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의 끝
chookee
손을 뻗어 쥔 백사는 한 방울의 물기도 머금지 못한 상태였다.
한참이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를 본 니콜라스는 합리적 의심을 떠올렸다. 사실 바쳐진 사람들은 신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니라 가는 길이 험준해 그 과정에서 죽어버린 것이 아닐까. 강한 자외선과 모래에 대비하기 위해 받은 방호복은 사실상 별 의미가 없었다. 나침반은 이미 바늘의 평형을 잃었다. 물은 입을 축이는 정도로만 사용한다고 해도 3일을 못 갈 것이다.
죽음 앞에서 계몽이란 부질없었다. 물이 말라붙어버린 나라에서 수자원을 관할하는 것은 기이하게도 정부가 아니었다. 동쪽의 가장 끝으로 가면 있는 신의 터. 그 곳에서 기거하는 수신水神만이 비를 내리게 할 수 있었다. 과학, 문명, 집단지성이 사라진 땅에서 사람들은 온갖 주술과 저주에 매달렸다. 신의 위치나 그가 원하는 것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무언가를 바치고 염원했다.
어쩌다 한 번, 비가 내리는 시기가 맞으면 그 행위는 신의 뜻을 맞춘 것이라는 기묘한 공식이 생겼다. 사절단으로 보내진 사람들은 사라지기도 했고 돌아오더라도 반절은 미친 사람이 되어 귀향했다. 그리고 다른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진 사람들은 오래 살지 못했다. 시신은 바짝 말라 까맣게 증발했다.
몇 세기가 연이어 흐르자 신의 존재 자체에 의구심을 품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니콜라스는 대학에 입학한 지 석 달 후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자들의 단체에 입단 제의를 받았다. 그들은 사회에서 의심받지 않을 엘리트로 자신들을 훈련했다. 사절단이 되어 정체를 밝혀내고 장렬하게 죽는 것. 니콜라스는 죽지 않는 법에 대해 탐구했고 강경파들은 끊임없이 주장했다. 죽더라도 진리를 알아내는 자가 이기는 것이라고.
-문제는 성공한 사람들이 아무도 없다는 거야.
-죽기 위해 가는 사람들에 이렇게 공을 들인다고?
-수백 년을 그렇게 살았으니 세뇌당했다는 사실도 모르고 그냥 바치는 거지.
분노 이전에 앞선 것은 원론적인 호기심이었다. 너무나 고귀해 일반 시민들은 얼굴도 볼 수 없는 황가의 사람들이 나와 무릎을 꿇어도 비를 내려주지 않는 이 존재가 대체 누구인지. 아니다. 애초에 존재하긴 하는 것인지. 그렇게 시작된 의문일 뿐이었다. 그게 죽음을 불사하고자 하는 대의는 아니었지만,
결국 길을 잃었다. 협곡의 길은 아무리 운동을 오래 한 신체여도 정복할 수 없었다. 신조차 돌보지 않는 그 곳의 바위에는 세월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두꺼운 이끼가 쌓여 있었다. 물 없이 바짝 마른 땅과 축축하게 젖은 이끼는 공존할 수 없었음에도 자아를 잃은 뇌는 그것을 유추할 수 없었다.
힘이 풀린 무릎이 꺾였다. 니콜라스는 허벅지 위, 그리고 심지어 허리 위까지 물이 차오르는 환각을 보았다. 흔들리는 몽상 속에서 준엄한 목소리가 그를 꾸짖었다. 목소리에는 분노와 안심한 기색이 모두 깃들어 있었다. 무의식 속은 모순만이 가득했다. 머리 위로는 더 이상 마르지도 못할 모래가 쏟아졌고 이제 목 부근까지 차오른 물은 그의 숨통을 겨누고 있었다.
[왜 여기에 다시 왔어?]
눈 앞에서 기괴할 정도로 밝은 빛이 일었다. 시야는 얼마 후 까맣게 꺼져 버렸다.
한참을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었던 의식이 떠올랐다. 숨을 막던 축축하고 습윤한 공기는 사라졌다. 눈을 뜨자 단정하고 깔끔하게 꾸며진 방이 눈에 들어왔다. 옅은 모래 빛의 암막 커튼이 눈에 들어왔고, 그 뒤로는 손에 감기는 까만 침구가 보였다. 모든 것은 마치 그를 기다린 것 처럼 준비되어 있었다.
무겁게 쳐져 있던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봄과 동시에 낮은 조도의 등들이 자동으로 켜졌다. 이 방의 모든 물건들은 수도, 아니 황궁에 있는 것들 보다도 공들여 세공한 물건 뿐이었다. 방의 주인은 공간에 애착이 큰 게 분명했다. 잠에서 깨어난 사람이 자연스럽게 다시 의식을 찾고 몸을 일으킬 수 있도록 모든 시설이 준비되어 있었다.
오른쪽에 놓인 협탁에는 마치 니콜라스가 잠에서 깨어날 것을 미리 알았다는 듯, 막 끓인 차가 좋은 향을 풍기며 놓여 있었다. 잔을 한참이나 노려본 니콜라스는 황제도 구할 수 없다는 백호은침白毫銀針의 향에 복종하기로 했다.
다행히도 그가 잔을 떨어트리며 피를 토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향긋하다 못해 사치스럽다고 느껴지는 이 액체를 모두 비워낸 니콜라스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치에는 푹신한 실내화가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아름답게 가꿔진 시야는 확실히 기이했다.
모든 것이 너무나 편안하고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어색할 지경이었다. 평생을 날뛰는 생명력과 함께 살아온 니콜라스에게는 익숙하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실내화 안으로 발을 꿴 니콜라스는 걸음을 옮겼다. 햇빛을 막아 둔 창살에 시선을 뺏기고 벽에 붙은 그림에 눈이 가기도 했다. 제대로 의식을 찾은 것이 아닌지 걸음이 올곧지 못했다. 발에 시야를 두었던 니콜라스가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생각보다 빨리 깨어났네요."
"...누구세요?"
"식사는 저 쪽에 준비되어 있어요."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었다. 말을 멈춘 남자가 다시 덧붙였다. 따라오세요. 순간 니콜라스의 몸이 알 수 없는 장력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앞으로 튕겨 나갔다. 그럼에도 남자와 니콜라스의 물리적 거리는 그대로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침입자에게 말을 건 남자의 머리칼은 다갈색이었다. 수도에서는 이제 자연적으로 가질 수 없는 머리색이었다. 정치적인 지도력은 커녕 사치와 향락에 빠진 황실에서 다갈색 머리의 궁인들을 찾는다는 가십도 공공연하게 돌 정도였으니까. 바깥 대륙의 염료만으로 만들 수 있는 '고귀한' 색의 머리카락이 눈앞에서 나풀거렸다. 니콜라스는 그 표현이 매우 계급적이라 생각했지만 태어나서 처음 본 빛깔의 머리색은 확실히 시선을 끌었다.
남자의 발걸음이 멈췄다. 문 안에는 이제 막 차린 듯 김을 뿜는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누가 봐도 근처에서 막 구한 듯 신선한 고기들과 보는 것 만으로도 물이 튈 것 같은 과일. 이런 것들은 이제 일반 민중 계급이 쉽게 먹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의아함을 떨칠 수 없는 니콜라스의 기척을 알아챈 남자가 속삭였다.
"혹시 궁금한 게 있다면... 일단 식사를 마치고 해주실 수 있을까요?"
미세하게 금이 가 있던 니콜라스의 얼굴에서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헛웃음이 터졌다.
"이걸 보고도 묻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나요?"
"애초에 살아서 여기까지 올 수 있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생각도 해볼 수 있겠죠."
침착하고 조용한 목소리임에도 한 마디를 져 주려 하지 않았다. 니콜라스는 새삼 이 공간의 침입자가 자신이며 언제든 사망한 사람으로 처리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항할 생각 없이 자리에 앉았다. 나가거나 갇히거나, 둘 중 무엇이어도 기력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기도 했고.
니콜라스가 식사를 시작하고 마치는 동안, 남자는 바깥 정원에 서 담뱃대를 꺼냈다. 가끔 재를 터느라 금속이 충돌하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살아 숨 쉬고 있으면서도 살아 있지 않는 것 같은 한기. 식사를 하는 내내 미묘한 거북함을 느낀 니콜라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남자가 깊게 숨을 내쉬며 마지막 재를 터는 것이 보였다. 고개가 돌아가고 눈이 마주쳤다. 아무 빛도 담지 않은 것 같은, 모래처럼 메마른 눈이 니콜라스를 응시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너무 오래 바라보았다고 생각될 무렵 남자가 중문으로 다시 들어왔다.
"어떻게 저를... 구했어요?"
"죽기 위해 여기에 온 거였나요?"
진실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사막을 건넌 이유를 솔직하게 말할 수 없는 니콜라스는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말하면 죽지 않을 것이라는 오만함도 있었으니까. 팔짱을 낀 남자가 흠, 하고 숨을 뱉었다.
"죽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던걸요. 물통에 물도 남아 있었고, 방호복도... 엄청 준비한 것 같았으니까."
"잘 아네요."
"죽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애초에 여기까지 오지도 못해요."
"그런가요."
"그렇게 열심히 죽음을 준비할 정도면 수도에서도 죽기 쉬울 테니까요."
여전히, 둥글고 순해 보이는 낯에 어울리지 않는 염세적인 말투와 눈빛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니콜라스는 어떤 이유를 그에게 설명해야 할 지 잠시간 고민의 시간을 가졌다. 남자는 그다지 답을 듣고 싶은 질문은 아니었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지내는 동안에 통성명은 해야 하니까."
저는 변의주. 의주라고 불러요. 손은 내밀어지지 않았다. 니콜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주는 그의 몸짓이 다소 군인 같다고 생각했다. 상대의 신체 신호를 빠르게 읽어내고 그에 대응하는 속도나, 위험을 감지한 곳에서 섣부르게 움직이지 않는 버릇이 그랬다. 니콜라스 왕. 의주는 잠시 불편하게 교차해 있던 팔을 내리고 어색하게 제 손톱을 쓰다듬었다.
"멋진 이름이네요."
그렇게 말한 의주는 더 이상의 설명 없이 몸을 돌렸다. 이렇게 이름만 트고 끝낸다고? 니콜라스는 보폭이 큰 의주의 걸음을 빠르게 따라잡았다. 모든 의문을 해결해 줄 사람은 눈앞의 의주 단 한명 뿐이었다. 의주를 따라 걷던 니콜라스는 이상한 사실을 하나 더 찾아냈다. 저택에 가까운 이 시설 안에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의주 한 명 뿐이라는 것을. 그대로 멈춰버린 니콜라스가 의주의 등에 대고 물었다.
"혼자 여기 사는 거예요?"
"뭐... 지금은 그래요."
"이렇게 넓은데도?"
대답하기 위해 멈춰 있던 의주의 다리가 다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이번에는 아까처럼 빠른 속도는 아니었다. 다시 의주를 따라잡은 니콜라스는 말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의주의 지문을 인식하자 거대하게 막혀 있던 문이 열렸다. 뭘 보건 첫인상만큼 놀랄 수야 없다고 생각했던 니콜라스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물이 거꾸로 흐르는 소형 폭포의 주변에는 너무나도 싱그러워 차라리 모형처럼 느껴지는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중앙에 놓인 모니터 화면에는 끊임없이 명령어가 자동으로 반복되고 처리 언어가 떠오르기를 반복했다. 이 밖에는 없고 이 곳에만 있는 것들. 사람들이 미신에 매달리면서까지 얻기를 바라는 것들이 모두 여기에 있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죠?"
무언가 문제가 생겼는지 중앙 PC 앞에 앉은 의주가 타이핑을 시작했다. 학부 공부를 할 때도 개발이나 공학 쪽에는 별 재능이 없었던 니콜라스는 그 장면을 멍하니 응시했다. 곧 화면 위로 떠올라 있던 에러 메시지가 사라졌다. 아까와 같은 루틴이 계속 반복되었다.
"그럼... 여기 있는 물들이 다 의주 씨가 입력하는 대로 움직이는 거라고요?"
"뭐... 이젠 자연적으로 생겨나지 않는 것들이니까. 만드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요."
설마. 니콜라스는 그 동안의 수많은 세뇌와 교육, 훈련을 떠올린다. 동쪽으로 가면 만날 수 있는 신. 설마? 이 쓸쓸하고 거대한 저택 안의 경이로운 자연을 혼자 돌보고, 사막에 가끔이나마 비를 내리는 이가 단 하나라면.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릴 것 같았다. 한참이나 숨을 고르던 니콜라스가 침묵을 깨트렸다.
"신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나요?"
턱을 괸 채로 화면을 바라보던 의주가 고개를 돌렸다. 대답이 두렵기는 처음이었다. 의주는 말문이 막혔다기보다는 너무나도 수많은 대답을 가지고 있어 답하기를 주저하는 듯했다. 여전히 물기 하나 머금지 않은 버석한 눈 안에 잠시 이채가 돌았다 사라져 버렸다.
"무엇을 신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른 답이 되겠네요."
안개가 잔뜩 끼어 사리를 구분할 수 없는 답이었다. 니콜라스는 다시 물었다. 척추 위로 솟아오르는 소름을 막기 위해.
"침입자인 사람에게 이런 것 까지 노출하는 이유가... 뭐죠?"
니콜라스는 의주의 대답에서 진의를 읽었다. 고대의 주술, 기도, 미신에서 비롯된 신이 아닌 멸종해버린 과학을 다스리는 자도 신이라 할 수 있다면 제 눈앞에 그 신이 있었다.
여전히 눈이 가라앉은 의주가 어렵지 않게 답했다.
"그냥... 제가 본 세상은 이 곳이 다일 뿐이에요."
니콜라스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주먹을 여러 번 펴고 쥐기를 반복한 의주가 속삭였다.
"여기서 태어나고 자라서, 다른 세상의 사람들을 도저히 알 수가 없었거든요."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당신은 이 경계를 넘은 유일한 인간이니까.
최초의 침입자에게 건네는 말 치고는 지독하리만큼 순종적인 문장이었다.
"바깥에는 비가 내리지 않나요?"
말문이 트인 의주는 니콜라스의 생각보다 말이 많았다. 자신이 가보지 못한 외부에 대한 질문이 끊임없이 쏟아졌다. 니콜라스는 아침과 같은 차를 마시며 그 질문들에 답했다.
도시의 사방을 두른 모래의 색, 그 위에 삶의 터전을 만들어야 하는 시민들이 수자원을 끌어오는 방식, 신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꾸준히 시행되는 의식들과 그 광경을 내려다보는 황족들의 표정 없는 얼굴, 사막 위로 발자국을 남기며 생존하고 있는 짧은 털의 고양이들과 모든 삶에 대한 이야기가 쏟아졌다. 마치 구전 동화를 듣는 듯한 어린아이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모든 것을 극도로 통제하며 사는 사람 치고는 엉뚱한 질문도 많았다.
"저기, 그렇게까지 안 씻고 살진 않아요. 매일 씻을 수 있다니까요. 어쨌든 재생산하는 시설도 있고..."
"예전처럼 펑펑 쓰지는 못할 테니까 그냥 궁금했을 뿐이에요."
"그럼 제가 꼬질꼬질하고... 엄청 더러운 사람처럼 보였겠네요?"
"그건 아니지만, 어쨌든 발견되었을 때 좀 그런 상태였던 건 맞-"
니콜라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다무는 것으로 항의를 대신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사실만을 나열하려던 의주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몇일간 관찰한 그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옷을 차려입는 것, 자신을 가다듬는 것에 열중하는 사람이었다. 옷 몇 벌을 가져다주었더니 싹둑 잘려 다른 옷이 되어 있기도 했다. 자신이 니콜라스를 이 곳으로 데려왔을 때 어떤 몰골이었는지는 앞으로도 말해주지 않는 게 나을 듯했다.
삼 주 정도의 시간이 흐른 이후로, 니콜라스는 이 곳에 도착한 이후의 시간을 헤아리지 않았다.
대신 발 끝으로 펼쳐진 협곡의 끝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물줄기를 끌어 올려 저택의 정원 안에는 아담한 호수가 하나 있었다. 작은 아기 천사가 조각된 분수와 세심하게 정돈된 정원의 풀들을 보며 니콜라스는 생각했다. 기억하지 못하는 때 부터 이곳에서 자랐다는 의주의 모든 세계는 이 곳에 있었다. 그가 신으로 불리는 자거나, 혹은 아니건 간에.
"그럼 식료품은 어떻게 구해요?"
"음... 일단 저장고가 있고, 가끔은 내려가기도 하고."
"그렇게 멀리?"
"여기 있는 것 만으로 충족되지 않는 때가 있어요."
니콜라스의 발 끝을 바라보던 의주는 자신이 이 곳에서 자라날 때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의주의 발이 땅에 닿는 순간조차 정해져 있었고,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그의 시중을 들었다는 문장이 이어졌다. 다음 날에는 조금 슬픈 이야기가 이어졌다. 고강도의 교육과 혼자서 살아남아야 하는 방법이 전부 전수되자 그들은 일종의 매뉴얼을 만들어준 후 이 드높은 협곡을 떠났다. 성과 이름을 물려주고 지어 주었을 부모의 존재는 아무리 추적해도 알아낼 수 없다고 했다.
니콜라스는 고향의 가족들을 생각했다. 이름을 주고도 만날 수 없는 가족이라는 존재는... 대체 어떤 깊이의 슬픔일까. 손을 뻗어 찬 바람을 막던 의주가 속삭였다.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 조금 덜 슬퍼지는 날이 와요."
거짓말.
아주 오랜 시간을 혼자서 살아온 남자는 아직도 그 사실에 슬퍼하고 있다.
"내 자신이 누군지를 모르는데도?"
순간 의주는 니콜라스의 눈 안에서 친절함, 웃음, 경계를 허무는 능력이 아닌 다른 것을 본다.
미세하게 벼려진 칼. 미상의 존재를 알아내고 가능하다면 파괴하기 위해 온, 아주 잘 훈련된 전사의 것이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알고 살아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 하지만 아주 오랫동안 학대에 가까운 삶을 스스로 내렸던 의주는 무어라 답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요."
니콜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때로는 말을 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있었으니까.
숨막히게 아름다워서 오히려 홀로 보며 자랐다면 고독할 풍경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침묵을 깬 것은 의주 쪽이었다.
"부탁이 있어요."
"네?"
"만약에, 나를 죽이기 위해 이 곳에 왔다면..."
"..."
"뜻대로 하도록 해줄 수 있어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분명 목적에 맞는 말을 하는 것을 아는데도 심장이 불쾌하게 뛰었다. 평범하다 못해 고독하게 자신의 삶을 지키고 있던 사람을 죽일 생각은 없다. 사실 귀향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니콜라스는 자신이 놓치고 있던 지점을 깨달았다.
"사람들을 죽인 건 내가 아니에요. 그 사람들은 여기까지 올 수도 없고... 너무 긴 여정에 지쳐서 자신의 생명력을 다한 채로 돌아갔겠죠."
"그럼 제가 의주 씨를 죽일 이유도 없어요."
"...저는 이 모든 시도가 지겹고, 니콜라스 씨는 승리해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잖아요."
턱 근육이 바짝 선 니콜라스의 입 밖으로 그가 말한 적이 없는 단어들이 튀어나온다. 州州,丟下我死? 저도 모르게 한발짝 물러선 의주의 눈에, 두려움과 함께 안도감이 감돌았다. 니콜라스는 손을 뻗어 관자놀이를 쥐었다. 불쾌한 통증과 기이할 정도로 엉긴 기억이 머리 속을 부유했다.
"그런 식으로 당신의 목숨을 재는 말은... 하지 말아요."
"...부담스러워서?"
죽여 달라는 말이 단지 상대가 '부담스러울까 봐'라니. 이 말도 안 되는 논리의 전개에 지친 니콜라스가 식은땀이 배어난 이마를 쓸었다.
"그건 아니고... 일단 좀 쉬다 올게요."
"그래요. 저녁은 6시에 차려 둘게요."
"이 와중에도 당신을 죽일 수 있는 사람한테 식사를 차려 주고 싶은 거에요?"
계속 말이 뾰족하게 튀어 나갔다. 니콜라스가 죽이기 위해 온 존재는 사람들을 제물로 받고 제 의지대로 기후를 조종하는 미지의 존재였지, 평생을 이런 식으로 감금되어 살아온 변의주가 아니었다. 무언가의 숨을 끊는 행위에 정당성이 다르냐고 묻는다면 니콜라스는 대답할 것이다. 이 남자가 신으로 치환되어 불리는 사람이라면 죽일 이유는 없다고. 의주가 웃자 특유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저건 씁쓸하거나, 슬퍼서 웃는 게 아닌 진짜 웃음이었다.
"나를 죽이지 못해도, 아니면 다시 죽일 마음을 가지더라도... 제가 해야 하는 걸 할 뿐이에요."
고개를 흔든 니콜라스는 망설이지 않고 뒤를 돌아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복도를 걸었다. 끔찍하도록 고요한 이 길에서 반대 편의 사람이 제 방으로 사라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침대 위로 몸을 던지자 니콜라스는 제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감각을 떠올렸다. 아주 부드러운 사막 위로 엎드리면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순간, 의주가 제 방호복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거울 옆에 걸어 두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와 함께 잊고 있던 수신기의 존재가 떠올랐다. 아마 이곳까지 왔다면 니콜라스의 위치는 미상으로 떠올라 있을 것이다. 니콜라스는 아직 꺼지지 않은 채로 빨갛게 점멸하는 수신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이나 그것을 쓰다듬다가 상단의 전원 버튼을 눌러 꺼 버렸다.
다시 침대로 몸을 옮긴 니콜라스는 축축해진 습도와 빗방울 소리에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협곡 아래로 잔잔하게 흐르는 물, 의주의 실험실에 있는 폭포, 정원의 분수에서 흐르는 물이 아닌 자연적으로 흐르는 비였다.
니콜라스의 기억이 아주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무릎에 자신과 누나를 앉힌 아버지가 동화책을 읽어 주는 소리가 들렸다. 책 안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거대한 존재가 눈물을 흘린다. 한 방울은 흩어져 사막으로, 한 방울은 흩어져 바짝 마른 수도의 강으로 갔다. 책장이 넘어가자 울고 있는 신의 아래로 기뻐서 춤을 추는 사람들이 나왔다. 누군가가 이렇게 극렬히 슬퍼하고 있는데 모두 웃고 있는 그림은... 어린 니콜라스의 눈에는, 정말로 이상했다.
우리에게 물을 주는 수신은 슬플 때 눈물을 흘려서 비를 내려 준대.
슬프지 않으면 어떻게 해?
그럼 황궁의 사절단들이 가서 빌고 비는 거야. 비를 내려 주세요, 당신이 아니면 우리가 물을 쓸 수 없어요...
이 사람은 그럼 영원히 슬퍼야 해?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허를 찔린 아버지가 흐음, 하고 고민한다. 책의 전개가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던 누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의문을 풀지 못하는 소년만이 그대로 아버지의 무릎에서 질문을 던졌다.
모두가 원하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는 일도 있는 거야.
아니야. 이건 틀린 답이야. 그렇게 생각했지만 니콜라스는 더 이상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답은 정해져 있었고 자신은 납득할 수 없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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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하라는 의주의 당부도 잊은 채 니콜라스는 깊은 수마에 빠졌다. 무의식의 경계에서 니콜라스는 쓰러진 자신의 육체를 내려다보는 의주가 되었다. 지금의 까맣고 짧은 머리가 아닌 뒷 머리가 꽤 긴 은발의 모습이다. 게다가 이번에 입은 방호복이 아닌 군복을 입고 있다. 끙, 소리를 내며 니콜라스의 몸을 돌린 의주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린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심박에 안도하며 그 몸을 일으켜 세웠다. 눈물이 흘러 턱 끝을 형편없이 적셨다. 이건 슬픔이 아닌 안도감의 눈물이었다. 네가 다시 태어나도 나를 또 찾아왔다는, 자만에서 비롯된 형편없는 마음. 그래서 비는 내리지 않았다. 신이 철저히 슬픔과 좌절을 느껴야만 세상이 젖었다.
시야가 뭉그러지며 깨진 결계와 그 사이로 침투한 황궁의 군인들이 보였다. 신이라는 호칭은 틀렸다. 그들은 대대로 신을 만들었다. 이건 더 이상 슬프지 않아 비를 내리지 않는 신에게 주는 경고였다. 그들은 신의 행복을 경계했다. 모든 의식은 그의 만족을 아닌, 불행하기를 바라는 원념이었다.
의주는 제 앞에 선 은빛 머리칼을 바라본다. 이 눈물은 다시 슬픔의 눈물이다. 저 밖에는 비가 내릴 것이다. 세상이 바짝 말라붙거나, 혹은 물에 넘쳐 모두가 사라지더라도 이제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잔인할 만큼 긴 시간 동안 같이 살아가기를 바란 대상은 오직 한 사람 뿐이었다. 자신 때문에 죽어도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 돌아오는 눈앞의 존재.
니콜. 안 돼. 가지 마. 저 쪽은 내가...
주주.
자신을 찾아왔던 니콜라스 중 가장 옅은 색의 눈을 한 이샹이 자신을 돌아본다. 아니다. 오직 니코라고 불리기를 원했던 니콜라스인가. 그는 지금까지의 니콜라스 중 가장 높은 강도로 단련된 사람이었지만, 결국은 사람이었다. 애초에 사람이 아닌 존재로 개조된 자신과는 달리 누군가가 목을 세게 조르기만 해도 숨이 끊어질 연약한 인간이다.
나 때문에 울면 안돼. 그럼 저 인간들은 또 주주를 슬프게 만들 거야. 주주의 인생이 영원히 울기만 하다 끝내는 건 억울하잖아.
...지금 니가 슬프게 만들고 있잖아...
틀렸어. 주주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을 없애려는 거야.
아니야, 아니, 안 돼.
몸 안의 장기가 끊어질 정도로 극심한 고통을 느낀 적은 항상 이 순간 뿐이었다. 처음 만났던 순간과 똑같은 자세로 쓰러져 있는 육신에게 속삭였다.
미안해. 너를 외면하지 못해서, 그 사막, 바다, 계곡, 절벽에서 죽도록 항상 내버려 두지 못해서. 내 존재로 인해 다시 없어질 너를 알면서도, 내 욕심 때문에 한 번 더 너를 보고 싶어서... 네 얼굴을 보고 다시 돌아왔다고 안심해서...
강제로 깨어진 신의 행복 덕에 수도에는 큰 비가 내렸다. 홍수에 가까운, 유례 없는 장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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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뜬 니콜라스는 망설이지 않았다. 뺨에서 흐른 눈물 덕에 귀가 잔뜩 젖어 있었다. 의주가 그대로 둔 자신의 가방에서 전투 장비가 될 만한 것들을 꺼내 챙기고 워커를 신었다. 고요한 복도를 채우는 것은 강한 확신에 찬 니콜라스의 발소리 뿐이었다. 굳게 닫힌 의주의 방문을 두드리고, 답이 없자 문을 열었다. 기도하듯 손을 올리고 잠든 의주가 보였다. 한참을 그 위에서 망설이던 니콜라스의 손이 의주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렸다. 눈을 찡그리며 깨어난 의주가 차갑게 굳은 니콜라스의 얼굴을 보고 속삭였다.
"이제 준비가 된 거에요?"
"나한테 말하지 않은 이야기가 꽤 많던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단 한 번도 당신을 죽이려 한 적 없는 걸 알잖아요. 항상... 당신을 살리기 위해 여기 온 걸, 다 알았잖아요."
마치 실연을 당한 것 처럼 분노한 목소리였다. 의주는 침대의 끝에 앉아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수없는 윤회를 반복하고 미련할 정도로 자신을 다시 사랑해주는 존재에게 죽임당하기를 원했던 건 진심이었다. 분에 넘치게 행복했던 만큼,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수십번의 불행을 겪었으니까.
"그 기계들도, 당신이 없어졌을 때의 대체 수단으로 만든 거죠?"
심각한 상황임이 확실함에도 웃음이 나왔다. 왜 이 존재는 항상 예민한 생명력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감지할까. 멋대로 침입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알아 주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법을 몰랐더라면 좋았을 텐데.
"곧 그 사람들이 올 거예요."
창 밖의 먼 곳을 응시한 의주가 속삭였다.
"이번에는... 제 뜻대로 움직여줘요. 꼭."
수십 번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설계해 둔 경보 시스템이 울렸다. 조정실의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던 의주는 문밖으로 향했다. 팔짱을 끼고 있던 니콜라스가 고갯짓으로 질문을 대신했다. 서쪽 벽. 의주의 대답과 함께 몸이 튀어 나갔다. 수많은 병력을 두 명이 야외에서 상대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필패의 조건이었다. 니콜라스는 그들을 실내로 유인하는 것을 제안했다. 의주는 군인이 아닌 니콜라스여도 생존 본능은 여전하다고 생각했다. 그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서쪽 벽과 연결된 대형 온실은 온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박물관 같은 구조였다. 수십 대의 총이 하나의 방향을 겨눌 때 마다 움직이는 레이저 빛에 니콜라스의 목뒤로 소름이 끼쳤다. 온실의 문을 열기 전, 의주가 낮게 속삭였다.
"내가 안쪽으로 먼저 유인할 테니까, 바깥쪽을 호위해요."
니콜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모든 장소를 정확히 꿰뚫고 있는 것은 의주였다.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니콜라스들은 어땠을 지 모르겠지만... 니콜라스는 의주의 명령에 충실히 따르기로 약속한 터였다. 의주가 온실의 개방 버튼을 열었고, 북쪽과 남쪽의 문이 동시에 활짝 열렸다. 이어 몇 명인지 셀 수도 없는 군화가 바닥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북문의 입장구를 닫아 버린 의주는 전 병력이 모두 이 곳으로 유인된 것을 보고 남문의 차단벽도 내려 버렸다. 니콜라스는 그제야 제 패착을 깨달았다. 저들의 목표는 자신이다. 그러나 지금 자신을 뺀 모든 사람과 의주가 저 온실 속에 갇힌 셈이었다. 차단벽이 내려갔음에도 투명하게 설계된 덕에 의주의 뒷모습과 그에게 총을 겨누는 군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다른 남자는 어디 있지?
-외부에 있는 것 같습니다.
-입장구를 파괴하고 다시 나가서 찾는다.
바보들. 나를 몇천년이나 가둬 두고,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허수아비라고 여전히 생각하는 사람들. 의주가 과학과 기술에 매달린 것은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저주와 같은 능력, 신의 대리인이라고 믿어지며 행했던 모든 것들이 지겨웠다. 발목 끝으로 물이 차올랐다. 이 온실에는 저들이 모르는 기능이 숨겨져 있다. 온실에 물을 대는 탱크는 바닥의 바로 아래에 연결되어 있다.
저주에 가까운 이 권능은 세상의 물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것.
투명한 벽으로 달려간 니콜라스가 온실의 벽으로 총구를 겨눴다. 거의 방공호에 가까운 외벽은 그 어떤 총알도 꽂히지 않았다. 허벅지 위로 물이 차오르자 당황한 군인들이 아무렇게나 총을 난사했다. 수분에 젖기 시작한 무기들은 기능을 하지 않았다. 의주는 지금껏 자신에게 바쳐진, 원하지 않던 모든 것들을 떠올렸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원망이 심장을 뛰게 했다.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존재로 키웠으면서. 그리고 의주는 바깥을 응시했다. 절망과 해결되지 않은 질문들을 담은 니콜라스의 눈이 마주친다.
그리고 그렇게 외로운 존재가 얼마나 쉽게 경계를 넘어온 타인을 사랑할 수 있는지. 그들은 그걸 알았어야 했다.
"왜..."
이번의 나에게는 당신을 더 알아갈 시간을 주지 않아?
항상 당신을 위해 내가 죽었다면서. 왜 나를 위해 죽는 거야?
빠른 속도로 차오른 물은 코 끝에 닿았다. 의주는 눈을 감았다. 어쩌면 이 이능만큼 형벌인 것은 미련할 정도로 단 한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끊어내려 했다.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의주는 그제야 깨닫는다.
99번째 파계破戒. 타인의 의지로는 죽을 수 없는 신이 저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것.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유.
이것이 아흔 아홉번이나 다시 태어나고, 다시 사랑해주길 반복한 미련한 상대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라면 충분히 감내할 만한 것이었다.
니콜라스는 중앙 제어실로 달렸다. 온실 쪽의 버튼이 무엇인지 몰라 떨리는 손으로 저택 안의 모든 문을 개방했다. 제발 늦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서쪽 벽으로 달렸다. 숨이 끊어질 것 처럼 차올랐지만 상관없었다. 문이 열리며 강한 압력에 밀려 나온 군인들이 보였다. 하지만 자신이 찾는 다갈빛 머리칼은 보이지 않았다. 정원 쪽으로 달린 니콜라스는 분수로 이어지는 계단 앞에 쓰러져 있는 의주를 발견했다.
더위를 잘 타 땀을 많이 흘린다고 하던 몸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제발. 기도하며 입 속으로 숨을 불어넣었다. 파랗게 질린 얼굴에는 혈색이 돌아오지 않았다. 의지와는 상관 없이 니콜라스의 눈꼬리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의주의 얼굴을 적셨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몇 번의 나를 만났는지 아직 안 알려줬잖아요..."
몸이 식은 상대에게는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이제 의주의 얼굴은 온실 안의 물이 아닌 니콜라스가 흘린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런 얘기는 다시 안 해줘도 되니까, 앞으로의 나를..."
다시 사랑하면 되잖아요.
의주에게 숨을 불어넣던 니콜라스는 축 늘어진 몸의 흉부를 압박했다. 뼈가 부러지더라도 멈춘 심장이 뛰도록 짓눌렀다. 눈물은 멈추고 땀이 흘렀다.
차갑게 식어 있던 손 끝에 움직임이 감지된 것은 그때였다. 진동하듯 떨린 손 끝을 잡은 니콜라스가 의주의 온 몸을 쓰다듬었다. 울컥, 하고 목 안에 고여 있던 물이 흘러나왔다. 한참이나 물을 토해낸 의주가 가늘게 눈을 떴다. 아직 시야를 분간하지 못하는 몸짓이었다. 온 몸이 떨릴 정도의 기침이 이어졌다. 의주는 자신이 보는 것이 죽어서 보는 환영인지, 혹은 실제인지 알 수 없다는 눈빛을 했다. 차게 식은 제 체온과 달리 따뜻한 니콜라스의 손이 목에 닿았다.
죽음과 삶이 구분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의주는 깨달았다. 이제 절대자는 없다. 언젠가는 나이가 들고, 누군가가 습격한다면 죽음을 맞이해야 할 필멸의 삶이 동등하게 놓여 있었다. 그 사실에 웃음이 나왔다. 원하지 않는 자들에게 저주와 축복을 내리는 삶은 정말로 끝이었다. 언젠가 다시 태어나길 바라면서 기다려야 하는 니콜라스가 아닌, 비슷한 인생의 길이를 받았을 니콜라스가 제 눈앞에 있었다.
"지금 웃음이 나와요...?"
"뭐야... 울었어요?"
"시키는 대로 하라면서, 그렇게 죽어 버리려고 하면..."
니콜라스는 다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여전히 차가운 의주가 상체를 올려 제 몸을 마치 부시기라도 할 듯 껴안았기 때문이었다.
"다 말해 줄게요."
"그럼 안 말하려고 했어요?"
"음... 궁금해하지 않는다면 굳이..."
"그럴 리가 없잖아요."
한참을 서로에게 기대 계단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로 비췄다. 의주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생각했지만 그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을 꺼냈다.
"이제 여기 혼자 사는 건 지겨워요. 그리고... 남은 인생이 길진 않을 테니까, 다른 곳에 가보는 것도 좋겠죠."
이번 생의 기억만을 가지고 있는 니콜라스여도 그 뜻은 잘 알았다. 비척이며 일어난 두 사람은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이제는 협곡 안에 가둬진 저택도, 사방이 모래인 수도도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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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에 있던 신이 한 남자와 함께 사라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수백명의 군인이 즉사한 사건은 풍문으로만 돌았다. 황실은 언론에 관련 기사가 나가는 것을 통제했다. 사막이 사라지고 넓은 잎을 가진 야자수들이 자라났다. 신은 더 이상 슬프지 않았다.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구진들은 신이 살았다는 저택의 연구실을 통째로 뜯어냈다. 이제 의미 없는 의식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메말랐던 강에는 다시 물이 차올랐다.
얼마 후 니콜라스의 가족들은 한참이나 돌아오지 않는 아들에게서 엽서를 받았다.
사막의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푸르다 못해 까만 바다가 펼쳐진 섬의 사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