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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on&산마

 






 

  

13:08:20 ━━━━━━✈━━━━━━━ 24: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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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바웃 의주(19)

 

[왕혁상]

 

“Sans serif로 박아주세요.”

예?”

이름 덜 뾰족하게 Sans serif로 박아주세요.”

 

카운터로 망가진 명찰과 울고 있는 오천 원짜리 지폐를 슥 내밀었다. 언제나 문방구를 가면 만날 수 있는 동그란 뿔테 안경의 NPC 형님이 이샹을 미친놈 보듯이 내려다보았다.

 

죄송한데… 그냥 기본 폰트로 해드리면 안될까요?”

 

오늘도 크라잉 율곡은 좀체 이샹의 주머니를 떠나지 못한다.

 

 

 

 

명찰이 망가졌다.

아랫집 사는 아저씨 짐 빼는 거 도와주다가 서랍장 손잡이에 걸려서, 본드 붙인 자리가 뚝 떼어져 버렸다.

 

아랫집 사는 아저씨와는 오며 가며 자주 인사를 하던 사이였다. 어디서 뭘하다 온 사람인지는 몰라도 몇 가지는 알았다. 그는 신실한 크리스천이었다. 늘 같은 시간에 성경 말씀을 들어서, 이샹은 그가 ‘주’님을 찾는 소리에 낮잠을 깬 적이 많았다. 또한 살가웠다. 집주인이 아직도 물막이판을 달지 않은 반지하가 또다시 침수될까봐 걱정된다거나, 혹시 이모더러 꽁초 버릴 때 저어기 소주병에 꽂아달라고 해줄 수 있니, 소소한 잡담을 친근하게도 붙여왔다.

 

그랬던 아저씨도 내일이면 이사를 떠난다.

버려진 가구 중에는 책상도 있었다. 이샹은 나무 합판 얹힌 싸구려 책상 위를 손끝으로 쓸어보았다. 먼지가 묻어나지 않는다. 사랑받은 책상이구나. 집주인에게 있을 자리가 되어주느라 그간 수고했지만, 떠날 때는 두고 간다. 이렇게 힘껏 사랑받았는데도.

 

니콜. 뭐해?”

 

계단에서 터벅터벅 내려오는 의주가 그를 불렀다. 의주의 목소리는 항구에서 울리는 뱃고둥을 닮았다. 그 애가 부르면 갈비뼈 안쪽이 둥둥 울린다. 붕 뜨던 발밑으로 닻이 달린다. 이샹은 버려진 책상에서 손을 떼어냈다.

 

명찰 떨어져서 문방구 다녀왔는데. Sans serif 없대.”

그냥 네 발음을 못 알아들으신 거 아닐까…. 일단 본드 사서 붙여 써봐.”

으웩. 본드 냄새 싫은데.”

 

이샹은 옷핀에서 떨어진 플라스틱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한국에는 미신이 많던데. 이름표가 떨어진 것에도 어떠한 징조가 있을까.

 

[왕혁상]

 

뾰족한 궁서체 폰트로 박힌 석 자는 ‘왕이샹’을 한국식으로 읽은 이름이었다. 부산에서 한번 납치당할 뻔한 뒤로 이모가 손수 개명시켜 주었다. 처음엔 꼭 남의 이름처럼 서로 낯을 가렸고, 가끔 잘못 적기도 해서 헉… 상… 님? 따위 떨떠름한 호명으로 수납처의 스타가 되기 일쑤였지만… 그래도 의주의 모국어로 불리는 제 이름이라 생각하면 썩 괜찮았는데.

 

명찰 망가진 김에 영어 명찰로 뽑으면 어때? 니콜라스로.”

 

크로스백을 어깨에 걸친 의주가 걸음을 나란히 겹친다. 이샹은 그 애의 발끝에 제 발끝을 맞추며 걸었다.

 

그건 주주만 부르는 이름.”

영어 폰트 이쁜 거 많잖아. 지렁이처럼 꼬불거리는 글씨로 Nicholas라고 쓰면 간지날 거 같은데.”

오. 주주. 방금 Nicholas 발음 좋은데.”

어학원 다닌 보람 있지? 이정도면 유학 가서도 대화에 무리 없겠지?”

 

웃고 있던 입매가 순식간에 뚱해졌다. 의주 입에서 유학 이야기가 나오면 기분이 삐죽해진다.

 

유학가면 잔뜩 있을걸. 니콜라스란 이름.”

 

괜히 퉁명하게 말했다. 나란히 걷던 의주가 어깨를 늘어뜨린 이샹을 돌아보았다.

 

거기 니콜라스들은 날 주주라고 안 부를 거잖아.”

“…….”

니콜은 니콜뿐이지.”

 

의주 입꼬리 양끝에 미소가 고인다. 깊고 우묵해서 걸음이 빠지기 좋았다. 의주의 웃는 낯을 쳐다보다가, 말없이 주먹으로 팔뚝을 쳤다. 아야, 왜 때려? 기껏 좋은 말 해줬는데. 억울하게 팔을 문지르는 의주 곁에서, 이샹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가끔 의주. 개다래 같이 말한다. 이샹은 고양이도 아닌데 정신을 못 차리고.

 

 

 

 

작년까지만 해도 의주가 건네는 개다래가 훨씬 후했는데. 요새는 행복한 ‘함께'의 시간이 번개보다 짧아졌다.

 

니콜. 나 어학원 8시에 끝나. 끝나면 같이 피씨방 가자.”

 

이샹은 휴대폰을 보는 의주의 옆모습을 보았다. 오늘은 토요일이고, 본래는 이샹이 의주를 독점하던 날이다. 의주네 어머니는 깐깐하면서도 허술한 구석이 있어서, 아들이 성적만 잘 받아오면 주말 자습을 한다는 핑계로 이샹과 놀러 다녀도 꿈에도 알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요즘 이샹이 보는 의주는 전부 옆모습이다.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는 옆모습. 게임하는 옆모습. 무언가 이샹이 아닌 다른 것에 집중하는, 완고한 옆모습. 옆모습의 의주는 앞만 본다. 이샹은 옆에 있는데. 끈질기게 붙여두었던 시선을 떨궜다.

 

게임…… 그렇게 재밌어?”

응?”

노래방도 간 지 오래 됐는데… 사장님이 너 왜 요즘 안 오냐는데.”

 

하고 싶은 말. 본질적인 바람을 비껴나는 말은 허접한 다트처럼 힘없이 까라진다. 이샹은 괜히 뒤꿈치로 아스팔트를 쿡쿡 밟았다. 땅에 적힌 ‘일방통행'이라는 하얀 페인트가 신발 밑에서 힘없이 신음한다.

 

요즘 의주는 이샹을 피한다. 가끔은 이샹을 보기 싫어 하는 것 같다. 앞길에서 아주 치워버린 것 같다. 바쁘게 그를 외면하는 의주를 볼 때면 이샹은 자신이 하기 싫은 과제나 쌓인 설거지가 된 기분이었다. 이샹은 그게 좋지가 않다.

 

하루만 게임이나 공부 안 하면 안 돼? 남는 시간 죽이지 말고 나 주면 안 돼? 11년 후에 내주는 시간 말고. 지금의 의주. 오늘의 의주도 옆 좀 내주면 안 될까.

 

말은 입속으로만 맴돈다. 뱉는 순간 의주의 눈가에 고여있던 손톱만한 불이 픽 나가버릴 것 같았다. 일 년 간 겨우 불 들어온 전구가 빛을 잃을 것 같았다. 침묵으로 조금 무거워진 공기가 깔깔하게 목구멍을 긁는다.

 

“……니콜.”

 

의주가 작게 부른다. 이샹은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다 알아. 주주는.

 

우리 지금까지 추억 많이 만들었지.”

 

내가 뭘 바라는지.

 

나중에 떠올리면서 많이 그리울 거고. 그리워서 슬플 거야.”

 

다 알면서 외면해.

 

피차 떠날 처지에, 슬퍼질 일 늘릴 필요 있을까……”

 

나에겐 오늘이 중요한데. 넌 혼자 내일을 사는 애니까.

 

그를 버려두고 묵묵히 걸어가는 의주의 마른 등을 응시했다. 너무 일찍 때렸다. 좋을 때 말고 지금 때렸어야 했는데.

 

그럴 거면 11년 후에 그런 목소리 내지 말던가. 그렇게 나 없어서 죽다 살았다는 목소리로 내 이름 부르지 말던가…

 

 

 

 

 

 

 

 

 

어바웃 의주(30)

 

상대: 니콜. 전화 돼?

상대: 목소리 듣고 싶은데

 

바람 피우는 기분이라고, 농담처럼 말한 적은 있지만.

 

이샹은 착잡한 기분으로 채팅창을 내려다보았다. 어학원 앞에서 의주를 배웅해주고 오는 길에 바톤 터치처럼 도착한 채팅. 현재의 의주가 외롭게 한 이샹을 미래의 의주가 위로한다. 꼭 의주를 의주의 대용으로 쓰는 것 같아서, 억울할 만큼 속이 켕긴다. 분명 둘 다 의주인데. 진짜 아닌데. 그런 거.

 

여보세요, 주주.”

[니콜. 잘 있었어? 밥은 먹었어?]

 

왔다. 나 없어서 죽다 살았다는 목소리. 비로소 우중충하던 기분이 맑게 개었다. 이샹은 어깨를 한 번 들썩이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요새 나 일곱 살 꼬마처럼 대해? 주주 아저씨인 거 까먹을까 봐?”

[미안한데. 11년 전에도 너 보면 미운 일곱 살 같았거든.]

 

의주의 웃음이 넘어온다. 낡은 책장을 풀썩 덮었을 때 피어오르는 먼지처럼, 가볍고 느리게 일어나 귓가로 내려앉는 웃음 소리. 의주가 웃어줄 때마다 그 소란이 가슴 속에 더께로 쌓인다. 어떤 쓸쓸한 순간에도 외투가 되어줄 것처럼 두껍게.

 

2024년의 의주는 꼭 이샹 좋으라고 태어난 주주 같다. 오만 원 받아챙긴 요술램프 지니가 이샹의 희망사항을 뭉쳐 빚어준 환상 같다. 이런 생각은 역시 바람인가? 물론 의주랑은 그런 사이 아니지만. 바람 날 사이 절대 아니지만. 친구로도 바람 날 수 있어? 이쪽도 저쪽도 주주인데?

 

아무튼, 오늘 이샹에겐 이쪽 ‘주주'를 위해 준비한 선물이 있다.

 

아저씨. 나 너 보여주려고 비밀 블로그 만들었어.”

[블로그?]

여기 들어와 봐. 비밀글이라 로그인해야 보여.

 

귀에서 휴대폰을 잠시 떼고, 블로그 링크와 함께 아이디 비번을 채팅으로 보냈다. 의주가 시킨 것을 수행하느라 잠시 조용해진 사이, 이샹은 가까운 버스 정류장 의자에 대강 엉덩일 붙이고 앉았다. 곧 귓가로 의아한 목소리가 들렸다.

 

[응. 로그인 했는데… 아무 게시글도 없는데?]

아무 문장 말해봐.”

[문장? 갑자기?]

응. 아무거나.”

[음……니콜 바보.]

아, 그거 싫어. 딴 거.”

[레이첼 맥아담스는 니콜라스를 더 닮았다.]

 

입가로 비뚜름한 미소가 걸렸다.

 

끊어.”

[니콜. 이런 거로 삐지…]

 

전화를 뚝 끊었다. 의주 말처럼 삐져서는 아니고. 주머니에 대강 챙겨온 노트와 펜을 꺼냈다. 펜 뚜껑을 이로 뽁 따서 껌처럼 뱉고, 문장을 날려 써내렸다.

 

‘McAdams JuJu’

 

카메라 전면. 노트 들고 한 장 찰칵. 사진을 비밀글로 블로그에 올렸다. 이샹은 실룩이는 입꼬리를 다리며 다시 의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거, 이거 뭐야? 방금 찍은 거야? 응?]

 

연결되기 무섭게 탄성이 박수갈채처럼 쏟아졌다. 기대한 반응 이상이었다.

 

이러면 미래 주주도 내 얼굴 볼 수 있잖아. 영상 통화의 사진 버전이다.”

[우와. 너 진짜… 이상한 데에서 머리 좋구나. 이런 방법은 생각도 못했어.]

칭찬 맞아? 나 보고 싶음 말해. 계속 사진 찍어줄게. 다음엔 뭐 입고 찍어줄까?”

[그렇게 말하니까 무슨 아프리카 비제이 같다. 니콜.]

어얼. 표현도 아저씨. 발상도 아저씨.”

[아저씨인 김에 말하는데…. 꼭 입고 찍을 필요 있을까?]

 

이샹은 무심코 한 손으로 가슴팍을 가렸다. 보는 눈도 없는데 갑자기 벌거벗은 기분에 얼굴이 확 뜨거워졌다.

 

으악. 주주 변태야?! 나 열아홉 살이야!”

[그러게 나이 좀 빨리 먹지 그랬어. 날래게 뛰어서 나 있는 2024년까지 와.]

나 가면 뭐 어쩌려고. 벗기시려고?”

[못할 나이도 아니긴 한데…]

“…….”

[하하. 농담이야…. 그보다는 너랑 놀고 싶은데. 얘기도 많이 하고. 근사하게 자란 모습 구경도 하고. 아. 우리 사무실 근처에 짬뽕 맛있게 하는 집 있는데. 니콜 데리고 거기도 가고 싶고…]

 

익숙한 목소리가 낯선 다정을 속삭인다. 그 발화는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막힘이 없어서, 꼭 어제도 그제도 이런 말을 들었던 것처럼 이샹을 속인다. 혈당이 오르는 기분으로 입가를 매만졌다. 이 썩어. 주주. 이렇게 말할 줄도 알면서.…

 

[니콜. 사진 또 올려줄 수 있어? 다른 사진도 보고 싶어. 너무 신기해.]

“…그렇게 좋아?”

[응. 실시간으로 뭐가 생기니까. 진짜 같이 있는 거 같잖아.]

 

안 보이는 곳에서 혼자 11년 먹어온 의주는 이샹을 피하지 않는다. 가끔은 이샹이 보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것 같다. 이샹 없는 길은 걷기 싫단다. 애타게 그를 찾는 의주를 볼 때면, 이샹은 어둡게 빛이 나간 의주의 눈동자 속 빛나는 알전구가 된 기분이었다. 이샹은 그게 좋았다. 무지막지 좋았다. 의주가 건네는 말들이. 웃음이. 목소리가. 그 모든 것들이 실재하는 우주가. 의주가. 좋았다. 좋아서. 이렇게 좋은 건 두 눈으로 꼭 봐야겠다 싶었다. 마음이 온통 여름의 색채로 물든다. 푸르고 붉고 뜨겁고 명랑한 색채로.

 

“……나도 좋아. 같이 있는 거.”

 

이샹은 고개를 젖혔다. 머리 위 이정표와 눈이 마주쳤다. 문득, 새삼스럽게. 이샹은 제가 정류장에 앉아있다는 사실을 곱씹었다.

 

정류장. 머무르는 곳.

8월 30일 이후로 이샹이 영원히 머무르는 곳.

 

삼각형 화살표가 날개처럼 달린 역 이름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표지판보다 키가 큰 가로수가 푸른 손바닥들을 느리게 흔들고 있었다. 이샹을 내려다보면서. 떠날 사람을 배웅하듯이.

 

주주. 진짜 그거 필요해?”

[그거?]

나 벗은 거.”

[……아냐. 농담이었어. 니콜.]

주주 손해지.”

 

의주. 이젠 추억이 생겨도 괜찮아?

네 곁에 슬픔이 늘어도 괜찮아?

 

 

 

 

 

현재의 의주는 갈수록 바빠졌다. 이샹이 넌지시 함께 있고 싶다는 말을 건넨 뒤로 더 바쁘게 된 것 같다. 아마도 일부러다. 피하는 거다. 단 일 초의 추억조차 용납하지 않으려고.

 

이샹은 갈수록 오늘의 의주보다 11년 후의 의주와 시간을 보냈다. 의주와 맞춰서 시계도 샀다. 단 일 초의 추억조차 낭비하지 않으려고. 시계를 사는 과정에서 작은 마찰이 있긴 했다. 무리하지 말라고 저렴한 보급형을 권하는 의주 vs 무리하고 싶다고 브랜드를 고집하는 이샹. (이샹. 까불지 말고 이거 사. 아니, 이거 주주 차기에는 너무 싼 거 아냐? 주주 어른이잖아. 너는 학생이잖아. 어차피 너 이 시계를 고르게 되어있다니까? 그게 예정 되어있는 미래라니까? 진짜 치사하네 주주. 맨날 혼자만 미래 컷닝하고. 답 정해져 있으면서 왜 물어보는데?) 결국 고급 브랜드이지만 보급형도 나오는 시계로 타협이 됐다. 아저씨는 비싼 시계 차야 멋 아니야? 했더니 의주가 그런 건 아반떼 타는 아저씨가 부리는 멋은 아니라고 웃었다. 이샹은 그걸 사기 위해 신발을 한 켤레 팔아야 했지만.

 

[시계 들여다볼 때마다 기억해. 11년 뒤 같은 시간에서 기다리고 있는 내가 있다는 걸.]

그런 거 매번 어떻게 기억해.”

 

하지만 시계를 차고 깨달았다. 손목을 꽉 물고 하루에도 몇 번씩 시선을 붙잡는 시계를 보면서 의주를 떠올리지 않기는 불가능했다. 가끔은 그저 째깍이는 초침을 보고 있기만 해도 심장이 쿵쿵 울리고 손발이 뜨거워졌다. 그것은 시계가 아닌 기록이었다. 초침이 한 칸 움직일 때마다 의주에게 내딛는 한 걸음이 시간 속에 기록되었다. 일 초. 한 걸음. 이 초. 두 걸음…… 11년은 4019일. 96456시간. 347241600초. 초침이 삼 억 번만 째깍이면 의주 곁이다. 이샹은 각인 마킹을 한다는 친구 아버지한테 부탁해서 시계 뒷면에 몰래 레이저 각인을 했다. EJ. 그 애 이니셜이 적힌 시계를 몸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삼 억 걸음을 걷는 그때까지 망가지지 마.

 

 

 

오늘은 월미도를 왔다. 이젠 11년을 사이에 둔 동행도 손을 잡고 걷는 것마냥 익숙하고 가깝게 여겨졌다.

 

와. 월미도 바이킹이 11년 뒤에도 있어? 그 전에 뿌서질 줄 알았어. 지금도 삐걱삐걱하는데.”

[거의 갈락말락해. 그러고 보니까 너 맨날 징징거렸지. 이거 부서질 것 같으니까 타지 말자고.]

“…진짜 부서지는 거 있거든. 놀이 공원 위험하거든.”

[지금은 탈 수 있겠네? 안 부서지는 거 알았으니까.]

바이킹 앞에서도 한 장 찍어볼까…”

[말 돌리는 거 봐.]

 

현란한 네온 컬러로 반짝대는 바이킹 앞에서 이샹은 입술을 쭉 내밀고 고개를 틀었다. 찰칵. 찰칵. 통화 끊기는 잠깐이 아쉬워서 급하게, 대충 여러 장 찍었다. 이샹은 눈을 찡그렸다. 태양이 너무 쨍해서 사진이 잘 보이지 않았다.

 

[찍은 거 블로그에 지금 올려줘.]

“No problem.”

 

오늘의 주주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줄어가는 것과 반비례하게, 내일의 주주를 위한 비밀 블로그 속 사진은 점점 쌓여갔다. 솔직히 이샹은 11년 후 의주 사진도 보고 싶었다. 그러나 과학자 형님들 말마따나, 미래는 과거로 갈 수 없다니까. 그 사실로 가장 속상해하는 건 의주고.

 

뭐. 고작 오만 원짜리 소원이다. 쥔 것 이상으로 욕심 사납게 굴지 않기로 한다.

 

 

 

 

王奕翔님이 월미도에 있습니다.

1분 전 · 인천광역시 중구 · 🌐

 

혼자 월미도 ㅋ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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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수

연락하지 왜 혼자 가냐 ㅋㅋㅋㅋ

이수림

빛이 나는 왕따><

조의웅

아까 @최정훈도 거기 감

최정훈

    조의웅 병신새낀가 날왜이새끼한테태그해 지워라

    임혜지

        최정훈 샹샹이좀 그만 미워해ㅡㅡ

        샹샹 셀카 많이 늘었다 ㅋㅋ

조의웅

ㅆㅂ 너 왜 갑자기 전체 공개로 올렸냐; 최정훈 태그됐잖아

王奕翔

   조의웅 실수ㅋㅋ설정어떻게바꿔?

 

그의 페이스북에서 가장 이른 게시글은 2011년이다. 전학갈 때마다 계정을 새로 파서 지층이 얇다. 친구도 지금 다니는 학교 애들이 전부다. 중학생 때 이샹은 수없이 교복을 갈았고, 수없이 많은 계정을 부수고 다시 지어왔지만, 이 학교에서 만든 계정은 꽤 나이테가 뚱뚱해지고 있었다. 사실 이 년도 넘게 다닌 학교는 여기가 처음이라.

 

푸르게 작열하는 염천 아래서, 이샹은 낡은 교복 셔츠를 펄럭이며 흐느적 흐느적 걸었다. 아, 더워. 너무 더워서 슬러시를 하나 샀다. 뺨에 가져다 대자 송글송글 맺힌 차가운 물기가 기분 좋게 열기를 식혔다.

 

주주. 우리 작년에 슬러시 사먹은 거 기억나?”

[너한테 작년이면 나한텐 12년 전이거든.]

아 맞다. 아무튼 그랬어. 주주는 포도맛 먹다가 혓바닥 까매졌잖아.”

[아, 그 말 들으니까 기억 난다. 너 그때 나 비웃으면서 슬러시 먹다가 브레인 프리즈 왔지. 머리 깨질 거 같다고 뒹구는 거 엄청 웃겼는데.]

주주는 왜 그런 거만 기억해?”

[그러게. 왜 난 너만 기억할까.]

“…….”

 

더워. 슬러시를 무심코 쭉 빨다가 띵하게 올랐다. 아. 브레인 프리즈… 인상을 찡그릴 정도로 아픈데도 비실비실 웃음이 샜다.

 

나 좋아하네. 주주가.”

 

뭐래. 작은 쿠사리가 한 박자 늦다. 때 늦은 부정은 긍정 아닌가. 숨죽여 키득거리면서, 이샹은 들고 있던 휴대폰을 귀에서 멀리 떨어뜨렸다. 슬러시를 든 손으로 브이자를 그리며, 찰칵. 이를 활짝 드러낸 셀카를 찍었다. 의주를 위한 추억으로 살쪄가는 16기가짜리 휴대폰이 용량의 한계를 호소하는 메세지를 띄웠다. 어쩔 수 없었다. 이 순간을 남기고 싶었다. 사진은 간직할 수 있는 형태의 추억이니까.

 

피차 떠날 처지에, 슬퍼질 일 늘릴 필요 있을까……

 

이샹의 생각은 달랐다. 슬픔은 추억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함께 들여다보면 추억은 아름다운 것. 그리운 것이 된다. 서른 살의 변의주 옆에는 서른 살의 왕이샹이 서 있을 거다. 정류장에 오고 가는 버스들처럼, 그 자리에 오래 머물지 않고 화살표를 따라 힘찬 걸음을 옮길 것이다. 거듭된 다짐은 언령과도 같았다. 말의 힘을 이샹은 굳게 믿었다.

 

셀카를 비밀 블로그에도, 페이스북에도 올렸을 때였다. …어? 귓가로 의주의 짧은 탄성이 들렸다.

 

왜?”

[아니. 방금 네가 블로그에 올린 이 사진…]

별로야? 이 보이고 웃었는데. 주주가 이 보이고 웃는 거 좋아해서.”

[…그건 아닌데. 많이 본 사진이라서.]

 

이샹은 고개를 기울였다. 방금 찍은 건데. 아, 미래 의주니까 이미 페이스북에서 봤나. 어쩐지 의주의 목소리가 침침했다. 많이 본 사진 또 봐서 지겨운가 했더니.

 

[네가…… 마지막으로 올린 사진이었어. 이게.]

 

마지막. 이샹은 그 뜻을 금세 눈치챘다. 이것이… 이샹이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올린 사진이었던 모양이다. 한톤 가라앉은 목소리로, 의주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11년 동안 이 사진을 볼 때마다……. 네가 언제 혼자 가서 이런 걸 찍었나. 했거든.]

“…혼자 아니잖아. 지금 주주랑 있는데.”

[옆에는 없잖아.]

주주가 안 온 거거든?”

 

그를 매몰차게 거절하던 주주의 모습을 떠올리고 이샹은 쬐끔 울컥했다.

 

주주가 나랑 추억 만들기 싫대. 진짜 피도 눈물도 없어.”

[……그 말. 오랜만에 듣네.]

 

위잉. 귓가로 모기 소리가 들렸다. 귓전을 짝 때렸다. 아야! 이샹의 뺨따구만 아팠다. 인간의 슬랩스틱을 비웃으며 모기는 유유히 날아갔다. 뺨이 간질간질한 걸 보니 한 입 잽싸게 빨고 토낀 게 틀림없다. 이샹은 비뚤어진 휴대폰을 고쳐 들고 부루퉁하게 물었다.

 

무슨 말?”

[피도 눈물도 없다는 말…]

왜 신경 써? 그냥 한국어 표현이잖아.”

 

심지어 그 말을 알려준 건 의주였다. 국어책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무뢰한'이라는 표현을 보고, 그럼 이녀석은 좀비냐고 물어봤더니 의주가 그랬다. 그만큼 메마른 사람이라는 거야. 몸에 있는 물기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그 말이 이상하게… 엄청 기억에 남았거든. 너랑 헤어진 이후로 11년 내내 여름만 되면 생각나더라. 네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눈물이 나지 않았던 것도. 네 말처럼 정말 피도 눈물도 없어서 그런가. 싶어서.]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

[알아. 그래도. 신경 쓰였어. 그냥. 나는 모기에 안 물리니까. 네 말이 맞는 것도 같아서. …그래서 소원 사이트에 모기에 물려보고 싶다고 쓴 거야. 그럼 나도 피도 눈물도 있는, 감정 있는 사람이라는 증명이 될 것 같잖아.]

“…….”

[하하. 좀 바보 같지?]

응.”

[아니라고 해야지.]

 

바보 맞는데. 비죽 웃음이 샜다. 서른 살이 아니라 세 살인 게 분명했다. 그 한마디에 11년과 오만 원을 지불했다니. 이샹의 말에 그만큼이나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니.

 

[…바보라고 하지 마. 얼마나 속상했는지 알아? 네가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나한테는 감정이란 게 정말 없나 싶어서. 11년이나 속상했다고, 난….]

 

바보…

그런 말은 나한테 감정 있길 바라니까 하는 소리잖아.

 

실없이 풀어지는 입가를 손으로 문질렀다. 의주는 속상했다는데. 이샹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사실 좋았다. 못됐지만 기분이 썩 좋았다. 의주는 그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는 거지. 이샹에게. 자기도 감정 있다고 보여주고 싶었다는 거지. 이게 세 살이 아니면 뭐야.

 

가르쳐줄까. 말까. 아. 입으로 고백하기엔 너무 쪽팔린데. 그렇지만 의주를 11년이나 속상하게 했다면 이샹이 나빴다. 이샹은 마음을 넓게 먹기로 했다.

 

그러니까. 그건 그냥 주주한테…”

 

퍽.

 

희번뜩한 통증이 뒤통수를 때렸다. 이샹은 잠에서 깨듯이 걸음을 멈췄다. 방금 전 그의 머리를 때린 운동화 한 짝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아싸, 헤드샷.”

최정훈 나대지 좀 마.”

 

색종이처럼 화사하게 돌아가는 관람차를 배경으로, 바지 통 꽉 끼는 아디다스 각다귀들이 이샹의 뒤에서 킬킬대고 있었다. 거 봐. 내가 이새끼 여기 있다고 했지. 페북 봤다니까. 이샹은 뒷덜미를 문지르며 그들을 돌아보았다.

 

안녕. 민철이랑 에이핑크들.”

 

고고 노래방의 연장선이었다. 그때 보았던 놈들과 거의 똑같은 구성이었으나, 이번엔 그 사이에 박민철이 끼어있다. 신발 한짝을 잃고 깨끔발로 경박스럽게 뛰고 있는 놈이 아마 이샹을 갈긴 범인일 것이다. 다른 애들보다 키도 한 뼘, 어깨도 한 뼘, 대가리도 한 뼘 큰 애. 굵은 허벅지를 감싼 험멜 바지가 터질 것 같았다. 명찰이 떨어진 것은 이러한 징조였나. 일진이 사나워서 사나운 일진을 만나고.

 

[……민철? 박민철이 있어?]

 

맞다. 통화중이었지. 이샹은 수화기에 대고 아무 것도 아니야, 여상하게 말하며 발치에 떨어진 운동화를 주웠다. 초록. 빨강. 초록이 번갈아 들어간 스트라이프. 브랜드 중에서도 브랜드 티 빡세게 나는 신발이다. 짠물 내음 풍기는 박민철과는 안 어울렸다.

 

[박민철이 왜 여기 있어? 걔가 또 시비 털어? 너한테 그렇게 처맞아놓고?]

처맞아서 그러는 거 아닐까….”

[싸우지 마. 그냥 가.]

 

의주가 드물게도 빠르게 쏟아내는 사이, 민철의 태생적으로 심술궂은 낯이 성큼 다가섰다.

 

야. 니 나한테 할 말 있지.”

 

의주 듣기 좋은 소리가 안 나올 것 같은 분위기. 이샹은 별 수 없이 휴대폰을 귀에서 떼어 주머니에 곱게 쑤셔넣었다.

 

왜 이러세요. 한국말 어려워요.”

 

곧바로 사방에서 분노가 작렬한다. 미친 새끼. 낭만 고양이는 교가보다 또박또박 처부르더니…. 또 어깨빵에 시동을 거는 최정훈을 박민철이 밀어냈다. 야. 꺼져봐. 껌 씹는 발음으로 후까시나 잡는 놈들과는 달리, 민철은 정말로 이샹에게 쌓인 게 많은 것 같았다. 놈은 네모난 떡판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린 채 이샹의 이마 정중앙을 검지로 쿡쿡 떼민다. 적당한 강약조절로 최대의 모멸을 주려는 손짓이다.

 

집밖 쳐 기어나오지 말고 가서 짱깨 딸배나 하라고, 거지년아. 나 니한테 깽값 죽어도 받아낼 거니까.”

“gang값을 왜 나한테 찾지. 경찰서에서도 혐의없음 떴는데.”

씨빨년아. 거기 CCTV 없는 거 알고 그런 거잖아. 너 내가 얌전히 봐주니까 장난 같냐?”

차남 같은데.”

얘 뭐래냐. 확 죽여버릴까 이걸.”

 

놈의 거대한 덩치가 태양을 어둡게 가린다. 싫어 못견디면서 왜 굳이 마주보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이샹은 민철이가 그렇게까지 싫진 않은데 말이다. 울그락푸르락하는 안면을 올려다 보면서, 이샹은 희미하게 미소를 그었다.

 

민철아. 아무리 그래도 너는 나 못 죽여.

나는 8월 30일까지 불사신이거든.

그날까진 정말 무서울 게 없거든.

 

민철.”

정답고 지랄이야, 미친 새끼.”

짭 신고 다니지 마.”

뭐?”

 

들었으면서. 짭은 이샹이 한국에 와서 가장 먼저 배운 말이었다. 山寨와 같은 뜻. 가짜. 이샹은 아까부터 들고 있던 줄이 세 개 그어진 운동화를 들어보였다.

 

미러급이긴 한데. 각인 이렇게 둥글면 짭이야. 나한테 gang값 못 받아서 짭 샀어?”

 

민철의 떡판이 서서히 벌게졌다. 정훈 곁에 서 있던 바가지 머리는 웃음을 참는 게 훤히 보였다.  이샹은 짭은 취급 안 한다. 신발을 양 손에 쥐고, 포즈를 취했다. 완벽한 레이업으로 슛.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신발은 이윽고 쓰레기 통에 골인한다.

 

3점.

 

그 위로 손에 들고 있던 슬러시도 처넣었다.

 

2점.

 

순식간에 5점을 득점한 런치타임의 마이클 조던은, 얼빠진 박민철이들을 남겨둔 채 그대로 토깠다.

 

야. 너 서라. 야. 서라고. 씨발년아! 박민철의 굵직한 고성이 달리는 등 뒤로 쩌렁댄다. 테마파크를 지나다니던 중학생들, 아이 데리고 나온 부모들이 급하게 그들을 피한다. 주변이 점차 한산해진다. 꼭 싸우라고 깔아주는 판처럼.

 

그렇지만 이샹은 싸우기 싫다.

날이 너무 덥고. 또… 주주가 싸우지 말랬다.

 

더운데 뛰기까지 하느라 땀이 맺혔다. 인적 드문 길을 골라 달린 끝에 텅 빈 공터 주차장까지 다다랐다. 이샹은 차오른 숨을 쌕쌕 몰아쉬었다. 허리를 쭉 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인적 없고. 차도 없고. 갈 곳도 없고… 공터를 둘러싼 탁 트인 서해 바다가 우중충한 푸른색으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바다……

의주가 건너갈 바다. 다다음주면 의주를 이샹 없는 세계로 데려다놓을 바다가 이샹을 소리없이 포위하고 있다.

 

퍽. 뒤에서 날아온 음료 컵이 이샹의 뒤통수에 부딪혀 떨어졌다. 차가운 음료가 뒤통수와 등짝을 흠뻑 적셨다. 축축한 뒷머리를 더듬자 손바닥으로 설익은 악의가 묻어난다. 차갑고 끈적하고 단내가 난다.

 

여기 니 편 없어. 새끼야.”

 

등 뒤에서 꽉 막힌 목소리가 들려왔다.

 

변태도 유학 간다며. 2학기부터는 니 싸고돌 호모 변태새끼도 없는데. 서글퍼서 어쩌냐?”

 

이샹은 여전히 손바닥을 응시했다. 음료를 머금은 손금이 잎맥처럼 푸르게 물들어 있었다. 앞머리 끝에 고인 푸른 음료가 피처럼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먹을 꽉 쥐고 뒤를 돌아보았다. 신발 한 짝도 잃어놓고, 인적 드문 주차용 공터까지 꾸역꾸역 쫓아온 놈은 비로소 이샹을 긁었다 생각했는지 도취된 표정이었다.

 

변태가 변의주야?

니 옆반이라 모르냐? 있어. 저 짱깨 후장 빠는 호모 새끼.

그럼 저새끼가 구멍이야?

미친 새끼야, 아!

귀 썩는다. 진짜.

 

아까부터 말했지만. 상투적이다. 상투적인 그들이 이루는 진부한 장면 속으로 이샹은 순순히 걸어들어갈 생각이 없다. 날이 너무 덥고. 또. 의주가 싸우지 말랬다. 민철의 의기양양한 송충이 눈썹을 보다가, 고개를 위로 젖혔다. 하늘이 보인다. 푸르다. 구름 한 점 없고. CCTV나 가까이 주차된 차의 블랙박스도 없이 탁 트인 파랑. 거기에 계절감을 보태는 작은 벌레의 비행음. 애앵, 하는 소리와 함께 눈 앞으로 모기가 날아간다.

 

민철. 거기 모기.”

뭐래냐 또.”

내가 잡아줄게.”

 

 

 

뻑.

달콤한 주먹이 민철의 뺘마리를 갈겼다.

 

 

 

 

 

 

 

 

 

*

 

 

 

작년에 왕이샹이 처음으로 박민철을 팼던 경위를 조명하자면.

 

또래 집단에 몸 담은 어린 것들은 오감이 칼날처럼 세워져 있다. 그들은 교실을 떠도는 기류를 면도칼처럼 날카롭게 긁어낸다.

 

- 니콜. 조금 떨어져서 걷자.

- 왜?

- …이상한 소문 났어. 우리.

 

의주는 이샹보다 눈치가 기민했다. 세영이가 알려줬어. 음. 그러니까. 우리끼리 음악실 들어가는 걸 봤나 봐. 박민철이. 그걸 두고. 섹스하러 가는 거라고, 게이… 뭐 그런 거라고. 자꾸 그러고 다니나 봐. 안 그래도 자꾸 내가 너랑만 다니고… 너희 집 열쇠도 가지고 있으니까. 좀 더 그래 보였나봐.

 

그냥 친해서 그런 거라고 말하긴 했는데…. 앞으론 너무 가까이 붙어있는 거 안 좋을 거 같아.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이샹은 조금 놀랐다. 한국에서 그런 생각이 흔한가. 남고생 둘이 붙어다니는 일이 쉽게 사랑으로 연관지을 일인가. 그렇게 치면 승우도 매일 성진이네 집에 간다. 인제는 태윤이를 자기 무릎에 앉히길 좋아한다. 심지어 박민철과 같이 다니는 동욱은 범준과 섹스하는 흉내를 내기도 했다. 뒷치기라며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던 걸 왕이샹이 다 봤다. 그 깨어있는 인식이 다른 누구도 아닌 꼴통 박민철 입에서 나왔다는 게 의외였다. 의주 별명으로 변태 따위 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일차원적인 놈인줄 알았는데.

 

- 소문 같은 걸 왜 신경 써? 그냥 다니면 되잖아.

 

왕이샹이 보는 세상은 태생적으로 청순했다. 그래서 그러한 소문이 사실은 멸시이며, 화교인 왕이샹을 욕보이고자 되는대로 뱉어진 조롱이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 몰라. 신경 쓰여.

 

의주는 달랐다. 이샹보다 훨씬 눈치가 빠른 의주의 눈썹 아래로 먹구름이 잔뜩 껴 있었다. 이샹은 그를 걷어주고 싶었다. 괜히 시원하게 웃었다.

 

- 괜찮아. 소문 난다고 죽는 것도 아니잖아.

 

그것은 늘 죽음에 쫓기는 이샹이기에 가능한 무적의 마인드였다. 의주는 역시 달랐다. 먹구름이 걷히긴 커녕 날카로운 번개로 벼려져 이상에게 꽂혔다.

 

- 그런 식으로 치면… 네 앞에서 내 문제는 전부 사소해지는 거잖아. 죽고 사는 문제를 어떻게 이겨.

-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어.

- 알아. 그치만… 나에겐 여기도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야. 되도록 즐겁게 잘 지내고 싶어.

 

의주의 말을 듣고, 이샹은 조금쯤 반성했다. 그 애의 반듯한 뿔테 안경에 비치는 세상은 이샹이 보는 것과는 다를 수 있다. 의주에겐 학교도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고, 이 작은 세상에서 의주는 누군가에게 욕보이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샹이 의주를 좋아하면 의주를 욕보이는 일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조금 뼈 아픈 깨달음이었다.

 

 

 

 

그맘때쯤 이샹은 여름 하굣길에 늘어진 능소화가 모두 의주로 보였다. 장마를 마중 나온다는 꽃에서 그 애를 떠올리고, 비가 오면 능소화가 전부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영원히 장마가 오지 않길 바랐다. 하필이면 그를 닮은 꽃의 꽃말이 그리움이라는 데에는 어떤 운명적 개연성도 없겠지만. 그런 마음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함께 있어도 그리웠다. 그 애가 숨 쉬는 하늘이 소중했다. 학교가 끝나고 이샹의 집으로 찾아온 의주가 ‘저 또 왔어요 이모' 하고 웃으면 온 집안이 반짝 밝아졌다. 새 전구알처럼 이샹의 침침하던 생활에 빛을 가져다 주었다. 이샹이 마련해둔 책상에 제 집처럼 눌러앉아 비로소 숨통이 트인다는 표정으로 만화책을 읽거나, 아이팟으로 노래를 듣거나, 이샹과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는 의주는 분명히 이샹의 곁을 제 ‘있을 자리’로 삼아주고 있었다.

 

방랑자처럼 청소년기를 배회하던 왕이샹이 그런 애를 좋아하지 않을 방법은 없었다.

변의주를 좋아하는 건 별이 빛나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므로 의주가 그것을 드러내지 않길 바란다면, 빛을 꺼뜨리는 대신 더 많은 별들 사이에 감춰야 했다. 이샹이 모두와 두루두루 어울린 이유라면 그게 가장 컸다. 의주랑 있고 싶어도 가끔은 그를 홀로 두고 공을 차러 뛰쳐나갔다. 모두의 생일을 외웠다. 안 친한 애들이 없었다. 딱 한 무리. 박민철 패거리 빼고.

 

박민철은 엄석대 같은 애야.

처음 같은 반이 됐을 때, 의주는 놈에 대해 심플하게 설명했다. (엄석대가 몇 반인데?)

 

듣기론 한 살 꿇어서 교복 입은 성인이랬다. 십 년만 일찍 태어났으면 제물포에서 한 따까리 해먹었을 놈이라고 선생들이 손수 꼬리표를 붙였다. 이 꼴통(엠창은 의주가 쓰지 말랬다) 고등학교가 늪이라면 그 맨 위를 헤엄치는 악어. 걔 형이 깡패고 아버지는 판사래. 그래서 형이 사람 죽이면 아빠가 묻어준대. 박민철이도 조폭될 거래. 후문에서 아저씨들이 걔한테 인사 박더라. 온갖 소문을 달고 다니는 것만은 이샹과 닮아있었으나, 왕이샹과 박민철 사이의 차이점은 그거였다. 왕이샹에게 편하게 어깨동무를 걸치고 다니는 친구들도 박민철 앞에선 목을 수그린다는 것.

 

그러나 왕이샹의 눈에 박민철은 ‘짭’이었다. 그와 그의 이모를 쫓는 정품들에 빗대면, 박민철은 되다 만 불량품. 짭 중에서도 가장 요란한 짭. 한마디로 놈의 불량에는 패기가 부족했다. 죽여버린다, 말을 뱉었으면 꼭 죽여줘야 진짜가 될 수 있는 건데. 걔는 그 말을 수십 번 뱉어놓고 아직까지 한 명도 죽이지 못했으니까.

 

박민철과 처음부터 틀어진 건 아니었다. 같은 중국어 반이 된 초반엔, 박민철이 먼저 왕이샹에게 접근했다. 얼굴만 보고 같은 과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이샹은 생긴 게 좀 양끼라고, 의주가 그랬으니까. 그러나 의주는 박민철을 불편해했다. 민철은 아무도 안 웃긴 얘기, 누굴 욕보이는 얘기를 혼자만 재밌게 떠들었고, 그런 걸 의주가 싫어했다. 이샹은 의주를 안다. 의주는 재미없게 선넘는 놈, 말보로 레드 피는 놈 안 좋아한다. 담배 중에서 냄새가 제일 별로라고 했다.

 

박민철이 처음 담배를 내밀었을 때, 이샹은 웃으면서 거절했다.

 

- 라이터는 실밥 태우려고 산 거라서.

 

그 뒤로 박민철은 왕이샹을 대놓고 무시했다. 무리에 훠궈마냥 넣었다 뺐다 하더니 아예 따로 놀게 됐다. 짱깨라는 말을 수시로 뱉었다. 의주는 그걸 아주 싫어했다. 의주가 표나게 그 말을 싫어해서, 이샹은 오히려 기분이 괜찮았다. 어차피 이샹을 상처줄 수 있는 건 이샹이 아끼는 상대 뿐이었다.

 

- 저기 게이 새끼들 지나간다.

 

하지만 의주는 일일이 상처를 받는 것 같았다. 의주에겐 여기가 세상이었으니까. 민철이 그들을 대놓고 이죽인 날. 유독 말수가 적어진 의주가 하굣길에 이샹더러 한 소리 했다.

 

- 왜 아까 가만히 있었어.

- 아까?

- 박민철이 우리한테 뭐라고 했잖아.

- 아. 게이.

- …….

- 별로. 기분 안 나빠서.

 

그냥 그렇게 보였나 보다 했다. 그렇게 제 속이 다 보이나 싶기도 했고. 이샹을 건너보던 의주가 애매하게 웃었다.

 

- 난 기분 나빴어.

- 내가?

- 그 새끼가.

- 민철이 때문에 상처 받아? 주주.

- …….

 

의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처받은 눈이었다.

 

- 걔 혼내줘?

- …아냐. 학교 끝나면 떡볶이나 먹으러 가자.

 

의주는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혼내지 말라는 눈은 아니었다.

 

그날은 학교 끝나고 의주와 떡볶이를 먹었다. 노래방도 갔다. 의주가 부르는 할머니 메들리에 맞춰서 춤도 췄다. 의주. 오늘은 집에 못 부를 거 같아. 왜? 약속 있어? 응. 중요한 약속. 평소보다 의주와 일찍 헤어지고, 이샹은 집으로 가서 옷부터 갈아입었다. 검은 후드. 검은 마스크. 검은 바지. 왕자이 우유 사탕을 주머니에 쑤셔넣고, 곧장 로데오 거리로 갔다.

 

박민철은 어느 때처럼 로데오에서 가장 CCTV 없고 인적 없는 골목길에 서 있었다. 거길 박민철은 ‘삥터’라고 불렀다. 친구들과 갈 때도 있지만 삥을 독식하기 위해 혼자를 선호한다는 걸, 박민철이 삐댈 때 들어둬서 알았다. 이샹은 마침 혼자서 삥 뜯은 돈을 세고 있는 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표정이 썩은 민철에게 4개 챙겼으나 오는 동안 하나 까먹어서 3개로 줄어든 사탕을 내밀었다.

 

- 날 놀리는 건 상관 없지만 의주한테는 그러지 마.

 

그랬다. 이샹이 내민 화해의 제스처는 곧바로 이샹 얼굴에 던져졌다.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이샹에게 뭘 던지는 걸 좋아했다. 회유 결렬.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묵묵히 사탕을 줍는 이샹을 비웃으면서, 민철은 담벼락처럼 큰 거구를 껍신댔다.

 

- 떡치러 가냐? 변태랑?

 

그때 왕이샹을 노려보던 박민철의 눈 속에는 못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 한 놈만 걸려 찢어지라고 박아둔 못.

찢어져야 한다면 누구인지. 이샹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다음날 이샹은 교무실에 불려갔다.

박민철은 전치 3주를 진단받았다.

 

아직 대만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무렵. 친구와 싸우고 돌아와서 이모에게 혼났던 날. 집 근처 정육점을 하던 펑 아저씨는 9살이었던 이샹에게 싸움의 법칙을 알려주었다. 승패를 결정하는 건 덩치나 기술 같은 게 아냐. 개싸움은 무조건 맞는 걸 겁내지 않는 놈이 이긴다. 쫄지 마라. 주먹을 쥐었으면 빼지 말고 죽어라 덤벼. 그땐 애한테 좋은 거 가르친다고, 펑 아저씨마저 이모에게 혼나긴 했지만. 이샹은 아저씨에게 배운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몇 학년 몇 반인지 모를 ‘엄석대' 같은 박민철을 병원에 눕힐 수 있었다. 이샹도 멀쩡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입원하지 않았으니 그런대로 괜찮은 맞다이였다.

 

마스크에 모자까지 쓰고 팼는데도 담임은 귀신같이 이샹을 교무실로 불러서 추궁했다. 아무래도 박민철이 꼰댄 게 분명했다.

 

- 파쿠르 하다 다친 건데요.

 

이샹은 시치미를 뗐다. 광대뼈 같은 잘 보이는 자리에 멍을 달고도 그냥 뻗댔다. 담임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지만, 증거가 없었다. 삥터는 보는 눈이 없어서 민철에게 골라진 장소였고. 그곳에서 민철 역시 그대로 당했을 뿐. 그렇게 고삐리들의 각축은 유야무야 넘어갔다. 고요한 해프닝으로 끝날 수 있었다.

 

그런데 의주가 그럴 줄은 이샹도 진짜 몰랐다. 줘터진 얼굴로 등교한 이샹을 보고도 의주가 그냥 가만히 웃길래. 어쩌다 다쳤냐고 묻지도 않고. 그냥 웃으면서 많이 다쳤냐고 하길래. 파쿠르하다 다쳤어. 대답한 게 전부였다. 선생님한텐 씨알도 안 먹혔어도 의주한텐 먹힐 줄 알았다.

 

그날 종례가 끝나기 무섭게, 의주는 이샹을 교탁 앞으로 끌고 갔다. 그냥 데려간 것도 아니고 질질 끌고 갔다. 영문을 몰라 눈만 끔뻑대는 이샹을 앞세워놓고, 의주는 예의 말간 낯으로 교실 아이들을 향해 물었다.

 

- 이 찐따 이렇게 만들어 놓은 애 누구야?

 

참고로 그때 의주는 반장이었다.

 

- 주주…… 잠깐.

- 너네 이샹이 무섭게 생겨서 일진이라고 막 씹었지? 얘 이렇게 처맞고 다녀. 찐따야.

- ……의주.

- 놔봐. 자꾸 이상한 소문 퍼뜨리고. 애 기스 내고. 한국 와서 고생하는 이샹이 불쌍하지도 않아?

- 의주. 됐어…… 그만해……

 

이샹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항변했다. 솔직히 도망치고 싶을 만큼 쪽팔렸다. 그러나 의주는 이샹의 팔뚝을 꽉 움켜쥐고 놔주지 않았다. 연약한 의주가 그렇게 아픈 힘을 낼 수 있을 줄 몰랐다.

 

- 얘들아… 자꾸 증거도 없이 이상한 소문 만드는 거 아니야. 내가 싫을 수는 있어. 내가 행실을 잘못한 부분이 있으면 따로 얘기해도 괜찮아. 그런데 이샹은 너희한테 잘 했잖아. 좋은 친구잖아. 나한테도 이샹은 소중한 친구야. 점심시간에 족구나 같이 하는 게 친구 아니고, 서로 도와줘야 친구인 거잖아.

 

반장 선거 때도 생각했지만, 의주는 정말 리더처럼 말을 하는 재주가 있었다. 실제보다 더 어른스럽게 자신을 내보일 줄 알았다. (이샹은 바보 만들어놓고. 어쩌면 그것 또한 의주를 더 어른스러워보이게 만드는 장치일까?) 아이들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체로 다 이샹의 친구였으니까. 박민철과 어울려 다니던 놈들만 무섭게 이샹을 꼬나보고 있었다. 남친 납셨네. 게이 새끼들. 교실 뒷편에서 박민철 절친인 최정훈이 꼬롬하게 빈정거렸다. 왕이샹은 잠깐 최정훈도 삥터로 데려갈지 고민했다. 싸우는 건 나쁘지만, 반드시 싸워야 할 땐 보는 눈 없는 곳에서 안 보이는 데만 잘 골라서 패라고 이모가 그랬고. 의주한테 저따위로 말하는 건 아무래도 용서가 안 됐으니까.

 

이샹은 등 뒤로 주먹을 꽉 쥐고 곁을 훔쳐보았다. 의주는 최정훈을 향해 또 읽기 힘든 반쪽 미소를 짓고 있었다. 능숙하게 넘기네. 역시 리더다. 어른스러워. 주주… 이샹이 소리 없이 감탄하고 있을 때. 의주가 예고없이 교탁에 놓여있는 화병을 집어들었다. 바닥이 둥글고 목이 길고 꽃이 꽂혀있는. 선생님이 가장 아끼는 예쁜 유리 화병이었다.

 

뭐야.

어쩌려고? 설마 던지려고? 그걸?

눈을 휘둥그렇게 뜬 이샹 앞에서, 의주는 전혀 예상치 못한 행동을 했다.

 

박 터지는 파열음이 교실을 요란하게 휩쓸었다. 짧은 비명. 경악한 표정들. 넋 나간 급우들의 이목을 스포트라이트처럼 받으며, 의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방금 화병을 박살낸 이마는 파편에 긁혀서 피가 배어 있었고, 부슬부슬한 머리카락엔 화병에 담겨있던 꽃잎 이파리가 대롱거렸다. 콧대부터 턱끝까지 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의주는 끝까지 웃음의 형상을 잃지 않았다.

 

-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얘들아. 우리 이상한 오해들 풀고 잘 지내보자… 알았지?

 

그때 의주의 둥근 눈에서, 이샹은 처음으로 못을 발견했다. 박민철의 눈에서 발견한 것과 비슷했으나, 그보다 단단하고, 결연하고, 무서울 정도로 곧게 박힌 못이었다.

그곳에 걸려 찢어질 엄두를 내지 못했으므로, 교실 속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고.

 

그 날 저녁엔 의주가 교무실에 불려갔다.

 

 

 

 

 

 

 

 

 

안개처럼 떠돌던 불온한 소문은 그날부로 교실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박민철 패거리들도 의주 앞에서는 썩 거들먹대지 않았다. 이해 불가한 미소는 때로 이해 가능한 폭력을 압도하는 것이었다.

 

이샹네 집에 의주가 다시 놀러온 건 사흘 뒤였다.

 

- 나 가출했어.

 

집채만한 캐리어를 끌고 온 의주를, 이샹은 군소리 없이 집으로 들였다. 함께 사는 그의 이모는 이런 부분에서 몹시 자유로운 편이었고, 의주를 이미 제2의 동거인처럼 여기고 있었다. 잘 구기면 사람 하나 들어갈 법한 캐리어의 짐을 정리하는 걸 구경하면서, 이샹은 넌지시 물었다.

 

- 아주 가출했어?

- 아니. 그냥 나가라길래 홧김에 나온 거야. 나가라고 하면 나갈 수 있는 애라는 거 보여주고 싶어서. 다시 돌아가긴 해야지.

- 왜 나가라고 해? 주주한테?

- 공부 안 하고 쓸데없는 거 하고 다닌다고. 교무실에 소환된 게 무슨 가문의 수치처럼 여겨지나 봐.

- ……그럼 주주 부모님은 나 싫어하겠네. 나 때문에 불려간 거니까.

 

이샹은 조금 울적해졌다. 이샹에게 부모와 같은 이모는 의주를 좋아하는데. 의주 부모님은 본 적도 없는 이샹을 벌써 싫어할 거라고 생각하니까. 캐리어를 풀던 의주가 그런 거 아냐, 하며 웃었다.

 

- 탓할 게 필요하신 거지. 내가 불량이라고 믿기 싫으니까.

 

이샹은 의주 곁에 쪼그려 앉았다. 그 애의 교복에서 옅은 담배 냄새가 피어올랐다. 이샹은 주머니에 든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다. 또 꽁초를 주워서 피웠을지, 아님 누가 줬을지. 이샹은 몰랐다. 그저 그 애가 물고 있던 가여운 실밥을, 제가 끊어내지 못했다는 사실만 알 수 있을 뿐. 의주… 하고 부르려던 때, 이샹의 눈에 위화감이 들어왔다.

 

의주의 손목을 확 끌어당겼다. 어어, 하고 휘청인 의주가 맥없이 끌려왔다. 가까이서 보니 한쪽 뺨이 반대쪽보다 확실하게 붉었다. 이샹은 훅 올라오는 분노를 가까스로 억누르며 물었다.

 

- 맞았어?

- ……파쿠르 하다가 다쳤어.

- 거짓말 하지 마. 의주 100미터 달리기도 18초잖아.

- 니콜. 열받게 하지……

- 왜 때려? 왜 아들을 때려?

 

이샹은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의주는 때릴 곳이 없었다. 한 대 치면 죽을 것처럼 생긴 애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자기들 보기 예쁘라고 불편한 구두를 신기고, 손찌검까지 할 수가 있지? 의주의 뺨을 감싼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복숭아의 표면을 만지듯이 얼굴의 조형을 덧그렸다. 의주는 꼼짝하지 않았다. 긴 속눈썹을 깔고. 이샹의 손길에 얼굴을 맡기고 있던 의주가 작게 웃었다.

 

- 너도 남의 아들 때리고 다니잖아.

- …….

- 너지? 박민철 두들겨 팬 거.

 

아주 둥근 눈매가 이샹을 똑바로 바라본다. 그곳에 박힌 못에 이샹의 시선이 걸린다. 눈 돌릴 수 없도록 못 박아버린다.

 

- ……아닌데. 나는 나보다 약한 애 안 때리는데.

 

이샹은 자신없이 말했다. 거짓말 같은 건 손금처럼 들여다보는 의주는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별 수 없이 털어놓았다.

 

- 일단 패봐야 나보다 쎈지 약한지 아니까……

- 어땠어?

- 쎄던데.

- 그럼 됐어. 잘 팼어.

 

혼낼 줄 알았는데. 의주의 따뜻한 손이 뒤통수에 닿았다. 그것이 느린 속도로 이샹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개를 쓰다듬는 방식이었다. 이샹은 개도 아닌데 그 손길을 떨쳐내지 못했다. 의주가 안 혼내서. 칭찬해서. 세다면서 왜 걔만 입원했냐고 따지지도 않고. 그래서. 그게 좋아서 가만 있었다.

 

- 그래도 다음부터는 꼴받는다고 사람 패지 마.

 

그렇게 말하면서도 의주는 웃었다. 능소화의 색을 닮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는 모습을, 이샹은 말없이 바라보았다. 세상이 처음 빚어지는 것을 목격한 인류 최초의 신자와 같은 눈빛으로.

 

사랑받아야 마땅한 것들이 세상에는 있었다. 갓 태어난 어린 동물. 이샹 취향에 딱 맞는 펑키한 옷만 내놓는 패션몰. 소싯적 별명이 오드리 햅번이었던 그의 이모. 그리고 주주.

주주.

말랑하고. 찌르면 푹 들어갈 것처럼 부드럽고. 흠집 나면 책임지고 사야 하는 과일처럼 손톱조차 조심해야 하는 주주.

의주라 부르면 지켜줘야 할 동생 같고, 주주라 부르면 조금은 애틋한 사이처럼 느껴지는 주주.

 

- 억울하네.

- 뭐가?

- 아무 짓도 못 했는데. 소문만 난게.

- ……

- 난 아직 주주랑 손도 못 잡아봤는데.

 

그 말은 꼭 그렇게 하고 싶다는 투로 흘러나갔다. 의주는 눈치챘을 텐데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저물녘 노을이 융단처럼 깔린 옥탑방. 그들은 무대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배우들처럼 제 자리에 쭈그려 앉은 채 서로를 응시했다.

무언가 태어날 것처럼 붉은 저녁이었다.

 

- …오늘 이모 늦게 와.

 

아니다. 이미 태어나 있었던 감정에 정확한 이름이 붙을 것 같은 정서였다고 해두자. 무언가 입밖으로 걸어나갈 것처럼 간지러워서, 이샹은 조용히 그런 말을 꺼냈었다. 이모, 늦게 와. 오늘 여기 주주랑 단둘이야. 그러니까……

 

고개가 기울어졌다. 눈과 눈이 닿을 것처럼 가까워졌다. 의주가 고개를 숙였다. 조심스럽게 턱을 잡아들었다. 눈동자에 떨림이 비쳤다. 언제부터였을까. 그 애의 이름 끝자를 두 번씩 부르기 시작한 때부터였을까. 아니면 바보처럼 놀러다닐 때? 담벼락 아래 쪼그리고 꽁초를 줍는 그 애의 정수리를 본 순간? 아니면 이름이 뭔지도 모를 때. 머리 잘 뻗치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름도 모르던 그 애를 똑바로 바라보며 자리로 걸어가던 전학 첫날? 언제부터인가 이샹은 그랬다. 게이라는 소릴 들어도, 기분이 나쁘긴 커녕 보란 듯이 손을 잡고 싶어지는 그런 기분을. 언제부터 의주한테.

 

말은 없고 눈을 읽는 시간. 서로의 시선만 실타래처럼 얽히고 설키는 정적. 의주가 먼저 눈을 피했다. 닿을 것처럼 가깝던 입술로. 그 애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 니콜… 다음엔 사람 때리지 마.

- ……안 때릴게.

- 폭력이 나빠서가 아니라…… 니콜이 잡혀갈까 봐 무서워서 그래.

- 안 그럴게. 안 때릴게.

 

안 때리면 괜찮나. 사람만 안 때리면 되나. 선행 조건일까. 너를 좋아하기 위한. 그렇다면 이샹은 지킬 수 있었다. 사람 안 치는 건 얘를 안 좋아하는 것보다 훨씬 쉬울 것 같았다.

 

- 어디 안 갈 거지. 니콜.

 

다음 말이 들려오기 전까진.

 

- 졸업하고도… 여기 있을 거지.

 

그것은 물음보다는 부탁이나 명령처럼 들렸다.

그래서 이샹은 깨달았다. 그게 진짜 선행 조건이라는 것.

 

그때 이샹은 어땠더라. 눈을 크게 뜨고. 의주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바닥에 놓여있던 손을 힘있게 감싸쥐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답하지 못했다.

 

 

이 고등학교에 온 이래로, 이모는 넌지시 전학 얘기를 여러 번 꺼냈다. 지금껏 이모가 그렇게 말하면 이샹은 늘 따랐다.

그러나 처음으로 거부했다.

이 학교에서 졸업하겠다 선언했다.

 

이모의 생존적 불안과 공포를 이해하면서도, 유독 여기서만 치기 어린 고집을 부렸다. 조용히 살게. 조심할게. 눈에 안 띌게. 이모는 내가 꼭 지켜줄게. 그러니까. 졸업까지만. 그때까지만. 그 애 곁에 머물 수 있는 가장 최후의 날을, 딱 그때까지만 미뤄달라고.

 

어쩔 수 없었다. 이샹은 의주와 보내는 하루가 소중했다. 인생이 가보지 않은 길을 걷는 여행이라면, 주머니에서 금 같은 시간 줄줄 쏟는 한이 있어도 한 걸음이라도 그애랑 같이 걷고 싶었다. 운동화 백 켤레, 바퀴벌레 안 나오는 집, 미래에서 번호 다 불러주는 로또, 그딴 거 하나도 안 부러웠다. 일평생의 슬픔이 그를 따라다니더라도 감당할 것이다. 결국 이별이 돌아온 계절처럼 찾아오더라도. 목숨을 걸더라도. 죽음을 잊고 시선을 잇고, 마음을 읽고 온기를 입고.

 

너와 있고 싶었다.

그냥.

있고 싶었다.

그럴 수 없게 되는 순간이 반드시 올 걸 알면서도. 딱 하루라도. 1시간. 1분. 1초. 0.0001초라도 더.

의주와 함께 있고 싶었다.

 

난 그런데. 넌 어떠니.

 

소리 내서 묻지는 못했다. 무력한 침묵은 그 애의 눈에 깊은 흠집을 남겼다. 새카맣게 불이 꺼지는 의주의 눈동자를 보면서도, 이샹은 가장 중요한 순간 그 애가 듣고 싶어하는 약속을 들려줄 수가 없었다. 지금이 아닌 미래에도, 네가 원한다면 모든 걸 다 버리고 너의 곁에 있을 거라는, 그런 무책임한 확언을 그땐 건넬 수 없었다.

 

잡고 있던 의주의 손이 느리게 빠져나갔다. 정서가 흩어졌다. 붉은 노을이 어둡게 잠겨갔다. 오늘을 아끼지 않는 마음과 내일의 약속이 필요했던 마음이 미끄러졌다. 이샹은 멀어지는 의주의 손을 다시 잡지 못했다. 손에 닿았던 체온의 부스러기만 만지작거리면서. 소리없이 고개를 떨궜다.

 

 

그 다음날이었다.

의주가 처음으로 유학에 대해 말을 꺼낸 게.

 

 

 

 

 

 

 

 

*

 

 

 

오늘따라 하늘이 아주 높다.

한 178cm만큼.

 

이샹은 놀이공원 주차장에 대짜로 뻗어서 멍하게 하늘을 보았다. 한 시간 내내 처맞아서 그런가. 좀 노래진 것 같기도 하고. 이것으로 깽값 지불이 되었길 바랐다. 남자끼리 주먹다짐 한 거 가지고 1년이나 꽁해있는 박민철 같은 사채업자는 빚을 달아둘수록 귀찮았다.

 

찌뿌둥한 몸을 우드득 일으켰다. 구석구석 골고루 밟힌 곳마다 욱씬거린다. 뼈 안 부러진 저렴한 부상들이라 다행이었다. 그보다는 단물을 뒤집어 써 끈적한 몸이 불쾌했다. 비라도 내려주면 좋을 텐데. 꼭 이런 날만 화창하다. 손목 시계를 들여다보니 시간은 오후 7시 9분. 지금 출발하면 의주가 학원에서 나올 때 딱 맞춰 기다릴 수 있다. 문득 시계에 난 하얀 기스가 눈에 들어왔다. 땅을 구르는 사이에 어딘가에 긁힌 게 분명했다. 얼마 전에 구매한 새 건데. 매일 닦아주고 애지중지한 건데. 시계에 난 기스를 문지르다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다행히 시계와 달리 휴대폰은 무사했다. 이샹은 불이 들어와 있는 화면을 보고 어깨를 움칠 굳혔다. 아까 끊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통화 화면이 떠있었다.

 

어디까지 들었지.

멀어서 안 들렸을지도 모른다.

1년 전엔 잘 팼다고 칭찬받았는데. 이번에 쳐맞은 거 들키면 혼낼지도 몰라. 이쪽 주주는 좀 더 꼰대니까.

 

이샹은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태연하게 폰을 귓가로 가져왔다.

 

여보세……”

[얼마나 다쳤는지 사진 올려 봐.]

 

쳇……

 

“……싫어.”

[너 줘퍼맞았지?]

한 대는 쳤어.”

[한 대 치고 열 대 맞으면 그게 쳐맞은 거지.]

“…….”

[속상하게 진짜. 내가 대신 때려주지도 못하고 어쩌지? 박민철 그 비겁한 새끼, 지보다 쪼그만 애를 상대로 다굴을 놓냐….]

 

교실 앞으로 끌고갈 때도 그렇고. 의주는 이샹의 편을 들어주는 척 은근히 멕이는 구석이 있다.

 

[…싸우지 말랬는데.]

 

귓가로 차분한 목소리가 넘어온다. 욱신거리는 발을 움직여 가까운 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시야로 옅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흙이 엉긴 턱을 손등으로 훔쳐냈다. 덥다.

 

싸운 거 아냐. 피하지 않은 거야.”

[왜 그랬어. 네가 걔들보다 훨씬 빠르면서.]

빠르면 뭐해. 느려터진 주주도 못 따라잡는데.”

[…….]

 

정류장으로 버스가 들어온다. 버스에 탄 이샹을 노년의 승객이 흘끗 쳐다본다. 꼬라지가 화려했을 것이다. 머리는 끈적하고. 종아리에는 바다보다도 시퍼런 멍이 들었다. 박민철 하나만 잡고 죽어라 팬 손마디는 까져서 피가 나고. 아프지 않은 곳이 없는데도 달콤한 냄새가 진동했다.

 

덜컹거리는 버스에 멀거니 서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의주도 이샹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주는 말을 고르는 것 같기도 했다. 가끔 의주는 답이 느리니까. 절대 틀린 답을 고르지 않으려고 오래오래 고민하는 애니까.

 

그러니까 의주가 하는 말은 다 맞다.

급한 건 언제나 이샹 뿐이고.

 

걔가 나한테 그랬어. 너 없어서 서글프겠다고.”

 

그걸 박민철이 어떻게 알았을까. 맞다. 서글프다. 의주도 알아주지 않는 걸 박민철 입에서 들었다. 어차피 인터폴도 안 될 거면서 미국 가는 거. 이샹이 죽는 것보다 그게 더 서글펐다. 말도 안 되게 서글펐다.

 

떠나는 건 항상 나였는데. 남겨지는 게 이렇게 아픈 줄 몰랐어.”

[…….]

그때 그냥 뻥칠 걸 그랬나. 졸업하고도 너랑 있겠다고 뻥쳤으면, 너도 유학 안 갔을까.”

[…….]

아님. 내가 박민철을 패서 네가 유학을 가게 됐나. 안 팼으면 교무실에 너희 어머니 불려올 일도 없고. 너도 떠날 일 없고. 나도… 죽을 일 없었나.”

 

의주는 말이 없었다. 이번에 대답하지 못하는 건 의주다. 거짓말을 못해서. 이샹이 들려주고 싶은 말을 찾지 못해서. 그런 거 존재하지도 않아서. 덜컹. 버스가 과속 방지턱을 밟는다. 바닥이 크게 흔들렸다. 이샹은 거친 숨을 들이켰다.

 

왜 주주는 아무렇지 않아?”

 

목 끝에서 찰랑이던 감정이 뚜껑 열린 음료처럼 순식간에 엎질러졌다.

 

왜 그렇게 쉽게 정했어? 난 죽기 직전까지 주주랑 있고 싶었는데 주주는 왜 졸업까지 기다려주지도 않고, 그렇게 일찍 나를 떠나기로 했어?”

[니콜…]

솔직히 나한테 감정 있었어? 주주. 감정 있는데도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이건 11년 뒤의 의주에게 할 말이 아닌데. 아닌 줄 알면서도. 말해도 달라질 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주주 가는 거 싫어. 주주가 일 분 일 초만 더 나랑 있어줬으면 좋겠어. 나 좀 봤으면 좋겠어. 나 떠나지 말았으면 좋겠어. 언젠가 헤어지더라도 지금 여기, 나랑 있는 게 지금의 주주면 좋겠어. 11년이나 지나서 나 생각하지 말고, 당장 나랑 있었으면 좋겠다고……”

 

기어코 말끝이 들썩였다. 손으로 얼굴을 와락 덮었다. 턱끝에서 흐르는 이것은 이샹이 삼켜온 감정이다. 어른스러워야지. 어리광 부리면 안 되지. 의주의 앞길을 막을 순 없어. 그 애의 등을 씩씩하게 밀어주고, 그 애의 고개가 무거운 날, 너무 무거워서 땅에 흩어진 꽁초 밖에 볼 수 없는 그런 날엔 책상 한 칸 만큼의 있을 자리를 내어주는 거. 그게 그거니까. 사랑이니까. 이샹이 생각하는 사랑이라는 건 그런 거니까. 그런데. 사랑이라는 게 이렇게 외로운 거였던가. 함께일 때도 혼자여야 하고, 혼자일 땐 두 배로 혼자가 되어야 하는 일인가. 너의 세상에서 내 사랑은 언제까지고 터부시되어야 하나. 그래서 기어코 빛 보지 못한 채 삼켜져야하는 감정인가. 처음부터 없던 마음처럼. 그래야 해? 꼭 그래야 해? 주주. 시간 죽이지 마. 나랑 있을 시간 죽이지 마. 나는 너에게로 가는 삼 억 초 중에 단 한 걸음도 낭비하고 싶지가 않은데. 너는 지금도 여기 있으면서. 나와 만나고. 얘기하고. 숨쉬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노래 하고 춤을 추고 비를 맞으며 미친 것처럼 뛰어다닐 수도 있으면서. 왜 나랑 있어주지 않아. 왜 나를 네 인생에서 비어져나온 실밥처럼 끊어냈어. 라이터를 내민 건 나였는데. 너를 발견한 건 나였는데. 나였는데…

 

이마부터 코끝까지 힘주어 쓸었다. 엉망으로 얼크러진 이목구비에서 슬픔을 털어내고 싶었는데, 눈물처럼 자꾸자꾸 원망이 흘러나왔다.

 

이번 정류장은 찬스 어학원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주학역입니다……

 

의주가 다니는 학원이다. 이샹은 더듬더듬 차임벨을 더듬었다. 삐-익. 긴 하차음이 귓가로 이명을 남긴다. 이명이 가시자 작은 소음들이 들려왔다. 아득히 먼 시간을 걷는 사람들의 웅성거림. 아득히 먼 시간에 태어났을 낯선 멜로디. 아득히 먼 곳에 서 있는 의주의 숨소리. 그 애로부터 태어나는 옅은 들숨…그리고 날숨.

 

[닿고 싶다.]

 

혼잣말처럼 작은 속삭임.

 

[안아 주고 싶어. 니콜.]

 

덜컹.

버스의 문이 열렸다.

 

[안고, 그냥…… 눈 앞에 있었으면 좋겠어. 네가…….]

 

이샹은 눈을 느리게 끔뻑였다. 여기 안 내리세요? 기사의 걸걸한 외침이 들려왔다. 그러나 이샹은 꿈쩍하지 않았다. 휴대폰 뒤에 끼워둔 교통카드를 찍는 대신, 휴대폰에서 잠시도 귀를 떼지 않았다.

 

[감정 없는 애랑 키스할 리가 없잖아. 바보야……]

 

끼익.

버스 문이 닫혔다.

 

 

 

 

8/20 21시 6분

 

한 정거장을 지나쳐서야 카드를 던지듯이 찍고 내렸다. 이샹은 버스가 지나친 길을 되돌아 뛰었다. 죽자고 뛰었다. 까지고 피멍 든 무릎이 시큰거렸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학원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건물의 으슥한 뒷문으로 책가방을 맨 의주가 막 걸어나오고 있었다.

 

이샹은 한달음에 의주에게 달려갔다. 그 애가 저를 알아볼 새도 없이 왈칵 품에 끌어안았다. 놀란 낯이 이샹을 돌아보았다. “니콜. 너 얼굴이…” 그 애가 입을 여는 순간, 이샹은 앞뒤 없이 입술을 겹쳤다.

 

 

21시 7분

 

째깍.

세상이 멈춰선 것 같았다.

 

이샹은 허리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한여름인데도 추위를 느끼는 사람처럼, 조금의 빈틈도 없이 의주와 몸을 밀착했다. 입술을 마주 대고 문질렀다. 머리 위로 깜빡이는 간판. 불어오는 밤바람. 데운 두부처럼 따뜻하고 부드럽게 뭉개지는 입술. 섣불리 열리지 않는 입. 코로 들이키는 숨. 간지러운 비누향. 풋내 나는 입맞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누구도 꼼짝하지 않고 입술을 겹치고 있는 두 사람. 이샹의 팔뚝을 움켜쥔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면서도, 의주는 얼어붙어 있었다. 밀어내지도 당기지도 못하고.

 

 

21시 8분

 

건물 안쪽에서 터벅터벅 발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몸이 세차게 떠밀려났다. 퍽 소리가 날 정도로 아팠다.

 

너 미쳤어? 나한테 왜 이래?”

주주….”

나한테 왜 이러냐고!”

 

의주가 드물게도 목소리를 높였다. 입을 손등으로 가리고, 주변에 누가 봤을까 두리번거리면서, 이샹으로부터 급하게 걸음을 뒤로 물린다. 의주가 내뱉는 말과 향하는 방향이 일치했다. 이샹을 향한 회피의 몸짓. 분노의 표현. 밀어내고자 하는 의지였다.

 

너, 이런 밖에서…… 제정신이 아니구나.”

밖 아니면 돼?”

뭐……?”

한 번 더 해도 돼?”

어디서 줘터지고 와가지고, 머리 다쳤으면 병원이나 가. 나 집 갈 거야. 엄마가, 택시비 줘서… 아무튼 나 오늘 따로, 따로 갈 거니까.”

 

말 잘하는 의주답지 않게 중언부언 횡설수설 한다. 이샹을 등지고, 그 애는 도망치듯 택시 정류장으로 뛰었다. 이제는 얼굴보다 자주 보는 의주의 등을 지켜보면서, 이샹은 심장에 손을 얹었다. 두근. 두근. 두근…

 

이래서 키스한 거였어. 주주. 이래서 키스한 거였다고.

 

11년을 건너서 그에게 키스를 전한 거였다. 미래의 그가 과거의 이샹에게 영향을 끼친 거였다. 백 원짜리 동전으로 긁은 벤치 위 낙서처럼, 이샹의 오늘에 미래의 의주가 묻어있는 거였다.

 

너도 나의 오늘에 새겨지고 있었어.

우린 서로가 서로에게 흔적을 남기고 있는 거야.

 

손목에 찬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9시 10분. 시간은 결코 멈추는 법 없다. 한 걸음 씩. 느리게. 그러나 꾸준히. 지치거나, 1초에 한 칸을 움직이겠다는 약속을 어기지 않고. 의주가 기다리는 그날을 향해 나아간다.

 

남은 시간 삼 억 초.

또 일 초가 지나갔다.

 

 

 

 

 

 

 

 

 

 

 

 

 

 

 

 

 

 

 

 

 

13:08:29 ━━━━━━━━━━━━━˖◛⁺˖ 24: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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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방 옮겨 다니며 도박장 연 화교 구속

노래방으로 위장하고 있던 업소, 사실 결탁해 도박 사이트 운영하며 돈 세탁해

인천광역시경찰청 수사과는 17일 미추홀구 노래방으로 위장한 도박장을 연 혐의로 대만인 C씨(42, 여) 씨 등 2명이 불구속 입건했다. 대만인 사장인 C씨는 노래방을 이용하는 청소년들을 특정 방에 안내하고, 남은 방에 불법 마작 도박을 주선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 조사 결과 C씨는 불법 도밥장을 약 11년 이상 운영해온 것이 드러났다. 이용자는 화교를 포함한 이민자들로, 수사과는 대만과 중국계 조직폭력배 60인을 도박행위자로 수사해 입건할 예정이다…(후략).

 

 

변의주 기자 toiletruler@mail.com

 

댓글(18)

 

나는빡빡이입니다 설마 ㅈㅎ동 gogo 노래방? ㄷㄷ

asdf1234 와 고고 노래방 옛날에 진짜 자주 갔는데~ 충격~

구월동불주먹 나도 고딩 때 자주 치러 갔음 ㅋㅋ

섹시여자만 두분은 서로 다른 목적으로 노래방을 가신듯… ㅋ

 

 

의주는 마우스를 몇 번 딸깍거리며 메일 수신함을 정리한다. 건조한 눈이 모래밭처럼 따끔거린다. 고개를 젖혀 안약을 몇 방울 넣고서야 시야가 맑아진다. 비단 댓글뿐만이 아니어도 금번 기사는 수확이 좋았다. 품과 시간을 들인 만큼 사건의 개요가 명확해져, 부장의 컨펌이 날 정도가 됐다. 태의의 소스로 천우징의 노래방에 들락거린 도박꾼 중 천우징의 측근이 있다는 걸 파악했다. 그 뒤를 따라다니면서 천우징의 소재지, 그리고 강남경찰청 외사과와 결탁한 클럽 대표에 천우징이 엮여 있다는 것 또한. 무수히 쌓인 사진과 데이터를 정리하면서, 의주는 기자와 탐정과 경찰 사이에는 분명 교집합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자연히 니콜라스와 대화 간격은 전보다 드물어졌다. 본격적으로 천우징의 흔적을 뒤쫓기 시작한 까닭이다. 그간 직업적 본분에 배임하긴 했지. 그래도 직업적 성찰보다 개인적인 사감이 더 큰 마와리였다. 잠은 커녕 끼니를 때우기도 어려워 만성적인 위염이 도졌다. 고고 노래방 인근 상인 인터뷰를 따다 듣도 보도 못한 쌍욕에 쫓겨나기도 했고, 고소와 안위를 협박하는 메일쯤이야 이미 다 스팸 메일함으로 보냈다. 와중에 니콜라스와 틈틈이 연락을 했지만, 그를 최우선으로 삼진 못 했다. 무엇보다 밤낮이 뒤바뀐 생활 탓에 대화 빈도가 현저히 줄었으니까. 의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의주는 피로회복제에 아르기닌 환과 종합 비타민을 타 혓바닥 위로 때려박는다. 의자 위로 뒷목을 곧게 뻗는다. 코피가 터질 것처럼 코 점막이 온통 시큰거린다.

 

태의 씨. 나 조금만 눈 붙일게.”

 

네. 깨워드릴게요. 태의의 대답이 멀게 들린다. 의주는 고요히 눈을 감는다. 감은 눈꺼풀 위로도 형광등 불빛이 현란해서 어지러웠다. 정각까지만. 날이 넘어가기 직전까지만. 눈을 붙이기로 의주는 홀로 다짐한다.

 

니콜라스의 기일을 세기까지 사흘도 채 남지 않았다. 왜 하필 이 시기에 바빠진 걸까. 디데이가 멀지 않은 무렵에. 그 애가 죽은 8월의 종말이 성큼성큼 달려오고 있는데. 니콜라스가 죽지 않은 과거를 만들기 위해 한 달을 채워왔다. 이대로라면 니콜라스가 죽을 리 없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기일이 가까워질수록 편집적으로 불안해진다.

 

손목 시계의 초침이 희미하게 살갗을 두드린다. 니콜라스에게 새로 커플 시계를 산 것처럼 말했지만, 새 시계를 사지 않았다. 늘 차고 다니던 고장난 시계를 수리점에 맡겼다. 오래되고 브랜드가 없는 시계인데 수리까지 하시고. 정말 중요한 시계인가봐요. 그렇게 말하는 수리상에게 무어라 대답하진 않았지만. 중요했지. 기실 휴대폰이나 노트북이 있을 땐 보지도 않는 악세사리지만. 오직 부의 척도를 나타내는 아이템으로 전락한 지 오래라, 그의 나이대에는 비싼 걸 차는 편이 면이 산다는 걸 알면서도. 니콜라스와 정확히 똑같은 값싸고 단일한 시계를 차고 싶었다. 멈췄던 그 애의 시간을, 의주의 손목 위에서 정확히 걸어가게 만들고 싶었다.

 

시침과 분침이 12 위에서 직렬한다. 8월 29일. 자정.

이제 정말 단 하루.

 

 

의주는 눈을 뜬다. 졸음이 타르 진액처럼 묻은 눈꺼풀을 홉뜨고 다시 채팅창에 접속했다. 늦은 시간이지만 자고 있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그래서 금방 답장이 돌아올 거라는 것도.

 

나: 뭐해?

상대: 주주 기다렸는데 ㅋ

상대: 바쁜 거 아니야?

 

의주의 짐작은 틀리지 않는다. 끈덕하고 따끔한 눈을 문지르다, 다시 안약 몇 방울을 채웠다. 본의와 상관없는 눈물이 뺨 위로 죽죽 흐른다. 무감히 시큼한 눈과 볼을 닦아내면서, 의주는 니콜라스를 떠올린다. 수화기 너머를 온통 먹먹하게 적시던 니콜라스의 눈물을. 저와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의주의 시간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울던 그 애를. 또 아무렇지 않게 나를 기다렸다고 말하는 어린 니콜라스를.

 

그 순간 의주가 달리 무엇을 말해줄 수 있었을까. 니콜라스가 바라는 그 시간만은 제 것이 아니라서, 내주겠다 약속조차 할 수 없는 지금의 의주가.

 

안아주고 싶었다.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 그 애의 질감과 부피를 품 안에 찔러넣기를 원했다. 11년 간 니콜라스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시시각각 색을 달리하거나 아예 빛을 잃기도 했지만. 그 순간만큼 강렬한 초록이었던 적은 없었다. 신호와 규칙 같은 건 전부 무시하고 니콜라스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멈춤도, 돌아가는 법도 모르는 것처럼.

 

의주는 책상 한켠에 던져두었던 담배를 집어든다. 피로한 적이 없던 것처럼 일어난다. 키보드를 두들기던 태의가 얼뜬 표정으로 의주를 올려다본다.

 

선배? 눈 좀 붙이신다면서요?”

죽어서 자지 뭐. 담배 피우면서 깨고 올게.”

 

 

 

나: 안 바빠.

나: 오늘은 뭐 할까?

 

 

 

 

 

 

 

 

 

 

 

 

8/29 새벽 2시 31분

 

인적 끊긴 옥상에서 희붐하게 연기가 샌다.

옥탑에선 늘 니콜라스와 함께네. 뒤섞이는 날벌레와 마천루의 불빛을 보며 의주는 그렇게 생각한다. 후덥한 여름밤은 공기가 검고 습지다. 의주는 귓가에 감겨드는 벌레의 날개 소리를 듣는다. 이 벌레. 모기인가. 나를 물어주려나. 아니면 물렸는데 가려운 줄도 모르는 걸까. 피로에 통점 몇 개를 잃고 무감해져서. 뻑뻑한 눈가를 쓸며 한숨을 쉬었다.

 

[주주. 요새 엄청 바빠 보이던데… 몸은 챙기고 있는 거 맞아?]

 

니콜라스가 의주의 이름을 되부른다. 의주는 담뱃재를 털다 조그맣게 웃음을 터뜨린다.

 

어느 주주 걱정?”

[당연히 지금 나랑 얘기하고 있는 주주 걱정이지!]

기자가 바쁜 건 당연하지. 뭐.”

[지금도 일하러 가야 하는 거 아냐?]

 

지극히 다정하고 어린 목소리. 생장의 기로에 선 19세가 의주를 안위를 걱정하고 있다. 당장 며칠 간을 죽지 않기 위해 살아야 하는 어린애가. 니콜라스의 목소리를 곱씹으며 의주는 눈을 지르감는다. 폐부 깊은 곳에서 숨을 퍼올린다. 아, 이래서 결혼하나. 목소리 들으면 피로가 풀리니까……. 열아홉의 니콜라스를 아들로 두어야 할지, 아내로 두어야 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아들이 되든 아내가 되든 머리가 아프겠지만.

 

너보다 중요한 건 없지…….”

 

피도 눈물도 없어.

 

여전히 너는 그렇게 말할까. 니콜라스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그리고 죽고난 후 환청처럼 지나간 말을 들을 때마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다고. 어쩌면 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 맞겠다고. 그렇게 믿었던 때도 있었다. 목소리나마 니콜라스를 돌려받고 나서야 알 수 있다. 역시 그렇지 않아. 틀려. 분명히 알고 느낀다. 나에게 없던 것은 너뿐이었다는 것을.

 

의주는 니콜라스가 죽지 않는 미래를 생각한다.

상상 속의 니콜라스는 여전히 아름답고, 다정하고, 생동한다. 어리지 않을 뿐이다. 니콜라스는 아무래도 의주의 편지에 답장을 보내 주겠지. 그 집에 사는 한은 계속. 니콜라스가 준비했지만 의주가 남기고 간 책상에 앉아서. 그 또한 의주를 생각하면서. 글자 속의 의주를 만지고, 상상하고, 그리면서. 영영. 계속…….

 

그 계속이 11년이나 이어지진 않더래도.

 

 

 

어둠 속에서도 눈이 부시다는 것처럼, 의주는 희미롭게 눈을 뜬다. 희고 붉은 건물의 불빛이 벌레의 날개처럼 어룽거린다. 의주의 상상 속에서 니콜라스는 살아있지만 둘은 여전히 함께가 아니다. 니콜라스는 의주에게 단 한 번도, 함께 있겠다는 확답을 들려준 적이 없었다. 의주가 유학을 결정한 것도 그때문이 아니었던가. 최초는 충동으로, 그리고 이후에 원망으로 니콜라스의 부재를 선택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

 

귓가에 댄 휴대폰이 가늘게 울린다. 의주는 미리보기로 뜬 알림을 본다. [선배 얼른 내려와요 지금 B 엔터 대표 차 나갔어요] 천우징 소재 인근에서 뻗치기를 하던 수습기자 슬희의 문자다. 간략히 알겠다는 답장을 보내고, 의주는 채 다 피우지 않은 담배를 지져 끈다. 손날로 연기를 흩트리며 니콜라스에게 말한다.

 

내가 기자가 된 건 너 때문인 거 같아.”

[엥? 왜?]

기자가 사실 탐정이랑 비슷하기도 해. 사설 형사. 너 쫓아다니던 그 사람… 꼭 찾고 싶었거든.”

[주주. 내 복수 해주고 싶었어?]

복수까지는 모르겠네. 사람이 참 사소한 계기로 직업을 갖기도 하더라고. 적성에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기는 없어. 악플이 달리거나 반응이 안 좋을 때도 있고… 꾸준히 읽어주는 사람도 있지만 엄청 소수야.”

[패줄까?]

하하… 그런 것도 읽어야지. 다 나아지라고 하는 말이잖아.”

[의주가 왜 나아져야 하는데?]

 

옥상 계단의 문을 열다 의주는 멈춰 선다. 왜 나아져야 하는지. 그런 질문은 처음 들어본다. 니콜라스가 주먹을 쥐듯 단호하게 말한다. 의주. 응원해주는 말만 들어. 단 한 명이어도 그 사람은 분명 의주 편이잖아. 편 들어주는 건 한 사람만 있어도 돼. 세상에 의주 편 한 놈도 없어지면, 그땐 내가 네 편 해줄게. 무조건.

 

무조건.

 

의주가 아는 한 니콜라스는 늘, 있는 힘껏 현재만을 살아가는 인간이다. 무조건. 언제나. 단 한 명. 그토록 절대적이고 극단적인 말이 한 치의 과장도 없이 진실일 수 있다니. 의주가 나아지지 않아도. 피도 눈물도 없어도. 여전히 형편없고 겁이 많은 인간일지라도. 조건 없이 의주의 편이라는 말은 니콜라스에게 불변하는 진리와도 같을 것을 안다. 의주는 후텁지근하고 거무스름한 옥탑의 밤을 돌아보며 괜스레 묻는다.

 

내가 바보 같은 짓 하면?”

[귀엽지.]

나쁜 짓 하면?”

[변명 들어준다.]

남들이 다 욕해도, 넌 평생 내 편 들어줄 거야?”

[평생. 주주 1호팬.]

 

의주는 빙긋이 웃었다. 누가 볼 새라 그 미소를 금세 지운다. 나, 다녀올게.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채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애랑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걸까.

 

평생. 니콜라스의 단언을 되뇌인다. 그의 평생이 얼마나 덧없을 만큼 짧았는지 안다. 의주의 8월은 전부 그 ‘평생’의 지속을 위해 쓰였다. 달리는 전차처럼 순식간에 삶을 주파하고 떠나버린 너를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손가락은 습관처럼 즐겨찾기를 해둔 비밀 블로그를 누른다. 이제 의주는 시간이 나면 페이스북 대신 이곳을 열어본다. 니콜라스가 찍어 올린 사진들이 주르륵 세로로 도열한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았다. 그가 일상처럼 더듬어온 페이스북의 마지막 사진 속에서도. 니콜라스가 의주 좋으라고 올려준 이 사진들 속에도. 그의 곁에 의주는 없다.

 

우리는 참 긴 시간 외로운 공생을 해왔구나.

 

왜 이렇게까지 혼자여야 했을까. 서로를 쉼없이 생각하면서도. 왜 늘 서로 없이 살아가는 법을 연습하는 사람들처럼.

 

 

 

 

 

*

 

 

 

니콜라스 없이 살아가는 법.

유학을 준비하던 시절은 전부 그 방법을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의주의 열아홉은 니콜라스를 제하면 전부 의미없는 것들 뿐이었다. 너의 100과 나의 100은 밀도부터가 달라. 그러니 네가 함부로 아무 곳에서 뿌린 입맞춤이 나와 같을 수 없었던 거야. 그맘때의 의주는 늘 삶에 압도되어 어쩔줄 모르는 채였다. 많은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의주를 제하고도 남을 니콜라스의 것들. 떠나간 의주를 두고 살아가는 니콜라스. 니콜라스의 가장 많은 시간을 부여받고도 만족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떠나는 마당에,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가고 싶지 않았다. 니콜라스는 의주 말고도 주변이 번화하지만, 미국으로 떠난 의주는 오롯하게 혼자뿐이니까. 그러므로 니콜라스의 입맞춤을 견딜 수 없었다. 매일밤 그 입술의 감촉을 더듬으며 잠들 스스로는 너무 추할 것이다. 내가 떠나도 너는 금세 다른 누군가 생길 텐데. 나만. 나 혼자만.

 

그러나 그 모든 번민은 니콜라스의 부재 같은 건 정말로 염두에 두지 않아 가능했던 일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악을 떨었음에도, 의주가 보스턴의 로건 국제 공항에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니콜라스에게 도착했다고 연락을 보낸 것이었다. 니콜라스는 오래도록 메시지를 읽지 않았다. 섭섭했던 걸까. 화가 많이 났나. 마음 풀면 안되나. 이제 얼굴 보고 화해할 수도 없는데.

 

몇 번 더, 이곳의 여름은 한국보다 훨씬 서늘하다는 메시지를 보냈었다. 여전히 니콜라스는 답장하지 않았다.

 

그 나이대에도 의주는 촌스러운 아날로그의 진정성을 믿었다. 문자로는 마음이 전해지지 않나, 해서 밸도 없이 편지를 써서 보냈다. 잠들기 전 꾹꾹 글자를 눌러 쓰면서, 사랑은 연필로 쓰라는 노래를 떠올렸다. 볼펜으로 쓰니 이건 사랑이 아니겠네, 생각했다. 외국으로 편지를 접수하는 지난한 과정 동안, 니콜라스도 이렇게 이방인이라 마음이 파랗게 외로웠을까.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몰래 생각했다.

 

2주 동안 매일매일 트래킹을 봤다.

우편에 수취가 떴을 때, 답을 기다리지 못 하고 두 통의 편지를 더 보냈다.

여전히 답은 오지 않았다.

국제 우편을 묶음으로 샀다.

한 장을 보내는데 70달러가 들어서, 여러 장을 동봉해서 보냈다.

첫 번째 생일이 무의미하게 지나갔다.

여전히 답은 오지 않았다.

 

반백 번째 편지를 쓸 때쯤부터 이미 그 행위는 고집이자 습관이 되어 있었다. 오늘 먹은 식사가 내용의 전부일 때도, 본질적으로 이곳의 의주는 아주 외로운데 그건 전부 너 때문이라는 철없는 얘기일 때도. 그러나 비로소 이방인이자 외지인인 너를 이해할 수 있다는 내용일 때도 있었다. 답은 꾸준히 오지 않았다.

 

두 번째 생일이 무의미하게 지나갔다. 혼자 사온 케이크를 앞에 두고, 의주는 볼펜이 터진 것처럼 파랗게 얼룩진 마음을 전부 니콜라스의 탓으로 돌렸다. 네 탓이야. 좀 멀어졌다고 날 못본 체하는 네 탓이야. 그 녀석이 날 잊을 리 없어. 그럴 리 없어. 절대. 다시 만날 때 울려준다고 했지. 절대 안 울 거야. 내가 물어뜯을 거야. 2년 동안 빠짐없이 니콜라스를 생각했다면 거짓말이지만. 적어도 쉬지 않고 니콜라스를 생각했다. 그러다 보면 서러움이 그의 곁에 친구처럼 와 앉는 기분이었다.

 

2년 동안 여든두 장의 편지를 썼다. 답장은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의주는 편지를 그만 두었다. 가장 마지막 편지에 적은 문장은 다음과 같다:

 

니콜라스. 나 다음 달 한국에 가.

 

 

 

 

 

칼리지 1학년 생활을 마친 방학, 의주는 2년 만에 한국에 입국했다. 인천 공항에 내려 친지 방에 잠시 묵을 짐을 푸는 반 나절 내내. 의주는 내내 주학동의 붉은 벽돌집으로 가는 길을 곱씹었다. 모국의 공기 같은 건 궁금하지 않았다. 채 옷도 갈아입지 않고 니콜라스의 집으로 택시를 탔다. 너 왜 편지 답장 안 했어. 한국에서 미국으로 편지 보내는 거, 그 반대보다 훨씬 쉬워. 그게 어려우면 메시지 정도는 읽을 수 있었잖아. 니콜라스에게 쏘아붙일 말 정도야 준비해왔다. 계절이 두 번씩 바뀌었는데도 발걸음은 그 애 집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었다. 문을 두드렸다. 몇 번이고 니콜라스의 이름을 불렀다. 확신에 차 왕이샹, 소리쳤다. 문 너머에서 누구냐는 물음이 들렸을 때. 그게 이샹의 입에서는 나올 일 없는 말이고, 그 목소리 또한 의주에게 낯설다는 것을 직시했을 때. 의주는 불현듯 이상한 예감을 느꼈다.

 

편지. 받긴 했나?

 

현관문을 열고 나온 건 전혀 모르는 얼굴의 중년의 여성이었다. 어깨 너머의 집은 구조가 전부 바뀌어 있었다. 의주는 창백해진 낯으로 몇 번이나 주먹을 쥐었다 폈다. 새로운 집주인에게 편지의 행방을 물었다.

 

- 아, 편지 보내신 분이에요? 저희가 여기 이사 온 지 좀 됐는데. 같은 이름으로 계속 국제 편지가 와서 난처했거든요. 엇갈렷나 보다. 전 주인분들이랑.

 

그녀에게 82통의 편지를 전부 돌려 받았다. 의주는 뜯기지 못한 편지 한 움큼을 들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더는 그가 마음대로 열 수 없는 현관문이 조용히 닫히고도. 한참을.

 

두툼한 편지를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찔러넣고 집으로 돌아왔다. 수취인 불명이 된 편지 쪼가리는 모두 캐리어 구석에 처박아버렸다.

 

알아듣기 위해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이 곳에서 비로소 혼자인 것 같았다.

 

 

 

짧은 방학이 무의미하게 흘러갔다. 분명 한국은 보스톤보다 더운 여름인데. 의주는 때때로 서늘한 부재감에 소스라쳤다. 유예했던 외로움이 그를 예고없이 습격했다. 그런 날이면 페이스북에서 니콜라스의 사진을 봤다. 니콜라스를 찾아가는 것 말고는 어떤 계획도 세워두지 않았기에, 그것이 일과의 전부였다. 아마 고교 동창인 혜지의 게시물이 눈에 띄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시간만 죽이다가 홀연히 미국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혜지는 모 대학의 중국어학과에 진학한 것 같았다. 활짝 웃고 있는 혜지의 얼굴에서, 의주는 필연적으로 니콜라스를 떠올렸다. 혜지가 니콜라스랑 친했지. 충동적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나 의주인데, 기억나지. 미국에서 들어와서. 시간되면 만나지 않을래.

 

 

- 의주야. 너 분위기가 변했다.

 

의주의 얼굴을 보자마자 혜지가 그렇게 말했던 것을 기억했다. 우리 친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만나자고 해서… 난 또 네가 나한테 마음 있는 줄 알고 긴장했거든……. 농담하며 웃는 혜지의 얼굴은 여전히 곰살맞았다. 이샹이 생각보다 착하다고 말했을 때도. 그 애의 입술에 틴트를 발라줬을 때도. 종종 니콜라스를 챙겨줄 때도 저런 얼굴로 웃지 않았던가. 화장법과 머리 스타일이 완연히 바뀐 혜지를 보면서 꼬리표처럼 니콜라스를 찾는 스스로를 생각하고, 의주는 조금 웃었다.

 

- 혜지 너, 니콜라스… …이샹이랑 연락해?

 

중국어학과니까. 고등학교 때도 친했으니까. 혜지와는 연락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설령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와도. 편지를 돌려 받았을 때처럼 상처받지 않을 준비는 되어 있었다. 그냥… 정말 궁금해서. 잘 지내는지. 졸업은 잘했는지. 그렇게 묻는 얼굴이 지나치게 쓸쓸하거나 슬퍼 보이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을 뿐인데.

 

혜지의 표정이 낯설어졌다. 아연한 낯으로 입을 가리더니 몇 번 어머, 하고 상투적인 탄식을 냈다. 어쩔줄 몰라 눈을 굴리는 모습이 편지를 돌려주던 낯선 집주인과 닮아 있었다. 그러니까 의주가 정말로 유예했던. 되돌려 받아야 할 외로움은.

 

- 의주 너 몰랐어? 이샹 얘기?

- 무슨 얘기?

- 어떡해. 이샹, 걔. 너 유학가던 날에…….

 

 

 

 

 

 

 

변의주는 2년 동안 니콜라스가 단 한 번도 편지에 답장하지 않은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전혀 예상해본 적 없는 형태였다.

 

니콜라스는 의주를 배웅하러 간 날 사망했다. 변의주를 배웅하던 그 자리에서. 변의주가 떠난 직후. 현장이 너무 처참하고 난잡해서, 시신을 수습하는 것조차 일이었다고 했다. 니콜라스 또한 발견되지 못 할 뻔 했지만. 다행히 불에 그슬린 운동화 한 짝과 그가 차고 다니던 시계가 발견되어서. 그의 이모가 겨우 유해를 수습했다고. 그쯤 얘기를 하며 혜지가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설명에 다행이라는 수식이 붙는 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뭐가 다행이라는 거지. 의주는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 끝을 보면서 생각했다. 여전히 눈물은 나지 않았다.

 

그 날 혜지와 어떤 방식으로 인사했는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계산은 누가 했는지. 집으로 어떻게 돌아왔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둑한 방의 침대에 혼자 앉아 있었다. 의주는 멍하게 다시 캐리어를 열었다. 구석에 쑤셔 박았던 편지를 헤치다가, 그 사이 도톰한 갈색 소포 봉투를 발견했다. 그 소포만이 국제 우표가 붙어 있지 않았다.

 

받는 이. 변의주. 봉투 안에는 화면이 깨어지고 시침이 비틀린 니콜라스의 시계가 들어 있었다. 끝이 동그랗게 말린 노란색 메모지도 함께.

 

의주 학생 것 같은데 주소를 몰라서 보내지 못했어요.

이샹이 가지고 있던 것 중엔 이게 제일 멀쩡했어요.

 

낯선 필적이지만 쓴 사람이 누구인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니콜라스의 이모가 빽빽하게 적어둔 쪽지에는 그녀의 동향이 적혀 있었다. 거처를 옮길 예정이다. 어딘지 말해줄 순 없겠지만, 이번엔 바다가 예쁜 도시로 갈 생각이다. 이샹이 바다를 참 좋아했으니까. 틈만 나면 서해 바다를 보러 가자고 했으니까. 물이 빠져 검고 못생긴 그 뻘을. 의주도 기억했다. 바다를 보러 가자던 니콜라스의 목소리를. 이미 소실된 목소리가 귀에 속삭이는 듯 했다. 의주. 바다에 가자. 놀러가자. 의주. 주주.

 

난 그 애가 남긴 신발을 신고 이샹이 가고 싶어했던 곳들을 다닐 거예요.

언젠가 더는 쫓기듯 살지 않아도 될 날이 오면, 그땐 우리 다시 만나서 이샹의 이야기를 해요.

그래주면 좋겠어요

 

마지막 문장엔 마침표가 찍혀 있지 않았다. 무엇도 마치지 못했다는 듯이. 의주는 천천히 망가진 시계를 뒤집었다. 시계의 뒤판에 조그맣게 새김글씨가 적혀 있었다. EJ.

 

그러니까… 모두가 이미 니콜라스의 죽음을 수용한 것처럼 말한다. 이상해. 정말이지 이상한 일이다. 의주는 두 눈으로 본 적이 없는데. 니콜라스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도, 그러니 받아들이지도 못 했는데. 다들 이미 니콜라스가 죽었다고 통보했다. 답장을 받지 못한 편지.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 시계. 그따위 것들을 의주의 품에 쑤셔 박고는. 그것이 부고라고. 장례식도, 무덤도, 하물며 유해조차 없는 땅을 가리키며 그곳에 의주의 세계가 들어있다 말하고 있었다.

 

이상했다.

꼭 들으면 받아들일 수 있는 사실을 얘기하는 것처럼. 모두가.

 

 

 

 

대낮 도심 공사장에서 건물 붕괴… 원인은 가스통 폭발

 

8월 30일 버스 정류장 인근 공사 현장에서 폭발 붕괴 사고가 일어났다. 사고 원인은 용접기의 불꽃이 가스통에 튄 것으로, 폭발로 인해 건물이 붕괴되며 정류장에 서 있던 시민 5명이 깔려 숨지고 1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연쇄적인 폭발과 화재로 인해 구조 작업이 지연되면서, 현장에 남겨져 있던 사상자들의 시신이 거의 전소되었다. 여전히 신원 파악에 난항을 겪고 있다고 전해진다.

 

검색해서 나온 기사를 읽었다.

다시 처음부터 읽었다.

읽고. 또 읽었다.

이미 시일이 지나 유기된 기사 중엔 그것이 가장 적절했다.

 

과장되거나 자극적인 제목 없이. 필요한 정보를 필요한 만큼. 덜도 더도 않고. 하나의 세계가 통째로 붕괴된 일을 지극히 사무적인 어투로 알리는 그 짧은 기사가. 의주가 찾은 기사 중 가장 읽을 만한 것이었다. 그 애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웃을 때와 웃지 않을 때의 얼굴의 온도가 얼마나 달라지는지. 제일 좋아하는 구기 종목은 뭔지. 영어로 된 팝송을 부를 때, 원 가수의 발음을 얼마나 잘 흉내내는지. 차가운 걸 먹으면 자주 머리가 아파 앓으면서도, 아이스크림은 뭘 그리 많이 사먹었는지. 신발은 몇 켤레나 있는지. 이모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마나 상냥하고, 사람을 좋아하고, 바보같고, 명랑한지……. 어떤 방식으로 의주의 세계를 구성했는지. 어떻게 의주의 전부가 되었는지.

 

그런 건 한 글자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래서 기자가 됐다. 국제 경찰이 되고 싶어서 미국에 갔던 변의주는 한국으로 돌아와 기사를 썼다. 세상이 기립하고 무너지는 일을 무수히 목격했다. 사망한 의주의 세계 전부를 외면하고 살아왔다. 살아왔다- 는 말이 적절한지는… 되돌리고 싶은 일이 있냐는 질문에 무감하게 없다, 고 거짓을 말하면서. 원하는 일이 있냐는 물음에 모기 따위를 운운하면서. 가냘픈 갈퀴 같은 발을 내리고 떠도는 삶.

 

기자와 탐정과 경찰에는 교집합이 있다. 무덤을 무덤으로 두지 않고, 파묻힌 것들을 억지로 헤집고 끄집어내는 일. 죽은 사람도 산 사람도 어둠 속에 두지 않고, 집요하게 끌어내는 일.

 

- 삼합회한테 찍혀서 평생 도망다녀야 하거든.

 

가장 찾고 싶은 놈. 정말 그 애를 죽이지도 못 했으면서. 평생 죽음이란 이름의 개에게 쫓기게 만든 사람. 의주의 전부가. 여든 두 통의 편지가. 의주의 다정한 세상이 땅과 바다가 아닌 500자의 기사에 차갑게 묻히게 한 놈. 그 놈은 아직도 한국에 있었다. 이제는 의주가 그 뒤를 개처럼 쫓고 있다. 죽음과 맞서 싸우는 니콜라스를 위해 고요하고 부드러운 세계를 준비해둬야 하니까.

 

- 쫓기면서 살면 좋은 것도 있어. 항상 필사를 다 하게 되거든. 매번 마지막이라 생각하니까.

 

이 마음은 어쩌면 처음부터. 애써 외면하고 아닌척했지만, 꽤 처음부터. 어떤 꿈도 장래희망도 없던 변의주가, 미국에 갈 거라면 국제 경찰 따위가 되어볼까 막연히 생각했던 그 순간부터. 이미 변의주는 한 사람을 위해 무모할 정도로 간단히 미래를 정했는지도 모른다.

 

그걸 몰랐지. 그때는.

지금 와서야 보이는 자신의 바보 같은 속내를, 그때의 변의주에게 가르쳐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태의 씨. 나 조금만 잘 테니까… 도착하면 깨워줄 수 있어?”

예, 예. 제발 주무세요. 죽지 마세요. 선배로 기사 쓰기 싫으니까.”

 

의주는 강남구 모처를 향해 가는 차의 조수석에 몸을 묻는다. 팔짱을 끼고 눈을 감는다. 거친 차의 움직임에 따라 고개가 뒤척인다. 의주는 여전히, 핸드폰 속에 갇힌 니콜라스를 생각한다.

 

서른 살의 너를 만나고 싶어. 너를 만나면, 나는 인사할 거야. 안녕.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사람처럼. 손발을 떨면서 네 인사를 기다릴 거야. 그러니까 니콜라스. 꼭 살아. 살아서 만나면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줄게. 그게 뭐든. 11년. 11년 뒤에 네가 누굴 좋아하고 있더라도 날 찾아와줘. 얼굴만 볼게. 나는 그거 하나면 되니까. 정말 살아있는지만 볼 테니까.

 

상상과 수마가 엮이기 시작한다. 철야로 지친 몸이 졸음에 묶이기 시작한다. 몽롱해지는 의식 속으로 어렴풋한 궁금증이 스며든다.

 

그런데 니콜라스는 정말 왜 그날의 정류장에 나왔던 걸까.

꽤 심하게 싸웠던 것 같은데.

 

왜 하필 울려준다고 얘기했지. 요전날 운 건 자기였으면서. 왜 울었지. 무엇 때문에 싸워서 그렇게. 11년이나 지나 기억이 바랜 탓인지. 혹은 뇌리의 생존 본능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의 말미를 싹둑 잘라내버렸기 때문인지. 정말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알았더라면. 뒤늦게 버스를 따라 달려야 할 만큼 싸웠던 이유를. 그것만 떠올리면. 좀 더 명확한 경고를,

 

니콜라스에게……

 

 

 

 

 

 

 

 

 

 

 

13:08:29 ━━━━━━━━━━━━━ 24: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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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9일 오후 2시

 

지웅

이샹! 너 내일 뭐하냐?

안 죽기 위한 몸부림.

그러냐? 같이 PC방 갈래?

아냐. 나 집에서 못 나가.

짜식. 뭘 사리냐! 쫄지 마! 파이팅 해라!

(뭘?)

 

혜지, 주영

이샹. 괜찮아? 혼자 다닐 수 있겠어? 이따 화장실 같이 가줄까?

나 남잔데?

 

권주혁

야, 걱정 마. 박민철 그거 얼마전에 휴대폰 대리점 털었다더라. 경찰들이 수사중이라던데. 조만간 강전갈 것 같으니까, 먼저 전학 가지 말고 버텨. 알았지?

왜 이래 다들? 왜 이러는데?

 

 

예비소집일이라고 학교에 왔더니 공기가 이상했다. 갑자기 친한 애들부터 안 친한 애들까지 이샹을 둥글게 에워싸고 혼자 다니질 못하게 했다. 뭔가 했는데, 들어 보니 박민철이 왕이샹을 팼던 일을 의기양양 떠벌리고 다녔다고. 교복쟁이들 모아둔 지 하루만에 교내에 소문이 퍼진 것이다.

 

정작 박민철은 학교에 오지도 않았다. (불량아가 예비소집일 따위를 알 턱이 없었다.)  왜 자기가 맞은 건 얘기 안 했는지 궁금했지만, 이샹은 군말 없이 아이들이 쥐여주고 가는 간식거리와 걱정들을 즐겼다. 이런 대접을 받는 게 새롭고 재밌었다. 연약한 이미지는 아닌데. 체육 수업에서 A를 놓친 적도 없고 점심 농구도 번번이 바르는데. 이게 다 주주가 나 찐따 만들어 놔서 그래.

그 주범은 지금 교실 구석에 서서 대걸레로 1분단 바닥만 북북 문지르고 있다.

 

1분단 걸레 변의주

 

칠판에 새하얀 분필로 적힌 문장이 꽤 묘하게 읽힌다고 생각하면서, 이샹은 혜지가 찔러주고 간 몽쉘을 우물거렸다.

 

기실 왕이샹은 박민철과 있었던 일 따윈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마음이 바빴으니까. 날짜는 성큼성큼 다가오고. 의주와 함께할 시간은 이제 정말 하루밖에 남지 않았고. 사형수도 죽기 직전엔 먹고 싶은 음식을 먹게 해준다는데. 의주는 고작 하루 더 볼 수 있는 이샹의 눈을 피하고 있다. 다들 걱정해주는데 본 척도 안 하고 말야. 나 온 뒤로 계속 같은 자리만 문지르고 있으면서. 신경 안 쓰는 척. 키스한 티 풀풀 나게.

 

아무래도 키스 때문이다. 그날 이후로 둘 사이는 확실하게 어색해졌다. 이샹의 집에 찾아오지도 않았고. 메신저로 연락을 나눌 때도 억지로 할말을 찾듯이 자주 마가 떴다. 혹시 연락하기 싫은 건가, 하고 가만히 있으면. 또 그것도 아니라는 듯이 연락이 왔다. [니콜. 뭐해?] 그럼 이샹은 답장했다. [주주 보고 싶다는 생각.] 그럼 또다시 공백이 찾아왔다.

 

의주는 그가 떠나기 직전 이샹과 ‘싸웠다’고 했는데. 그게 혹시 키스 때문이었나. 그건 싫은데. 이렇게 끝낼 순 없다. 안 보는 척 게걸음으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묵묵히 걸레질을 하는 의주가 고개를 숙인 틈에 안경을 휙 뺏었다. 고개를 드는 의주 앞에서 안경을 척 써보였다.

 

주주 가짜 안경.”

돌려줘.”

뺏어봐.”

 

전봇대 같은 의주가 저보다 작은 놈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슥 손을 뻗으면 슥 몸을 돌렸다. 왼손을 뻗으면 오른쪽으로. 오른손을 뻗으면 왼쪽으로. 회전문처럼 빙글거리다가 어깨를 턱 붙들렸다. 의주가 안경을 빼앗아갔을 때. 눈과 눈이 마주쳤다.

 

교실 커튼이 여름 바람에 살랑였다. 이샹도 의주도 몇초간 눈을 피하지 않았다. 의주의 맨눈을 보는 건 오랜만이다. 요즘 의주는 이샹 앞에서 안경을 벗은 적이 없었다. 안경 너머로만 보던 눈동자는 늘 불 꺼진 집이었는데. 그 까맣고 둥근 렌즈에 지금, 희미한 빛이 괴어 있다. 검고 짙게 반짝이고 있다. 모래사장에서 주운 젖은 조약돌처럼….. 이샹이 그 빛을 자세히 보기도 전에, 다시 안경이 그들 사이의 시선을 툭 끊어냈다. 어딘지 데꾼해보이는 눈을 돌린 의주는 조금 피곤해보였다. 이샹은 장난스러운 태도를 한풀 꺾고 물었다.

 

오늘 우리 집 안 와?”

“……짐 싸느라 바빠. 내일 출국이잖아.”

내일 출국인데. 오늘이 마지막인데. 주주가 두고간 닌텐도도 아직 우리 집에 있는데.”

“…….”

같이 보내면 좋겠는데.”

 

이번엔 더 명확한 바람을 내비쳤다. 한 쌍의 렌즈가 말없이 이샹을 응시했다. 캄캄해서 무엇이든 선명하게 새길 수 있는 눈동자.

 

“……그렇지. 오늘이 마지막이지.”

 

카메라 렌즈를 닮은 눈동자가 이샹을 응시한다. 지금 의주는 이샹을 담고 있다. 왠지 그런 기분. 캄캄한 암실 속에 이상이 오래 맺히도록, 눈에서 돋아난 작은 손들이 이샹을 더듬고. 덧그리고, 제 어둠 속에 짙게 복제하고 있는 듯한 기분. 의주의 입술에 얕은 긴장이 들어간다. 니콜라스. 넘어지는 물컵처럼 쏟아진 것은 드물게도 긴 호명이었다.

 

왜? 의주.”

“……나.”

응.”

할 말이 있는데.”

무슨 말?”

오늘이 오면……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음울한 이끼 같기도, 지친 꽃잎 같기도 한 목소리다. 슬픈 건지, 지친 건지, 애틋한 건지, 전부인지, 여러 감정이 겹겹히 쌓여있는 의주의 음성을 읽기 힘들다. 이샹은 느리게 침을 삼켰다.

 

뭔데. 무슨 말인데. 왜 이렇게 뜸 들여.”

 

고개를 바짝 들이밀었다. 눈과 눈 사이의 거리가 쑥 줄어들자, 의주가 주춤 발을 뒤로 물렸다. 턱끝을 당기고. 눈을 좌, 우로 한 번씩 굴리다가.

 

“……나중에.”

 

천천히 등을 돌린다. 새파란 마대 걸레로 껌자국을 북북 문지르는 의주를 보면서, 이샹은 고개를 기울였다. 나중에 언제? 그래서 우리집 온다는 거야? 빙 돌아서 얼굴을 보면. 몰라. 또 몸을 돌리고. 마지막인데도? 마지막 날인데도? 다시 반대쪽으로 기울여서 얼굴을 보면, 묵묵히 또 몸을 돌리고. 또다시 회전문처럼 빙글빙글 꼬리잡기가 이어지던 끝에 이샹이 먼저 포기했다. 이샹이 더는 기웃대지 않자, 등을 보인 의주가 마지못한 투로 작게 말했다.

 

“……진짜 바빠서 그래. 이샹. 여행 준비가 아니라 살러 가는 준비를 하는 거잖아.”

진작 다 준비했을 거면서.”

그래도 두고 가는 게 없는지 확인을…….”

정없어. 주주.”

 

툭 내뱉었다. 의주의 등이 조용해졌다. 반듯하게 다려져 있던 교복 셔츠 등판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응달에 핀 이끼처럼 어둡고 습했다. 이번엔 확실히 읽을 수 있었다. 의주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피할 일인가. 키스가 그렇게 싫었나.

 

 

 

 

 

 

 

오후 6시

 

내일이면 의주가 떠난다.

 

그간 이샹은 죽기로 예정되었던 정류장에 여러 번 가보았다. 그냥. 제가 미래에 죽었던 장소라면(미래인데도 과거형인 게 참 기이하지만) 두 눈으로 봐두고 싶었으니까. 과연 의주가 보낸 신문기사 대로, 정류장 근처엔 높다란 건물을 짓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오늘도 이샹은 마치 어떤 단서를 찾는 탐정처럼 그곳을 뒤졌다. 굴착기 소음이 드드드 울리는 공사장부터, 맨홀 위를 낙엽처럼 굴러다니는 찌라시 하나까지 눈에 담았다. 당장은 누구도 죽지 않을 걸 알면서도 마음이 불안하게 술렁였다.

 

비닐이 쳐진 아찔한 철근. 지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거나 중장비를 끌고 오가는 인부들. 저 사람들 중 몇명은 내일 죽을 것이다. 내일 있을 비극을 아는 건 이샹 뿐이었다.

 

가스가 폭발할 수도 있어요. 용접할 때 조심하세요.

 

인부 한두 명을 붙잡고 경고도 해봤다. 그들은 이샹을 희한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아까 점검 다 했는데, 왜. 어디서 가스 냄새라도 맡았냐? 아니요, 그냥… 위험한 거 조심하면 좋잖아요. 어이구. 죽을 놈은 조심해도 다 죽어요. 생사를 농담처럼 웃어 넘기는 인부는 꼭 잠을 며칠 못 잔 사람처럼 피로해보였다. 죽음을 두려워하기엔 지금도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듯이.

 

세상은 그토록 평화로운데, 도처에서 죽음의 향기가 났다.

 

 

 

 

 

나: 주주

나: 내가 안 죽으면 미래가 확 바뀔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채팅을 보냈다. 죽지 않을 거라는 건 알겠는데. 그 이후는 짐작이 안 갔다. 의주는 바쁘다고 한 말이 무색할 만큼 빨리 답장을 해주었다.

 

상대: 그럴지도 모르겠네.

나: 시간 여행에 관한 영화들 보면 꼭 그런 말 나오잖아

나: 과거를 함부로 바꾸는 건 위험하다고

나: butterfly effect 때문에, 하나만 바꿔도 막 미래가 크게 바뀔 수도 있다고

 

작성 중을 뜻하는 동그란 점이 줄지어 박힌다.

 

상대: 상관 없어. 너만 안 죽으면 돼.

 

그리고 백지 위에 뜬 건 마침표처럼 단호한 텍스트.

 

상대: 니콜만 안 죽으면 갑자기 서울이 사라져 있든, 남북 통일이 이뤄져 있든, 내 직업이 달라져있든

상대: 상관 없다고 나는.

 

이샹은 의주가 건넨 텍스트를 말없이 읽었다. 한 글자. 한 글자. 발자국처럼 찍힌 문장 위에 발을 겹쳐보듯이 의주의 목소리를 덧씌워보았다. 상관 없어. 너만 안 죽으면 돼. 부드러운 발음도. 고집을 부릴 때의 완강한 투로도. 옷을 입히듯 여러 목소리를 번갈아 씌워보았다. 발화의 방식이 바뀐다고 의미가 달라지지 않는 문장들.

 

나: 요즘. 주주랑 얘기 하고 있으면…

 

전부 한 가지 같았다. 의주는 계속해서 같은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꼭. 의주가 이샹을….

……

 

상대: 나랑 얘기하면… 뭐?

 

손은 액정 위를 오래 맴돈다. 적었다가. 지웠다가. 적었다가. 지웠다가… 역시 이런 건 채팅으로 적지 않기로 했다. 멋없는 건 딱 싫으니까.

 

나: 나중에 얼굴 보고 말할게 ㅋㅋ

상대: 뭐?

상대: 그 나중이 설마 11년 후는 아니지?

나: 에이~ 그 전에 주주 한국 오면 보겠지 ㅋㅋ

상대: 그래도…

상대: 미래가 변해도, 우리가 못 만날 수도 있잖아

상대: 뜸들이지 말고 그냥 지금 말하지 그래? 전화할래?

 

의주가 드물게도 애타하는 모습이 재밌었다. 휴대폰을 쥔 채 히죽거리면서 골목길 모퉁이를 돌던 이샹은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의 집 앞 가로등 아래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긴 그림자를 만들며 담배를 피우던 이모가 고개를 들었다.

 

“…이샹.”

 

이모의 표정을 확인한 순간, 이샹은 웃음기를 지웠다.

 

 

 

 

 

 

 

 

 

오후 6시 20분

 

 

나도 오늘 선혜한테 들었어. 식당 쉬는 날에 월미도에 놀러 갔는데, 무섭게 생긴 남자들이 네 사진을 들고 있었대. 그걸 보여주면서 혹시 이런 애를 본적이 있냐고 묻더라고. 이 사진, 어디 올린 적 있니?

…….

이샹은 알아서 잘 하는 애기도 하고, 네가 당연하게 누려야 할 어린 시절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어디서 뭘 하고 다니든 되도록 놔두었지만…… 알잖아. 우리는 잠꼬대도 모국어로 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야. 남들보다 조용하게 살아야 하는 거, 이샹도 알지.

딱 한 번이었어. 딱 한 번 실수했어. 이모. 항상 친구들만 볼 수 있게 올렸는데, 딱 한 번 실수로… 프로필에 어디 사는지도 안 썼는데…

그래. 이모는 컴퓨터나 SNS 같은 건 잘 몰라서 모르겠어. 이모가 아는 건, 어쨌든 그 사람들이 우릴 쫓아 여기까지 왔다는 거야. 무슨 뜻인지 알지.

…….

새 거처를 구할 때까지 전주에 계신 선혜 어머님 집에 신세를 지기로 했어. 표도 사뒀고. 당장 떠날 수 있게 들어가서 중요한 짐만 싸렴.

지금 당장…? 주학동이랑 월미도가 엄청 가깝지도 않잖아.

엄청 멀지도 않지.

이모. 그러지 말고 하루만…

지금까지 기다려줬잖니. 이모도 네게 미안해서, 참 많이 양보했잖아. 이건 우리 목숨이 달린 문제야.

딱 하루만. 응? 하루만 여기 있을게. 의주가 내일 유학을 가. 오늘 마지막으로 우리집에 올지도 몰라. 여기서 기다려야 해.

이샹…….

어차피 죽을 놈은 조심해도 다 죽는다잖아.

 

이모가 말없이 꽁초를 떨궜다. 그녀의 발치에는 이미 그녀가 틴트를 묻힌 꽁초들이 난사당한 유해처럼 수북했다. 거기 놓여있는 것들은 시간이었다. 이모가 불안 속에서 쌓아온 시간.

 

“……그런 말은 하지 마. 이샹.”

 

이모의 잠긴 눈을 보면서, 이샹은 뱉어둔 말을 후회했다.

왜 소중한 사람을 상처주는 건 이렇게 쉬운 걸까.

 

 

 

 

 

오후 8시 경

 

결국 이모가 졌다. 그녀는 집에서 마지막 한 끼를 이샹과 먹고, 간단한 짐을 챙겼다. 딱 하루야. 내일 꼭 와야 한다. 전주 터미널에서 기다릴게. 이샹에게 거듭 거듭 다짐을 받고서야, 이모는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섰다.

 

[주주. 정말 안 올 거야?]

[너 책상에 중국어 사전 두고 갔는데?]

[난 이거 다 알아서 필요 없는데]

[오늘 아니면 우리 못 보는데]

 

나도 내일이면 떠나는데. 말할까, 하다 관뒀다. 의주의 답은 없었다. 출국을 위해 이것저것 체크하느라 바쁘겠지.

 

이샹은 혼자 남겨진 집안을 천천히 걸었다. 곳곳에 생활이 묻어있다. 싱크대에 한 쌍의 분홍 고무장갑이 덜 마른 빨래처럼 걸려 있다. 의주가 저걸 끼우고 설거지를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설거지를 꼭 해보고 싶었다고 그러길래. 자기 집에서는 엄마가 집안일을 절대 하지 못하게 한다고. 공부 아닌 일은 절대 못하게 한다고. 그래서. 그게 뭐라고 흐흐 웃으면서. 몽글몽글 거품을 내면서 접시를 닦던 의주. 곁에 서서 어어, 컵부터 닦아야지. 기름 때 뜨거운 물로 닦아야지. 일일이 잔소리를 했더니 부루퉁해지던 의주.

 

의주는 이샹의 집에 처음 왔을 때 ‘이런 집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구석마다 풀지도 않은 짐 박스들이 후줄근하게 쌓였고, 벽면은 덕지덕지 발라둔 영화 포스터로 가득하고, 돈벌레나 바퀴벌레는 월세도 없이 동거 중. 가끔 환풍기에서 쥐 발소리가 들리고. 누나처럼 보이는 이모가 있고. 마른 오징어처럼 뒤집어 걸린 운동화들이 즐비하고. 화장실은 아직도 알전구를 쓰고. 개다리소반에 더운 밥이 비좁게 차려지는 집. 방에 참고서가 빼곡히 끼워진 책상이 놓여있던 집. 이샹이 살던 집. 의주가 살던 집.

 

이샹도 그랬다. 사실은 이샹도 이런 집에서 살고 싶었다. 눌러 앉아서 오래 오래 살아보고 싶었다. 고무장갑을 틱틱 늘려보다가,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곧 이곳엔 날파리가 들끓을 것이다. 죽은 집이 될 것이다. 보기 싫어서 문을 열고 옥상으로 나왔다. 신문지를 깔아둔 옥상에 대짜로 퍼더 누웠다. 온 세상에 불이 난 것처럼 하늘이 붉었다.

 

보고 싶다.

외롭다.

두렵다.

그가 맞이해야 할 내일이 굳은 빵처럼 차갑고 딱딱하게 느껴진다. 물어뜯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그게 조금쯤 외롭고 두렵다. 많이는 아니고. 조금.

그런 얘기를 나눌 사람이 없다.

 

째깍. 째깍. 손목 시계의 미세한 소음이 거스러미처럼 일어난다. 그것을 긁어내는 심정으로 귀를 눌렀다. 의주를 충분히 눈에 담았던가. 의주의 눈에 충분히 담겼던가. 네가 떠나고 내가 떠나는데. 우리는 언젠가 다시 기적처럼 만날 수 있을까. 당장이 아니어도 좋으니까. 일 년. 이 년. 아니면 십일 년 뒤라도…

 

십일 년.

 

아, 맞다.”

 

십일 년 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의주가 그제야 떠올랐다. 맞다. 채팅.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다. 전화 달라고 했는데. 휴대폰을 급하게 열었다. 상대의 채팅이 와있었다.

 

상대: 전화 안 돼?

상대: 그쪽 의주랑 있는 중?

상대: 이쪽 의주는 조금 외로운데

 

찌그러진 웃음이 났다. 이것 봐… 바람을 피우는 것 같다니까… 두 사람이 아니라 세 사람인 것 같아, 우린. 채팅을 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짧게 이어졌다.

 

[여보세요.]

 

목소리가 잠겨있다. 이샹은 시야가 희미해지도록 눈을 접어 웃었다. 잤어? 응. 사무실에서 눈 좀 붙였어. 요새 통 잠을 못 자서. 말끝에 멋쩍게 웃었다. 박하처럼 시원한 그 애의 웃음이 여름 저녁의 더위를 날린다.

 

항상 필사를 다하고 사는 거. 쉽지 않은 거 같아. 주주.”

 

잠깐 조용하던 의주가 웃었다. 무슨 일 있었어? 이샹의 안부를 묻는다. 이샹을 궁금해한다. 이럴 수 있으면서 그러지 말지라는 생각도 이제는 그만하게 되었다.

 

천우징이…… 인천까지 왔나 봐.”

 

이샹은 짧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만히 듣던 의주가 귓가로 꺼질 듯한 한숨을 불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나는 하나도 몰랐는데. 왜 얘기 안 했어?]

주주 미국 갈 건데. 걱정시키기 싫어서.”

[……그냥 지금이라도 걔한테 말하면 안 돼? 이런 것도 모르고 너랑 싸웠을 거 생각하니까 답답하다.]

걔라니. 주주인데… 얘기 한다고 달라질 거 없잖아. 어차피 주주도 유학가고, 나도 떠나고. 참, 그래서 내일 집에만 있겠다는 말은 못 지켜. 일찍 전주 터미널 가야 해.”

[상관 없어. 9시 7분에 그 정류장에만 안 가면 되니까.]

내일 살아남더라도 쭉 도망다녀야겠지.”

[…….]

휴대폰도 바꾸고. 이름도 바꿀 거야. 주주랑 연락 못할지도 몰라.”

[왜? 나랑은 연락해주면 안 돼?]

주주 위험해져. 안 돼.”

 

그 말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의주는 치. 짧게 볼멘 소리를 내고는 한동안 대꾸가 없었다. 이럴 때 보면 서른 살 주주가 지금 주주보다 더 애 같아. 이샹은 조용히 키득거렸다.

 

영원히 안 보는 거는 좀 그렇고. 11년 뒤에 만날까?”

[……11년? 너 11년이 옆집 개 이름이야?]

뭘. 3억 초밖에 안 되던데.”

[넌 진짜…….]

내일 어때?”

 

내일이라니… 하고 되묻던 의주가 벼락같이 입을 다문다. 무언가 깨달은 듯 짧은 헛숨.

 

[2024년 8월 30일… 말하는 거야?]

 

이샹은 느슨하게 웃었다.

 

생각보다 금방이지?”

 

너한테는.

 

주주는 눈 깜빡하면 나 볼 수 있어.”

 

기다림 같은 거 안 시킬 거다. 그런 외롭고 지난하고 무거운 일은 전부 이샹의 몫이다. 나른하게 몸을 일으켜 난간에 기대 섰다.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옥상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집보다 조금 높은, 불 꺼진 학교 건물. 3층 교실 창문에 비치는 붉은 십자가. 초록색 비상구 표시등. 담벼락 아래로 빠르게 움직이는 조그마한 고양이. 의주가 꽁초를 줍던 가로등 아래. 우린 그때도 거짓말처럼 만났지.

 

“2024년 8월 30일. 시간은 9시 7분. 의주 바보 적힌 공원벤치에서 보자. 그때 꼭 약속 지키러 나갈게. 그럼 괜찮지?”

[너 11년 동안 그거 안 까먹을 수 있겠어?]

어. 나 높은 곳에만 살잖아. 시간 빨리 가.”

 

입꼬리가 간지러웠다. 크게 웃고 싶었다. 왜 좌절했을까. 이렇게 쉬운 문제인데.

 

[넌 진짜 무모해.]

 

의주가 투덜거렸다. 그럼에도 목소리에 밴 기대감을 감추지 못한다. 크리스마스에 걸어둔 양말처럼 들떴네. 이샹은 정말 참지 못하고 웃었다. 근데 솔직히, 약속 필요 없을지도 몰라. 나 안 죽으면 더 일찍 만나지 않을까? 그런가? 그럼 현재의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글쎄? 인터폴 사무실에 있는 거 아냐? 말라깽이 폴리스 주주. 야, 그거 편견이라니까… 시덥잖은 말을 고무공처럼 주고 받을수록 마음이 가벼워졌다. 불안도 외로움도 공포도 사라진다.

 

빨리 보고 싶다.”

 

솔직하게 말했다. 나도. 달콤한 보상이 돌아온다. 아. 먼저 말한 건 이샹인데 귀가 뜨거워진다. 괜히 귓불을 매만지면서 고개를 비틀었을 때.

 

누구랑 그렇게 즐겁게 통화해?

 

등 뒤에서 건조한 음성이 들려왔다.

 

 

 

오후 9시 12분

 

어깨가 덜컥 굳었다. 저 목소리를 기다린 적은 있어도, 저 목소리에 놀란 건 처음이었다. 이샹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열린 옥탑방 옥상문 앞에 의주가 서 있었다. 집에 갔다 온 건지 얌전한 사복 차림으로. 옆구리에는 그가 이 집에 두고 간 중국어 사전을 끼고서. 의주는 무표정하게 이샹을 보고 있었다. 이샹은 반사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정말 바람이라도 피우다가 들킨 것처럼.

 

주주. 오늘 못 오는줄 알았…”

누구랑 그렇게 즐겁게 통화하냐니까.”

 

의주가 차분하게 물었다. 정말 바람 현장이라도 잡은 것처럼. 이샹은 어색하게 웃었다.

 

아니. 뭐… 친구.”

어떤 친구가 그렇게 보고 싶었는데?”

“……”

네 친구가 다 내 친구인데. 누가 그렇게 살가워?”

그러니까… 그게…”

 

설명할 수 없다. 너와 대화하고 있었다고. 이샹이 입술만 들썩이자, 의주가 한숨처럼 웃었다. 웃겨서 웃는 웃음은 아니었다.

 

여자친구면 그냥 그렇게 말하면 되잖아. 니콜라스.”

아니라니까. 그런 거.”

혜지야? 요새 친하던데.”

아냐! 걔 남자친구 있어.”

혜지 아니면 누군데. 그냥 말을 해, 니콜라스. 나도 다 알아.”

 

뭘 아는데?

 

요즘 맨날 누구랑 숨어서 소근소근 통화하고. 휴대폰 손에서 안 떼는 거. 빤히 보이거든.”

 

뭐가 보이는데.

 

뭘 나한테까지 감추고 그래… 내가 네 뭐라도 되는 것처럼.”

 

의주가 눌러찍은 마침표는 차분하고 날카로웠다. 꼭 밟고 피 보라고 놓인 압정처럼.

 

의주가 그를 보러 와준 기쁨이 무색할 만큼 기분이 순식간에 까라졌다. 대신 속에서 뜨거움이 울컥 치받았다. 따지고 싶어서 입술이 움찔거렸다. 그게 나한테 할 소리냐고. 네가 내 뭐라도 된다는 거 알면서. 내가 좋아하는 게 누군지 뻔히 알면서. 내가 누구한테 키스를 했는데, 내가 아무한테나 그러는 놈이 아닌데. 착한 얼굴로 끝까지 못된 말만 하고. 뭘 아냐고. 알긴 아냐고.

 

목구멍에 걸린 울분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울컥거렸다. 이샹은 숨을 씨근대면서도 입은 꽉 잠궜다. 화내면 안 돼. 싸우면 안 돼.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순간이야. 꿈틀거리는 눈썹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가슴팍의 압력을 줄이기 위해 긴 숨을 내쉬고, 힘겹게 웃음을 걸었다.

 

주주… 나 보러 와준 거야?”

아니. 두고 간 책 챙기러.”

어… 그래도 가기 전에 얼굴 보니까 좋다.”

그래? 괜히 내가 와서 방해한 거 아냐? 방금 전까지 훨씬 기분 좋아보이던데.”

그런 거 아니라니까, 주주….”

 

싸늘한 공기를 데우고 싶었는데. 이샹은 그런 방면으로 능숙하지가 않았다. 김빼주는 건 잘 해도 싸늘해진 의주를 다시 따뜻하게 만드는 게 어려웠다. 쩔쩔매게 됐다.

 

이럴 거면 왜…….”

 

의주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인다. 뱉어내려다가, 삼킨다. 어떤 언어들을 뱃속으로 내려보내는 것이 보였는데.

 

네 웃는 얼굴 보니까… 하려던 말도 다 까먹었어.”

 

결국 의주가 뱉어낸 건 냉담이었고. 그 식어버린 온도가 이샹의 가슴을 깊게 할퀴었고.

 

“…그럼 내가 울어야 해? 네가 떠나서 내가 슬프길 바라? 주주는?”

 

상처주는 말은 부메랑과 같은 성질이 있어서.

 

그냥. 적어도……아니. 됐다.”

말 하다 멈추지 마. 그거 진짜 싫어.”

나도 너 맞춰주기 싫어.”

왜 나한테 짜증 부려 주주? 떠나기로 한 건 너잖아. 네가 떠난다고 했잖아. 이제 와서 가지 말라면 안 갈 것도 아니잖아.”

그래. 갈 거야. 너무 늦었으니까.”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다.

 

여름 하늘의 불길이 서서히 가시고 있었다. 타르처럼 검게 늘어붙은 새카만 눈동자가, 이샹으로부터 천천히 떨어진다. 시선이 떠난다. 이샹을 남기고.

 

갈게.

 

돌아서는 의주의 팔을 다급하게 붙들었다. 어쩌자는 생각도 없이 손부터 나갔다. 정류장까지 바래다 줄게. 됐어. 한 시 비행기랬어? 공항으로 마중나갈게. 됐다고, 네가 뭐라고 마중을 나와… 가족도 아니고. 엄마가 학회 가시는 길에 정류장까지는 데려다주시기로 했어. 그거면 충분해.

 

충분하다고 한다. 이샹이 없는 마지막으로 충분하다고. 가족도 아니니까. 이샹은. 익사의 예감이 이상의 발목으로부터 뜨겁게 차오른다. 여름은 너무 더워. 축축하고. 끓어 죽기 좋아서. 이샹은 끓는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심정으로 내뱉었다. 그럼 난 너한테 뭐였는데?

 

감정도 없는 애한테 키스할 리가 없잖아.

의주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분명 그렇게 말했으니까. 의주가 조금 고개를 숙인다. 숨을 들이키듯 등판이 한번 들썩였다.

 

남이지.”

 

담담했다. 한쪽이 놓으면 끝나는… 남이야.

 

이샹은 견고한 뒤통수를 응시했다. 숱이 많고. 복잡하고. 그래서 끄트머리가 조금 엉켜있고. 의주를 닮은. 이샹은 천천히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눈가에 고여있던 눈물이 느리게 흘러내렸다.

 

“……넌 진짜로 피도 눈물도 없어. 변의주.”

 

 

 

 

 

탁.

옥탑방의 문이 닫혔다.

두 사람이 흘린 피가 낭자한 옥상 위로, 소년이 덩그러니 남겨진다. 또 한 번 텅 비어버린 피 묻은 목줄을 쥐고. 홀로.

 

 

 

 

 

 

 

 

 

 

 

13:08:29 ━━━━━━━━━━━━━˖◛⁺˖ 24: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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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팅방

 

나: 니콜?

나: 전화 왜 끊은 거야?

나: 신호 안 좋아? 다시 걸까?

나: …니콜?

상대: 주주

상대: 나랑 왜 싸웠는지 기억 나?

나: 응?

나: 글쎄.. 11년이나 지나서 가물가물해

나: 안 그래도 궁금해서 계속 생각했어

나: 되게 별 거 아닌 거로 다툰 기억은 나는데..

상대: 그래

상대: 별 거 아니지

상대: 나중에 연락할게

 

 

 

오전 1시 20분

 

기자님 또 휴대폰만 보시네. 뻗치기 힘들죠?

아닙니다. 그런 거.

에휴. 촬영 기자 일 오래하면서 웬만한 형사만큼은 잠복해본 거 같아요… 저쪽 대표님도 애인이랑 노니느라 바쁘시네. 차가 들썩들썩 하는데요? 사람 다니는 골목에서 차암…

천우징이랑 접촉하는 것만 얼른 찍고 가죠… 그런데 저 분 딸도 있지 않습니까? 방송에 나왔던 거 같은데.

딸 있으면 불륜 안 하나요. 웃긴 게 뭔지 압니까?

…….

아이. 시시해.

뭔데요. 웃긴 게.

저기 차에 같이 들어간 여배우요. 그 사람이 먼저 대표한테 매달렸거든요. 그때는 대표도 뭐 본격적으로 바람 피우는 것도 아니고, 눈치 보면서 몸 사리더니. 올해 여배우가 딴 놈이랑 열애설 터지니까 갑자기 둘이 불이 붙지 뭡니까?

이해가 안 가네요. 딴 사람이 노리니까 아쉬워진 건가요?

원래 뭐. 욕심이라는 게 그렇대요. 안전한 소유 안에서는 조용하다가, 딴놈의 욕망과 부딪히면 확 타오른다고. 한마디로 내 거 뺏길 거 같으면 갑자기 미친듯이 욕망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런가요. 그건 좀 소유욕 아닙니까.

글쎄요. 그냥 잃어봐야 깨닫는 거라고 봅니다. 저는.

…….

뭐, 그렇다고 저사람 하는 짓이 아름다운 건 아니지만은…아, 저기 들어오는 거 천우징 차 아닙니까?

빨리 찍어요. 저기.

어우. 오늘따라 의욕이 아주 넘치시네요, 기자님?

 

저도 제 걸 건드리는 사람이 싫은가 보죠.

 

 

 

 

 

 

 

 

 

 

 

 

 

13:08:29 ━━━━━━━━━━━━━ 24: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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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7시 7분

 

현재 이샹은 무기력하고 안전하다.

 

잠은 거의 자지 못했다. 잠만 들면 꿈에 의주가 나왔다. 타고 남은 잔해 같은 눈동자로 이샹을 보면서 나쁜 말을 해서, 이샹은 가슴을 움켜쥐고 눈을 뜨길 반복했다.

 

예고된 죽음의 시간까지 두 시간이 남았다. 이샹은 시간을 죽이기 위해 휴대폰으로 유튜브를 보았다. 그런 것만 찾아봐서 그런지 알고리즘이 시간에 관한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영상들로 가득 차있었다.

 

시간은 자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움직이는 상태를 나타내기 위해 만든 척도일 뿐입니다. 모든 것이 멈춰 있을 때,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 때, 시간은 흐르지 않습니다.

 

1시간 지난 거 같아. 다시 시계를 보았다. 오전 7시 10분. 고작 3분이 지났다.

 

1초는 항상 1초라고. 시간의 걸음걸이는 배신하는 일 없이 꾸준하고 일정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따라 시간은 걸음이 느리다. 시계가 고장나서 1초에 1초가 아니라 1시간에 1초씩 흘러가는 것 같다.

 

의주. 그러니까 서른 살의 의주는 밤새 채팅으로 달래는 말을 몇 개 보냈다. 왜 싸웠는지는 잘 기억 안나지만. 미안하다고. 아마 진심이 아닐 거라고.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못하면서. 내가 한 말은 11년이 넘도록 기억하는 주제에….

 

그러게. 왜 난 너만 기억할까.

 

가슴 안쪽이 빈 깡통처럼 우그러든다.

 

그 말이 이상하게 엄청 기억에 남았거든. 너랑 헤어진 이후로 11년 내내 여름만 되면 생각나더라.

 

나도 잘못했어. 피도 눈물도 없다는 말. 의주가 싫어하는 거 알면서.

사과하고 싶어도 의주는 이미 떠났다. 이샹은 침대에 퍼더누운 채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지금쯤 정류장에 도착했을까. 엄마가 데려다준다고 했는데.

 

그냥. 나는 모기에 안 물리니까. 네 말이 맞는 것도 같아서. …그래서 소원 사이트에 모기에 물려보고 싶다고 쓴 거야.

 

그게 뭐라고 5만원이나 쓰고.

 

감정도 없는 애한테 키스할 리가 없잖아.

 

모르겠다.

키스는 내가 했잖아. 내가 너한테 했어야 하는 말이잖아.

감정이 있긴 했나. 의주는 조금도 흘려주지 않아서.

 

어떤 현재는 미래가 대신할 수 없다. 11년이 지나서 건네는 모호한 말들로는 수몰된 마음이 수복될 수 없다. 어쩌면 의주는 거짓말로 이샹을 달래놓은 거 아닐까. 미안하니까. 11년 지나고 보니까 역시 못되게 굴었던 게 미안해서…….

 

아닌데. 그런 거 아니던데.

11년 후의 의주랑 얘기하고 있다 보면, 의주가 계속해서 같은 말을 하는 것 같았는데. 전부 한 가지 같았는데.

꼭. 의주가 이샹을…….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우씨… 그럼 나한테 왜 그렇게 못되게 굴어? 변태야?”

 

허공에 주먹을 휙휙 휘둘렀다. 짜증나! 보고 싶다고 주주! 또 눈물이 왈칵 치밀 것 같아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됐어! 의주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거야. 난 최선을 다했어.

 

시계는 오전 8시. 결국 폐쇄감을 참지 못하고 집밖으로 나왔다. 집앞 버스 정류장에서 애꿎은 보도블럭을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종합터미널로 가는 버스가 도착하기까지는 7분이 남았다. 정류장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누가 세워놓은 마네킹처럼 선 채 고개를 쭉 빼고 전광판에 뜬 시간만을 보고 있다. 아이 씨. 버스가 안 와. 옆에서 통화를 하던 사람이 투덜거렸다.

 

모두가 시간에 얽매여 있었다.

일 분 일 초의 걸음을 셈하면서. 어떤 시간이 그들을 찾아 와줄 때까지 제자리에서 무력하게 기다리고 있다.

찾아오는 건 시간이다. 인간은 원하는 시간을 먼저 찾아가지 못한다.

 

그럴수만 있다면. 만약 찾아갈 수 있다면. 지금 이샹이 가장 가고 싶은 시간은 어디일까? 역시 11년 후겠지. 2024년 8월 30일 9시 7분. 정확한 좌표가 생겼으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나가면 되겠지. 이샹의 의주는 거기 있으니까. 3억 걸음을 걸어간 그 자리에는 분명히 의주가 있으니까…

 

네가 뭐라고 마중을 나와… 가족도 아니고.

 

주머니로 손을 질러넣었다. 잡히는 대로 대충 구겨 넣은 온갖 종이쪼가리가 나왔다. 얼마 전 구천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서 산 <어바웃 타임> 영화표가 딸려나왔다. 표를 내려다보면서 의주를 떠올렸다. 서른 살의 의주. 의주한테 영화관은 너무 비싸다고 투덜거렸더니, 자기는 이만 팔천 원을 썼다고 그랬다. 거짓말. 왜 그렇게 비싸냐고 그랬더니 자리를 두 개나 잡았다고 했다. 뭐하러 그래? 물었더니 서른 살 의주가 열쩍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 네 자리니까.

 

내 자리. 11년 이후에는 이샹의 자리가 있다. 의주가 내어주는 이샹의 자리다. 그러니까 이샹이 지금부터 할 일은, 얌전히 11년 후까지 기다리는 거. 아무 것도 안 하고. 아무 변화도 없이. 죽을 만큼 느린 걸음으로 삼억 초를 걸으면서. 기다리는 거 하나만 잘 하면. 그럼 널 다시 만날 수 있는데….

못 본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표를 느리게 문질렀다. 표 아래로 지폐가 겹쳐져 있었다. 아직도 바꾸지 못한 크라잉 율곡. 여전히 울고 있다. 어디에라도 쓰이고 싶은데. 울적한 자길 받아주는 곳은 아무 곳도 없어서. 그게 서글프다는 표정이다.

 

58  9

곧 도착: 68 (여유)

 

이샹이 기다리는 버스는 58번이었다. 번호가 비슷해서 잠시 제가 기다리는 버스가 온다고 착각했다. 버스 노선도를 보자 68번의 경유지에 익숙한 정류장이 보였다. 공항 버스를 탈 수 있는 송도의 한 정류장. 이샹이 그간 뻔질나게 다녀온 장소이자, 한때는 그가 죽을 것으로 예정된 자리였고, 의주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공항버스 정류장.

 

의주는 지금쯤 버스를 탔을까…

 

일전 의주는 자신의 출국 계획에 대해 들려준 적이 있었다. 교수이신 어머니가 그날 학회 일정이 있어서, 아버지는 출장이셔서, 아마도 두 분 다 공항까지 데려다주지는 못할 거라고. 원체도 성적표 받아올 때나 얼굴 제대로 보던 분들이니 딱히 별 유감은 없지만. 혼자 공항 버스를 기다리고 서 있을 걸 생각하면, 조금은. 쓸쓸하다고.

 

정류장 근처 담벼락엔 늘어진 능소화가 붉게 흔들리고 있었다. 액정에 기스가 많은 낡은 아이폰을 들여다보았다. 미래로 열린 채팅방 대신 연락처에 있는 열아홉의 의주, 현재의 의주 번호 위를 오래도록 방황했다. 한 마디 정도는 할까. 잘 다녀오라고… 안전하게. 이건 상투적일까. 기다리고 있을게. 한국 어디서든 기다리고 있을게. 이건 ‘남’이 하기엔 부담스러운 말일까.

너 지금 쓸쓸하니.

이런 말을 묻기엔. 너무 늦었을까.

 

 

위잉.

 

짧은 휴대폰 진동이 온몸을 뒤흔든다. 이샹은 놀라서 휴대폰을 떨굴 뻔했다. 텔레파시도 아니고. 하필 그가 전화를 걸려던 상대로부터 이 타이밍에 문자가 왔다. [니콜. 자고 있지?] 떨리는 마음으로 문자를 눌렀다. 짧을 줄 알았는데, 편지처럼 긴 MMS 문자였다.

 

[나 이제 휴대폰 유심 갈아 끼울 거야. 그래서 연락이 안 될 거야.

연락 기다렸는데. 연락 안 하더라. 아직 화났겠지. 이해해. 나도 어째서 네가 연락해줄 거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네…… 그래도 마지막이니까…….]

 

문자는 계속 이어졌다. 이샹은 말없이 시선을 고정한 채 스크롤을 죽죽 내렸다. 서른 살의 의주는 이런 얘기는 하지 않았다. 싸웠다는 단편적인 장면만을 기억할 뿐. 자신이 이런 문자를 보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변의주도 잊어버린 변의주의 텍스트들이다.

11년 동안 기억 속에서 희석되지 않은, 아직 생생하게 살 숨쉬는 현재의 의주가 화면을 가득 메운다.

 

[어제 한 말은 진심이 아니었어.

아니… 진심을 다 얘기하지 않았어. 나는 거짓말은 못하지만 진짜 마음도 잘 얘기 안하잖아.

 

니콜이 남이기를 바라긴 했어. 가족이랑은 조금 다른 존재였으니까. 나한테 가족은 니콜 같은 모양새가 아니거든. 니콜처럼 편한 운동화를 선뜻 주거나, 내가 마음 편하게 앉을 수 있는 책상을 주지도 않았어. 그런 걸 받아본 적이 없어서. 너 같은 애랑 있어본 적이 없어서. 가끔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몰랐어.

 

그런 모습들이 네게는 피도 눈물도 없게 보인 거겠지.

 

너 그 말 진짜 좋아하는 거 알아? 어떻게 여름철에 모기만 날아다니면 꼭 그 소리를 하냐? 바보야. 자꾸 들으니까 맞는 말 같잖아. 나는 남들이 웃을 때도 눈치를 보면서 웃고, 널 볼 때도 항상, 뭐가 그렇게 즐거워서 웃고 사나 이해를 못했으니까. 그래도 너 보고 많이 배웠어. 네가 자꾸 웃으니까 따라서 실없이 웃게 되고. 누가 맞고 온 게 화나서 이마로 화병 깨본 건 진짜 네가 처음이었어. ㅎㅎ 근데도 네가 그런 소리를 해? 정말 못됐어. 니콜.

 

이 문자를 보고 네 화가 풀릴지는 모르겠네. 일단 난 화 안 풀렸어. 나중에 나 미국 가면 제대로 사과편지 보내기야. 주소 알려줄게. 그동안 조심해서 잘 지내. 그 나쁜놈들한테 잡히지 말고. 여자 친구랑도… 걔랑은 좀 못 지내라. 여자친구 두고 왜 나한테 키스하고 그래. 바보.

 

마중은 나오라고 할 걸 그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마침표 없는 말은 할말이 끝나지 않은 것처럼 끊겨있다.

 

의주가 과연 어떤 말을 삼켰는지는 편지에 적혀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샹은 편지 끄트머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변의주는 미래에서만 그러는 게 아니다. 지금도 의주는 한 가지 말을 아주 길게 풀어쓰고 있어서. 이토록 긴 고해성사 속에도 끝내 뱉지 못한 어떤 말을 읽어낼 수 있었다. 액정 위로 능소화의 붉은 그늘이 번진다.

 

보고 싶다.

어쩔 수 없이.

 

 

 

68번 버스가 도착했다. 이샹은 제가 기다리던 버스와 번호가 비슷한, 그러나 분명히 다른 방향으로 향하는 버스로 주저 없이 올라탔다. 그의 손에서 울고 있던 율곡 이이가 버스 금전통으로 팔랑 떨어졌다.

 

 

 

 

 

 

 

 

 

오후 8시 50분

 

출근길이라 차가 막혔다. 한국에 있는 모든 차가 이샹의 앞을 막으러 도로로 나온 것 같았다. 이샹은 중간 정류장에 내려서 두 다리로 내달렸다. 의주랑만 엮이면 꼭 달리는 일이 많아지는 거 같다.

 

그렇게 살다보니까 마음이 사라진 거 같아. 진짜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 된 거지. 11년 전에 이미 마지막으로 모기에게 물릴 기회를 놓쳤으니까….

 

헉, 헉, 숨이 턱까지 찼다. 흉곽이 터질 것 같아도 두 다리는 경주마처럼 힘차게 땅을 도약한다. 다행이다. 운동화를 신고 나와서. 고르고 골라 그가 가장 아끼던 조던을 신고 나와서.

 

지잉. 전화가 울렸다. 화면을 확인하지도 않고 받았다.

 

[니콜, 너 잘 있나 확인하려고… 왜 이렇게 헐떡거려? 너 지금 어디야?]

 

11년 뒤의 의주의 목소리다. 역시. 이샹은 찌그러질 것 같은 폐부를 안고 토하듯 웃었다. 문자 그대로 죽을 것 같은데, 입꼬리가 내려가질 않았다.

 

주주! 나 알았어!”

[뭐?]

알았다고! 주주도 똑같았어! 주주도 오늘 나랑 있고 싶었지?! 나 보고 싶었잖아!”

 

그게 무슨… 의주가 아연하게 말끝을 흐렸다. 이샹이 어딜 향해 달리고 있는지 눈치를 챘는지, 숨소리에 기절할 것 같은 경악이 서린다.

 

[너 설마…… 미쳤어? 어디야, 니콜라스!]

괜찮아!”

[뭐가 괜찮다는 거야! 당장 돌아가! 거기 가면 죽는다고 했잖아!]

상관 없어!”

[죽는다니까! 일단 멈춰! 멈추고 얘기해!]

 

정류장까지, 두 블럭. 이샹은 날듯이 빨리 내달렸다. 그의 발이 너무도 빨라서, 시계 초침은 유례 없이 걸음을 늦춘다. 그가 제 시간에 의주를 만날 수 있도록 무척이나 느린 걸음으로 1초를 걷는다.

 

주주가… 나, 보고… 싶다고 했잖아…!”

[그게 대체… 나중에 봐도 되잖아!]

싫어! 안 돼! 지금 당장이야!”

[왜! 왜 그래야 하는데!]

좋으니까!”

[야…!]

쓸쓸하면, 안 되니까! 1초라도!”

 

9시 5분. 모퉁이를 꺾었다. 저 멀리 멈춰있는 고속버스가 보였다.

 

[니콜라스! 나랑 한 약속 안 지킬 거야?!]

 

마치 그 모습을 훤히 보고 있는 것처럼, 귓가로 서른 살의 의주가 절규와 같이 외쳤다.

 

[오늘 보기로 했잖아! 오늘 공원에서, 살아서 보기로 했잖아!]

 

이제 이샹은 거의 호흡을 건너뛰고 있었다.

 

미안. 주주.

이게 선약이야.

그 애를 발견해줘야 해. 그 애가 세상에서 아주 혼자 같은 순간에 책상 한 칸 만큼의 자리를 내주는 게 이샹의 일이라서.

 

알려 줄 거야… 네가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이샹은 그래. 의주와 보내는 하루가 소중했다. 인생이 가보지 않은 길을 걷는 여행이라면, 주머니에서 금 같은 시간 줄줄 쏟는 한이 있어도 한 걸음이라도 그애랑 같이 걷고 싶었다. 운동화 백 켤레, 바퀴벌레 안 나오는 집, 미래에서 번호 다 불러주는 로또, 그딴 거 하나도 안 부럽다. 일평생의 슬픔이 그를 따라다니더라도 감당할 것이다. 결국 이별이 돌아온 계절처럼 찾아오더라도. 이샹의 목숨을 걸더라도. 죽음을 잊고 시선을 잇고, 마음을 읽고 온기를 입고.

 

그런데 의주도 똑같더라. 이샹이 싫어서 떠나는 게 아니었어. 감정 없는 게 아니었다. 도망치는 거였어. 의주. 무서워서 도망치는 거였어. 이별의 마지막 순간. 보고 싶다. 어쩔 수 없이. 그게 무엇을 뜻하는 거겠나.

 

너와 있고 싶다.

그냥.

있고 싶다.

그럴 수 없게 되는 순간이 반드시 올 걸 알면서도. 딱 하루라도. 1시간. 1분. 1초. 0.0001초라도 더.

이샹과 함께 있고 싶다.

 

그래서. 의주가 그런 기분이라는 걸 알아버려서.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 기어코, 끝내, 결정적으로 알아 버려서. 이샹은 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목숨을 걸더라도, 죽음을 만나더라도, 꼭 네게 알려주지 않고는 못 참겠으니까,  네가 혼자가 아니라는 거, 내가 너를 이렇게, 이렇게 좋아하고, 네가 나를 꼭 그만큼, 분명 똑같이 좋아하니까, 절대 널 쓸쓸하게 보내지 않을 거고, 나는 약속, 그러니까 어떤 약속만큼은 꼭 지킬 거고, 네가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얼굴 보면, 꼭 들려 준다고 했잖아, 너한테 할말 진짜 있다니까, 이 말을 전부 전할 시간이, 지금의 이샹에게는 없을 뿐이야, 그러니까…

 

야, 주주!!!!”

 

생존에 필요한 몫의 산소까지 끌어다가 뱉었다. 행인들이 힐끗 쳐다볼 정도로 우렁찬 성량이었다. 열려있는 고속버스 창문으로 그 애가 보였다. 이샹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뒤를 돌아보는 의주가 보였다. 휴대폰을 손에 쥔 채로, 후들거리는 무릎을 짚고 헐떡였다.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둥근, 카메라 렌즈처럼 캄캄하고 둥근 눈이 정확히 이샹을 담고 있다. 의주는 알까. 우리 눈이 마주친 그 순간, 커다래진 눈은 이샹을 영원히 기억할 것처럼 반짝 빛이 들어왔다고.

 

피도 눈물도 없다고?

모기에 물려보고 싶다고?

그런 눈으로 이샹을 바라보면서, 자기가 감정이 없는 사람인 것 같다고?

피가 몰려 새빨개진 얼굴로, 이샹은 발악하듯 소리질렀다.

 

다시 만나면 너 울려줄 줄 알아!”

 

나로 눈물나게 할 거야.

 

물어 뜯어버릴 거야!”

 

나로 피 보게 할 거야.

 

두고 봐!”

 

그땐 절대 도망 못 가. 반드시 알게 할 거야. 네게 피도 눈물도 있다는 거. 마음이 있다는 거. 왕이샹이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이 네게도 분명히 있다는 거. 넌 날 너무 좋아해. 언젠가의 이별을 견디지 못해 나를 피해야 할 정도로 내가 좋아. 앞뒤 없이 키스하는데도 1분이나 얼어있을 정도로 왕이샹이 너무 좋아서, 근데 왕이샹도 똑같아서, 이샹도 의주가 너무 좋아서, 지금 당장 죽어버리더라도 잠깐 얼굴 본 거로 시원하게 웃어버릴 만큼 좋아서, 그래서, 그러니까, 그러므로,

내가 가진 1시간. 1분. 1초. 0.000001초까지, 전부.

 

열린 차창. 손바닥만한 스크린으로 의주가 보인다.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차창이 닫힌다. 버스가 떠난다. 떠난 버스가 모퉁이를 돌아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이샹은 손목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의주가 볼 때마다 제 생각을 하라고 했던 손목 시계 위로 움직이는 초침이 보였다.

 

 

 

 

9시 6분 55초

 

시간은 이샹의 찰나를 위해 늦췄던 걸음만큼 빠르게 내달린다.

 

 

9시 6분 56초

 

이제 알겠어. 의주.

 

 

9시 6분 57초

 

내가 죽은 건 ‘너’를 빨리 만나고 싶어서였던 건지도 몰라.

 

 

9시 6분 58초

 

삼 억 걸음을 단숨에 따라잡고 싶어서, 가장 높은 곳을 향해 훌쩍 뛰어버렸던 건지도 몰라.

 

 

9시 6분 59초

 

비록 주어진 시간은 짧았으나.

 

 

 

 

9시 7분 00초

 

역시 소원 사이트에 걸어보길 잘했다.

가보지 않은 길을 걷는 일은, 역시 근사하지 않은 적이 없어서.

 

 

 

 

 

 

 

 

 

이샹은 그에게 남겨진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걸 다 했다.

그 이후는 예정대로였다.

 

고층 건물이 정류장을 향해 무너졌다.

 

 

 

 

 

 

 

 

 

 

 

 

 

 

 

 

 

🔇

 

 

금방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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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30일 9시 7분 00초

 

귓청이 떨어질듯한 폭발음이 울렸다.

 

삐- 이명이 귓가로 심전도음처럼 길게 울린다. 의주는 휴대폰을 쥔 채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명이 물러난 자리로 서서히 주변의 소음이 들려온다. 공원에 놀러 나온 커플들이 즐겁게 재잘이는 소리. 머리 위로 느리게 흔들리는 배롱나무의 이파리들이 보내는 시원한 박수 갈채. 계속 소리를 지르느라 빠르게 오르내리던 가슴팍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의주는 통화가 끊어진 채팅창을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 상대와의 연결이 끊어졌습니다. -

 

끊어졌다.

끊어졌다…

 

끊어졌다의 뜻은 세 가지가 있다. 실, 줄, 끈 따위의 이어진 것이 잘라져 따로 떨어지게 되다¹. 관계가 이어지지 아니하게 되다². 하던 일을 하지 아니하게 되거나 멈추게 되다³. 그러니까 셋 중 어떤 ‘끊어지다'일까. 니콜라스가 실밥을 끊듯이 그들을 연결해주던 종이컵 전화기의 실이 끊어져서, 통화가 어렵다는 뜻일까. 니콜라스와 이어오던 관계가 더는 이어지지 않게된 걸까. 아니면 가장 단정적인 마지막. 지속되었던 어떤. 생명 같은 것이 멈추게 되었다. 그러한 끊어졌다일까.

 

휴대폰 위에 뜬 시간은 오전 9시 7분. 머리 위에선 2024년의 하얀 구름이 붉은 배롱나무 꽃 위로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숨을 끊기에는 너무 화창한 날이었다.

 

 

 

 

 

9시 45분

 

쾅.

 

사무실 문을 박찼다. 선배, 오늘 외근 나가신 거 아니었…? 의아하게 그를 쳐다보는 T를 떠밀듯이 밀치고 제 자리로 달려갔다. 책상 서랍을 뒤집어 엎었다. 구깃구깃한 신문 기사를 펼치는 손이 중독자의 그것처럼 형편없이 떨렸다.

 

8월 30일, 정류장 인근 폭발 사고. 건물이 붕괴. 정류장에 서 있던 시민 5명. 시신 전소…

 

보지 않고도 읊을 수 있는 기사.

눈 감고도 그릴 수 있는 사진.

전부 똑같다.

 

기사 속 숫자는 달라지지 않았다. 사진에는 여전히 니콜라스의 운동화가 시체처럼 누워있다. 달라질 게 없는 줄 알면서도 읽고 읽고 또 읽는다. 빡빡하게 말라가는 눈알이 머리를 아프게 두드린다. 이제 그만 받아들이라고 종용한다. 의주의 눈에 보이는 진실은 하나뿐이다.

 

니콜라스는 죽었다.

여전히.

 

 

 

 

 

 

 

10시 7분

 

컴퓨터가 1시간마다 알림을 울려온다.

니콜라스와 만나기로 했던 시간으로부터 1시간이 지났다.

 

 

11시 7분

 

2시간이.

 

 

12시 7분

 

3시간이.

 

 

13시 7분

 

도대체 난 몇번의 이걸 겪은 거지.

 

 

14시 7분

 

열아홉의 의주는 다시 2년 후 니콜라스의 죽음을 전해들을 것이다. 그 후로 다시 9년 간 그의 죽음은 사채처럼 의주의 감정들을 고갈해갈 것이다.

 

 

15시 7분

 

내게 피도 눈물도 없지 않다는 걸, 내게도 감정이 있다는 걸 증명해줄 녀석을 영원히 잃은 채로. 영원히 모기에 물리지 않는 사람으로.

그렇게.

 

 

18시 7분

 

식사를 하고 들어오던 T와 H가 놀란 표정으로 변의주를 본다. 아직도 퇴근 안 했어요? 상태 안 좋아보이는데 집에 좀 가세요. 큰 건 마무리하시느라 몸살나셨나보네. 아이고. 녹말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던 C 차장도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지나간다. 그래, 넌 좀 일찍 들어가라. 네가 터뜨린 기사 덕분에 요새 강남 라인이 기자로 바글바글해. 그렇게 염불 외더니 결국 범죄도시 해냈네?

 

의주는 고개를 천천히 젓는다. 괜찮습니다. 오래 굳은 경추에서 삐걱삐걱 소리가 난다. 싫다. 집으로 가고 싶지 않다.

 

잊어야 해. 일을 해야 해. 이런 순간에도 일을 할 수 있는 자신이 끔찍하다. T와 H가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러다 시체 치우는 거 아냐? C 차장님이 또 아이템 킬하신 거 아냐? 이번 킬은 정말 뼈아프셨나보다. 차장님도 진짜 너무하지. 권력의 노예인 게 분명… 중얼거리는 말들이 귓가를 맴돌기만 한다.

 

맞는 말이다. 이번 킬은 뼈 아팠다.

이미 당해본 킬인데도. 희망이라는 망치에 두드려 맞은 자리가 유독 뼈 아팠다.

 

여름날은 꿈꾸기 좋은 계절이다. 다 꿈이었을 뿐이다. 악몽 중에서도 가장 괘씸한 악몽이 변의주를 찾아왔다가 떠났을 뿐이다. 오만 원으로 지옥을 샀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여전히 나지 않았다. 니콜라스의 다짐과는 달리 의주는 끝내 그로 눈물짓지 못했다. 그를 살리지 못했다는 잔인한 진실 앞에서 온 몸의 핏기가 쭉 가시고, 숨이 가빠오고, 무릎이 떨렸고, 의자에 무너졌지만, 봐라. 지금은 아무렇지 않다. 그냥 잃었다. 이렇게 쉽게.

 

니콜라스는 의주를 원망하며 죽은 게 아니었다. 니콜라스는 의주를 백치같이, 미련하게, 꺾거나 돌아가는 법도 없이, 올곧게, 순수하게, 그래서 더 나쁘게, 죽을 각오로 사랑했다. 끝의 끝까지 니콜라스는 변의주만 생각했다. 그런데 변의주도 끝의 끝까지 변의주만 생각하는 바람에. 그 애가 온 힘을 다해 던진 사랑에 원망이란 색을 입혔다. 그들의 마지막에 대해 11년을 착각했다. 11년을. 무슨 착각을 11년이나 했다.

 

의주는 9시간 만에 사무실에서 나와 옥상으로 올라간다. 와이셔츠 포켓에 꽂힌 담배를 꺼내는 대신, 누가 난간에 비벼두고 간 붉은 연지 자국이 묻은 꽁초를 집어든다. 반 밖에 타지 못하고 버려진 꽁초였다. 휠 라이터를 꺼내 끝에 불을 댔다. 틱. 틱. 틱. 몇 번의 시도 끝에 불꽃이 피어난다. 어두컴컴한 밤을 배경으로 피어오른 작은 불꽃이. 점차 파르르 떨린다.

 

꽁초 끝에 닿은 신문 기사가 검게 타들어간다.

그 재를 옥상 바람에 떠나보내면서, 의주는 눈 마른 울음을 꺽꺽 울었다.

 

이 세계에서 나만이 너의 장례를 두 번이나 치렀다.

 

 

 

 

 

 

 

 

 

 

 

 

 

 

 

 

 

창을 닫지 마세요

 

저거 도대체 몇 시간 째 삐대는 거냐? 기자가 엉덩이가 아니라 발로 일해야지…. 저기 창 좀 열어라. 사무실에서 시취 나는 거 같어.

거기 방충망 구멍 나서 모기 들어와요, 선배.

들어오라 그래. 어차피 의주는 안 물잖아. 자고로 신은 한 쪽 창을 닫으시면 다른 쪽 창은 반드시 열어두시는 법이다.

문이겠죠….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대화의 객체가 의주인줄도 몰랐다. 눈을 깜빡이는 일조차 번거롭게 느껴진 몇 시간이었으니까. 이미 데스크에서 컨펌 받은 기사라 더 이상의 수정은 의미가 없는 걸 알면서도. 조사 한 자를 교열한다. 이 기사는 온점이다. 한 치의 오차와 흠이 없는 마무리여야 마땅했다. 의주에겐 천우징의 말로를 기록할 의무가 있다. 취득한 정보를 보도 목적으로만 사용한다는 직업 윤리 같은 건 이미 염두에 두지 않았다.

 

 

[단독 보도] 강남 유흥가를 떠들썩하게 한 ‘천 사장’의 정체

 

보도 타이틀은 직설적이고 명료하다. 내용엔 사감이 임계치 직전까지만 깃들었다. 잠복 취재를 통해. 극적으로 포착한 사진. 스모킹건. 경찰과 기자의 공조. 삼합회의 검은 돈을 다루는 천우징과 한국 엔터테인먼트 사 대표의 유착 의혹에 관하여. 대만 당국의 수사 협조 요청으로, 현재 행적 추적 중. 해외로 도피한 것으로 추정. 기사의 논조가 삭막하지 못 하다고 몇 번이나 깨졌다. 여전히 단어는 한여름의 타이어처럼 한껏 부풀어 굴러갈 준비를 하고 있다.

 

업로드와 동시에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입사 초반부터 끈질기게 다른 유착 사건 취재를 마무리짓는 기사였으니. 평소보다도 댓글이 달리는 속도가 빠르고 빈도가 잦았다. 성의 없는 댓글 한두 개로 끝나던 기사가 아니다. 의주는 지극히 무감하고 건조한 얼굴로 마우스를 딸깍거린다.

 

모쏠리니: ㄷㄷ 와 엔터 주가 어떡하냐

선녀와바지끈: 그러니까 작년부터 XX 엔터 배우들 마약 도박 사건 터진 게 삼합회가 배후라고? 근데 그 사람이 대만 엔터사업에서도 큰손이라고? 무슨 영화도 아니고… 진짜 어마어마하네

미디어광인: 근데 기자는 보도 윤리 있지 않나… 경찰에 제보하면 안 되지 않음?

모쏠리니: 보도를 하거나 제보를 하거나 하나만 했어야 했는데 둘 다 한 건 사실상 윤리 어긋나긴 함ㅇㅇ

할말살해마: 그럼 뭐 거기서 48시간 뻗대서 사진까지 찍었는데 특종 헐 때까지 기다려야 하냐? 방구석에서 키보드만 두드리는 것들이 말 존나 많음

남자성기삽니다: 이 기자님 아이디 들어가봤는데 4년 전에 쓴 삼합회 로비 의혹 관련 기사 있음..… 쳐보면 이 기사밖에 안 나오는데ㄷㄷ 대체 언제부터 냄새 맡은 거

 

 

이 순간을 상상한 적이 있다.

입사 첫 날, 소원이 있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사실 니콜라스의 복수를 완성시키는 순간을 그렸다.

 

상상 속의 의주는 조금 개운한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오래된 숙원이기도 했으니까. 데스크에 기사를 올리고, 의기양양하겠지만 일단 한숨을 자지 않으려나. 사는 것이 조금 덜 괴로워질지도 모르겠어.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전부 틀렸다. 어떤 기분도, 생각도, 느낌도 들지 않는다. 비로소 껍데기처럼 앉아, 늘어나는 댓글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 의주의 몇 년을 묵혔다 털어냈는데. 잠도 오지 않는다. 쉬어야겠다는 욕심도. 의기양양한 마음도. 늘 닻처럼 짊어지고 있던 고통에 어떤 증감도 없다.

 

네가 없는 세상이 조금 안전해졌다. 네가 없는데. 이제야. 때늦게. 소실된 네가 자유로워졌다.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자유가 된 너는 어디에 떠다니고 있나. 이젠 무엇도 니콜라스를 괴롭히지 않는다. 하지만 의주는 괴롭다. 차라리 기회를 가졌던 적이 없길 바란다. 가진 적이 없던 일부가 통증처럼 아프다. 이제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그 애가 이제야 자유로워진 것처럼, 의주는 이제야 길을 잃어버린다. 유예한 죽음이 의주에게 와서, 이제 그는 힘껏 고통스러워해야 한다. 일부를 잃어버린 대가로 전부를 견디면서 살아가야 한다. 여전히 울지도 못하고. 너의 죽음 속에서. 솔직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의주는 노트북의 화면을 덮는다. 그곳에 니콜라스의 죽음이 있다. 막을 내린 노트북 위로 웅크린다. 뻑뻑한 눈꺼풀을 깜빡거리다, 다시 감는다.

 

필요했던 건 딱 하나뿐이었으나 영영 잃어버렸다. 일부가 떨어져나간 게 아니다. 니콜라스로부터 의주의 전부가 유실된 것이다. 슬픔조차 무감하게 느껴지는 세계로부터, 시야가 감긴다. 전원을 내리듯. 암전. 모든 것이…….

 

 

 

 

 

 

여름은 꿈꾸기 좋은 계절.

 

사무실에서 잠든 의주는 꿈을 꾸었다. 그 지긋지긋한 소원 사이트에 접속하는 꿈이었다.

 

사이트가 말하길, 십만 번째 같은 선택을 한 고객을 대상으로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다고 한다. 십만 번째 기념으로 십만 원을 결제하면, 과거의 가장 돌아가고 싶은 순간으로 딱 1분. 1분 동안 보내준다고.

 

1분간 직접 과거를 바꿀 수 있는 기회를 드립니다. 어느 1분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필요 없습니다. 모든 선택이 모여서 지금의 저를 만드는 겁니다. 상실도 후회도 전부 제 몫입니다. 돌아본다는 선택지는 없어요. ……그런 소리는 복수는 무엇도 낳지 않는다는 말이랑 똑같은 거였다. 듣기에는 그럴싸하고 입 바르지만. 웃기지 마라. 기회만 주어지면 누구나 선택한다. 1분을 천 번 사도 모자랄 만큼 수도 없이 많은 후회의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으니까.

 

의주는 제게 오만 원짜리 지옥을 판 사이트에 또 십만 원을 결제했다. 니콜라스를 1분 더 볼 수 있으면 백만 원 천만 원쯤 값쌌다. 어바웃 타임을 봐서 그런가. 그가 졸았던 사무실 문이 과거로 통하는 통로가 되어 있었다. 꿈이니까, 별 설명이 없어도 의주는 모든 걸 이해하고 있었다. 망설임 없이 사무실 문을 열었다.

 

의주가 고른 1분은 옥탑방에서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이상하게, 분명 잊고 살았던 그 순간의 모든 것들이 너무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꿈속에서 완벽하게 재현되었다. 그날의 붉은 하늘. 옥상에 걸려서 흔들리던 낡은 빨랫줄. 발밑에서 바스락대던 신문지. 힘있게 움켜잡힌 손목에서 느껴지는 얼얼함. 니콜라스의, 돌아보지 않아도 표정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금방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목소리.

 

그럼 난 너한테 뭐였는데?

 

니콜라스가 질문을 던졌다.

우산을 챙기지 못한 의주는 직선으로 내리는 마음을 흠뻑 뒤집어쓴다. 그때와 같이 의주는. 이번에도 의주는. 그 말이 여전히 조금 두렵고. 가슴이 쿵쾅거리고. 도망치고 싶고. 가슴이 미어지도록 괴롭다. 그래서 의주는.

 

인생은 가보지 않은 낯선 길을 걷는 여행입니다.

 

이번엔 말보다 명확한 방식의 발화를 선택했다.

니콜라스의 멱살을 붙들고 끌어당겨 입술을 부딪혔다. 그애가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넌 나한테 뭐였지.

좋아하는 애였지.

좋아하는 애. 좋아서. 다른 애 말고 나. 나를 좋아해줬으면 하는 애였지. 내가 떠나면 슬퍼해줬으면 하는 애. 나를 좀 붙잡아줬으면 하는 애. 네가 가지 말라고 딱 한 마디만 했어도, 내 결심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을 수도 있었을, 작지만 거대한 애였지. 정말 오래도록 친구로만 남으려고 애써봤지만. 역시 좋았지. 좋아서 어쩔 수가 없었어. 너. 내가 피도 눈물도 없다고 했지.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네가 나 피 안 흘리는 거 봤니. 눈물샘 열어봤냐고. 널 만난 뒤로 내 안에 무엇이 뜨겁게 끓고 있었는지, 너 아무 것도 모르면서. 나한테 없는 건 피도 눈물도 아니었는데. 나한테 없는 건 너 하나뿐이었는데. 네가 날 좋아한다고 말해주지 않아서. 붙잡아주지 않아서. 나는 이제 영원히 그걸 확인받을 수 없게 됐어. 누굴 만나도 심장에 피가 흐르지 않고, 누구와 이별해도 눈물이 나지 않는 사람이 됐어. 여름이 오면 널 대신해 찾아오는 모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됐어. 그것이 나를 물어 뜯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면서. 네가 했어야 하는 일을 대신해주기를 기다리면서. 피를 보길 기다리면서. 사실 내가 기다리는 건 다른 거였는데. 너였는데. 너를 내가 참 많이.

 

좋아했는데.

 

 

 

니콜라스의 표정은 끝내 확인하지 못했다. 그것만은 꿈인데도 기억이 재구성하지 못했다. 1분 짜리 값비싼 여름날이 멀어진다. 이후는 마치 달리는 기차처럼 장면과 장면의 연속 필름이었다. 니콜라스는 변함없이 정류장에 나오고. 건물은 변함없이 무너지고. 의주는 그것을 2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고.

 

나야 뭐. 주주가 한다면 다 응원하지.

 

꿈 속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잘못 붙인 콜라주처럼 어색하게 끼어드는 목소리였다.

 

세상에 의주 편 한 놈도 없어지면, 그땐 내가 네 편 해줄게. 무조건.

 

왜 그 말들이 떠올랐을까…… 어떤 맥락도 없이.

 

 

 

 

 

여전히 의주는 사무실 속이다.

책상에 엎드린 채 잠에서 깬다. 몇 시간을 잔 것 같이 정신이 맑은데, 불과 30분도 채 지나 있지 않았다. 사무실의 정경이 완전히 낯설게 느껴진다. 깜빡거리는 형광등의 창백한 조명. 창문 밖으로 나다니는 자동차의 소음. 에어컨의 바람 속으로 불쾌하게 도사린 전자기기의 열기.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을 꾼 양, 심중이 선득하게 두근거린다. 뭔가 중요한 단서를 놓친 것처럼. 의주는 안경을 고쳐 쓴다. 다시 노트북을 펼친다. 절전 상태였던 화면이 종전의 기사 댓글창을 그대로 보여낸다. 그 새 댓글이 더 달려 스크롤이 생겨 있는 화면을, 의주는 멍하게 응시한다.

 

asdf1234: 와 이 놈 드디어 잡혔어요? 대박~ 기자님 진짜 수고하셨습니다ㅋㅋ

 

늘 의주의 기사에 출석하는 댓글. 단순한 아이디. 이제 눈에 익어 정겨울 지경이다. 또 이 사람인가…. 무감히 내리려던 스크롤을, 의주는 불현듯 잡아세운다.

 

의주. 응원해주는 말만 들어. 단 한 명이어도 그 사람은 분명 의주 편이잖아.

 

성의 없는 댓글 아이디를 클릭한다. 댓글 이력이 뜬다. 전부 의주가 쓴 기사다. 그리고 의주가 쓴 기사 전부이기도 했다. 기묘했다. 세상에 아이돌도 아니고, 기자를 이만큼 집요하게 지켜보는 사람이 있나. 어떤 이유가 있는 게 아니고서야… 어떤 이유가.

 

굳은 손가락을 움직여 F5를 누른다. 화면이 새로고침 된다. 새 댓글이 달려 있다. asdf1234가 자기 댓글에 단 답글.

 

asdf1234: 근데 일 하느라 약속도 까먹은 거?

 

천천히. 아주 느리게 댓글을 읽는다. 의주는 안경을 벗는다. 렌즈가 흐려. 셔츠 밑단에 안경알을 문지르고, 다시 코 끝에 걸친다. 눈가를 조금 찡그리다 다시 F5를 눌렀다.

 

asdf1234: 난 10분 늦었는데 너는 얼마나 늦는 거야? 설마 10분도 안 기다리고 가버렸어? ㅋㅋ

asdf1234: 벌써 23시간 지났는데

asdf1234: 와 나이키랩 앞에 이틀 죽치던 거 생각나고 좋다

asdf1234: 얼마나 더 기다려요? ㅋㅋ 노숙자가 자꾸 나 노려봐

 

마우스를 낚아채는 손길이 매처럼 빨랐다. 의주는 방문 기록이 남아 있는 문제의 그 사고 기사에 접속한다. 커서가 형편없이 떨려서 몇 번이고 다른 페이지를 띄웠다. 여전히 삽입된 이미지에 니콜라스의 운동화가 뒹굴고 있고, 사상자 수엔 변함이 없다. 달라진 게 없는데. 23시간이 지난 거면… 지금이 몇 시지. 의주는 습관적으로 셔츠의 손목을 걷는다. 기실 휴대폰이나 노트북이 있을 땐 보지도 않는 악세사리. 오직 부의 척도를 나타내는 아이템으로 전락한 지 오래라, 그의 나이대에는 비싼 걸 차는 편이 면이 산다는 걸 알면서도. 그가 고른 니콜라스와 정확히 똑같은 값싸고 단일한 시계. 그러니까 23시간만에 처음으로 손목을 들여다본 의주는.

 

asdf1234: 나 그냥 가버린다 주주

 

비어있는 손목을 확인한다.

늘 그 자리에 머물던 시계 모양의 절망이 흔적 없이 사라져 있었다.

 

 

 

 

 

 

 

 

 

 

 

 

 

 

 

 

 

asdf1234 와 고고 노래방 옛날에 진짜 자주 갔는데~ 충격~

 

 

 

 

 

 

 

 

 

 

 

 

 

 

2024년 8월 31일

오전 9시 7분

 

 

작년 시속 146km짜리 폭풍이 네덜란드의 여름을 강타했다. 그로 인해 1명이 숨지고 부상자들이 속출했으며, 기상청은 코드 레드를 발령했다. 변의주도 기사를 썼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다.

 

차량 속도 계기판이 시속 146km을 두드린다. 그의 아반떼가 내본 것중 최고 속도였다. 경인 고속도로 위를 쏜살처럼 내달리는 차 뒤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제한 속도 구간에서 위반 딱지들이 날아붙었지만, 상관 없었다. 1분 1초도 더 기다리게 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게 꿈이 아니라면. 진짜라면. 진짜 그곳에 그 애가 기다리고 있다면.

 

거짓말이야. 거짓말이겠지. 시계는 씻을 때 풀어놨다가 깜빡한 건지도 몰라. 그 외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잖아.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는데.

 

공원 밖 아무 곳에나 차를 댔다. 견인 당해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그때부턴 두 다리로 달렸다. 숨 차게 뛰었다. 공원 중심부를 11년도 넘게 지키고 선 배롱나무가 의주를 향해 푸른 이파리를 손짓 한다. 벤치까지 겨우 당도한 의주는 무릎을 짚고 숨을 몰아쉬었다. 고개를 들었다.

 

아무도 없었다.

 

의주는 쓰러지듯 벤치에 주저 앉아서 숨을 골랐다. 곁을 돌아보았다. 니스칠 된 나무 벤치 위로 하얗게 일어난 글자. 의주 바보. 그를 11년이나 바보로 만들어놓았던 그 글자는 모든 게 꿈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그날, 의주의 옆 자리에 분명 니콜라스가 앉아 있었다고. 11년을 건너서 함께. 그들이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고.

 

증명받은 건 그게 전부였다. 그 기나긴 한여름밤의 꿈이 진짜이긴 했다고. 너에겐 분명 두 번째 기회가 있었다고.

 

목 아래로 무언가 차오른다. 동시에 빠져나간다. 무언가 터져나올 것 같다. 동시에 공허하다. 의주는 몸을 수그렸다. 이마가 무릎에 닿을 정도로 깊게 수그렸다. 그를 두고 돌아가는 세상을 향해 깊게 고두하는 자세로. 의주는 눈을 지긋이 감았다.

 

제발.

5만원으로 산 지옥이 너무 길잖아…….

 

귓가로 여름 바람이 살랑인다. 공을 차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와르르 쏟아진다. 손목 시계의 째깍거림이 톱밥처럼 쌓여간다. 의주의 인생은 지금부터였다. 지금부터 의주의 삶은 일 초가 다음 일 초로 이어지길 기다리는 순간의 연속이다. 길고. 지난하고. 고루하게. 오래도록 무의미할 것이다. 너 같은 애는 너밖에 없으니까. 너 밖에 없었으니까. 나한테.

 

차갑다…

여름인데도.

이마에 닿은 냉기가 차다. 축축하고.

 

의주는 눈을 떴다. 고개를 들었다. 그의 이마를 건드린 것은 차고 축축한 이슬이 맺힌 포카리 스웨트 캔이었다. 고개를 더 들었다. 음료 캔을 움켜쥔 투박한 손이 보인다. 나무의 가장 굵은 가지처럼 튼튼한 팔이. 그것을 휘감은 큼직하고 짙은 흉터가 시야에 들어왔다.

 

늦어 놓고 sorry도 없어.”

 

똑.

음료 캔에 맺혀있던 물방울이 떨어졌다.

 

의주는 내밀어진 캔을 느리게 받아들었다. 탁. 소리와 함께 캔이 따인다. 입구를 입에 댔다. 뛰어오느라 메마른 목으로 청량하고 달콤한 온도가 넘어갔다. 목을 축인 빈 캔을 우그러뜨리고, 의주는 비로소 적신 입술을 열었다.

 

너야말로 11년이나 걸려 놓고. 쏘리는 어딨는데…….”

 

그를 가만히 내려다 보던 니콜라스가 웃는다.

거봐. 울려준다고 했잖아.

 

2024년의 마지막 여름 날. 의주는 세상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남자를 품에 안고 울었다. 피도 눈물도 없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눈물샘이 범람했다. 살면서 흘린 눈물을 다 모아도 오늘 의주가 니콜라스를 끌어 안고 흘린 눈물을 넘어설 수는 없었다. 서른 살이 될 때까지 고여만 있던 물기를 죄다 흘려보낼 때까지, 니콜라스는 말없이 의주를 마주 안아주었다.

 

 

 

 

 

*

 

 

서른 살의 니콜라스.

그런 건 의주의 데이터 베이스에 존재하지 않았다.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의주 안의 니콜라스는 늘 열아홉에 박제되어 있었으니까. 열어젖힌 교복 셔츠와 가방을 등 위로 팔랑대던 열아홉. 11년의 간극을 훌쩍 지나 나타난 니콜라스는. 더 이상 셔츠를 열고 다니지 않고, 등이 커다랬다. 의주의 상상보다도 더 다정하고… 어느 의미로 능숙하다. 의주의 손바닥 위에서 뛰고 달리는 소년의 니콜라스가 아니다. 뚝. 뚝- 해. 성기고 큰 손바닥으로 의주의 뺨을 몇 번이고 닦아내며 속삭인다. 숫제 어린애를 달래는 것 같은 목소리가. 변한 것이 없는데도 낯설었다. 급기야 티셔츠 앞섶으로 의주의 코를 훔치는 시늉을 해서, 의주는 빨개진 얼굴로 결국 웃고 만다.

 

울지 마. 의주가 우니까…

응. 이제 안 울어.

못생겼어.

 

어이가 없어서 눈물이 그쳤다. 한 번 더 젖은 볼을 문지른 니콜라스가 크게 웃는다. 그쳤다. 안 운다. 그를 따라 털레털레 웃는 의주의 손목을 끌어다 벤치에 앉힌다. 정확히 ‘의주 바보’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채로, 의주는 가늘게 잔울음을 헐떡거린다. 다시 팔꿈치 안쪽에 눈을 묻자 니콜라스가 어어, 하며 탄식했다. 왜 또 울어. 우는 거 아니야. 근데 왜 가려. 못생겼다며…….

 

의주. 서른인데 귀여운 거 졸업 못 했어. 애다, 애. 마구잡이로 머리통을 끌어안고 킬킬거리는 니콜라스의 가슴팍에선 낯선 체향이 난다. 가만히 안겨준 것은 순전히 그 때문이다. 니콜라스에게서. 아주 오래, 여름 속에 서 있던 것 같은 냄새가 나서. 고작 스물네 시간보다 훨씬, 훨씬 긴 시간 이곳에서 의주를 기다려온 사람처럼.

 

소회는 짧았고 나눠야 할 얘기는 많았다. 의주는 퉁퉁 부은 제 눈과 입술을 닦다 몇 번이고 니콜라스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어떻게 여기 앉아있는 건지 믿기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꿈인가. 흰 뺨을 세게 꼬집자, 가만히 얼굴을 대어주고 있던 니콜라스가 아픈 소리를 냈다.

 

죽었다고 했는데.”

시체는 안 나왔잖아.”

기사에선 사상자 수가 안 변했어….”

나 대신 누가 돌아가셨나. 좀 죄송하네.”

그럼 기사 사진에 그 신발은?”

뛰다가 벗겨졌지.”

 

뒤꿈치도 다 까졌어. 엄청 아팠어. 11년 전의 사건을 어제 일처럼 얘기하면서, 니콜라스가 발코를 들어 보였다.

 

주주가 그렇게 경고해줬는데. 가만 있을 리가 없잖아. 바보도 아니고.”

“........”

열아홉 살 의주도. 서른 살의 의주도. 안 외롭게 두고 싶었어. 약속한 거 다 지키고 싶었어. 그래서 마지막 1초까지 발악했어. 죽으면 주주가 외로워질 테니까…….”

 

다시 만난 니콜라스는 한국어가 얼마간 유창해져 있었다. 의주가 말해줬던 정류장. 사실 뻔질나게 가봤거든. 그니까… 안 올 거지만. 혹시라도 내가 여길 올 수도 있으니까. 만약이니까. 만약 오면, 어떻게 사고를 피할 수 있을지 계속 생각했었어. 탁 트인 곳이라 뛰어들 데가 하나도 없더라고. 그나마 찾은 게 그거다. 금 간 맨홀.

 

asdf1234 저도 예전에 맨홀 깨먹은 적 있음 ㅋㅋ 금 갔길래 발로 밟았더니 1초만에 퍽 깨지더라고요 ㅋㅋ 오늘도 기사 잘봤습니다!

 

그때 진짜 아슬아슬했지. 완전 luck이었다.”

 

이거 봐. 그가 팔뚝을 훈장처럼 내보인다. 희게 부푼 전완 위로 화상을 입은 상처가 번져 있다. 비닐 같은 새살이 붉게 도포된 상흔. 의주는 매끈한 표면을 조심스럽게 만진다. 의주의 손끝을 따라 융기된 살점이 밀렸다, 돌아온다. 간지러운데. 귀와 어깨를 붙인 니콜라스가 또 웃는다.

 

타죽진 않았잖아. 이렇게 살아서 주주도 만나고…..”

한국 언제 들어왔어?”

어. 한국? 지난달에….”

연락 왜 안 했어?”

 

안도하고 나자 때늦게 감정이 밀려든다. 또 말미에 원망이 밴다.

 

연락할 수 있었잖아. 내 기사에 댓글도 달았으면서.”

“......아. 그게.”

살아 있었으면서 왜, 내가 11년이나 네가 죽었다고 믿게 해……”

 

말끝이 떨렸다. 이제 니콜라스가 곤란한 미소를 짓는다. 주주. 진짜 너 눈물이 없다고 생각했어? 이렇게 잘 울면서? 의주의 짓무른 눈가를 투박한 엄지가 훔쳐낸다.

 

그래야 의주가 완전히 안전하니까.”

 

니콜라스는 차근차근 그의 11년을 되감아 들려주었다. 아주 재밌는 옛날 얘기를 하듯이.

 

그날 현장에서 나온 휴대폰이랑 신발 때문인가. 내가 죽은 것처럼 기사가 나왔더라. 경찰들이 띄운 사망자 명단에도 내 이름 있길래. 그래서….. 그대로 죽은 척 했어. 그래야 그만 쫓겨 다닐 수 있잖아. 이모도 나 죽은 줄 알았나 봐. 이모한테 찾아 갔더니 정말 기절할 것처럼 놀랐어. 그대로 이모랑 같이 배 타고 도망쳤지. 세계 지도 여기저기 빙빙 돌다가, 종착지는 미국으로.

 

너한테 연락하고 싶었는데. 네가 알려준 주소, 그런 거. 사고 날 핸드폰이랑 같이 다 잃어버려서. 너 페이스북도 비공개고. 다시 그런 거 하면 이모가 머리털을 다 뽑아 놓겠다고 해서……. 주주가 좀 더 외향적으로 살았다면 내가 좀 더 빨리 찾았을 텐데. 아야. 왜 때려? 그래도 미국 대학교 커뮤니티는 다 찾아봤어. 네 얼굴 보고 싶어서. 주주가 다니는 학교 겨우 찾았는데… 자퇴했다는 거야. 딱 한 달 차이로 귀국했다고. 네 플랫 메이트가 말해줬어.

 

한국에는 못 가고. 미국엔 주주 없고. 어쩔 수 없지 뭐. 피자 가게 도넛 가게에서 일하면서 돈 모았어. 기자가 오면 쫌 더 잘해줬어. 네 생각 나서. 소식 알고 싶어서, 매일 구글에 네 이름 검색했어. 한국에 언제쯤 들어갈 수 있나. 천우징도 계속 알아보고. 그런데, 어느 날 검색 결과에 한 기사가 떴어. 그, 네가 쓴 첫번째 삼합회 기사. 읽자마자 알아봤어. 주주다. 내가 아는 변의주다.

 

나 약속 지켰다. 주주 1호팬. 무조건 네 편. 응원 댓글 다 달았는데. 읽었어?

 

11년은 정말 속 터지게 느리더라. 네 기사 읽는 재미까지 없었으면 정말 지겨울 뻔했어. 참지 못하고 약속보다 한 달이나 일찍 한국 와버렸잖아. 있는 돈 없는 돈 탈탈 털어서. 사실 멀리서 주주 쪼금씩 훔쳐봤는데. 몰랐지. 나도 너 때문에 미래 컷닝했으니까. 어디 가는지 다 아니까. 미리 가서, 주주랑 가까운 자리에 앉아있기도 했어. 괜히 툭툭 쳤는데. 안 돌아보더라. 돌아보면 모른 척 들켜줄까 했는데, 아야, 아야, 미안해, 미안… 그래도 약속 다 지켰는데…

 

참. 마지막 기사 있잖아. 댓글 엄청 많이 달렸더라. 천우징 이제 한국에서는 기를 못 펴겠던데. 멋지다. 주주. 나 이제 죽은 척 안 하고 살아도 되지?

 

니콜.”

응?”

“11년 치를 하루만에 다 말하려고 하지 마.”

 

아까부터 참고 있었는데. 더는 차례를 기다리기 힘들었다. 니콜라스의 양뺨을 움켜쥐었다. 연필처럼 뾰족하던 눈매를 멀뚱하게 궁글린 그를 보면서, 의주는 정말, 이 길고 어찌 되어도 좋을 이야기들보다 훨씬 궁금했던 질문을 턱 뱉었다.

 

요즘 나랑 얘기하고 있으면, 뭐.”

“.....음?”

너가 그 때 채팅으로 그랬잖아. 11년 전에. 요즘 나랑 얘기 하고 있으면… 그 다음 뭐라고 하려고 했어. 얼굴 보면 알려주기로 했잖아.”

 

이것이 그에게 얼마나 때늦은 대화인지는 알고 있다. 의주에게는 엊그제여도 이샹에게는 11년 하고도 엊그제 일이다. 알고 있지만. 알고 있지만 기묘한 확신이 있었다. 기억의 천재인 너는 분명 잊지 않았을 거라고. 딱 저런 표정으로 눈을 껌뻑이다가, 아아, 짧은 탄식과 함께 웃으면서, 어렵지 않게 그 대답을 떠올려줄 거라고.

 

별 거 아냐. 너 나 좋아한다고.”

 

이샹이 미소를 지었다. 부드러운 능선을 그리는 입부리를 보는 순간, 의주는 망설임 없이 입술을 겹쳤다.

 

두 번째 입맞춤이었다. 이번엔 이쪽에서 먼저 했다. 예고도 전조도 없었지만, 11년 전 니콜라스가 선빵이었으니까 그래도 된다. 멋대로 해도 돼. 네 입술 같은 거, 재잘대라고 있는 게 아니라 나랑 키스하라고 만들어졌다는 양 함부로 훔쳐도 된다. 그러고 싶었으니까. 정말 오래 전부터 이러고 싶었으니까. 앞니가 쨍 하고 부딪힐 만큼 격렬하게 그를 삼켰다. 니콜라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의주의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거친 서슬에 안경이 콧등에서 미끄러졌다. 섞이는 혀에서 피맛이 났다. 왜 우리의 키스는 전부 사람들이 나다니는 길바닥에서 이루어지는 걸까, 그런 지엽적인 문제 같은 건 금세 지워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이야 보든 말든, 그를 끌어안고, 그의 입을 제 입으로 완전히 틀어막고서야, 그 애의 숨을 느끼고서야, 생물성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의주는.

 

깨닫는다.

그 한 마디를 11년이나 기다려왔다는 걸.

 

 

 

 

 

 

 

 

 

 

 

 

 

 

 

 

 

근데 그거 알아, 주주? 너도 할 말 있다고 했었어.

내가 언제.

너 떠나기 전날. 학교에서 청소 시간에.

기억 안 나.

거짓말. 거짓말 하면 다 티나.

티 많이 나?

기억하네. 할 말 뭐였는데. 빨리 들려줘!

서른 먹고 어린애처럼 보채지 마…… 음. 오늘 보니까 이미 알고 있던데?

뭐? 내가 주주 할 말 어떻게 알아?

알던데. 아까 네 입으로 말하던데.

……

……앗. 따가.

왜?

방금 모기가……

 

 

 

 

Ꙭ̮

 

 

 

 

 

 

 

 

 

 

 

 

 

 

 

 

 

 

 

 

 

 

 

 

 

 

 

 

 

 

 

 

 

 

 

 

쟤 또 담배 줍네.

 

높고 하얀 건물 옥상에 서 있는 남자를 보면서, 이샹은 그가 살아있던 날이 남기고 간 노스텔지어를 느낀다. 웅크려있던 남자의 등이 펴진다. 정수리가 쑥 올라왔다. 분수처럼 쏟아지는 숱에 끝단에서 살짝 엉기는 머리카락. 천국에서도 단박에 알아볼 수 있는 정수리를 내려다보면서. 이샹은 조금 웃었다.

 

여전하네. 변의주.

 

 

 

 

 

언제부터 너를 봤다고 생각해?

꽁초를 줍던 그날일까?

글쎄.

 

처음 만난 바로 그 순간부터, 왕이샹의 소관은 변의주를 보는 일이었다.

 

전학 온 첫날부터 왕이샹은 변의주만 보았다. 담임이 그 애의 앞자리를 이샹의 자리로 내주었을 때부터 그랬다. 자기 소개를 마치고 앉을 자리로 걸어 가기까지, 이샹은 긴 시간 동안 그 애를 정면으로 보고 다가가야 했다. 책상들을 지나쳐서 다가가는 내도록 둘은 서로의 눈을 보았다. 얌전한 머리나 능선이 많은 얼굴. 순한 눈을 가둔 뿔테 안경이 가장 강렬했다. 공부 잘 하게 생겼네. 의자를 빼다 실수로 책상을 쳤다. 눈이 마주쳐서 웃어줬더니, 피했다.

 

다음날에도 이샹은 자리로 가는 동안 의주를 보았다. 머리. 얌전한 줄 알았는데 가까이 보니까 군데군데 엉겨있네. 빗어도 엉키는 체질인가. 길게 기르면 삽살개처럼 덥수룩해질 것 같네. 의자를 조심스럽게 뺐다. 놈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 다음날에도 이샹은 자리로 가는 동안 의주를 보았다. 그때 이샹은 저도 모르게 얇은 교복 셔츠를 두어번 펄럭였다. 조금 더웠다. 조끼까지 챙겨입은 차림새가 보기 더워서도 있지만, 그애 주변 공기가 유독 뜨거웠다. 누군가 걔만 찻주전자 속에 넣어 놓은 것 같다. 모의고사 문제집으로 고개를 푹 숙인 목덜미에서 옅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듯 했다. 끓는 물 같은 얼굴이네. 저러다 넘칠 것 같은데.

 

의자를 빼다 일부러 책상을 쳤다. 눈이 마주쳤다. 절절 끓고 있는 눈동자를 보면서 웃어주었다. 또 피했다. 첫번보다 한 2초 늦게.

 

이샹은 자주 의주의 책상을 쳤다. 그때마다 끓고 있던 의주는 움찔했다. 찰랑. 넘치는 것 같았다. 그 애가 눈에 담고 있던 열기가 이샹에게로 쏟아졌다. 뜨거웠다. 가끔 의주 책상에 있던 지우개나 샤프가 떨어지기도 했다. 이샹은 늘 그것을 주웠지만, 바로 책상에 놔주지 않았다. 의주가 아, 고마워, 하고 손을 내밀면 그때 손 위에 올려놓았다. 지우개나 샤프를 건네는 손끝에 의주의 손바닥이 스쳤다. 뜨거웠다.

 

그정도였다. 둘은 쉽게 스쳤지만 좀처럼 마주치지 않았다. 서로를 의식하면서도 서로를 바깥에 두었다. 이샹은 친구들이 생겼고, 의주는 친구들을 멀리했다. 이대로 학년이 바뀔 때까지 데면데면할 수도 있었다. 그 애가 담배를 줍던 모습을 이샹이 보지 않았다면.

 

의주는 라이터와 담배를 함께 주웠다. 이어질 행동이 뻔했다. 이샹은 옥상 난간에 턱을 괴고 구경했다.

 

나쁜 짓을 꼭 나쁜 짓처럼 한다.

나쁜 짓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애들도 많은데.

 

정해진 길에서 커브를 꺾을 수 있는 쿨함. 도전과 비행은 둘 다 틀에서 벗어나려는 몸짓이다. 그 틀이 억압인지 보호인지가 다를 뿐이다. 한껏 나빠 보이고 싶을 나이의 소년들은 구분하지 못한다. 알아도 듣기 싫은 거지. 제한 속도 무시하고 질주하는 쾌감을 한 번 알게 되면 틀 안으로 돌아가기 어려워진다.

 

그러나 변의주는 비행을 꼭 도전 같이 하고 있었다. 돈을 훔치는 것도 아니고 버린 꽁초를 줍는 건데도, 어깨가 안쓰러울 정도로 굳어있다.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보는 눈이 없는 걸 몇번이나 확인하고. 담벼락과 차 사이에 쪼그려 몸을 숨긴 채로, 꽁초를 주워들었다. 무척 무거운 걸 주워들듯이 힘겹게.

 

3층짜리 벽돌 주택 옥상에서, 이샹은 편안하게 그 애의 일탈을 구경했다. 의주는 정말로 주운 꽁초를 입에 물었다. 이샹은 인상을 찡그렸다. 웩. 그렇게 나빠 보고 싶었나. 그래서 남이 피우던 거 주워 피우는 건가. 아님 샌님 같이 생겨선 변태인가. 북슬북슬한 머리칼에 가려서 표정이 안 보인다. 어떤 표정으로 꽁초를 물고 있을지 궁금했다.

 

옥상에서 빠져나온 이샹이 1층으로 내려갈 때까지도, 의주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두꺼비한테 팔린 헌집 같은 등을 보다 천천히 다가갔다. 그 애는 주운 라이터를 켜보려고 씨름을 하는 중이었다. 버려진 라이터엔 기름도 없겠지만, 애초에 변의주는 불을 어떻게 켜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럴 거 같긴 했다. 불을 어떻게 끄는지도 모르는 애니까. 푹 숙인 목덜미에서 옅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듯 했다. 여전히 끓는 물 같은 얼굴이네. 정말 넘칠 것 같은데. 슬슬 누가 봐줘야 할 것 같은데.

발견해줘야 할 것 같은데.

 

이샹. 실밥은 함부로 뜯거나 잡아당기면 안 돼. 실은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억지로 잡아당기면 멀쩡하던 부분도 구겨진단다. 그래서 라이터로 지져서 막아주는 거야. 올이 더는 풀리지 않게. 거기서 멈추도록.

 

이모의 말을 떠올리면서, 이샹은 주머니에 질러넣은 손끝으로 라이터를 갉작였다. 바닥에 붙어있던 걸음이 느리게 떨어졌다. 그 애가 가까워진다. 그냥. 그 애의 책상을 의자 등받이로 건드리는 행위의 연장선이다. 조금 더 세게 건드려 보고 싶었을 뿐이다. 남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굽어진 등. 그러나 이샹의 눈에 띄고 만 침울한 머리꼭지. 혹은 전학 온 가장 첫날. 혼자 아지랑이처럼 위태롭고 뜨겁게 끓고 있던 눈을 마주쳤을 때부터 아마도 이샹은 이러고 싶었던 것 같다. 의주한테 발각되고 싶었다. 의주가 이샹에게 발각되었듯이. 꽁초를 줍는 의주는 무더웠고. 무고하게 아파 보였고. 발에는 길 안 든 가죽 구두가 신겨 있었고. 뒷덜미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서. 유독 부드러워 보이는 입술에는 더러운, 새빨간 얼룩이 묻은, 가여운 실밥 한 가닥이 물려 있었고. 아무도 그 애가 이러고 있는 걸 발견하지 못했고. 이샹은 마침 주머니에 손을 꽂고 있었고. 그가 가진 작은 라이터가 손바닥에 잡혀서.

 

- 빌려줄까?

 

그 애가 다 풀려버리기 전에 실밥을 끊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라이터를 내주었고.

 

 

 

 

 

 

 

 

 

그렇게 시작한 일이 여기까지 왔네. 주주.

 

역시 천국은 시간이 겁나 빠르다. 3억 초 쯤은 눈 깜빡할 새에 지나가더라. 아니. 사실 천국에는 시간이란 개념이 없었다. 엄마한테 물어봤더니 그러더라. 시간은 모든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지상에서 만들어진 거라고.

 

여기선 모든 사건이 동시에 보인다. 저쪽에서는 이샹이 막 전학온 교실에서 교복쟁이 의주를 꼬나보고 있고. 이쪽 건물 위에선 서른 살의 변의주가 담배 꽁초들을 우울하게 내려다보고 있다.

 

또 어디선 이샹이 실시간으로 죽고 있고.

어디선 마흔이 넘은 의주가 고독한 단칸방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하나만이 변함없다. 이샹이 사라지고 나면 의주는 웃질 않았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처럼 산다. 죽상인 얼굴 참 안 이쁘다. 입꼬리는 웃고 있는데 눈은 울고 있잖아. 맨날 반쪽짜리로 웃고. 불량해.

 

「선배는요? 의주 선배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갈 거예요?」

「딱히 없어.」

 

와. 주주 개구라.

 

「모기에 물려보고 싶어요.」

「모기에게 물린다는 건 몸 속에 피가 흐른다는 거잖아요.」

 

저런 걸 소원이라고 말하고 있네. 회사 면접 같은 중요한 자리에서.

 

「지금은 걱정 안 돼? 주주.」

「거기 나 없잖아.」

 

내 소원도 바보 같기는 똑같고.

 

아빠는 천국이 옛날 같지 않다고 투덜거렸다. 자기가 처음 왔을 땐 천국에서 인터넷 이용도 못했는데. 젊어서 온 애들은 하루 한 시간 씩 인터넷으로 선플 알바를 하며 돈벌이를 하기도 한다고 했다. 그렇게 번 돈을 살아있는 가족들에게 갑자기 생긴 꽁돈으로 살그머니 넣어주거나 길바닥에 떨궈서 소소한 재미도 맛본다고. 천국은 군기가 전부인데 다들 빠졌다고 그런다. 군기가 빠진 덕분에 아들 두고 비명횡사한 부모님이나 후회할 짓 잔뜩 저지른 이샹 같은 놈도 여기 온 것 같은데 말이다.

 

사실 이샹도 최근 인터넷을 쓰고 있다. 무료 온라인 강좌로 사이트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는데 이거 아주 재밌었다. 아직은 기본 디자인 정도밖에 못해서 미감은 충격적이지만. 결제 기능부터 채팅 서버 여는 법까지 배우고 나니 무엇이든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자고로 신은 한쪽 창을 닫으시면 다른 쪽 창은 열어두시는 법이다.」

「문이겠죠.」

 

긴 대기 끝에 컴퓨터 앞에 앉은 이샹은 문득, 한 가지 장난을 떠올렸다.

 

열어 볼까? 창을.

 

시간을 속여서, 과거와 미래가 서로를 살짝 엿볼 수 있는 창을 연다면 어떨까. 생전에 속이는 건 나쁜 일이라고 배웠다. 그것은 대체로 속이는 일의 결과가 불행과 파멸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속이는 일로 누군가를 구할 수 있다면, 그건 좋은 일 아닐까? 예컨대 어플로 만난 넷카마에게 우연찮게 인생을 구원받은 청년이 존재한다면. 그건 천국에서 저질러도 용서받을만한 ‘속이기’ 아닐까?

 

천국이 군기가 빠져서 그렇다. 이샹이 짓궂은 계획을 세우기 전에 막지 못한 천사님들 잘못이다. 이샹은 그가 몰래 관음해온 시간들 속에서 힌트를 얻어 홈페이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입력받는 건 이름이랑 사주. 만약에 둘이 서로의 이름과 생일을 입력하면, 두 사람은 같은 채팅방에 입장한다. 그들이 서 있는 게 과거든 미래든 간에. 장난이니까. 혹시 한명이라도 다른 사람의 이름을 입력하면 정말 장난으로 끝나면 그만이니까. 아무나 쓰지 못하게 결제창. 가격은 각각 오만 원 씩. 고등학생 때 의주가 고양이 모자 뽑겠다고 쓴 돈이 구만 오천 원이니까. 한 방에 뽑는 거로 살짝 바꿔서 돈 아껴주고. 남은 오천 원은 이샹의 교복 바지 주머니에나 넣어줘야겠다. 좋은 곳에 쓰라고. 스스로의 둔한 성격 상 발견 못하고 세탁기에 돌려버릴 것 같긴 하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완성한 사이트를 한참 꼬나보았다. 습. 결정적인 무언가 부족하다. 결정적으로…… 신빙성? 전문성? 아무튼 그가 보기에도 이건 쬐끔 설득력이 부족한. 좀 피싱 사이트 feel? 곤란한데. 천국의 이샹에겐 장난일 지라도, 살아있는 이들에겐 인생에 다시 열리지 않을 기회인데. 꽉 닫혀버린 한쪽 창을 대신해서 이샹이 열어둔 반대쪽 창인데. 관심 줘야 하는데. 고민하던 이샹은 만든 사이트 맨 상단에 한 문장을 덧붙이기로 했다. 아직 낯가리는 한글 자판에 검지를 세우고,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눌렀다.

 

절대… 이… 창을… 닫…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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