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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이 창을 닫지 마세요 上

okon&산마

 

지구상에 모기를 기다리는 인간은 나 하나뿐일 것이다.

모기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나 금융권에서 내놓는 모기지론을 줄여서 모기, 그런 거 아니고. 진짜 모기. 파리목의 피빨이 곤충 맞다. 모기들은 좀처럼 나를 물어주지 않는다.

 

물리기만 하면 바로 알 텐데.

걔 말이 틀렸다는 거.

 

 

 

 

 

 

 

 

절대 이 창을 닫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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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기누설이 오만 원이면 너무 저렴한데.

 

의주는 무감하게 마우스를 딸깍거린다. 으레 조준을 잘못해 창에 뜨는 광고창을 몇 번 클릭했더니 팝업창이 늘 말썽이다. 남들 보여주기 곤란한 광고가 아니라 다행인 건가. 웹 에디터로 몇 줄 건드린 것 같은 조잡한 사이트라 더 눈길이 갔다. 천기누설 주제에 가격도 덤핑이고. 의주는 두더지 잡기처럼 위치를 바꿔 떠오르는 창을 꼼꼼하게 골라 모두 닫는다. 몇 번, 재회라는 단어에 눈이 달라붙는다. 필연적으로 짧고 묵직한 한숨이 터져 건너편의 후임 T가 왜요, 하고 묻는다.

 

“요즘 회사 인터넷 보안이 별로인가 봐. 자꾸 광고창이 뜨네.”

“그래요? 제 컴퓨터는 안 그러던데.”

 

의주는 뻣뻣한 고개를 양쪽으로 비틀었다. 타성에 굳어진 목에서 우드득 소리가 난다. 사회부는 이맘때가 그나마 한가한데도 구성원의 표정은 전부 송곳처럼 예민하다. 이 날씨에도 에어컨을 쓰지 못하는 탓이겠지. 제때 필터 청소를 못 해 곰팡이가 핀 에어컨은 청소 기사가 오기까지 일주일은 걸린다고 했다. 환기되지 못한 공기가 콤콤하게 고인다. 담배가 살갗에 찌든 냄새. 원두의 묵은 냄새. 볼펜 잉크가 엉긴 냄새. 프린터의 롤이 뜨겁게 종이를 달구는 냄새. 커다란 창으로 볕이 악취를 달구며 둔중하게 쏟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무실의 색채는 전부 잿빛으로. 무료하다는 것조차 당연해서 죽일 필요가 없는 시간이다.

 

C 차장에게 호출을 받은 것도 그 무렵이다. 어설프게 파티션이 쳐진 오피스의 안쪽에 각을 잡고 선다. 습관적으로 다리를 모은 채 뒷짐을 지고. 40대의 C 차장은 그린 듯한 형상의 중년 회사원이다. 안경을 끼고 배가 조금 나왔으며, 사회의 흐리고 악독한 얼룩은 귀신같이 찾아내지만 일주일 전 체크 셔츠에 묻힌 커피 얼룩만은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근데 저 얼룩이 아직도 있다는 건… 의주는 조용히 검지를 코 밑에 댄다.

 

“야. 너 내가 기자의 소명이 뭐랬어?”

“팩트를 전달하는 것…”

“아니 그건 당연한 거고. 대중의 호기심에 보답할 수 있는 팩트를 전달하는 거랬지. 21세기에 지금 온 나라가 외교관 폭행 사건으로 들썩거리는데 누가 한물 간 조폭 얘기 보고 싶어하냐고. 니가 범죄 도시이시냐고.”

“범죄 도시도 천만인데요…”

“후배가 말대꾸?”

“……”

“변죽만 울리지 말고 시키는 거나 해. 열심히 파놓은 아이템 킬 당하는 거 지겹지 않냐.”

 

시간 나면 네 기사 조회수들 보면서 반성 좀 하고. C 차장이 노트북 화면에 띄운 의주의 기사를 손끝으로 툭툭 쳤다. 다른 기사들보다 열독률이 떨어지는 수치였다. 변의주는 데꾼한 눈으로 고개를 숙였다. 입속으로 들릴 듯 말 듯 한 혼잣말이 맴돌았다. 진짜 킬 당하는 게 어떤 건지도 모르시면서요.

 

말대꾸?

아닙니다.

 

 

 

 

 

 

차장님은 솔직히 선배 담뱃값 좀 내줘야 해요. 자기 때문에 한 갑 살 거 두 갑 사는 거 아시나 몰라…. 후임인 T는 말수가 많다. 좋게 말하면 쾌활하고, 나쁘게 말하면 동작도 부산스럽고 큰 편이다. 그편이 장점이 될 때도, 단점이 될 때도 있다. 기사가 까일 때마다 늘 옥상에 둘러 모여 의주 몫의 투덜거림까지 뱉는 것도 항상 T이니까. 의주는 그때마다 햇볕을 쬔 노호혼처럼 말없이 머리를 끄덕거렸다.

 

“담배 진짜 끊어야 하는데. 와이프가 임신했거든요.”

“힘들겠다. 좀 줄여.”

“원래 결혼하면 끊기로 했거든요. 근데 이제 와이프가 임신했는데도 안 돼요. 애들 태어나면 끊으려나.”

“그렇게 핑계만 대면 영영 못 끊지.”

“차가워. 선배는 담배 언제부터 피웠어요?”

 

의주는 관자놀이를 슬쩍 문지른다. 나쁜 버릇의 뿌리를 말해도 될는지. 눈을 조금 굴리다 순순히 대답한다.

 

“나… 고등학교 때.”

“헐. 의외로 얼리 어답터. 전 선배 학창시절부터 모범생이셨을 줄 알았어요. 인턴 때부터 초고속 하이패스로 유명하셨고.”

“공부만 하면서 담배도 피울 수 있지.”

 

그렇게 모범생도 아니었어……. 의주는 담배꽁초가 장마철 잔디처럼 다복다복하게 꽂힌 재떨이를 갈마본다. 필터까지 닳은 꽁초는 키가 제각기 다르다. 불그스름하게 립스틱이 묻은 것들도 종종 있다. 그쯤에서 의주는 생각하기를 그만둔다.

 

며칠 전까지 는개비가 오거나 멈추기를 반복해서, 초록색 옥상의 바닥엔 웅덩이가 군데군데 포진해 있다. 가장자리가 하얗게 마른 얕은 물웅덩이 위로 가느다란 날파리가 기승이다. 배수관이 젖은 까닭인지 이 낮에도 날벌레가 사람한테 달겨든다고, T가 투덜거린다. 의주는 T와 같이 벌레를 쫓기 위해 손을 내젓는 대신, 초연히 바닥에 떨어진 담뱃재를 구두코로 부스러뜨린다. 옥상에선 온통 마른 플라스틱 냄새가 진동한다. 이 공간에 가만히 서 있자면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삶이 닳아가는 것 같은 감각이 든다.

 

“여기 물이 이렇게 고여서 사무실에 모기가 많나 봐요.”

“사무실에 모기가 있었어? 몰랐네.”

“아니 권 선배가 맨날 모기향 갈고 스프레이 뿌리는데. 의주 선배는 어떻게 그걸 몰라요? 엄청 독하잖아. 올해 모기.”

“모기에 안 물려서… 잘 몰라.”

“안 물린다고요? 모기를?”

“응. 예전부터.”

 

T는 의주의 말을 믿지 못하는 눈치다. 에이. 한 번도 안 물리는 게 말이 돼요? 선배가 둔해서 물려도 물린 줄 모르는 거 아니야? 땀 많이 흘리면 모기가 좋아하지 않나. 선배 땀 많잖아요. 의주는 부정하지 않는다. 조금 나와 있었다고 벌써 더위를 타 목덜미에 검질긴 물기가 스몄다. 의주는 손등으로 습습한 턱을 훔쳐냈다. 고장 난 손목시계의 깨진 유리가 빛에 반짝였다.

 

T와 의주, 단 둘뿐이던 옥상의 흡연 구역으로 경제부의 H가 합류한다. H는 소개팅 상대와 함께 볼 영화를 고민 중인데 영 마땅치가 않다고 투덜거렸다.

 

“요즘 영화 뭐 아는 게 있어야지. 기자 일 하면서 벼라별 꼴을 다 봤더니 느와르는 시시해서 손이 안 가더라.”

“무슨 느와르야, 여자랑 볼 거면 로맨스죠. 어제 어바웃 타임 재개봉했던데. 그거 어때요?”

“그것 또한 시시함 중에 하나지.”

“그래요? 저는 재밌던데. 아기자기하고.”

“야. 나는 내가 시간을 돌릴 수 있으면 그렇게 아기자기하게 안 살아. 일단 나였으면 첫사랑이랑 바로 잤어.”

“선배가 그런 식이라 항상 삼프터까지 못 가는 거 아닐까요?”

“죽고 싶냐?”

 

대화는 금방 논제 바깥으로 빠진다. 너는, 넌 뭐 얼마나 잘나서 삼프터까지 갔어. 선배. 저는 결혼해서 출산까지 갔죠. 할 말이 없네. 시간을 돌려서 니 결혼을 막을란다. 만담 같은 대화를 들으면서 의주는 새로이 담배 한 개비를 뺀다. 두 사람의 대화에 끼지 않고 홀로 공상을 한다. T는 와이프가 임신했단 핑계로 담배를 끊는다는데. 나는 무슨 핑계로 끊나.

 

“저는 고등학교 때로 가서 재수 안 하고 그냥 붙은 데 등록할 거예요. 어차피 좋은 데 못 가니까.”

“그럼 나는 2년 전으로 가서 계양구 땅은 안 살란다. 거기 때문에 매일 시위 나가서 울엄마 디스크 생겼어.”

“선배는요? 의주 선배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갈 거예요?”

 

질문의 추가 의주에게 돌아온다.

돌아가고 싶은 순간.

 

의주는 연기를 흐트러트림으로써 대답을 유보한다. 입술 끝의 조그만 불씨가 화톳불처럼, 유달리 크고 덥게 느껴진다. 침묵이 지나치게 둔중하게 느껴지기 직전, 재떨이 위로 툭 재를 떨친다.

 

“…딱히 없어.”

 

없다.

그는 이미 지나온 모든 순간을 수용했다. 밀려드는 삶에 자맥질하기 위해 불필요한 후회들의 추를 잘라낸 지 좀 되었다.

 

 

 

Ꙭ̯

 

 

 

입사 첫날 제 몫의 책상을 받았을 때, 선임 사수가 넌 꿈이 뭐냐고 물었다.

의주가 그 질문을 정확히 기억하는 까닭은, 그렇게 묻는 선임 사수의 앞니 치열이 상습적인 커피와 담뱃진으로 전부 노래졌다는 것을 눈여겨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커피나 담배 둘 중 하나는 끊어야겠어. 그렇게 생각했고. 내리깔린 눈으로 책상의 모서리를 조금 응시하다가.

 

모기에 물려보고 싶어요.

 

뭐라고? 모기요. 그 모기 맞아요. 의주도 사수의 의도가 좀 더 형이상학적인, 직업적인 자아실현과 그 본질에 관한 것임은 당연히 모르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메이저 업체로 이직에 성공한다거나. 업계에 이름을 떨친다거나. 잘 쓴 사회면의 기사 하나로 세상을 바꾼다거나. 사수가 기대한 건 사회 초년생의 패기로운 대답이었고 그로써 의주를 파악하기 위함이었겠지만. 의주가 준비한 대답은 그런 게 아니다. 어느 시점 이후로 늘 고정되어 있다.

 

어떤 숙원은 지극히 작고 평범함으로써 우스워진다. 혹자가 지나가는 말로 물었을 때. 로또 당첨, 자가 마련, 남북통일, 세계 평화, 세속적인 것부터 박애적인 보기 중 의주의 것은 늘 단연 눈에 띄는 웃음거리였다. 모기에게 물리는 것이 소원이라니. 왜? 이유를 묻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사수도 마찬가지로 재차 묻는다. 왜? 그에 대한 답변 또한 준비되어 있다.

 

모기에게 물린다는 건 몸속에 피가 흐른다는 거잖아요.

 

 

어떤 모기도 그의 살가죽을 뚫고 피가 흐름을 소명하지 못한 채, 이 사무실로 찾아온 네 번째의 묵묵한 잿빛 여름.

 

모두가 제 몫을 마치거나 하러 떠난 사무실에 앉아서, 의주는 데스크에 올릴 꼭지 기사 하나를 마감한 후 간신히 회의를 통과해서 올라간 지난주 기사를 확인한다. 이마저도 차장에게 한 소리를 들었던 소스라는 걸 기억한다. 대만의 총통이 바뀐 후 흑사회와 삼합회 방파의 동향이 한국까지 미쳤다는 게 골자다. 그새 댓글이 두 개 정도 달려 있다. 의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천천히 댓글을 읽는다.

 

섹시여자만 니 밤길 조심해라.

(답글1)

asdf1234 님 조폭? ㅋㅋ변의주 기자님 늘 기사 잘 보고 있습니다!

 

악플 1개에 선플 1개. 이 정도면 제로섬이니 수확이 나쁘지 않다. 근데 왜 밤길을 조심하라는 거지. 의주는 난데없는 퍽치기 예고에 자기 뒤통수를 문지르다 시간을 확인한다. 시간은 아홉 시경, 지금 집에 들어가도 조금 늦나. 의주는 데스크에 올릴 꼭지 기사를 백업하다가 스트레칭을 했다. 피곤하다. 머리 아파. 타이레놀을 찾기 위해 서랍을 뒤적거렸다. 손끝이 멈칫한다. 약 대신 딸려 나온 건 손바닥만 한 신문 쪼가리였다.

 

8월 30일, 정류장 인근 폭발 사고. 건물이 붕괴. 정류장에 서 있던 시민 5명. 시신 전소… 사고의 열기를 흡습하는, 지극히 메마르고 사무적인 언어들. 참사에 대한 유감은 완전히 제거된 기사. 한때 이 기사의 온점이 몇 개인지 외울 수도 있을 만큼 골몰했던 적이 있다. 아직도, 모서리에 구겨져 잘 보이지도 않는 기자의 애먼 이름이 단박에 의주의 혀 밑을 맴돌 정도다.

 

의주는 기사를 다시 서랍장 가장 깊은 곳에 처박는다.

나중에 버리자.

 

나중에. 나중이라는 시간의 막연함을 가늠하면서도 다시 서랍장을 열지 않았다. 의주는 분명히 이 기사가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들여다보지 않았을 뿐. 습관처럼 손목을 매만졌다. 쩍쩍 금이 간 손목시계. 그다지 비싼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이 나이에 차라리 안 차는 게 낫지 않나 싶은 저가형 브랜드의 시계. 그럼에도 이 시계를 무엇보다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시계 뒤에 새겨진 EJ라는 각인. 이 시계의 주인은 의주가 아니었다. 그저 그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 전달이 된, 니콜라스의 유품이었다. 시계는 그 애가 죽은 9시 7분으로부터 1초도 움직이지 않는다. 고장 난 시간 속에 영원히 유기된 청춘이 의주의 손목에 살고 있다.

 

11년 전부터 니콜라스는 늙지 않는다. 나이 먹지 않아. 죽음이란 핀에 영원히 박제된 채로 뒤처진 삶의 격차를 벌리고 있다. 살아간 것은 의주뿐이다. 그의 죽음 이래 의주의 삶은 전부 그날로 돌아가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매 순간을 견딜 수 없었다. 그러니 있는 힘을 다해야 한다. 본 적 없는 그의 죽음을 혼자 기록하지 않기 위해서. 정류장의 불꽃과 열기, 머리를 조이는 유류의 냄새, 춤추는 분진. 한 낱이라도 겪어본 바 없어서 더 적나라하고 생생한. 출근길 차의 시동을 걸다가도. 편의점의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다가도. 혼자 남겨진 사무실의 백열등 아래에서도. 의주를 너무도 쉽게 유리시키는, 사장되지 못한 어느 세계.

 

겹붙은 잡념을 가지 치듯이, 컴퓨터에 켜진 수십 개의 탭과 창을 잘라낸다. 딸깍. 딸깍. 딸깍. 생각 없이 움직이던 손가락이 어느 창에서 잠시 멈춘다.

 

!!! 절대 이 창을 닫지 마세요 !!!

 

산세리프 폰트의 텍스트가 LED 전광판처럼 현란하게 번들거린다. 분명 아까 코웃음 치며 꼼꼼하게 닫아버린 창이다. 개중에서도 미처 닫히지 않은 창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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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도… 재회가 저렇게 튀는 색깔이었나?

 

탭을 닫으려 커서를 올리자 분명히 종전에 없었던 팝업까지 뜬다. 정말 종료하시겠습니까?⟫ 차츰 부아가 치밀었다. 네 주제에 사람을 다그쳐. 끽해야 바이러스거나, 광고거나, 광고이면서 바이러스일 주제에. 눌러 봐야 오늘 물을 조심하거나 불을 조심하라는 얘기 따위가 전부일 거면서. 선심이라도 써서 좋은 기회를 준다는 어투다.

 

인생은 가보지 않은 길을 걷는 여행이라니. 그건 멍청할 정도로 낙관적인 말이다. 인생은 여행 같은 게 아니다. 가지 않은 길을 후회하고 죽이는 지난한 시간일 뿐. 재회라는 건 처음 만났던 것이 살아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꿈꾸지 않는다. 감히 바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의주는 허무맹랑한 망상을 털어내듯이 그에게 허락된 소원을 찾는다. 그의 오랜 소원….

 

모기에 물려보고 싶다.

역시 물린 자리를 네게 보여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럴 수는 없겠지만. 많은 걸 바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냥. 모기에 물려보는 것. 그 정도는 의주가 바라도 될 것 같아서.

 

의주는 순순히 주어진 칸을 모두 채운다. 9월 7일. 7월 9일. 이름은 전부 한자로 돌려 입력했다. 확인 버튼을 누르고 소액 결제창에 이르기까지 거침이 없었다. 속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이 우스운 사이트에게서 가르침 따위 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 차라리 속임수였다고 의기양양하게 비웃고 싶은 호승심. 결제를 모두 마친 후에 자동으로 창이 넘어간다. 오피스의 인터넷망이 느린 까닭에 웹사이트의 화면이 전부 하얗게 번졌다가 느리게 스크롤 된다.

 

.

.

 

[매칭되었습니다.]

[상대와 대화를 시작하세요.]

 

메시지를 입력하세요

 

 

채팅창이다.

아무 특별할 것도 없는. 그냥 랜덤 채팅 같은 창.

그럼 그렇지… 의주는 가볍게 코웃음을 친다. 오만 원이면 소액 사기 축에도 못 끼는데. 경찰서에 가서 신고해도 한숨을 들을 그 푼돈 벌자고 누굴 가르치려 들었던 걸까. 인생은 가보지 않은 길을 걷는 여행이라는 말을, 온 힘을 다해 비웃고 부정할 수 있다. 커서가 미련 없이 붉은색 엑스로 향한다. 마지막으로 마우스의 버튼을 누르기 직전,

 

상대: hi

 

띠링, 거품 소리 같은 알림과 함께 인사가 떠오른다.

 

상대: 뭐야

 

메시지가 꽤 빠르게 위로 밀려난다. 오만 원어치의 성의는 보이겠다는 건가. 요즘 피싱 사이트들 인터랙션이 꽤 발전했네. 의주는 무감하게 상대의 모습을 그린다. 아마 인건비를 아꼈다면 중국이나 베트남, 그보다 정교하다면 국내 지방 슬레이트에 거점을 두었을 테고. 의주에게 인사한 상대는 말단 알바생일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한국어는 잘하는 애를 썼어야지. 접객에 이렇게 반말을 찍찍 갈겨서야. 의주는 다시 키보드 위로 손끝을 올린다. 한 마디 정도는 은근하게 빈정거리고 싶었다.

 

나: 이런 일 하시느라 힘드시겠네요

상대: 힘들지 ㅋㅋ

상대: 주님도 힘드시겠어

 

주님. 의주는 눈썹을 찡그렸다가, 방금 제 손으로 이름과 개인정보를 갖다 바쳤다는 걸 깨닫고 코웃음을 친다. 이름을 끝 글자만 부르네… 이름 정도는 어디 팔기조차 우스울 테니까. 결제에 쓴 카드는 분실 처리하고, 인터넷 뱅킹의 비밀번호도 바꿔야겠다. 이쯤 해서 자리를 뜨려던 의주는 다시 상대의 채팅을 읽는다. 힘들지. 손끝으로 턱을 궁글리다 의자 깊숙하게 자세를 고쳐 앉는다. 키보드에 힘없이 손톱을 얹고, 어떻게 말을 이어갈지 조금 고민한다.

 

나: 변의주입니다

나: 잠깐 대화 가능하실까요

 

피싱 사이트는 사회면에서 늘 써먹기 좋은 소재였다. 조회 수도 잘 나오는 편이고. 갖다 바친 개인정보랑 5만 원어치 소스는 좀 줬으면 좋겠는데. 텀이 빠르던 채팅이 꽤 늘어진다. 너무 대뜸… 이름을 댔나. 의주의 메시지 밑으로 작성 중이라는 의미의 점 세 개가 굴러간다. 의주는 괴고 있던 턱을 기울이다가.

 

상대: 주주?

 

책상을 무감하게 두들기던 손가락 끝이 멎는다.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방의 메시지를 곰곰이 본다.

 

주주. 그건 명확하게 의주의 이름이다. 텍스트를 읽기만 해도 그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가 머리에 기차의 경적처럼 울린다. 곧 보이지 않는 손이 내장을 무참히 앗아간 것 같은 감각이 의주를 사로잡는다. 다시. 귓바퀴에서 현악기의 가장 높은음자리 같은 소음이 울린다. 의주는 핏발이 서기 시작하는 눈을 깜빡거리며 메시지를 노려본다. 이번에 대화를 잇지 못하는 건 의주 쪽이다. 점 세 개가 무한히 동그라미를 만들며 대화를 폐쇄한다. 당연해. 아무도 날 주주라고 부를 수 없어. 그 이름으로 변의주를 부르던 사람은 하나뿐이었고.

 

지금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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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 yulgok 안 우는 거로 주세요.”

“예?”

“이 Mr. yulgok. 안 우는 그림으로 바꿔 주세요.”

 

눌어붙은 곰팡이처럼 퀴퀴한 풍경이다. 올해부로 실내 흡연이 금지됐음에도, PC방에는 한 자리를 오래 떠나지 않는 자들의 눅은 쩐내가 배어 있다. 헤드셋을 낀 고등학생들이 간헐적으로 내뱉는 욕설. 웅성이는 게임 소음. 어질러진 일회용기들. 그것들을 홀로 치워야 해서 심기가 좋지 않아 보이는 PC방 알바생과. 그 앞에 오천 원짜리 지폐를 쥐고 선 고삐리.

 

“손님. 외국인이세요? 오천 원짜리는 그림 다 똑같아요.”

“다른 거에서는 안 울던데.”

“지폐인데 프린트가 다 다르면 짭이죠. 뭐 이런 당연한 걸 말하고 있냐.”

 

넥타이를 가슴까지 풀어제낀 고삐리는 이러한 배경에 누구보다도 어우러지는 꼴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이샹이 유지하는 각도는 이 공간에 있는 누구보다도 반듯하다. 짝다리 안 짚고 꼿꼿한 정자세. 숙이지 않았을 뿐인데도 뻗대는 것처럼 비치는 축복의 눈깔. 쫙쫙 다려진 객기다.

 

알바생 미간이 오천 원짜리만큼 구겨지기 직전, 화장실에 다녀온 의주가 젖은 손을 툭툭 털면서 카운터로 왔다. (이 PC방 화장실은 비누만 있고 페이퍼 타올이 없어서 늘 축축한 손으로 나와야 했다.)

 

“뭐해, 니콜? 핫바 안 샀어?”

“어. 이 오천 원짜리 바꾸려고. 그림 마음에 안 들어.”

“무슨 소리야. 니콜.”

“이 분 외국인이세요? 왜 한국말이 안 통하지?”

“아… 한국어는 잘하는데 애가 생각이 좀 남달라요. 죄송합니다. 제가 데려갈게요.”

 

의주가 이샹의 어깨를 돌려세우는 척 교복에 슬쩍 물기를 닦아낸다. 아 뭐해. 축축해진 교복 어깨를 훔쳐내며 성냈더니 흐흐 웃는다. 자리로 도망치는 의주의 양 손목을 확 붙잡고, 젖은 두 손을 그 애의 뺨에 마구 문질러 주었다. 두 뺨이 축축해진 의주를 보면서 이번엔 이샹이 킬킬 웃었다. 의주가 뚱하게 고개를 돌린다. 웃기는 주주. 자기가 먼저 물 묻혀놓고서는.

 

“왜 그런 거야 니콜? 너도 알바 해봤으면 인간적으로 진상은 부리지 말아야지.”

“진상 안 부렸어.”

“오천 원짜리 그림이 다 똑같은데, 그걸 왜 바꿔 달라고 그래.”

 

의주가 알바생이랑 똑같은 소리를 한다. 이샹 친구면서.

 

“이거 봐. 내 Mr. yulgok 눈 아래. 울고 있잖아.”

 

이샹은 오천 원을 내밀었다. 여러 번 접히고 구겨진 지폐의 삽화 부분이 군데군데 해져 있었다. 하필 율곡 이이 삽화의 눈 부분도 하얗게 까져서. 그게 꼭 눈물 같다… 가 이샹의 논리였다. 고개를 설설 저은 의주가 PC방 컴퓨터에 아이디를 입력한다.

 

“니콜. 넌… 가끔 생각의 계단을 세 칸씩 뛰어넘는 거 같아. 걸음이 너무 빠르니까 상대가 널 못 쫓아가는 거야.”

“주주는 내 말 다 이해하면서.”

“남들보다 조금 더 이해하는 거지. 가끔은 진짜 모르겠어, 널.”

 

이샹은 대강 웃는 낯으로 컴퓨터 본체 전원을 눌렀다. 화면이 느리게 로딩한다. 창문 모양의 윈도우 로고를 보면서 소리 없이 생각한다. 너도 나한테 그래. 의주. 네 생각을 진짜 모르겠어.

 

오늘 왕이샹은 줄곧 저기압이었다. 아침부터 울고 있는 오천 원짜리를 봐서 그런 게 분명하다. 크라잉 율곡. 실수로 세탁기에 돌린 바지 주머니서 나온 지폐를 쥐고 나온 이후부터 영 기분이 오르질 않는다. 부적이 되어주는 동전 따위는 많던데. 울고 있는 오천 원에는 그런 luck 따윈 기대할 수 없을 것 같다.

 

“아. 포인트 너무 많이 남았네. 다음 달까지 다 써야 하는데.”

 

자기랑 하나도 안 닮은 예쁜 여자 캐릭터를 움직이면서, 의주가 흘러가듯 혼잣말을 했다.

 

“미국 가면 이 게임은 못 하겠지?”

 

이샹은 기계적으로 의주가 접속한 RPG 게임을 따라서 켰다. 로딩으로 까매진 화면 위에 무표정한 제 얼굴이 비친다.

 

“…이참에 게임 끊어. 주주.”

 

구겨진 지폐와 달리, 이샹은 함부로 울지 않는다.

의주를 저기압의 범인으로 만들기는 싫었다.

 

 

 

 

 

 

 

왕이샹이 처음 외로움의 존재를 의식한 것은 한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였다. 전 재산을 욱여넣은 캐리어 하나를 끌고 택시에 올랐을 때. 그의 이모가 불러주는 주소를 통 알아듣지 못하는 한국인 기사의 찡그린 눈썹을 보면서, 이샹은 문득 속이 허전해졌다. 이해 불가한 존재와 마주할 때 느끼는 무력감. 그걸 외로움이라고 이해했다. 이샹은 그 감정을 속에서 쓸어냈다. 앨범을 정리하다가 강아지 슌쯔와 찍힌 사진을 발견했을 때, 이샹은 두 번째로 외로움의 존재를 의식했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것. 그게 외로움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이샹은 의주를 보며 불현듯 닥친 세 번째 외로움을 마주했다. 불가해하다. 이번엔 어째서일까. 지금 의주는 그의 옆에 앉아 있는데. 의주의 모습이 보이고. 목소리가 들리고. 손 뻗으면 체온도 느낄 수 있는데. 그가 의주와 함께 있는데.

 

외로울 거면 다음 달이어야 했다.

다음 달이 되면 그의 곁에 앉아 있는 변의주는 미국으로 떠날 테니까.

 

고교 마지막 여름방학. 의주는 그 방학이 끝나기 전 미국에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간다. 아직 실감은 안 났다. 방에는 여전히 의주의 책상이 있고, 침대에는 의주의 베개가 있는데. 7월 달력에는 초복이 있고, 장마 전선의 시작이 있고, 의주가 빨갛게 칠해둔 지난날의 동그라미가 있고… 모든 게 제자리에 있는데, 달력이 넘어가면 이 중에서 무언가는 영영 사라질 것이라 말한다. 그게 잔인한 부분이다. 의주는. 아무거나 함부로 말하지 않으니까. 꼭 그렇게 될 일만을 입에 담으니까.

 

 

의주가 미국으로 전학을 갈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나온 것은 작년 여름부터였다. 간다, 보다는 갈지도 모른다. 그때까진 덜 확정적인 투였는데, 그 가능성의 태동이 간다는 확언보다 더 충격이었던 것 같다.

 

처음 그 얘길 들었을 때 어땠더라.

그렇구나. 말고는 할 말이 없었다.

 

- 나야 뭐. 주주가 한다면 다 응원하지.

 

이샹은 교실 책상 앞에 쭈그려 앉아 고개를 들지 않고 답했다. 박민철이 붙이고 간 껌이 아직 책상 아래 붙어 있었다. 커터칼로 그 위를 문대면서 여상히 물었다. 갑자기 미국 왜? 갈 거면 졸업이나 하고 가지, 왜 여름방학에 가. 의주는 그게 학점에도 유리하고, 그냥 더 한국에 있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다.

 

- 한국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 여기 니콜이 있으니까.

- …….

- 농담이야. 삐졌어?

 

이샹은 말없이 커터칼로 껌의 잔해만 갉작였다. 긁을수록 그의 책상 아래로 하얀 빗금들이 늘어갔다.

 

그날 교실이 품고 있던 정서를 이샹은 기억한다. 방과 후, 서쪽으로 저무는 태양이 교실에 드리운 붉은 그림자. 터진 교복 바지의 실밥을 라이터로 떼느라 옅게 남은 탄내. 일렁이는 커튼. 창밖 멀리서 빠앙- 길게 늘어지던 경적. 앞선 차를 향해 네 발 달린 고철 덩어리가 짖는 소리. 지난 겨울이 따뜻해서 그런지 모기가 많네. 중얼거리는 의주의 짧은 반팔 교복 아래로 드러난 팔. 교실에 달린 선풍기가 돌아갈 때마다 옅은 소름이 일었다 가라앉는. 말과는 달리 모기도 안 물리는 팔. 깨끗한 팔. 손을 대보고 싶은 팔. 생각이 들자마자 손을 댔다. 뭐해. 하지 마. 의주가 웃으면서 쳐냈다. 평소의 주주 같아서 안심이 됐다.

 

- 미국 가서 뭐 할 거야 주주는.

- 글쎄…. 우선 대학에 가고.

- 대학 가고?

- 인터폴이 될 거야.

- 와오. 멋있다 주주. 안경잡이 인터폴. 말라깽이 폴리스.

- 선입견이야… 기밀정보를 다루는 사람들은 평범해 보일수록 좋다 그랬거든.

- 아. 농담이 아니고 진짜 인터폴이 되고 싶다는 거야? 진짜?

- …어차피 꿈도 없는데, 아무거나 되고 싶어 해도 상관없잖아. 네가 볼 일은 없겠지만.

 

의주가 뱉은 말의 모서리가 이샹을 조금 아프게 찔렀다. 이샹은 이 순간이 시시한 농담처럼 지나가길 바라면서 웃었다.

 

- 약간 스파이 영화 같고 멋있겠다. 우리 주주 탐 크루즈네.

- 톰 크루즈가 어딜 봐서 평범하지.

- 탐 크루주주.

- 그럼 넌 니콜 키드먼.

- 왜? 내 영어 이름 니콜라스라서?

- 그리고 톰 크루즈랑 헤어지잖아. …장난이야.

- ……

- 미안. 삐졌어, 니콜?

- 아냐. 의주는 원래 피도 눈물도 없으니까.

 

그러니까 맨날 모기들이 나한테 날아들지… 이샹은 괜히 허공에 손뼉을 쳤다. 그에게 날아들던 모기 한 마리가 책상으로 추락했다. 의주는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떨궜다. 눈은 안 웃고 입만 웃는 반쪽짜리 웃는 습관대로.

 

- 간다는 건 아니고… 그냥 생각만 해본 거야. 나도 거기서 잘 지낼 수 있을지 걱정되고.

- 왜 걱정되는데.

- 거기 니콜이 없으니까.

 

 

 

 

 

 

 

게임 캐릭터를 고른 이샹은 제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PC방 헤드셋을 낀 의주가 랜덤한 확률로 아이템을 드랍하는 복권을 열심히 긁고 있었다. 미국에 가기까지 한 달밖에 안 남은 이 시점, 의주는 온갖 게임에 빠져 있었다. 전에는 분명 게임 싫다고 했는데. 거기서 죽일 수 있는 건 사람도 몬스터도 아닌 시간뿐이라고. 이건 시간을 죽이는 일이라고. 요새 의주가 죽인 시간을 모으면 공동묘지도 세울 수 있을 것 같다. 이샹이 추천해 준 게임인데도, 플레이타임으로 이미 이샹을 넘어섰다.

 

“지금은 걱정 안 돼? 주주.”

“응?”

“거기 나 없잖아.”

 

이샹을 멀뚱히 보던 의주가 의아하게 되받는다. “그야 거기 없지… 니콜은.” 기억 못 하네. 자기가 뭘 말했었는지도 까먹는다. 이샹은 기억의 천재인데. 기억의 신인데. 다 기억하는데. 기분이 별로다. 왜일까. 아마도 방금 의주가 랜덤 뽑기로 이샹이 계속 갖고 싶어 한 고양이 모자를 한 번에 뽑았기 때문인 것 같다.

 

“와. 나는 오만 원 쓰고도 못 뽑았는데!”

“이게 클라스 차이야. 니콜.”

“주주 class.”

 

게임 캐릭터를 만드는 미학에는 두 종류가 있다. 자기를 꼭 닮게 만드는 부류. 자신의 판타지를 입히는 부류. 이샹은 게임 캐릭터도 자신을 닮게 만드는 편이었다. 의주는 하나도 안 닮았다. 눈매는 뾰족하고 머리는 삐죽한 여자 캐릭터다. 물어보니까 자기 취향대로 꾸몄다던데. 뭐… 고양이 모자 씌우면 귀엽긴 하겠다. 빨리 씌워보라고 독촉하는 이샹을, 의주가 가만히 돌아본다. 슬며시 이샹 쪽으로 기울어지는 머리에서 싱그러운 샴푸 향기가 났다.

 

“이거… 너 줄까?”

“응?”

“고양이 모자. 뽑으면 니콜 주려고 했어.”

 

이샹은 두 눈을 최대한 둥그렇게 떴다. 진짜? 왜? 주주 필요 없어? 여기 오천 원 썼는데도? 그 반응이 재밌다는 듯이 웃으면서, 의주가 선물하기 기능으로 방금 뽑은 요란한 고양이 모자 아이템을 보냈다. 이샹은 눈을 끔쩍이다가 제 캐릭터한테 아이템을 씌웠다. 추리닝 차림에 피어싱 범벅으로 커스터마이징한 캐릭터 위로 깜찍한 모자가 덥썩 씌워진다. 캐릭터가 갑자기 엄청 쎄 보였다. 이샹은 히죽 웃었다.

 

“주주 최고다.”

 

의주는 더 해보라는 듯이 턱을 까딱까딱한다. 주주 짱. 주주 천재. 주주 완전 좋아. 됐어, 그만해. 그러면서도 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웃는다. 싱그럽게 웃는 의주를 보면서, 이샹도 웃었다.

 

의주는 이런 점이 신기하다. 쓰레기 분리배출도 날짜 딱딱 지켜서 할 것처럼 생겨서는, 이샹의 기분은 멋대로 내놨다가 주워갔다가 제멋대로다. 기분이 좋아진 이샹은 새로 커스텀된 캐릭터를 수십 장 찍었다. 그동안 의주는 RPG 게임을 끄고 AOS 게임으로 갈아탔다. 요즘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게임이었다. 5 대 5 매칭을 돌리는 의주를 보다가, 이샹도 RPG 게임을 껐다. 의주 없는 게임은 이샹도 재미없다.

 

“니콜. 너도 롤 하자.”

“어. 나 이거 스크린샷만 올리고.”

 

페이스북을 켰다. 게시물 작성창에 의주를 태그하고. 스크린샷을 첨부했다. 눈이 하트로 변한 제 캐릭터랑, 의주 캐릭터가 나란히 나온 거. 나란히 세워놓고 보니 커스터마이징이 조금 닮은 것 같다. 이샹의 캐릭터는 이샹을 닮았는데 의주의 캐릭터도 이샹을 닮은 것 같다. 일부러 장미꽃이 흐드러진 아름다운 정원을 배경으로 찍은 스크린샷을 골라 친구 공개 설정해서 올렸다.

 

1분 전 · 👥

 

#OOTD

뽑기 천재 주주가 뽑아준 고양이 귀ㅋㅋ

근데 이 게임 미국에서도 할 수 있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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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의웅 누구 미국 가서 이 게임 해본 사람?

임혜지 겜창아ㅡ.ㅡ 낼 모해??

권주혁 미국섭으로 해야할듯 ㅋ 아이피 우회하면 가능할 수도

 

침대처럼 푹신한 게이밍 의자에 등을 파묻고 커피를 쭉 빨았다. 진짜 미국에서는 못하나? 같이 하면 좋을 텐데. 찾아볼까. 포털 사이트를 켜고 [미국에서 한국 게임 하는 법]을 검색했다. 가장 관련성 있어 보이는 블로그를 눌렀는데. 별안간 화면으로 커다란 팝업이 떴다.

 

 

!!! 절대 이 창을 닫지 마세요 !!!

 

 

새빨간 폰트로 박힌 긴박한 경고 문구. 요란한 디자인의 팝업창. 이샹은 멍하게 화면을 메운 창을 바라보았다. 그가 알고 싶어하는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이트였다. 그럼에도 끄지 말라는 경고가 너무 강렬해서, 이샹은 천천히 그곳에 적힌 말들을 읽어보았다.

 

 

인생은 가보지 않은 길을 걷는 여행입니다.

귀신도 울고 갈 기적의 천기누설!

직접 검증해 드리겠습니다.

인연 / 재회 / 소원 / 성취

 

 

인연. 재회. 소원. 성취. 다 이샹이 좋아하는 말들뿐이다. 안내 문구 아래는 입력창이 있었다. 두 사람 분의 생일을 입력받는 입력창. 여기 생일만 넣으면 인연 / 재회 / 소원 / 성취 죄다 준다는 건가? 고작 생일만으로? 하긴, 같은 반 혜지도 소원을 이뤄주는 문구라면서 늘 메신저 프로필에 R=VD를 달아놓고 다닌다. 그에 비하면 생일을 입력하는 쪽이 훨씬 정성스러울 것이다.

 

소원. 왕이샹의 소원이라.

의주가 미국에서도 한국 게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매일매일.

 

이샹은 단순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주주 생일을 적어야 되겠네. 옆에 앉은 의주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게임 삼매경이던 의주가 헤드셋을 벗고 뭐냐는 듯이 본다. 너 몇 시에 태어났어? 새벽에… 몰라… 네 시? 왜? 귀만 열고 눈으로는 화면을 보면서 의주가 건성으로 대답한다. 그거면 됐어. 나머진 다 아니까. 이샹은 곧장 의주의 생년월일시를 적었다. 공들여 시간까지 다 입력했을 때. 이샹은 한발 늦게 이 팝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읽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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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 요금 : 50,000원

 

띠꺼운 웃음이 났다.

 

“돈 벌줄 아셔.”

 

마우스를 쥐고 곧바로 창닫기 버튼으로 커서를 옮겼다. 그러나 손가락은 쉽게 마우스를 클릭하지 못했다. 처음 팝업이 떴을 때부터 가장 눈에 박혔던 구절로 시선이 옮겨갔다.

 

인생은 가보지 않은 길을 걷는 여행입니다.

 

다시 읽어도 멋있어. 이샹의 단세포가 전율했다. 가보지 않은 길을 걷는 거, 재미없었던 적이 있나? 이런 멋진 말을 아는 녀석이라면 속아줘도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오만 원. 괜찮은 거 같아. 고작 게임 아이템에도 오만 원을 쓰는데. 오만 원 쓰고도 고양이 모자를 못 뽑는데. 돈 주면 소원 100% 들어준다고 하니까. 무엇보다 고양이 모자는 의주가 뽑아줬다. 고작 오천 원도 안 쓰고 뽑았다. 그러니까 이샹은 의주가 아낀 만큼 낭비해도 된다. 기적의 연산이다.

 

소원 성취 사이트 팝업은 꽤 세속적인 방식으로 대가를 징수했다. 이샹은 휴대폰 결제를 선택하고, 버튼을 눌렀다. 결제가 이루어지자 곧장 다른 창이 떴다. 이샹은 꾸준히 로딩을 기다렸다. 소원. 소원 성취를 대체 어떻게 해주겠다는 거지? 믿음은 안 갔지만 기대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얗던 창이 곧 UI를 갖춘다.

 

[매칭되었습니다.]

[상대와 대화를 시작하세요.]

 

메시지를 입력하세요

 

사이트에 보이는 건 간소한 채팅창 UI가 전부였다.

 

이샹은 팔짱을 끼고 사이트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알라딘의 요술램프 같은 게 화면에서 뛰쳐나올 리는 없다고 쳐도. 채팅창? 어떤 메커니즘으로 채팅방이 소원을 이뤄준다는 걸까. 하늘에 계신 높으신 분이 열어둔 채팅방이라서, 여기에 아멘 하면 주님이 읽고 기도를 들어주시는 건가.

 

채팅창에는 아무것도 뜨지 않는다. 이샹의 첫 마디를 기다리듯 마냥 하얀 창을 꼬나보다가,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나: hi

 

주님에게 적당히 첫마디를 건넸다. 예수는 서양인이니까 영어로 보냈는데 씹혔다.

 

나: 뭐야

 

여전히 답이 없다. 천국 와이파이 상태가 안 좋은 듯하다. 이샹은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주문으로 나온 핫바를 씹으면서 핫도그를 추가 주문했다. 2분쯤 지났을까. 채팅창에 작성 중이라는 아이콘이 떴다.

 

상대: 이런 일 하시느라 힘드시겠네요

 

이샹은 고개를 기울였다. 오. 주님. 한국말 개 잘해. 미쳤어. 한국에 교회가 많은 이유가 있네. 근데 뭐가 힘들겠다는 걸까. 소원성취 사이트를 찾아온 사람이니 어련히 힘든 일 있어 보였나.

 

나: 힘들지 ㅋㅋ

나: 주님도 힘드시겠어

 

주문으로 나온 핫바를 입에 물고 토독토독 키보드를 두드렸다. 다시 짧은 공백.

 

상대: 변의주입니다

상대: 잠깐 대화 가능하실까요

 

이샹은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의주는 여전히 칼바람에 폭탄 뿌리는 너구리 새끼 패잡느라 바빴다.

 

주님이 이쪽 주님?

 

누구든 변의주를 얌전한 녀석으로 본다. 그러나 이샹은 진실을 안다. 변의주는 변칙적이다. 장난을 좋아한다. 겉만 봐선 상상도 못 할 일탈에 손대기도 한다. 이건 땅에 떨어진 담배를 주워 피우던 의주의 모습을 봤을 때부터 알아본 지점이다. 의주라면 이런 장난을 칠 수도 있지. 가끔 골 때려. 이샹은 비스듬히 웃으며 타자를 쳤다.

 

나: 주주?

 

보내놓고 흘끗 옆자리를 확인했다. 채팅을 확인하는 눈치는 없다. 다시 채팅창을 보았다. 변의주가 타자 치는 기색도 없었는데 답장이 와 있다.

 

상대: 그 별명을 어떻게 아시죠

 

채팅 어떻게 했지. 지금 한참 랭킹전 중이면서.

 

나: 왜 몰라? 내가 붙여준 별명인데 ㅋㅋ

나: 근데 왜 존대?

나: 나한테 뭐 잘못했어? ㅋㅋ

나: be honest juju~ 지금 말하면 딱밤 한 대로 끝내줄게

상대: 혹시 해서 묻는 건데요

 

뜸을 엄청 들인다. 무슨 고해성사를 하려나. 그러고 보니까 한 달 전에 게임기 빌려준 거 안 돌려줬지. 그거 부숴 먹었나. 그 정도는 딱밤거리도 아니다. 혹시 또 이샹이 아끼는 운동화를 꺾어 신었나. 아님 옷 빌려가서 뭐 묻혔나. 아직도 옷장 구석에는 의주가 뭘 묻히는 바람에 잠옷이 되어버린 크롬하츠 서울 한정판 티셔츠가 처박혀 있다. 곱게 모셔놨다가 리셀하려던 거였는데… 그래도 그 정도까지는 출력 40% 딱밤 정도로 용서할 용의 있었다. 그러나 긴 정적 끝에 날아온 채팅은 맥이 빠질 정도로 시시했다.

 

상대: 혹시 니콜라스… 랑 아는 사이이신가요?

 

안다면 아는 사이였다.

 

나: 내가 니콜라스거든

상대: 아니… 니콜라스일 수가 없거든요

나: 뭐라는 거야

나: 나 니콜라스라니까

상대: 그럴 수가 없다니까요

나: 니콜라스 맞습니다

나: 주학고 3학년 2반 런치타임의 마이클 조던 니콜라스입니다

나: 이거 뭔 컨셉이야? ㅋㅋ 서프라이즈? 

상대: 주학고라고?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기억상실증 걸린 드라마 여주인공 놀이도 아니고. 기가 차서 의주 어깨를 툭 친다.

 

“아, 뭐야, 왜?”

“장난 그만 쳐, 주주.”

“무슨 소리야? 친 건 네가 쳤잖아… 아, 한타 망했다.”

 

게임 속 의주 캐릭터가 사망에 이른다. 너 때문에 죽었잖아. 투덜거리는 의주를 보면서, 이샹은 조금 이상함을 느꼈다.

 

“너 나한테… 채팅 보내지 않았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니콜… 나 게임 하고 있잖아…”

 

부활 시간을 기다리며 아이템을 사던 변의주가 니콜라스의 화면을 건너다본다.

 

“너 랜덤 채팅해?”

“어? 아니… 이거…”

 

정체 모를 사이트에서 오만 원을 결제했더니 뜬 채팅방이다. 상대가 자기가 변의주라고 해서 나는 네가 장난치는 건 줄 알았다. 솔직히 토로하자 의주가 식은 죽 같은 미소를 지었다. 아… 하는 탄식에서 옅은 비웃음이 느껴진다.

 

“안 그렇게 생겨서 사기 진짜 잘 당해… 니콜.”

 

따지고 싶었다. 너도 그 경고 문구를 봤으면 분명히 오만 원 긁었을걸? 분명 그랬을걸? 그러나 의주는 자기 캐릭터가 부활했다고 도로 헤드셋을 쓰고 있었다. 바보 취급당했어! 분한 마음으로 채팅을 쳤다.

 

나: 변의주 아니잖아 ㅡㅡ^

나: 주주 지금 내 옆에서 게임 중인데?

상대: 저..

상대: 너 진짜 니콜라스야? 왕이샹?

나: 주주도 아니면서 내 이름 어떻게 알았어?

나: 너 박민철이지

나: 나한테 집착 그만해 ㅋㅋ 후져

상대: 그 이름..

상대: 니콜 내 말 들어 봐… 너 지금 몇 살이야?

나: ㅗ

상대: 몇 살인지만 알려줘

나: 오십 살 ㅋㅋ

상대: 니콜 나 정말로 의주야

상대: 내가 네 옆에서 게임을 하고 있다면… 아마 지금의 나는 아닐 거야

상대: 난 지금 사무실에 있거든

상대: 서른 살이고. 회사에 다녀. 직업은 기자야

 

진지하게 상대할 맘이 안 든다. 무슨 서른 살. 주주의 열아홉 번째 생일이 목전인데. 그 귀한 날짜를 미국놈들에게 뺏기는 것도 화딱지가 나는데. 역시 박민철이 분명하다. 이샹한테 짙은 원한을 품은 놈은 교실에서 그 새끼밖에 없었다.

 

이샹은 조용히 손가락을 뚝뚝 꺾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이모는 이샹이 친구와 싸우고 올 때마다 무섭게 혼냈다. 남자는 함부로 주먹 쓰는 거 아니라고. 그러나 반드시 싸워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보는 눈 없는 곳에서 안 보이는 데만 잘 골라서 패라고 했다. 지금이야. 이모. 남자가 반드시 싸워야 하는 순간. 박민철 이새끼가 기어코 내 오만 원 먹었어.

 

> 지금부터 통화가 가능합니다.

 

때맞춰 채팅창에 초록 글씨의 알림창이 떴다. 채팅창 UI 아래 전화기 모양의 새로운 버튼이 떠 있었다. 당장 클릭했다. 연결 대신 ‘모바일로 이용해달라’는 간단한 알림이 떴다.

 

뒤졌어 박민철.

 

이샹은 지난달에 산 iphone 4s로 링크를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옮겨적었다. 힘들게 휴대폰으로 사이트를 열자, 다행히 채팅 내용이 다 살아있었다. (구라 사이트가 쓸데없이 기능은 좋았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연결 화면이 곧바로 떠올랐다. 기본 통화 화면과 비슷한 화면 위로 상대 이름에 ‘변의주’가 떠 있었다. 아니면서. 사칭할 게 따로 있지. 개자식…

이어지던 신호음은 금방 끊겼다. 이샹은 곧바로 선빵을 깠다.

 

“야.”

[니콜라스.]

 

음성이 겹쳤다. 상대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욕을 하기 위해 벌어졌던 입이 느리게 다물렸다.

 

[니콜.]

 

상대가 한 번 더 불렀다. 박민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다시 옆에 앉은 의주를 바라보았다. 의주의 둥근 안경알 위로는 피 튀기는 게임 화면이 상영 중이었다. 대단하네. 보이스 피싱 진짜 하이 테크놀로지다. 어디서 이렇게 변의주 같은 녀석을 데려왔지…… 이성은 작금의 상황을 그 정도로 뭉개려고 들었지만, 설득하는 목소리에서 점차 힘이 빠졌다. 그의 귀가 아니까. 방금 전까지도 듣던 목소리를 모를 수가 없어서.

 

“…누구야. 너.”

 

누구든 다 될 수 있어도, 단 한 사람만은 될 수 없는데. 그 사람은 지금 이샹의 곁에서 게임을 하고 있는데.

 

[니콜. 이상하게 들릴 거 알지만, 제발 이것만 대답해 줘. 혹시 오늘 날짜가 며칠이야?]

 

그러니 씹어버리면 그만인데. 그딴 게 궁금하면 달력 보라고, 아니 휴대폰에도 뜨지 않냐고. 일갈하고 전화를 끊고. 아, 5만 원 졸라 아까웠다. 운동화 하나 더 팔아야겠다. 의주랑 웃고 떠들면 시마이인데.

 

“7월 30일.”

 

입 밖으로 대답이 걸어 나갔다. 뭐에 씐 것처럼.

 

[몇 년?]

 

상대가 급박하게 채근해 온다.

 

“2013년.”

 

‘상대’는 대답이 없었다. 귓가에서 숨소리가 완충재처럼 바삭댄다. 숨결까지 속일 수 있는 걸까. 그정도로 훌륭한 거짓말이 가능한 걸까. 이샹은 주먹을 꽉 쥐었다. 발자국처럼 찍히던 침묵 끝에, 건너편에서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여긴……. 2024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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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의주는 발작적으로 통화 시간이 넘어가는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볼펜을 더듬어 쥐고 책상 위 이면지에 가만히 연도를 역산한다. 열아홉.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살아있는 해의 니콜라스다.

 

그럴 수가 있나. 가능한 건가. 이게.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상황을 가정하니 당황도 들지 않았다. 애초에 의주의 상식선이라면 이미 끊었어야 마땅한 전화다. 채팅을 치며 웃는 니콜라스. 시시껄렁한 농담을 치는 니콜라스. 의주와 전화를 하는 니콜라스. 이런 것들이 실재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의주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지난 십여 년간 틈만 나면 니콜라스의 흔적을 찾아왔고, 번번이 좌절당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주는 전화를 끊지 못하고 있다. 그가 기억하는 한, 니콜라스와 나눠 온 추억은 철저히 폐쇄적인 회로였다. 타인에게 공개되거나 공유된 적은 실상 전무했다. 무엇보다 니콜라스가 박민철에게 주먹질을 했다는 건 당사자를 제외한다면, 담임 교사가 아니고서야 알 수가 없는 사건이었다.

 

[……2024년이라고?]

 

채이는 깡통처럼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상대가 희미하게 웃는다. 의주가 잘 아는 소성이다. 니콜라스는 진자가 반대쪽과 이쪽을 똑-딱 때리는 것처럼 경쾌하게 웃곤 했다. 별것도 아닌 일에 몸을 뒤틀면서, 온 힘을 다하여.

 

[사기꾼이야 역시. 주주 목소리 해킹했어.]

 

의주는 핸드폰의 숫자 위로 이마를 기울인다. 자모음을 발음하는 방식. 이국의 언어로 형성되는 의주의 이름. 세상에서 의주를 그렇게 발음하는 사람도, 그를 주주라고 부르는 사람도 단 하나뿐이었다. 그런 건 목소리를 덧입힌다고 속일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의주를 구성하는 지층 깊숙한 곳이 반응하니까.

 

그 애야.

 

그 즉시로 잿빛 오피스는 주학동 다가구 주택의 가장 조그만 방이 된다. 낙엽색 방문과 문지방이 비틀어지고 해가 조금만 넘어가면 온통 뽀얗고 노래지던 니콜라스의 방. 떠올리지 않기 위해 내내 손바닥으로 틀어막고 있었던 기억들. 그건 의주가 상기한 것들을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는 것과 동의다. 니콜라스의 웃음. 니콜라스의 목소리. 의주의 무르고 부드러운 소년기를 이루는 모든 것들. 니콜라스. 분명한 니콜라스다. 수화기 너머에 니콜라스가 살아있다. 의주의 서랍장 안에 박제된 마지막 표본에서 단 한 낱도 비틀어지지 않은 니콜라스가. 그가 숨 쉬며, 웃고, 의주의 이름을 부름으로 존재하고 있다.

 

의주는 너무 급박하게 호흡하지 않기 위해 숨을 잠근다. 바로 아까까지 후배와 시간 여행에 관한 영화로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일까. 머리가 생각보다 빠르게 이 현실을 받아들였다. 아니. 받아들이고 싶었다. 믿고 싶었다. 설명하기 힘들다면 기적이라 부르면 되었다. 마법이든 환상이든, 이유 따윈 상관없었다. 정말로 그 애가 죽기 한 달 전의 시점으로 전화가 연결되었다면. T의 질문이 다시 뒤통수에 편종처럼 울린다. 지금 다시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 선배는요? 선배는 바꾸고 싶은 거 없어요?

 

“너… 8월 30일에 절대로 밖에 나오지 마.”

 

당연하게도. 있다.

바꿀 수 있다면 반드시 바꾸고 싶은 단 한 가지 결말이.

 

[…뭐라는 거야?]

“부탁이야. 너 내가 시키는 거 다 하잖아.”

[사기꾼. 내 오만 원 내놔. 주주 목소리 어떻게 해킹했어?]

“목소리가 해킹이 되겠냐고, 니콜…”

 

이런 니콜라스를 잘 알고 있다. 그는 납득하지 않은 일은 절대 하지 않는다. 궁금해서라도 더 밖에 싸돌아다니겠지. 의주는 마른 입술을 뜯는다.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일을 떠올려야 한다. 니콜라스를 설득할 수 있는 사건을. 의주는 색 바랜 십일 년전의 기억을 뒤적거린다. 불과 십여분 전까지 의식적으로 차단하던 시간이라 오히려 더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편집적으로 책상 끄트머리를 두들기다, 기억이 나는 대로 꺼내 들었다.

 

“고고 노래방. 벽에 낙서했었어. 3번 방에 니콜라스 바보라고. 사장님이 우리 오면 맨날 다른 방 말고 거기 줬잖아.”

[글쎄. 난 본 적 없는데.]

“몰래 했으니까 본 적 없지. 지금 가서 봐봐.”

[싫어. 지금 PC방이야.]

 

의주는 조용히 머리를 쥐어뜯는다. 그랬지. 언제 니콜라스가 내 말을 들었다고. 두통에서 노스탤지어가 느껴질 지경이다. 차라리 사기꾼이나 피싱 알바책을 상대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식이라면 언제라도 전화가 끊길 것이다. 니콜! 의주는 답지 않게 큰 목소리로 그의 주의를 붙든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뭐어.]

“나 담배 주워 피우고 있었는데… 틴트 묻은 담배.”

[…….]

“그때 네가 나한테 라이터 빌려줬잖아. 네 집에 데려가서 알려줬잖아. 왜 대만에서 한국으로 온 건지. 너한테 산다는 게 뭔지. 다 들려줬어. 나한테.”

[…….]

“나 이건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어. 너도 알지. 내가 이런 얘기 남한테 할 성격 아니라는 거.”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수화기 너머의 니콜라스가 대답을 유보한다. 키보드가 딸깍거리고 남자애들이 잔나비처럼 소리를 지르는 유년의 정적이 들려온다. 의주는 마찬가지로 되묻거나 니콜라스를 부르지 않는다. 아마 지금 니콜라스에겐 형광등이 가느다랗게 떨고, 건물의 환풍기가 웅웅거리는 피로한 직장인의 소음이 들릴 것이다. 한참 만에 니콜라스가 대답한다.

 

[그렇지. 주주는 절대 안 하지.]

 

응? 나한테 뭐라고 했어? 수화기 너머로 희미한 목소리가 들린다. 귀에 꽂힘과 동시에 성대가 떨리는 것 같다. 입을 연 적이 없는데 마치 제가 말하고 있는 듯하다. 니콜라스와 다르게 비교군이 있어 확실히 알 수 있다. 나다. 열아홉 살의 나. 의주는 2013년이라는 니콜라스의 말을 곱씹는다. 7월 30일이라고 했지. 그러면 정확히 한 달이 남았다. 연도를 역산한 이면지 위에 다시금 볼펜을 긋는다.

 

니코, 이름을 미처 다 부르기도 전에 오피스 기자실의 문이 덜컥 열린다. 의주는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어깨를 떤다. 얼른 휴대폰을 가리고 돌아본다. 누군가 다시 출근하기엔 확연히 늦은 시간인데, 피곤한 안색의 수습기자다. 슬희 씨? 이름을 부르자 S가 도리어 의주를 보고 펄쩍 놀란다.

 

“의주 선배님 아직 퇴근 안 하셨어요?”

“기사 쓰다 보니…. 슬희 씨는 이 시간에 취재 다녀왔어요?”

“아아. 네……. 그 왜, 지난주에 선배님이랑 같이 다뤘던 사건 있잖아요. 그 엔터 관계자가 한국에 들어와 있는 삼합회 간부랑 룸싸롱에서….”

“아… 네. 그 사건.”

“그거 제가 팩트 체크를 잘못한 거 같아서 경찰서에 야간 취재 좀 다녀왔어요. 중요한 아이템인데 저 때문에 킬 되면 안 되니까… 계신 김에 선배도 한번 같이 검토해 주시면 안 돼요?”

 

그렇게 묻는 S의 눈 밑은 까므스름하고 가칠하다. 본래라면 대답조차 하지 않고 승낙했을 일이지만, 의주는 휴대폰의 상부를 감싼 채 조금 망설인다. 지금, 하필 지금. 니콜라스가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는지조차 확인하지 못했는데. S가 데스크에 짐을 내려놓고 노트북을 켜는 동안 겨우 휴대폰에 귀를 댔다. 니콜? 끊었어? S의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 도둑질을 하듯 음성을 낮춘다. 대답 대신 웃음이 돌아온다.

 

[거기서도 바쁘네. 주주.]

 

원두 거품처럼 부드러운 목소리. 짧은 일찰나, 의주는 옆에서 S가 신경질적으로 노트북의 패드를 딸칵거리는 것도, 이곳이 창백하고 파란 불빛이 내리는 공유 오피스라는 것도, 그리하여 니콜라스가 없는 세계에 있다는 것도 잊는다. 좀 더 어리석고, 좀 더 말랑하고, 민감한 열아홉의 변의주가 된다. 가벼운 스포츠 백팩이 걸음마다 내려앉는 너른 등. 공연히 귀 끝이나 턱을 건드리던 험한 손끝. 주주, 울대 낮은 음성으로 불리던 이름. 그런 것들이 내장의 어딘가를 긁을 때마다 공연히 신경질을 부려야 했던, 어린 날의 변의주. 그 목소리가 온 세상이 숨을 조이던 소년기를 부른다. 10년도 전에 죽은 사람과 전화를 나눈다는 우스운 사실은 이미 잊었다. 질 나쁜 기망행위라도 상관없다. 아니. 제발 그러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솔직히 네가 주주인 거, 아직 잘 안 믿기거든.]

“일단 지금은. 내가…….”

[근데 나 여기 오만 원 냈어. 시간 써줄게. 오만 원만큼.]

 

그러니까 다녀와.

의주는 변명을 잇지 못한 채 핸드폰을 구명하듯 붙든다. 모니터 위로 고개를 기울이며 욕지기를 참는다. 속이 온통 커다란 배처럼 느리게 뉘엿거린다. 윽, 작게 숨을 삼키자 시끄럽게 하품을 하던 S가 의주를 돌아보곤 뒤늦게 목소리를 낮춘다. 죄송해요. 통화 중이신 줄 모르고. 괜찮아요. 금방 보러 갈게요……. S에게 둘러대는 소리를 니콜라스가 작게 따라 한다. [금방 보러 와?] 의주는 눈을 덮고 바보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니콜라스가 볼 수 없는데도. 응. 금방.

 

“니콜. 내가 또 연락할게. 꼭 다시 연락할게. 이 링크 절대 잃어버리지 마.”

[응. 빨리 와. 나 기다리는 거 싫어.]

 

뚝. 연결이 종료된다. 의주는 통화가 종료된 핸드폰 속 시간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2024년 7월 30일이다. 선배? S가 일별하는 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주소창을 누른다. facebook을 치자 자동으로 /wenowang이 완성된다.

 

프로필 명 王奕翔. 마지막 포스팅은 11년 전 8월 20일. 필터가 노랗게 낀 사진 속 배경은 월미도. 새파란 슬러시를 손에 든 그 애는 웃고 있다. 가느다란 마우스 커서가 니콜라스의 흐린 뺨의 픽셀을 물길처럼 따른다.

 

옷이 얇아지기 시작하는 계절이 돌아오면, 의주는 종종 노랗게 색이 바랜 니콜라스의 사진을 찾았다. 이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의주는 신체 어딘가가 작열하는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그 애가 남긴 마지막 사진에 변의주가 함께 찍혀있지 않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그 애를 혼자 뒀다. 변의주가 그 애와 함께 있어 주지 않아서. 그 애가 남긴 마지막 흔적에 출연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인생은 가보지 않은 길을 걷는 여행입니다.

 

도대체 어째서 그 사이트가 변의주를 선택한 건지, 어떤 선별을 통해 의주 앞에 이 길이 놓인 건지는 몰라도. 의주는 주먹을 강하게 쥔다. 지금까지 그가 수용해 온 모든 감정들이 손아귀 안에서 으스러진다.

 

기회다.

더는 니콜라스를 기다림 속에 홀로 내버려 두지 않을 기회.

 

 

 

 

 

 

 

 

 

13:07:31 ━━━━━━━━━━━━━ 24: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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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의 불청객

 

 

전화가 끊겼다.

이샹은 말없이 전화기를 내려다보았다. 통화 기록을 보았다. 어제 그가 짜장면을 시킨 중국집 번호가 가장 최근 것으로 떠 있었다.

 

“니콜. 나 핫도그 한 입 먹어도 돼?”

 

막 헤드셋을 벗은 의주가 이샹을 돌아보았다. 이샹이 누구와 통화를 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 같았다. 이샹은 기계적인 미소와 함께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다. 소스를 입에 묻히며 그것을 먹는 의주를 보다가 지나가듯 물었다.

 

“의주. 너 고고 노래방 벽에 나 바보라고 낙서했어?”

 

의주가 이샹을 돌아보았다. 잠깐 떠올리는 표정을 짓더니, 아, 봤어?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었다.

 

“금방 들켰네… 모를 줄 알았는데.”

 

말없이 의주를 바라보던 이샹은 앞접시로 시선을 돌렸다. 빈 꼬치만 두 개 담겨있는 종이 접시엔 빨간 소스가 피처럼 묻어 있었다.

 

 

 

 

 

 

지금부터 4년쯤 전인가. 스티븐 호킹 박사가 시간 여행자들을 초대하는 파티를 열었다. 어떻게 초대했냐면, 초대장을 작성하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파티가 끝난 이후에야 초대장을 공개한다. 그렇다면 미래에서 이것을 본 사람들은 시간을 거슬러 파티에 참석할 수도 있으니까.

 

시간 여행자의 파티엔 끝내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것을 통해 박사는 결론지었다.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것이라면 몰라도, 미래에서 과거로 오는 시간 여행은 불가하다. 결과는 원인을 앞설 수 없으므로.’

 

 

응철이 김션 영원히 사랑해 >< 빡추중 개원빈 곽병규 번호 -> 010-8990-0000 너네 이쁜 여자 밝히면 대머리된다… <- 왜지 여자 밝혀주려고? ♡씨스타♡ 이름이 뭐예요~ <- 안알랴줌 <- 나 김철중 ㅋㅋ <- 안녕 병신 철중이~ 13.02.15 민석소영 다녀감 2013년도 행복하자! 니콜라스 바보

 

“어. 있다.”

 

벽의 낙서를 톺아가던 손끝이 멎었다. 니콜라스 바보. 까만 네임펜으로 적힌 글씨는 주인을 닮아 반듯하고 둥글었다. 이샹은 조금 웃었다. 이런 건 언제 적었을까. 딱히 숨으려는 의도도 없이 뚜렷하게 적혀있는데, 의주와 여길 몇 번이나 드나들면서도 한 번도 보지 못하다니. 사람 눈은 낯선 것을 함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던 이모의 말이 떠올랐다.

 

이샹. 너와 나는 이곳에서 낯선 거야. 만약 이곳의 사람들이 우리를 예쁘게 봐주지 않는다 해도, 그건 네가 못났다는 뜻이 절대 아니란다.

 

고고 노래방의 사장은 이샹을 낯선 것 대신 반가운 것으로 인식해주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대만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건너간 뒤, 대학에서 만난 한국 남자와 결혼해 최종적으로 한국에 정착했다고. 그녀와 이샹은 종종 보통화로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그때마다 의주는 자기 욕하지 말라고 가만히 웃었는데…

 

낙서 위를 여들없이 매만지다가, 자리에 풀썩 앉았다. 노래방의 얇은 벽 너머로 남자들의 찢어지는 열창이 들려온다. 슬퍼하지 마 no, no, no 혼자가 아냐 no, no, no 언제나나나 내게 항상 빛이 돼준 그대… 에이핑크를 김경호로 승화시키는 소음 공해를 긁어내듯이 새끼로 귀를 후볐다.

 

정말로 의주였던 걸까.

 

노래방이나 PC방이나, 생각해 보면 다들 돈을 받고 시간을 판다. 이샹은 단돈 오만 원에 11년을 해치우고 변의주의 미래를 사버렸는지도 모른다. 2024년이라면 타임머신 개발될 만도 하니까. 차도 날아다니고 있을 거고 옷도 로봇이 대신 입혀줄 테니까. 홀로 미국 유학 행을 선택한 의주가 11년 뒤 기자가 되어 미래로부터 전화를 걸어오는 일 따위는 기적 축에도 못 낀다.

 

그렇다면 미국은 갈 필요 없지 않나. 너는 어차피 인터폴 같은 게 되지 않을 텐데…

 

이샹은 고개를 털었다. 의주의 인생은 의주의 것이다. 의주가 꿈을 좇는데 미리부터 미래를 스포할 수는 없다. 그 애의 모든 선택이 결국 11년 뒤의 의주를 만들었을 테니까. 이샹이 의주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등을 밀어주는 일. 더 넓은 세상으로 비행한 의주가 지쳐 돌아올 때, 그 애가 잠깐 쉬어갈 책상이 되어주는 일.

 

“나 착하지. 주주.”

 

혼잣말을 되뇌어본다. 답은 노래방 건너편에서 찢어지는 득음으로 돌아온다. 다들 그만해 라고 말할 때- 마지막 니가 바라볼 사랑 이젠 내가 돼 줄게 oh- 에이핑크의 새로운 해석을 차마 더 들어주기 힘들어서, 이샹은 방치되어 있던 노래방 기계를 집어들었다.

 

435 황홀한 고백 - 윤수일

 

스타트는 주주 18번으로.

 

 

 

🔇

 

 

과연 누가 먼저 명창의 경지에 달하는가에 대한 성대 소모적인 배틀은 쉬즈곤-돈크라이-낭만 고양이 선에서 정리되었다. 죽도록 악을 쓰던 옆방이 잠잠해지고 나서야, 이샹은 남겨진 10분을 룸에 두고 미련없이 나섰다. 그와 배틀을 벌이던 옆 방에서도 때맞춰 숫내 나는 고삐리들이 왁자하게 몰려나오고 있었다. 같은 교복. 아는 얼굴. 익숙한 쌍소리. 박민철과 늘 붙어 다니는 놀량패들이다. 이샹이 그들을 보자 놈들도 이샹을 보았다. 곧바로 질 낮은 눈빛들이 오간다. 아주 우스운 것이나 아주 더러운 것을 봤다는 눈깔들.

 

병신 낭만 고양이…

눈깔 먹물을 확 씨… 짱깨 새끼가.

 

고삐리 무리가 이샹의 어깨를 툭 뻑 떼밀고 지나갔다. 그중 가장 세게 치고 지나간 최정훈은 낄낄대면서도 두어 번씩 이샹을 돌아보았다. 어깨빵을 쳤으면 그대로 걸어 나가야 멋인데. 마음 놓고 등을 보이지 못하는 태세는 그다지 효과적인 위협이 되지 못했다. 이샹은 힐끔대는 무리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낭만 고양이 완전 나지. 너희는 끝내 에이핑크가 되지 못했지만.

 

역시 혼자 노래방에 오는 건 썩 즐겁지 않았다. 의주가 있었으면 무적의 듀엣을 이뤘을 텐데. 이샹은 다시 한번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지금의 의주는 학원에 있을 시간이니, 그가 기다리는 ‘의주’의 연락은 조금 먼 미래로부터 올 것이다.

 

 

 

 

상대: 니콜 나 퇴근했어

상대: 지금 전화 돼?

 

의주한테 채팅이 온 건 오후 7시였다. 그때쯤 이샹은 상가 근린공원에 앉아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공원에 있는 커다란 배롱나무 아래 벤치. 거긴 시간을 죽이는 일에 돈이 들지 않는 귀한 자리다. 이샹은 그 자리를 좋아했다. 좋아해서 의주랑만 앉았다. 지금 의주는 어학원의 불편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느라 이샹을 혼자 두었지만.

 

나: 의주

나: 나 네 18번으로 에이핑크를 무찔렀어

상대: 무슨 소린진 모르겠는데… 통화해도 된다는 거지?

나: 전화하면 그거 불러주라

나: 윤수일 황홀한 고백

상대: 와 그거 마지막으로 부른지 십 년도 넘었는데

상대: 할머니가 좋아하는 노래라 외웠던 거지... 지금은 다 까먹었어

 

아쉽다. 그거 한 곡이면 의주인 거 바로 확인인데. 이샹은 포장해 온 떡볶이를 우물거리면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니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든다.

 

“고고 노래방 다녀왔는데.”

[아. 응.]

“있더라. 낙서.”

 

안도의 한숨이 들려온다. 역시 그때쯤에 새긴 게 맞구나. 말끝에 살짝 섞이는 웃음기. 낮고. 먹먹하고. 잘 휘어지고. 누르면 푹 들어갈 거 같고. 오래 들어도 거슬리지 않고. 7080 댄스곡에 제대로 흥을 실을 줄 아는. 의심 없이 의주의 목소리다. 세월에 갈렸는지 약간 원숙해지긴 했어도. 이샹은 허물없는 웃음을 지었다.

 

“너 담배 안 끊었지.”

[…어떻게 알았어?]

“목소리 들으면 다 알아.”

[끊었다 다시 피우는 거거든.]

 

변명하는 투도 똑같네. 입가에 묻은 떡볶이 소스를 엄지로 닦아 쪽 빨았다. 오뎅만 남은 컵은 쓰레기통에 버렸다. 평소엔 의주가 오뎅 먹어주는데. 지금은 오뎅 먹어줄 의주는 어학원 계시니까. 곱씹을수록 아랫입술이 비죽 비어져 나왔다. 주주가 안 놀아주니까 미래의 주주랑 바람피우는 거야.

 

“요즘도 꽁초 주워 피워?”

[요즘은 당당하게 사서 피우지. 이제 신분증 검사도 안 해… 하하.]

“우와. 주주 아저씨다 아저씨.”

[야. 넌 뭐 영원히 나이 안 먹을 줄……]

 

시원스럽게 쏘아붙이던 의주가 말끝을 흐린다. 말이 뚝 잘려서 잠깐 연결이 끊긴 줄 알았다.

 

“주주?”

[…너도 아저씨 될 거라고. 언젠가.]

 

잠깐 침묵하던 의주가 자연스럽게 말을 맺었다. 장난스러웠지만 왠지 웃고 있진 않은 것 같다. 이샹은 그걸 구분할 수 있다. 의주는 웃기 싫을 때도 웃는 애고, 그럴 때만 내는 꾸민 듯한 소리가 있으니까. 그렇게 싫은가. 아저씨란 말이.

 

아저씨 의주. 서른의 의주. 11년 뒤 미래에서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는 학교에서도 배운 적 없다. 이샹은 부른 배에 손을 올려놓고 벤치에 등을 기댔다.

 

“나 미래에 대해 궁금한 거 있어.”

[뭔데?]

“너목들 결말 알려줘.”

[뭐야…… 차라리 주식을 물어봐. 니콜.]

“주식? 잘 몰라, 그런 건.”

[네가 하는 운동화 리셀이랑 비슷한 거야. 좀 더 돈이 될 뿐이지…… 잠깐만. 말하고 보니까 좋은데? 대박 나는 주식 알려줄까?]

 

갑자기 의주의 목소리에 생기가 서렸다. 기다려 봐. 2013년에 수익률 높았던 기업 뭐 있지. 아니다, 주식보다는 로또가…… 열성적으로 불로소득 뽕뽑는 얘기를 들어주던 이샹은 슬쩍 하품을 했다.

 

“주주. 왜 어른 되니까 그거 됐지. 속물.”

[속물이라니. 니콜…… 너 이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소원인지 알아? 미래에서 로또 번호 훔쳐 오는 거?]

“몰라. 내 소원은 아냐. 그런 큰 거 받아버렸다가 갑자기 사이트 사라지면 어떡해. 오 만원어치 소원 다 들어줬다고."

 

숨소리가 들려오던 끝에 방점이 찍힌다. ……그래. 너는 그런 애지. 어딘가 체념 조를 띠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이샹도 웃었다. 맞다. 그는 이런 놈이다. 억을 준대도 주주랑 보내는 시답잖은 시간이 더 좋은 놈.

 

“그런 재미 없는 얘기 말고. 우리 좀 걷자.”

 

그러니까 너는 날 혼자 두지 말라고.

 

 

 

 

 

그들은 함께 동네를 걸었다. 같은 방향으로 걸으면서, 보이는 모든 글자를 서로에게 읽어주는 놀이를 했다. 같은 동네였지만 다른 시간이었다. 같은 길이지만 다른 풍경이었다. 어떤 곳은 업종이 바뀌었고, 울타리에 걸린 현수막이 다르기도 했고, 어떤 벽엔 없던 그래피티가 생기기도 했다. 아주 가끔 의주 쪽의 길이 막히기도, 이샹 쪽에 길이 아직 생기지 않았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그들은 다른 길을 찾았다. 그들이 함께 걸을 수 있는 길.

 

“뭐? 진짜 그 게임이 망했다고? 김씨네 김밥.”

[응. 그 뽑기 박스 확률이 다 조작이었더라구. 천정루.]

“어쩐지 겁나 안 나오더라…… 잠시만, 그럼 주주 미국 가서 이 게임 못 하잖아? 내 소원 망했어…… 미니스톱.”

[어. 거기 GS25로 바뀌었다. 그러니까 니콜. 내 말을 한 번만 들어봐… 복권 제발 사봐. 응? 1등이 부담되면 3등 정도라도.]

“2013년 교원 임용고시 합격을 축하합니다. 빨리 보이는 글씨나 읽어.”

[너 말 진짜 안 들어. 피자 삿뽀로 돈까스.]

“온나라 부동산. 근데 주주.”

[아. 거긴 대박 부동산으로 상호가……]

“우리 거기 같이 있지 않은 거지?”

 

습격처럼 물었다.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2024년에 살고 있다는 변의주는 마치 이샹을 아주 오랜만에 만난 사람처럼 굴었다. 그 목소리에는 망향을 앓는 방랑자가 고향 사진을 들여다보는 듯한 회한과 그리움이 서려 있었다. 그래서 이샹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거기 내가 없구나.

 

그렇다면 2024년의 이샹 곁에도 의주가 없나.

그건 너무 슬플 것 같았다.

그가 슬퍼해서, 어딘가의 장난스러운 신이 그에게서 오만 원을 수금하고 리트라이 기회를 준 건지도 모른다. 오락실 철권도 오백 원 넣으면 재도전하게 해주니까. 그 백 배 비싼 만큼 귀한 기회다. 어떻게 써야 좋을까.

 

“주주는 소원 뭐였어?”

[내 소원은… 모기에 물려보는 거.]

“뭐야, 그게.”

[……됐어. 그런 소원은. 이제 바꿨어. 내 소원은 너 8월 30일에 아무 데도 못 가게 하는 거야.]

 

꽤 구체적인 날짜가 거듭 나오니 궁금해진다. 그날 뭐가 있길래 그렇게 집착해. 이샹이 물었더니, 수화기 너머로는 융단처럼 부드러운 숨소리만 한참 이어졌다. 사람마다 지문이 있고 목소리에는 성문이 있듯이, 의주의 숨소리에는 의주만의 결이 있다. 소라에 귀를 대면 들려오는 파도 소리처럼 느리게 밀려오고. 빠져나가는 숨소리. 횡단보도의 빨간 불이 초록으로 변할 때 쯤, 의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 그날…… 개똥 밟아.]

“…….”

[그때 네가 신고 있던 건 에어 조던 1이었어. 슬램덩크에 나왔던 신발 있잖아.]

“그, 그걸 내가 신었을 리가 없어. 리셀하려고 곱게 모셔놨는데.”

[나 유학가기 전에 최고로 멋진 모습만 보여줘야 한다고 신고 나오던데. 그리고 그대로 날아갔지…… 리셀가가 얼마였을지…… 하.]

“그, 그럼 그걸 안 신으면 되는 거 아냐?”

[중요한 건…… 신발만 날아간 게 아니라는 거야. 그때 난 캐리어를 끌고 막 공항 버스에 오르고 있었는데, 날 배웅하러 나온 네가 개똥을 밟고 미끄러져서 머리가 깨지던 모습이 아주 생생해.]

“…….”

[유학 시절 동안 내 기억 속에서 네 모습은 그딴 웃기는 꼬라지로 남고 말았지…… 사실 니콜라스, 너와 연락하지 않게 된 건 그것 때문이야. 우린 그 사건으로 돌이킬 수 없이 어색해진 거라고. 차라리 네가 그날 나오지 않았더라면…… 그 생각을 얼마나 했는지 몰라.]

“……절대 안 나갈게.”

 

뭐가 됐든 재수 더럽게 없는 날이었던 게 분명했다. 그래도 다행이지. 의주가 들려준 이야기가 전부는 아니겠지만(제발!) 어쨌든 8월 30일에 어떤 문제가 있어 그들이 멀어진 거라면. 그 날만 조심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와. 학교 진짜 오랜만에 와본다.]

 

걸음을 멈췄다. 산책을 하다보니 걸음이 자연스레 익숙한 길로 그를 인도했다. 지난 주 방학식 때도 왔던 곳. 이샹에겐 현재이고 의주에겐 과거가 된 곳. 이샹은 갓 페인트칠을 해 깨끗한 본교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의 시간이 처음으로 동행을 시작했던 시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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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싼 재료를 골라 쌓은 붉은 벽돌. 빗물에 비닐 껍데기처럼 일어나 흘러내리는 페인트. 건물의 모서리는 먼지가 쌓인 것처럼 전부 얼룩덜룩하다. 건물 형태는 10여 년 전의 것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나, 의주는 유념 속의 소년기를 비집어 내어 그 배경을 비교한다. 학교보단 창백한 교도소에 가까워 보인다. 이보다 좀 더 따뜻하고 부드러운 색감이었던 거 같은데. 이렇게 작고, 오래되고, 빽빽한 건물 속에서 보냈던 것들은 시간에 훼손되어 전부 얼룩졌다.

 

오래된 학교의 정경은 대체로 거기서 거기다. 사람들이 공유하는 각자의 학창시절은 사실 비슷한 예산 안에서 규격화되어 있는 것이다. 의주는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다. 여덟 시가 훌쩍 넘어 저녁이라 하기도, 밤이라 하기도 어중간한 시각. 건물의 따개비 같은 창에 납덩이처럼 창백한 불이 켜져 있으나, 어둠을 완전히 몰아내진 못했다. 더위를 모두 토해낸 짙푸른 땅거미가 교정을 고요히 덮고 있었다.

 

[너 어디 서 있어?]

“정문 앞.”

[나도. 나 빨간 벽돌 밟고 있어.]

 

의주는 고개를 수그려 발코를 본다. 이 무렵에 보도블록을 잘못 쌓아 점 같은 빨간 벽돌이 하나 있었지. 발등을 조금 움직여 그 위로 발을 얹었다. 여기. 같은 점 위에 니콜라스가 서 있다. 그와 같은 자리에 서 있다. 현재의 시간까지 함께하지 못했지만 공간만큼은 공유하고 있다. 의주는 덧그리듯 조심스럽게 허공에 손을 뻗는다. 어느 자리든. 그쯤 니콜라스의 손이 있을 것 같다. 촉감의 기억을 잃어가는 그 손에 닿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여기서 내가 너한테 처음으로 말 걸었던 거 기억 나?]

 

어루만지듯 부드럽게 잠긴 목소리가 의주를 일깨운다. 니콜라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지 조금 궁금해진다. 의주가 앙금이 일렁이는 추억을 유영하는 것처럼. 니콜라스도 얼마 되지 않은 과거를 되짚고 있을까. 니콜라스를 처음 만난 곳. 이 시간쯤이었다. 학교 근처의 주택가 담벼락을 따라 걷는다. 몸이 기억한다. 소년기가 발목까지 찰랑거리고 있다. 의주는 지금이 아닌 과거의 시간선을 따라 걷는다. 니콜라스도 함께 걷고 있는지, 뺨에 수화기가 스쳐 바스락대는 소리가 들린다.

 

[후문 근처였어.]

“응. 알아… 여기다.”

[나도 거기 있어. 여기서 너 담뱃불 못 붙이고 있었지. 라이터 어떻게 쓰는 줄도 모르면서 꽁초 물고 있었어.]

“그때 네가 라이터 빌려줬잖아.”

 

자동차가 무너진 성냥갑처럼 엉망으로 줄지어 선 담벼락을 따라, 의주는 몸을 웅크려 앉는다. 그때와 같다. 기억을 되살릴 필요가 없다. 앙상한 나트륨등의 동그란 불빛 아래 날벌레가 엉겨있다. 이쯤엔 언제나 다 피운 꽁초들이 송장처럼 낭자해 있었다. 개중에서 가장 길고, 깔끔한 꽁초를 뒤적거리고 있었지. 의주의 나쁜 버릇은 전부 이맘때 시작됐다. 그리고 그 도입을 전부 니콜라스에게 들켰다. 숨기는 건 의주의 가장 큰 재능이기도 했는데.

 

“그래서… 너도 담배 피우잖아, 하고 내가 물어봤는데. 네가 그랬어.”

 

조그맣게 웃는다. 그 때도 지금도. 니콜라스가 웃었고.

 

[바지 실밥 태우려고 산 건데.]

 

그 말이 꼭 옆에서 속삭이는 것 같았다.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혼자 변하지 않아 뽀얗게 먼지 쌓인 얼굴로. 잘못한 사람처럼 발뒤꿈치를 세운 의주에게. 마치 그런 의주를 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전화 너머의 니콜라스가 여전히 초침소리처럼 웃고 있다. 그때와 같이. 잘못 쌓은 책장을 건드리듯. 뒤꿈치 밑의 차도와 붉은 담벼락이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한다. 의주는 속절없이 오랜 과거로 빨려든다.

 

이샹.

그때는 널 그렇게 불렀고.

 

 

 

 

*

 

 

개발된 아파트 단지가 덩그러니 들어선 신도시와 멀지 않은 동네. 연수구와 접경한 미추홀구의 평준화 공립 고등학교. 판검사, 포스코 임직원 자녀들은 다 송도 특목자사고로 빠지고. 이 학교는 그곳에 속하지 못한 채 적당히 뺑뺑이로 온 의주 같은 애들이 절반, 건달 자치구에서 모인 양아치들이 절반인 빅 애플이었다. 의주는 매일 어머니의 출근길에 딸려 조수석의 짐처럼 동을 건너 등교했다.

 

신도시 인근 학교가 그러하듯, 한 반에서도 빈부격차가 컸다. 학교부터가 그랬다. 마모되지 않아 모서리가 날카로운 아파트를 등에 이고, 고상한 상아탑처럼 우뚝 서서 키작은 벽돌 주택을 주위로 두르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진학할 당시 의주의 어머니는 정확히, 영 주변 환경은 상스럽지만 내신 따기엔 좋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 학교가 미추홀 3대 엠창 학교 리스트에 4번째 멤버로 이름을 올리기 직전이었다는 걸 어머니가 알았다면 애초에 진학부터 시키지 않았겠지만.

 

어머니가 말한 상스러운 환경이란. 낮에 학교 복도에서 인사한 선배가 밤 되면 로데오 거리에서 툭 치고 돈 받아 간다더라. 어떤 반 복도에는 재떨이가 있다. 담배 꼬나물고 등교하는 놈과 선생이 맞담 하는 걸 봤다. 성적 최하위권 교실은 전담 연기가 자욱하다…… 소문의 대부분은 과장되어 있겠지만, 의주는 전자담배 연기만큼은 확실히 보았다. 하교길 구석구석 도사린 끈적한 웅덩이와 꽁초 더미를 피해 다닐 때면, 의주는 벌레 쫓듯 거주 구역을 뒤집기를 바라는 부모님과 주변 환경 중 어느 것이 정말로 상스러운지 홀로 생각하곤 했다.

 

어쨌든 학교는 주어진 환경에서 최대한 물과 기름을 분리해 두었다. 1학년은 성적순. 2학년은 제2외국어에 따라 반이 갈렸으니, 학생 개인에게 어느 정도 선택지는 제공한 셈이다. 모범생들은 알아서 등급 따기 좋은 언어로, 아랫물은 대개 중국어를 골랐다. 반이 정원을 꽉 채운 한 개뿐이라 뭉쳐 노가리를 까기 좋다는 이유였다. 남몰래 부모님을 비웃긴 했어도, 그 재떨이 같은 교실에 제 발로 들어가는 건 분명 다른 일이어서. 의주는 2학년이 되면 꼭 아랍어, 못해도 프랑스나 독어를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애가 전학을 온 건 1학년의 중간고사를 치르기 직전의 애매한 시기였다.

 

첫 내신 준비로 마음이 급급하거나, 그저 학교가 일찍 끝나 좋은 무리들이 섞여 반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전학생이 세워진 건 그 앞이었다. 중국인지 어디인지. 외국에서 왔으니까 잘해주라고, 담임은 흘리듯 말했다. 교탁 앞에 선 그 애는 내후년에 없어지기로 예정된 플라스틱 탈부착 명찰을 가슴에 달고 있었다. [왕혁상]. 생김새가 거센 글자만 골라 만든 것 같은 이름. 혁, 혁상이. 담임 교사가 더듬거리며 그렇게 소개하자 그 애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 왕이샹.

 

혁상은 제 이름이 아니고요. 왕이샹. 닉도 괜찮고 니콜라스도 상관없어.

 

그렇게 말하는 낯짝의 카테고리는 명확한 ‘불량’이었다. 뒷짐을 지고 동급생의 얼굴을 조목조목 뜯어보는 눈매. 종이를 제멋대로 찢은 것처럼 단면이 거칠고 날카로웠다. 웃지 않는 얼굴엔 팽팽한 긴장이 있었고. 앞으로 쏟아질 것 같은 살모사의 인상 같았다. 누구라도 그 애를 보면 불량과 선도를 떠올릴 것이다. 당시엔 의주도 다르지 않았고.

 

그 애는 의주의 앞자리에 앉았다. 이름이 참 많은데. 명확하게 자기가 어떻게 불려야 할지 알고 있는 게 좀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그 애는 일주일가량 고리띠를 두른 것처럼 혼자 앉아 있곤 했다. 연수구에서 등교하는 애들도, 미추홀구로 하교하는 애들도 그 애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의주의 몫은 전학생에게 중간고사 범위와 유인물을 전해주는 일이었다. 그때마다 의주는 어떤 이름을 골라 불러야 할지 고민했다. 이샹, 닉, 니콜라스. 그 어떤 것도 고르지 못해 저기… 하는 애매한 부름으로 그 애의 책상을 두드리곤 했다. 그때마다 그 애는 사나운 눈을 최대한 상냥하게 부릅뜨고 의주를 돌아보았다. 대화의 말미엔 항상 빨간 패키지의 왕자이 우유 사탕을 주었다. 고마워. 이거 너 먹어. 하면서.

 

아무도 그 애를 명찰에 적힌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왕이샹. 닉 왕. 왕 서방. 개중엔 그 애의 국적을 얕잡거나, 이샹이란 이름을 부러 세게, 놀리듯 발음하는 머저리들도 있었지만, 적어도 본인 앞에서 직접 내뱉진 않았다. (그러지 못한 것에 가까웠다.) 당시 의주는 이미 키가 백팔십 언저리라 맨 뒷줄을 도맡아 앉고 있었다. 자연히 그 애의 뒤통수를 볼 수 있는 것도 의주뿐이었다. 그 애는 턱이 작고 목이 두꺼웠다. 뒷머리가 단정하고 셔츠 카라가 보기보다 깔끔했다. 그리고 신발이 자주 바뀌었다. 알록달록하고 둔탁한 모양의 나이키 신발. 빨강일 때도, 파랑일 때도, 상아색일 때도 있었다. 의주가 관찰한 일주일 동안 그 애는 총 다섯 쌍의 각자 다른 신발을 신고 왔다. 그게 어떤 신발인지, 그때는 잘 몰랐지만.

 

- 야. 이샹 신발 뭐냐? 개 신기하네.

- 나이키 스웨거 터미네이터.

- 와씨. 우리 형이 저거 사려고 전날부터 강남 나이키 매장 밖에 줄 섰는데도 못 샀는데. 너 어떻게 샀냐?

- 응. 나 이틀 전부터 거기서 서서 잤어.

 

의주는 너 짝짝이로 신고 왔다고 말해줘야 하나 고민했던 이샹의 신발이. 사실은 아주 비싸고 멋진 신발이라고 했다. 그 일자로 반의 두어 명이 오늘의 신발은 뭐냐고 물으러 오기 시작했다. 그 애의 짝꿍이었던 여자애가 ‘애는 착해. 그냥 쑥스러움 타는 듯…’ 하는 미담 아닌 미담을 뱉은 이후로 그 수는 배가 됐다. 의주의 자리에선 그 애가 매일매일 다르게 대는 신발의 이름을 엿들을 수 있었다. 바로 앞자리였으니까.

 

말문을 틔우기 어렵다 뿐이지, 그 애는 보기보다 성격에 무게감이 없었다. 누가 신발의 이름을 묻든 똑같이 눈썹을 높게 뜨고 친절하게 대답했다. 필요 이상으로 웃어 줏대가 없지도, 분위기가 망칠 만큼 예민하게 굴지도 않았다. 선을 안다는 건 파고들어야 하는 지점을 안다는 것과 같다. 점심시간이면 커튼 너머의 창을 바라보던 그 애는 곧 그 밖으로 나가 농구를 하게 됐다. 그 나이엔 구기종목만 잘해도 절대 혼자 다닐 수 없었다. 구와 성별을 가리지 않고, 그 애는 곧 친구가 아주 많아졌다.

 

의주와 그 애는 꼭 물과 기름 같았다. 의주는 그 애의 고리띠 밖에 있었다. 유인물을 모두 전달한 후에는 그 애와 말도 섞지 않았다. 그 애는 애매한 시기에 들어와도 구심점에 끼어드는 메기였고, 의주는 그냥 키가 크고 얌전하다는 것이 인상의 전부인, 존재감이 그림자처럼 흐린 부반장이었다. 같이 다니는 애들도 그랬다. 의주와 비슷한 데시벨을 가지고, 연수구로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애들. 따돌림을 당한 건 아니지만 크게 주목받은 적도 없었다. 의주는 동급생과 모두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그뿐이었다. 학교의 규격 밖에서 만날 정도로 마음을 나눈 애도 없었다.

 

 

돌이켜보면 변의주의 고교 생활은 표면이 팽팽한 풍선이었다. 사람들은 종종 얌전한 것과 모범적인 것을 구별하지 못했는데, 의주의 소소한 불행과 우울은 늘 거기서 시작했다. 변의주는 고분고분한 학생이지 모범적인 학생은 아니었다. 동급생도, 교사들도, 하물며 그를 제일 알아야 하는 가족도. 늘 그가 학업이 우수하고 모범적인 학생이라 오해하곤 했지만.

 

어머니의 말마따나 주변 환경에도 불구하고 내신 따기 좋은 학교에 왔으니, 평균은 곧 미달을 의미했다. 의주는 타고난 것 이상의 모범생이 되어야 했다. 의주의 부모님은 어중간한 최고가 될 바엔 최고들한테 가서 어중간해지라고, 필요하다면 해외 유수의 대학도 지원해 주겠다며 선심 쓰듯 말했다. 국내보단 그쪽이 나을 수도 있다고. 그런 부모님을 의주는 속으로 조금 비웃었다. 자기네 아들이 어중간한 건 아시는구나. 그래서 굳이 최고란 수식어를 앞뒤 어디든 붙이려고 애쓰는구나. 지금 그의 아들은 이런 어중간한 똥통에서조차 최고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언제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실까.

 

전학생. 그 애에게선 의주의 발목에 감긴 것과 같은 모범의 굴레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기출 문제를 풀다 고개를 들면 언제고 그 애를 볼 수 있었다. 그 애는 의주의 시야각 속에서 쉬는 시간마다 각자 다른 애들과 노닥거렸다. 원한다면 누구나 그 애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교실의 왼쪽 벽과 오른쪽 벽을 공평하게 때리는 것 같은, 진자를 닮은 웃음소리가 그 애에게서 풍선처럼 터질 때마다. 의주는 조용히 이어폰을 꼈다. 이어폰 사이로 파고드는 그 애의 웃음소리가 의주의 왼쪽 귀와 오른쪽 귀를 똑-딱 두드리고 지나갈 때까지.

 

꼭 그래서 이샹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 아니다.

이샹을 싫어할 이유는 많았다.

 

이를테면, 이샹은 책상을 빼거나 의자에서 일어설 때 자주 의주의 걸상을 쳤다. 조금 거슬렸지만 심할 정도는 아니었다. 깜짝 놀란 의주가 눈을 치켜들면 그때마다 미안하다는 듯이 웃었으니까. 몇 번 눈이 마주친 후에, 의주는 이샹이 몸을 일으킬 것 같으면 조용히 책상을 뺐다. 의주의 그런 수고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샹은 건너편의 남자애와 얘기하면서 의주의 책상을 짚기도 했다. 의주는 제도 샤프를 움켜쥐고, 조용히 이샹의 손끝을 훔쳐보았다. 유달리 끝이 불그스름하고 두툼한 흰 손을.

 

이샹은 상체의 골조가 커서 움직임이 특히 잘 보였다. 그 애가 수업 시간에 짝꿍과 필담을 나누면서 몸을 수그릴 때나. 어깨를 가늘게 들썩이며 웃음을 참을 때. 1교시면 졸음을 참지 못하고 쏟아지듯 꾸벅거릴 때. 찌뿌듯한 목을 비틀며 뚝뚝거리는 소리를 낼 때. 의주는 어김없이, 그리고 너무도 쉽게 주의를 빼앗겼다. 한 번 필기를 놓치면 그냥 턱을 괴어 이샹을 관찰하기도 했다. 짝꿍과 무슨 재미난 얘기를 그리 하는지. 손톱에 컴퓨터 사인펜을 매니큐어처럼 칠 당하는데도 가만히 손을 내어주는 이샹. 손가락에 조그만 졸라맨을 그리는 이샹.

 

그리고 짝꿍이 발라주겠다며 든 틴트에 가만히 입술을 대주던 이샹을 보면서. 마침내 의주는 최초의 짜증과도 같은 감정을 느꼈던 것이다. 도톰한 윗입술에 퍼지던 발간 색소와 면봉 같은 솔에 눌리던 표피. 이샹은 친하지도 않은 의주를 돌아보면서 마구 웃었다. 나 이뻐? 그딴 걸 질문이라고 하면서.

 

이샹의 입술에 번진 색소는 다음 교시에 금방 흐려졌으나. 의주의 불만은 얼룩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왕이샹. 피어싱도 막 뚫고. 넥타이는 항상 어깨에 아무렇게나 걸어두고. 교칙을 지키는 것에도 일관성이 없고. 자기 지각하는 날에만 아무도 읽지 못할 한자 명찰을 달고. 여자애도 남자애도 가리지 않고 마음이 헤프고. 뭐든 다 자기 맘대로. 미래에 대한 대책 같은 거, 하나도 없겠지. 아무래도 상관없을 거야. 누군가의 본이 되어야 하는 압박감도. 평균은 실패라는 생각도 그 애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사실 알고 있었다. 이샹이 주머니에 항상 라이터를 넣고 다닌다는 것도.

 

비로소 의주는 이샹을 ‘불량'의 부류에 밀어 넣었다. 상스러운 주변 환경. 팽팽하게 부푼 풍선 같은 의주를 터뜨릴지도 모르는 바늘. 그래서… 피해야 마땅한. 혁상. 이샹. 니콜라스. 닉.

 

 

 

 

 

 

 

학생 징계 공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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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 학생은 학교 생활 지도 규칙(교내흡연)에 의거 처벌함

 

 

 

그 당시 학교에는 자주 가정통신문이 돌았다. 학교 근처를 빙 두른 벽돌 주택으로부터 항의 전화가 잦았다. 주택가 담벼락 아래 베이지색 교복을 입은 애들이 자꾸 꽁초를 수북하게 버리고 간다고. 교사들은 조례와 종례마다 담배가 얼마나 무익한지, 그러다 불이라도 나면 얼마나 큰 배상액이 나오는지 설명하곤 했다. 교사들은 몰라도 학생들은 범인이 누군지 다 알았다. 이샹과도 종종 공을 튀기는 무리다. 개중 몇 명은 징계 공고에 이름을 박고 교내 미화 봉사를 했다.

 

의주는 허울뿐인 공문 앞에 서서 이샹의 이름을 찾곤 했다. 니은부터 이응까지. 찾지는 못했지만. 담벼락 밑에 잔디처럼 무수한 꽁초 중에 이샹의 것도 있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이샹의 주머니에서 항상 네모나게 자국을 내는 라이터를 생각했다. 자율학습 시간에 빠져나와 주택가로 갔던 것도 그뿐이다. 10시까지 매일 공부는 하니까. 오늘은 조금 일찍 가고 싶었던 것뿐이다. 이샹은 자주 야간 자율학습을 듣지 않았고, 오늘도 짝꿍과 또 다른 색의 틴트를 바르며 노닥거리다 먼저 하교했다. 시야각에 꾸무럭거리는 이샹이 걸리지 않는 게 도리어 신경이 쓰여서. 의주는 조용히 모든 교재를 내팽개치고 나왔던 것이다.

 

교문을 조금만 벗어나면 주택가의 담벼락이 나왔다. 의주는 담벼락에 손끝으로 선을 그으며 걷다가, 집집의 간격이 참 좁아서 서로 간의 대화를 모두 들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소복하게 모인 꽁초를 발견하곤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발뒤꿈치를 세우고, 위태롭게. 어둑한 땅바닥을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이 중 이샹의 것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왜 나는 굳이 이샹의 것을 찾고 싶어 할까. 생각했다.

 

의주는 담벼락에 놓인 것 중 가장 긴 꽁초를 발견했다. 거의 장초에 가까웠는데, 필터에 빨갛게 틴트가 묻어 있었다. 이샹의 짝꿍이 그 입술에 발라주던 색과 비슷해 보였다. 의주는 아무 거리낌 없이 그것을… 주워들었다. 뜨거운 음식을 식히듯 필터를 입으로 여러 번, 정말이지 여러 번 불었다. 끄트머리가 채 타지도 않은 장초를 입가에 가져갔다. 필터를 앞니 끝으로 아주 살짝 물었다. 이샹이 피웠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더럽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뒤켠에는 일회용 가스라이터가 떨어져 있었다. 투명한 네온 핑크색 몸체에 돌체 노래방이라고 쓰여 있었다. 어떻게 켜는지 몰라서 한참 동안 휠을 만지작거렸다. 불을 대고 빨아들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어쩔 줄 몰라 휠만 손톱으로 득득 긁고 있을 때, 불쑥. 눈앞으로 불을 움켜쥔 큰 손이 나타났고.

 

- 빌려줄까?

 

파드득 놀뛰는 의주 뒤에 그 애가 서 있었다. 한 손은 주머니에 질러 넣고, 다른 손으로 휠라이터 불을 든 전학생. 여전히 어깨에 멋대로 넥타이를 넘겨 걸고. 그 애의 목소리는 지극히 태연했고, 리을을 흘리는 발음 때문에 순진하고 다정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정작 의주의 행동은 역하다는 듯 눈썹을 은은하게 찌푸리고 있었지만. 눈이 마주친 순간 뜨거운 돌을 삼킨 것처럼 귀가 홧홧해졌다. 다 보고 있었구나. 얼른 담배를 뱉고 싶었는데, 못난 짓을 하다 들킨 것처럼 보이는 게 더 싫었다. 의주는 놈이 든 일렁이는 가스 불 끝에 장초를 가져다 댔다. 확신 없이 숨을 들이키자, 빨갛고 동그랗게 불꽃이 피어올랐다. 곧장 발작적인 기침이 터졌다. 전학생은 그런 의주를 보며 비웃거나 한심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저 재미있다는 듯 빙긋이 눈을 접어 웃었다.

 

- 못 피우면서 왜 피워?

- ……너도 피우잖아.

- 내가?

- 아닌 척하지 마. 라이터도 들고 다니면서.

 

전학생이 고개를 기울였다. 들고 있던 라이터를 내려다보더니, 아직 열기가 남은 노즐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거의 닳지 않은 연료가 찰랑거렸다. 오해를 받는 것쯤은 익숙하다는 듯이, 유감없는 태도다.

 

- 바지 실밥 태우려고 산 건데.

 

진짜야. 나 옷 자주 자르거든. 집에 재봉틀도 있어. 전학생이 라이터를 다시 주머니에 넣으며 덧붙였다. 나 담배 냄새도 싫어. 그렇지만. 그 애의 대답을 믿기 싫었다. 의주가 주워 문 담배는 반드시 이샹이 피우다 버린 것이어야 했다. 비록 지금 제 눈앞에 선 그 애가 멀건 맨입술이라고 해도. 틴트가 모두 지워져 있다고 해도. 의주는 폐부를 비집는 기침을 참고 다시 꽁초를 입에 댔다. 그 애가 조용히 담배를 빼앗아 땅에 털었다. 땅으로 튀는 불씨까지 지근지근 밟았다.

 

- 배고픈가 봐. 자꾸 입에 뭐 물어.

- …….

- 우리 집 갈래? 이모가 루러우판 해준댔는데.

- 그게 뭔데.

- 한국말로. 돼지 덮밥…?

 

돼지 덮밥이라니. 돼지고기 덮밥이겠지……. 의주는 공깃밥 위에 올라간 귀여운 돼지를 상상했다. 상상하자 뭔지도 잘 모르는 그 음식이 당겼다. 그런가. 나 사실 배가 고팠나. 그렇게 생각하니 배가 고픈 게 맞는 것 같았다. 의주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다. 집이 어딘데? 짧은 물음에 그 애는 대답 대신 담벼락 너머의 주택을 턱짓했다. 여기. 꼭대기.

 

그러니까. 그때까지 걔와 의주의 교점이라곤 다 나눠준 유인물이 전부였지. 그 애는 자꾸 의주의 책상을 치는 앞자리의 전학생. 의주는 담배를 한번 피워보고 싶은 얌전한 부반장이었다. 걘 어머니가 말한 상스러운 불량에 편입된 일부여야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주는 전학생을 따라 벽돌 주택을 향해 걸었다. 골목길로 번진 땅거미에 나트륨등의 오렌지색 불빛이 홀씨처럼 번져 있었다. 그 애에게서 자라난 기다란 그림자가 의주의 신발코에 걸렸다. 의주는 그 그림자를 발끝으로 꼭꼭 붙들었다. 첫 담배 때문인가. 속이 물에 막 퍼뜨린 과일처럼 동동, 미식거렸다.

 

 

 

*

 

 

서른이 된 의주는 다시금 그날의 삐가리를 느낀다. 걸음마다 몸속 장기가 배에 실린 양 출렁인다. 주택을 둘러싼 낡은 담벼락이 눈에 들어왔다. 10여 년이 넘도록 그 담벼락에 얼마나 많은 낙서가 덧칠되었던가. 의주는 담벼락 벽의 글귀를 헤아린다. 이제는 이 동네를 찾아오지 않는 이들이 남긴 무수한 흔적을. 불량한 꽁초가 깨끗이 쓸린 바닥을.

 

뒷주머니에서 숨이 죽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낸다. 더는 남이 피우다 버린 담배를 줍지 않아도 떳떳하게 담배를 살 수 있게 됐다. 아무도 그를 혼내지 않는다. 여기서 꽁초 하나쯤 버린다고 해도, 공문에 이름이 붙을 일도 없다. 그를 발견해 줄 니콜라스도…… 더는 이곳에 없다.

 

“……배고프다.”

[나도.]

“넌 떡볶이 먹었으면서.”

[성장기라 상시 배고파.]

“성장기…… 하하. 그때 너희 이모가 해준 루러우판 맛있었는데.”

[그럼 찾아가서 해달라고 해. 이모는 주주라면 언제든 웰컴이야.]

“음…… 어디 계신지 몰라서.”

 

완곡한 진실이다.

의주는 그녀의 행방도, 생사도 알지 못한다. 미국 유학을 끝내고 입국한 후 백방으로 그녀의 소식을 찾았고, 그건 입사한 후까지 이어졌지만. 미추홀구의 주택에서 전출한 이후 그녀의 행방은 여직까지 묘연하다. 그나마 니콜라스와 그의 혈육을 기억하던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은 짐을 모두 빼고 홀연히 없어졌다고 말했을 뿐이다. 니콜라스에게 그런 불명의 불안까지 전하고 싶지 않아 최대한 우회적으로 대답했지만.

 

[그래? ……무사한 거겠지?]

 

니콜라스는 읽어냄에 재능이 있다. 시종일관 씩씩하던 목소리에 처음으로 흐릿한 안개가 꼈다. 걱정되겠지. 대만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다시 인천으로. 그들의 뒤를 쫓던 불행에 혹시라도 이모가 발목을 물리진 않았을지.

 

“아마 그러실 거야. 도망쳐서 잘 숨어 계실 거야. 나도 소식 알아볼게.”

[그렇구나… 그리고 이건 그냥 궁금한 건데. 주주.]

“…….”

[역시 나 죽은 거지?]

 

손끝에서 장초가 미끄러졌다.

 

세상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어떻게? 물음이 머릿속을 빙글빙글 맴돈다. 아직 그 장본인에게 죽음을 고백할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될 수 있다면 오래, 그리고 계속. 모르게 하고 싶었는데.

 

“왜, 그런 생각을…….”

 

안 돼. 니콜라스는 읽음이 빠르다. 이런 멍청한 말맺음이라면 벌써 대답을 읽어버릴 것이다.

 

[주주 목소리 들으면 알아. 날 그리워하는 것 같은데. 찾아가겠다는 말 절대 안 하니까.]

“…….”

[역시 천우징한테 잡혔어? 그 녀석 손에 죽은 거야?]

 

니콜라스가 묻는다. 자신의 죽음 같은 건 신경 쓰지 않는 듯, 여전히 상냥하고 어린 말씨로. 의주는 목울대를 몇 번 울렁였다. 기도의 점막이 끈적하게 협착한 것처럼, 자꾸 숨이 막힌다. 니콜라스가. 죽었다…… 는 걸. 이렇게 살아있는데도 죽었다는 걸…… 그의 죽음을…… 발음할 때마다 말 뒤로 일렬의 탄흔이 찍힌다.

 

“네가 죽은…… 건. 천우징이랑 관련 없어.”

[그럼 어떻게 죽었는데?]

“폭발 사고…….”

[폭발 사고?]

“내가 미국으로 가던 날에 네가…… 버스 정류장으로 나왔거든.”

[주주를 배웅하러?]

 

머리통에 칼을 저미는 것처럼. 기억의 뚜껑에 날이 닿는다.

 

“아니… 아마도 화를 내러.”

 

통조림처럼 억지로 입을 벌린 기억이 머릿속으로 난분분하게 쏟아진다. 서랍장에 쑤셔 넣고 몇 년이나 모르는 척했던 활자들. 8월 30일, 정류장 인근 폭발 사고. 건물이 붕괴. 정류장에 서 있던 시민 5명. 시신 전소……. 니콜라스에게만큼은 명확히 설명해야 한다. 그러니까. 그의 죽음에는. 어쩌면 의주가…….

 

“넌 죽기 직전에……. 나한테 엄청 화냈어.”

 

모든 것들이 삽시간에 의주의 틈을 파고든다.

 

지극히 사소했다. 별 일도 아니었다. 한 명만 참았어도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다. 말꼬리를 잡고 늘어진 건 의주 쪽이었고, 봐주지 않은 건 니콜라스 쪽이었다. 버스정류장으로 떠나기 직전까지 니콜라스에게선 전화 한 통 오지 않았다. 화가 나서 유심칩을 뽑아버렸다.

 

리무진 트렁크에 채웠던 28인치 캐리어 두 개. 굳이 배웅까지 나올 필요는 없다고 했으니 니콜라스가 정말 정류장에 나타날 줄은 몰랐다. 안녕이라도 건네러 왔나 했는데, 버스 창밖에서 고함을 내질렀지. 그 목에 선 핏대. 리무진 안의 드문 인적이 모두 쳐다볼 만큼 컸던 목소리. 사나워진 얼굴과 온통 빨개졌던 귓바퀴.

 

야! 주주! 다시 만나면 너 울려줄 줄 알아! 물어 뜯어버릴 거야! 두고 봐!

 

버스 밖에서 니콜라스는 화를 내고 있었다. 의주가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어쩌면 그 말을 하러 마중길을 달려 나온 것 같았다. 고작 그 말을. 마지막으로 헤어지는 장면을 마무리할 때 그보다 좋은 대사를 준비했을 수도 있는 거잖아. 더 듣고 싶지 않았다. 떠나는 버스의 창문을 닫고 헤드셋을 썼다. 모든 것들이 차단되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소리치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그 너머를 들으려고 하진 않았다. 열아홉의 의주는 고집이 셌고, 그래서 어리석었다.

 

버스가 모퉁이를 돌며 재생되던 노래를 기억한다. 그 또한 니콜라스가 알려준 노래였으니까. 버스가 모퉁이를 돌던 순간, 헤드셋을 희미하게 뚫고 들어오던 먹먹한 소음도. 늘 그 애가 듣던 커다란 음악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일부여야 한다. 그것이 그 애의 단말마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인간은 견딜 수 있는 고통만큼만 상상해야 죽지 않을 수 있다. 그 너머의 구도를 잡는 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다. 의주는 언제나 자신이 가진 내구력 안의 것들만을 원했다.

 

“네가 죽었다는 걸 나는 아주 늦게 알았어. 그래서 믿겨지지가 않아서.”

 

의주는 어두운 주택가의 길에 바르고 꼿꼿하게 서 있다. 울지 않는다. 함부로 신파에 젖지 않는다. 그는 모기에 물리지 않는 놈이니까. 피도 눈물도 없으니까.

 

“그래서, 기사를 찾아봤는데. 거기 실린 사건 현장 사진에.”

 

온몸이 떨리고 손발이 주검처럼 차가워지더라도.

 

“피 묻은 네 신발이……”

 

의주는 울지 않는다.

다만 견딜 뿐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순간이 영원처럼 이어지던 그 간난한 시기. 11년간 변의주는 그를 덮쳐오는 치명적인 감정에 익사하지 않도록 발버둥을 쳐왔다. 돌이킬 수 없이 후회할 것 같을 때마다 생명줄처럼 붙들 주문이 필요했다.

그의 숨을 이어준 언령은 이런 문장이었다:

 

그날이 니콜라스와의 마지막이라는 걸 알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었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던 거야.

 

 

 

 

 

 

 

13:07:31 ━━━━━━━━━━━━━ 24: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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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시간

 

종이컵 전화기를 연결한 실처럼, 한동안 침묵이 길게 늘어졌다.

 

이샹은 고요해진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뜨끈한 기기로 네 시간을 넘어가는 통화 시간이 찍혀있었다.

 

……늦었으니까. 들어가.

 

내가 들려준 말은 너무 신경쓰지 말고… 라고. 누구보다도 신경쓰는 목소리로 중얼거린 의주가 통화를 먼저 끊었다. 담담하던 목소리가 사라지자 세상이 죽을 듯한 적막으로 빠져들었다. 이샹은 학교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오렌지색으로 아름답게 물들어 있던 건물이 스산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주인을 잡아먹고 낡아온 폐가처럼.

 

짐작대로, 11년 후 의주의 세계에서 이샹은 죽은 모양이다.

 

처음엔 단순히 멀어진 건 줄 알았으나, 이모가 어디 계신지 모른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렴풋이 깨닫게 됐다. 의주는 니콜라스를 찾아가겠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 목소리에 묻어나는 그리움은 먼 바다를 건너온 열대 바람보다는 깊은 땅속의 공허함이 배어 있었다.

 

의주는, 이샹이 죽기 직전에 화를 냈다고 했다.

 

화를 냈을 리가 없다. 이샹이 의주에게. 눈앞의 의주가 마지막 의주라는 걸 알면 결코 화냈을 리가 없었다. 설령 진짜로 화가 났어도 그랬을 리가. 그 모습을 의주가 혼자 11년이나 잊지 못하고 괴로움에 몸부림치게 뒀을 리가…

 

“철 들어라, 이샹.”

 

갑갑한 늑골 위를 주먹으로 퍽 때렸다. 아무리 빡쳐도 그러진 말아야지. 의주가 영영 기억할 마지막 모습인데. 좋은 걸 쥐여 보내야지. 소원 사이트 채팅창에는 의주가 통화를 끊고 보내준 긴 텍스트가 남아 있었다. 기사였다. 의주는 너의 사고에 대한 기사라면서 신문기사를 요약해서 보내주었다.

 

상대: 읽어둬. 알아야 피하잖아.

 

 

대낮 도심 공사장에서 건물 붕괴… 원인은 가스통 폭발

8월 30일 버스 정류장 인근 공사 현장에서 폭발 붕괴 사고가 일어났다. 사고 원인은 용접기의 불꽃이 가스통에 튄 것으로, 폭발로 인해 건물이 붕괴되며 정류장에 서 있던 시민 5명이 깔려 숨지고 13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연쇄적인 폭발과 화재로 인해 구조 작업이 지연되면서, 현장에 남겨져 있던 사상자들의 시신이 거의 전소되었다. 여전히 신원 파악에 난항을 겪고 있다고 전해진다.

 

 

자신이 죽었다는 기사를 읽는 건 기분이 이상했다. 가슴 한 켠이 조금은 선득하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벌써 그 고통이 들이닥치는 느낌이었다.

 

후. 깊은 숨을 내쉬었다. 두근거리던 심장이 차츰 잦아든다. 그래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는지 아니까 편한 부분도 있다. 이샹은 3미터쯤 뒤에서부터 느리게 서행하는 검은 승용차를 흘끗 돌아보았다. 그 차는 주학동 주택가 골목에 들어선 순간부터 이샹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그의 생사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끼익. 철제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창백한 현관등이 그를 반긴다. 지하로 계단 네 칸 아래 위치한 반지하 투룸. 집안으로 들어서면 좁아터진 신발장 한가득 운동화들이 마른 오징어처럼 뒤집혀 걸려 있다. 조던이 가장 높은 곳에 걸려 있고, 아디다스 이지부스트나 슈프림, 뉴발란스도 있었다. 막 이 집에 드나들기 시작했을 때 의주가 물어봤던 적이 있다. 너 맨날 돈 없다더니, 왜 이렇게 비싼 신발이 많아? 그 말을 듣고 이샹은 웃었다. 나 슈푸어야.

 

무언가를 많이 가진 건 빈곤과는 상관이 없다. 그 산더미 같은 무언가를 제 용도로 쓸 수 있는가가 빈부를 가른다. 집에 1억이 쌓여 있어도 그게 남의 돈이면, 함부로 쓰지 못하면 가난이다. 이샹이 애지중지 모은 신발은 언젠가 값이 오르면 팔만한 것들로 그가 신기 위해 산 게 아니었다. 신기 위해 있는 물건인데 신는다는 용도로 쓸 수 없다. 그래서 이샹은 그다지 여유롭지 않은 것이다.

 

물론 이샹은 자신이 뼈 아플 만큼 가난하다고는 생각하진 않았다. 남들보다 많이 가졌고, 함부로 꺼내 쓸 수 있는 게 그의 내면에 가득했다. 이를테면 사랑.

 

“주주. 집에 있어?”

 

응. 방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방문을 열자 책상에 앉은 의주의 모습이 보였다. 영어 토익책을 풀고 있었다.

 

“이모는?”

“방금 나가셨어. 부엌에 완탕국 끓여두셨으니까 데워 먹으래.”

“에이. 밥 같이 먹고 싶었는데.”

 

의주가 쥔 볼펜이 노트 위를 사각사각 걸어간다. 요새 의주는 볼 때마다 공부 중이었다. 미국 유학이 코 앞에 닥쳐서 그런 거겠지. 이해하지만, 바보처럼 함께 놀러다니던 시간이 그리운 건 사실이다. 게임을 조금 덜하면 될 텐데. 시간을 죽이는 일을 줄이고 이샹과 같은 시간을 살아주면 좋을 텐데.

 

의주의 왼손은 노트를 감싸고 있었다. 그 위를 오른손으로 가만히 덮었다. 펜을 쥐지 않은 쪽의 손을 잡았는데도, 사각이던 펜이 멈췄다.

 

“뭐 하는 거야. 니콜.”

“…그냥. 이러고 싶어서.”

“실없어….”

 

작게 중얼거린 의주가 손을 쓱 빼냈다. 노트에 고개를 옴쭉 숙이고 이샹을 외면하는 뒤통수. 그 동그랗고 풍성한 머리꼭지를 보다가 가만히 제 귓바퀴를 매만졌다. 뜨겁다. 이번엔 의주의 귓바퀴를 만졌다. 아, 왜 이래. 의주가 또 밀어냈다. 의주도 이만큼 뜨거웠던 것 같은데.

 

“오늘 집 오는데. 까만 차가 따라왔어.”

“뭐?”

 

의주가 그제야 번쩍 고개를 든다. “그 사람이야? 조폭들이 따라온 거야?” 새된 목소리로 묻는 의주는 이샹보다 더 놀라보여서, 안심시키듯 미소를 지었다.

 

“아니. 형사더라.”

“형사…? 형사가 널 따라왔다고?”

“이 동네 치안이 안 좋잖아. 얼마전에 살인미수 사건이 있었는데. 내가 시꺼멓게 입고, 후드 모자 푹 눌러쓰고 다니니까. 용의자인 줄 알았대.”

“……그래도 그렇지. 고등학생을 어떻게 용의자로 봐. 아무튼 조폭은 아니어서 다행이다.”

 

이샹은 말없이 의주의 손을 꽉 감싸 쥐었다. 이번에 의주는 손을 빼지 않는다. “많이 놀랐구나. 니콜.” 중얼거리면서 손을 꼭 맞잡아 왔다. 멋대로 속을 짚어줘서 변명할 필요가 없었다. 숨어 다니는 놈들은 다 죄인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자유라는 건 티끌 하나 안 묻는 놈들의 전유물이라고 쉽게들 여기고 마니까.

 

용도를 분리하기 좁은 방에는 책상과 침대가 가까이 놓여 있었다. 의주 뒤에 놓인 침대에 드러 누웠다. 유튜브 검색창에 시간 여행을 검색해 보았다. 아인슈타인. 상대성 이론. 타임 패러독스가 어쩌구저쩌구. 꽤 흥미로운 이야기와 이론들을 설명하는 영상들은 종국에 가서는 비슷한 결론을 내놓는다. 과거는 바꿀 수 없습니다. 다음 영상을 재생하면서 의주에게 말을 걸었다.

 

“주주. 그거 알아? 시간은 높은 곳에서 더 빨리 흐른대.”

“진짜? 높이에도 시차가 있어?”

“완전 쬐끔. 산 위에서 시간 재면 평지 시간보다 더 빨리 흐른대. Dr. Einstein이.”

“그럼 난 바닥에 붙어 있어야겠다. 시간 빨리 가는 거 싫어.”

“난 누워 있고 주주는 앉아 있는데. 주주가 나보다 더 빨리 사네.”

“그래. 조만간 내가 니콜 나이 넘어볼게. 형이라고 불러.”

 

침대에 누운 채로 의주를 구경했다. 학습지에 고개를 드리운 의주의 옆모습은 정물과 같다. 누가 그려둔 사과와 물병처럼 제자리에 얌전했고, 항상 비슷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얌전한 것들은 건드려서 움직여 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주주.”

“자꾸 방해하면 나 학교 가서 자습할 거야….”

“만약에 과거로 갈 수 있으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어?”

 

걸려온 질문은 반드시 답해주는 게 의주의 상냥이다. 비록 답이 로딩되기까지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펜을 굴리던 의주가 톡톡. 펜 끝으로 노트를 두드린다.

 

“딱히 없지… 사람은 현재를 살아야 하는 거잖아.”

“만약 내가 죽으면?”

“그런 생각도 하지 마. 니콜. 너 죽으면 죽여버릴 거야.”

“어… 그래. 암튼 그때로 돌아가진 않는단 거지?”

“몰라. 생각 안 해. 너 안 죽을 거니까.”

 

의주는 귀에 이어폰을 꼭 끼워버렸다. 한때는 한짝씩 자주 나눠 끼우곤 했는데. 요즘 들어 저 이어폰은 의주만 편애한다. 이샹을 의주에게서 차단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이샹 혼자 남겨진 적막 속. 아래층에 사는 아저씨가 틀어둔 라디오인지 TV인지의 음량이 넘어온다. 우리는 모두 때가 되면 천국에 갑니다. 하늘에 올라 그분 곁으로 돌아갑니다… 일정한 톤으로 읊어지는 교리를 자장가처럼 들으면서, 이샹은 머리맡의 눅진 새우깡을 하나 입에 넣었다.
 

천국은 시간 진짜 빠르겠다.

 

 

 

 

바깥공기를 쐬기 위해 옥탑방의 문을 열고 나왔다. 현관문 한짝을 경계로 안과 밖의 밤은 색감부터가 다르다. 도리어 밖이 더 사늘한 바람을 머금은 옥색의 여름이다. 이샹은 덜 마른 세탁물처럼 난간에 걸린 채 야경을 응시했다.

 

- 네 신발이……

 

“주주한테 또 불편한 신발을 줘버렸네.”

 

혼잣말을 중얼거려 보았다. 나는 신기 좋은 거. 신으면 걸음이 가뿐해지는 거만 신겨주고 싶었는데.

 

이샹은 천국에 갔을까?

그건 의주조차 모를 것이다.

그가 죽었다는 사실보다도, 제 죽음에 대해 말하는 의주의 태도에 이샹은 놀랐다. 의주는 힘겹게. 무척이나 힘겹게 그가 죽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미 다 봉합된 검은 실을 뜯어 다시 상처를 벌리듯 말의 마디마디에서 쇠맛이 났고, 피를 토하는 것 같았다. 누구라도 그 목소리를 들으면 알 수 있었다.

 

많이 힘들었구나.

내가 죽은 거로 그렇게까지 힘들었구나.

내가 주주한테 그만큼…… 별 거였구나.

 

 

 

 

 

 

 

 

 

 

*

 

 

 

마른 여름날이었다. 코앞에 닥친 장마의 흔적은 오간 데 없고, 어디든 쉽게 불씨가 옮겨 붙을 날씨.

 

쟤 담배 줍네.

 

담벼락 앞에 웅크린 등을 처음 발견했을 때, 이샹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이삭도 아니고 꽁초를 저렇게 힘겹게 줍네.

 

웅크려있던 등이 펴진다. 정수리가 쑥 올라왔다. 분수처럼 쏟아지는 숱에 끝단에서 살짝 엉기는 머리카락. 보는 순간 이샹은 곧바로 알아보았다.

 

쟤 변의주네.

 

 

 

 

늘 라이터를 들고 다니면서도, 이샹이 누군가에게 라이터를 빌려준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경계심이 많은 생물일 줄 알았는데. 그 애는 밥 먹고 가라는 말에 어떤 의문도 없이 따라왔다.

 

이샹은 이모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이모는 이모가 아닌 누나 정도로 보일 만큼 젊은 외모를 지니고 있었는데, 이샹 못지않게 쾌활하고 명랑한 성격이었다. 그녀는 이샹이 말도 없이 데려온 의주를 굉장히 반겨주었다.

 

- 아니, 이샹! 집에 친구를 데려온 건 처음이잖아.

- 이모. 그렇게 말하면 얘가 나 친구 없는 줄 알아.

 

이샹은 툴툴거리면서 이모가 상을 차리는 걸 도왔다. 의주도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고 일어나서 서성서성 이샹을 따라다녔다. 수저 어딨어요? 그냥 앉아 있어. 손님은 아무것도 하는 거 아냐. 그럼 물이라도 제가 따라놓을게요. 앉아 있으라니까. 이샹! 너도 그냥 앉아 있어. 가재도구가 여기저기 널린 좁은 마루에 개다리소반을 펴놓고, 밥에 돼지고기 고명을 덮은 루러우판을 한 그릇씩 비웠다. 의주 마음에 들까 싶었는데. 맘에 들어하는 것 같았다. 장조림 같을 줄 알았는데 조금 다르다고.

 

의주가 다 먹기를 기다렸다가 곧바로 설거지를 했다. 고무장갑을 집게에 걸어놓고 돌아오자, 의주가 신기한 눈으로 이샹을 쳐다보았다.

 

- 너… 생각보다 소문이랑 다르네.

- 소문 어떤데?

- 막… 부산에서 한 따까리 했다고.

- hantakari?

- 너 노는 애들이랑도 맨날 공 차러 나가잖아… 난 그래서 너도 담배 피울 줄 알았어.

- 전학 원래 자주 해. 삼합회한테 찍혀서 평생 도망 다녀야 하거든.

 

의주는 농담이라 여기는 거 같았다. 이샹은 웃으며 부연했다. 진짜야. 이모가 남자 복이 없어서……. 누가 남자 복이 없어! 마침 사과를 깎아들고 오던 이모가 이샹의 뒤통수를 때렸다. 그녀는 잘 닦인 상에 과일 접시를 놔주면서 이샹에게 여상히 말을 건넸다.

 

- 他是可靠的人嗎? 이 애는 믿을만한 애니?

- 我也不確定, 不過他不擅長做些壞事的. 그건 모르겠는데. 나쁜 일에 서툰 애야.

 

의주는 자신을 두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나누는 그들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앉지도, 서지도 못한 엉거주춤한 자세로, 제가 여기 있어도 좋은지 모르겠다는 애매한 미소. 그것은 제자리를 벗어나본 적 없는 사람들이 지니는 특유의 어색함이었다. 그 애를 머리부터 쭉 훑던 이모가, 돌연 짝 손뼉을 마주쳤다.

 

- 어머. 너 키가 정말 크구나?

 

 

 

 

이모는 기어코 의주에게 밥값을 시켰다. 어제부터 화장실 전등이 나가서 오늘 새 전구를 사왔는데, 이 집엔 밟고 올라갈 발판이 마땅찮아 전구를 갈기가 난처했던 차라고. 이샹 친구가 키가 크니까, 도와주면 참 좋겠다고. 거절하기도 민망한 투로 부탁을 했다.

 

할 거면 아침에 하지. 캄캄한 저녁에 무슨 손님한테 이런 걸 시켜. 이런 건 나도 할 수 있는데…. 화장실 입구에 기대선 이샹은 작게 투덜거렸다. 이샹에게는 휴대폰으로 손전등을 켜서 의주를 비춰주는 임무가 맡겨진 차였다. 난 좋은데. 왜. 의주는 까치발도 안 서고 전등 갓을 떼어냈다. 이샹을 돌아보는 눈이 조금 으쓱했다.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애였다. 원래 그런 애였는데 이샹이 여태 몰랐던 걸 수도 있다. 이샹은 늘 끓고 있는 의주만 보았으니까. 식었을 때 그 애가 어떤 모습인지는 몰랐으니까.

 

불 꺼진 화장실은 어두웠다. 금이 많이 간 흰 타일들은 손바닥만 한 창문에서 스며드는 마지막 황혼으로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붉은 어항 같은 화장실. 이샹이 든 손전등의 창백한 빛만이 간신히 의주가 가야 할 방향을 비추고 있었다. 붉은 의주가 희게 질린 전구를 향해 팔을 뻗었다. 다섯 가닥 손가락이 둥근 백열전구를 감싸쥐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돌린다. 끼릭끼릭, 낡은 전구 돌아가는 소리가 적막을 비튼다.

 

저기. 이렇게 하는 거 맞아?

의주가 물었던 것 같다.

나 사실 이런 거 처음 해 봐. 너가 알려줘야 해.

의주는 그런 말도 했던 것 같다.

어. 그대로 돌리기만 하면 돼.

이샹의 이름은 저기도 너도 아니었다.

 

저기도 너도 아닌 이샹은 손전등이 비추는 의주를 보았다. 그 애가 걸친 풀 먹인 셔츠가 길게 비틀렸다. 판판하고 하얀 굴곡 사이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주름마저 부러질 것처럼 곧다고, 이샹은 생각했다. 의주는 확실히 키가 컸다. 바르게 서면 이샹의 눈높이에 의주의 목덜미가 걸렸다. 꼿꼿하게 뻗은 뒷목은 늘 반듯하고, 까무잡잡하기보다는 짙었고, 불필요한 힘으로 늘 팽팽했다. 쥐면 쨍 소리가 나게 깨질지도 모르겠다는 긴장감에 자꾸 눈이 갔다. 편백나무처럼 곧은 목덜미에는 송글송글 땀이 맺혀 있었다. 그중 한 방울이 목줄기를 따라 느리게 미끄러졌다. 미끄럼틀을 타듯.

 

한 방울의 느리고 긴 미끄러짐. 그것이 이샹의 망막에 깊은 물길을 남겼다. 그 순간을 1년이나 잊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그때 이샹은 알지 못했다. 그땐 그저 거기에 손을 대보고 싶었다. 땀방울처럼 이샹의 손도 목줄기를 따라 죽 미끄러질 것 같았다. 건드리고 싶어서 손끝이 꿈틀였다.

 

- 삼합회한테 찍혔다는 거, 거짓말이지?

 

전구를 돌리던 의주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이샹은 뒷목으로 뻗던 손을 교복 바지 주머니로 질러 감췄다.

 

- 왜 그렇게 생각해?

- 믿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냐? 삼합회한테 쫓긴다면서 학교는 어떻게 다녀.

- 인생은 달력마다 반드시 그때 해야 할 일이 있대. 그래서 난 꼭 학교 다녀야 한대. 이모가.

- 그만 해. 진짜로 슬슬 속을 거 같아…

 

땅거미가 금세 물러간 창밖은 검었다. 이샹은 천천히 손전등을 껐다. 화장실이 새카만 어둠에 잠겼다. 길쭉한 그림자가 잠깐 멈칫한다. 그러나 이윽고 다시 움직인다. 어둠 속에서 전구 돌아가는 소리가 끼릭끼릭 들려왔다.

 

이 애는 믿을만한 애니?

의주는 꽁초 하나도 눈치를 보면서 줍는다.

앞이 안 보여도 시킨 일을 묵묵히 한다.

변의주는 그런 애인 것 같다.

 

그런데. 딱히 그래서는 아니고. 그냥 충동이다. 꽁초를 줍고 있던 의주가 이샹에게 발각당했으니까. 그도 발각당해야 수지가 맞다고 생각했다. 어둠 속에서 이샹은 느릿느릿 한국어를 골랐다. 아마 이 나라에 온 뒤로 가장 많은 말을 했다.

 

- 이모가 배우였어. 작품 잘 골라서 운 좋게 확 뜬 신인 영화배우. 그런데 대만 연예계 쪽은 삼합회들이 꽉 잡고 있거든. 이모 주가가 올라가니까, 어느 날 한 남자가 찾아왔어. 천우징이라고. 잘 모르는데 삼합회 쪽에 얽힌 거물이래. 그 남자가 울 이모한테 꽂혀서, 거지 같은 요구했는데. 이모가 거절했다나봐.

- …….

- 천우징은 돈 빌려가서 안 갚은 놈보다, 자기한테 돈 안 빌려준 놈을 더 싫어한대. 그니까… 자기 명예. 체면. 자존심. 이런 게 무엇보다 중요한 자식인 거야. 겨우 자기 부탁 거절했다는 이유로, 걔는 이모 집안을 쑥대밭으로 뒤집어놨어. 잡히면 죽이겠다고 찾아다녀서. 이모는 내 손 잡고 여기로 도망쳤어. 한국으로.

- …….

- 이모는 한국 와서 새 신분을 샀어. 근데 이모를 못 찾으니까, 천우징이 이번엔 내 뒤를 캐고 다녔나봐. 어머니 돌아가시고 이모가 나 입양했거든… 부산 쪽 학교 다닐 때, 하굣길에 중국어로 말하는 놈들한테 한번 납치당할 뻔한 적이 있어. 그 뒤로 그냥. 주기적으로 전학 다녀. 한 곳에 머무는 것보단 늘 떠날 수 있게.

- …….

- 믿기 싫으면 믿지 마. 근데 진짜야. 나 그거 찍을 수 있어. 그거. 구세영이 알려준 건데. 한국에서는 맹세할 때 새끼손가락 이마에 대고 엄지에 혀 댄다던데.

 

의주는 말이 없었다. 전구 돌아가는 소리는 한참 전부터 멎어 있었다. 가만히 어둠 속에 정지한 그림자를 대신해서, 이샹은 팔을 뻗어 스위치를 켰다. 전구의 빛이 팟 들어왔다.

 

화장실이 하얗게 밝아졌다. 타일 곳곳에 흰 불빛이 달라붙어 번들거리는데도, 의주의 눈만이 감광제를 바른 양 어두웠다. 이샹은 의주의 눈을 보며 카메라의 렌즈를 떠올렸다. 캄캄한 구멍 너머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저 쪽에선 이쪽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을. 의주의 시선이 니콜라스의 눈과 얼굴, 손, 발끝을 궁글릴 때마다, 시선에 달린 아주 작은 손들이 그의 표면에 어두운 도료를 덧바른다. 함께 어둠으로 흠뻑 젖는다. 밤의 정서가 된다.

 

저 눈에 빛이 괴는 걸 보고 싶다.

전구를 갈듯이 불을 켜볼 수 있다면.

 

하얗게 부활한 백열등 아래서 한참 눈을 마주보았다. 피하지 않고 받아주던 의주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면 그런 식으로 맹세하는 거 아냐. 아무리 엠창 학교 다녀도 그러면 안 돼.

 

의주는 이샹에게 나쁜 말을 정확하게 가르쳐준 첫 번째 친구였다.

 

 

 

 

 

 

왕이샹의 신발장에는 신발이 잔뜩 있었다. 지네보다 신발이 많았다. 사정이 넉넉치 않은 집인데도 이모가 이샹의 신발 수집을 묵인하는 것은 생활에 보탬이 되기 때문이다. 이샹이 이 집에서 가장 깔끔하게 꾸며둔 신발장을 구경하던 의주의 눈이 반짝였다. 잘 빛나지도 않는 눈이 한 번 빛나니까 구슬 같다.

 

- 부럽다. 우리 부모님은 운동화를 사주지 않거든.

- 왜?

- 뛰어놀기 좋은 신발이라고. 그런 걸 신겨주면, 내가 공부 안 하고 놀러다닐 줄 알았나봐.

 

의주의 신발을 보았다. 반들반들 윤 나는 가죽 로퍼가 신겨져 있었다. 뛰어놀기는커녕, 의주의 하얀 양말에 옅은 피가 배어있는 게 보였다. 양말 벗어봐. 괜찮아. 벗어. 이샹은 대일 밴드를 가져다 의주의 뒤꿈치에 붙여주었다.

 

뒤꿈치가 다 까지도록 불편한 신발. 얘 부모님은 한번이라도 얘 발을 본 적 있을까. 손아귀 한 줌에 잡히고도 남을 얇은 발목이 피를 흘릴 때 한번이라도 밴드를 발라준 적 있나.

 

- 아. 이거 되게 예쁘다…

 

의주는 신발장 가장 위에 뒤집혀 있는 모래색 운동화가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이샹은 여기 신발의 대부분이 리셀을 위해 보관해둔 한정판 새 신발들이며, 네가 만지고 있는 그 모래색 나이키는 프리미엄이 붙어서 지금도 수백만 원을 호가한다거나, 복각만 안 되면 더 비싸게 팔릴 수도 있는 절판 신발이라는 소릴 굳이 하진 않았다.

 

- 마음에 들면 가져.

 

대신 그렇게 말했다. 신발을 만지던 의주가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 정말?

 

웃을 때 이목구비가 죄다 동그래진다. 입꼬리는 동물 꼬리처럼 말리고, 백건처럼 가지런한 치아가 명랑하게 열렸다. 저런 얼굴을 볼 수 있는데 운동화를 사주지 않는 의주네 부모님이 정말 이상했다. 보기만 하면 수백만 원 안 아까울 텐데.

 

옥탑방의 단점 백 가지를 견디고 나면 탁 트인 옥상을 아무 때나 누릴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새 신발을 신은 의주는 초록색 우레탄 바닥에 고인 물을 밟지 않도록 조심조심 걸었다. 이샹은 이모가 담배를 피울 때 쓰는 접이식 의자를 펴서 의주를 앉혔다. 너는 어디 앉아? 난 바닥에 신문 깔고. 나한테 의자 양보하는 거야? 의주는 키 커서 바닥 안 어울려. 그 말에 의주는 보란듯이 의자를 치워버리고 이샹이 앉은 신문지에 엉덩이를 붙였다. 의주, 은근히 오기 있다.

 

둘은 신문지를 깔고 앉아 이어폰을 나눠끼고 노래를 들었다. 팝송으로 꽉 찬 아이팟은 이샹 거였고, 노래의 베이스를 잘 잡아준다는 좋은 이어폰은 의주 거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듣는 노래는 각자에게 낯설었다.

 

- 와. 이 이어폰 진짜 신기하다. 맨날 듣는 노래인데 되게 다르게 들리네. 귓구멍이 둥둥 울려.

- 너처럼 하드락 좋아하게 생긴 애가 아리아나 그란데를 듣는 게 더 신기해.

- 나 관상이 하드락이라는 말 처음 듣는데… 의주는 노래 뭐 듣는데?

- 나… 그냥 애들이 틀어놓는 거.

- 취향 없어?

- 없는 줄 알았는데. 네가 듣는 노래들은 좋은 거 같아. 취향 훔칠게.

- 도둑질 나빠.

 

아이팟에서 노래가 한 바퀴쯤 돌았을 때쯤, 머리 위로 붉은 개울처럼 흐르는 노을을 보던 의주가 말했다.

 

- …넌 대단한 거 같아.

- 왜?

- 그냥. 무서운 놈들한테 쫓겨 다닌다면서. 신발들을 모으고. 좋아하는 노래들을 듣고. 나랑 이러고 있고……

- 너랑 이러고 있는 게 뭔데?

- ……그냥. 이러고 있는 거.

 

붉은 노을의 끝자락이 보랏빛 밤의 경계에서 넘실거렸다. 이샹은 의주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애의 밤을 닮은 눈에도 빨간색이 고였다. 빨간색은 가장 멀리까지 보일 수 있는 색이랬는데. 먼 우주에서도 이 눈을 보고 있는 놈이 있을지를 의문하면서. 이샹은 여상하게 웃었던 것 같다.

 

- 쫓기면서 살면 좋은 것도 있어. 항상 필사를 다 하게 되거든. 매번 마지막이라 생각하니까.

- 필사… 처절한 느낌이네.

- 그런가. 난 태평한데.

- 그래 보이긴 해.

- …….

- 아. …곧 어머니가 데리러 올 시간이야.

 

중얼거리는 음성이 울적했다. 집이 아니라 어디 노역장으로 가야할 시간인 것 같았다.

 

- 가기 싫다.

- …….

- 이런 집에서 살고 싶다. 나도.

 

철 지난 꽃처럼 고개를 수그린 의주를 보았다. 이샹은 또 손끝이 간지럽다. 목을 주물러주고 싶다. 주주가 보는 이런 집은 어떤 집일까. 구석마다 풀지도 않은 짐 박스들이 후줄근하게 쌓였고, 벽면은 덕지덕지 발라둔 영화 포스터로 가득하고, 돈벌레나 바퀴벌레는 월세도 없이 동거중. 가끔 환풍기에서 쥐 발소리가 들리고. 누나처럼 보이는 이모가 있고. 마른 오징어처럼 뒤집어 걸린 운동화들이 즐비하고. 화장실은 아직도 알전구를 쓰고. 개다리소반에 더운 밥이 비좁게 차려지는 집. 이샹이 사는 집.

이 집에 모기 많이 나오는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의주가 작게 웃는다.

 

- 괜찮아. 나 잘 잡아. 잘 물리지도 않고.

- 살래?

- 하하. 월세 얼마 낼까?

- 오천만 원.

- 아직 한국 물가 잘 모르네.

 

이샹이 있는 집.

그것은 의주가 살고 싶어질만한 집.

 

 

 

 

다음날도, 이샹은 집에 의주를 초대했다. 이샹이 머무는 좁은 방 한 편에는 쌓인 짐들이 사라지고 대신 깨끗한 책상이 놓여 있었다. 의주를 보면서 책상을 손마디로 퉁 두드렸다.

 

- 여기 네 책상.

- 뭐?

- 그리고 이건 집 열쇠.

- 집 열쇠? 이 집 열쇠?

- 어. 너 꺼.

 

열쇠를 짤랑 던져주었다. 그것을 반사적으로 받으면서도, 의주는 이해가 잘 안 간다는 표정으로 책상과 열쇠를 번갈아보았다. 이샹은 친절하게 덧붙였다.

 

- 이런 집에서 살고 싶다며. 살고 싶을 때 오시라고.

 

의주는 당황한 미소를 머금은 채 멀거니 열쇠를 내려다보았다.

 

- …그냥 한 소리였는데. 겨우 그 말로 내 책상을 샀다고? 그것도 네 방에?

- 사실 산 건 아니고. 이모 친구한테 공짜로 받았어.

- 나 오천만 원 없어.

- 그럼 모기 오천만 마리 잡아줘.

- 우리, 그렇게 친하지도 않은데…….

- 와. 나만 친구로 생각했어. 난 주주 담배 피운 것도 안 꼬랐는데.

 

들으란 듯이 투덜거려도 의주는 가만히 서서 책상만 보고 있었다. 멋쩍음을 감추려고 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양말 신은 발끝으로 마룻바닥을 툭툭 후비면서 중얼거렸다.

 

- 학교 끝나고 집 갈 시간에. 너 가고 싶은 집 가라고. 이유 안 붙이고 그냥 막 오라고. 이모도 주주 좋아하니깐.

- ….주주?

- 친해지려고 애칭 붙여봤어. 대만에선 이름 끝에 두 번 부르면 애칭.

- 너 원래 그래? 이렇게 성큼성큼 가까워지고… 그래?

- 아니. 주주만.

- 내가 편해서?

- 편해 아니고 편애하려고.

 

의자 등받이 너머로 몰래 훔쳐봐온 의주는 꼭 시키는 거 잘하려고 태어난 애 같았다. 누가 리모콘을 쥐여줘야 움직이는 애. 그로 인해 누구든 충만함을 안겨주는 애. 그런 의주에게는 어디든 자기 집이 아닌 곳이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 그런 곳을 집이라고 불러보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샹은 열쇠를 복사했다. 책상을 들였다. 좁은 둥지에 의주를 앉힐 더 좁은 둥지를 마련했다. 집은 아니어도 내 자리. 의주가 생각하는 내 자리라는 게 되었으면 했다. 새 책상을 내려다보던 의주가 천천히 회전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의자를 한바퀴 빙 돌리자 의주도 빙 돌아간다. 옆모습. 폭닥한 뒤통수. 다시 옆모습. 다시 앞모습으로 돌아왔을 때. 의주는 좀 바보처럼 웃고 있었다.

 

- 너 정말 막무가내구나.

 

막무가내. 나중에 사전으로 찾아보니 이샹도 아는 단어였다. 无可奈何. 달리 어쩔 수 없다는 뜻이더라. 달리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었다. 의주가 먼저 그러고 있었으니까. 이샹은 달리 어쩔 수 없었다. 의주를 건드리는 수밖에 없었다. 제 둥지로 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를 속에 담아놓고 오래 끓고 있는 것들은 눈을 떼기가 힘드니까. 이샹이 그 애 몫으로 마련해둔 한 평짜리 책상. 그건 제 손으로 의주에게 보금자리를 내어주고 싶은 어리고 풋내나는 욕심. 그땐 아직 새 것이었지만, 점차 의주의 책이 놓이고, 지우개 가루가 뒹굴고, 볼펜 자국이 남고, 그 애가 그 자리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께로 쌓여가길 바랐다. 그래서 종국엔 그 애가 끓지 않을 수 있는 한 평짜리 그늘이 될 수 있길 바랐다.

 

- 고마워. 니콜라스.

 

책상을 손바닥으로 쓸던 의주가 중얼거렸다. 그애의 뒷목에 송글송글하게 맺혔던 땀방울은 더는 보이지 않았다. 이샹은 슬며시 웃음을 빼물었다.

 

- 니콜라스라고 부르기로 하셨어?

- …첫날에. 네가 자기소개할 때. 네가 말하는 니콜라스, 라는 발음이 되게… 좋다고 생각했어.

- 안 어려운데. 니콜라스.

- 니콜라스.

- 니콜라스.

- 니콜… 니콜라스.

- 어려우면 딴 이름으로 불러도 돼.

 

그 후로도 의주는 오기 있게 니콜라스만 고수했다. 그 이름은 양초처럼 시간이 갈수록 짧아져서, 종국에는 니콜. 온 세상에 의주 하나만 부르는 이름으로 굳어져갔다.

 

 

 

 

 

 

 

 

 

 

 

 

 

*

 

 

그애의 작은 책상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결국 이샹은 죽었다. 언젠가 그럴 줄은 알았지만. 의주를 슬픔 속에 긴 시간 유배시켜 놓고, 무책임하게 죽어버릴 줄은 몰랐다.

 

2013년의 이샹은 옥상 바람이 헝클어뜨리고 간 머리를 느리게 쓸어넘겼다. 의주는 그의 죽음을 어떤 태도로 맞이했을까. 어릴 때 할머니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 슌쯔가 문득 떠올랐다. 갈색의 늠름한 토종견 슌쯔. 마작을 좋아하시던 할머니가 1월 23일에 태어났다는 의미로 붙여준 이름. 기질이 경계심 많고 예민했지만, 유독 이샹을 잘 따랐던 강아지. 슌쯔는 어느날 뒷마당에서 사라져 버렸다. 온통 피투성이가 된 마당을 보면서, 어른들은 필시 들개가 물어간 거라고 했다. 이샹은 믿지 않았다. 머리가 받아들이지를 못했던 것 같다. 슌쯔의 피가 아닐 수도 있잖아. 어쩌면 그냥, 슌쯔는 괴롭게 탈출한 거고, 어딘가 자유롭게 지내고 있을지도 몰라.

 

의주도 그날의 이샹과 비슷한 기분이었을까. 이샹이 죽었다는 사실을 전해들었을 때. 충격받고 손이 떨렸을까. 수많은 어쩌면을 그렸을까. 눈에 안 보여도 어딘가에서 행복하리라 믿었을까. 그러다가 끝내, 기사 사진에 찍힌 낯익은 신발 한 짝을 발견하고 혼자 고요하게 익사했을까. 동네 뒷산을 샅샅이 뒤지다가 피묻은 개목줄에 적힌 슌쯔 두 글자를 발견하고 열병을 앓은 아홉 살의 왕이샹처럼.

 

채팅방에 뜬 통화 버튼을 내려다보다가, 슬며시 문질렀다. 신호가 간다. 기다렸다는 듯이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여보세요.]

 

누군지 알면서도, 상투적인 통화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가 칼칼했다. 이샹은 조금 웃어버렸다. 난간에 괴어둔 팔에 고개를 파묻고 누그러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울었어?”

[아니거든. 피곤해서 그래… 야근하느라.]

“그치. 깡통 주주가 울 리가 없지.”

[너 보고 있으면 진짜 나 엄청 매도하는 거 알아? 맨날 피도 없다, 눈물도 없다…]

“그렇게 말하니까 정말 나 보고 있는 거 같아서 좋아.”

[……그런 뜻이 아니잖아.]

 

적어도 이샹에게 의주는 먼 존재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등 뒤에도 의주가 있지만, 바로 곁에도 의주가 있는 것 같다. 서른 살의 의주를 그려본다. 철 지난 개꽃처럼 고개를 떨구고. 무엇을 담아야할지 몰라 헤매는 까맣게 탄 눈동자.

 

의주가 있는 곳은 밤일까.

밤이겠지.

야근이라. 멋있다. 혼자 잽싸게 나이 먹어서 취직도 하고.

밥은 먹었을까.

잠은 잤을까.

결혼은 했을까.

이상하다. 의주를 데리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의주는 여전히 의주인데. 분명히 등 뒤에 숨 쉬고 있는데.

 

“주주. 8월 30일에 아무 데도 안 갈게.”

 

이샹에게 그는 여전히 책상을 마련해주고 싶은 미아일 뿐인데.

 

“그럼 되는 거잖아. 나 안 죽을 거야. 미래 바꿔줄게. 너가 슬플 필요 하나도 없어.”

[…정말 바뀔까? 미래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힘이 없는 목소리가 돌아온다. 역시 의주는 종일 이샹이 죽는 생각이나 한 거다. 축 처진 어깨가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나 믿어. 그날 절대 안 죽을게. 맹세한다.”

 

이샹은 담담하게 말했다. 목소리에 손이 돋아서 그 애의 어깨를 어루만져줄 수 있길 바라면서.

 

적어도 의주와의 통화 화면에서 넘어가는 1분. 1초. 그건 완전하게 서로가 공유하는 ‘지금’이다. 지금, 이샹은 생때같이 살아있다. 너목들 결말은 몰라도 왕이샹 결말은 알았으니 피할 수 있는 거다. 아인슈타인 형님부터 스티븐 호킹 형님까지 죄다 뭐라 따지고 들더라도 이샹이 다 두드려 패서 침묵시킬 수 있다. 대충 달래려고 하는 소리 아냐. 백 퍼센트 진심 짱짱한 맹세야. 11년 뒤에도 주주 절대 혼자 안 둘 거야. 죽었대도 살아 돌아올 거야. 한 글자 한 글자 확신을 눌러 담았다.

 

의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동안 느린 숨소리만 들려왔다.

 

[근거도 없이 자신감만 대박….]

 

이윽고 낮고 공기 섞인 음성이 들려왔다. 한번 짠 스펀지처럼 머금고 있던 울적함이 어느정도 가신 목소리였다. 이샹은 보이지도 않을 어깨를 쭉폈다.

 

“운명은 기합이래.”

[진짜 맹세해? 안 죽을 거라고?]

“응. 신에 대고 맹세.”

[믿는 종교도 없으면서 신을 붙잡네.]

“나 신 많아. 아디다스의 신. 나이키의 신. 슈프림의 신.]

[그 신이 아니잖아.]

 

그제야 의주가 웃는다. 하하, 하고 짧게 털어 웃는다. 약간 끊어지듯 웃는 소리. 우는 소리 같기도 했다. 주주가 울 리는 없으니까. 이샹도 웃었다. 의주가 웃는 게 좋다. 의주는 많이 웃어야 한다. 요즘의 의주는 잘 웃지 않으니까. 11년 뒤라도 많이 웃어야 한다.

 

인생은 가보지 않은 길을 걷는 여행입니다.

 

낯설고 새로운 여행의 티켓이 이샹에게 주어진 거라면. 그 애를 웃게 해주고 싶다.

마음에 무거운 신발 한 짝을 올려둔 채 불편하게 살아온 11년 어치로. 많이.

 

 

 

 

 

 

 

 

 

13:08:06 ━━━━━━━━━━━━━˖◛⁺˖ 24: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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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지금 치약 짜고 있는 거 알죠?”

“아.”

 

의주는 태의의 지적에 제 손을 내려다 본다. 로메인 상추 위에 애벌레처럼 하늘색 치약이 짜여 있다. 아아…. 의주는 얼떨떨한 소리를 내다가 포크로 조심히 뭉친 치약이나마 조금 걷어낸다. 와. 양치 안 해도 되겠네. 멋쩍어 중얼거렸다. 의주를 지켜보는 태의와 한호의 얼굴에 좀 모자란 사람을 보듯 측은지심이 스친다. 다른 기자들은 취재와 외근을 나가 한산한 게 그나마 다행이다.

 

“패키지가 비슷해서. 소스인줄 알았나봐.”

“와. 얼마나 넋이 나가신 거예요.”

“야… 누가 의주 돈 떼먹었냐? 자수해라. 이거 스케일이 한두푼이 아니다.”

 

태의와 한호는 어딘가 흘게 빠진 듯이 구는 의주가 영 낯설다는 듯이 수군거린다. 팩트 크로스 체킹할 때는 제보자 온점까지 물고 늘어지던 평소의 꼼꼼함을 감안하면 합리적인 의심이긴 하다. 근래의 의주는 나사가 빠진 것 같다기보다도… 부드러워 보인다. 오래 저어 몽클하게 거품이 잡힌 반죽처럼. 도리어 숨이 죽어 보이기도 했다. 의주가 보기 드물게 말랑할 때 자잘한 일을 보고하는 게 낫겠다 판단한 태의가 의주의 옆에 붙는다. 눈을 홉뜨며 왜? 묻는 얼굴이 또 맹하다.

 

“아, 그 선배가 파던 대만 방파 삼합회 건이요. 저도 강남 약물 유통 파면서 서에서 주워들었거든요. 지금 강남 쪽에 머물고 있는 거 확실하대요. 경찰도 예의주시 중이긴 한데 매번 클럽이나 다닌다던데요?”

“요즘 강남 물 괜찮은 거냐? 그 나이에. 쯧.”

“음… 그럼 그 건 체킹만 태의 씨가 해줄 수 있겠어?”

“…어? 네?”

“왜?”

“아니, 그냥… 그러게요?”

“뭐가.”

“그, 선배가 제 이름 부르는 게 왠지… 되게 낯설어서요.”

 

생각해보니까 회의 때 말곤 따로 들어본 적이… 지나가다 부를 때도 저기 이러시면서…. 태의가 궁얼거리며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그랬던가. 생각해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속으로 늘 T라고 지칭하다보니 이름이 잘 입에 붙지 않았었지…. 의주는 치약 범벅이 된 샐러드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쟤 진짜 이상해. 맨날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경제부의 H, 한호가 혀를 차며 어디 여자가 생긴 게 분명하다고 태의에게 속달거린다. 치약 양상추로 포크를 헛질하던 의주는, 거품같은 알림음이 울린 순간 사무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다.

 

“나 카페 가서 일할게.”

“사무실 두고… 카페를? 의주 네가?”

“역시 변하셨다니까…….”

“샐러드는 태의 씨 먹어.”

“저걸요? 제가요?”

 

여자가 생긴 건지. 돈을 떼먹힌 건지. 한호와 태의가 속삭이는 것을 뒤로 한 채 가방과 노트북을 챙겨 나왔다. 변했나. 태의의 말을 곱씹는데도 입이 쓰지 않았다.

 

일주일 간의 의주가 변했냐고 하면 아니라고 말할 순 없다. 여자가 생긴 것도 돈을 떼먹힌 것도 아니지만. 의주는 건물의 엘리베이터를 탄 후 밝기를 낮춘 화면 속 채팅창을 확인한다.

 

상대: 주주~

상대: 나 학교 끝 ㅋㅋ

상대: 뭐해? 바쁘겠네?

 

좀… 원조교제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의주는 별 내용도 없는 채팅을 보고 좀 웃다, 움직이지 않는 엘리베이터에 층의 버튼조차 누르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다. 일층까지 내려가는 동안에도 그 간단한 메시지에 내놓을 답변을 고민했다. 인근의 카페에 내려간 의주는 제일 큰 사이즈의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노트북을 세팅하고, 음료를 받아온 후에야 채팅창에 답장을 작성하기 시작한다.

 

나: 아냐

나: 안 바빠

나: 오늘 하루 어땠어?

 

별 볼일도, 재미도 없는 세 문장을 보내면서 얼마나 바보같이 웃었는지. 근래의 의주는 니콜라스에게 보낼 말을 고를 때가 아니면 잘 웃지 않는다. 일주일 간 나눈 대화가 과거의 총량에 육박할지도 모르겠다고, 의주는 생각한다.

 

니콜라스는 늘 메시지보다 전화를 더 선호했다. 채팅으로 어떤 치다가도, 답답해지면 전화를 걸어 의주에게 그날 하루 그가 느낀 모든 것을 쏟아놓았다. 주주, 열이랑 시간은 성질이 비슷하대. 한 번 떠나면 돌아오지 않는 거. 잃는 방향으로만 변한다는 거야. 그리고 과거에서 미래로 가는 건 가능하지만, 미래에서 과거로 돌아가는 건 안 된대… 왜인진 잘 모르겠다! 공부는 안 하고 시간 여행에 대한 책이나 영상을 본 모양인지, 의주도 모르는 이야기를 많이도 들려주었다. 쫑알쫑알 숨도 안 쉬고 말하는 게 조금 귀여워서. 의주는 반은 흘려 듣다 반은 맞장구 치기를 반복했다. 생각해보면 니콜라스는 공부는 별로 안 좋아하면서도 궁금한 건 바로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애였으니까.

 

그리고 이런 얘기를 듣는 제 표정을 같은 사무실의 태의나 한호에게 보여주는 건, 아무래도 정말 곤란해서.

 

[…그래서 결국 과거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대.]

“그럼 나는 어떻게 너랑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글쎄. 네가 과거로 온 게 아니라 내가 미래로 연결된 거 아냐?]

“그냥 말장난 같은데….”

[내가 미래로 가는 거로 할래. 빨리 가서 아저씨 된 주주 보고 싶다.]

“지금 거기 있는 의주랑이나 놀아.”

[여기 의주가 나랑 안 놀아줘.]

 

의주는 날짜를 헤아리고 작게 탄식한다. 이맘때쯤이면 열아홉 살의 제가 한참 니콜라스를 피해다닐 때였다. 그래서 니콜라스가 혼자 시간 여행에 대한 걸 이렇게 열심히 공부했구나. 만약 지금의 의주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열아홉의 의주를 힘껏 꼬집어 줄 텐데. 어차피 떠날 거니까 먼저 정을 떼려는 행동은 어리석은 거라고, 선행자답게 충고해줄 텐데.

 

그렇다고 해서 업무까지 내팽개치고 니콜라스와 놀아줄 순 없다. 무엇보다 지금의 변의주는 전세금이나 다달이 나가는 공과금을 책임져야 하는 사회인이었다. 의주는 노트북을 켜서 어제 올린 기사를 체크했다.

 

인기 스타 박 씨 4m 맨홀 추락… 결국 드라마 하차

보행자를 위협하는 콘크리트 맨홀

 

댓글(5)

편의점오셨습니까 ㅅㅂ 트랩이네 거의

하윤이맘 어유. 저희 애 다니는 초등학교 앞에도 금 간 콘크리트 맨홀 많더라고요~~ 저희 애한테는 절대 밟지 말라고 신신당부해뒀는데… 애들 떨어지면 아주 큰 사고 날 것 같아서 무서워요~ ㅜㅜ

정의의김철중 이게 다 국민 혈세 삥땅치는 국개의원들 탓이다… 개혁이 시급하다!

asdf1234 저도 예전에 맨홀 깨먹은 적 있음 ㅋㅋ 금 갔길래 발로 밟았더니 1초만에 퍽 깨지더라고요 ㅋㅋ 오늘도 기사 잘봤습니다!

박박디라라 니 어케 살았나

asdf1234 바퀴벌레들이 구해줌

 

생각보다 댓글이 달렸네. 맨홀 관련 기사 낸 거 처음도 아닌데. 이번엔 다친 사람이 배우라서? 대중들은 사고 자체보다는 그 사고를 당한 대상 같은 지엽적인 부분에 더 집중하니까. 잠시 시니컬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소년처럼 명랑한 음성이 그를 상념에서 끌어낸다.

 

[참. 미래의 주주한테 힌트 얻고 싶은 게 있어.]

“뭔데?”

[넌 내가 손 잡는 거 싫어해? 기분 나빠?]

 

의주는 니콜라스의 질문에 조금 웃는다. 이렇게 대놓고 묻는 게 니콜라스답기도 하고. 11년이나 지나서야 소회를 묻는 게 귀엽기도 했다. 과거와 미래의 의주를 거의 별개의 인물로 생각하는 것 같으면서도 이런 편법을 쓰다니.

 

열아홉 살의 니콜라스를 더듬는다. 그맘때의 니콜라스는 참 살 부딪히기를 좋아했다. 의주는 자주 손을 붙잡혔고, 허벅다리나 팔뚝의 배면 같이 살이 연한 곳을 서슴없이 주물리기도 했다. 둘만 있던 다른 사람과 있던 니콜라스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태생적으로 살부드러운 기질이라 그랬음은 알지만, 종종 의주는 니콜라스의 손을 잡아 떼기도 했고, 조용히 몸을 물리기도 했다. 니콜라스가 그걸 어떻게 생각할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유달리 크고 끝이 둥그런 손이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 때마다. 숨이 막혀서 그랬다. 싫어서 숨이 막혔느냐 묻는다면…

 

“아니. 따뜻해서 좋아했어.”

 

니콜라스의 손은 니콜라스를 닮았다. 그때문에 얼굴을 붉히는 스스로가 부끄럽고 싫었을 뿐이다. 전화기 너머의 니콜라스는 영 의주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은 듯 볼멘소리를 낸다. 왜. 안 믿어져? 되묻자 순순히 말한다.

 

[근데 왜 자꾸 빼내지.]

“민망하잖아.”

[좋은데 민망해?]

“그건 함께 갈 수 있는 거야.”

[Be honest. 주주.]

“이쪽 주주한테 말하셔봤자…….”

 

그러게 너무 자주 만지지 말던가, 만져도 너무 헤프게 만져놓고. 혈기방장한 남고생을. 19살의 의주에게도 댈 변명이, 니콜라스에게도 잘못이 있었다. 그것도 손으로만 만진 게 전부도 아니었잖아. 무엇보다 이쯤이라면. 의주는 별 생각 없이 물었다.

 

“그리고 넌 나한테 키스도 했잖아?”

 

수화기 너머로 뭔가 우당탕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뭐?! 내가 너한테 키스했다고?!]

 

버럭 내지른 목소리가 스피커를 울린다. 옆에 앉아 인적성 문제집을 풀던 여자가 흘끗 의주를 돌아본다. 의주는 (남자 목소리가 쩌렁대는) 스피커 구멍을 황급히 덮고 살짝 고개를 꾸벅였다. 일자 계산을 실패했다. 아무래도 첫키스의 장례식 날짜를 기리고 살진 않았으니까.

 

우당탕. 작아진 음량 사이로 자그마한 소요가 새어나온다. 뭐야? 니콜, 왜 이래? 잠 덜 깬 제 목소리. 의주는 눈을 찡그리고 휴대폰을 다시 귀로 가져다댔다.

 

“…니콜? 뭐해? 나랑 있어?”

[흥분해서 낮잠 자던 주주 때렸어.]

“가만히 잠 자던 나를 왜 때리지?”

[지금은 밖에 나왔어. 근데 진짜야? 진짜 내가? 주주한테? 언제?]

“아냐. 잊어버려.”

[어떻게 잊어 이런 걸?!]

“잊고 살면 잊어져.”

[주주 정말 무정하다! 어른 같아!]

“몰랐어? 나 어른이잖아. 그보다 내일 뭐해? 니콜.”

 

의주는 슬며시 화두를 돌리며 유투브 영상의 배너로 뜬 영화 광고를 클릭한다. 얼마 전에 재개봉한 타임 리프 영화. 일전에 H와 T가 애프터용 영화로 얘기를 나눴던 게 기억났다. About Time (2013). 영화 제목 옆에 개봉 연도가 쓰여 있다. 마침 2013년. 개봉 당시에 이걸 봤던가. 고등학교 3학년생 신분으로 영화관까지 가서 봤을 것 같진 않고. 어물어물 주워 본 클립 영상으로 스스로가 봤다고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일? 아무 것도 안해. 의주랑 놀아. 니콜라스가 단순하게 대답한다. 그건 이쪽 의주야, 그쪽 의주야? 오케이 해주는 의주. 의주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럼 이쪽 의주겠네.

 

“혹시 거기 어바웃 타임 개봉하지 않았어?”

[몰라. 영화관 잘 안 가서.]

“한번 찾아 봐. 개봉했으면 내일 같이 보러 가자.”

[같이? 거기는 2024년이잖아.]

“재개봉했거든.”

 

영화관 예매창을 켜 관을 찾았다. 당시 니콜라스와 함께 살았던 동네의 영화관 중 리모델링이 되지 않은 곳은 하나뿐이었다. 좌석에서 오래된 섬유 향이 나는, 소극장에 가까운 관. 시작하는 시간대가 비슷한 조조영화로 골랐다. 그 시간에 일어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니콜라스가 퉁명스럽게 중얼거리지만 무시한다. 못 일어나면 너는 아무 주주랑도 못 노는 거지. 그렇게 얘기하며 의주는 텅텅 빈 좌석 아이콘을 클릭한다. 외근 중에 전화를 하고 영화표를 사고 있자니, 꼭 맘대로 학교를 빠져나온 청소년이 된 것만 같다.

 

“나 G열 11번에 앉을 테니까…… 너는 12번에 앉아.”

[내 옆 자리 앉고 싶구나. 주주.]

“…….”

 

11번과 12번, 두 자리분을 샀다는 건 말하지 않는다. 의기양양한 니콜라스가 서른 먹고도 얄미운 걸 보니, 의주도 어른은 덜 된 모양이었고. 그럼 너는 다른 데 앉던가. 끝내 덧붙인 한마디에는 다시 열아홉 살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수화기 너머의 니콜라스가 웃기 시작한다. 목을 울리며 웃는 소리에서 시계 초침 소리가 난다.

 

나를 이토록 초조하고 즐겁게 만드는 건 너뿐이니까, 그러니 네 옆자리에 앉고 싶은 거라고. 생각할 뿐 소리내어 말하지 않는 게 거짓말은 아니다. 거짓말이 아닌 게 솔직함은 아니지만. 서른 살의 의주는 여전히 열아홉 살의 니콜라스 앞에서 아주 솔직하기가 어렵다.

 

 

 

 

 

 

 

*


 

I just try to live every day as if I've deliberately come back to this one day, to enjoy it, as if it was the full final day of my extraordinary, ordinary life.나는 그저 매일을 이 날을 즐기러 미래로부터 돌아온 듯이 살고자 한다. 마치 이것이 나의 특별하고도 평범한 인생의 가장 최후의 날인 것처럼.

 

영화는 어두운 조도에서 시작되고 끝이 났다. 지난하고, 대수롭지 않고, 적당한 오류를 끌어안은 스토리였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지만, 미래로 올 수는 없는 남자. 과학자들은 그 반대만 가능하다던데. 니콜라스 말로는 그렇다던데. 어쨌든 그런 건 사랑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미 볼 사람은 다 본 영화라 그런지, 관은 텅 비다시피했다. 의주가 앉은 중앙 쪽에나 커플 두어 쌍과 혼자 영화보러 온 사람들이 드문드문 있었고. 하필 뒷자리에 앉은 남자가 자꾸 등받이를 툭툭 차서, 통 영화에 집중이 안 됐다. 자리 선정을 잘못 했나봐. 니콜라스 쪽은 안 그럴까? 그 애는 영화를 재밌게 보고 있을까? 의주는 자꾸 빈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보잘 것 없는 대사가 나오는 순간조차, 니콜라스의 귀에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속삭이고 싶었다. 다음엔 차라리 노트북으로 보자고 할까. 그럼 영화를 보면서 동시에 니콜라스의 귀에 속삭이는 게 가능할 텐데.

 

 

“니콜. 영화 재밌었어?”

[몰라. 난 주주랑 키스한 얘기 때문에 집중 안 됐어.]

“유감이네.”

[그리고 레이첼 맥아담스 주주 닮았더라.]

“짜증나게 할래?”

 

집중하지 못 했다면 피차 마찬가지니 다행이다. 의주는 영화관에서 나와 조금 걸었다. 주말이라 나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의주. 병원 끼고 따라 걸어. 횡단 보도 기다리는 중. 거기 공원 보이지. 니콜라스가 어디로 가야 할지 종알종알 설명해준 탓에 같은 길을 걷다보니 목적지인 시민 공원에 금세 달했다.

 

공원의 정경은 의주가 기억하는 것과 조금 달랐다. 볕이 유달리 드센 탓에 조금 젖은 앞머리를 문지르면서, 의주는 공원 입구의 조그만 커피 체인점에서 아이스 커피를 샀다. 수화기 너머로 니콜라스가 토스트를 주문하는 소리가 들린다. 햄치즈. 양상추는 조금만. 소스는 많이. 의주는 입술을 벙긋거리며 그의 주문을 따라한다. 니콜라스는 대체로 몸에 안 좋은 것들을 좋아했다.

 

“그러고 보니 10년 전에 이 자리에 토스트 가게 있었지.”

[바뀌었어?]

“이젠 카페가 생겼어.”

[엑. 그럼 토스트 두 개 사야지.]

“왜? 있을 때 많이 먹어두려고?”

 

바보. 없어진다고 해도 11년 후인데. 의주는 사온 커피를 들고 시민공원 구석 벤치에 앉았다. 달궈진 핸드폰으로 뺨이 온통 뜨거웠다.

 

“나 첫번째 벤치에 앉았어.”

[그럼 나도 거기.]

 

니콜라스가 그를 따라 조심성 없이 앉는 소리가 들린다. 니콜라스의 핸드폰이 더 구형이라 그런지, 음질은 나빠도 조그만 소음이 여실히 들린다. 의주는 벤치에 등을 기댄다. 오래되어 조임이 헐거운 벤치는 의주의 움직임에 따라 조이고 퍼지기를 반복한다. 의주의 핸드폰은 이런 조그만 소음 정도는 차단해줄 것이다. 의주는 꼿꼿한 목덜미를 젖힌다. 벤치의 등을 따라 수북한 꽃을 늘어뜨린 배롱나무가 웃자라 있다.

 

“그래도 이 배롱나무랑 벤치는 그대로 있어.”

[어. 나도 거기 앉아 있어.]

 

의주의 세계 그 어느 곳에도 니콜라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같은 곳에 앉아있다는 짧은 위안이 온다. 주말의 시민공원에 이토록 많은 사람이 나다니지만 의주와 닿아있는 건 지나간 시간선의 니콜라스뿐이다. 의주는 촘촘하게 그림자가 진 벤치를 손끝으로 건드린다. 응달의 경계가 명확해서, 볕이 닿지 않은 곳엔 열기가 없다.

 

[그러고 보니 주주 감상 못 들었어. 영화 재미 있었는지.]

“응. 뭐, 그냥 주인공 부럽던데.”

[부러워?]

“편리한 능력이잖아. 그런 좋은 걸 공짜로 물려 받고. 우리는 오만 원이나 내고도 채팅이나 통화밖에 못하는데. 닿지도 못하고.”

[주주. 나한테 닿고 싶었어?]

“…….”

[내 옆자리도 앉고 싶고. 나 만지고 싶고.]

“니콜. 곡해라는 말 알아?”

[Gokay?]

“됐다…”

[그래서 내가 키스했을 때 기분 좋았어? 어땠어? 언제 했어? 힌트 없어?]

 

서른 언저리에도 솔직해지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바래지 않는 첫키스의 촉각 같은 것. 아주 오래 들여다보지 않은 그 심상과 온도.

 

“미안한데 안 알려줄 거야… 11년이나 지난 리뷰는.”

 

의주는 테이크 아웃 컵의 선득한 표면에 뺨을 댄다. 까까머리 고등학생처럼 얼굴을 붉히고 싶진 않다. 표면에 열매처럼 맺힌 수분으로 볼이 축축하게 젖는다.

 

“지금 뭐해? 니콜라스.”

[주주 엉덩이 만져.]

“그게 무슨 소리야…….”

[이 자리 쯤에 앉아있을 거 같아서. 여기 주주 엉덩이 있다.]

“없거든. 바보야.”

 

가볍게 웃으며 시선을 내리던 의주는 쥐고 있던 컵을 놓칠 뻔 했다.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오른다리 옆을 보았다. 벤치의 나무표면 위로 희게 흠이 새겨지고 있다. 원주가 채 닿지 않은 동그라미다. 보이지 않는 조각칼에 긁히는 것처럼, 하얀 홈이 동그랗게 파인다.

 

“니콜, 뭐야? 이거 너야?”

[보여?]

“이거 네가 하는 거야? 지금 벤치에……”

[진짜 11년 동안 한번도 안 바뀌었나 보네.]

 

조그만 동그라미 아래로 거침없이 작대기가 달린다. 이윽고 그 옆에도. 하얀 홈이 잇고 떨어지며 벤치에 글자 네 자가 적힌다. 의주 바보. 의주는 채 웃지도 못한 채 얕은 홈의 표면을 만진다. …좀 멋진 걸 쓰지. 11년 동안 나도 모르는 새 바보였네.

 

니콜라스. 니콜라스가 새긴 글씨. 11년 전으로부터 곧장 날아온 짧은 편지. 방금 새긴 글자임에도 시간에 매끄럽게 닳아 있다. 마멸되어 표면이 흐리게 반질거리는 글자가 곧 수화기 너머의 니콜라스가 진짜임을 증명한다. 의주의 니콜라스가, 의주의 이샹이 보낸 장난스러운 글자가 무서울 정도로 생동한다. 그래서.

 

“치사해…….”

 

속으로부터 무언가 울컥 치받는다.

 

[주주?]

“나만 읽잖아. 내가 여기 답장을 써도 니콜은 못 보잖아.”

[…….]

“너는 내 오늘에 계속 새겨지고 있는데. 나는 네 어제에 무엇도 새로 쓸 수가 없어. 과거는 미래를 이렇게 쉽게 바꿀 수 있는데. 난 과거를 바꿀 수가 없는 거야.”

 

울고 싶다. 눈물은 나지 않지만 혓바닥과 콧대가 시큰거린다. 갖고 싶은 장난감을 갖지 못한 어린애처럼, 목구멍을 부풀리고. 입을 벌리고. 억울하다고. 누군지도 모를 것을 향해 서럽게 악을 떨고 싶다. 나도 나를 확인시키고 싶은데. 분명 여기에 네가 있는데. 두 눈으로 보고 싶은데. 그곳도 하늘이 깨질 것처럼 날이 화창한지. 머리 위로 흔들리는 배롱나무 꽃이 네 흰 살갗에 붉은 그늘을 드리우는지. 그 크고 도톰한 손에 무엇을 쥐고 이 글자를 적었는지. 오늘은 어떤 옷을 골라 입었는지. 그렇다면 계절을 따라 훌쩍 짧아진 바지가 네 둥글고 견고한 무릎을 내놓았는지. 방금 셔츠깃을 뒤챈 바람이 네 뺨을 스치기도 하는지. 만질 수 없다면 볼 수라도. 볼 수 없다면 느낄 수라도 있다면 좋을 텐데.

 

의주는 니콜라스가 새긴 글자를 움켜쥔다. 수화기 너머로 11년 전의 소음이 쏟아진다. 이럴 때면 니콜라스가 미래를 향해 온 건지, 의주가 과거에 닿은 건지 경계가 모호하게 느껴진다. 따지고 보면 의주가 열한 살이나 연상인데. 가끔 그보다도 어려지는 것 같다. 니콜라스의 앞에서 너무도 쉽게 연약해진다. 유원지의 어질러진 웃음소리 속에서, 니콜라스가 고요히 속삭인다.

 

[무슨 소리야? 주주가 제일 큰 걸 바꿨는데. 나 안 죽게 해줄 거잖아.]

 

그 가벼운 말이 흉금을 옭아맨 낚싯줄을 자른다. 니콜라스의 말로 의주는 겨우 얽어매인 고깃덩이에서 인간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니콜라스의 말이 사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약속 하나는 잘 지켰으니까. 그게 니콜라스의 미더운 점 중 하나이니까. 대답 대신 ‘의주 바보'의 의주를 손끝으로 매만진다. 오래 이응을 동글리고 맺음이 오래된 자음을 더듬는다. 같은 곳을 니콜라스도 만지고 있으리라는 막연한. 그러나 또렷한 확신이 든다.

 

[의주. 내가 시간은 높이에 따라 다르게 흐른다고 했던 거 기억나?]

“기억이 안 나….”

[일주일 전에. 너한테는 11년 하고도 일주일 전에 내가 말했어. 시간은 모든 곳에서 다 다르게 흐른대. 높은 곳일수록 시간이 빨리 흐르고, 달리는 기차에선 더 느리게 흐르고… 그래서 세상에는 천 개도 넘는 시간이 있대.]

“…….”

[그럼 정확히 같은 곳에 같은 속도로 서 있으면 우린 같은 시간에 서 있는 거야. 누가 미래고 과거고, 그런 거 아니고. 지금이 우리의 현재인 거지.]

 

손끝이 벤치 목재의 더운 온기로 인이 박히는 것 같다. 의주의 손. 경계가 분명한 응달과 볕이 옮긴 전열임이 응당하겠지만 의주는 역시 니콜라스의 온도를 찾는다. 손을 겹쳐 올린 것처럼. 감각을 지져 없애는 것 같은 체온이 온전히 그의 것이기를 바란다.

 

[의주. 우리 함께 있어. 지금.]

 

비록 의주와 니콜라스 사이에 11년의 간극이 있더라도. 니콜라스는 그건 지구의 시간에 불과하다고 웃어 넘겼다. 소우주의 어딘가에서 그 11년이 찰나가 될 수도, 수억광년이 될 수도 있다고. 니콜라스가 이 별이 아닌 다른 별. 멀리 떨어진 다른 이름의 지구에서 전화를 걸어오고 있는 거라면. 그래도 두 사람이 어쩌다 지극이 우연히도, 똑같은 시간선에 함께 서 있을 수도 있는 걸까. 의주는 핸드폰의 송화기에 기도하듯 이마를 댄다. 조그만 구멍에서 토해지는 이샹의 모든 말이 교리처럼 진실이기를 바라며.

 

 

 

 

 

 

 

 

*

 

 

 

니콜라스 집에 의주 몫의 책상이 생긴 뒤로, 두 사람의 시간은 교집이 넓어졌다. 생활 반경을 겹치고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 주주. 그거 답 아닐 걸.

- 응?

- 너가 옆에 써둔 풀이 보니까. 항등원이랑 임의의 상수 헷갈린 거 같은데.

- 아, 진짜다… a랑 e 값을 헷갈렸어.

 

니콜라스는 의외로 공부를…. 했다.

 

- 네가 이렇게 문제 푸는 거 볼 때마다 신기해.

- 그렇지. 주주는 나 빡대가리로 생각하시지.

 

니콜라스가 아랫입술을 비쭉였다. 뾰로통한 얼굴을 보니 좀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굳이 의주가 쓰고 있는, 비좁은 1.2미터 폭의 책상에 낑겨 앉아 만화책을 읽는 니콜라스의 모습에선 통 지성이랄 게 느껴지지 않았다.

 

- 너 중간고사 때… 내분점과 외분점 사이의 거리를 자로 직접 재서 적었잖아. 선생님한테 문제 잘못 됐다고 건의했다가 대판 깨지고.

- 자로 재도 루트 2 느낌으로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 선생님이 칠판에다가 점근선에서 내린 수선의 발 그려보라니까, 발가락 다섯 개 그려놓고…….

- 그건 틀려도 상관 없을 때니까.

- 틀려도 상관 없으면 틀려?

 

만화책을 툭 덮은 니콜라스가 책상 서랍에서 교재 한 권을 꺼냈다. 중국어로 된 문제집이었다. 数学이란 한자만 겨우 미루어 알아볼 수 있었고, 표지며 책등이 전부 손이 타 벌어져 있었다. 의주는 작은 필기까지 빼곡한 문제집을 들춰보며 작게 감탄했다. 진짜 열심히 했네……. 니콜라스가 고개를 기울이며 눈매를 가늘게 접었다. 예사로운 웃음이다.

 

- 바보는 아무도 신경 안 쓰잖아.

 

하긴. 니콜라스는 어디서든 두각을 드러내어 좋을 처지가 아니었다. 지금처럼. 바보같이 살아도 주변에 애들이 바글대는데. 어른들한테까지 주목을 받아서야……. 애먼 일에 또 훌쩍, 의주가 모르는 곳으로 전학을 가야 할지도 모르니까.

 

- 넌 너무 눈에 띄어.

- 응?

- 친구 만들지 마. 공부도 하지 마.

- 아무 것도 하지 마? 그냥 꼼짝 말고 주주랑 있으면 돼?

- 어. 왜 그렇게 학생의 본분에 열심이야. 조폭한테 쫓기고 살기도 바쁘면서…

 

반쯤은 농담이었는데. 니콜라스가 뺨을 봉긋하게 말고 웃었다. 그치? 나도 이모한테 비슷한 말 한 적 있어. 들키면 죽는데. 유명해봤자 소용도 없으니까, 공부 같은 거 필요 없지 않냐고. 그랬더니 이모가 등을 엄청 아프게 때렸어. 어차피 때 되면 죽는데 밥은 왜 먹고 사랑은 왜 하니- 그러면서. 그래서 그냥 공부 열심히 해. 아무도 몰라도. 내일 죽을 것처럼 사는 것보다, 내일도 살 것처럼 죽도록 노력하는 게 더 기분 좋아.

 

니콜라스가 옥탑의 창 밖을 내다 보았다. 창틀을 따라 규격에 각이 진 달빛이 그의 얼굴 윤곽을 따라 도독하게 굴절했다. 의주는 희게 반들거리는 니콜라스의 뺨을 훔쳐 보았다.

 

- 그리고 이제 의주가 알아. 내가 열심히 하는 거.

 

언제든 심지가 잘릴 촛불 같은 처지 따위, 쉽게 불어 날려버리는 애. 그게 니콜라스니까. 죽고 사는 문제조차 니콜라스는 웃어 넘기고야 만다. 그러니 니콜라스와 있을 때는, 의주도 내일의 무게 같은 건 어깨에 짊어질 필요가 없었다. 전부 별 게 아니지만 니콜라스와 의주만이 별 것이 될 수 있었으니까.

 

 

 

붉은 벽돌담의 다가구 주택집과 옥탑방은. 의주가 몸을 의탁할 뿐인 아파트 단지와는 아예 다른 국경의 땅 같았다. 모든 게 눈에 설고 생소했다. 문 열린 1층 집 가구 곳곳에 붙은 새빨간 차압 딱지. 매일 정해진 시간마다 벽을 타고 올라오는 아랫집의 성경 방송. 비가 많이 내린다 싶은 날이면 밴드맨이 세든 반지하가 침수되기 일쑤라, 주민들 전부가 물을 퍼내기도 했다. 니콜라스와 의주도 교복 바지를 동동 올려 묶고 합세했다. 그 날 어디서 바지를 이렇게 적셔 왔냐고 집에서 꾸지람을 들었다.

 

전부 의주가 속한 세계에서는 일어날 일 없는 사건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래서, 의주는 그 집이 좋았다. 제 집보다 자주 드나들게 됐다. 집에는 야자를 한다는 핑계로 밤 열한시까지 니콜라스의 방에서 때로 무의하게, 때로 유의하게 시간을 보냈다. 그 소년기의 모든 방점에 니콜라스가 있었다.

 

아무 것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의주가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곳.

의주가 의주일 수 있는 곳.

그게 집이라는 것을 니콜라스의 곁에서 처음 깨달았다.

 

 

 

2학년 진학 직전, 제 2외국어는 중국어로 골랐다. 의주의 어머니는 아랍어나 못해도 노어 같은, 등급을 따기 좋은 과목을 권했지만 이 정도 독단적인 고집은 용납되었다. 2학년이 되고도 의주는 니콜라스와 같은 교실에 앉아있을 수 있었다. 니콜라스가 중국어를 고른 건 좀 치사하다고 생각했지만서도. (제 1외국어면서.) 그렇다고 해서 의주가 손수 재떨이 중국어 반을 고른 건… 순전히 니콜라스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냥 중국어를 배우고 싶기도 했고. 어머니한테도 그런 핑계를 댔으니까.

 

- 이거 성조가 뭐야? 니콜.

 

의주는 니콜라스에게 수학, 영어 뿐만 아니라 중국어도 종종 물어보게 되었다. 니콜라스는 쉬는 시간마다 의주의 책상에 와서 같이 문제집을 들여다보았다. 2성이니, 3성이니 손가락으로 노랫말 같은 성조를 그리면서. 뭇 동급생이 보기엔 의주가 이샹을 가르치는 그림이었을 것이다. 생김새가 그러했으니까. 연수구의 모범. 미추홀구의 불량. 그러나 카테고리를 넘어 이상할 정도로 붙어다니는 애들.

 

니콜라스는 자주 의주를 건드렸다. 더는 의자로 책상을 건드리지 않았지만, 대신 팔을. 어깨를. 손을 너무도 쉽게 건드렸다. 의주가 화장실에라도 다녀오면 아예 의주의 자리를 차지해놓고 앉아 방석을 자처했다. 의주는 니콜라스의 허벅다리 위에 힘없이 앉으면서 불평했다. 자기가 더 작으면서.

 

- 워 시환 니랑 워 아이 니는 뭐가 달라? 둘 다 좋아해 아냐?

- 워 시환니는 내가 주주한테 하는 거. 워 아이니는 주주가 나한테 듣고 싶은 거.

- 혹시 욕 같은 뜻도 있나?

- 에이. 주주 나 완전 좋아하면서.

 

가끔 이런 밑도 끝도 없는 농담이 쉬웠고.

 

- 니콜이 날 완전 좋아하는 거겠지.

 

발끈해서 받아치면 대답이 없었다. 니콜라스는 입술을 뾰족하게 모은 채 제 귓불만 만지작대다가, 야 이샹, 의주 방해하지 말고 농구하러 가자. 뒤에서 애들이 부르는 소리에 공을 끼고 쌩 나가버렸다. 방해는 무슨 방해. 이샹이 아니라 너희가 방해하고 있잖아. 의주는 빈 교실 문을 물끄러미 보다 니콜라스가 알려준 성조를 조용히 따라했다. 워 아이 니. 4성.

 

니콜라스는 친구가 많다. 의주뿐만 아니라 키가 작은 세원이나 태영도 함부로 허벅지에 끌어다 앉히는 걸 모르지 않았다. 의주는 개중 하나.

그 중 하나여도 특별한 하나.

그 정도는 의주도 안다. 니콜이 집 열쇠를 준 건 의주뿐이다.

니콜이 가장 많은 시간을 쓰는 것도 의주뿐이다.

 

붙어 다니는 시간이 지겹지 않았다. 니콜라스는 안쪽에 견고한 걸쇠를 단 닫혀있는 변의주의 세계에 파고드는 법을 알았다. 어떻게든 걷어차서, 때때로 미는 문을 당겨서 멋대로 열고 의주를 바깥으로 끌어냈다. 니콜라스 덕분에 의주는 많은 걸 알게 됐다. 당구장에서 먹는 짜장면의 맛. 편의점 봉다리를 달랑이며 함께 부슬비를 맞고 걷던 날 적당한 음량으로 틀어두었던 팝송의 이름, 제가 월미도 바이킹을 생각보다 잘 탄다는 사실 등을.

 

니콜라스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그 애는 길거리 농구를 좋아했고. 오락실에서는 펌프를 잘 했다. 그 애가 자주 학교를 째는 이유는 일진이라서가 아니라 한정판 신발을 구하는 원정을 떠난 거였다. 니콜라스는 하나같이 의주는 잘 못하는 것들만 골라 잘했다. 그런데도 니콜라스는 주주와 함께하길 좋아했다. 재밌다고 말하는 니콜라스의 상기된 목소리. 있는 힘껏 눈을 접어 웃는 얼굴 같은 것을 세원이나 태영은 모를 테지. 의주만이 아는 것들. 니콜라스가 의주에게만 알려준 것들. 의주의 니콜라스.

 

니콜라스에게 배운 것들 중에는 마작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게임을 배운다는 건 새로운 세계의 규칙을 머릿속에 심는 것과 같으니까. 그건 의주가 니콜라스에게서 선물 받은 가장 어렵고 으슥한 세계.

 

그걸 배운 건 폐쇄된 음악실에서였다. 음악실은 노후화와 리모델링을 핑계로 방치되었다가, 몰래 담배를 뻐끔대던 애들이 불을 낸 게 두어 해 전이었다. 이후 문 손잡이에 두툼한 자전거용 자물쇠가 채워졌다고 했다. 그걸 어느 날에 니콜라스가 비밀번호를 땄다. 999번만 시도해보면 된다는 마음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돌려봤는데, 907번째에서 풀렸다고 말했다. 뒤에서부터 할 걸 그랬다고 투털대는 니콜라스에게 의주는 고개를 내저었다. 보통 사람들은 그럴 생각을 안 해, 니콜라스……

 

구석이 조금 그슬린 음악실은 방음이 좋았다. 어느 소리도 새어나가지 않을 것을 알았다. 중식을 대충 떼우는 날이면 둘만이 음악실에 처박혀 문을 잠갔다. 사람이 들지 않는 음악실에서는 늘 조금 콤콤한 냄새가 났고, 시멘트 바닥은 응달처럼 서늘했다. 무엇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교실에서 사실은 별 것도 하지 않았다. 교회의 기도실처럼 도열한 책상들을 뒤로 밀어놓고, 돗자리 대신 신문지를 깐 싸느라한 바닥에 누워서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공부와는 상관 없는 책을 읽거나, 노래를 듣거나, 세 가지를 동시에 했다.

 

마작도 그 게임의 일환이었다. 어느 날 니콜라스가 마작패를 가지고 왔다. 모가 동그랗게 닳은 미니 마작패를 굴리면서, 할머니가 그에게 온갖 마작을 가르쳐주었다고 일렀다. 한국에서는 안 해? 명절에 종종 마작을 했어. 지방마다 조금씩 룰이 달라. 그냥 할머니한테 배운대로 알려줄게.

 

니콜라스는 네모난 블럭같은 패들을 늘어놓고 발음이 어려운 이름들을 알려주었다. 얘는 홍쭝. 바이반. 퐈차이……. 성의껏 노래의 마디 같은 이름을 따라 읊는 의주에게 니콜라스가 또 웃었다. 의주. 다 외울 필요는 없어. 게임은 하면서 배우는 거야.

 

- 마작은 보통 세 명 이상이 하는 건데… 주주가 이 인분 어치 해야겠다.

- 그런 게 어딨어?

- 왜. 이길 확률도 두 배 되는데?

- 싫어. 바보 같잖아.

- 음… 2인용 룰도 있어. 만화에서만 보고 해본 적은 없는데…….

 

니콜라스가 책상 위로 등을 구붓하게 수그린다. 뭉뚝한 손끝에서 마작패가 눕거나 섰다. 단추가 하나도 잠기지 않은 하복 셔츠의 끝단을 따라 유난하게 볕이 팔딱거렸다. 사실 의주는 니콜라스가 줄세우는 패에는 하나도 집중하지 못 했다. 뒷머리가 단정하게 덮은 목이나, 흰 소매 밑으로 도드라지는 팔을 보았다. 패를 모아 세운 니콜라스가 봐봐, 하고 의주를 돌아본 후에야 겨우 집중하는 척을 했다.

 

- 2인용 마작은 시작부터 텐파이 상태를 만들어.

- 텐파이?

- 텐파이.

- 아니. 텐파이가 뭐냐고.

- 후러 되기 직전 상태.

- 후러는 또 뭔데.

- 후러.

- 후, 러.

- 후러.

- 후… 너 자꾸 내 외국어 발음 가지고 놀릴래? 그냥 재밌어서 그러는 거지?

 

뜻이나 알려달라니까. 의주가 공연히 골을 내자 니콜라스가 또 뺨을 봉긋하게 쌓고 웃었다. 희고 큰 손이 불시에 의주의 얼굴을 향해 온다.

 

의주를 놀라지 않게 안심시키는 손길이 천천히 뺨을 감싼다. 검지와 엄지 사이의 오목한 곳과 손바닥에 턱이 괴였다. 늘 조금씩 핏기가 밴 니콜라스의 손은 덥고 조금 거칠거리기까지 했는데, 향긋하고 부드러운 비누 냄새가 났다.

 

짜증조차 내지 못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 채로 얼굴이 붙들렸다. 의주는 니콜라스의 내리깔린 눈꺼풀을 보다, 셔츠 밑단을 구겨 쥐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손가락이 들어왔다. 검지와 중지. 턱이 벌어질 만큼 크고 두툼한 손가락. 니콜라스가 의주의 입술을 보고 있었다. 채 다물지도, 벌리지도 못하는 구강 사이를 손가락이 헤집었다. 니콜라스가 꼭 마작패를 집듯 의주의 혀끝을 내짚었다.

 

- 발음할 때. 혀를 더 안으로 넣어야 해.

- ….

- 이렇게, 후러.

 

침을, 삼켜야 하나. 아니면…….

고민하는 새에 타액이 입을 비집은 손가락과 손목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시신경이 아뜩해질 정도로 하얗게 바랬다. 느리게 흔들리는 엷은 커튼. 제멋대로 어긋난 책상과 의자. 점점이 동그라미가 남는 베이지색 교복 바지. 실핏줄이 붉게 번진 눈꺼풀. 귓바퀴와 뺨을 따라 뭉근한 불꽃이 붙은 듯했다. 어떡하지. 닦지 않은 렌즈를 통해 보듯 사위의 가장자리가 뿌옇게 번지기 시작했다. 종래엔 생각마저 잊어서. 유달리 성기고 굵은 지문의 인이 혓바닥이 아니라 온몸을 문지르는 듯해서. 의주는 저도 모르게 니콜라스의 손목을 붙들었고.

 

꿀꺽.

목울대가 느리게 울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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