 사랑한다는 말만 읽을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것은 그것이다.
나도 너에게 사랑한다 말해줄 걸.
상처 받을까 봐 두려웠다. 어차피 심장을 노리고 있단 걸 알았다면 그깟 마음의 상처 같은 거 다 감당할 걸. 찌르라고 종용하기 전에 내 심장은 어차피 너의 것이라고 말해둘 것을.
사랑해.
너에게 입술을 내어주고 몸과 마음을 내어주었을 때, 난 이미 사랑의 덩굴 속에 깊숙이 갇혔어. 네가 없는 덩굴 속에서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해, 니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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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어디든 제 발로 밟을 수 있는 거리라서 좋았던 마을은, 작기 때문에 어딜 가도 니콜라스와 다닌 곳이었다. 장점은 순식간에 단점으로 뒤바뀐다. 의주의 생활반경 모두 니콜라스와 있던, 니콜라스와 걷던, 니콜라스와 먹던, 니콜라스와 함께였던 추억이 가득했다. 같은 공간을 다른 시간대에 혼자 있는 기분은 뭣 같았다. 의주는 어디에서나 울 수 있었고, 어떤 것에서도 무너질 수 있었다.
자주 사먹던 아이스크림, 매일 걷던 산책로, 돗자리 없이 누워있던 들판, 종종 사먹던 야시장 13번 소세지, 니콜라스가 매만지던 맥도날드 장난감, 흑곰을 만나 기절초풍했던 금지된 숲, 하도 궁금해하고 갖고 싶어하길래 너도 갖고 있으라며 굳이 멀리까지 가서 사왔던 공기계, 대뜸 올라가 있어서 내려오라고 소리지르다가 결국 같이 올라갔던 마을의 100년 된 나무, 니콜라스가 건전지를 갈았던 시계, 이거 이름이 뭐냐고 열다섯 번씩 묻고도 기억하지 못한 물망초, 의주 감시 하에 연필 비뚤게 잡고 뾰루퉁한 얼굴로 초등학생 1학년 단어를 외우던 공책, 시장에서 야무지게 골라 사줄 때까지 발걸음을 떼지 않아 울며 겨자먹기로 사주었던 핫핑크색 바지, 신발장에 쌓여 있는 280짜리 왕발 니콜라스의 신발들, 맨발로 가만가만 걸으며 한동안 말 없던 해변, 니콜라스가 두 뺨에 가득 쑤셔넣으며 먹던 옆옆집 할머니가 싸준 총좌빙.
드는 정은 몰라도 나는 정은 안다고. 더는 그가 없는 곳에서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
평생 귀지방을 떠나고 싶지 않았고, 떠날 수 없었는데 지금은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강렬한 직감이었다. 대만의 귀지방에서 떠날 수 없었던 것은 어쩐지 니콜라스 때문이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니콜라스 때문에 떠날 수 있단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갈 수 있는 중에 가장 추운 나라를 골랐다. 사시사철 더운 나라인 대만에 있었으니 어딜 가도 여름만 되면, 더위와 습기에 땀을 흘릴 때면, 여름의 작렬하는 태양을 보면 무조건반사처럼 떠오를 것 같아서 그랬다. 고민하다 타오위안의 직항노선 중에서, 5월 초에도 눈이 내린다는 캐나다 토론토를 골랐다. 마천루가 즐비한 도시란 것도 고려 대상 중 하나였다. 어디라도 지금 살던 곳과 완전히 반대된다면, 니콜라스 생각이 덜 나겠지.
허나 그 얕은 판단은 금방 깨졌다.
어딜 가도 무얼 먹어도 다 생소했다. 낯섦에 익숙해지기 위해 의주는 성실하게 현재에 임했다. 그러나 오히려 현재와 미래를 향해 갈수록, 물속에서 걷는 것처럼 과거가 자신을 온몸으로 붙들었다. 이역만리에 뚝 떨어지니 더더욱 니콜라스가 그리웠다. 바다에서 뭍으로 올라오며 뭐든 신기했을 인어가. 새로운 말을 배우며 의사소통이 더뎌 답답했을 니콜이.그럼에도 너무나 빠르게 적응했던 니콜라스가.
이방인으로 살아간다는 건 너무나도 외로운 일이었다. 대만에서 살 때는 너무 어려서 몰랐다. 세상천지가 저 혼자에게만 별천지라, 남들은 무심하게 지나치는 그 순간에도 마음이 갈퀴어졌다. 땀은커녕 한기에 오들오들 떨며 몸을 움츠려야 하는 겨울도 남들의 마음 같아서 괴로웠다.
허나 니콜라스도 이랬을까 더듬어 상상하고 나면. 어쩐지 그리 외롭지만은 않아졌다. 네가 느꼈던 감정을 나도 느끼고 파. 옷을 몇 겹씩 두르고 이불을 몇 장씩 돌돌 말아 이불 속에서 이를 달달 떨면서도 의주는 금방 여름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니콜라스를 만난 여름, 니콜라스와 함께였던 여름. 마음만은 뜨겁게 달궈져 더는 춥지 않았다.
벗어나기 위한 모든 것들이, 오히려 저를 잠식하길래.
그래서 귀월을, 중원절을 맞아 왔다.
귀가 되었을 니콜라스를 만나기 위해서.
-
음력 7월이 반절이 지나갔는데도, 중원절인데도 깜깜무소식이었다.
죽지 않았다는 뜻일까? 아니면 아직도 찾아오지 못하는 것일까?
어찌 되었건 의주는 마음을 다해 매일매일 지전을 태우고 과일과 떡을 바꿔가며 상을 다시 차렸다. 매일 신선한 횟감을 찾아 어시장에 들려 어류를 올리다가, 혹시 제 친구들을 올리는 걸 좋아하지 않을까 싶어 조개를 올리다가, 성게나 멍게를 올리다가, 해조류를 올리다가 했다. 귀월 내내 이럴 생각이었다.
그래도 중원절엔 올 줄 알았는데.
의주는 차일피일 미뤘던 재택근무 업무들을 소화했다. 중원절이 다 가도록 오지 않는 걸.
밀린 업무는 산더미처럼 많았다. 의주는 쉬지 않고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시간이 어찌 지나가는지도 모르고 12시를 막 넘긴 찰나.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반사적으로 돌아본다.
이상하게도 제 어깨를 두드리는 장난을 치던 남자가 불현듯 떠오른다. 돌아보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돌아보게 되었던, 보려고 하지 않아도 보게 되었던 남자. 잊지 못해 돌아오게 만든 남자.
“안녕, 의주.”
“…….”
“오랜만이야.”
남자의 얼굴에 개구진 고양이 수염이 생긴다.
“청룡이 되느라 늦었어.”
2025년 을사년, 푸른 뱀의 띠, 중원절을 하루 지난 9월 7일, 의주의 생일.
청룡 왕이샹이 돌아왔다.
의주를 만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