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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소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괴이한 몰골을 본 것은 내가 열두 살이었을 때이다. 학교가 일찍 파했지만 갓 전학 와 마땅히 같이 놀 친구들이 없었던 나는 어른들이 절대 가지 말라고 한 웅례길 뒷골목 쪽을 나무 작대기 하나 들고 성큼성큼 걸었다. 딴에는 모험이라고 생각하며 나선 길이었다. 후미진 주택들은 낡아 있었고 아직 옛날 방식대로 생활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촌동네였지만 빌라와 학원도 들어서는 내가 사는 동네와는 사뭇 달랐다. 그렇게 누군가의 집 뒷골목을 빠듯하게 걸었다. 길고양이 한 마리 벌레 하나 보이지 않았다. 대낮이라고 하기에는 무섭게도 적막했다. 낮은 담벼락 너머 뚫린 낡은 창으로 보아버리고 말았다. 첫눈에 귀신이라고 생각이 들 만큼 희한한 차림이었다. 창이 난 경대 있는 안방에는 붉은 저고리에 치마, 버선까지 신은 긴 머리의 여자애가 다리를 뻗고 앉아 있었다. 내 또래는 되어 보였으나 머리가 산발로 얼굴을 가려 잘 확인할 수 없었다. 그것의 모습에 시선이 뺏긴 나는 한동안 창을 통해 그것을 바라보았는데, 그것의 시선이 창을 통해 나를 향하는 듯 했다.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한 나는 깜짝 놀라 줄행랑을 쳤다.

 

내가 그 곳에 간 것을 아무 어른도 알지 못했다. 목격자도 없었고 나도 그 일을 꽁꽁 숨겼기 때문이다. 뒤늦게서야 내가 그 때 본 것이 귀신이 아닐까? 공포스러운 생각에 한기가 돋았다. 그러나 그 애를 봤을 때 무서움은 들지 않았다. 호기심이 먼저 동했다. 쟤는 학교를 안 가나, 왜 저런 차림으로 있나, 머리를 빗어줄 어른은 없나, 따위의 궁금증들이 머리에서 피어올랐다. 나는 내가 본 것이 허깨비가 아님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그 곳에 가고 싶었지만 그 후로 마땅히 그 곳을 찾아갈 기회는 오지 않았다. 한 여름날의 기이한 만남은 그렇게 잊혀지는가 싶었다.

 

마을 버스로 한 두 정거장 떨어진 데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했고 드디어 교복을 입었다. 엄마는 교복점에서 한숨을 푹푹 쉬며 두 치수 큰 걸 달라고 했다. 덕분에 어깨선도 맞지 않는 커다란 마이를 입고 다니기 시작하게 된 학교였지만 모든 게 설렜다. 단 두개의 반뿐이었던 초등학교와 달리 읍에서도 아파트에서도 다니는 학생들이 있는 중학교는 훨씬 컸고 재미있었다. 새 친구들도 사귀고 공부도 하며 머리가 커져갈 무렵 읍에 사는 친구들이 웅례길 얘기를 했다. 의주 느네 동네에 위험한 골목 있다며. 애들은 정확한 지명은 알지 몰랐지만 그 골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전부 걔네의 부모들과 주변 사람들이 절대 그 곳에는 가지 말라고 당부한 탓이었다. 차라리 제발 그곳에 가달라고 돈을 쥐어주며 부탁하는 것이 나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금기는 그 무엇보다 나와 그 애들을 자극했다.

 

이 동네에 사는 책임으로 내가 선두를 맡아 애들 몇을 데리고 웅례길 뒷골목 쪽으로 향했다. 유리에 먼지 쌓인 트럭과 밴이 갓길에 주차돼 있었다. 길이 좁아 우리는 횡대로 걸어야 했다. 여전히 내가 선두였다. 기억은 어렴풋했지만 열두 살 때 왔던 풍경과 달라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내가 보았던 빨간 저고리의 애가 생각났다. 설마 아직도 그 집에 살까? 그 애도 자랐을까? 스릴감에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어오는 걸 느끼면서 외길을 따라 걸었다. 여전히 적막한 골목에는 우리의 발소리만이 들렸다. 그 집에 다다르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창 쪽으로 돌렸다. 나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 했다. 갑자기 멈춰선 내 뒤로 애들이 차례로 갈길이 막히며 무슨 일이냐고 물어왔다. 옛날과 똑같이 낮은 담벼락, 그 너머의 창문에는 머리가 짧은 소년이 서 있었다. 그 때의 기이한 차림새가 아닌 그저 후줄근한 흰 티셔츠와 츄리닝 바지를 입은 채였다. 내가 놀란 이유는 내가 그 쪽을 쳐다보기도 전부터 창에 딱 달라붙어 걔의 집 뒷골목을 걸어가는 우리를 보고 있는 그 애 때문이었다. 옛날에 보았을 때와 한참 달라진 외양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저 애가 예전의 그 애가 맞다는 묘한 확신을 가졌다. 키가 훨씬 커져 있어 그 애의 오빠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으나 왜 그런 확신을 가졌는지는 모른다. 게다가 이 주변에는 그 애 말고 다른 아이라고는 전혀 없는 듯했다. 그 애는 창문을 조금 열었다. 어느새 내 뒤를 따라오던 애들도 창 속의 그 애에게 시선이 고정된 채 압도되어 있었다.

 

“잡혀 죽기 전에 도망가.”

 

그 말을 하고는 창문을 턱 닫았다. 조근조근한 어조였지만 그 내용의 포악함에 깜짝 놀란 우리는 그대로 왔던 길을 되돌아 뛰어갔다. 웅례길을 벗어나서야 우리는 숨을 고르고 안심했다. 뭐야, 뭔데, 애들끼리 정말 무서웠다고 떠들어댔다. 나는 그 애가 우리를 놀린 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제 집 뒷골목을 놀이터 삼아 누비던 우리를 쫓아내려고 한 말일지도 몰랐다. 그 애의 목소리는 청량하고 높은 톤이었다. 그래서인지 며칠동안 그 목소리가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나이를 꽤 먹고 부모님 허락 없이 돈을 쓰고 저축할 수 있을 때쯤이 되어서야 웅례길은 불법도박의 온상지였다.

 

 

 

 

트럼프, 화투, 마작, 주사위까지 없는 게 없다고 했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불법 토토 사무소를 차린 아는 형이 말해주었다. 특별한 소개 없이는 갈 수도 없으며 그나마도 다 늙어 빠진 아저씨, 아줌마들이라고 했다. 대학에 가지 않기로 하면서 엄마와는 거의 말을 하지 않게 되었고 나는 이 동네에 남아있는, 불법 토토 사무소를 운영하는 형과 비슷한 무리와 어울리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라도 19살이 되면 이 동네를 떠났다. 웅례길과 맞닿아 있는, 십 년 전에는 비교적 잘 살았던 우리 동네도 재개발로 보통 사람들은 싹 빠져나간 후였다. 끝까지 보상을 받지 않고 재개발에 반대하며 빈 개미굴과도 같은 아파트에 남아있는 건 내가 중학생 때 아빠가 죽은 후 인생에서 어딘가 하나가 빠져버린 엄마의 고집이었다.

 

이 나이 되도록 염색 한번 하지 않고 학교도 아픈 날 빼고는 개근을 해온 내가 소위 날라리 같은 형들과 어울리게 된 건 환경 탓이기도 했다. 초등학생의 사회생활과 성인의 사회생활은 별 다를 게 없었다. 놀 친구가 없으면 주변의 아무 손이나 잡기 마련이었다. 어느날 단골 삼겹살집에서 소주를 마시며 나는 캐캐묵은 어린시절의 괴담과도 같은 비밀을 털어놓았다. 기억 속 귀신과도 같은 존재를 다시 끄집어낸 것이다. 설녀 전설처럼 이 비밀을 털어놓았다가 마주보고 앉은 형이 갑자기 설녀로 변하며 나의 얼굴을 뜯어 먹는 우스개같은 상상도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누구나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비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게 어린 시절에 일어난 어떤 흔하지 않은 일이든 어두운 가정사든, ‘를 이 따분하고도 공포스러운 세상에서 분리시켜줄 저마다의 소중한 비밀이 있을 것이다. 내게는 웅례길의 내 또래의 귀신같은 존재를 만난 것이 그랬다.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그 후로 사귀었던 어떤 친구들에게도 말하지 않고 꽁꽁 숨겨온 소중한 비밀이었다. 그러나 그 고백을 들은 형의 반응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내 이야기를 믿어주지 않는 듯한 표정부터 잘못 본 거 아니냐고 나를 위로하려는 시도까지 그랬다. 나는 더욱 흥분하여 내가 정말로 보았던 그 이질적인 질감, 붉은 한복의 차림새, 내 귀를 울렸던 목소리까지 하나하나 강조해서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곳에 어린애가 있을 리 없다는 말로 일축했다. 나의 참담한 충격이 전해졌는지, 그는 그렇게 궁금하면 다시 한번 그 곳에 가보라고 했다. 진짜 어린애가 있었다면 지금도 거기 있을 리는 없겠지만. 정 그 기억이 너를 아직까지 좇는다면 다시 그 장소에 가서 어린 마음이 과장시켰을 그 기억을 덧씌워 버리라고 했다.

 

해가 지고 난 뒤의 웅례길은 어린 시절에는 들어와본 적 없는 공간이었다. 그만큼 달랐다. 오히려 낮보다 활기를 띄었고 점집과 같은 한자가 쓰인 풍등이 켜진 건물이 있었고 벌써 술에 취한채 단체로 어디론가 들어가는 아저씨들이 있었고 앞마당에 물을 뿌리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나와 비슷한 또래는 찾을 수 없었는데, 멍하니 골목에 서있자 바닥에 이곳저곳 물을 뿌리던 아주머니가 내게 물었다.

 

"얼라가 무슨 일로 왔노?"

 

이가 많이 빠져있는 듯 정확하지 않은 발음이었다. 나를 쫓아내지 않고 받아들이듯 안내하는 이 질문은 아주 잔인한 것이었다고 나중에야 깨달았다.

 

"저랑 비슷한 또래... 아니면 어린애를 찾고 있는데요."

"니보다 얼라는 없고, 왕이샹이 찾는 거면 저 안쪽에 연꽃 있는 집으로 가면 된다."

 

마치 어두운 게임의 시작을 알리는 NPC처럼 아주머니는 내게 말했다. 연꽃 장식? 보통 우리 동네에서 연꽃 장식은 신기 다 빠진 무당이 얼마 안 되는 돈을 받고 점을 봐주거나 다 늙은 할머니들이 몸을 파는 곳이었다. 나는 비탈진 길을 올라 연분홍빛 연꽃 풍등이 있는 집을 찾아내었다. 그때도 이렇게 이 길을 속속들이 깊이 들어왔었나. 과거와 일치하지 않는 길찾기에 이미 과거의 망령을 찾기 어느정도 포기한 나는 안을 한번 보고나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비스듬히 열려있는 철문을 열었다.

 

"...도망가라고 했는데."

 

나타난 것은 하얀 얼굴에 뒷머리가 목을 덮은 나와 또래로 보이는 한 남자애였다. 철문이 열리는 소리와 그 애의 말소리가 겹쳐서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내가 응? 하고 물었다. 그 남자애는 다시 말해줄 생각이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검은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있어 옛날에 봤던 그 꼬마 귀신이 맞는지 알 길이 없었다.

 

소개도 없이 온 나를 점집으로 위장한 도박장 주인들은 잘 받아주었다. 처음이니까 판돈은 서비스로 준다고 하고 아주 친절하였다. 장판이 일정하지 않게 깔린 바닥 위에 고풍스러운 어둡게 옻칠이 된 커다란 상이 놓여 있었고 중년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각자 앉아 판돈을 세고 있었다. 중앙에 놓인 것은 화투로 이 곳은 섰다를 주로 하는 곳이라고 했다. 게임을 지켜보기만 하려고 해도 판돈을 내야 한다길래 나는 그들이 내어주는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섰다 정도는 어릴 때 명절에 친척들이 하는 것을 보아 대충 알고 있었고 족보도 머릿속에 있었다. 멀리서 끼이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까 봤던 그 남자애가 이국적으로 생긴 전통 옷, 흡사 소복 같은 것을 입고 2층에서 내려오는 것이었다.

 

"오늘은 이샹이가 점도 봐주네. 길일이야, 길일."

 

맞은편에 앉은 코에 사마귀가 붙은 중년 남자가 말했다. 이름이 왕이샹인 걸로 보아 한국인은 아닌 듯했고, 점을 보는 방식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방식이라 외국인이구나, 어림잡을 뿐이었다.

 

"오늘 기 아저씨는 3을 만나면 주의하세요."

 

남자는 능숙한 한국어로 점을 다 본듯 맞은편의 사마귀에게 읊조렸다. 이샹의 점은 늘 잘 맞지만 해석하기가 어렵다고들 했다. 상에 앉은 나머지 세명의 점을 각각 봐주고 드디어 이샹의 얇고 날카로운 눈이 나를 향했다.

 

"쌀알을 원하는 만큼 쥐어."

 

말하는 대로 그릇에 놓인 쌀알을 적당히 쥔 다음에 이샹이라는 남자에게 건넸다. 그는 점괘를 맞춰보더니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나직하게 속삭였다.

 

"출구는 한번인데 너와 뒤집힌 자가 안내하겠네."

 

앞선 점들과 같이 한결같이 알아듣기 어려운 소리 뿐이었다. 왕이샹은 점을 다 봐주었다며 다시 2층으로 올라가 행방을 감추었다. 소복을 입은 모습을 보자 저 애가 내가 어릴 때 봤던 그 꼬마 귀신이 맞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주인 아주머니가 내어주는 요구르트를 마셨고, 깨어났을 때는 어둡고 좁은 옷장 안이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기억나는 것은 어젯밤 계속해서 졌다는 것이다. 내가 6끗이 나오면 상대는 7끗이 나오고, 내게 좋은 패가 들리면 상대는 하나같이 다 죽는 것이었다. 그렇게 달아놓은 빚만 오천 쯤 쌓였을때, 나는 그것이 모두 허울 좋은 장난인 줄 알았고 노름인 줄 알았다. 목구멍 안쪽에서 쓴물이 올라왔다. 숨 쉬기가 갑갑해서 옷장을 안쪽에서 두드렸으나 밖에서는 인기척이 없었다. 아주 멀리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였는데도 모두들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았다.

 

당장 나가기를 포기했을 쯔음 옷장 문이 벌컥 하고 열렸는데 밖에 있는 것은 익숙한 얼굴도 어른도 아닌 노랑색 한복을 입은 한 여자아이였다.

 

"오빠, 일어났다!"

 

여자애가 그렇게 외치자 밖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지는데 어제 봤던 왕이샹이 민소매 나시를 입은 채 옷장이 있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옷장 안이 너무 좁아서 알지 못했는데 양 발목이 케이블 타이로 묶여있는 채였다.

 

"오빠라고 하면 안 되지요."

 

이샹이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목소리 톤으로 여자애에게 말을 했다. 그러고보니 여자애의 머리가 사내애처럼 짧게 깎여져 있었다.

 

"으응... 이샹 형! 여기 형이 옷장을 두드려서, 내가 문을 열었어!"

 

여자애가 이상하게 나와 왕이샹을 형이라 칭하며 밝게 말하자 왕이샹이 옷장 안에 그대로 처박혀있는 나를 감정 없는 눈으로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눈은 나를 향하지만 말은 여자애를 향하듯 멀찍이 말을 했다.

 

"응, 만해 아저씨가 데려갈 거야."

"또 만해 아저씨야?"

"응. 그 아저씨는 아주 돈이 많거든."

 

아무런 설명을 이어 듣지 못하고 다시 옷장 안에 갇혔다. 이샹은 나를 불쌍히 여기지도 않는지 꼬마애가 열었던 옷장 문을 그대로 닫고 여자애를 데리고 방에서 나간 듯 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다리가 저려 발목의 감각조차 잃었을 쯔음 옷장 문이 다시 열렸다. 아까는 낮이었는데 지금은 어두컴컴한 밤인 듯 했다.

 

"이거 봐라."

 

주인 아주머니가 내게 건넨 것은 거의 신체포기각서였고 맨 아래는 빨간색으로 지장이 찍혀져 있었다. 지장 옆의 이름이 내 이름인 것으로 보아 내 지장이라 하는 듯 했는데 나는 전혀 그런 기억이 없었다. 그러나 퍼뜩하여 손을 들어보니 오른쪽 엄지에 붉은 인주 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이건, 이건 말도 안되잖아요. 사기잖아요."

"여기 출신이재? 느그 부모가 안 가르쳤드나? 이 길로 오믄 안 된다고."

 

그렇게 말하는 아주머니의 얼굴이 활짝 피어있어 괴이하게 보였다. 그제야 나는 웅례길의 실상을 조금 더 알았다.

 

"만해 아저씨한테 노름하는 법 배우고 빚 잘 갚으래이."

 

아주머니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떠버렸다. 나는 술에 취한 듯한 만해라는 남자가 나를 데리러 와서야 발목의 끈이 풀리고 제대로 걸을 수 있었다. 만해는 전국에서 유명한 노름꾼으로 심부름을 할 싹싹한 젊은 애가 필요하다고 했다. 처음 며칠동안 쪽방에 갇혀 족보만 외웠다. 그리고 만해의 밥상을 차려주고 치워주는 나날이었다. 어느날 낮, 만해가 의주를 내버려두고 노름판으로 갔을 때 익숙한 얼굴이 기척 없이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샹이었다.

 

"......"

"내가 살고 싶으면 도망치라고 했잖아."

"...어릴 때 봤던 게 너야?"

 

이샹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다 왕이샹 때문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나를 이곳으로 꿰어내고 환상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나는 정체 모를 힘에 이끌리듯 자꾸 이 웅례길을 찾은 것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서 왕이샹을 향해 덤벼들었다. 흙바닥에 구르며 왕이샹의 턱을 갈겼다. 이샹은 반항하지 않다가 조금 맞아주고는 나를 힘으로 떼어냈다. 며칠동안 제대로 밥숟갈도 뜨지 못한 내가 힘을 제대로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도하가 너를 보고 싶어해."

"...도하가 누군데."

 

왕이샹도 이제 얼굴에 피딱지를 달고 있었으나 당연히 며칠동안 갇혀 처맞은 내가 더 몰골이었음은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노랑 저고리. 꼬마애."

"이 미친 동네는 왜 꼬마애를 그렇게 입히고 사는 거야......"

"원주민들이 만들어낸 미신이야. 제물로 어린애를 성별을 속여 바쳐. 그러면 잘 살 수 있다고 믿어."

"...그 때는 네가 제물이었고? 제물이 정확히 무슨 뜻인데."

"악행으로부터의 온갖 살을 대신 맞아주는 거야. 그런데 죽지는 않아 성별이 다르니까... 조금 빗겨나가서 살 수는 있어. 나는 그래서 팔을 잃을 뻔 했어."

 

왕이샹이 제 오른팔에 감겨있던 스카프를 걷어 커다란 상처 자국을 보여주었다. 이 곳은 미쳤다. 나는 이제 왕이샹에게 무릎 꿇고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왕이샹은 조금 제정신인 듯해 보이니까. 나보고 도망가라고 해주었잖아. 출구, 출구가 있다고 했잖아.

 

 

 

/

 

 

 

의주는 2002 9 7일생으로 흑말띠를 타고나 원래 기운이 성하지 않은 몸이었다. 어릴 때부터 자꾸 헛것을 보았으며 그래서 그런지 어느 좁은 길에서 꼬마 귀신을 만났다고 했을 때 아무도 의주가 웅례길에 들어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의주네 집은 결코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정상적인 가정이었고 누나와 형도 있어 어느정도 사랑을 받고 자랐다. 따라서 의주의 실종은 동네에서도 꽤나 큰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의주가 설마 그 웅례길에 들어갔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경찰부터가 스무살의 치기 어린 가출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의주네 동네에서 나이가 차면 돈을 훔쳐 서울로 떠나는 애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샹은 의주를 세번쨰로 보았을 때, 그러니까 의주가 연꽃 등을 찾아 다 커서 이 집으로 들어왔을 때 의주의 운이 다 했다고 생각했다. 처음 만났을 때도 두번째 만났을 때도 이샹은 이기적으로 굴지 않고 도망치라고 친절히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대만어와 한국어를 쓰는 엄마를 잃고 홀로 남겨져 이상한 차림새에 머리를 귀신같이 질질 길러서 쪽방에 가두어져 살았는데 의주는 처음 본 또래 아이였다. 머리도 자기처럼 이상하게 산발로 길지 않았고 눈도 저와 달리 동그랗고 맑게 뜨여져 있었다. 이샹이 처음으로 가진 동경이었다. 나도 이 곳을 벗어나서 저 애처럼 뛰어서 이 곳을 벗어나고 싶다. 이샹이 그 애를 잊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독감에 걸려 죽을 뻔했을 때도 머릿속으로는 그 애를 떠올렸다.

 

두번째에 의주를 봤을 때에는 엄중히 경고했다. 이제 이 곳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았고 점도 어느정도 칠 줄 알아 사람들의 앞날을 볼 수 있었는데 의주의 생명선은 아주 얇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의주와 같이 온 아이들이 외치는 소리로 의주의 이름이 의주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샹은 시끄러운 아이들 소리가 떠나간 웅례길에 홀로 남아 생각했다. ...이름 한번 잘 지었네.

 

의주가 왜 자꾸 이곳에 이끌리는지 이샹은 알지 못했다. 그게 설마 자기가 의주에게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어서 의주가 자꾸 이곳으로 되돌아오고 싶어한다는 것도 본인 앞날은 보지 못하는 점쟁이 이샹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의주가 세번째로 이 곳에 돌아온 날, 이샹은 자기 목숨을 다해 의주를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리라 결심했다. 도하가 마음에 걸렸지만 도하는 자기보다 신기가 세기 때문에 언젠가는 이 곳을 자기 도움 없이도 벗어날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미혼모인 은주 씨가 머리를 뒤로 묶고는 어느새 만해가 시장에서 주워온 진돗개에게 개 먹이를 먹이고 있을 때, 계절이 4개쯤 흘렀다. 의주의 머리는 이샹이 잘라주어 늘 그렇게 길지 않은 꼴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이제 의주도 어엿한 웅례길의 주민으로 다리에 줄이 채워지지 않은 채 지낼 수 있었다.

 

이샹이 미용가위를 가져와 앞마당에 의자를 두고 의주를 앉혔다. 수건을 목에 두른 다음 뒷목 위로 내려온 머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샹은 처음에 의주를 만났을 때보다 한껏 다정해져 있었다.

 

"오늘 머리 자르면 예쁘겠다, 그치."

"......."

"머리 스타일 바꾸고 싶음 말해 내가 잡지도 가져왔으니까..."

"너는 왜 뒷머리 안 잘라?"

"나? 이건 패션이지."

"지저분해 보여."

"사실 뒷목에 뭐가 안 덮혀져 있는 게 좀 어색해. 어릴 때부터 긴 머리였어서..."

"그렇구나. 도하는?"

"오늘은 색종이 접기 한대."

 

의주는 조금씩 멍을 때리는 빈도가 잦아졌으며 어느샌가 이샹이 낮에 아무도 없을 때 의주를 붙잡고 너를 도망가게 해주겠다고 고백하듯 속삭였으나 의주는 그 말을 믿지 못하는 듯 했다. 이샹도 그 절절한 고백을 뱉은 이후 별 다른 계획 없이 의주와 함께 있는 것에 만족해 보였기 때문에, 의주는 점차 희망을 잃어갔다. 눈앞의 왕이샹이 저주스러웠으며, 자기 목숨을 바쳐 자신을 도망가게 해주겠다는 말은 싸이코처럼 들렸다.

 

 

연꽃등이 달린 집에 큰 불이 난 날이었다. 도하가 늘 지내는 곳이라 사람들이 애워싸고 발을 동동 굴렀지만 도하는 그 어느 집 구멍으로도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샹이 헐레벌떡 뛰어와 의주를 찾았다. 멀리서 연기나는 것을 보았으므로 의주는 도하를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샹 혼자 온 것이 영 불안했다.

 

"의주, 너, 헉, 헉, 도망, 쳐야 돼."

"...도하는?"

 

이샹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냉정하게 굴었다. 지금 도하 걱정을 할 때가 아니라고 했다. 모두의 눈이 불에 쏠린 지금만이 기회였다. 이샹은 의주를 업고 일부러 길 쪽이 아닌 수풀 사이로 뛰었다. 5분이 되지 않아 누군가는 의주가 사라졌음을 눈치챌 것이었다. 이샹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자 의주가 벌떡 일어나 절뚝이며 이샹이 향하던 방향으로 계속해서 뛰었다. 의주도 눈치챈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이샹은 의주를 도망치게 해주겠다는 일념 하나로 뛰었음에도, 의주가 멀쩡히 뛰어 도망치고 있음에도 의주를 좇았다. 이내 거센 소나기가 쿠르릉대며 웅례길 쪽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큰 불 따위 한번에 꺼뜨릴 비였다. 빗물이 얼굴에서 주륵주륵 흐르고 얼마 가지 않아 멀쩡한 대로가 보였다. 도하가 살았으려나, 한번 뒤돌아보는 이샹의 손을 잡고 이끈 것은 의주의 작은 손이었다. 이샹이 의주의 얼굴을 제대로 살필 여유 없이 의주가 이끄는 대로 둘은 뛰었다. 이 곳을 벗어나야 했다.

 

운명이 서로 뒤집힌 자가 서로를 구하는 형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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