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세주인 줄 알았는데 도깨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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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씨가 착해서 도깨비가 혹을 떼준 혹부리 영감 이야기, 도깨비를 도와줬더니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이야기. 반대로 마음씨가 나빠 혹을 하나 더 얻은 혹부리 영감 이야기, 도깨비를 무시했다가 혼쭐이 났다는 이야기. 도깨비가 등장하는 수많은 동화들이 존재하지만,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착한 인간은 도깨비의 보은을 받지만 나쁜 인간은 벌을 받는다는 것이다.
♥ 떼인 돈 받아드립니다 ♥ 02-xxx-0907 변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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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지면 손에 잉크가 묻어나올 듯 쨍쨍한 색감을 자랑하던 광고지가 지금은 빛이 바래 온통 희끄무레한 색만 겨우 띠고 있다. 요즘은 자기PR도 직관적인 슬로건이 대세라길래 구구절절 부연 설명은 과감하게 생략하고 임팩트 있는 문구만 넣은 건데. 그러나 착잡한 의주의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양 옆에 붙은 하트는 너 나 할 것 없이 정확히 반을 긋는 낙서로 갈라져 있다. 너무해. 누군진 모르겠지만 낙서한 사람, 길 가다 새똥이나 맞아라. 속으로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저주를 내리며 주먹을 불끈 쥔 의주가 결국 한숨 푹푹 내쉬며 벽에 붙은 광고지를 뗀다. 그마저도 붙일 때 어찌나 꼼꼼하게 붙였는지 잘 떨어지지도 않아서 다 뜯고 났더니 뭐 글씨도 제대로 못 알아볼 정도로 갈기갈기 찢어진 채였다. 아... 진짜 기운 쭉 빠지네. 변의주 인생 쓸데없이 하드코어다.
그러니까 변의주로 말할 것 같으면,
[채권추심 전문 변의주 개인 법률 사무소]의 사장이자 비서이자 유일한 직원이자... 아무튼 다 하는,
변호사다.
잘 다니던 대형 로펌을 때려치고 독립하겠다고 처음 선언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안 좋다 못해 처참한 지경(미쳤냐, 제정신이냐, 어디 더 좋은 조건으로 스카웃 제의라도 들어왔냐, 그것도 아니면 로또라도 당첨된 거냐)이었으나 의주의 결심은 확고했다. 난 원래부터 내 이름으로 된 개인 사무소 차리는 게 꿈이었어.
가족들과 동기들은 물론이고 학부 시절 교수님까지 '법대 나와서 개인 사무소 차리는 꿈 안 꾸는 사람이 어디 있냐', '독립은 커리어를 더 쌓은 뒤에 해도 늦지 않다'고 뜯어말렸지만 의주에겐 씨알도 안 먹혔다. 나는 남들 다 꾸는 꿈을 조금 일찍 실현시키려는 것뿐이고 커리어는 이 정도면 충분히 쌓았다고 주장했다. 원래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가는 법이다. 굳이 따지자면 변의주는 고양이보다는 강아지 쪽에 더 가깝긴 했지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뭣도 아닌데 무작정 철없는 소리만 한 건 아니고. 법대 수석 입학 및 졸업에 사법고시 현역 패스한 변의주는 먼저 사무소 차려 나간 선배 변호사들에게 조언도 얻고 발품 팔아서 사무실 마련부터 사업자등록까지 철저하게 준비한 뒤 당당하게 개업했다.
...비록 3개월 째 정식 의뢰 건수 제로, 수익 제로, 하다못해 잘못 걸려온 전화까지 제로. 트리플 제로라는 참담한 결과를 내고 있는 중이지만.
그래서 그 화려한 '법대 수석 입학 및 졸업에 사법고시 현역 패스' 타이틀 달고 있는 변의주가 어쩌다 이런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냐면.
입사 1년 차 쯤이었나. 약 10억 원 상당의 채권을 추심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온 적이 있었다. 성공만 하면 커리어에 꽤 도움이 될 만한 건이어서 당연히 서로 하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다들 이미 다른 일로 바쁘다며 양보에 양보를 거쳐 운 좋게 막내인 의주가 그 사건을 맡게 됐고. 의주 어떡하냐. 고생 좀 하겠네. 부모 낙하산으로 입사했다는 소문이 자자한 입사 동기부터 7년 차 시니어 변호사인 사수가 제 어깨를 툭툭 치며 격려할 때까지만 해도 그냥 고작 1년 차에 이렇게 큰 건을 맡게 된 막내가 안타까워서 그런 거겠거니, 했는데.
"그러니까 저 지금... 찍힌 거죠?"
기껏 맡은 바 열과 성을 다해 임무를 수행해놨더니 돌아오는 건 뭔 말 같지도 않은 퇴사 강요였다. 알고 봤더니 의주의 의뢰인에게 10억을 빌리고 안 갚은 사람이 무슨 당 유명한 국회의원 조카시랜다. 불법 토토로 돈 깨나 잃은 모양이다. 처음 의뢰 받고 나서 웬일로 운 좋게 나한테 이런 행운이 왔나 했더니 네잎클로버인 줄 알았던 게 초특급 대왕 똥이었다. 어쩐지... 다들 바빠서 못하는 게 아니라 다 알고 일부러 피한 거였어.
국회의원 조카씩이나 되시는 분이 고작 햇병아리 변호사한테 한 방 먹은 게 제법 삔또가 상하셨나 보다. 집안 어른들한테 고자질이라도 했는지 윗선에서 압박이 들어오는 바람에 의주는 울며 겨자먹기로 입사 1년 만에 퇴사 당했다.
그래도 스펙 짱짱하고 내로라하는 로펌 경력도 있으니 나와서 개업하면 되겠지, 싶었는데. 돈도 많으신 양반께서 괘씸한 햇병아리 변호사 앞길 막겠다고 손이란 손은 죄다 쓰신 모양이다. 3개월 내내 정식 의뢰나 문의 전화는커녕 개미 한 마리조차 사무실에 코빼기도 안 보였다. 말 그대로 방귀 낀 놈이 성만 내는 게 아니라 방귀 맞은 사람한테 화풀이까지 하는 꼴이었다.
이런 날들이 반복되다 보니 아무리 무던하고 끈기 있는 의주라 할지라도 멘탈이 흔들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막막한 무력감에 그냥 다 접고 본가 내려가서 요양이나 좀 할까 싶어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던 적도 몇 번 있었지만,
- 어 아들~ 바쁜데 어떻게 전화를 다 하구~
"엄마..."
- 아들 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걱정하실까 봐 로펌 그만뒀을 때도 온갖 그럴듯한 이유 붙여가며 겨우 속였는데, 개업한 아들래미 돈 쓸어담으면서 잘 살고 있는 줄로만 알고 계실 부모님께 "나 높으신 분한테 찍혔어 다 망했어 그냥 집 돌아갈래" 하소연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아뇨. 그냥 생각 나서 전화 드렸어요."
결국 그냥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 드렸다'는 효자 아들이나 될 뿐이었다.
"어디서 구세주라도 나타나면 좋겠네..."
동태 눈으로 바닥에 떨어진 광고지 찢어진 잔해들을 줍던 의주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소심하게 발을 꿍 구른다. 귀신은 뭐하나. 그 나쁜 놈 안 데려가고. 덕분에 바닥에 남아있던 종이 쪼가리들이 바람에 들썩였다. 아앗. 발 구른 건 본인이면서 의주는 자기가 더 놀라 흠칫한다. 역시 변의주는 동태 눈깔은 할지언정 화 난다고 욕하고 성질부릴 위인은 못 된다. 귀신은 속여도 천성은 못 속인다고 의주가 저쪽까지 바람에 날아간 종이 쪼가리들을 주우려고 막 발을 떼려는데.
"여기 떼인 돈 받아주는 곳 맞아요?"
바로 그 순간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의주는 제 귀를 의심한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분명 '변의주 개인 법률 사무소' 개업 이래 첫 의뢰가 들어오는 기념적인 순간이었다. 진짜 구세주가 나타났다. 언제 그랬냐는 듯 의주의 죽은 안광에 다시금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네, 네! 맞아요! 떼인 돈..."
그리하여 최근 3개월 중 가장 밝은 톤으로 저의 구세주를 맞이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변의주 변호사.
"받아... 드립니다...?"
색 바랜 광고지를 손에 든 그의 구세주는 색감 잘 빠진 은발에 쨍한 핫핑크색 셔츠와 가죽 레자바지를 입었으며 귀에는 주렁주렁 철물점을 차린...
"救救我的錢. 저 돈 떼였어요."
외국인이었다.
구세주인 줄 알았는데 도깨비였습니다
"그러니까 여기가 아니라고요?"
으, 써. 접대용으로 내놓은 커피(믹스커피 아니고 블랙커피였다)를 한 모금 후루룩 마시자마자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린 남자가 되물었다. 쩍 벌리고 앉은 다리를 달달 떠는 진동에 맞춰 남자의 볼체인 귀걸이가 달랑달랑 흔들린다.
"네. 여기는 채권추심 전문 법률 사무소예요."
"저는 최권추가 아니라 니콜라스인데요."
"최권추가 아니라 채권추심... 네, 니콜라스 씨."
"근데 분명 떼인 돈 받아드린다고 돼있었는데?"
"그러니까 저희가 떼인 돈을 받아드리기는 하는데요..."
생각하시는 그런 나쁜 데가 아니라 완전 합법적인 곳이거든요, 여기. 변의주는 남자에게 상황을 설명하며 처음으로 자신의 카피라이트 문구 선정 센스에 대해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한다. 직관적인 슬로건이 대세라고 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너무 직관적이었나 싶었다. 설마 저걸 보고 여기를 일수 업체라고 생각해서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지.
"알겠어요. 어쨌든, 일수? 그거 아니라는 거죠?"
"일수꾼이요."
"네. 그거요. 일수꾼."
"말씀드렸지만 저는 일수꾼이 아니라 채권추심 전문 변호사예요."
"네. 최권추 변호사님."
"최권추가 아니라 변의주입니다."
"변의주 변호사님."
의주가 일수꾼이라는 단어를 다섯 번 정도 또박또박 발음하며 채권추심 변호사와 일수꾼의 차이에 대해 장장 10분을 설명하고 나서야 드디어 니콜라스도 제대로 이해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근데 이름 너무 어렵다."
"그냥 주주 변호사님 하면 안 돼요?"
"...마음대로 하세요."
자기 마음대로 변의주 변호사를 주주 변호사로 바꿔 부르더니 마음에 드는지 입을 가리고 히히 웃는 모습이 영... 의주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지 의심스럽긴 했지만.
변의주보다 최권추가 훨씬 어렵지 않나...
아무리 봐도 돈을 떼먹었으면 떼먹었지 누구한테 떼먹힐 인상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푼수 같은 면이 있는 걸로 봐서는 돈 떼먹혔다는 게 어느 정도 납득이 되는 것도 같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결국 블랙커피 한 잔도 다 비우지 못한 니콜라스를 1층까지 내려가서 배웅했다. 제가 말씀드린 대로만 찾아가시면 돼요. 쭉 걷다가 갈림길 나오면 왼쪽 말고 오른쪽. 꼭 기억해요. 왼쪽 아니고 오른쪽이에요. 중고 거래 사기를 당한 것 같길래 친절하게 경찰서 가는 길까지 설명해줬으니 이 정도면 나름 투철한 서비스 정신도 발휘했고.
그러니까 의주는 그 투철한 서비스 정신을 본업에 좀 발휘하고 싶었는데 말이다.
그날 니콜라스가 떠난 뒤 매일같이 먼지 한 톨 안 나오는 깨끗한 사무실 청소도 다시 하고, 개업할 때 받은 (사람 수보다 많은) 화분에 물도 주고, 두꺼운 뿔테 안경 쓰고 열심히 키보드 두드리는 척 잘나가는 커리어맨 흉내도 내보고, '니콜라스 씨는 경찰서 잘 찾아가셨으려나' 생각도 해봤지만 여전히 사무실은 한가하다 못해 공기마저 지루했다. 키자니아 변호사 체험관도 여기보다는 더 바쁠 것 같았다.
하지만 부정해봤자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고. 오늘도 하루종일 어영부영 시간만 보낸 의주는 그렇게 스스로 합리화면서 결국 퇴근할 준비를 시작한다. 그러나 애써 태연하게 퇴근 가방을 챙겨도 사람 마음이란 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고. 괜히 미련이 남아 애꿎은 사무실 전화기나 한번 스윽 만지면서 미적거리는데.
♪
그 순간 놀랍게도 개업 후 처음으로 의주의 사무실 전화기가 울린다. 네, 채권추심 전문 변의주 개인 법률 사무소입니다. 혹시나 끊길까 봐 부리나케 전화를 받은 의주가 옆에 놓인 메모지와 볼펜도 부지런히 챙겨들었다. 이런 순간을 위해 미리 구비해둔 녀석들이다. 의도치 않게 3개월 동안 방치되느라 손때 대신 먼지만 잔뜩 묻은 상태였지만.
아무튼 눈 깜짝할 사이에 만반의 준비를 마친 의주가 (영상통화가 아니라 음성통화인데도) 방긋 웃으며 상냥하게 전화 문의 응대의 메뉴얼을 읊는다.
"어떤 문제로 전화 주셨을까요?"
여기는 채권추심 전문 사무소니까 당연히 채권추심 관련 문제로 전화를 했겠지. 이건 그냥 형식적인 인삿말이다. 상대방이 말해주는 채권 내용에 따라 의주의 다음 매뉴얼 내용도 달라지기 때문에 이것보다는 이 형식적인 인삿말에 상대에게서 어떤 대답이 돌아오는지가 더 중요했다.
근데...
- 어, 주주 씨!
왠지 익숙한 목소리와,
- 주주 씨 덕분에 저 그때 일 잘 해결됐어요!
주주 변호사에서 그새 또 제멋대로 바뀐 호칭과,
- 일주일 만에 떼인 돈 받게 도와주겠대요.
묘하게 찝찝한 이 대답은 대체 뭐지?
기대했던 의뢰 전화가 아닌 건 차치하더라도 차용 증거 모으고 필요한 서류 준비하고 이런저런 과정이 복잡해서 절대 이렇게 빨리 채권이 추심될 수가 없는데. 불길한 기운이 엄습한다. 니콜라스 씨. 네, 주주 씨!
"누가 그래요, 니콜라스 씨 일주일 만에 떼인 돈 받게 해준다고?"
- 음, 누군지 모르는데. 근데 여자 두 명이었는데 둘 다 엄청 친절했어요. 주주 씨만큼은 아닌데.
느닷없이 나타나더니 마침 니콜라스에게 퍼즐 조각 딱 맞춰지듯 필요한 도움을 제공하는, 지나치게 친절한 모르는 여자 두 명. 이거 너무 수상한 냄새가 폴폴 나는데.
"혹시 그 사람들이 막, 자기가 무슨무슨 대학 심리학과 학생들인데 과제 때문에 심리검사 해주겠다면서 어디 근처 카페 같은 데 가서 얘기 나누자고 했어요?"
- 오! 맞아요. 어떻게 알았어요?
혹시나가 역시나다.
이 사람, 그날 오른쪽 말고 왼쪽 갈림길로 갔네.
"....니콜라스 씨 지금 어디예요?"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무리 없이 니콜라스를 찾을 수 있었다. 곧 테이블을 뚫기라도 할 듯 처박고 있는 저 은색 뒷통수를 못 알아보는 게 더 이상하지.
"니콜라스 씨."
의주가 조심스레 어깨를 톡톡 치자 니콜라스가 부스스 고개를 든다. 얼마나 이러고 있었으면 앞머리가 잔뜩 헝클어져 눈을 다 가렸다. 주주 씨... 목소리에 힘 없는 거 보니까 아까 전화 끊고 나서부터 계속 이 상태였겠구만.
예상대로 의주와 헤어진 후 오른쪽이 아닌 왼쪽 갈림길로 들어간 니콜라스는 그대로 도믿걸들에게 붙잡혀 카페까지 따라갔다고 했다. (아마도 개인정보 파악이 목적이었을) 심리 검사부터 (먹잇감을 어떻게 살살 녹여먹을지 밑밥 까는) 고민 상담까지 이 순진한 외국 남자는 그걸 다 술술 답해줬댄다. 이럴까 봐 왼쪽 말고 오른쪽으로 가라고 그렇게 강조했던 건데.
오른쪽 골목은 경찰서가 있어서 안전하지만 왼쪽 골목은 세 걸음에 한 번 꼴로 사이비 지뢰가 포진되어 있어서 특히 니콜라스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외국인이라면 밟았다가 터지기 딱 좋은 구역이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이 순진한 외국인 남자는 그 지뢰밭에 '나 죽여주소' 하면서 제 발로 뚜벅뚜벅 걸어들어간 셈이었다.
"그럼 그 사람들 대학생이라는 거, 거짓말이에요?"
"네."
"이쪽으로 유능한 전문가 한 명 알고 있다고, 일주일 만에 떼인 돈 받게 도와주겠다고 했는데."
"그것도 거짓말이겠죠."
"그럼 이건요? 딸기라떼 사이즈업. 8900원이나 하는데 그때 그 사람들이 사줬어요."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게 사이비 수법이에요."
"......"
테이블 위에 놓인 사이즈업 딸기라떼를 울적하게 바라보는 니콜라스의 팔자주름이 더 깊어진 것 같은 건 기분탓이겠지.
배신감에 말을 잇지 못하는 니콜라스를 보며 의주는 왜 어른들이 대한민국의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모르는 사람이 먹을 걸 준다고 해도 따라가면 안 돼요'라고 조기부터 교육을 시키는지 새삼 다시 한번 그 선견지명에 감탄한다. 물론 니콜라스는 한국인도 아니고 자라나는 새싹은 더더욱 아니며 그저 한국의 길거리 도믿문화에 대해 지식이 전무한 선량한 외국인 피해자일 뿐이지만.
교묘하게 사람 심리 파고들면서 타깃을 공략하는 건 의주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이비 수법이었기에, 세상이 무너진 듯 우울해하는 니콜라스에게 '그 사람들이 소개해 준다고 했던 유능한 전문가도 사실은 개구라뻥이고 다 같은 사이비 한통속이었을 거'라는 슬픈 사실은 구태여 알려주지 않기로 한다.
"주주 씨, 저 이제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의주에게 사건의 진실을 듣고 한참을 벙찐 채로 가만히 있더니. 누가 봐도 안 괜찮은 표정으로 니콜라스가 꾸벅 목례했다. 이 사람 진짜 괜찮은 거 맞나... 의심스럽지만 일단 본인이 괜찮다니 의주도 그러려니 한다.
"꼭 경찰서 가서 신고하세요. 혹시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하시구요."
니콜라스와는 이쯤에서 건투를 빌어주며 아름다운 작별을 할 생각이었다. 사기꾼 꼭 잡으시면 좋겠어요, 니콜라스 씨. 감사합니다. 주주 씨는 정말 친절하고 착해요. 카페에서 나온 뒤에는 서로 악수하며 훈훈한 멘트도 주고받았고.
영원히 악수할 생각인지 니콜라스가 도무지 손에 힘을 안 빼는 바람에 벗어나는 데 살짝 애먹긴 했지만...
띠리링, 때마침 울리는 휴대폰 전화벨 소리 덕분에 겨우 손을 빼낼 수 있었다. 니콜라스 씨 잠시만요. 저 전화 좀...
"사무실을 빼라고요?"
의주가 전화를 받자마자 건물 주인이 대뜸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해왔다.
- 어휴~ 건물 팔았는데 새 주인이 세입자들 다 내보내고 여기서 자기 장사할 생각인가 보더라구. 암튼 변호사 양반한테는 미안하게 됐어~ 근데 어차피 변호사 양반도 여기 있으면서 장사 잘 안 됐잖어? 이참에 다른 데 가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다시 시작해 봐~
이건 뭐,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병 주고 병 주는 건가. 그래, 그래도 여기까진 이해할 수 있었다. 좀 짜증나긴 해도 이런 경우가 더러 있긴 했으니까.
근데 문제는 그 새 건물주라는 사람이,
- 아 맞다. 새 건물주가 무슨 국회의원 조카더라고. 왜, 요즘 티비에 많이 나오는 국회의원 있잖아. 그 집안이 다 돈이 많나 봐? 조카가 웃돈을 엄청 주고 이 건물 사갔다니까. 나야 완전 땡잡았지. 오홍홍.
......
어쩐지 이렇게 갑자기 방 빼라는 게 말이 안 된다 했더니. 우리 대단하신 국회의원 조카 되시는 분께서는 의주의 의뢰인을 빼돌려 장사 안 되게 막는 걸로는 성에 안 차시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이번엔 아예 작정했는지 일주일 뒤에 바로 건물 내부 공사에 들어갈 예정이라면서, 기존 세입자들더러 그 전에 방을 빼라고 했댄다.
아니, 아무리 조물주 위에 건물주 있다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요... 지가 돈 많으면 다야?
그래... 돈 많으면 다지. 여긴 대한민국이니까 새삼 놀랄 것도 없다. 의주가 깊게 침음한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입 떡 벌리며 항의해봤자 의주가 바꿀 수 있는 건 없었다.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알겠습니다, 할 수밖에.
"왜요 주주 씨. 무슨 일?"
심각하게 전화를 끊은 의주에게로 더 심각한 표정의 니콜라스가 다가왔다. 안 좋은 일이에요? 주주 씨 표정 너무 안 좋은데.
"아 아뇨. 그냥 좀..."
"그냥 좀?"
슬쩍 말끝 흐리면서 넘어갈 생각이었는데 의주의 문장이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니콜라스의 집요한 시선이 느껴진다.
"갑자기 사무실을 빼게 돼서요."
"그럼 주주 씨 사무실 이사해요?"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은 이사하고 싶어도 못한다. 과연 조카튼 국회의원 조카가 의주가 새 사무실로 옮기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까? 절대 아니지. 아마 뒤끝이 없어질 때까지 의주가 가는 곳, 하는 것마다 사사건건 방해할 거다. 단순히 이사해서 해결될 게 아니라 의주를 이사하게 만든 주체가 사라져야 끝날 문제였다.
하지만 굳이 니콜라스한테 이런 것까지 설명할 필요는 없으니 적당히 대답하고 넘기려 했으나,
"......"
"......"
니콜라스의 시선은 좀처럼 의주에게서 떨어질 생각이 없어보인다. 아무래도 대충 둘러대긴 글렀네.
결국 최근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짧게 요약해서 말해줬다. 10억짜리 채권추심을 진행한 이야기. 알고 보니 채무자가 국회의원 조카였다는 이야기. 그 덕에 높으신 분께 찍혀버려서 로펌에서 쫓겨나다시피 퇴사했다는 이야기. 그 높으신 분의 뒤끝이 의주가 개업한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이라는 이야기.
의주의 이야기를 듣는 니콜라스의 표정이 시시각각 바뀌더니 오늘 아침 건물주와의 전화 내용까지 듣고 나자 험악하게 구겨진다. 완전 나쁜 사람이잖아요 그거.
"제가 재수없게 미친 놈한테 잘못 걸린 거죠 뭐."
"그런 나쁜 사람은 벌을 받아야 돼요."
니콜라스가 의주보다도 더 씩씩거리며 분노한다. 귀에 달린 볼체인 귀걸이가 달랑거린다.
나쁜 사람은 벌을 받아야 된다. 의주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일단 의주는 저를 괴롭히는 기득권에게 벌을 줄 힘도, 돈도, 권력도 없을뿐더러 이젠 그냥 체념에 가까운 상태였다. 다만 아무리 뒤끝이 길다 해도 평생을 따라다니면서 괴롭힐 정도는 아닐 테니 일단은 꽁지 내린 척 타이밍 보다가 나중에 살금살금 복귀를 하든 말든 할 생각이었는데.
니콜라스는 그게 아닌 듯했다.
"주주 씨가 못하면 제가 할래요."
"뭘요?"
"벌 주는 거요."
니콜라스의 눈동자에 순간 이채가 반짝였다.
귀에 달랑거리는 볼체인 귀걸이를 떼자 순식간에 가시 돋친 몽둥이로 바뀌었다. 니콜라스가 꼭 도깨비 방망이처럼 생긴 그것을 한번 가볍게 휘두르니 푸른 빛이 둘을 감싸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보지 마! 찍지도 말라고! 남자의 안타까운 절규가 광화문 한복판에 울려퍼진다. 위아래 옷도 없이 팬티 하나 딸랑 걸친 채로 무릎 꿇고 앉은 남자의 목에는 [두 번 다시 변의주 변호사를 괴롭히지 않겠습니다 - 국회의원 김철수의 조카 김민수] 라고 적힌 판넬이 걸려있었다. 사람들이 어머 어머 저 사람 좀 봐, 수군대며 지나갈 때마다 남자가 신경질적으로 몸을 움직였지만 아무런 구속이 없음에도 남자의 몸은 마치 보이지 않는 끈으로 고정된 듯 끄떡없었다.
"야 너, 뭐하는 새끼야? 엉?"
"나한테 뭔 짓을 한 거야!"
"너 내가 누군지 몰라?"
"우리 삼촌이 서울시 국회의원이야 임마!"
"빨랑 이거 안 풀어?"
니콜라스와 눈이 마주치자 남자가 악다구니를 쓰며 발악한다. 거 되게 시끄럽네. 니콜라스의 손목 스냅 한 번에 이번엔 남자의 입에 보이지 않는 지퍼가 채워졌다. 으! 느 으그 은 프르! 웅웅거리는 외침이 남자의 입 안에서나 겨우 맴돌다가 이내 목구멍으로 사라졌다.
"이제야 좀 조용하네. 그쵸 주주 씨?"
"니, 니콜라스 씨 도깨비예요..?"
한편 의주는 이 말도 안 되는 광경에 도무지 제 눈을 믿을 수 없는 상태였다. 이게... 이게 지금 내가 똑바로 보고 있는 게 맞나? 그러나 아무리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눈앞에서는 같은 장면만이 보였다.
도깨비니 뭐니 이런 건 옛날 전래동화에서나 나오는 얘기인 줄 알았는데 21세기에도 있었다니. 그것도 이렇게 가까이에...
말투가 좀 어색하고 한국 물정을 잘 모르는 게 당연히 외국인이라서 그런 건 줄 알았지 도깨비라서 그랬던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아니, 도깨비는 한국에만 있는 거 아니었냐고.
"요즘 도깨비 글로벌이에요. 한국이 제일 유명하긴 하지만 우리 대만에도 있고 일본이랑 중국에도 있어요. 그리고 저는 한국으로 유학 온 외국깨비. 도깨비 세상도 인간 세상이랑 똑같아요."
니콜라스가 어깨를 한번 으쓱하며 설명한다.
하지만 내가 어릴 때 봤던 동화 속 도깨비는 이렇게 안 잘생겼는데? 우락부락 험상궂고 무섭게 생겼지?
의주의 생각은 대체 어떻게 알아채는 건지 니콜라스가 친절하게 설명을 또 덧붙였다.
"인간 세상에서 인간들 흉내내면서 사람처럼 사는 도깨비들도 많아요. 저처럼."
얼빠진 의주의 궁금증을 해소해 준 니콜라스가 씨익 웃는다. 근데 저 잘생겼어요? 그 모습이 영락없는 인간의 모습이라 의주는 니콜라스와 눈을 마주치면서도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아 동그란 두 눈만 끔뻑였다.
따악, 니콜라스가 핑거 스냅을 치자 커다란 도깨비 방망이에서 나온 푸른 불빛이 니콜라스와 의주의 몸과 그 주변을 가득 채운다. 그럼 주주 씨, 우리 이제 다시 사무실로 돌아갈까요?
국회의원 김철수의 조카 김민수의 광화문 한복판 석고대죄 영상이 sns에서 엄청난 이슈가 되면서 덩달아 의주의 사무소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김민수의 판넬에 적힌 '변의주 변호사' 여섯 글자가 상당한 홍보 효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의주는 다시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왔다. 다만 예전과는 달리 아주 많은 변화가 생기긴 했다. [변의주 개인 법률 사무소]는 이름만 법률 사무소인 텅 빈 절간에서 사장과 비서와 직원이 각각 존재하는 어엿한 법률 사무소가 되었고, 적막한 사무실에서 오지 않는 손님들을 기다리며 한숨 푹푹 내쉬던 의주는 이제 그곳의 당당한 리더가 되었으며.
또 하나 달라진 게 있다면 그런 의주의 옆에
"주주, 요즘은 누가 주주 안 괴롭혀?"
딸기맛 웨하스를 아삭아삭 씹어먹는,
"니콜라스 제발. 부스러기 다 떨어져."
니콜라스라는 껌딱지, 아니, 도깨비가 생겼다는 점이랄까.